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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이중에10대여드름피부에는 어떤게 좋나요?
비공개 조회수 4,163 작성일2013.07.21
1.해피바스ㅇ네츄럴 휩클렌징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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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아무래도이클렌징폼은여드름전용이니까좋겠죠?????

2013.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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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신
피부과 29위, 여드름개선 7위, 피부관리, 화장 2위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안녕하세요 주진료 여드름 치료 한의원입니다.

 

여드름피부에 맞는 세안제에 대해 문의를 주셨네요.

많은 분들게서 여드름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찾는것이 클렌징폼, 천연비누등의 세안제입니다.

 

세안은 피부의 관리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 중에 하나 입니다. 따라서 좋은 세안은 여드름을 개선하는데 도움이됩니다. 특히 우리의 피부는 약 28일을 주기로 주기적인 피부의 각질탈락을 이루는데,이 각질은 피부의 모공을 막아 여드름이 발생 될 수 있기에 피부의 미세각질은 반드시 관리를 해야하며 이중 가장 기초적인 것이 바로 세안입니다.

 

그러나 흔히들 오해하시는 것중 하나가 천연/한방/식물성 세안제 등의 단어가 본인의 여드름을 개선해 줄 것이라 생각을 하여 폼클렌징이나 세안도구의 추천을 해달라는 분들이 많이 있죠.  그러나 사람의 피부는 약산성을 띄고 있으며, 각질이 원활히 제거되기 위해서는 세정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따라서 시중의 일반적 비누로도 충분히 여드름의 개선이 가능 합니다.

 

천연, 한방, 식물성, 여드름 전용 등의 단어에 속지 마시길 바랍니다. 만일 세안제가 여드름개선에 의학적 효능이 있다면 그것은 세안제가 아닌 의학품이며 의학품은 의사의 처방을 받아야만 구매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여드름에 좋은 세안제를 찾기 보다는 세안을 꼼꼼히 올바르게 하는 습관을 익히시는 것이 여드름개선에 도움이 되는 길 입니다. 

2013.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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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하느님은 거짓이 아닙니다. 하느님의존재는 충분히 믿을 수 있습니다.

시간을 내어서 천천히 읽어보세요.

 

한경직 목사의 하느님을 믿는 이유..

1. 하나님을 믿는 이유

유물론자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항상 하나님을 인간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고 물상화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서 확인시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가지 예로서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다.

어느 젊은이의 경우 자기 부친이 어렸을 때에 별세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어느 날 느닷없이 자기 부친이 생존해 계신다는 기별이 왔습니다. 반신반의하면서도 그 증거로서 부친의 편지와 소문을 제시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자기 부친 이 생존한 증거로 충분한 것일까요? 실제로 생존하고 계신다해도 의심하는 자식에게는 믿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의 경우도 그 개념이 문제라고 봅니다. 의심치 않고 믿는 자에게는 세상의 무엇을 보아도 신의 생존하심을 믿는 증거로서 족합니다 그러나 의심하거나 반대하는 마음가짐으로서는 반론의 기세를 올리기에 알맞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분명히 말해두는 것은 신의 존재를 확실히 증거하고 못함에 따라 신의 존재가 좌우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 증명이 전혀 실제적인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자고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시도한 사람도 많았고 그러한 논증도 많았습니다.

그러한 철학적 노력을 변증학 또는 험증학이라고 해서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저술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변증론을 간략하게 4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인과주의입니다.

이는 원인과 결과를 말합니다 즉 결과가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원인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첫 원인 곧 제 1원인으로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주장입니다. 모든 결과의 제 1원인으로서의 하나님을 설정한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모든 결과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말합니다

생명은 그 자체가 스스로를 증명하지 못합니다. 결코 전혀 백지의 상태에서 하루아침에 갑자기 생겨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근원이 있어야만 생명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생명의 근원으로서 나아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라 할 수 있는 우주의 설계자로서의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 우주에는 분명 설계자의 능력과 지혜와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그냥 우연히 만들어진 것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오묘하고 놀라울 수 있겠는가? 하는 소박한 생각에서 출발하여 그 설계자로서의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노력이 인과주의입니다.

둘째는 만유의 목적으로서의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시도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계속 이어져 나가는 데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도덕적 논증이 있는데 이는 도덕의 근본으로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이 땅에 도덕이 존재할 수 없고 설명되어질 수 없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넷째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주 우주적이고 보편적이라는 견해입니다.

사실 사람이란 누구나 신을 믿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에까지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잡신이라 할지라도 신에 대한 동경은 어느 역사,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세계 전 민족에게 보이는 그 어떤 형태의 종교로부터 그 배후에서 신의 존재를 추론해보려는 소위 역사적 종교적 논증이 있습니다.

여기서 보다 이해하기 쉽게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려고 하신 한경직 목사님의 전도책자 “기독교란 무엇인가?”의 글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우리 인간들이 짐승과 달리 특별히 소유한 3가지 보배가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이성이요 둘째 양심이요 셋째는 우리 속의 불멸의 영혼입니다. 이 세 가지 보배가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합니다

첫째로 우리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사색하고 연구합니다. 그래서 발명도 하고 발견도 합니다. 창조적 활동을 합니다. 그래서 과학이 발달하고 문화가 창조됩니다.

이런 이성이 있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대 우주를 바라봅시다

우리는 인과의 법칙을 믿습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이 법칙은 꼭 옳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인과의 원칙에서 우리가 살고있는 대우주를 볼 때 이 우주는 어떤 큰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 큰 우주가 생겼은 즉 반드시 제일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이 제일 원인을 하나님이라고 결론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지으신 까닭으로 이 우주가 생겼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는 "이 우주를 볼 때 큰 운동하는 움직임을 보고 특별히 놀랐다. 아무래도 이 움직임을 처음 시작한 분이 있겠다. 그분은 하나님일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인과의 법칙으로 보아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분명히 알 수밖에 없습니다.

이 진리를 부인하고자 하면 우주는 본래부터 영원까지 그냥 그대로 있다고 하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을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우주 자체가 영원하다고 하는 주장은 오늘 과학의 시대에 와서는 그렇게 강하게 주장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과학적인 연구대로 살펴보면 이 우주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 우주는 일정한 시간에 시작되었다는 것을 거의 단언합니다.

요즘 과학자나 천문학자들은 이 지구나 태양계나 우주전체가 몇 해 전부터 시작이 되었겠나 하는 것을 측정해 보는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그것은 우라늄원소와 그것이 방사하는 것을 측정해 보고 그 연대를 어느 정도까지 확실히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우리가 사는 이 지구의 연령은 대략 45억만년쯤 되었다고 합니다. 또 우주전체의 연령은 약 100억년으로 추산합니다. 물론 상당히 오래 전 일입니다. 그러니 일정한 시간에 시작한 때가 있다고 하는 것을 다 인정합니다.

이 지구에는 여러 가지 생물이 많지마는 생물이 이 지구에 영원히 있었습니까? 지질학을 연구해보면 일정한 시기에 일정한 생물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인간이 지구에 영원부터 살았습니까? 지질학을 연구 해보면 일정한 시기, 그것도 아주 말기에 인간이 나타납니다. 우리 인간이 이 지구에 영원부터 있은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인과의 견지에서 볼 때에 이 우주는 반드시 지은이가 있을 것이 분명하고 그 우주를 지은이가 계시다고 할 것이면 무한 절대의 하나님인 것을 우리가 믿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이 우주를 다른 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우주의 현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되는대로 복잡한 것 같지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조직이 있고 질서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을 하늘을 쳐다보면 별이 되는대로 널려있는 것 같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망원경을 통해서 자세히 보면 꼭 조직이 있습니다.

태양계에도 조직이 있습니다. 태양을 중심 하여 돌아가는 유성들이 있습니다. 일정한 궤도와 속도가 있습니다.

북극성을 중심 하여 돌아가는 유성이 있습니다. 일정한 궤도와 속도가 있습니다

이런 항성계가 여럿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여서, 갤랙시(星群)가 되고 이런 것들이 많이 모여서 대 우주가 형성됩니다. 아무리 크지만 조직과 질서가 있습니다.

큰 것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물질을 분석하는 과학자들의 말을 들어볼지라도 그렇습니다. 물질을 분자로 분석합니다. 분자를 원자로 분석합니다. 원자 속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 양자도 있고 그 양자를 중심 하여 빙빙 도는 전자가 있는 것이 마치 작은 우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큰 데부터 작은데 까지 조직과 질서가 있습니다

보이는 우주의 모든 현상을 보면 모든 것에 고안이 있습니다

“꽃을 봅시다” 그 꽃 한 송이를 자세히 볼지라도 거기에는 아름다운 색깔과 무늬와 향기가 있습니다. 형형 색색 가지각색의 꽃마다 고안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와 같은 꽃을 만들려고 하면 얼마나 많은 생각과 수고를 들여야 그 같이 만들 수 있겠습니까?

나비 한마디를 살펴볼지라도 어떻게 아름답게 생겼는지! 거기에도 고안이 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동물과 식물이 서로 조화되어 살겠 끔 된 것을 보면 기막힐 정도로 놀랍습니다.

흔히 꽃이 있으면 벌과 나비가 왔다 갔다 합니다. 벌과 나비가 왜 왕래합니까? 물론 꽃 속의 꿀을 빨기 위해서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나 꽃의 꿀을 거져 가져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꽃가루가 서로 왔다 갔다 해서는 결국 씨를 맺게 만듭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동물이 쓸데없다고 호흡으로 내버린 탄산가스는 나무와 풀에 유익합니다. 나무와 풀은 동화작용으로 탄소를 섭취하고 내 버리는 산소는 동물에게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누가 이렇게 동물과 식물이 협동하여 살게 만들었습니까?

이 우주에는 꼭 고안이 있습니다. 일정한 목적에 의한 고안이 있습니다.

비오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묘한 것이 있습니다. 태평양에 가면 물이 많습니다. 햇빛에 쪼여서 태평양 바다 물이 수증기가 되어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공중에서 찬바람을 만나서는 다시 물이 되어 비가 되어서 떨어집니다.

빗물이 떨어져서 몇 가지 작용을 하는지 아십니까? 여러 가지 작용을 합니다. 우선 공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이 물방울이 내려오면서 공기 속의 먼지를 모두 잡아 가지고 내려옵니다. 그러기에 비온 다음의 공기가 신선합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합니까?

비가 오면 이 땅을 아주 깨끗이 씻어줍니다. 비가 오래 안 오면 이 땅이 아주 더러워집니다. 세상의 먼지를 누가 다 씻습니까?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서 깨끗이 씻어줍니다.

그것 뿐 입니까? 빗방울이 사방에 떨어져서 풀이 자라고 곡식이 자라고, 나무에 열매가 맺게 합니다. 땅을 깨끗이 씻은 빗방울은 모여 시내가 되고, 강물이 되어서 더러운 것을 다 씻어다가 마지막에는 바다로 들어갑니다.

바다 물이 짭니다. 왜 바닷물이 짭니까? 짜야 소독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비 하나를 가지고도 이렇게 소제하고 더러운 것을 다 흘러버리게 하고 풀과 나무가 자라게 하기 위하여 간단없이 순환하게 합니다.

전에 서울 남산에 올라가 보니까 남산 중턱에 꽃을 가지고 시계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글자를 모두 꽃을 심어 만들었습니다. 그 속에 기계를 묻었습니다. 큰바늘이 돌아갑니다.

멋있는 꽃시계입니다. 이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꽃시계를 보고 저절로 되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정신병자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고안이 있는 우주를 보면서 고안자 곧 창조자가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정신병자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면 이 우주에 대한 이론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나는 모르겠다는 불가지론 (不可知論)이요. 또 하나는 이것이 다 거져 우연히 되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 시편 19장 1절 말씀과 같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궁창이 그의 솜씨를 우리에게 나타냅니다. 과연 하나님은 계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습니다.

둘째, 우리 인간이 짐승과 다른 또 한가지는 인간의 가슴속에는 양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도덕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무엇을 해라 무엇은 하지 말라 .무엇은 꼭 해야한다. 무엇은 꼭 안 해야 한다. 이렇게 지시하는 지상명령인 무엇이 있습니다.

사람의 가슴속에는 어떤 사람을 물론하고 이 양심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무슨 일을 대할 때든지 선과 악을 분별해 줍니다.

물론, 어떤 때는 양심이 마비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마비는 안됩니다.

언제나 어느 한 구석에서, 선악을 분별하여 선하게 할 때는 마음이 기쁘고, 악한 길을 갈 때는 얼굴이 부끄러워지고 붉어집니다.

이 양심이란 것은 언제든지 마음속에서 잘할 때에는 칭찬과 격려를 해주고 잘못할 때는 가책과 책망을 해 줍니다.

현대인들 가운데는 이 양심을 후천적 원인으로서 혹은 사회적, 문화적 요인으로서 혹은. 환경, 교양, 같은 것으로 설명해 보려고 애쓴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 실패했습니다.

물론 다소 후천적인 요소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양심은 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유명한 스토익 철학자 에픽테큐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날 때에 선천적으로 음악이나 기하학의 지식을 가지고 나는 이는 없다. 그러나 누구나 도덕적 의식은 다 가지고 난다 "

그것은 사실입니다. 이 양심이 어디서 왔습니까? 이 도덕적 법칙이 어디서 왔습니까? 성경은 양심은 마음에 새긴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지적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만든 모든 만물에 자연법칙을 주셨듯이 또한 사람을 지으신 다음에 바로 살기 위하여 인간사회의 질서유지를 위하여 도덕적인 법칙 곧, 하나님의 율법을 그 속에 새겨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계에 자연법칙을 두셨습니다. 모든 물질은 이 자연법칙을 준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생활에 있어서도 도덕적 법칙을 주셨습니다. 인간은 이 도덕법칙을 준수해야 합니다.

그런데 물질과 자연법칙과의 관계는 그저 그대로 운행되는 것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사람은 인격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아 자유가 부여되었으므로 그 관계가 다릅니다

우리 인간은 선과 악을 택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이 자유를 바로 쓰기 위하여 양심이 부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양심의 방향을 따라 자유를 옳게 사용할 때만 평안과 행복을 누리게 줍니다

이렇게 양심은 누구에게나 새 겨져 있습니다.

이 골짜기를 파도 물이 나오고 저 골짜기를 파도 물이 나오면 자연히 그 속에는 물이 있다고 결론하는 것이 아마 정당한 이론일 것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속을 깊이 살펴 볼 지라도 양심이 있고, 저 사람의 마음속을 깊이 살펴볼지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양심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과 우주의 배후에는 도덕적인 대 주재자가 있고 대 양심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양심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우리가 이 음성을 들을 때에 자연히 하나님이 계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미 말했지마는 오늘날 세상 사람 가운데는 이 양심을 무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실 양심이 화인 맞은 것처럼 되어서 마비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양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요히 자리에 누울 때 흑은 아침 일찍이 깨어서 고요히 자기를 살펴볼 때는 누구나 이 양심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음성이 곧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을 스스로 살펴볼 때 다시 말하면 인간의 종교성, 인간의 도덕성을 살펴볼 때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확실히 믿게 됩니다.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칸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늘에는 별이 있고 내 속에는 도덕적 율법이 있다. 이 두 가지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갖게 한다".

우리 속에 양심이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말해 줍니다.

셋째는, 인간에게는 짐승과는 아주 다른 영혼이 있습니다.

불멸의 영혼이 있습니다.

TV에 써커스 극장이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거기 보면 짐승들도 재주가 많습니다. 재주를 아주 잘 부립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짐승들이 자기네끼리 신전을 지었다고 하는 말을 들어보았습니까?

물론 못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아무리 야만인이라고 해도 아무리 미개한 아프리카나 남방의 어떤 오지의 미개한 사회의 사람들이라도 그들은 자기의 집을 집고 또한 신전을 지었습니다.

신전을 세우고 기도를 드리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동서고금, 어느 시대. 어느 장소. 어느 종족일지라도 다 종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입니다. 왜 이런 일을 합니까? 인간이란 그 속에 영혼이 있는 까닭입니다. 이 사실은 인간이 종교적 동물이란 사실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사람들도 급할 때에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전에 믿지 않는 어떤 분과 만나서 이야기를 했는데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6 .25사변 때 전쟁터의 위급한 지경에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흔히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는 종교성이 있습니다. 종교적 본능이 있습니다. 우리가 배가고프면 먹고자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어린애에게 젖을 빠는 본능이 있기에 어머니의 젖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사람에게 사교적 본능이 있습니다. 같이 살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이 있습니다. 친구들이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점점 자라서 17, 8세쯤 되면 전에 없는 번민이 나타납니다. 그것 이 무엇입니까? 성적본능입니다. 그 성적본능도 만족시킬만한 이성이 있습니다. 남성과, 여성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본능이 있으면 그 본능을 만족시킬 만한 대상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에게 종교적 본능이 있는데 이 종교적 본능에 대해서만 이것을 만족시킬 대상이 없겠습니까?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누구입니까? 그 대상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먼저 계시니까 우리 인간에게 이런 본능이 생긴 것입니다.

왜 풀과 나무가 위를 향하여 자랍니까 ? 위에는 태양이 있는 까닭입니다.

왜 사람의 심령이 높은 것을 앙망하고 동경합니까? 하나님이 계시는 까닭입니다.

인간의 심령에 영적 기갈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까닭입니다.

짐승들은 먹을 것이나 잘 먹고 편안히 누울 자리만 있으면 만족을 느낍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찾고 집 없을 때에 집을 찾지만 아무리 의식주가 넉넉하더라도 거기에서 우리인간의 심령이 참 만족을 찾을 수 없습니다. 절대로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다른 모든 것에 다 만족을 느끼더라도 하나님을 찾기 전에는 참 만족이 없고, 마음 한구석엔 허무감이 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모릅니다. 왜 이렇게 부르짖습니까?

그것은 영혼이 있는 까닭입니다. 이 영혼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서 계심을 우리에게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이 한경직 목사님의 하나님에 관한 존재 증명입니다.

이 글을 통하여 기독교의 하나님 존재 증거론의 대략을 이해 하셨을 줄 압니다.

그러나 이 모든 논증은 철학적 노력에 불과하고 이제 말씀드린바와 같이 다 불충분합니다. 이러한 증명들은 하나님을 긍정하고 믿으려는 이들에게는 의미가 있지만 믿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만난 체험을 간증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고 설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믿음을 가지려는 이들에게는 의미가 있지만 전혀 근본적으로 영적인 세계를 부인하는 이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 말씀드린 어느 젊은이의 경우처럼 자기가 친히 스스로 간절한 마음으로 생존하시는 부친을 찾아서 만나게 돨 때에 그것으로 모든 의심이 해소되는 것처럼 신의 존재를 분명히 이해하려면 그를 믿고 생존하시는 신을 만나 대면하는 길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론의 정연성과 논리의 철저성에서 생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합리성과 실증에만 얽매이지 않고 그 이상의 것을 긍정하려는 데서 가능합니다

이러한 긍정과 수락은 인간의 결단이면서도 또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은사(恩賜)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실증적 영역(자연계나 현상계)에 예속될 수 없는 신을 과학적인 이성으로 그 실증성(實證性)을 증명해보려는 그 자체가 비이성적인 태도임을 생각해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의 경우 이성적 과학의 실증적 영역에서 신의 증명이 가능했다 손치더라도 우리의 불완전하고 좁은 머리에서 인식되어지고 갇혀진 신은 이미 우리가 찾는 참신,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 두뇌의 산물인 죽은 하나님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이것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 문제는 이론적 영역에서 훨씬 벗어난 실존의 문제입니다.

신의 인식

사실 오늘날 많은 불신자들이 기독교인을 향하여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믿느냐는 질문을 흔히 던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사람들은 한가지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 육안의 식별 대상에 속하지 않다는 사실을 그들이 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사람의 육안에 보여지는 부분은 극히. 적은 부분에 지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전자파 가운데 사람의 육안에 빛깔로서 보여지는 광선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광파(光波)가 빨강 색보다 약간 길어지거나 보라색보다 약간 짧아지면 벌써 우리의 육안은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적외선이나 자외선은 사진 작용을 하면서도 우리의 육안에는 포착되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의 육안이란 사진기의 필름만도 못합니다.

우리의 육안은 너무 밝거나 너무 어두운데서 사물을 볼 수 없고 광선의 파동이 너무 긴 것이나 너무 짧은 것도 볼 수 없는 불완전한 것입니다.

이 세상 물질을 보는데도 이런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는 불안전한 육안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계시지 않는다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오늘날 과학이 발달된 시대에 있어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실험관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 현미경으로 조사해 보고 또는 수학공식에 의한 것이 아니면, 아무 것도 참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은 불확실한 것 불완전한 것으로 보고 신앙은 과학과 서로 상반되는 것. 서로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신앙보다 안다고 하는 지식 면에만 서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가 아는 것은 매우 적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안다는 것은 때로는 옅은 것이고 대단치 않은 것일 때가 많습니다. 그와 반대로 가장 중대한 일들과 우리가 그것 때문에 살고 있는 많은 것들을 실상 우리는 증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예들 든다면 태양이 내일 아침에 다시 떠오리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매일 아침이면 해가 떠올라 왔으니 우리는 다만 짐작으로 확실히 떠오른다고 상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긴 겨울이 지날 때 땅에 흰눈이 덮이고 자연의 모든 것이 죽은 것과 같은 상태에 놓여있음을 볼 때에 우리는 때가 이르면 봄이 오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대학입학 예비생은 자기 부모님이 계속 자기를 사랑하고 대학교에 진학시켜 주리라고 믿기 때문에 밤을 새워가며 공부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 하나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의 부모가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일이나 앞으로 계속해서 사랑하리라고 하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실험관이나 현미경 속에서 볼 수 없으며 수학적공식으로 잴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가장 중요한 일들을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문제는 지식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라 신앙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신앙으로 살고 있는 사실을 일상생활 속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밤에 잠자리에 들어갈 때 옷을 벗어 가지런히 옷장에 걸어놓고 자는 것은 내일 아침에도 전과같이 해가 떠오를 것이고 또 일어나서 옷을 입고 활동할 수 있다고 믿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노심초사해서 모은 돈을 은행에다가 예금을 하는 것은 그 은행의 직원은 다 정직하고 성실해서 내 돈을 잘 보관해 두었다가 내가 필요로 할 때에 즉시 내어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한 야간 열차를 타고 그 차 속에서 잠을 잘 수는 것도 그 열차의 기관수는 기차를 안전하게 운전할 능력을 가진 사람이며 진실히 자기 직무를 감당할 사람으로 목적지까지 나를 무사하게 실어다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용소(理容所)에 가서 면도를 하면서 잠을 잘 수 있는 것도 이 업소의 면도사는 심신이 건강하여 안전하게 면도해 줄 것이라고 그의 기술과 건강과 정신상태를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매사에 있어서 순진하고도 단순한 신앙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 하나를 다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못을 박아 고정시키는 것과 같이 변동이 없는 증명을 거친 사실만 가지고 살아간다고 하면 우리는 우리의 생을 한 발자국도 바로 옮겨 놓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라 하여 증명을 가지고 걸어가는 우리의 방향은 우리를 캄캄한 방으로 인도하여 거기서 어두운 일생을 마치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새삼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을 어떤 물건처럼 취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주체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자기의 혼이요 신체입니다. 나는 나요. 이것 저것 하는 물체가 아닙니다. 이런 주체를 물건처럼 다룰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묘한 심리학자라도 그 상대하는 인간이 자기를 공개하지 않으려고 마음먹으면 그 사람의 마음속을 알아낼 수 없으며 아무리 권세자라 할지라도 그 상대자가 마음을 주지 않으면 그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물질로 매매될 수 없는 것과 같이 인간은 과학적으로 다루어지는 것도 아니요 또 그렇게 다루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에 관한 한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인격적인 하나님이시요 비인격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지식의 대상으로 하여 많은 말을 할지라도 우리의 상상과 성찰 속에서 발견되는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 빈 껍데기의 하나님 죽은 하나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매일같이 궁리해 보았으나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하루는 바닷가를 거닐면서 역시 하나님이 참으로 계시냐, 안 계시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깊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가다가 본즉 웬 어린아이 하나가 바닷가에 웅덩이를 파놓고 두 손으로 바닷물을 움켜서 거기에 넣기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얘! 너는 왜 바닷물을 손으로 움켜서 거기에 넣는 거냐?" "예! 저는 이렇게 해서 저 바닷물을 전부 이 웅덩이 속에 넣어 보려고 합니다." "예이 바보 같으니 그게 될 일이냐" 그때에 그 아이 반문하기를 "그럼 아저씨는 그 작은 머리 속에 어떻게 무한하신 하나님을 넣어 보려고 하십니까?" 하더니 홀연히 사라지더랍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 깨어서 보니 꿈이었습니다. 그 꿈 이후 그는 하나님에 대한 부질없는 어리석은 생각를 버리고 겸손히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종교신앙에서 “안다” “믿는다” 하는 것은 절대자와의 관계에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과학에서 안다는 것은 제3차원의 절대의 세계를 안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그것을 알 수 있는 자연적인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과학이나 철학이 그 극한 선에 이를 때 종교는 그 선을 "신앙"으로 비약하는 것입니다.

백척간두에서 더 나갈 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끝에서 허공을 향하여 한 걸음 더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절대적인 모험입니다.

그러나 그 비약의 결과에서 딴 세계가 전개됩니다.

그 이상(以上)의 세계에 준비된 인간 이외의 손이 있어 그를 받아 준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됩니다.

"알고 믿는다"는 것보다도 "믿고 안다"는 말하자면 이성을 초극한 또 하나의 초 이성적인 이해가 생깁니다.

그것은 자연인으로서의 자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자연인의 극한 선에서 믿음으로 비약한 결과로 생기는 영의 세계에서의 영적 사실의 탄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과 신의 세계가 알려진다는 것은 이런 삶의 절대적인 신앙적 모험에서 새로 체험되는 경우에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은 " 무한 절대 주체"로서 물상화 할 수가 없으며 따라서 과학이나 철학의 지식 분야에서는 파악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왔다 합시다. 그 사람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때 그의 키, 얼굴, 의복, 직업, 가족, 생활, 경력 등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속마음은 그가 스스로 고백하기 전에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그가 자기 속마음을 고백할 것입니까?

그와 내가 인격적으로 서로 신뢰하고 서로 친구가 되고 서로 사랑을 통하는 때에만 그가 그의 속마음을 고백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것은 “인격적인 신뢰" "사랑의 교류"에서 생기는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神)에 대한 것도 그렇습니다.

신을 객관적으로 사고하고 모색한다 할지라도 결국 무신론이니, 유신론이니 하는 끊임없는 논쟁이 벌어졌지 신의 자기계시에 접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신은 알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신(그것이 비록 不可知라 할지라도)을 향하여 신앙으로 모험하면 그 믿는 마음의 관계가 신의 계시에의 접촉점을 만드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자연인의 이성을 초월한 "신의 지식”이 확인됩니다.

이렇게 알게된 신에 대해서 그는 감정적으로 신뢰합니다.

이런 신뢰는 사랑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신뢰하게 됨으로서 사람이 신의 뜻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2. 과학시대와 종교신앙

사람에게 있어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며 영적으로 깨우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오늘날 과학이 발달된 시대에 있어서 우리가 과학만 잘 배워서 문화를 발전시키고, 각 방면으로 진보하면 그만이지 무슨 종교가 필요한가? 종교신앙은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에 심신이 허약한 사람들이 누구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에서 실제하지 않는 신을 붙드는 미신행위이지.. 오늘날과 같이 깬 세상에서 그런 것은 필요없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상당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나라 국민의 최근 인구조사 통계에서 종교의 유무를 묻는 질문에 종교가 없다고(無宗敎) 답한 사람이 40%가 넘는 것이 이를 뒷받침 합니다

특별히 과학이 눈부시게 발달한 19세기 말기부터 20세기 초에 그런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기를,“그저 과학을 잘 연구해서 새로운 과학적 진리를 발견하고, 또 여러 가지 과학의 이치를 발견하여 생활에 활용하면 이 세계가 크게 진보하고 온 세계 인류는 행복스럽고 평화롭게 잘 살게 될 것이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꿈은 20세기 초엽을 지나자마자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20세기, 21세기의 양상을 보십시오!

전 세계 인류에 큰 참화를 가져온 세계 제1차대전과 2차대전, 그리고 계속 이어져 온 전쟁과 테러, 자연의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 홍수, 가뭄, 지진, 폭풍, 해일등 잦은 기상이변, 환경오염, 지구 온난화, 또한 이로 인한 AIDS, 조류 인프랜자 같은 새로운 질병의 발생은 인간 과학 발전의 또 다른 한계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과학의 발전이 가져온 세계의 결국은, 혼탁하고 피비린내 나는 세계,.전 인류를 더 큰 불안과 공포에 빠지게 한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과학이 물론 필요합니다. 불처럼 필요합니다.

불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밥을 짓는데도 쓰고, 난방을 하는 데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불을 쓰는 사람이 그 불을 바로 써야지 잘못 쓰면 오히려 더 큰 재난을 당하고 다른사람에게까지 큰 피해를 입히게 되는 것입니다.

과학 역시 그렇습니다. 과학을 올바르게 써야지 이것을 사람이 바로 쓰지 못하면 오히려 인류에게 더 큰 참화를 가져오는 비극적인 결과를 맞을 수 있습니다.

물론, 과학은 비행기를 만들어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 지구 어디든지 순식간에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지구 대기권 바깥으로 미사일을 쏘아 올려서 우주여행도 할 수 있게 되었고 인공위성을 띄워서 무선 통신의 광역화로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가까운 이웃집과 같이 교통하게 했습니다

또, 가공할 위력의 원자탄 수소탄 무기를 만들어 외부의 침략에도 대비해 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르게 사용할 사람은 과학이 만들지 못합니다.

원자력의 무한한 에너지를 잘 이용하고 관리하면 얼마나 우리 생활에 유익을 가져다 주겠습니까? 그러나 그것도 잘못 관리할 때에 러시아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건과 같이 순식간에 수만명의 사람이 죽고 상해를 입는 사고를 발생시킬 수 있으며

또한 각 나라들이 경쟁적으로 개발하여 산같이 쌓아놓은 핵무기가 순간적인 실수와 오판으로 발사되어지고 전쟁에 사용하게 될 때에 전 세계 인류가 일시에 멸망할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 호전적인 이란이나 북한 같은 나라의 핵무기 개발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큰 위협이 되고 불안요소가 되고 있습니까?

곰곰히 생각해보면 오늘날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의 삶이 상당히 편리하게 되었고 얻은 것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편 인간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놓은 기계산업 때문에 인간이 기계의 한 부속품의 역할로 전락해 버렸는가 하면 영리(營利)를 위한 하나의 수단물로 격하(格下)되어 가는 비인간화의 모습,....오토메이션과 컴퓨터장치로 인하여 자유와 창조성마저도 박탈당한 채 기계에 밀려나는 허수아비 인간,... 과학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는 중류 이상의 가정에서의 이혼과 자살의 증가,... 과학기술의 발달로 고도화된 사회와 국가에서의 범죄의 증가,... 가공할 무기로 팽팽히 맞선 국가간의 긴장과 대치,.... 환경의 오염으로 인한 생태계의 심각한 파괴, 등등‥‥ 과거에 생각지도 못한 이러한 여러가지 불안과 공포에 현대인은 발광할 정도로 고민에 쌓여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과학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한계점을 또한 발견하는 것입니다.

과학은 발전했지만 사람의 심성은 옛날 야만인 그대로여서 오히려 이런 심성이 사람을 더 위험케 하고 불안케 하는 요소인 것을 깨닫습니다.

전기의 힘은 위대하여 스위치만 넣으면 수백만의 인구가 사는 대도시를 일순간에 백주(白晝)와 같이 휘황 찬란한 불야성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그러나 온 인류가 갈망하는 평화와 안전의 길은 조금도 밝게 비추어 주지를 못하여 여전히 우리는 캄캄한 전쟁의 위험의 밤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의 발달된 기계의 놀라운 힘은 하루아침에 태산을 무너뜨려서 호수를 만드는 놀라운 힘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병든 의지를 고쳐서 새롭게 하는 힘은 없습니다.

현대는 과학 기술의 발달로 무진장한 자연의 자원을 발굴하여 엄청난 부를 이루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 거대한 부를 가지고도 우리의 잃어버린 꿈 많은 소년 시절을 되사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학시대 일수록 종교가 더욱 필요한 것이며 또한 종교가 없이는 인간 심령의 깊은 기갈에 만족을 줄 수 없고 또한 종교가 없이는 깊은 인생의 문제를 깨달을 수도 없다는 것을 내 심령 스스로가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과학시대임에도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욱 절실히,... 인간의 근본적인 삶의 문제와 본질에 대한 탐구와 정립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흔히 말하기를 우리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빵문제가 아닌가?... 빵을 달라고 대중은 부르짖습니다.

"나만 따라 오너라! 그렇게 하면 내가 네게 빵을 주리라"고 외치는 지도자들도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말은 옳습니다. 과연 의식주가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만을 해결한 사람이 과연 그 생활에서 참된 만족을 가질수 있을까요?

사실 공산국가에서는 과거 이 빵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하는 약속을 가지고 전 국민을 현혹시키며 기계나 노예와 같이 부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빵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해결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설사 그들이 빵 문제를 해결했다고 하더라도. 자유와 인권을 유린당하고 독재자의 통제 아래서 우물안에 개구리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무슨 참된 행복과 만족이 있겠습니까?

또한 오늘날 물질적으로 부유한 미국을 비롯한 선진제국에서 오히려 아프리카나 열대지방 후진국의 사람들보다 더 생의 혐오와 권태를 느껴 자살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볼 때에 사람은 빵문제를 해결했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일 육신만이라 할 것이면 으례 배만 부르고 등만 따뜻하면 만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육신적인 모든 조건이 해결되고 넉넉하더라도 다른 조건 즉 영적 만족이 없으면 언제든지 텅빈 느낌, 공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문제만 해결되면 만족할 수 있다고 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생각은 사람을 단순히 한 짐승과 같이 보는 견해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짐승 이상의 다른 무엇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떡 이상의 무엇을 그리워합니다. 그리고 그 이상의 무엇을 탐구하여 해결보지 못하는 한 항상 공허감과 허전함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종교 문제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독일에 쇼펜하워라는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한번은 어떤 공원에 가서 의자에 외로이 앉아 깊인 인생 문제를 명상하였다고 합니다.

깊은 명상에 잠겨서 해가 지는 줄 모르고 앉아있는데 어느덧 황혼이 깃 들어 공원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공원지기가 공원을 둘러보다가 한옆을 보니까 어떤 노인이 앉아서 눈을 그냥 감고 나가지를 않고 있었습니다. 이 공원지기는 어떤 빌어먹는 노인인가 생각하고 큰소리로 "이거 누구야! 이 사람 어디서 왔어" 하고 고함을 쳤습니다.

그때에 쇼펜하워가 눈을 번쩍 뜨면서 “어디서 왔냐구? 아 내가 그걸 알면야!...... 그것을 몰라서 지금까지 이렇게 눈을 감고 앉았는데‥‥,"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인생이 어디서 왔습니까? 내가 어디서 왔습니까? 왜 삽니까? 이 세상을 사는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또 어디로 갑니까? 질문자는 이러한 문제를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몇 해전에 답변자가 한 장례식에 조문을 가게 되었는데 방금 출관(出棺)하려는 직전에 아버지가 멀리 나갔다가 소식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들어오자마자 그는 너무 가슴이 아파서 자기 아들의 관을 부둥켜안고 울부짖습니다.

“이게 웬 일이냐? 네가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느냐?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느냐?" ...대성통곡을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흔히 우리는 생,노,병,사,의 사고(四苦)를 말합니다.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인간은 이런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의 해답이 없는 한... 영혼의 참만족과 행복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는 이런 인생의 근본문제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종교신앙에 눈을 뜨므로서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또 한가지 큰 문제점은 우리가 다 마음으로는 의을 사모하고 의를 행하고자 하지만 원하는 의는 행하지 못하고 원치않는 불의와 죄악에 빠질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악으로 기우는 이 인간의 부패한 근성, 이 삐뚜러진 심성을 바로 잡을 힘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가서 이 사람을 바로 세울 수 있습니까?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바로 세울 수 없습니다.

사람을 본래 지으신 조물주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되어야 하고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다시 새롭게 거듭나야 하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과학은 모든 사물에 대하여 “어떻게”라는 문제에 해답을 주려는 일이지마는 종교는 “왜”라는 문제, 곧 인생의 의미를 찾고 목적을 뚜렷이 밝히려는 요구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종교적인 요구는 과학 이전의 시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과학 이후의 시대에 더 긴급히 요구되는 일입니다

과학이 발달하면 발달 할수록 인간은 그 큰 기계주의의 챗바퀴에 휘말려 자기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큽니다

오늘의 세계가 물질적으로 경제적으로 이전 보다 더 풍부해지고 여유있는 삶을 인간에게 제공해 주고는 있으나 그 대신 인간을 얼마나 비인간화 시키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 잃어버린 인간성을 재발견하고 회복시켜 주는 일이 바로 종교의 역할입니다

비유하건대 이 종교신앙은 마치 나무가 땅속 깊이 샘의 근원을 찾아 뿌리를 내리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무가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물을 찾지 못하면 폭풍우가 올 때에 넘어지고 가뭄이 올 때에도 쉽게 말라 죽게 됩니다.

그러나 땅속 깊은 샘의 근원을 찾아 거기에 뿌리를 내릴 수만 있다면 어떤 폭풍우에도 쓰러지지 아니하고 어떤 긴 가뭄에도 마르지 아니하고 왕성한 생명력을 가지고 푸르른 잎을 피우고 힘차게 가지를 뻗어올려 마침내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참된 종교는 우리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 죄와 죽음의 문제, 삶의 의미와 목적에 해답을 주고 바른 길을 제시해 주어 인생을 밝고 지혜롭게 힘있게 살게 해 주는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참된 종교신앙이 우리 인생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근원적인 기갈을 해갈해 줄 참 샘의 근원을 찾아야하고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폴 틸리히는 이를“인간의 긍극적인 관심”이라고 했습니다

파스칼은 인간의 심령 속에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이 채워지지 않는 한 인간은 삶의 무의미와 공허를 경험할 수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일부 무신론 무종교자들은 종교신앙인들의 비위를 들먹이면서 종교무용론 내지는 더 나아가서 종교 백해 무익론까지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편견과 오해에 지나지 않습니다

종교인 개인의 비위를 가지고 그가 믿는 종교 자체를 매도 해서는 안됩니다

그가 믿는 신이,.. 구세주가 그렇게 살라고 가르쳐 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기독교는 예수를 믿는 종교인데 그러면 예수님이 그를 믿는 신자들에게 남의 것을 빼앗고 거짓말하라고 가르쳐 주어서 그가 그런 도적질을 하고 사기죄를 짓게 되었단 말입니까? 그런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은 그 당사자들이 예수를 잘못 믿고 교회를 다니면서도 사사로운 욕심에 매여서 예수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않기 때문에 그런 죄를 짓게 된 것이지 예수의 책임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은 너나 나나 다 부족한 점이 많고 불완전한 존재인지라, 알게 모르게 자기의 의지와는 다르게 죄를 짓게 되고 또 상식적으로 잘 알고 있는 기본적인 교양도, 도덕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행하지 못하며 오히려 원치않는 죄를 순간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짓게 되므로 뒤늦게 자신을 후회하고 한탄하며 생을 저주하기까지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는 것입니까?

나는 건강하고 깨끗한 사람이요 법을 성실히 지키는 사람이니까 나에게는 종교가 필요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본인이 죄가 없다고 겉으로는 큰 소리 칠지라도 자기 양심에 손을 얹고 삶을 되돌아 볼 때에 정말 이제까지 나는 죄를 하나도 안짓고 살았다고 자부할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어느 누구도 절대신 앞에서 자기는 죄를 하나도 짓지 않고 부끄러움이 없이 인생을 살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은 다 죄인이라는 말은 진실인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대부분의 불안과 고통과 환란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배반과 죄의 결과로 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므로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화해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어떻게 화해한단 말입니까?

그것은 이렇게 하나님과 단절된 채 죄와 사망의 권세에 매여 눌려있는 인간에게 죄사유함과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중보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구원의 도를 따르므로 그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영생)에 이르게 이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에서 구세주로 믿는 예수님은 보통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과 같이 똑같이 33년을 사셨지마는 죄는 없으신 분이요 죄와 사망의 굴레에 매여 허덕이며 고통하는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또한 인류구원을 위햔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므로 또한 그 길을 밝히 보여 주시고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 사실의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져 있는 책이 바로 성경책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게 되고 또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예수님을 알게 되고 만나게 되며 또 그 분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힘입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안가지고를 떠나서 인류사회의 문명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 누구라고 보십니까?

아무도 예수임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땅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수십억이 되고 예수의 영향이 지대하여 인류역사의 기점을 그의 탄생 이전과 이후의 시대로 나누며

유명한 천재 과학자 뉴턴같은 사람도 진실한 신앙의 사람으로 자기가 평생 많은 것을 성경에서 영감을 얻어 깨닫고 발견한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또 최근 20세기의 가장 잘 알려진 물리학자 아이슈타인과 같은 사람도 종교없는 과학은 소경과 같고 과학없는 종교는 절룸발이와 같다고 말하며 종교와 과학은 서로 배치되는 관계가 아니고 상호 보완되는 관계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을 향하여 허상에 도취된 자들.... 실제로는 신이 아닌데 자칭 신이라고 하는 예수사기꾼 시골촌뜨기의 말에 미혹되고 미친자들이라고 비난합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있냐? 있다면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과 하나님을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읽고 듣고 또한 깊이 기도로 교통하는 중에 만나고 또한 그 가운데에서 구원의 길을 발견한 확신과 체험을 가지고 열심히 하 나님의 교회를 섬기며 예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생동감이 넘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종교를 가져야 하는 것을 인간이 마땅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겨야 하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을 믿어야 할 이유

사44:24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나와 함께한 자 없이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베풀었고.....“

롬1:19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이 이를 저희 속에 보이셨느니라“

롬1:20 "하나님의 영윈하신 능력과 신성(神性) 그 만드신 만물이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게치 못 할지니라“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시19:1-10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전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전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2. 예수님을 믿어야 할 이유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죽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4: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예수 외에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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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다가 만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읽어주세요.

서론 : 이성적인 방법을 통한 결론 도출에 대한 설명과 근거와 착오에 대한 분류에 관해서.

이성과 믿음이 상충될때에는 믿음을 선택하는 편이 낫다. - 간디.

(믿음과 이성이 계속적으로상충될 일이 없고, 왜냐하면 그것이 더 정직하기 때문입니다.)

*이성이란 무엇인가? - 이성이란 올바른 생각을 하는 능력이다.



이성이란 올바른 생각을 하는 능력입니다. 혹자는 이러한 이성이라는 단어를 감정과 대비하여, 감정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개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이라고 말할수있지만, 그것은 감정이 올바르게 생각 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전제 아래에서 내려진 것입니다. 만약 다른 어떠한 요인이 있어 근거의 올바름에도 불구하고, 생각하는것을 방해한다고 여겨진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그것과 관계되어 이성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고집을 버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라. 등등 으로 표현할수 있는 것입니다.

이성이란 항상 올바른 생각을 하는 능력이기 때문에, 사람은 이성이란 단어로 치장되길 좋아하며 이성적인 능력이 높은 인간이 되길 원합니다. 그것은 올바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는 말이기 때문임을 직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인 인간은 사고의 결과가 올바를 것이 요구되는 인간에게 있어 최고의 찬사이며, 능력의 표징입니다. 누구나 이성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것이 이미 올바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성이라는 개념은 어떤 대상에 올바른가?를 결정하는 기준에 대하여 두 가지로 나뉘며, 그것은 올바른 사고인지 결정하는 기준에 의해 갈리는 것일 뿐 사실 이성이 올바른 생각을 하는 능력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도구적 이성이라는 것은 한 개인이 원하는 목표에 대해 올바른 사고를 하는 것과 결부된 능력인 반면, 성찰적 이성이라는 것은 사회가 원하는 목표에 대해 개인이 취해야 할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성이라는 단어는 종종 그 이성이라는 이름 앞에 비나 반과 같은 접두사가붙었을 경우 그것은 틀렸다라는 말로서 오인됩니다. 왜냐하면 이성이라는 것은 올바른 생각을 하는 능력인데, 비이성이라는 단어는 올바른 생각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하지 않은 생각으로 틀린 생각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두 사람이 주장할 때에 있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하는 비이성적이라는 말은 상대방의 입장을고려하지않을 때 폭력적입니다. 특히 종교와 관련되어 사용 되어지는 비이성이라는 말은 그러한 오인을가장 많이일으키기 쉽습니다.

이 글의 목적은 종교에 관한 이성적인 사고를 통하여 종교적인 믿음을 옹호하기위하여, 특히 그것이 이성적으로 옳은 것임을 변증하기 위해 작성되어졌습니다. 이글이 모든 것이 부정된다고 하여도 믿음의 본질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단지 믿음에 대한 이성적인사고에의 도움과 믿음에 대한 비판을 방어키 위해 존재합니다.





*이성을 바탕으로 한 생각은 모두 올바른 생각인가?

앞서서 올바른 생각을 하는 능력을 이성이라고 하였지만, 이성적 사고의 결과가 항상 올바른 것은 아닙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의 이성적사고 결과는 서로 다를 수가 있는데, 이러한 것은 이성적 사고가 이성적 사고를 가능케 하는 데에있어 활용되는 근거에 차이가 있거나 일정한 관점에 의해 의존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특히 이성적인 사고의내용은 사고에 사용된 근거가 사실과 상이할 때 틀려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근거에 관하여 명확하게 생각하기.

이제 근거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근거만 올바르다면 이성이 올바른 결론을 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판단에 있어 가장 기초가 되는 판단 근거는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경험은 자신이 한 경험입니다. 이러한 경험에도 오류가 섞여 있을 수 있겠지만 정상적인 이성적인 상황을 가정할 때에 그 오류는 무시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성이란 올바른 생각을 낼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성적인 인간이 올바른 근거를 바탕으로 한 결론은 올바른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경험이란 한계가 있어서 모든 일을 다 경험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경험 또한 그 근거가 될 수 있으며, 때로는 다른 사람의 주장 또한 그 근거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타인이 경험하였다는 것은 내가 한 경험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이 섞여있을 수 있습니다. 거짓의 원인으로는 착오 하였을 수도 있고, 정말로 거짓말일 수 있거나, 전달되는 와중에 과장이나 왜곡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올바른 생각이란 어떠한 올바른 생각을 방해하는 요소가 없는 가운데에 명확한 근거를 바탕으로 한 생각이라고볼 수 있습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올바른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이성적인 상황외에도 타인이 경험한 근거를 판단할 필요성을 가집니다.

그러하다면 어떻게 타인이 한 경험을 판단해낼 수 있을지 생각해봅시다. 먼저 어떠한 개인의 판단에 있어 근거가 되는 것은 자신이 하는 경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즉 내가 한 경험이라는 것은 언제라도 그 본인에게 있어 올바른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조건을 완화하여서 내가 할 수 있는 경험이라면 어떠할 것인지를 생각해봅시다. 즉 지금 당장은 할 수 없지만 언제라도 내가 그러한 시점에서 할 수 있다면 그러한 경험은 늘 내가 진위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한 경험과 가장 근사한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내가 확인할 수 있어도 일단 거기에는 일정한 노력이 더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대놓고 거짓을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떠한 동기 요인을 기반으로 할 때에 거짓말을 하면 나로부터 손해를 입을 것으로 확실시 될 때에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을 것으로 보증 받을 수 있음으로 잘 행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사안을 조금 더 확대하여 봅시다. 모든 경험이 내가 한 경험과 내가 할 수 있는 경험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경험은 내가 살면서 경험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나는 전혀 경험할 수 없을 지 모르는 경험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험자의 상태에 따라 어떠한 경험은 누군가는 경험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전혀 경험할 수 없는 경험도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럼으로 내가 살면서 전혀 경험할 수 없을지 모르는 경험을 판단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러니깐 추가적인 경험을 판단하는 다른 방법에 있어 거짓일 가능성을 제거하는 요인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먼저 잘못된 타인의 경험이 전달되는 요인을 생각해보면 착오, 거짓말을한 경우, 왜곡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거짓말을 의도적으로 하는 경우는 우리는 동기요인을 통해서 걸러낼수가있습니다. 즉 사람은 어떠한 특이한 동기가 없다면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개인적인 관계에 의해서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아왔다면 또한 거짓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와 같은 것입니다.

두 번째로 착오를 걸러내는 기준은 일반적으로 다수가 보고하는 것과 권위, 그리고 시간에 걸쳐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다수가 한 경험은 착오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 기인합니다. 권위는 대체로 다수에 의해 지지되며, 착오가 많지 않을 경우에 지지됩니다. 또한 시간에 걸쳐서 검증 될경우 당대의 대중 사이의 분위기, 발언에 관련된 권력 관계 등에 지배되지 않아 착오의 가능성이 줄어들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도 문제가 있는데, 어떠한 은닉된 조직이 조직적으로 다수의 거짓 보고를 한다면 거짓된 근거를 진실로 믿을 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시간에 걸친 장기적인 판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이런 방법 외에도 진실된 근거를 찾는 방법은 근거와 근거 사이의 연결을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진실일 경우에는 다른 많은 사안들과 그 안에 잘 녹아 들어가지만 거짓일 경우에는 다른 무언가에 대해 설명이 되지 않거나, 모순이 생기게 되는 경우가 존재합니다. 그러한 경우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특히 다른 많은 사안과 연관성이 높다고 생각될 경우에 진실성이 있다고 생각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조건성 이라고 하는데, A가 일어난 것이 참이고, A이면 B인 관계가 되는 사안의 경험이 매우 많을 경우 B는 착오가 아니라 사실로서 여겨집니다.

위에서 논의한 것들을 정리해보면 자기 경험을 기준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경우에 해당하는 근거가 있고, 자기가 경험할 수 없는 것을 바탕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경우에 신뢰성을 주는 근거를 판단하는 기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경험을 기준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경우에 해당하는 근거는, 실제로 내가 한 경험과 다른 사람이 했더라도 내가 언제든지 다시 경험할 수 있는 경험이 있고, 자기가 경험할수 없는 것을 바탕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경우에는 그 원인을 생각하여 원인 별로 거짓이 아닐 가능성을 판단하는 기준인, 동기를 고려한 맥락관계를 파악하거나 개인적 관계에 입각하여 판단하는 것, 또한경험의 착오와 관련하여 다수의 보고를 통해서 판단하거나, 권위에 의존하거나, 오랜 기간에 걸쳐서 관찰되었는지에 관해서 생각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평가방법은 서로가 상호보완적이며, 특히 모든 조건을 다 통과하였을 때 진실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일반적인 과학적 방법론에 관해서.

오늘날 가장 올바른 결론을 이끌어낸다고 하는 과학적 방법론은 다음과 같은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어떤 상황을 설명하는 문제에 대하여 그러한 것을 설명하는데 타당하다고 생각되어지는 가설을 생각해냅니다. 그리고 근거를 통하여 그 가설을 부정하는데, 여기에서 근거가 되는 것은 대체로 내가 언제든지 그러한 경험을 이용할 수 있는 경험입니다. 내가 한 경험은 서로 공유할 수 없고, 타인을 믿는 경험 같은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경험에 비해 신뢰성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그 근거를 지지하는 경험이라기보다는 대체로 다른 가설을 부정하는데 사용되는 경험입니다. 과학적 방법론에 있어서의 경험은 귀납적으로 타당한 경험이어야 합니다. 가령 매번 조사시에 달라지는 경험은 그 달라지는 제반 조건을 통제하지 않고서는 인정받지 못합니다. 과학적 방법론은 이러한 수 많은 제약점 때문에 늘 최소한의 지식을 갖고 있으며, 최대한의 지식이 되지 못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사람에게 있어 근거가되는것은 단지 이러한 형태의 것 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방법은 단지 단순한 귀납적 명제를 응용하는 것이나, 측정과 수리적인 계산을 통해 무언가 결론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마야인이 별자리를 파악하여 달력을 만드는 것이나, 에라토스테네스가 측정을 통해서 지구의 크기를 측정해낸 것과같은것은 과학적 방법론에 의한 결론이 아닙니다. 마야인이 별자리를 파악하여 달력을 만드는 것은 귀납적명제를 응용한 것이며, 에라토스테네스가 지구의 크기를 측정해낸 것은 지구가 구형이라는 것을 가정한 것을 기반으로하기 때문입니다. 가정을 사용한 결론은 추측의 영역으로, 과학적방법론을통한 결론이 아닙니다.

 과학적 방법론의 증명은 단지 자신의 주장을 증명할 근거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에 반대되는 것을 반박할 근거를 찾는데에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세계엔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의해 고려되어 지는 것입니다. 또한 현재 우리가 제시하는 것이 참이 아니라면 그 증거를 다른 어떤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반증가능성의 근거를 납득할만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을 사실로서 여겨집니다.





*근거의 완화에 관하여

앞에서 증명에 사용되는 근거를 말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근거란 내가 언제든지 경험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언제든지 경험할 수 있는 근거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경우에 있어 그러한 근거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정신과학에 있어 자신의 일상 경험 외의 앞에서의 언제든지 자신의 의사로 경험할 수 있고, 또한 그 조건을 명백히 밝힐 수 있는 근거는 활용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정신 작용에 문제가 발생하는 행위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타인의 경험을 이용하여 질병에 걸린 환자나 부위가 손상된 환자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역사학자나 진화 론자 들도 언제든지 실험에서 사용되는 자신의 의사로 경험할 수 있고, 그 조건을 명백히 밝힐 수 있는 근거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항상 과거의 사실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과학적 방법론에서 요구되는근거를 확보할 수 없는 학문에서는 다른 형태의 근거를 통해 사실을 밝힙니다.학문마다 그 학문에 있어 요구되는 근거는 다를 수 있으며, 어떠한 사실 때문에 근거가 제약될 수 밖에 없다면 제약된 근거를 통한 증명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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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창조자 하느님에 관하여.





성서의 종교만큼 잘 입증된 과학은없다. - 뉴턴.





*종교의 시작 역사와 오늘날의 하느님.



종교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기록도 없지만 우리가 가진 현존 유물과 역사에서 종교를 포함하지 않은 것은 없어 보입니다. 매우 오래되었다고 판정되는 유물 속의 매장문화를 보았을때 우리는 고대인들이 사후세계를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추론합니다. 네안데르탈인은 죽은 자를 묻어 줄 때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을 묻어주었다는 결과가 나와있으며, 그 이후의 이스라엘의 카프제와 스쿨에 있는 12~9만년 된 동굴에서도 의도적인 매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종교와 관련된 유적은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너무나도 많아서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며, 종교를 믿는 사람은 현재 약 지구촌 인구의 70%이상을 차지하는 약 54억 명이상이며, 그 중 하느님과 성경을 믿는 종교인 기독교와 이슬람교 등 유일신 교를 믿는 사람의 숫자는 50%이상으로 약 39억명 이상이 유일신 교를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일신 교가 아니라도 창조신 브라흐마가 있는 종교인 힌두교는 9억명 가량이며, 약 48억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 세상은 창조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과거에서부터 믿어온 종교인들이 많았기에 열거할 수 없을 만큼의 유적이 있으며, 오늘날에도 전체 인구의 50% 이상이 유일신인 창조주 하느님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창조주의 근거를 찾는데있어서의 제약.

이제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데에 적합한 근거를 갖지 못한 사람에게 창조주 하느님이 어떻게 하여 존재하는지 설명하기 위한 근거를 찾아 보려고 합니다. 먼저 창조라는 사실은 과거의 사실이기 때문에 다른 과거의 사실과 같이 다룬다면 근거를 찾기란 매우 쉽습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해 적용하듯이 과거 사람들이 창조주가 존재했다고 믿어온 역사와 기록만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근거는 다른 역사적 인물과는 달리 창조주에게서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주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근거틀이 필요하다고 주장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초에 세계를 창조한 창조주를 의심없이 받아들이기 위한 근거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역사책처럼 문서로 남길 수도 없는 노릇이며, 남겨도 어느 시점에 누구를 통해서 남겨야 할 것이며, 본인이 창조주라고 주장한다고할지라도 그것을 믿어줘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창조주를 완벽히 증명하는 근거는 처음부터 적혀져 있을 지 모른다는것인데, 물질을 통하여 적혀있는 것들은 대체로 변하기 때문에 찾기가 힘든 것이 당연합니다. 우주를 창조하였다는 창조주가 처음부터 석판에 적어서 내용을 준다고 한 들 그 석판에 적힌 내용이 과연 맞느냐에서부터 어떻게 그 석판이 존속되어 여기까지 와 있게 되었냐 까지 법칙에 어긋나 존재하는 그 석판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창조의 근거라는 것은 그러한 기적 외에는 찾아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기적 외에도 창조주를 알아 볼 수 있는 근거가 있는데, 우리는 물질 이외에 창조주가 창조주를 알 수 있도록 적어놓았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사람에게 그러한 것을전달하고자 한다면 사람이 어떠한 시점에 알 수 있도록 적어놓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확실하고 간편한 방법은 창조주가 자신을 인식시키고 싶은 시점에 우리는 창조주를 인식하는 것이며, 창조주가 있게끔 하는 경험이 창조주를 인식할 수 있게끔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만약 창조주가 정말로 있다면 왜 모두에게 태어날 때부터 창조주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시켜놓지않았느냐고 말을 하는데, 태어날 때 부터 인식시키지는 않아도 특정 시점부터는 인식시켜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특정 시점부터의 인식은 기계론 적인 물리 법칙과 생물의 설계성 그리고 신경신학을 통해 확인될수 있습니다.



*직관적인 신을 믿는데 따른 증거

직관적으로 창조주가 있다는 것은 창조된 것으로 보이는 세상 만물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이 세상의 정보값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먼저 우주의 크기를 살펴보자. 우주의 크기는

그 우주속에서, 먼지 만한 크기의 작은 지구에 사는 생물의 종의 숫자를 통해서 살펴보자. 미생물을 포함하면 종의 숫자는, 그 중에 한 생명인 인간의 신체 세포수를 살펴보자. 그 신체 세포가 어떻게 해서 서로 연결지어 하나의 기관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자. 이 모든 정보값을 통틀어서 계산할 수 있다면, 앞에서 정보값이 매우 큰데 그 커다란 정보 값이 하루아침에 생겨났을리 없으며, 점진적으로 만들어





*다른 경우에 신을 사람은 어떠할 때에 믿게 되는가?

인간은 신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무신론자들은 마치 종교의 신이 설화처럼 이야기로 지어져서 단순히 믿게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럼으로 FSM교와 같은 이야기를 지어내고, 날으는 스파게티 미트볼을 믿는다며 비난하기도 합니다. 이와 비슷한 논의는 버트란드 러셀이 한 적이 있습니다. 신은 러셀이 생각하기에 지구와 화성 사이에 도자기 찻주전자 하나가 타원 궤도로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고주장하고이 찻주전자는 너무나 작아서 가장 좋은 망원경으로도 볼 수 없다고 말함으로 사람이 볼 수 없는 찻주전자와 같이 다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 속성에 부합하지 않는 모순적인 사실을 들어 신의 존재가 존재할 가능성조차 없으며 모순인것처럼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 신의 존재는 위와 같은 대상의 속성과 수식어가 서로 모순적이라서 반드시거짓인 것과 명백히 다릅니다.

실제 신의 존재는 그 존재가 가지는 의미상 이 세계와 모순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사람이 알 수 없는 신을 알고 있다라고 주장한다면 이 경우에만 모순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도 완벽히 라는 수식어가 있을 때에만 말입니다. 즉 사람이 어떠한 경로를 통하여 신을 알게 되었는지 혹은 믿게 되었는지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신의 근거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체험을 통해 신을 인식하는 조건은 몇 가지 관련된 근거가 존재합니다. 가장 확인되기 쉬운 주장은 단식과 그에 따른 체험과 관련된 것입니다. 단식을 할 경우 종교와 관련된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쉽게 발견됩니다. 단순히 인터넷 검색 창에 당신이 단식과 종교를 검색하면 수많은 글을 확인할 수 있는데,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이집트, 피타고라스에이르기 까지 단식을 종교의 수행법 중 하나로 인정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몇몇 종교는 가령 이슬람교는 정기적으로 계율을 만들어 라마단 기간 동안 단식을 강제하고 있기 까지 한데, 이것은 단식이 일정한 종교와 관련된 연관 고리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단식 외에도 신의 인식과 관련된 몇몇 가지 증표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가장 원시적인 부족 형태의 샤먼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샤먼의 경우에 잠을 자지 않는 것, 호흡통제, 한계 이상의 몸의 움직임등을 통하여서도 그들이 말하는신적인 존재와의 만남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것들도 대부분이 단식과 같은 일종의 신체적인 극단상황과 맞물려 있습니다. 두 번째 증거는 역사적 증거입니다. 가장큰 역사적 증거는 산업혁명과 무신론의 확대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산업혁명의 확대와 전 후를 살펴보았을때의 대표적인 것은 무신론의 대중적 확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산업 혁명 이전에의 무신론은 몇몇 사람들에의해 주장되었을 뿐, 대중적으로 파급되지는 못하였습니다. 대중들은 무신론자들의 저서에 관심을 기울이기 보다 종교적인 저술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지만 산업 혁명 이후 대중들에게 무신론과 관련된 저서가 구매되기시작한 것입니다. 또한 학문적인 영역에 있어서도 산업 혁명 이전과 이후에 관련된 논의가 바뀌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무신론적인 논의는 다윈의 진화론이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것들은 선진국과 후진국에 존재하는 종교의 변화와도 밀접합니다. 선진국에서는 종교가 일반적으로 쇠퇴하는 반면 후진국에서의 종교는 너무나도 왕성합니다. 세 번째 증거는 일상적인 증거입니다. 일상적인 증거의 대부분은 교회에서보거나, 기사에서 볼 수 있거나 심지어 통계를 통하여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상적인 증거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간증입니다. 간증은 교회에서 볼 수 있는 데, 이러한 간증의 경우에도 몇몇 경우에있어 패턴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개인의 위기 -> 신의도움 -> 회생 이 그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불황이생기면 종교가 성장한다와같은 기사를 보기도 하고, 종교와 소득간의 관계를 통계를 통하여 분석할 수 있기도합니다.

앞에서 나열된 증거는 모든 신을 믿는 경로를 포함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신을 믿게 되는 것이 특정한 조건성을 띄게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이 모든 근거는 앞에서 말한 착오와 거짓말을 하는 원인의 기준도 통과한 것으로 생각되어 집니다. 왜냐하면 종교를 믿는데에 있어 사람들은 돈을 지불하고,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 성직자의 경우에도 스스로의 삶에서 결혼을 포기하는 등 신이 없다면 하지 않을 행위를 하고 있기 때문에 동기 요인에 있어서도 문제가 없기 때문이며, 종교를 믿는 사람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기 때문에 다수이고 수많은 역사서에 종교와 관련된내용이나오는 것을 보아 시간을 걸쳐서 검증된 내용이며, 오랜 기간 권위를 가진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신의 근거는 제약 조건이 설명가능하고, 거짓말에대한 동기 요인 검증, 착오에 대한 다수와 시간에 걸친 검증, 진실성의확보를 위한 조건성과 연결성의 검증을 통과하였기 때문에 사실로서 여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종교 형태가 있지만 모든 종교 형태는 창조주를 가지고, 창조주를 도출해낸다.

 앞에서 신에 관하여 다수가 믿고 있음을 말하였고, 역사를 통한 것을 말하는 등 다수와 시간에걸쳐진 검증을 받았기 때문에 착오의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하였지만 각각의 사람들이 믿는 종교 형태가 다르다는 것은 몇가지 의문점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가령 각 종교들은 모두 다수가 믿고 있고, 시간에 걸쳐진 검증을 받았지만 개개의 종교의 주장들 간에는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그 모순성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경험은 단지 그 경험만으로 통용되지 않고, 해석을 거치며, 그러한 다양한 해석의 차이가 바로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하여 중요한 것은 개개의 다수가 믿고 있고, 시간에 걸쳐진 검증을 받은 종교들은 창조주와 관련된 것들이 포함되어 있고, 당연 도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이슬람교나 기독교는 물론이고, 다신론적인 성향을 띄는힌두교에 이르기 까지 종교엔 창조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창조주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불교에있어서도 그 표현상의 명확성만 떨어질 뿐으로 창조주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불교에 있어서 세계의 탄생은 어떠한연기에 의해서 생겨난다고 하는데, 처음에 있는 무언가가 자신의 성질대로 연기를 시켰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 세계에 있어서의 물질 같은 것들은 입자성을 띄고 있음으로 타 입자로의 분리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세계가 입자성을 띄지 않지만 입자성을 띄는 것처럼 보인다고 주장할수도있지만 이것은 공간과 존재에 관하여 모순없이 무언가를 발생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문제에 있어 모순이 생김으로 옳지 않은 주장입니다. 따라서 처음에 있는 무언가가 발생시키는 인과란 처음부터 이 세계가 모두 입자로 분리되어 공간속에 존재하고 있었다라고 주장되지 않는 이상 현실 입자 외의 존재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동차 사고의 목격자를 보았을 때에 각기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어도 공통된 어떠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공통된 목격담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듯이 종교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어도 공통된 주장인 창조주나 기도 응답과 같은 것들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과 상통합니다.

*신을 믿는 경험에 대한 이해와 창조주의 도출에 관해.

신을 믿게 되는 경험에 대해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종교적인 체험과 관련된 자료가 필요합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유명 인사들의 자료를 인용해본다면 어떠한 존재의 "음성"이나 환각,환청, 황홀한 느낌, 치유, 기도응답등의 체험과 신을 믿는 경험은 관련되어 있으며, 그외에는 논리적인 납득이 다시 뒤따른다는 것을 확인할수 있습니다. 가령 파스칼의 팡세는 파스칼이 신앙과 관련된 체험을 한 후에 한 기술이 놓여있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 또한 죽음의 순간에 앞서 경험한 기독교와 관련된 경험을 말하였고, 테레사 수녀는 다르질링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음성을 들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러한기독교적인 체험 외에도 수 많은 다른 종교에 있어서의 체험도 많으며, 비종교인 내에서의 체험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체험들은 각기 자신과 관여가 있었던 종교와 관련된 경험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보통 원시부족에서 발견될 수 있는 샤먼과 같은 형태의 체험을 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샤먼의 체험에 있어서도 꿈에서 신과 관련된 존재와 접촉하거나 환각, 환청등을 경험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실제로 샤먼이 아니더라도 소크라테스의 경우 다이몬의 환청을 들었다고 주장하는등 어떠한 종교적인 체험을 하는 것은 종교와 상관없이 경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앞에서 논의해본 바와같이 인간이 종교적인 경험을 하는 것은 거의 사실에 가깝지만 그 내용이 창조주와 결부되어있다는 것은 확증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기본적인 논리적 기반과 합쳐져 볼 때에 그러한 종교적인 경험이 창조주라는 존재와 합치되는 것은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첫번 째로 체험의 경우 상위 귀속적인 관련성을 보이는 듯 하다는것입니다. 가령 보통 원시부족에서 발견될 수 있는 샤먼과 같은형태의 체험은 종교와 관여되기 시작하면서종교와 관련된 형태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개인이 가지는 신에 대한 관념과 결부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신에 대한 관념은 계속 상승하기만 할 뿐 내려가는 경향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의 삶에 있어서 끊임없이 종교적인 체험은 원시적인 형태 그대로에서 머물렀어야 옳고, 종교적인 형태내로 포섭될리가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원시적인 형태에 있어서의 종교적인 체험은 창조주가 존재하는 형태의 종교적인 형태에 귀속되는 경향이 있고, 우리가보는 결론 그대로 창조주를 포함하는 종교 체계를 지지하게 된다고 여겨집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매우 오래되고 유명한 제 1원인에 의한 신 증명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이것은 쉽게 인간의 일상경험으로부터 유비됩니다. 가령 그것은 모든 것은 점진적으로 쌓여가고, 도약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인간은 인위적이냐, 인위적이지 않느냐를 구분하는 일종의 인식필터를 내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인식 필터상으로 이 세계의 정교 성을 인식하게 되면 인위적이라는것에 관련되어 창조주를 도출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은 끊임없이 질문을 하는 경향이 있고, 그러한 질문은 쉽게신의 개념으로까지 확장됩니다. "이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와같은 질문이 그러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이러한 답변에 대해 일반적인 논리 경향으로는 어떠한 존재를 상정하게되어 있는데, 이것은 인간이 주어와 동작으로 세계를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를 만든 것은 동작행위이고, 또한 동작행위는 당연히 주어의 필요성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앞에서 둘을 조합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는 경험적 측면에서 우리가 신비한 경험을 할 경우에 창조주로 발달해가는 경향이 존재할 것이라 판단되며, 다른 하나는 논리적 측면에서 창조주를 생각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가장 큰 개념으로서 창조주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창조주를 믿게 되는 것은 어떠한 필연성을 띈다는것입니다.





*현대적인 측정(신경 신학에 관해)

오늘날 신비체험은 뇌 영상을 통해서도 측정되는 수준에 다다랐습니다. 신비 체험가들이 의도적으로 신비체험을 위한 행위를 유도한 뇌 영상에서 해당 부위의 느낌을 가능케 하는 부위가 비활성화되는 것이 확인된 것입니다. 앤드류 뉴버그는 티베트 명상 수행자가 명상이 그러한 영적 절정 상태에 들어갈 때 즉 “시간이 정지한 느낌과 무한의 느낌이 든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존재하는 모든 사람과 모든것의일부처럼 느껴진다.”라고 말하는 순간을 포착하였습니다. 뇌의 물리적 공간에서 개인의 방향과 위치를 담당하는 후상부 두정엽에서 혈류가 급격하게 감소하는 것을 몸속에 주입한 방사성 추적자의 위치를 파악하는 Spect 카메라를 통해 측정해낸 것입니다. 그것 만이 아닙니다. 신성에 관련된 표현이 나올만한 황홀한 경험을 할 때에 쾌락과 관련이 깊은 부분을 측정하였다고 합니다. 경험의 보고자가 스스로 실제의 사실을 느끼는 것을 보고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 외에도 측두엽 간질이종교적인 발언을 더 많이하게 한다는 것이 관찰되었습니다. 종교적 황홀경과 관련된 경험을 하게 만드는원인으로서 측두엽 간질이 언급되기도 하는데, 이것 또한 종교적인 경험이 뇌와 관련 있을 수 있다는 것을확인해줍니다.

혹자는 이러한 신비체험을 예시로들어서 종교적인 경험이 단지 뇌의 작용일 뿐이며, 실재하지않는다 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경험 중에 뇌가 작용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경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우리가 사람을 보게 되는 작용에도 눈 뿐만 아니라 뇌의 시신경 세포가 필요하며, 사실 뇌가작동하지 않는 경험이란 경험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으로 신비체험을 뇌의 영상으로 관찰할 수 있다는것은 신비체험이 실제로 경험되는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확신.

앞에서 검토한 것과 같이 신비체험은 다른 모든 인간의 경험과 같이 인간이 경험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작화성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대의 인간은 신을 믿으며, 내부의 질서를 유지하고, 고통을 견디며, 희망을 갖고 행복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그러한 것은 인간의 역사와 전통에 뿌리 깊게 있으며, 오늘날은 과거의 연속과 연장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체험은 일어나고 있으며, 비록 개개의 체험이 단 하나의 종교 양식과 초월자의 형상을 지지하지는 않아도 초월자의 존재를 인식시켜줌에는 충분합니다. 또한신비체험을 하는 인간의 초월자에 대한 관념이 점차 최고관념으로 경험한다는 것과 이미 있는 초월자들의 개념과 창조자에 대한 위계를짓는 것으로 보아할 때, 신비체험의 대상에 대한 관념에서 지칭하는 초월자의 의미가 창조자가 되는 것은 점차적인 필연이라고생각합니다.

과거의 사실은 우리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이 창조라는 사실일 때에 우리는 물질, 생명을 통해서도 알 수가 없고, 어떤 우리가 현재에 알지 못하는 능력을 행한다는 것에서도 알 수 없으며, 오직우리가 창조자가 존재한다고 여기게끔 하는 경험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역사책이 당연히 사실을 바탕으로 쓰여졌다고 믿습니다. 유적들은 그 역사책의 사실성을 보강합니다. 하지만 이것 들은 자연적인경험을 기반으로 하지 않으며, 단지 우리가 몇가지 가설을 전제하여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각각 다른 국가의 역사책이 서로 모순된 상태에 있을지라도 모든 역사책의 진실성을 의심하지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당신이 역사를 믿는다면, 세상의창조와 창조주(, 하느님)를 몇가지 모순된 상태에 있을지라도 의심하지 않고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성적인 방법을 통한 창조주의 추론

이러한 것 외에도 자연을 살펴보는이성적인 방법을 통해 창조주를 추론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매우 정교하고도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우리는 인위적이다 라는 것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고학이나 외계인의존재를 탐사할 때에도 사용되는 틀입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면 그러한 것에 대해 아무런 근거 없이 자연은 예외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이러한 것은 수학과 같은 것을 들어 수학은 복잡하지만 누군가가 설계하지 않았다는 방식으로 단어를 치환하여 논의를 피하고자 하거나 자기 경험 상에서 경험된 것이 아님으로 부인할 수 있다는 방식으로 대화를 전개시켜 나갑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매우 잘못된 개념입니다.

먼저 우주의 시작 시점이 빅뱅이라는 시점에서 스스로 있었다라는 것을 심사숙고해봅시다. 빅뱅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개념은 일종의 현재를 통한 과거의 추론일 뿐이며, 사실 그것이 실제로 그러했는가? 라는 것은 단지 우리의 몇 가지 믿음을 바탕으로 한 현재를 통한 과거의 추론을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가령 그러한 믿음의 가장 근간이되는 토대는 자기 경험을 토대로 한 추론에 의한것입니다. 나의 오늘은 어제와 연속된다는 자신의 경험에의해 만들어진 명제인 과거와 오늘은 영속된다는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공존하는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의 과거의 삶의 과거 이상을본 바가 없기 때문에 실제로 그것이 사실인지는 단지 우리의 경험 밖에 놓여있습니다. 사실 역사가 기록되기도 전의 어느 시점에 있어 우주가 만들어졌는데, 사람들이 그러한 것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화석과 우주적인 증거가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역사 이전의 어느시점에도 우주는 스스로 있을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단지 그것을 그렇게 몇 가지 가정적인 믿음 하에서 그것을 그렇게 생각하기에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에 있어서 우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논증을 확장하여, “모든 사람이 인식하기 전에도 과거와 현실은 연속되도록 존재하였다.”라는것에쉽사리 확장할 수 있듯이 우리는 창조주에 관하여서도 확장에 큰 문제를 가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경험 상 정교한 것은 단지 그냥 모여서 만들어지지 않고, 어떤 우리의 영적인 무엇인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모든 정교한것은 점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빅뱅이나 진화론의 이론을 추론해내듯이 창조주를 추론해낼 수 있습니다.

 *인과관계에 의한 증명방법

이제 인과관계에 의한 추론을 확장해봅시다. 세상에 있는 것은 원인과 결과가 있는 일대일 대응을 따르는 것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것과 일대일 대응을 벗어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깐 어떠한 존재를 놓고 보았을 때 전의 과거에 A 사건이 발생하면 미래에 반드시 B의 사건이 일어나는 것과 전의 과거에 A 사건이 발생했는데, 미래에 반드시 B의 사건이 발생하지 않고, 수 없이 많은 b1,B2,B3,B4,B5,b6,b7,b8의 사건이 발생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이다 아니다의 관계에 있음으로 이 둘 사이는 서로 중간 것이 없는 것일 것입니다. 인과관계를 따르는 것은 대표적으로 물리 법칙에 의한 물질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면 인과관계를 따르지 않는 것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인간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물질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인간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갖게 끔하는 기본 요소를 생각해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세상의 최초로 돌아가보면 물질들은 모두 인과관계를 따르는데, 물질에는 우리가 알기에는 다른 물질을 만들어내는 속성이 없음으로 이러한 물질이 만들어내는 인과관게가 없음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무가 있은 후에 만약 이 세상이 그대로 나온다면 무가 인과관계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무가 있은 후에 이 세상이 생겨나지 않을 것임으로 무가 있은 후에 인과관계를 생각해낼 필요성이 있던가, 무가 있은 후에 영이 있었고, 영과 같은 존재(인과관계를 따르지 않는 창의적인 존재)에 의해서 이 세상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과관계를 생각해낼 필요가 없었다라고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다시 이러한 세상이 될 어떠한 필연성을 갖고 있지 않다면 이 세상은 창조되었다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다시 이러한 세상이 되어서 종교가 일정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다시 창조주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무가 있은 후에 있는 인과관계는 하느님과 같은 영과 같은 존재에 의해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 탄생의 태초 계획성에 대하여.

-생명체의발생과 진화를 구분하는 것은 인위적인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은 인간의 정신 작용이 창조주를 도출해낸다라는 것이고, 인과관계에 의해 이 세상이 탄생되지 않고, 영과 같은 존재인 하느님에 의해 탄생되었다라고 살펴보았다면 이제 다음은 인과관게에 의해 필연적으로 무에서 이 세상이 탄생되었다면 그러한 세상에서 인간의 탄생이 우연적이지 않다는 것을 설득하고자 합니다. 생물의 역사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내용은 지적설계론(개별창조론)과 진화론이 존재합니다. 진화론의 오류에 관하여서는 타 서적들을 통해서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지적설계론 에 있어서의 주요한 주장은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과 지적 존재가 만든 것에 대해 인위적이라고 판단하는 인식 필터입니다. 지적 존재가 만든 것에 대해 인위적이라고 판단하는 인식 필터는 고고학이나 태양계 외의지적 생명체의 존재를 판단하는데있어 주로 사용됩니다. 생명체를 보면 그 행동양식이 우리가 인위적으로만든 로봇으로 묘사될 정도로 정교성을 띄고 있으며, 그럼으로 하여 이것이 인위적인 지적 존재에 의해창조된 것이라고 주장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 진화론은 화석이라는 실증적인근거와 화석에 놓여있는 생명체와 실제 생명체 간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합니다. 생명체는 최초의세포에서다른 세포로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화론은 진화 과정을설명하기 위해서 자연 선택론을 주장하는데, 자연 선택 론은 다음과 같은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집단 내의개체는 변이가 일어난다.

2.개체 내의 변이의 일부는 자손에게 전달된다.

3.생물의집단은 생존 가능한 수보다 많은 자손을 생산한다.

4.생존과 생식은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변이가 일어날 때에 신 다윈 설은 유전자에 의해 돌연변이가발생하며, 이러한 돌연변이는 우연적으로 발생한다고 여겨집니다. 여기에서의 우연성이란 결과의 비 보장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진화론은 이러한 결과가 어떠한 특정한 생존 가능한 문제로의 보장을 담보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가 격리된 환경에 의해 생명이 선택되며, 그러한 결과로 인해 점진적으로 누진되어 생명이 진화한다고 주장합니다.

생명은 결과가 비 보장된 돌연변이와같은 것이 누적된 것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생명체의 탄생은 아무리 정교하더라도 우연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일반적으로 유물론과 같이 통용되어 주장됩니다. 그럼으로 하여 환경과 생명은 일종의 동질성을 띄게 되고, 생명의 생존은 생명 그 자체의 적응에 관련된 이동과 환경 개척과 같은 것들은 박탈되고 오직 환경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렇게 독립적으로 늘 진화하기 위해서는 갈라파고스 섬에서처럼 일종의 고립이 필요하지만 진화론에 있어서 각각의종에 관하여 진화를 논할 때 그 과정을 어떠한 유전자가 존재했고, 그 유전자가 어떠한 환경을 만나서어떠한 고립상황에서 각각 진화되었는지에 관하여 정교하게 논의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단지 화석의 나열을통해해결하기 때문에 고립과 같은 점은 일반적으로 생각되어 지지 않습니다. 특히 동물체에 있어 생명체는이동이가능하기 때문에 환경은 생명을 결정하는 요소로서 작용하지 않고, 오히려 생명체가 적합한 환경을 찾아가는경우가 상당합니다.

그런데 이 논의에서 빠진 것은생명의 발생과 진화의 구분은 사람이 한 인위적인 구분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은 단지 생명 그 스스로의모습을 갖춰있는 것 뿐인데, 사람이 인위적으로 종을 구분하고, 어떠한것은 발생이다. 어떠한 것은 진화다 라고 이름을 붙인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DNA 몇 개를 움직이는 것이 생명 전체의 모습을 갖추는데 필요한 분자의 숫자를 움직이는 것 보다 훨씬 작으며따라서 발생이 무언가에 의해 생명 전체의 모습을 갖추는 것이 매우 조직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면 DNA를몇 개 움직이는 것 또한 무언가에 의해 조직적으로 움직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발생이 인위적인필터에 의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도록 움직여질 수 있듯이 책에 비견되는 DnA 또한 인위적인 필터에의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일 수 있으며, 모든 생물은 마치 발생하듯이 진화된 것일 수 있는 것입니다. 처음의 하느님이 만들어놓으신 그대로 모든 생물들은 그 모습 그대로 나오게 된 것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에서 제시된 진화론, 지적 설계론, 개별 창조론 중에서 우연적으로 인간의 탄생을 서술하는것은 없음으로 태초부터 인간의 탄생이 처음의 우주가 시작될때부터 계획되어졌음이 증명됩니다. 또한 최초에창조주의 증거로서 인간에게 있는 창조주를 인식하는 조건이있고, 인식되고 있음과 다시 창조주를 논리적으로추론할 수 있도록 인간이 되어져 있음을 통하여 창조주를인식하는 것이 계획되어졌음이 증명됩니다. 모든일은 인과관계에 의해 형성되며, 세상에 작은 우연은 있어도 큰 시대를 걸친 우연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세계는 창조되었으며, 인간은 창조된 것이 분명합니다

더 쉽게 설명하자면 인간이 탄생하기전에는 오직 인과관계 요인 밖에 없음으로 인간이 탄생되는 것은 필연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이 탄생한이후에야 비로서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거짓말이 탄생함으로 인간이 작화적으로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어떠한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것을 믿을만한하느님을 믿게끔 하는데에 충분한 근거만이 있으면 하느님을 믿는 것이 태초에 빅뱅이 일어난 시점에서부터 정해져 있음으로 하느님이 "인간이 하느님을 생각하도록 했다"는 것이 옳다는것입니다.

==요약 그림 : 도미노 처럼 맨 처음에 하느님에서 시작하여 창의성이 나오기전까지는 우연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인과적인 관계 혹은 하느님 한 존재에 의해 움직여지기 때문에 인간이 탄생되는 것은 필연이며, 다시 인간이 탄생한 이후에 신경적인 문제나 기타 심리적인 문제에 의해 하느님의 개념이 탄생하고, 종교를 믿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그러함으로 역사상 종교를 믿어왔다고 생각되어지기 때문에 인간이 하느님을 유니콘과 같이 상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도록 하였다는 것이 맞다고 판단됩니다. 인과를 벗어나서 행동할 수 있는 존재는 자유 의지자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 물리적 인과관계--> 생물적 인과관계(창의성이 없음으로 우연에 개입할 수 있는 존재가 존재하지 않음, 여기에서의 우연이 없음이란 다시 이 세상을 만들었을 경우에 동일한 인간이 탄생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권의1등은 1등이있을 경우에만 당첨되기 때문입니다.) --> 인간의 탄생(자유의지자의 탄생)---> 신경 신학(하느님을 인간이 상상으로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창조주를 알게 됩니다. 그 명백한 증거는 사람의 상당수가 오랜기간 하느님을실존한 대상으로 알아왔다는 데 있습니다.)


*인과관계의 두가지 경우



*필연적으로 생각하게 된 하느님


*그냥 있는 세상 혹은 무에서 어떤 인과를 따르는 물질에서 인과되어 나온 세상에서 왜 필연적으로 하느님을 생각하게 되었는가?


 반증 질문 : 그냥 존재하게 된 세상, 인과관계에 의해서 무 다음에 어떠한 물질이 인과하여 만들어진 세상이라면 왜 필연적으로 탄생한 인간이 하느님을믿도록 하는 근간을 갖고 있으며, 그러한 근간에 의해 하느님을 인식하게 되는가? 하느님 대신 그냥 있다라는 개념을 대입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하느님을 믿도록 하는 근간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대비하여 그러한 근간을 갖추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종교에 반하여 우연을 우선시하는 대답일 뿐일 수 있습니다. 그냥 있다라는 세상을 믿도록 하는 근간은 존재하지 않는 반면에 하느님을 믿도록 하는 근간은 있다는 점을 상기하여야 하며 따라서 그 반대의 질문은 타당하지 않다고생각됩니다. 또한 그 반대의 질문이 타당한 경우에도 여전히 하느님을 믿도록 하는 근간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하느님을 믿을 수 있음으로 역반증이 되지 않는 이상 하느님을 믿는 믿음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작화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유니콘, 드라큘라, 신을 먹는 늑대등)도 사람이 생각해놓았으니깐 있느냐라는 주장은 이 글을 잘못읽은 주장이라고 생각됩니다. 작화를 검증하는 방법을 말해놓았는데, 하느님은 작화를 검증하는 방법을 통과한 주장이며, 더욱이 작화에 의해 창의적으로 만들어진 주장과 계기에 의해 만들어진 주장은 서로 다르다고 판단됩니다. 또한 계기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도 서로가 다른데, 이 글에 반대하는 어떠한 사람이 신을 먹는 늑대의 이야기를 지어서 신을 먹는 늑대도 있느냐라고 물었다고 합시다. 그 경우에 신을 먹는 늑대라는 존재는 계기에 의해서 생각하게 된 존재이지만 그 존재를 생각해낸 목적이 계기를 설명하는 것이고, 하느님이라는 존재는 이러한 존재를 생각해낸 목적이 계기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외계 생명체라는 것을 판단해내는 계기가 물이 있는 행성이 있다에서 생각되어지는 것처럼 일반원리에서 계기가 추론되기 때문에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경험하는 종교적인 체험에서 추론되어지던가, 이 세상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라고 생각되는 인식필터에서 추론되던가, 이 세상에서 점진적이지 않은 것은 없기 때문에 이 세상도 점진적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와 같은 유추추론에서 나오는 것이기 떄문에 하느님의 존재는 일반적인 계기에 의해서 생각되어진 것이지, 존재를 만들어내는 목적이 계기가 되는 경우와 분명히 다르며, 또한 명백한 계기가 연결되지 않게 만들어지는 작화에 의해 만들어지는 혹은 착각에 의해 만들어지는 존재들과는 틀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묻는 것 자체가 유도 질문이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질문에 대한 답변은 항상 질문에 귀속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냥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왜 하느님을 알게 되었는가?"이 질문은 다른 식으로 질문을 하여 다른 답변을 할 수가 없는 질문입니다. 물론 비아냥은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답변이 가려진 것에 대해 질문을 함으로써 작화성에 의해 지어낸 다른 것들을 대입하여 비아냥을 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작화성이 되는 것에 대해 동기 요인,권위 등의 방법등으로 검증하는 방법을 말하였고, 그것을 통과하였음으로 하느님은 그러한 작화성의 비아냥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하느님이 증명되었음을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이 모든 논의 보다 중요한 것은 생각할 것인가, 생각하지 않을 것인가?라고 생각합니다. 받아들일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에 대해 생각을 한다면 결국 하느님의 존재는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로 귀속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의 존재가 말장난 이상으로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를 생각해본다면 결론은 정의가 항상적으로 이기도록 보증되어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존속하는가? 정의에 부합하는 삶이 좋은 삶이 확실한 것인가? 와 같은 희망으로 귀속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의에 대한 희망을 끊임없이 가질 것인가? 가지지 말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서 가진다라고 대답할 때에 희망의 근거로서 우리는 하느님을 언급할 수 있으며, 그 이상으로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논의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논의에서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데에 있어서 결격이 될만한 근거는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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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영혼에 관하여



술은 영혼의 언어이다. – 헤르만헤세



- 영혼의 개념에 관한 잘못된 이해.

영혼의 개념은 오늘날 매우 희미하여 그 의미를 찾기가 힘듭니다. 그리하여 죽은 후에 남는 인간의 정신이라는 개념으로서 몰이해하여 자리잡혀 있습니다. 이러한 관념 하에서의 영혼은 곧잘 부정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정신이란 쉽게 신체적 영향을 받으며 박탈당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러한 점은 신체의 일부분인 뇌와 관련하여 더욱 더 강조됩니다. 다양한 뇌에 관련된 외상을 입은 환자들은 정신 상의 결여를 보이고, 각각의 외상환자들의 외상을 모아보면 뇌에 기인하지 않은 능력이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죽은 후에 남는 인간의 정신이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적 영혼의 개념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관찰로부터 나온 것으로, 이것은 근본적으로 기본 입자의 차이에 기반합니다. 영혼은 정신을 구성하는 일부분으로서 여겨지는 것으로, 인간의 정신 그 자체가 아니라고 하면 뇌 손상에 의한 기능 소실이 문제를 피할 수 있습니다.



*물질과 생명과 영혼의 구분에대해서.

영혼은 인간의 정신과 동일하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의식이라는 측면에서 동일하다고 볼 수 있지만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정신이란 뇌나 생체 환경의 조건에 영향을 쉽게 받습니다. 간단하게 우리는 동일한 시간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나이가 많이 든 사람은 단기간에 더 많은 정신활동을 할 수 없으며, 식사를 거르거나 하여도 우리의 시간은 점점 더 빨리 흘러갑니다. 또한 각각의 뇌의 외상은 우리의 정신적인 능력을 앗아갑니다. 가령 앞에서 논의한 후상부 두정엽에 이상이 생기면 사람은 물리적 공간에서 이동하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한 개인들에게 물어볼 경우 침대를 향해 다가갈때 뇌는 각도와 두께와 거리가 계속 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섭취하는 수 많은 화학물질들 또한 정신을 각성시키거나, 잠이 오게 하는 등의 다양한 변화를 일으킵니다. 정신과학에서 뇌의손상을 입은 사람들을 조사하여 각각의 뇌의 부위가 하는 역할이 무엇인지를 점검한 결과 오감과 감정, 성욕등의 욕구 그리고 분위기 등을 파악하는 능력, 거리의조절 등의 신체 활동, 기억, 사고의 안정성, 사고의 제약성 등 거의 우리가 사고 할 수 있다라는 그 자체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부분에서 이상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 파악될 정도로 광범위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볼 때 우리의 정신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변질되지 않는 기본요소라기 보다는 기본요소를 바탕으로 한 일종의 결과물로 판단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온당하지 않은 것이 의식이라는 주체를 중심으로 여전히 잠을 자거나 죽지 않는 이상 의식은 어떠한 문제에 있어서도 실존함으로 의식이 곧 영혼의 중심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물질로 설명할 수 없는 요인을 찾아내어 새로운 기본요소가 존재할 수 있고, 그것을영혼이라고 부르기로 합니다. 즉 이것은 쉽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블럭 쌓기를 하는데, 벽돌이 입자라고 하고, 그 입자의 구조물들이 무언가라면 노란 벽돌로만 쌓으면 노란 색의 건물이 생기고, 빨간 벽돌이 하나 들어있어야만 빨간 벽돌이 들어있는 건물이 들어갈 수 있음으로 빨간 벽돌만 발견하면 우리는 두 구조물이 동일한 기본 입자로 만들어지지 않고, 서로 다른 입자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인간과 다른 모든 입자들의 구조물인 생명 물질과의 차이점을 비교해서 특이성을 찾으면 그것을 바탕으로 인간의 영혼을 논의해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의식이 창발적으로 노란 벽돌이 모여서 시스템적인 움직임을 통하여 마치 빨간 벽돌처럼 보인다는 구조적인 문제로 의견을 제시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견해는 원자론에 반대되는 내용으로 마치 FE가 없는데, FE가 있는 반응이 섞여서 나온 것이다와 같은 그 메커니즘을 분명히 입증해야만 하는 주장이고, 모든 화학 체계를 부정하는 주장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아야 하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 메커니즘을 분명히 한다고 할 때에 있어서도 출발되는 기본 입자들이 있어야 하는데, 창의성은 인과관계를 벗어난 대응(원인 - 결과를 벗어난 대응)임으로 인과관계로 묶여 있는 뉴턴의 제 3법칙을 따르는 물질로는 설명이 안되는 것이 틀림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창의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체와 물질간의 연관관계를 들어서 인과관계에 의해 움직인다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 인과관계가 작용되지 않는 시간이라는 것이 있어서, 즉 항상 인과관계 속에 놓여 있지 않기 떄문에 신체와 그렇지 않은 부분의 작용이 있는 와중에도 인간은 인과관계에서 벗어난 시간동안 창의적인 활동을 하기 때문에 인과관계의 대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다른 무엇에도없는 인간만의 독특한 점 찾아내기.

인간은 다른 생명들에 비해 매우 독특합니다. 혹자는 이것이 인간의 지능이 다른 생명체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생명과 인간 모두 지능이 있음으로 따라서 인간과 생명은 동일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의 범위를 벗어납니다. 지능이라는것은 구체적인 단어가 아니라 추상적인 단어로, 앞에서 이성이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이라면, 지능이라는 것은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각각의 생명체는 모두 생존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음으로 생존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생존한 모든 생명체는 생존에 적합한 지능을 가진 것으로 역추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몇 몇 생명체의 경우 생존이라는 목적에 대하여 올바른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을 찾아내지못하는 것을 바탕으로 각 생명체의 지능의 여부를 평가하는데, 이러한것은 종종 생물의 인식 상의 차이를인지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적외선으로 사물을 보는 종과 가시광선으로 사물을보는 종은 서로 다른 시각으로 보지만 가시광선으로 볼 수 있는 무언가로 지능을 평가하는 실험을 짜서 평가할 경우 적외선으로 사물을 보는 종의 지능은 가시광선으로 사물을 보는 종에 비해 떨어지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구체적인 행위들의 모음을 추상화한 단어를 통해서만 평가하고자 합니다. 지능처럼 모든 생명에게 있을 수 밖에 없는 구체적인 행위들의 모음을 추상화한 단어는 가급적 배제하고,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구체적인 행위들의 모음을 추상화한 단어를찾아 그 독특함의 원천을 찾아내어야 우리는 인간에게생명에게는 없는 독특한 기본요소가 있음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행위를 이미 이름 붙여 부르는 데, 그것은바로 창의성입니다.

*인간은 과연 창조하는가?(프로그램이 만들어내는 것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창의적이지 않다.)

인간은 스스로가 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 또한 생명체처럼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갖고 있던 프로그램에 따라 반응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만약 로봇을 블라인드 테스트로 그 사람이 로봇인지 아닌지 가르쳐 주었을 때사람이 찾아낼 수 없다면 우리는 프로그램에따른 반응에 의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로봇은 프로그램에 따라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견해는 프로그램이 반응을 하려면 반드시 입력어가 필요하다는 것을 간과합니다. 가령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우리가 대화를 할 때에 대화 상대방이 반드시 필요해야 해당로봇은 인간처럼 반응할 뿐, 별도로 사람들과 떨어져서 조용한 가운데에서 스스로 사고를 하여 반응을 나타내지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물도 사람도 없는 조용한 공간으로 이동하여 한번 스스로를 돌아봅시다. 우리는그곳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없습니까? 우리가 만약 그곳에서도 고요한 가운데에서도 반응을 끊임없이하고 있다면 우리는 앞에서의 프로그램이 반응하는 것에서 벗어납니다. 하얀백지 속의 독방 감옥에서 인간이그림을 백지에 그릴 수 있는 것은 인간이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물은 끊임없이 랜덤한반복행동을 하지만 인간은 백지 속에 그림을 그리고, 그 안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며, 그것은 전적으로 현실과 동떨어진 무엇인가를 만듭니다. 인간은 현재세계와흡사한 가상현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상현실은 거의 대부분이 폐쇄된 사무실에서일어나며, 그러한 가상현실을 만들기 위한 자료들은 대체로 현실과 관련된 것을 모방한 것이거나, 누군가가 만들어낸 이야기에 기인하거나, 혹은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냅니다. 여기에는 시스템이 정한 내부규칙 상의 충돌이 없는 한 무엇이든 만들 수 있습니다.

또한 앞의 블라인드 테스트를 넘어서서 우리가 백지 속에 그림을 그리는 것 자체도 프로그램처럼 짜여져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운명이며, 그정해진 바에 따라 우리는 움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도 착각이고, 자기가 가는 삶도 착각이고, 전부 정해진 바에따라 착각하며 사는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전적인 삶의 무의미와 세상의 거짓됨을 주장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성적 논증의 범위를 벗어납니다. 이성적 논증은 경험을 반드시 참으로 받아들이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모든 경험을 단지 아무 이유 없이 착각이라고 주장할수 있습니다. 또한 선별적으로 무언가의 경험을 착각과 거짓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럴 경우 이성적 논증은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앞에서도말했듯이 이성적 논증이란 주어진 가설을 바탕으로 근거를 들어 부정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진실로 파악하고자 하는 무언가에 대해 알아가는 방법인데, 경험에 의한 근거 자체를 부정할 경우 어떠한 것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혼에 관한 추가적인 논의.

인간이 동물과 차이가 나는 것은 단지 창조력 뿐 만이 아닙니다. 인간은 특히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학습을 할 수가 있습니다. 듣기로 인간의 뇌의 체계는 다른 동물들과 달리매우 특이하게 되어 있으며, 몇몇 경우 그것은 잘 알지 못하지만 이중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가령 한쪽에서 뉴런이 신경정보를 전달하는 와중에 다시 그 충동에 반대되는 뉴런이 발화하여 그러한 신경 정보를차단하는충돌하는 형태를 띄고 있으며, 기억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도 이중 기억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간단하게 이중적인 측면을 띄는 것은 하나의 원천이 아니라 두 개의 원천을 바탕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라고 결론을낼수 있지만 그것보다 더 자세히 앞에서의 영혼에서의 창조와 관련된 다른 것들을 생각해봅시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본능에서 벗어난 충돌되는 행동의 결정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창조력과 긴밀한 관계를 지닙니다. 왜냐하면 창조라는것은 애당초 무언가 정해진 본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의지를 바탕으로 해야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즉 본능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는 시간이라는 것이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본능에 의해서만 행동한다면 우리는 창조를 할 만한 여지가 없어지게 되며, 다시 창조에 의해서만 행동하게 된다면 본능이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의지와 창의적 능력은 일종의 같이 있어야만 가능한 무엇이 되는 것 입니다. 또한 본능은 특정 상황에서 발동하는 무엇이고 입력 값에 의해 반응하는 종류의 것인데, 그것은 일례로 들면 남성의 경우 시각적으로 여성과 비슷한 것을 보면 성욕이 들고, 음식과 비슷한 것을 보면 식욕이 들며, 얼굴에 정해진 황금 비율에따라개인에 대한 호감도 결정된다는 것 등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시시 때때로 들기 시작하면 그개인이자신에 대해 만들어놓은 일정한 개인의 자아상을 끊임없이 위협하게 됩니다. 즉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조차 달성하기가 힘들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범위 조차 확보하지 못하는 삶에 있어 창조를 위해서는 반드시창조를 할 만한 시간을 확보하는 능력이 있지 않으면 안되며, 본능과 창조를 할 만한 시간을 만들기위한것을 조절하기 위한 의지가 반드시 필요로 합니다. 정해진 대로의 삶이 아니라 스스로가 원하는 삶, 스스로를 창조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의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창조를 하는 존재인 의식, 자기 자아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봅시다. 나라는 현재의 의식은 창조나 의지라는 것과 별개가 될 수가 있는가?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가 의지를 행사하여 무엇을 하는 것으로 나에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나는 의지를 행사하여 창조하고, 통제합니다. 사실 통제할 수 있음으로 하여 나는 본능으로부터 벗어나 혹은 본능이 간섭하지 않는 동안 창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에 대한 기억은 나와 별개의 존재가 될 수 있는가? 그것도 아닐 것입니다. 자아에 대한 기억은 나를 구성하는 일부이기 때문에 나에 대한 기억은 나와 높은 관련성을 가질 것입니다. 또한 자아에 대한 기억 외에도 다른 기억은 창조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성은 누적이 되어야만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누적을 담당하는 기억은 창조성과 관련이 깊게 있습니다.

자아, 의지, 창의력, 기억은 서로 깊은 관련성을 가지며 따라서 앞에서 논의한 우리에게 존재하는 영혼의 각각 다른 측면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각각 다른 이름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성찰하는 과정에서 이름을 붙인것이며, 이 모든 것이 같이 있을 때에야 비로서 창조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창의력이 계속 이어지기 위해서는 어떠한 근간을 필요로 하며 그 근간이 바로 기억이기 때문에 기억과 영혼이 연관이 있으며, 창의의 주체가 필요하기 떄문에 의식과 영혼이 연관이 있으며, 본능과 창의할 시간을 조율하기 위해서 창의와 자유의지가 연관이 있음으로 영혼을 논의할 때에있어 창의력, 기억, 의지, 자아(의식)는 서로 연관성을 반드시 띄게 되는것입니다.

그림 4. 각각의 관련성.


*인간의 자유의지가 없다는주장에 대하여

사람의 자유의지가 없다는 주장은 과잉 된 주장이라고 판단됩니다. 실제 많은 근거를 살펴본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인간은 스스로 원하는 것을 완벽히 달성할 만큼 자유의지가 있진 않습니다. 자유 의지는 각 개인마다 상황마다크기가 다를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런 경우 다음과 같은 형태를 띌 수 있습니다. 모든 신체 요소가 그렇듯이 신체의 상태나 훈련에 의해 강해집니다. 또한신체의 파괴에 의해서 의지가 나약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신체가 파괴된 경우에도 약간의자유의지라도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유 의지를 인식하지 못하면 인간은 자신을 훈련할 수 없기 때문에항상 나약한 의지만을 갖습니다.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어서 자유의지가 항상 적으로 존재합니다. 훈련 방법은 인간에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하게 계획화하고 끊임없이 그 계획에 맞춰 충돌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원하는 방법을 달성하기 위해 신체의 회복기간 동안 약간씩 쉬어가면서 고통을참고 노력하면 의지를 키울수 있습니다. 뇌는 가소성이 있기 때문에 의지를 키우는 것은 문제 없습니다.

특히 범죄와 관련하여 인간의 자유의지는 한도 없이 존재합니다. 보통 의지란 것은 무언가를 하는데 들어가게 되는데, 범죄 행위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지가 없는 정상 상태라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하기 싫어하는 상태입니다. 의지와 벗어나서 하게끔 하는 무언가는 보통 충동이라고 표현합니다. 충동이라는것은“고통 혹은 환상적 기쁨으로 표현되는 어떠한 충동을 추동 하는 느낌”과 함께 어떤 욕망의 구현으로서 표현됩니다.충동의 강약은 고통 혹은 환상적 기쁨으로 표현되는 어떠한 느낌이 얼마나 강한가?로 알 수가있으며, 가령 게임과 관련된 충동의 경우, 게임과 관련된이미지나 그러한 무언가가 들면서 충동과 관련된 느낌이 들게 됩니다.

저질러지는범죄의 경우 그 전에 범죄와 관련된 충동이 있을 수 있는데, 우발적이지 않은 경우에는 대체적으로 범죄충동을 의지적으로 컨트롤 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범죄 충동은 범죄와 관련된 충동으로 나타나지 않고, 욕구와관련된 충동으로 나타납니다. 이 때에 있어 욕구를 그러한방식으로 충족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라는 개인의자기 인식이 있다면 충동이 개인을 고문하기 시작합니다. 즉 이 경우에도 개인은 내적 고통을 겪음으로서선택할 수 있습니다. 충동을 쉽게 이기기 위해서는 평소 운동과 충분한 영양섭취, 휴식을 통해 신체를 건강히 하고, 술과 같은 자신의 의지력을 나약하게하는 행위와 멀어지면 됩니다. 또한 신체가 건강하지 않더라도 충동이 일어나는 행동에 걸리는 시간이 길게되고 행동이 더 복잡해지게 되면 의지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됩니다. 가령 자물쇠가 존재하는 것과자물쇠가 없는 것은 범죄 충동에 의해 억제 여부가 틀려지게 됩니다. 범죄는 이렇게의지와 그 전에 준비하는무언가와 상관 있기 때문에 처벌에 있어서 우발적, 의도적 범죄를 차등합니다. 그리고 고도의 자물쇠가 있을 경우에 행한 범죄는 특별히 처벌합니다. 또한습관이 된 것과 습관이 되지 않은 것에는 의지가 서로 다르게 적용되게 됩니다. 따라서 초범인지, 재범인지는 교화 기간에 있어서 틀려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습관은자기 무의식에 의해서 끊임없이 교정을 받게 됩니다. 잘못된 것에 반대되는 긍정적인 자기 인식이 없다면행해지는 충동에 반대하여 싸움이 일어나게 되는 충동과 의지의 투쟁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럼으로 쉽게습관화된 것이 행해지게 됩니다. 한번 범죄를 일으킨 사람이 자신을 단지 범죄자라고 낙인 찍게 되면 범죄의충동에대해 쉽게 허락하게 되어 범죄를 계속해서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미 이렇게 범죄를 저지른사람은다시 긍정적인 자기 인식을 갖기에 이때까지 한 일에 대해 자괴감을 느끼게 됨으로 돌이키기가 힘든 것입니다. 또한잘못된 것을 개선시키는 것에 대해 사고할 때에도 이유를 환경적인 이유보다 개인적인 이유를 모두 생각하고, 먼저개인적인 이유를 정확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스트레스를 받아서 술을 마신다. 라고 할 경우 스트레스를 해소할 다른 방법을 생각한다면 술을 마시지 않게 될 수있는 것입니다. 환경적인 이유를 먼저 생각한다면 환경에 대해 수동적으로 행동할 수 밖에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반대의 이론을 이와 같은 관점에서 살펴본 다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것을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죽은 뒤에 어떻게될 것인가?

인간이 죽은 뒤에 어떻게 될 것인가?에대한 답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답변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무가 된다는 것이고, 하나는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가 된다는 입장을 대변하기위해서 우리는 근본적으로 다음의 답변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나란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된다는 현상적 지식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죽으면 물질 체(유기물)이됩니다. 생물은 기능하지 않으며,물질은 그대로 존재합니다. 다른 모든 생물의 죽음과 동일하게 인간은 죽은 생물체가 되는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죽은 뒤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묻는 것은 이상하기 짝이없습니다.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금 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라는 것이 인간이라는 어떤 통합체적인 무엇이라면 결코 나는 존재하지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구성하는 많은 것들은 정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다시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란 정말 무엇인가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나라는 것이 의식임을 말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우리의 의식 외의 많은 부분들은 제약되거나 파괴되는 양상을 볼 수 있지만 그 외의 것에서 우리는 그러한것들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의식을 중심으로 나라는 것의 존속을 말할 것입니다.

의식이라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기본 단위로서 설명할 수 없는 무엇입니다. 다른 존재에 의식이 있는지 우리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앞에서살펴보았듯이 나라는 주체가 창조를 하기 때문에 의식이라는 것은 영혼과 동질적으로 놓여있을 것입니다. 사실우리는 나라는 것을 말을 함으로 알지, 사실 나라는 것 자체는 의식이라는 별개로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내가 있다는 것을 내가 인식하는 것 뿐입니다. 나라는 것이인간의구성요소로서의 의지를 행사하는 의식과 창조성, 그리고 인간 만의 독특한 학습을 가능하게 하는 기억으로구성된 영혼이라면 나는 죽은 뒤에도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체의 모든 감각은 부분적으로정지된 사람이 있음으로 죽은 이후에는 아무 감각도 느낄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하여

오늘날 신체의 잃어버린 감각은 모두 회복되는 것이 확인 됩니다. 따라서죽은 이후에 모든 감각이 회복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공식적인 신앙 고백인 사도 신경은 예표로서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것이 우리에게 전하는 육신의 부활을 믿습니다. 그럼으로 그것은 사후에 모든 감각이 상실된 상태의 부활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부활을 말하는 것임으로 기독교가 믿는 부활이 뜻하는 죽음 이후가 모든 감각이 상실된 상태라는비판은 적당하지 않습니다.



종전까지는 종교의 근간이 되는 하느님과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을 논의하였다면 이후에의 논의는 이러한것을 근간으로 하는 종교인 기독교에 관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기독교는 성경의 신약에 나오는 예수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믿는 종교입니다. 최초에는 그 기록이 정확한 기록인가?를 검증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기적에 관하여 논할 것입니다.

이 책은 기독교의 변증과 관련된 책이고, 제가 어떠한 신적인 존재가 아니기때문에 내용을 실질적으로 담보할 수 없습니다. 예시로 나온 내용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글입니다. 틀릴수가 있습니다. 스스로가 생각하여 “무엇이 옳은가?”를 상고하시는것이 올바를 것으로 생각합니다. 공신적인 기독교 교리의 교육 기관은 교회입니다. 부분적인 해석입니다. 따라서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은 본인이 스스로판단하시거나 영적인존재의 인도를 받는 권위 있는 교회의 의견을 참고(신약 성경 200주년 주해본을 참조하세요.)하시기 바랍니다. 글을 쓴 사람에게는 조언 외의 아무런 의도와 책임도 없음을 밝힙니다. 믿음을 가지신다면 권위 있는 교회를 도와서 다른 사람들이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도움을주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출석을 권장합니다.



3-1 그리스도의 실존과 그 증명.

우리는 먼저 성경이 과연 올바른 기록인가를 먼저 따질 것입니다. 그뒤에 그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기독교에서 믿음이 되는 그리스도의 말을 해석하고, 그 말을 믿는 신앙이무엇인가?를 상고할 것입니다. 역사적 자료의 확실성을 검토할 때에는 다음의 세 가지 질문들을 고려해야 합니다.

"정말 관련 있는 사람이 썻는가?","책이 쓰인 이래 제대로 필사되어 왔는가?","책에 기록된 서술이 역사적으로 틀림이 없는가?"



*기록의 정확성- 정말 관련 있는 사람들이 썻는가?(기독교는참되다 책 참조)

신약성서의 어떤 저자들은 자신이 목격자의 진술을 기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베드로는 종종 그는 자신의 설교와 글에서 자신이 예수의 증인이라고 주장합니다. (행 2:32, 3:15,, 5:32, 10:39-42 벧전 5:1,벧후 1:16-18,벧후 1:16) 요한 복음서의 저자 또한 이 글이 목격자의 증언에 뒷받침하고 있음을 주장한다.(요 19:35, 요 21:24) 누가는 목격자들과 자신이 접촉하였다고 말한다(눅 1:1-2) 저자에 대한 증거를 찾아보면 A.D110년까지 첫 복음서가 인용되었기 때문에 마태의 생전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그나티우스(aD110),폴리캅(aD110),바나바서신(AD130),순교자 저스틴(AD140),교리서 (AD150)모두가 마태오 복음서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마태가 마태복음을 저술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2개의 진술이 있습니다. 파피아스(AD140)는 "마태가 히브리어로 신의 말씀을 기록했다"고 말했습니다. AD180이레니우스 "마태 또한 그들의 언어로 기록된 복음서를 펴냈다"라고 주장합니다. 제2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해설자인 마가임이 확인 되었습니다. 누가는 바울의 동역자요, 의사임이 확인되는 저자입니다. 요한 복음의 저술자는 AD125년경에 필사되었고, 서기 110년에는 직접인용은 하지 않았지만 네번쨰 복음서에 의존하는 듯한 암시를 줌으로 요한이 직접집필했을 가능성을 우리에게 줍니다.

즉 목격자 스스로가 목격한 것을 바탕으로 썼거나 그렇지 않다면 목격담을 듣고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내용을 저술하였는 것입니다.

*기록의 정확성 - 책에 쓰인 이래 제대로 필사되어 왔는가?

성경은 다른 역사적 기록에 비하여 필사에 따른 오탈 자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대의 기록은 현대처럼 복사기가 존재한 것이 아니라 손으로 직접 쓴 필사한 것이기 때문에 글에 있어 문제가발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 기록 중에 성경은 거의 최상의 상태로 보존되어 온 것이 고고학적으로확인됩니다. 다른 역사서와 비교해본다면 그 시대로부터 변경되지 않은 기독교의 성경은 많은 서구 역사서(헤로도토스의 역사 AD900,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AD1100, 요세푸스의 유대전쟁 AD900)보다 최초의 사본에 있어서 더 오래되었고, 사본의 숫자는 8, 5, 8개에 지나지 않는 역사책보다 훨씬 많습니다. 신약 성경은 사본만 5000개 이상의 사본이 존재하며, 각각의사본들은거의 AD 125년 경의 글이 쓰여진 시기에서 이른 시기에 발견되고 있으며, AD 96 – 400 년 사이에 신약 성서의 대부분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AD300년에서 350년의 완전한 사본까지 존재합니다. 구약의 사본 또한 1947년 3월에 모두 다시금 발견되었는데, 이 모든 것은 사본의 필사에 관련된 오류가 적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사본이 필사되면서 변경되었을 가능성은 현저히 적습니다. 우리가 신뢰하는 역사 기록과 그것을 비교해보면 기독교의 사본이 우리가 믿는 역사보다 더 견고함을 알 수 있습니다.

*기록의 정확성 - 역사적 정확성. 

역사적 자료의 신뢰성을 입증할 때 증인들의 정직성,증인들의 적합한 능력,여려명의 증인들,증언의 일관성,외부의 확인 등을 그 기준으로 내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발견된 증거는 정직성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증언을 부정하기보다 죽음을 택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신약 성서는 조직적으로 잘 쓰인 책입니다. 저자들이 정신 착란을 일으키거나,스스로 또는 타인에 의해 속임을 당하거나, 환각 상태에 있었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누가복음의 경우에는 역사적 사가인 캐인스가 현대의 역사기술방시에 대한 최고 요소들의 요약을 누가 복음보다 더 잘 보여주는 안내서를 찾을 수 없다라고 말을 하였을 정도입니다. 신약 성서들의 이야기는 일관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1세기 외부의 증거가 그것을 뒷받침해줍니다. 고고학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절름 발이를 고쳐준(요 5:2)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내었습니다. 야곱의 우물은 나블루스라는 현대도시 내에 있습니다. 그 우물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하였다고 나온 그 연못입니다(요4:6) 예수그리스도가 기적을 행사했다던 가버나움에서도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로마 극장 폐허에서는 황제 티베리우스와 그 총독 빌라도의 이름이 발견되었습니다. 고고학은 성전 구역에 이방인을 들이지 못하라고 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사도 행전의 내용도 확인하였습니다. 1871년에 하나 발견되었고, 1938년에 또한 발견되었는데, "어떤 외국인도 성전 울타리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누구든지 잡히면 죽음을 보게 될 것이다." 는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알지 못하는 신"에 관한 마르스 언덕은 오늘날 방문할 수 있습니다. 페르가몬 재단 근처에서 알려지지 않은 신에게 기원하는 비문이 있었습니다. 누가가 데살로니가의 지배자들을 폴리타르크스라고 부른 것 또한 다섯개의 비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미국 신시네티에 있는 히브리신학교의 학장을 지낸 넬슨 글뤽은 "어떤 고고학적 발견도 성서에 언급된 것을 잘못된 것으로 뒤집은 적이 없다라고 말한다." 고고학적 자료 외에도 기독교인 저서가를 제외한 요세푸스,엘리에셀, 바빌로니아탈무드,타키투스,폴리니우스 에게서 그리스도는 다시 언급됩니다. 알렉산더대제의 경우 사후 300- 500년의 역사가들이 전한 것이며, 다른국가들의 역사서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으로 신약의 역사적 기록의 사실성은 보장된다고 여겨집니다. (기독교는 참되다 내용 중에서)



*복음서 내에서의 예수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이 일어날 수 있는 증거에 관하여

역사상의 기록으로 분명하게 적혀 있어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식에 비추어 볼 때에 옳지 않다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인데, 그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맥락을 벗어난 기적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가지는 오랜 기간 동안의 권위와 여전히 발생하는 공인된 기적들.

기독교는 2000년 동안이나 그것이 종교적 사실로서 입증되어 온 것이며, 역사상 문명에 커다란 영향을 준 믿음입니다. 이러한 것은 단순히그문자적 의미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톨릭 교회와 성령과 같은 신성으로서 체험적인 믿음이 뒷받침된 형태로서 존재해왔습니다. 가톨릭 교회 내에는 다른 종교와 달리 기적이 실질적으로 존재해왔으며,이러한기적들은사실적 맥락에 의해 뒷받침됩니다. 또한 성경 내에 있는 기적도 그러한 기적이 허무맹랑한 것만은아니라는것은 기적이 사라진 팔이 재생되는 것과 같은 기적이 아니라 눈이 떠진다던가, 앉은뱅이가 일어난다던가하는형태로 제약되어 있다는 것에서 확인됩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신성과 맞닿아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세의 기적도 맥락 성 측면에서 뒷받침 됩니다. 노예로 처한사람들이대규모로 잘 조직된 군대를가진 이집트인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기적적인 사건이 있지 않으면 안되며, 그것은바다가 갈라지고추격하던 군대를 몰살시킨 것과 같은 기적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달루페 에서출현한 성모의 기적도 누추한 원주민이 백인 위주의 정복자적인 고정관념을 불식시키기 위하여서는 그에 합당한 그들을 납득시킬 만한 기적이존재했을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으며, 파티마에 있어서도 어린 목동들이 사람을 그만큼 모으기 위해서는 또한그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러한 것들은 기독교가 가지는어떤 무언가가 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가 존재하였고, 그 능력이 기적적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으며, 그러한바탕 위에 기독교가 성립한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능력이 없는 사람의 말은 믿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은 능력이 없는 사람은 지적이지 못하거나자신의 말의 신뢰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그것은 그러한 믿음을 가능케 하는 능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의사와 과학자, 박사들의 말이라면 사람들은 믿습니다. 분명히 거기에는 착각이나 착오가 들어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능력을 신뢰하여 믿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떠한 지식적인 식별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설득할만한 능력을 그리스도는 갖고 있었고, 그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다시 신뢰가 거듭 연쇄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서 자체의 본질적인 요소인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파와 수난과 부활은 왜곡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약의 모순과 불립문자성에 관해서

성경의 신약은 서로 모순된다고 말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순은각기 다른 성경의저자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이야기 형식으로 솔직하게 짜 넣어 만들어진 것이며, 또한 이러한형식의 이야기는 상황에 따라 하나의 지식아래 말하는 여러 이야기가 불립문자 적으로 성립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핵심적인 것은 성경이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말해지는가? 하는것입니다. 그러한 견해를 바탕으로 성경을 바라보면 모순이 저절로 풀어지게 됩니다.

*하느님을 만나지 않고서도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이유.

사람이 밥을 먹는 것처럼 하느님도 어떠한 행동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그당연하게 생각하는 원리를 가지고, 하느님이 어떠한 존재 인지에 관한 것을 성경을 통해서 추론해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당연한 원리가 실제로 종교적으로 믿어지는 경험하는 사람들이 신앙하는 존재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면우리는 그러한 해석을 올바른 종교적 가르침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것이 절대적으로옳은 것인지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의 감각 이상을 넘어서는것이며, 우리의 미래와 관련된 죽음 이후이나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인 창조자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엇이 옳은 믿음인지 검증하거나 생각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에관한이해와 신앙에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

*성경 해석 제 1원리.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신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명제는 하느님은 선하시다라는 것이며, 하느님은인간을 사랑 하신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충분히 추론이 가능한 명제입니다. 먼저 하느님은 선하시다라는 것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증명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먼저 선과 악이라는 개념이 구체적인 개념이 아니라 추상적인 개념이며, 따라서 사람들이 사과를 보듯이구체적인 실체를 느끼듯이 알수 있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선과 악을 평가하듯이 하느님에 대해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과 악이란 보통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사후의 누군가의 행동에 대한 평가입니다. 그런데 그 선과 악이라는 개념은 현실상 선과 악이 있어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느님에 대해 평가를 할 때에 있어 우리는 단순히 추상개념을 사람에게 대듯이 대면 어떤 식으로든 모든양태를동시에 지니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하느님이 있다는 것을 통하여 창조를 알아냈음으로, 이 세상에 대해서 판별함으로서 알아낼 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애당초 우리가 선과 악이라는 추상어를 인식하게 된 것은 이 세상 안에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으로 우리가 이것을 통해 하느님의 성향을 추론하는것은 언제나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는 존재하는것입니다. 만약 세상이 선하기만 하다면 선과 악이라는단어는 표현할 대상이 없기에 그 말의 가치를 잃어아예 존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설사 신이 선과 악을모두 갖춘 성향과 거리가 멀더라도, 목적에 의해서 그런 식으로 우리가 인식하도록 만들어졌더라도, 별도로신의 성향을 인간에게 적용하듯이 적용한다면 결국 우리는 그 한계 이상 추론해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에 관한 추상적인 것은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모든 추상적인 개념은 결국 인간의 현실인식으로부터 나온 대자적 개념(좋다, 나쁘다. 위대하다. 위대하지않다. 등등)이며, 현실을창조한 존재의 본질에 대한 대자적인 개념을 현실에 대한 판단으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현실을통해서 본 하느님은 쌍방의 결론만이 나옵니다. 현실을 통해서 본다면 어떤 면을 보느냐에 따라 하느님은얼굴을 달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앞에서 우리가 논의하였듯이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였다라고 하지만 사실 그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아무런 것도 없습니다. 세상은 그냥 존재했어도 그만이고, 하느님이창조했어도 그만입니다.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영혼의 존재만으로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창조했다는 사실은 질문을 자아내게 됩니다. 사람에게있어 창조라는 것은 목적성과 계획성을 띄지 않으면 안 되는 행위입니다.

하느님을 생각하게 되는 의미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에대답하기 위해서 다음을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세상에 있어서 정말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놓여있는 돌맹이 자체도 그 돌맹이의 속성과 그 의미를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통해서 아무런 의미를 결코 알 수 없는 어떤 존재를 알 수가 있다는것은 무언가 그 존재의 의미를 놓친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근간이 되는 체험은 그 자체로 체험 당시에 어떠한 경향성을 갖춘다고 생각됩니다. 대체로의 체험과 종교는 기도응답이라는 것을 갖추며, 이러한 기도응답은무엇이든지 가능할 것 같은 희망을 줍니다. 가령 비가 내려오지 않으면 비를 내려달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희망은 결국 우리는 체험의 대상을 통해 우리가 존재하는 세상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에서 오며, 결국 절망 속의 희망 그 자체를 만들어내기 위해 존재합니다. 체험은단지 창조자라는 존재를 추론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체험 자체의 의미성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체험은 기독교에서 그 분명한 형태를 드러낸다. 인간의체험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에게 희망이 있다는 격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체험이 근간된 하느님은 당연히선할 수 밖에 없습니다. 현실 이상의 무엇을 지칭하기 위해 체험은 있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이 동시에 있는 세상에서 인간을 만든 존재가 인간에게 인간이 원하는 최대한의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인간이인식하도록하기 위해 체험은 존재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다시 역으로 체험을 통해 인간을 만든 존재를 인식하며, 선과 악이 있는 세상에서 인간이 원하는 최대한의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확실성을 얻는 방법으로서 신을 믿습니다.

신이 없다는 것은 수 많은 신을 믿는 사람들과 그러한 믿음을 가능케 하는어떠한 것들을 무시하는 것이고, 다시 신이 선하지 않는다는 것은 체험의 존재가 갖는 의미성에 대해 생각하기를거부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신은 언제나 선하십니다. 창조 되었다라는 정보는 신이 세상을창조하였다면 왜 이렇게 모든 것이 불완전한가?라는 인간의 질문을 뒤집을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제 신은 선하고, 따라서 우리가 원하는 최종적인 무언가가반드시 존재한다라는 것과 이 세상은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며, 우리는 좋지않은 것을 느끼며 살아간다는것을 요약하여 표현해봅시다. 그리고 그 전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먼저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는 존중이고, 하나는 사랑입니다. 먼저 존중이란 다른 이가 원하는 것을 그대로 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사랑이란상대가 원하는 것 이상을 주는 것입니다. 가령 존중은 자기가 필요한 것만 달라고 하여 그것만주는 것이라면 사랑은 그 사람이 필요한 것이 현재에는 그것이지만 미래에 더 필요할 것이라 생각하여 더 주는 것입니다. 존중과 사랑의 차이는 현재 시점에서 극명하게 갈리게 된다. 현재시점에서 그가 원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사실 미래시점에서 그에게 좋지 않은 것이라면 존중은 그 현재 시점에서의 그가 원하는 좋지 않은 것을 들어주는것이지만 사랑은 현재 시점에서의 그가 원하는좋지 않은 것일지라도 들어 주지 않고, 그가 궁극적으로원하는 무엇을 들어주는 것이다. 항상 그가 원하는 최선의 것을 해주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가 그것을 인지하든 인지하지 않든, 그가 얼마만큼 원하는가를 떠나서최선의 것을 해주는 것이 사랑이며, 따라서 신은 인간이 원하는 최종적인 무언가를 반드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신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있습니다. 인간이 가지는 종교의 의미는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에서만 찾을 수 있고, 인간은 현실을 통해 신의 성향에 대한 어떤 추상적인 판단도 내릴 수 없으며,하느님이 존재하신당서 우리는 하느님이 사랑이시다라는 의미를 추론해낼 수 있습니다. 이 모든것은 실제 인간의 삶 속에 녹아있어 역사 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가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이 사실을 너무나도 확연하게 드러내어 줍니다. 왜냐하면 계시자는 분명히 그 사실을 우리에게 너무나도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자신을 내어주고, 고통받고 죽으셨으며,그것을 통해 죽음이후의 세상인 부활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다는 것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해석 제 2원리. 인간은 하느님을 닮았고 창조성이 존재한다.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는부모와자녀 간의 관계로 묘사할 수 있습니다.(요한 1: 12)

앞에서 인간은 독특한 창조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영혼을 추론해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인간과하느님은 둘 다 창조자라는 점에서 닮은 것이다. 또한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해내었으며,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한다. 이와 같은 관계는 사람에게 있어 부모와자식간의 관계와 유사하다. 부모와자녀는 서로 닮았으며, 부모는자식을 낳았고, 부모는 자식을사랑한다. 따라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묘사할 수 있습니다.

*성경해석 제 3원리. 성경에 적힌 그리스도를 믿는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성경을 읽을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기독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경전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견해를 따르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한다. 하느님은사랑이심으로 하느님이 보내신 그리스도 또한 사랑으로 전제하고 읽는다. 어법상 책은 공격적인 어조로 쓰여져있다는것을 감안하여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를 단순한 스승으로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온전한 전달자로서 받아들여야만 한다.

*성경을 해석할 때에 해석되지 않는 부분은 억지로 해석하지 않아야합니다.

또한 개인적인 해석은 틀릴 수 있음으로 권위있는 교회를 믿는 것이 좋습니다. 혹은 기도를 통하여그 뜻이 무엇인지 응답을 받는 방법도 있습니다. 예시의 내용은 전적인 개인적인 해석임으로 참고만 하시길바랍니다. 하느님은 창조자시라는 의미에서 "? 창조된 세상이 이러한가?" 라는 물음을 바탕으로 성경을바탕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읽는 방법. 복음서(신약) -> 구약 복음서.



해석 예시 --> 복음서를 탐독하는 방법

*창세기 1장 (해석 예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하시니 빛이 생겼다. 그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하느님은 왜 인간을 창조하셨는가?

창조하는 것이 좋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창조를 하실 때에 창조의 원인이 되는 이유는 자기 동기 밖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기동기 외에 어떠한 연유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창조된 무언가를 바탕으로 생각해내기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첫 번째 창조의 이유는 항상 창조하고 싶었기 때문에 창조하였다는 것이 이유가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목적이 존재하는 존재가 있을 수 있는데,그것은 창조의 보조적 목적을 가진 것입니다. 즉 창조를 위해서 창조한 것은 창조하고 싶었기때문에 창조한 것 외의 목적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만들어진 이유는 창조하고 싶었기 때문에창조된 다른 사물과 다름 없는 이유일 수도 있고,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의 보조적 목적의 이유인 것입니다.



예수께서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 저산이 저리로 옮겨지라고 하면 옮겨질 것이다. (해석 예시)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소원을 들어주시기 때문이다. 추측이 아닌 미래에 대한 강한 믿음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간주적 소원이다. 우리의 의지는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어서 우리가 소원을 간절히 빌면 전 우주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움직인다. 만약 들어지지 않는다면 왜?라는 물음을 해보면 된다. 증거는 우리주위에 많이 존재한다. 플라시보 효과와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마가 1:21-28

21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들어갔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곧바로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그 때에 회당에 악한 귀신 들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큰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24 "나사렛 사람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 25 예수께서 그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라." 26 그러자 악한 귀신은 그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서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 27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이게 어찌된 일이냐? 권위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그가 악한 귀신들에게 명하시니, 그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면서 서로 물었다. 28 그리하여 예수의 소문이 곧 갈릴리 주위의 온 지역에 두루 퍼졌다.

마가 3:20-30, 마가 5:1-20, 마가 9: 14-29 누가 8:26-39, 누가 9:37-43, 누가 10: 17-20, 누가 11: 14-26

*영에 관한 질병에 관하여.

정신분열증의 경우 오늘날 질병으로 인식되고 있고, 그 원인을 다양하게 제시하고있지만 기독교적인 관점에 있어서 이것은 영이라는 개념에 입각하여 재 해석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영은창조성과 더불어 영은 의지 성을 갖고 있는데,의지 성이란 A와 B 중에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으로 다시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다시 말하면 의지가 없는 존재에게는 자극 없는 행동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선택 성이 결여된 의지가 없는 무언가로 나타내어지는 영이 아닌 무언가는 반드시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 대하여 아무것도 아닌 상태와 스스로무언가를 일으키는 것 중에 선택을 할 수가 없고, 따라서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그렇지 않은상태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렇게 만드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만들어내는 인과요인인 아무 것도 아닌 상태를 유발하는 무언가에 의해만들어지는 것과 그렇지 않은 상태로 변화하기 위하여 만들어지는 무언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다르게 말하면 의지가 없는 것에 의해서는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다른 어떠한 것에 의하지 않고, 그렇지않은 상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에 관련된 논의는 자유의지에 관련된 논의와 흡사합니다. 자유의지가존재한다는 것은 선택가능 하다는 것이고, 이것은 다시 무에서 유를 만들어낼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즉 아무 것도 아닌 상태와 움직이는 상태를 선택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가 있는가?와 없는 가의 구분의 기준은 대응 관계로서 표현할 수있는데, A->B이면 자유의지가 개입되지 않는 것이고,A->B,C이면 자유의지가 개입된 것입니다. 이 때에 착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아는 인과관계를 모두 찾았을 때를 산정해야지, 그것을 모두 찾지 않았을 경우를 산정해서는 안 된다는것입니다. 특히 자유의지의 확고함은 창조력에서 나옵니다. 무에서유를 만들어내는 선택은 무라는 하나의 결과에 대해 다수의 색다른 유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항시적으로 창조 가능한 인간에게 있어 자유의지가 있는 것임을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반드시 그렇게 만드는 인과적인 최초 과제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찾아낸 이러한 것에 대한 표현 방식은 자극(원인)이 있으면 반응(결과)이있다는 방식이나, 자극(원인)이 오랜 기간 내부에 잠재되어서 어떠한 메커니즘을 따라 움직이다가 반응(결과)한다는 방식(원인이 다양한 인과관계를 거쳐서 결과가 나옴)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깐 우리가 보는 결과 B는 A(원인)->B(결과)이던가, A(원인)->C(감춰진메커니즘)->B(결과)이던가 하다는 것입니다. 신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모든 결과는 이 두 가지 메커니즘에 따라서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정신 분열증에 있어서도 자유 의지가 있는 존재가 개입되지 않았다면 이 결과는적용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정상인과 구별되는 것임으로 원인의 문제는 기필코 아니게 됩니다. 왜냐하면 정상인과 정신 분열증을 겪은 사람의 경우 같은 세상 속에서 살아감으로 일상 속에서는 동일한 자극을줄 수 있는 환경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신 분열증을 겪는 사람의 경우 명상을 하여도 똑같이자극을 받는데, 이것은 명상을 함으로서 원인을 갖는다 라고 말하기에는 문제가 있게 됩니다. 그럼으로 항상 말해지는 것은 A(원인) -> C(감춰진 메커니즘) -> B(결과)와 같은 감춰진 메커니즘과 동질적으로 말해지는 뇌의 구조적 이상이라고 말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상인은 A(원인)-> C1(정상적인 감춰진 메커니즘) -> B(결과) 라는 것으로 설명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A(원인) -> C2(비정상적인 감춰진 메커니즘) -> B(결과) 라는 것이며,메커니즘의 변화는 어떠한 그 전에 놓여있는 D와 같은 특수한 원인(유전자, 그 유전자를 발현시키는 환경)에 의하여 C1이 C2로변화하였다고 설명하는 게 오늘날의 양태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구조적 이상으로서 말해질 수 없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A(원인) ->C2(비정상적인 감춰진 메커니즘) ->B(결과)와같은 단일 적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B(결과)가 다른질병들과 다른 특이한 반응을 보인다는 점에 있습니다. B(결과)가아니라 B1, B2, B3, B4 와 같은 다양한 결과를 갖고 있으며,중요한 것은 이러한 B1, B2, B3, B4가 개인의 어떠한 상태에 대응하여 유기적으로반응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니깐 A(원인) -> C2(비정상적인 감춰진 메커니즘) -> B1, B2, B3,B4…..B234823094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B(결과)라고 만들어내는 것은 어떠한 형태를 추상적으로 보는 관점하에서만 그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실제로 나타나는 결과는 수 없이 다양한 양태(수 많은 다른 언어)로 나타나는데,이것을 하나의 언어가 들린다 라는 추상적인 실제의 구체적이지 않은 결과로 대응을 시킴으로 우리는 어떠한 것이 무언가에 의해서 선택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자극이 없이 뇌 속에서 어떤 존재의 의지를 떠나서선택 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구조적 이상으로 똑 같은 말이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원인(자극  단지메커니즘이 하나가 변했다.)은 하나인데, 결과가 수없이 많은다수가 대응하기에 이것은 자유 의지가 있는 존재의 개입으로서 여겨지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정신 분열증의 대표적인 증상인 환청은 하나의 구조적 원인이라고주장하는 것에 의해 수 없이 많은 여러 가지 구체적인 형태가 나타나는 것 뿐만 아니라 이러한 환청이 개인의 고통을 야기시키는 방식으로 지능적으로변경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환청은 고통과 함께 욕설과 같은 개인이 듣기 싫은 말을 동반합니다. 그런데 이 듣기 싫은 말이라는 것은 개인의 상태에 따라 변동합니다. 즉개인의 상황을 읽고 거기에 맞추어 듣기 싫은 말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A(원인) ->C2(비정상적인 감춰진 메커니즘) -> 처음의 수많은 다수 선택 B1, B2, B3, B4…….B23748732847293 -> 자유 의지 자에의한 원인 선택 D1,D2,D3,D4……D23784273942 -> 거기에 맞추어 B를 선택하여 제공함이라는 것입니다. 환청의 괴로움이라는 것이 언어적형태를 띄고 있기 때문에 사람마다 다르게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환청을 겪는 개인은 허공에다 대고 대화를 하기도 하고, 뇌 속에서 어떠한 생각의 침입과 그에 대응한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이것은앞에서 설명했듯이 하나의 원인이 발생한 이후에는 다 대응 성을 갖고 있다는 측면에서 선택 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추론해낼 수 있으며, 단순히 선택 성이 없는 수 많은 요소들에 의해서 말해지는 다른 질병과 동일하게 다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또한 다른 증상인 망상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사람마다 다를 수가 있고, 정교하고 복잡하게 발생합니다. 하나의 단일한 호르몬 망상이라는 것이매우 다수의 반응인 B1,B2,B3,B4…….B23482374982378947가 생기게 되는 것이고, 다시 자유 의지 자에 의한 원인 선택에 맞추어 다른 형태의 B를제공한다는 것입니다.

A(원인) ->C2(비정상적인감춰진 메커니즘) -> 처음의 수 많은 다수 선택 B1,B2,B3,B4…….B23748732847293 -> 자유 의지 자에 의한 원인 선택D1,D2,D3,D4……D23784273942 -> 거기에 맞추어 B를 선택하여 제공하는것이 주 패턴입니다. 이것을 예시로 든다면 가령 음식에 독이 들었다.라는 망상이 들었을 경우, 음식에 독이 들었어도 안 먹으면 죽는다. 따라서 먹는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음식을 먹게 된다면 망상은 효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망상의 증상은 그것이 효력이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 다른 망상으로 변경되게 됩니다. 집요하게 망상은 그 망상이 효력이 생길 때까지 변경되면서 발생합니다. 따라서망상이나 환청은 하나의 원인에 대한 다수의 대응성과 선택 가능성, 그리고 자유의지자의 선택에 의해 그러한정보를 인지하고 다시 대응하는 다른 우리의 인과관계의 사고를 벗어난 형태를 띄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와 같이 환청이나 망상은 어떠한 자유 의지자의 선택에 의한 정교 성을띄고 있기 때문에 붕괴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정교 성을 일으킬 수 있는 무언가에 의해 작위적으로만들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영은 창조성을 가지고 있고,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의 작용으로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2013.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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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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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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