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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5.18민주 운동 에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audr**** 조회수 8,581 작성일2004.05.19
3분간 발표를 해야 되서 인데

5.18민주 운동을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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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민주화 운동




다시 스러진 민주화의 꿈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후 헌법 제 48조 규정에 따라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했다. 최 권한대행은 27일 오전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 계엄을 선포하는 동시에 계엄사령관에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대장을 임명했다.
이어 최 권한대행은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해 제 10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최 대통령은 '우리는 정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의사가 전혀 없는 정부'라는 말로 국민들의 의구심을 풀려 했다. 야당인 신민당은 정부가 과도기간을 연장하는 등 불만스러운 점이 없지 않았으나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국민들 역시 유신체제라는 억압에서 막 벗어나려는 순간에 있어 정부의 조치를 조심스럽게 지켜보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12월 12일 저녁 10·26 사건 수사를 맡았던 보안 사령관 전두환 소장은 9사단장 노태우 소장 등 하나회 출신의 정치군인들과 (황영시, 유학성, 박준병, 박희도, 장세동, 김진영, 최세창, 정호용, 허삼수, 이희성, 김복동.....) 함께 일련의 군사 행동을 취하였다. 全 사령관은 박대통령 암살 사건에 관련 혐의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재가도 없이 계엄 사령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 총장을 강제 연행하는 하극상의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게다가 정 총장을 연행하면서 총격전까지 벌였다.
한편 전 사령관의 연행 재가 요청에 최대통령은 정 총장 연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노재현 국방장관도 정 총장을 석방하고 각자 부대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전 보안 사령관은 이를 거부하고 군을 동원해 무력으로 중앙청, 국방부, 육군 본부 등 국군 중추부를 차례로 장악하고, 각 방송국, 신문사, 통신사를 그들의 통제하에 두었다. ( 12. 12 쿠데타 )
결국 이 사건으로 전두환 보안 사령관 등 일부 군인들(신군부)의 위법적인 행동에 반대했던 많은 군 장성들이 체포되고 군에서 쫓겨났다. (신군부는 정승화를 비롯, 그의 추종세력인 3군 사령관 이건영, 특전 사령관 정병주,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등을 80년 1월 20일자로 모두 강제 예편시키고 정승화에게는 징역 10년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전두환 사령관은 자신의 육사 동기생 및 가까운 친구들을 요직에 앉혔다. 9사단장 노태우 소장은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됐다. 또 쿠데타 주체 세력들은 특전사령관과 3군 사령관 등 핵심 부대의 책임자가 됐다.

美정부와 서울의 미대사관측은 전두환 사령관의 '권력 찬탈'(Power grab; 당시 글라이스틴대사가 사석에서 사용한 표현)을 원상태로 복구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런 노력이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글라이스틴은 전두환의 측근들에게 "우리는 12월 12일 일어난 사건을 역전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고 명백히 밝혔다. 그 대신 미국은 전사령관에게 정치에 개입하거나 정치권력을 차지하려 들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의 충고를 간단히 무시하고 곧바로 정치 개입과 정치 권력 장악에 나서게 된다.

12·12쿠데타는 약 20년에 걸친 박정희 군사 독재가 끝난 후 국민들이 열망하던 민선·민주 정부의 부활을 가로막았다. 그 후 몇 달에 걸쳐 군부가 다시 집권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무력을 동원한 한 무리의 군인들에 의해 국가 권력이 또다시 찬탈되고 있음을 느꼈다. 1970년대는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

70년대에 바침
신해철 작사·작곡
하늘이 그리도 어두웠었기에 더 절실했던 낭만
지금 와선 촌스럽다 해도 그땐 모든 게 그랬지.
그때를 기억하는지 그 시절 70년대를.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와 가위를 든 경찰들
지금 와선 이상하다 해도 그땐 모든 게 그랬지.
그때를 기억하는지 그 시절 70년대를.

* 무엇이 옳았었고 (무엇이) 틀렸었는지
이제는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을까
모두 지난 후에는 (누구나) 말하긴 쉽지만
그때는 (그때는) 그렇게 쉽지는 않았지.

한발의 총성으로 그가 사라져간 그날 이후로
70년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지.
수많은 사연과 할 말을 남긴 채.
남겨진 사람들은 수만의 가슴 마다에 하나씩 꿈을 꾸었지.
숨겨왔던 오랜 꿈을.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가.

장군들의 긴박한 현장 육성

(보안사령부 비밀 녹음 테이프 ; 이건영 3군 사령관과 장태완 수도경비 사령관의 전화 통화 ; 12일 밤 10시 16분)
.........
.........
이 : 응
장 ; 그러니까 헌병감이 턱 들어오더니 총장님이 피습당한 것 같다.....
이 : 총장이 뭐라고?
장 ; 총장님이 피습당한 것 같다.... 이렇게 탁 돼 가지고 그래 제가 확 나가면서 총장님 공관에 전화를 딱 걸으니까 공관의 경호 대위 김대위가 탁 나오더니 [사령관님, 지금 빨리 앰뷸런스를 좀 보내주고..... 총장님이 피습 당했습니다.] 이렇게 아주 경황없이 이야기를 해요. 알았다, 그러면서 제가 전화를 딱 끊고 바로 거기서 제가 차를 몰고 부대에 들어오면서 바로 부대 출동태세를 갖춰놓고 APC하고 병력을 총장 공관으로 우선 급파를 시켰지 요. 그러고 앰뷸런스를 보내고 동시에 총장님을 빨리 구출하기를 이렇게 하고 그러고 지금 제가 여기와서 대략 상황을 보니....파악이 안되는데 우선 총장님 문제만 생각해서 갔더니 거기 가서 보니 해병대 애들하고 우리 헌병들이 들어가 있는데 이놈들이 우리 헌병 들어간 놈이 총장님을 피습한 건지 원래부터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해병대가 총장을 피습했는지 그건 모르 겠는데..... 아무튼 해병대가 우리 헌병을 그 안에 한 50명 있는 것을 포위해 가지고 마이크로 버스에서 안 내보내고 있어요.
이 ; 우리 헌병이?
장 ; 못 나오고 있어요.
이 ; 해병 헌병 때문에.
장 ; 해병 헌병이요, 우리 0 0 니까.
이 ; 응
장 ; 육군총장 공관에서 총소리가 났기 때문에 자기네는 무조건 안 내보낸다 이거죠. 그래 마침 해군 헌병감이 오고 이러는데.... 30단에 유학성 장군이 와 있다.... 이래서 나를 자꾸 찾는다 이래서 예감이 이상해서 말입니다. 지가 빨리 상황실에 들어왔습니다. 들어와 가지고 30단에 유학성 장군이 있다고 해서 전화를 바꾸니까 이미 오래된 것처럼... [왜 유장군님 남의 부대에 와서 왜 이럽니까?] 제가 예감이 이상해서 물으니까 [에이 장 장군 거 알면서 왜 그래 이리와....] [이리 오기는 어딜 와 . 당신이 왜 그래요. 왜 남의 (부대에) 한밤중에 와서 무슨 지랄하고 있어. 쏴 죽인다.] 이렇게 했더니 황영시 장군한테 전화를 바꿔요. 황영시 장군이 있다가 [장태완이 너 왜 그래. 알 만한 사람이 나하고 다 통할 수 있는 처지인데 왜 그래. 이리 와 ] [ 아니 왜 이라십니까. 왜 그 우리 좋은 총장님을 어쩌자고 납치해 가지고 왜 이라요. 정말 그러면 내 죽여] 했더니 [차규헌이도 와 있고
다 와 있는데 마 이리와....] [ 무슨 .... 혼자 다 해먹어. 임마 난 죽기로 결심한 놈이야....] 해놓고 바로 출동준비를 갖추고 있는 중인데 말입니다.
이 : 응, 그러면 말이야.
장 ; 보니깐 조그만 이놈들이 장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전화를 올리는 것은 총장님은 납치돼 가지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그라는데요. 참모차장하고 모두 저짝에서 전화가 오기를 [어떻게 되느냐] [어떻게 되긴 나는 딴 것 없다. 쳐들어간다. 30단이고 다 쏴 죽인다] 했더니.....
(중략)
이 : 그럼 말이야, 30단이 장 장군 명령권 내에 있는 거 아니야?
장 ; 그런데 거기에는 제가 자극을 안하는기요. 거기에 몽땅 모여 있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 새끼들 거기 모여 있으면 뭐합니까. 제가 단장한테 전화를 걸어가지고 이리 오너라 하든지 지시하든지.... 처음에는 단장보고 금마들(그 놈들) 당장 쏴 죽이라 했거든요. 그런데 단장이 모두 그놈아들한테 누질려 (눌려) 있는 것 같아요
이 ; 그런데 현재는 말야. 다른 30이나 33이나 부대동원에 대해서는 각각 지휘관들한테 내 명령 없이 출동하지 말라고 지시는 해놔 있어요.
장 ; 지가 알아서 해 놔 있어요.
이 : 그래서 여기선 부대는 하나도 동원 안하는데 쌍방이 충돌이 없이 잘 돼야지, 그렇지 않으면 굉장한 불상사가 생겨.
장 ; 그까짓 거 충돌이고 뭐고 몇 놈 죽어도...
이 : 글쎄 잘못된 놈은 죽어도 좋은데.
장 : 하여튼 내부에선 제가 죽든 살든 할 테니까요. 사령관님은 바깥을 좀 해 주십시오.
이 : 그렇게 해요..... 이거 뭐 좀 불순한 장난이 있는 것 같애.
장 ; 예, 완전히 장난이라요. 전두환이하고 이놈아들이 모두 작당(?)해 가지고 장난인 것 같애요.
이 ; 응
장 : 그리고 여기도 보니까 단장들이 몇 놈들이 자취를 감추고 없는데요. 그놈 아들한테 전부 사전에 공작을 해서 한 모양인데...
(중략)
이 ; 알겠어. 이게 뭐 굉장히 불순한 장난이 있어 큰일이야.
장 : 안에선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이 ; 이랬다가 북괴한테 큰일 나요.
장 ; 사령관님은 바깥에서 잘 해 주십시오.
이 ; 알겠어요
장 ; 저는 안에서... 이놈의 새끼들 다 죽이든지 해버릴 테니....
이 ; 하여튼 빨리 수습을 좀 하도록 해. 이거 굉장히 불행한 사태야.
장 : 알겠습니다.
이 : OK, 전화줘 고마워요.

좌절된 '서울의 봄'

1980년 봄이 왔다. 10·26 사태로 비상 계엄이 선포되고 12·12 쿠데타 등 불안정한 정국의 추이에 불안을 느끼면서도 국민들은 오랜 유신 체제의 망령에서 벗어나 새로운 민주 사회에 대한 희망을 키워 나갔다.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 각처에서 민주화의 물결은 봇물 터지듯이 솟구쳤다. ( '서울의 봄' ) 4.19직후처럼 민주회복의 물결이 도도하게 흘러 군사독재의 모든 잔재를 씻어내는 듯 했다. 사람들은 이제는 민주적인 선거에 의해 대통령이 선출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김영삼·김대중의 행보에 신경을 썼다. 두 사람은 단결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부는 새로운 민주 헌법의 제정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이에 학생들은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학생들은 이제까지 정부 태도를 볼 때, "최규하 정부는 유신 잔당으로 민주화 의지가 없다"고 단정지었다. 신중하게 학원에서 민주화 운동을 벌이던 학생들은 5월이 되면서 거리로 나왔다. 14일과 15일 서울의 대학생들은 계엄령 하인데도 시내에서 대규모 시위를 가졌다.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에 놀란 정부는 서둘러 학생들을 진정시키려 했다. 사태가 악화되자 신현확 총리는 15일 담화문을 발표해 "국회와 협의해 모든 정치 일정을 최대한 앞당기겠다"며 학생들에게 자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중동을 방문중이었던 최 대통령도 일정을 하루 앞 당겨 16일 밤 귀국하려 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일단 15일의 시위를 중지하고 정부의 태도를 지켜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최대통령이 귀국했을 때 상황은 국민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고, 국민들은 다시 한번 깊은 좌절을 맛보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지 일주일만에 12.12 쿠데타를 당한 최 대통령은 그 뒤 군의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 보안 사령관의 요구를 무시하지 못했다. (전 보안사령관은 1980년 4월 14일 공석 중이던 중앙정보부장의 자리까지 겸임하면서 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전 보안 사령관은 단결된 군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이끌어 나가야 된다고 주장하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나 집회가 공산주의자의 선전에 말려들어 나라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강력한 군의 힘을 동원하여 막기로 작정하였다. 이러한 군의 요구를 이겨내지 못한 최규하 정부는 5월 17일 24시를 기해 그간의 부분 계엄을 전국 계엄으로 확대하였다. 그리고 계엄포고령을 발표 ▲ 모든 정치 활동의 중지 및 옥내외 집회·시위의 금지 ▲ 언론·출판·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 각 대학의 휴교령 ▲ 직장 이탈 및 태업·파업 금지 등의 조치를 취함으로써 정치인의 손발을 묶고 국민의 저항에 쇄기를 박았다. 이어 18일에는 김대중, 김상현, 김종필, 이후락 등 26명의 정치인들을 학원·노사분규 선동과,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로 합동수사본부에 연행하고 김영삼을 가택연금 시키는 등 정치적 일대 탄압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전국의 각 대학과 주요 도시에는 공수 특전단을 비롯한 군 부대가 투입되었다. 12.12에 이은 신군부의 제 2의 쿠데타였다. 체코의 '프라하의 봄'이 소련군의 탱크에 짓밟혔듯이 '서울의 봄'은 신군부의 장갑차에 산산조삭이 나고 말았다.

민족의 십자가, 광주

가로수들의 신록이 여느 해처럼 싱그러운 1980년 5월 18일 아침, 전남대생들은 교내로 들어가려다가 총을 든 군인들에 의해 제지를 당하자 투석으로 맞섰다. 당시 어느 외국 언론이 표현한 대로 ' 20세기의 마지막 비극'인 광주의 학살과 위대한 민중항쟁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이 확대되고 휴교령이 내려졌다. 신군부는 공수부대의 핵심인 7공수여단의 33대대와 35대대를 광주에 파견하고 그중 33대대의 주력이 전남대를 장악했다. 전남대생들은 만일의 휴교 조치에 대비하여 학교 앞에 모이기로 사전 합의한 대로 휴교령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나오다가 계엄군과 대결하게 된 것이다.
학교 앞에서 계엄군에 쫓겨난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시내 거리를 돌며 "전두환이 반란을 일으켰다." "김대중을 석방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경찰이 최루탄과 경찰봉으로 해산시키려 하자 다시 투석전으로 맞섰다. 신군부는 경찰력으로 진압이 실패하자 오후 3시경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착검한 M16에 방망이로 무장한 공수대원들은 남녀학생들을 붙잡아 마구 난타했다. 격분한 학생들이 보도 블럭을 깨서 집어 던졌다. 붙잡혀온 학생들을 공수대원들은 군화발로 짓밟았다. 피 흘리는 학생들은 굴비처럼 엮어져 군 트럭에 실려 갔으며, 통금이 밤 9시로 단축되자 귀가하는 학생·청년들을 닥치는 대로 두들켜 패고 연행하고 만류하는 시민들까지 개머리판으로 마구 때렸다.

다음날인 19일 시민들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금남로 일대에 많은 시민들이 모여 들었다. 공수대원들은 난폭하게 시민들을 해산 시켜려 들었다.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되었다. 공수대원들은 분노한 시민들의 합세로 시위가 커지자 몽둥이는 물론 대검까지 사용하였다. 공수대원들의 무자비한 진압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가는 사람들의 수가 차츰 많아졌다. 공수대원들의 잔인성을 목격한 군중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마침내 총궐기에 나섰다. 20일 날이 밝자 아침부터 금남로에 모여든 시민들이 수 만 명에 달했다. 시민들은 금남로에 주저앉아 공수대원들의 잔인한 진압을 성토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민들의 숫자는 늘어났다. 오후가 되자 공수대원들은 시위하는 시민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광주 시내 곳곳에는 다시 격렬한 공방이 시작되었다.

통한의 계절 - 계엄령을 철폐하라! 전두환에게 죽음을! 남한의 한 도청 소재지 광주에 10만여 시위대는 서울의 계엄 정권에, 또 전두환이라는 새로운 권력자에게 분노를 터뜨리며 거리를 가득 메웠다. 시위는 곧 전면적 봉기로 확대됐다......
당시의 상황을 TIME은 이렇게 보도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저녁 7시쯤 금남로에는 새로운 상황이 벌어졌다. 2백여 대가 넘는 차량들이 도청 앞으로 길게 뻗은 금남로를 따라 줄이어 들어왔다. 헤드라이트를 밝힌 차량 행렬의 앞에는 대형 트럭이 앞장을 서고, 그 뒤로 버스와 택시들이 뒤따랐다. 1만여 명의 시민들이 차량 행렬을 에워싸고 금남로를 따라 서서히 도청 앞으로 나아갔다. (금남로 차량시위)
시민들은 박수를 보내고 만세를 부르며 힘을 돋구었다. 시민들과 공수부대 사이에 밀고 밀리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제 시민들은 힘을 얻어 물러서지 않고 공수대원들을 공격하였다. 이날 밤 늦게 광주 시내의 밤하늘을 가르는 굉음이 소용돌이쳤다. 도청을 필사 Ю막?지키던 공수부대는 시민들의 격렬한 공격을 받자 마침내 총을 쏘기 시작한 것이다. 앞장을 섰던 몇몇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거나 크게 다쳤다. 그러나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시민들은 인근 경찰서에 들어가 경찰 예비군용 총기·실탄·수류탄을 빼앗아 무장하여 계엄군에 맞섰다. 시위대와 공수대원들은 밤을 새우며 혈전을 치렀다. 21일 새벽이 되자 공수부대는 작전상 광주 외곽으로 퇴각하였다. 시민들이 이긴 것이다.

<광주시민 궐기문>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는가?
(1980년 5월 25일)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는가?
먼저 이 고장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피를 흘리며 싸우다 목숨을 바친 시민, 학생들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 없어서 너도 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본인이 알기로는 우리 학생들과 시민들은 과도정부의 중대발표와 또 자제하고 관망하라는 말을 듣고 학생들은 17일부터 학업에, 시민들은 생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 당국에서는 17일 야간에 계엄령을 확대 선포하고 일부 학생과 민주인사, 정치인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구실로 불법 연행했습니다. 이에 우리 시민 모두는 의아해 했습니다. 또한 18일 아침에 각 학교에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이에 반발하는 학생들에게 대검을 꽂고 '돌격, 앞으로 '를 감행하였고 이에 우리 학생들은 다시 거리로 뛰쳐나와 정부당국의 불법처사를 규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 이럴수가 있단 말입니까? 계엄당국은 18일 오후부터 공수부대를 대량투입하여 시내 곳곳에서 학생, 젊은이들에게 무차별 살상을 자행하였으니!
시민 여러분!
너무나 경악스런 또 하나의 사실은 20일 밤부터 계엄당국은 발포명령을 내려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고장을 지키고자 이 자리에 모이신 민주 시민 여러분!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당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장을 지키고 우리 부모형제를 지키고자 손에 손에 총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부와 언론에서는 계속 불순배, 폭도로 몰고 있습니다.
여러분!
잔인무도한 만행을 일삼았던 계엄군이 폭돕니까? 이 고장을 지키겠다고 나선 우리 시민군이 폭돕니까? 아닙니다. 그런데도 당국에서는 계속 허위날조, 유포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 시민군은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안전을 끝까지 지킬 것입니다. 또한 협상이 올바른 방향대로 진행되면 우리는 즉각 총을 놓겠습니다. 일부에서는 우리 시민군에 대한 오해가 많은 것 같습니다.
민주 시민 여러분!
우리 시민군을 절대 믿어주시고 적극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광주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22일 오래간만에 시민들은 작은 평화를 되찾았다. 그러나 지난 며칠간 너무나도 엄청난 일들이 벌어져 시민들은 아직 어찌해야 될 지를 몰랐다. 이런 가운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수습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수습위원회는 계엄군과 협상을 하면서 시민들에게 총기를 반납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많은 시민들은 정부가 사과하기 전에 총기를 반납할 수는 없다고 버티었다. 총기를 반납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많은 갈등이 나타났다.
23일부터는 도청 앞 광장에서 매일 성토 대회가 열렸다. 이 성토 대회에서 시민들은 자신들을 폭도로 몰아부치는 정부의 태도에 크게 분노하였다. "민주주의를 요구하였던 시민들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살상해놓고 정부는 무슨 염치로 시민들을 '폭도'로 모는가?" , "계엄을 해제하라" ,"정부는 과잉 진압에 대해 사과하라!"는 등 시민들의 요구가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25일이 되면서 군은 또 다시 광주 시내로 들어오려는 준비를 서둘렀다. 시민들은 불안에 싸였다. 5월 26일 이미 도청 앞에는 군이 진입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많은 시민들이 모여 궐기 대회를 열며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궐기 대회가 끝난 다음 시민들은 대형 태극기와 1천여 명의 고등 학생 시위대를 앞세우고 가두 행진을 벌였다. 시민들은 "계엄령을 해제하라", "피의 대가를 보상하라", "전두환은 물러나라", "무기 반납을 결사 반대한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오후가 되자 상황은 더욱 급박하게 돌아갔다. 계속적인 항쟁을 내 세운 도청 지도부는 시민군을 재편성해 계엄군의 진입이 예상되는 지점에 배치하면서 군의 진입에 대비했다.
오후에는 또 한 차례 궐기 대회가 열렸다. 궐기 대회를 마치고 시민들은 가두 행진에 나섰다. 5천여 명으로 시작된 행진은 광주 시내를 돌며 "광주를 사수하자"고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위기는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행렬이 다시 도청으로 돌아왔을 때 남은 사람은 단지 이삼백 명뿐이었다. 그만큼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항쟁 지도부는 마지막까지 시민들에게 다시 한번 돌아갈 것을 권했다. 모두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특히 어린 고등 학생들이 자신들이 나서 도청을 지키겠다고 애원했을 때 모두들 고개를 숙여 눈물을 훔치지 않을 수 없었다. 200 ∼ 500명의 시민군이 도청을 사수하는 가운데 27일 새벽 3시 드디어 수많은 계엄군들이 광주 시내로 공격해 들어 왔다. 항쟁 지도부는 가두 방송을 통해 광주 시민들과 마지막 작별을 하였다.
"시민 여러분!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광주 시내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결국 도청에 남아 있던 시민들은 계엄군을 이길 수가 없었다. 작전 개시 1시간 40여 분만에 모든 저항은 끝이 났다. 새벽녘이 뿌옇게 찾아 왔을 때 도청을 지키려 했던, 그래서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를 지키려 했던 젊은 청년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갔다.
'광주 학살'로 불리게 된 이 사건은 그 후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핵심적인 쟁점이 돼 왔다. 그것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감의 진앙(震央)이었다.

<참고 1> 신군부의 집권 그리고 그 후....

. 1980. 5월 18∼ 5.27 ; 계엄군, 광주항쟁 무력 진압
계엄사령부는 7.22일 광주사태로 인한 사망자 수가 189명이라고 최종 발표했지만, 아직도 사망자 수, 행불자 수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음
. 1980. 5.31 신군부, 대통령 자문·보좌 기구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설치
상임위원장에 전두환 보안사령관 취임
이후 국보위의 강권 통치
* 국보위는 초헌법적 기구로 5.16 군사쿠데타 후의 [국가재건최고회의]와 성격이 비슷

. 1980. 8.16. 최규하 대통령 사임,
< 사임 성명 >
" 우리 나라에 있어서의 책임 정치의 구현으로 불신 풍조를 없애고 불했했던 헌정사에 평화적인 정권 이양의 선례를 남기며 국민 모두가 심기일전해 화합과 단결을 다짐으로써 시대 요청에 따른 안정과 도의와 번영의 밝고 새로운 사회를.... 민주국가의 평화적인 정권이양에 있어서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국익 우선의 국가적인 견지에서 임기 전에라도 스스로의 판단과 결심으로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정부를 승계권자에게 이양하는 것도 확실히 정치 발전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 (8.16)

. 1980. 8.21 전군 지휘관 회의, 전두환 장군을 대통령으로 추대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
. 1980. 8.27 통일주체국민회의, 보궐 선거를 통해 새 대통령에 전두환 선출 (총투표자 252명중 무효 1표, 100%지지)

. 1980. 9.1 전두환 제 11대 대통령 취임
< 취임 성명 (9.1) >
"... 앞으로 나 자신과 내 주변의 부정과 부패를 스스로 용납치 않을 것이며, 모든 공직자의 부정 부패도 계속 척결해 나감으로써 국민의 불신 소지를 가능한 한 조속히 없애는 데 주력하겠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회 개혁 주도세력이 처음에는 대단한 열의와 정의감을 가지고 출발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이 부패하고 사명감을 상실하기 때문에 국민으로부터 불신을 받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새 시대에는 결단코 이와 같은 전철을 밟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 새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며
조병화
...... 온 국민과 더불어 경축하는
이 새 출발 / 국운이여! 영원하여라
청렴결백한 통치자 / 참신과감한 통치자
이념투철한 통치자 / 정의부동한 통치자
인품온화한 통치자 / 애국애족 사랑의 통치자
........
이 새로운 영토 / 오, 통치자여! 그 힘 막강하여라
아, 이 새로운 영토 / 이 출발
신념이여, 부동불굴하여라.... (80년 8월 28일 경향신문)

. 1980. 9.17. 군법회의 김대중에게 내란죄 적용, 사형 판결
* 미국의 김대중 구명운동
전두환, '김대중 카드'를 이용한 '방미' 협상
. 1980. 10.27 제 8차 개헌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 간선제 및 7년 단임제 규정)
. 1980. 11.28 민주정의당 창당
. 1981. 1.21 미국, 전두환 초청
. 1981. 1.25 전두환, 계엄령을 해제하고 김대중의 형량을 사형에서 종신형으로 감형한다고 발표
. 1981. 1.28 전두환 대통령, 미국 방문
. 1981. 2. 25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간접 선거 실시. 전두환 후보 전체선거인의 90.2% 득표 당선
. 1981. 3. 3 전두환 제12대 대통령 취임. 제 5공화국 출범
장구한 세월에 걸친 시련과 고뇌의 시대를 넘어서서 이제야말로 제 5공화국의 출범으로 자기완성시대를 형성하여야 할 성장과 성숙의 시대에 들어서는 찰나에 있다."(취임사 중)

< 그리고 그 후....>
. 1988. 2월 전두환 대통령, 1988년 2월 외신과의 회견에서
".. 광주 사태는 당시 국가의 존립 기반이 위태로울 정도록 최악의 상황에서 국가 위기를 수습하는 가운데 빚어진 것으로서 대단히 불행하고 유감스러운 일이다."
. 1988 6공 정부,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 특별위원회 구성
청문회 실시
. 1990 광주피해자 보상법 제정
. 1993 김영삼 대통령 특별담화 통해 광주 수습책 제시
12·12를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
. 1995. 7.18 서울지검, 5.18수사 결과 발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요지로 불기소 결정
◁ 국민들의 반발 일어남
1995.11 김영삼 대통령 민자당에 5.18특별법 제정 지시
1995.11.30.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 발족,
검찰 재수사결정
1995.12.2 전두환씨, 연희동자택에서 대국민담화 발표 뒤 낙향
곧 연행, 구속 수감
1995. 12.21. 검찰, 전두환, 노태우씨를 12·12반란혐의로 기소
1996.8 검찰, 전두환·노태우씨에 각각 사형, 징역 22년 6월징역 구형
1997 전두환,노태우씨 상고심 선고
(전두환씨 - 무기징역으로 감형)
1998 김영삼 정부, 국민대화합 차원에서 전두환, 노태우씨 사면

<참고2> 신군부 검열에 삭제당한 시사만화 만평들

























<참고3> 시와 노래로 보는 광주 항쟁 그리고 80년대 초반의 사회

① 아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김 준 태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만 흘리는 /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 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나
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 / 찢어져 산산이 조각나버렸나

하느님도 새떼들도 / 떠나 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 아침 저녁으로 살아 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통곡뿐인 남도의 /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해바람이 곤두박질치고 / 이 시대의 모든 산맥들이
엉터리로 우뚝 솟아 있을 때 / 그러나 그 누구도 찢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는 / 아아 자유의 깃발이여
인간의 깃발이여 / 살과 뼈로 응어리진 깃발이여

아아 우리들의 도시 / 우리들의 노래와 꿈과 사랑이
때로는 파도처럼 밀리고/ 때로는 무덤처럼 뒤집어 쓸지언정

아아 광주여 광주여 /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아아 온 몸에 상처뿐인 / 죽을뿐인 하나님의 아들이여

정말 우리는 죽어버렸나 / 더 이상 이 나라를 사랑할 수 없이
더 이상 우리들의 아이들을 / 사랑할 수 없이 죽어버렸나
충장로에서 금남로에서 / 화정동에서 산수동에서 용봉동에서
지산동에서 양동에서 계림동에서 /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아아 우리들의 피와 살덩이를 / 삼키고 불어오는 바람이여
속절없이 세월의 흐름이여

지금 우리들은 다만 / 쓰러지고 쓰러지고 울어야만 하는가
공포와 목숨 어떻게 숨을 / 쉬어야만 하는가

아아 살아남은 사람들은 / 모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구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 모두가
넋을 잃고 밥 그릇조차 대하기 / 어렵구나 무섭구나
무서워 어쩌지도 못하는 구나.....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 죽음과 죽음을 뚫고나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나님 아들이여 / 예수는 한번 죽고
한번 부활하여 / 오늘까지 아니 언제까지 산다던가

그러나 우리들은 몇 백 번 죽고도 / 몇 백 번을 부활할 우리의 참사랑이여
우리들의 불이여 영광이여 아픔이여 / 지금 우리들은 더욱 살아남아 나는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튼튼하구나 / 지금 우리들은 더욱
푸르른 하늘을 올라 / 해와 달은 입맞추는 구나

광주여, 무등산이여 / 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이여, 십자가여 /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젊어져가는 청춘의 도시여
......
.......
.......
........


② 오독
홍 헌 호

어느 시에서 나는
'화염 속의 내 고향 광주'를
'화엄 속의 내 고향 광주'로
잘못 읽었는데

그렇게 읽길 잘했어

화엄이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옆에서 죽는 놈 짠하고 불쌍해서
내 목숨 들이붓고 피 뿜는 짓이 있다면
그것이 화엄 아니겄냐?
그것이 불타는 엄숙함 아니것냐?


③ 바위섬 (배창희 작사·작곡 김원중 노래)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 인적 없던 이곳에
세상 사람들 하나 둘 모여들더니
어느 밤 폭풍우에 휘말려 모두 사라지고
남은 것은 바위섬과 흰 파도라네
바위섬 너는 내가 미워도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다시 태어나지 못해도 너를 사랑해
이제는 갈매기도 떠나고 아무도 없지만
나는 이곳 바위섬에 살고 싶어라.
* 광주항쟁을 은유적으로 표현

④ 어머니의 노래 (작사·작곡 김종서)

Part - Ⅰ <땅 Ⅰ>

Part - Ⅱ < 어머니의 노래 >
Mother! 흐린 두 눈에 내일의 꿈을 꾸나요. 마냥 녹슬어만 가는 당신의 어린 아이들 무장한 캐터필러 광란의 노래 다 포근히 감싸며 안아 주셨죠. Mother! 폭 패인 두뺨에 슬픈 눈물 고이네! Mother! 이젠 알아요. 내일도 해는 뜨는 걸 하지만 날개 돋힌 오만은 차갑게 그 빛을 가리네. Mother! 다 포근히 감싸며 안아 주셨죠.
(랩) 시커멓게 그을린 동심들과 컴퓨터의 포로가 된 내 아이 도시에 엉켜진 거미줄 전파 공해 이 거리를 헤매는 표정없는 얼굴들.
Mother! 다음 세상엔 무엇이 기다리나요.

Part - Ⅲ < 땅 Ⅱ >
타오르는 연기 뒤로 전사들의 메아리. 내 형제를 지키는 자랑스런 T.N.T 이글대는 태양 아래 춤을 추는 자동차 구멍뚫린 하늘 아래 내리쬐는 검은 빛 다시 한번 들려줘 어머니의 노래를 희미하게 식어가는 어머니의 노래를

Part - Ⅳ < 안녕히 >
이제는 모두 지워버리고 이젠 잠을 잘 시간. 때로는 힘겨운 나날들 한숨 뒤로 묻어요. 그대 품에 가득 안기어 어제의 수고에 감사드려요. 새들도 모두 집을 찾는데 우리 이젠 안녕히 슬픔도 이젠 안녕히


⑤ 오월의 햇살 (이선희 노래)
어디선가 날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보면 / 보이는건 쓸쓸한 거리 불어오는 바람뿐인데 / 바람결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쓸어올리면 / 가던 걸음 멈추어서서 또 뒤를 돌아보네 / 어두운 밤 함께하던 젊은 소리가 허공에 흩어져가고 아침이 올 때까지 노래하자던 내 친구 어디로 갔나 / 머물다 간 순간들 남겨진 너의 그 목소리 / 오월의 햇살 가득 건너 우리 마음 따스하리

⑥ 불씨 (한돌 작사·작곡 신형원 노래 1982)
그 누가 나를 / 사랑한다고 해도
이젠 사랑의 불꽃 / 태울 수 없네
슬픈 내 사랑 / 바람에 흩날리더니
뜨거운 눈물 속으로 / 사라져버렸네
텅빈 내 가슴에 / 재만 남았네
불씨야 불씨야 / 다시 피어라.

* 이 노래는 5공 초기 젊은이들의 좌절감과 패배감을 노래하고 있다. '불씨'는 야망과 정열과 투쟁과 항쟁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 불꽃은 타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비록 자기변명, 자기 정당화에 불과할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두고 보자는 최소한의 자존심, 바로 불씨는 살아있다는 사실을 끝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불꽃은 꺼져버렸지만 또 타오를 수 있는 불씨만큼은 가슴 속에 살아있기에 '절대적인 힘'에 부딪쳐 물러나도 권토중래를 기약한다는 자기 위안의 의미는 충분히 가지고 있었기에 대학가에서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킬 수 있었다.

⑦ 여러분 (윤항기 작사·작곡 윤복희 노래)
윤복희의 히트곡 <여러분>은 '단 한분'의 심기를 건드려 불경죄로 쓴맛을 본 대표적 노래다. 이 노래는 원래 가수 남진과의 이혼으로 가슴앓이를 하고 있던 윤복희를 위로하기 위해 그녀의 오빠였던 윤항기가 1979년 만든 노래였다. 1주일간 문을 닫고 버티던 윤복희는 결국 이 노래로 문을 열고 힘없이 악보를 따라 부르던 그녀는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 내가 위로해줄께
네가 만약 서러울때면 / 내가 눈물되리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 때 / 내가 내가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 때 / 내가 너의 벗되리라
나는 너의 영원한 친구야 /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너의 기쁨이야.....

이들 남매는 <여러분>이 단 한사람이 아닌, 세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이듬해 서울 국제 가요제에 출품했다. 오빠는 지휘봉을 잡고 동생은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대상을 거머쥐었다. 어쨌거나 <여러분>은 여러사람이 좋아했던 곡이였다. 전두환 대통령도 그 '여러분'중의 한명이었다. <여러분>의 인기 덕분에 조영남과 함께 청와대 영빈관에 초대되었다. 대통령을 비롯해 내외 귀빈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자리였다. 그 지엄한 자리가 <여러분>의 생명이 끝날 자리일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무대에 나서기 전 노래 연습을 할 때였다. 청와대측에서 주문이 들어왔다. 정중하게 가사를 바꿔 달라는 거였다. 노랫말 중에 '네가' 혹은 '너는'하는 부분이 반말투여서 대통령 앞에서 부르는 것은 좀 심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윤복희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네가' 대신 '그대' '당신'등이 거론되기도 했지만 노래의 가사를 바꾸는 것은 곡을 바꾸는거나 마찬가지라며 요구를 물리쳤다. 영빈관 객석과 무대와의 사이는 5m정도 됐다. 먼저 무대에 오른 윤복희는 내외빈이 가득한 무대를 향해 <여러분>을 불렀다. 열창이었다. 그러나 그 '네가'가 결국 말썽이었다. 문제는 반말만이 아니었다. 대통령 내외를 향해 아예 손가락까지 까딱대니 대통령은 물론 주위 분위기까지 어색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불경'도 이만저만한 '불경'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 이후로 그녀에게 청와대 초청은 더 이상 없었다. 그리고 노래의 방송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면서 <여러분>의 인기는 시들해지고 말았다.

<참고4> 그리고 남겨진 이야기....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할머니께서 광주에 계시기 때문에 설날만 되면 광주에 내려가곤 합니다. 작년 이맘때 SBS가 지방에서는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모래시계]를 서울에서 본 후 다시 광주 유선 방송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저도 나름대로 감동을 받으며 보았지만, 직접 광주 항쟁을 겪으신 할머니와 막내 삼촌 등 광주에 계신 친척들이 모래시계를 보며 느끼는 것들은 분명 저와 달랐습니다. 친한 친구가 총에 맞아 죽고, 옥상에서 저격수가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보며 고추장을 푸러 가셨다는 할머니..... 막내 삼촌은 몇 일 동안 어두컴컴한 다락방에 숨어 할머니께서 갖다 주시는 밥으로 생활하셨다고 합니다. 아주 먼일로 여겨졌던 일들을 직접 들으면서 한 사람의 야망이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역사는 계속 반복됩니다. 사람의 욕망으로 실수를 또 반복합니다. 또 언젠가 비극은 시작되겠지요. 그것은 필연적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역사입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역사를 배우면서 반성을 합니다. 과거의 일들을 돌이켜보며 다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하자고 다짐을 합니다. 사람의 욕망으로 비극은 언제나 역사 속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역사를 다시 배우며 욕망을 억제하고, 모두 다 같이 행복할 수 있게 노력하려는 태도가 바로 역사를 배우는 태도가 아닐까요?
(명덕외고 96년 졸업생 불어과 김민선 )

망월동
언니 오빠들이 봄비를 맞으며 / 노래를 부릅니다.
무덤 속의 오빠들에게 / 들려 주는 노래입니다.
안경 쓴 할머니가 / 비를 맞으며
엉엉 웁니다.
무덤 속의 언니가 / 보고 싶은가 봅니다.
노래 소리를 듣고 / 무덤 속에서
제비 꽃이 피어납니다.
엉엉 우는 소리를 듣고 / 풀잎들이
할머니 머리를 만져 줍니다.
5.18 묘역에서는 / 비가 와도
깃발이 펄럭입니다.
김진경 (광주 서석국교 4학년)

아기 천사에게
태어났으면 나와 동갑인 중학교 1학년이 되었을 아기 천사야! 너의 아빠가 엄마의 묘비에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라고 적은 걸 보고 나는 너를 아기 천사라고 부른다.
만삭의 어머니들처럼 불룩불룩한 무덤들이 너무 많아서 달님도 조용히 살펴간다는 망월동. 소풍 가방에 챙겨 온 치즈, 햄버거와 콜라를 먹으려다가 너의 영전에 바친다. 너도 이런 걸 좋아했을 거야.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최루탄 터지지 않은 오월이야. 5월은 언제나 그렇게 맵고 눈물 흘리며 숨어 있어야 하는 계절로만 알았지 뭐야. 쓰러진 엄마 뱃속에서 펄쩍 펄쩍 뛰었다는 말을 듣고 너라도 살려내지 못한 그 순간이 무척 안타까웠단다. 엄마가 쓰러지면 아기도 쓰러지는 것처럼 망월동이 쓰러지면 나도 쓰러지겠지? 엄마가 묻히면 아기도 따라 묻히는 것처럼 5월이 묻히면 희망도 따라 묻혀 버리겠지?
네가 태어나려다 만 세상은 너를 죽인 사람들에겐 천국 같은 곳이지만 너의 아빠와 같은 분들에겐 눈물이 마르지 않는 곳이란다. 민주화란 말은 참 슬퍼. 무덤 위에서 피어난 민들레 꽃처럼 봄비 속에서 노오랗게 떨고 있는 생명 같은 거야. 초록 풀잎들이 싱싱하게 자라는 걸 보면 무덤 속의 거름으로 태어나는 누군가가 있다는 거야. ..... 우리의 초록빛 소원을 기름지게 키우는 아기 천사야. 햄버거 봉지를 든 내 손이 부끄러워 목이 메인다. 쑥쑥 자라난 풀밭을 헤치고 불쑥 뛰어오르는 개구리 왕자처럼 깜짝 놀라게 찾아올 그날을 위하여 우리의 몸을 맑은 샘물로 채워 두어야겠어.
안녕! 나의 친구 아기 천사야.


박건호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지금은 약 4시가 넘은 새벽입니다. 이것 저것 하다보니 잘 시간을 놓쳐 뜬 눈으로 밤을 새게 되었어요. 제가 원래 좀 밤잠이 없어서요. 이 늦은 시간에 펜을 든 건 아까 보충시간때 배운 '5.18 광주사태'에 대해 몇자 적어보려구요.
제가 5.18에 대해 알게 된 건 초등학교 6학년때였어요.
그해 초에 전 광주로 전학을 갔고 또 그 무렵 김영삼 전 대통령이 취임을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 김대통령이 5.18을 크게 떠들썩하게 만드는 것을 보며 많은 광주인들은 비난을 하였습니다. 저의 담임선생님께서도 5.18사태를 정치에 이용해먹으려는 수작이라면서 도덕시간마다 목에 핏대를 세우시며 말씀하셨던게 기억이 납니다. 근데 그때 당시엔 저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잘 몰랐어요. 전 제가 광주에 1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동안 살면서... 정말 많은 걸 경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 우리나라 정치에 대한 그들의 관심들... 어린 나이였지만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나 그들은 5.18을 잊지 못하고 있었고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저의 세대들에게도 그 정신을 가르치고 그들의 아픔을 잊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들이 5.18때 희생된 많은 사람들을 기리고 그 정신을 계속 계승한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제가 느끼기엔 그들은 뭔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아주 단편적이고 작은 경험들이었지만 제가 본 광주인들은 너무나 배타적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역사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이란 사실에 대한 분노 그리고 무조건적인 적개심이 전 너무 무서웠고 한편으로는 불쾌했습니다. 물론 군부가 저지른 용서받지 못할 과오는 비난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들의 증오는 거기에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호남지방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국민들 또 그 중 영남 지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호남인이 아니면 누구든 적으로 보는 닫힌 그들의 사고방식은 분명 고쳐져야 합니다.
그 당시 우리 국민은 모두가 희생자였고 그 상처를 치유하려면 국민 모두는 서로 화합해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그들이 이렇게 하기란 쉽지 않다는 건 알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치른 희생과 억울함에 대한 상처 역시 정치인들의 보상과 사죄 또한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피해 의식도 버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너무 냉정하다고 누가 그러긴 하지만... 저의 이 말도 안되는 글을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몽사몽간에 쓴 거라 저도 정신이 없네요. 그리고 진짜 현대사를 고 3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배우게 됐는데 정말 재미있고 감동적인 수업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 ○ 올림

2004.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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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퍼 왔습니다.

아주 자료가 상세하기에 발표하실때 요약해서 잘 하세요^^

1) 5.18 발생배경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독재정권은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경제성장에 집착하였고 솟구치는 민주화 운동에 대한 극심한 탄압으로 일관하였다. 저곡가 저임금 정책은 경제성장을 위한 필수 조건이었으며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는 민주화운동 세력을 압살하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우선 수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운동은 전국적으로 그칠 줄 모르고 전개되었다.
마침내 한계에 도달한 박정희 독재정권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자신의 심복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때부터 군부내에서 자신의 세력을 규합해 온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 일당은 오히려 민주화 과정의 과도기를 틈타 자신들의 집권 시나리오를 준비하여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한 다음, 당시 분출되고 있던 전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민주화운동세력과 야당의 정적을 제거해야 했다. 그 제물이 광주였다. 민주화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온 곳이며 야당의 정적 중에서 가장 많은 대중적 지지를 받고있던 김대중의 정치적 고향이 전라도 광주였던 것이다.

전라도 광주는 70년대 박정희 개발 독재 때부터 희생양이었다. 철저히 소외되었고 경제에서는 낙후되었으며 우리 민족을 다시 동서로 가르는 지역감정의 볼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장은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마저 내던지며 투쟁해 온 민주투사의 고장이었다. 전두환 신군부 일당의 학살만행에 맞서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시민전체가 일심동체로 저항하였던 것은 정신적 측면에서든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든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피의 진압으로 5·18민중항쟁은 끝났지만 그 후 청년학생을 비롯한 양심적인 민주인사들과 민중운동에 의해 전두환 일당을 역사의 심판대에 세움으로서 항쟁의 정당성은 온 천하에 입증되기에 이르렀다.


2) 5.18 항쟁의 의의

5·18민중항쟁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 면면이 이어져 내려온 자발적인 민중운동의 소산이다. 조선말기의 갑오농민혁명, 일제 강점기의 3·1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 등 온갖 탄압에도 굴하지 않은 민족해방투쟁,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학생혁명 등의 정신을 이어받은 밑으로부터 개혁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항쟁이었던 것이다.

5·18민중항쟁은 깨어있는 민중이 민주사회 발전의 원동력임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나라의 민주화와 민족의 자주적인 통일, 그리고 평등 세상을 향한 사회진보 운동의 일대 전환점으로 자리잡았다.

5·18민중항쟁은 당시에는 피의 진압으로 패배하였지만 이후 전개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유신체제를 계승한 제5공화국 정권의 부도덕성을 만천하에 드러낸 증거가 되었고, 나아가서는 불법적인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한 정치군부 세력을 심판하였으며 마침내는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맞선 민중의 자위적 무장항쟁이 국민저항권의 적극적 행사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5·18민중항쟁 시기의 수준 높은 나눔과 자치, 연대의 공동체 정신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의 훌륭한 모범이자 압제에 저항하는 세계 진보적인 사람들의 가슴에 가장 경이로운 민중항쟁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이제 5·18민중항쟁은 저항과 단죄를 넘어 나눔과 자치, 연대의 공동체 실현을 위해 우리 모두가 그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은 물론, 인류 역사의 숭고한 가치로 승화시켜나가야 할 우리 모두의 유산이다.

3) 5.18 민중항쟁 상황일지



5월 17일 (토요일, 맑음)
·21시 40분 : 비상국무회의, 비상계엄 전국확대 의결
·23시 00분 : 민주인사, 복적생, 학생운동 지도부 등 예비검속
·24시 00분 : 비상계엄 전국확대, 광주시내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 및 학생 연행

5월 18일 (일요일, 맑음)
·9시 40분 : 계엄군에 의해 전남대생 50여명이 교문 앞에서 등교 저지 당함.
·10시 00분 : 학생들이 "계엄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시위
·10시 15분 : 곤봉을 휘두르는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으로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짐.
·10시 20분 : "금남로로 가자"는 구호와 함께 학생들이 금남로로 이동하기 시작
·15시 40분 : 유동 3거리에 공수부대가 등장하면서 진압작전 감행
·19시 02분 : 계엄사령부, 광주지방 통행금지시간이 저녁 9시로 앞당겨졌다고 발표

5월 19일 (월요일, 오후부터 비)
·3시 00분 : 증파된 11여단 병력, 광주역 도착
·9시 30분 : 시민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임동, 누문동 파출소 방화
·10시 00분 : 시민들 수가 점차 불어나면서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 전개
·14시 40분 : 조선대로 철수했던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되어 무리한 진압작전 전개
·15시 00분 : 시내 기관장 및 유지들, 회의를 갖고 시위 진압을 완화하도록 건의
·16시 30분 : 계림파출소 근처에서 조대부고생 김영찬이 계엄군의 총에의해 부상
·20시 00분 : 수만명의 시민들 "전두환 타도" 외침.

5월 20일 (화요일, 오전에 약간의 비)
·8시 00분 : 고등학교 휴교조치
·10시 20분 : 카톨릭센터 앞에서 남녀 30여명이 속옷만 입힌 채 심하게 구타당함. 공수부대와 시민간의
공방전 계속
·18시 40분 : 금남로에서 200여대의 택시가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차량시위를 벌이자 시위대
분위기 고조
·20시 10분 : 시민들이 도청을 향해 금남로, 충장로, 노동청 방면에서 공수부대, 경찰과 대치
·21시 05분 : 노동청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저지선으로 돌진하여 경찰 4명 사망
·21시 50분 : 광주MBC건물 방화
·23시 00분 :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의 발포로 시민 2명 사망



5월 21일 (수요일, 맑음)
·0시 35분 : 노동청 방면에서 군중 2만여명이 계엄군과 공방전 전개
·2시 18분 : 시외전화 두절
·4시 00분 : 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금 남로에 등장
·4시 30분 : 광주KBS건물 방화
·8시 00분 : 시위대, 광주공업단지 입구에서 20사단 병력과 충돌
·10시 15분 : 실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 맨 앞으로 교체
·10시 19분 : 광주세무서건물 전소
·11시 10분 : 대형헬기, 도청광장에 도착
·12시 59분 :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몰고 온 장갑차 1대 도청광장으로 기습 진출
·13시 00분 :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 울려 퍼지면서 공수부대 사격 시작
·13시 20분 : 청년들이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을 받고 계속 쓰러짐
·14시 15분 : 도지사, 경찰헬기에서 시위해산 종용하는 설득 방송
·14시 35분 : 시민들이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용트럭, 장갑차 수십대 획득
·14시 40분 : 시민들이 지원동의 탄약고에서 TNT 입수
·15시 48분 : 공수부대원들이 주요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
·16시 00분 : 화순, 나주지역에서 무기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 전개
·16시 43분 : 학생들, 전남대병원 옥상에 기관총(LMG) 2대 설치
·17시 30분 : 공수부대, 도청에서 조선대학교로 철수



5월 22일 (목요일, 맑음)
·9시 00분 :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 집결
·10시 30분 : 군용헬기 공중선회하며 "폭도들에게 알린다"는 내용의 전단 살포
·11시 25분 :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헌혈 호소
·12시 00분 : 도청 옥상의 태극기가 검은 리본과 함께 반기 게양
·13시 30분 : 시민수습위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분소 방문, 7개항의 수습안 전달
·15시 08분 : 서울서 대학생 5백여명 광주 도착, 환영식 거행
·15시 58분 :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 개최
·17시 18분 : 수습위 대표, 상무대 방문결과 보고
·17시 40분 : 도청광장에 시체 23구 도착
·21시 30분 : 박충훈 신임국무총리, "광주는 치안 부재상태"라고 방송

5월 23일 (금요일, 맑고 한때 흐림)
·8시 00분 : 학생들, 시민들에게 청소 협조 호소
·10시 00분 : 시민 5만여명이 도청광장에서 집회
·10시 15분 : 학생수습위 자체 특공대 조직하여 총기 회수작업 시작
·11시 45분 : 도청과 광장주변에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 게시
·13시 00분 : 지원동 주남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 17명 사망
·15시 00분 :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계엄사의 '경고문'전단이 시내전역에 살포
·19시 40분 : 최초 석방자 33명 도청광장에 도착

5월 24일 (토요일, 오후에 비)
·13시 20분 : 공수부대, 원제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
·14시 20분 : 송암동에서 공수부대와 전교사부대간의 오인 총격전 발생
·14시 50분 :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5월 25일 (일요일, 비)
·11시 00분 : 김수환 추기경의 메시지와 광주항쟁 구호대책비 1천만원 전달
·15시 00분 :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7시 00분 : 재야 민주인사들, 김성용 신부의 4개항 수습안에 대해 만장일치 채택
·21시 10분 : 학생수습대책위원들, 범죄발생 예방과 식량공급 청소문제등 논의

5월 26일 (월요일, 아침 한때 비)
·5시 20분 : 계엄군, 화정동 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
·8시 00분 : 시민수습대책위원들, 계엄군의 시내진입 저지를 위해 죽음의 행진 감행
·10시 00분 :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4시 00분 : 학생수습위원회,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항 요구
·15시 00분 :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7시 00분 :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 외신기자들에게 광주상황 브리핑
·19시 10분 : 시민군, "계엄군이 오늘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조치 시킴.
·24시 00분 : 시내전화 일제히 두절



5월 27일 (화요일, 맑음)
·3시 00분 :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
·4시 00분 : 도청 주변 완전 포위, 금남로에서 시가전 전개
·4시 10분 : 계엄군 특공대,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들에게 사격
·5시 10분 : 계엄군, 도청을 비롯한 시내전역 장악하고 진압작전 종료
·6시 00분 : 계엄군,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선무 방송
·7시 00분 : 공수부대, 20사단 병력에 도청 인계
·8시 50분 : 시내전화 통화 재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www.518.org/ 에서 확인하세요~

2004.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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