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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성당에서 고해성사 보는방법 좀 알려주세요ㅠㅠ
kjhw**** 조회수 388 작성일2012.12.08

 안녕하세요,

세례받고 열심히 성당 다니다가 집안사정으로 인해 9월달부터 지금 현재까지 성당에 나가지 못했습니다.ㅠㅠ

첨에 한달정도 못나갔는데 그 이후부터는 다시 성당에 나가야지 하면서도

고해성사를 어떻게 봐야하나 하고 걱정만 하다가 시간이 어느덧 이렇게 흘러버렸네요..

내일 다시 용기내어 성당에 나갈려고 하는데 고해성사 보는 방법 좀 알려주세요~

고해성사는 세례받고난후 딱 한번 본 적이 있는데 오래되어 기억이 잘 나지않네요..;;

고해성사하는 순서랑 저의 죄를 얘기할때 어떤식으로 얘기해야 하는지도 알려주세요..^^;

 

참, 그리고 고해성사 보고 난후에 신부님께서 보속?을 주셨던걸로 기억하는데

그걸 받은후 미사를 보고 난 후에 보속 주신것을 해도 되나요?

제가 미사를 지금 몇달간 빠졌는데 고해성사 보고나서 신부님께서 주신 보속을 하지 않은상태에서

바로 미사참여 하면서 영성체도 모셔도 되는걸까요?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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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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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개 답변
1번째 답변

 가톨릭 기도서에 보면 25쪽에 고해성사에 대하여 나와 있습니다.

참고하시고, 없으시다면

1. 먼저, 지은 죄를 모드 알아내고

2. 진정으로 뉘우치며

3.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로 귿게 결심하고

4. 고백의 기도와 통회의 기도를 바친다. (이 또한 기도서의 차례에 보면 찾을 수 있습니다.)

 

고해소에 들어가 장괘를 하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굳게 믿으며 그 동안 지은 죄를 뉘우치고 사실대로 고백하십시오.(생락 가능)

● 아멘.(함께 생략 가능)

● 고해한지 (           )됩니다.

    -예- (  언제  ) 세례받고 첫 고해 한 후 처음입니다.

그 동안 미사 참례 못한 것과 지은 죄에 대하여 고백하고

● 이 밖에도 알아내지 못한 죄도 모두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면 신부님께서 보속을 주시고

† 주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평안히 가십시오.

● 감사합니다.

 

하고 고해소에서 나와 보속으로 주어진 것을 이행하시면 됩니다.(길다면 미사 후에 해도 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미사 전에 일찍 가서 고해를 보았다면 영성체를 하여도 되지만 고해성사를 못 보고 미사에 참례하였다면 영성체를 해서는 안됩니다. 그 또한 성체 모독으로 대죄가 됩니다.

 

 

2012.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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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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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초인
가톨릭 52위, 인체건강상식, 신경외과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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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해성사 보기 전.. 성당의자에 앉아서 자기 성찰 부터 하시구요.... 고해실 들어가셔서.. 고해성사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보속이란 언제든 하면 되시는데... 즉시 하시는 게 좋죠...^^ 까먹을지도 모르니...^^

 

미사 후 보속을 해도 상관 없어요^^; 고해성사를 본 후 영성체 하시면 되요^^;

2012.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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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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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군사
초인
개신교 60위, 가톨릭 62위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천주교인 가운데 고해성사 문제 때문에 고민을 하는 교인이 많은 줄 알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고해성사를 신부에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톨릭의 고해성사는 성경의 내용을 왜곡하는 잘못된 교리입니다

지은죄는 묵혀두지 않고 깨달은 즉시 직접 하나님께 회개기도를 수시로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의 죄사 사해지는 것이 형식적으로 천주교의 고해성사나 영성체에 참석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은 자가 하나님과의 1대1의 관계에서 얼마나 진실된 자세로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느냐 하는 회개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의 도를 얼마나 확실히 믿느냐 하는 믿음과 신뢰의 정도에 따라 죄사함의 은총을 받고 못받고가 결정될 것입니다

천주교의 고해성사란 어떤 것인가?

천주교회에서는 고해성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교회와 화해 하고자 하는 사람은 진지하게 양심을 성찰해서 기억해낸 아직 고백하지 않은 모든 대죄를 사제에게 고백하여야 한다”(제2편544쪽)

“교회의 계명에 따라 모든 신자는 사리를 분별할 나이에 이른 후에는 매년 적어도 한번 자기의 대죄를 성실히 고백할 의무가 있다”(교회법제989조,제2편533쪽)

“교회의 권위자에게 사죄권을 받은 신부들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할 수 있다”(제2편544쪽)

천주교회의 사제들의 사죄권 주장은 마태16장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었고, 그 열쇠로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인다고 한 말씀에 기인합니다. 그 말씀은 곧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에게 사죄권을 주심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또한 베드로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천주교회의 인물이고(베드로는 제1대 교황), 그들로부터 그 이후 교황에게 그 사죄권이 계대되어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천주교회에만 사죄의 권한이 있고, 그 교황을 통하여 사죄권이 주어진 신부들의 여러 성사(聖事)들을 통해서만 신자들의 죄가 사해지고 구원을 받게 된다고 하는 논리입니다

참고로 신부들이 죄사함을 베푸는 성사(聖事)를 열거하면

(1) 세례성사는 개신교의 세례식과 같은 것인데 중요한 점은 이 세례성사를 통해서만 신자 의 원죄가 사해진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2) 성체성사는 성찬식을 말하는데 이 영성체에 참여하여 떡과 포도주를 받을 때에 그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하여 그 예식에 참예한 자의 죄와 허물을 깨끗이 씻고 보양하며 자범죄를 사하게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3) 고해성사는 신부에게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것인데 천주교회에서는 자범죄를 대죄와 소죄로 구별하여 대죄는 반드시 신부에게 고백해야 하고, 그 고해성사를 받는 신부를 통해서 그 죄가 사해진다고 믿는 것입니다 .

(4) 병자성사는 종부성사라고도 하는데, 이는 사람이 죽을 때 눈,코,귀,손,발에 기름을 바르고 기도해 주는 의식으로서, 이러한 신부의 종부성사로 일평생 그 지체로 지은 죄를 용서해주는 의식입니다.

이러한 천주교회의 교리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근본적으로 신자들을 하나님과 예수님에게서 끌어내려서 천주교회에게로, 더 정확히는 인간(마리아, 성인, 사제등)들에게로 집중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죄의 교리에서 극치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천주교회의 사죄의 교리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범죄하여 불안한 인간의 심리를 적절히 이용하여 신자들을 교회에 종속시키고 있을 뿐, 실제는 죄 사함을 위해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길 즉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요 중보자이신 예수님께로 가는 길을 아주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23:14절에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신 그 실제를 그들이 예수님 앞에 설치해 놓은 인간장막(교황, 마리아. 성인. 신부)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천주교의 신부에 의한 고해성사의 사죄의 교리비판

마가2:1-12에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 주었고, 이를 보고 서기관들이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분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했는데 이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으시고 그렇다 내가 바로 하나님으로서 내게 사람의 죄를 사할 권능이 있는 것이다 라고 인정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직접 중풍병자의 병만 낫게 하는 것이 쉽지만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그 병자의 죄까지도 사해주셔서 근본적으로 그 병자의 문제를 치유하시는 일을 하신 것은 예수님 당신이 바로 하나님이요, 예수님 당신에게 사죄권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사죄권이 있음은 당연하고 분명합니다. 그 분이 하나님이요, 대속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요, 대속주이신 주님만이 인간의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죄를 사해줄 권세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전체가 가르치고 있는 복음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것이 아닙니까?

천주교회의 주장은 이 예수님의 사죄권이 제자들에게, 또 그것이 천주교회의 사제들에게 계승되어 주어졌다는 주장인데, 그러나 그것은 엉터리 주장입니다

또한 그러한 주장의 성경의 근거로 들고 있는 성경의 구절도 왜곡인 것입니다

천주교회에서 말하는 근거 중 첫째는 마태16장에 나와 있는 대로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천국의 열쇠를 주었고, 또한 그런 베드로에게로부터 계승되어 내려오는 사람이 천주교회의 교황이니 그에게 사죄권이 있고, 그로부터 사죄권을 받은 천주교회의 신부만이 사죄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16장에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준다는 것은 자연인간 베드로 개인에게 준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얼마 안 있어 사탄의 자식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 그 허물 많은 인간에게 무슨 천국 열쇠를 준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바로 알고 대답하게 한 그 신앙과 그 고백 그 예수의 복음안에서 죄를 풀고 매는 권위가 주어지게 된다는 뜻이요 그 신앙의 터 위에 교회가 세위지고, 천국의 열쇠가 주어진다는 뜻인 것입니다 .

즉 예수님을 구세주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믿음과 그 고백안에서 죄사함의 역사, 곧 죄로부터 해방받는 역사가 일어나고, 예수님의 몸된 교회가 세워지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약성경의 많은 다른 곳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죄사함을 얻게 하고 의롭다함을 얻게 하며 영생에 이르게 한다고 말씀하며 그에 관한 믿음이 바로 교회의 터가 되는 반석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마태16:18, 로마서9:33, 고린도전서10;4, 베드로전서2:8)

또 천주교회만이 베드로의 사도권과 최고수위권을 승계한 유일한 교회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 근거한 주장이란 말입니까?

베드로에게 예수를 구주요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믿게 한 성령의 감화와 감동, 그 성령님의 역사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고 믿고 고백하고 따르는 무리들이 생기는 것이며 이런 믿음의 성도들의 헌신으로 또한 주님의 몸된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성령의 역사로 세워지고 진행되는 고금의 천하의 모든 교회는 다 같은 주님의 교회요 또한 그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도 다 같은 주님의 지체들이요 형제들인 것입니다.(로마서12:3절이하)

이 비밀을 모르고 천주교회만이 베드로에게서 바통을 이어받은 유일한 교회요, 천주교회 사제만이 사죄권을 받은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천주교회가 인위로 조작한 교리요 성경의 아전인수격의 해석인 것입니다 .

또한 천주교회에서는 요한복음20:22-23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 하시고,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말씀하신 것을 근거 삼아 사죄권이 제자들에게 계승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일견 그럴듯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체적인 맥락해서 보고 부분을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귀를 보는 의사가 전 신체에 관하여 잘 알고 전 신체와 관련하여 귀를 진찰하고 치료해야 되지, 귀만 보고 귀를 치료했다가는 귀는 물론 생명까지 위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해석도 그와 같습니다.

성경의 다른 곳을 보십시다!

먼저 성경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죄를 사해 줄수 있음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각자가 직접 하나님을 상대하여 하나님께서 죄사함 받는 은혜의 수단과 방편으로 마련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를 믿고, 그의 십자가 앞에서 죄를 회개하면 그 모든 죄가 사해지는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 사람을 통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일서1:9에 보면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말씀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직접 죄를 자백하면 저가 들으시고 우리 죄를 직접 사해준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신약성경 전체, 앞뒤와 연결해서 읽어 보면 더 확실해 집니다.

결코 신부를 통해서, 신부가 죄를 사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누가복음18:9-14에 보면 세리의 기도가 나오는데, 세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기도했고, 그 결과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인간을 통하여, 어느 인간이 사해 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직접 자백하고, 하나님이 직접 사해 주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 셨을 때에 그 옆의 십자가에 달려 있던 한 강도는 예수님을 믿은 것 하나로 죄 사함을 받고 그날 즉시 죽자마자 낙원으로 갔습니다.

어느 인간을 통하여, 어느 인간이 죄를 사해 준 것이 아니고 주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되어진 것입니다.(누가복음23:39-43)

또 사도행전16:31에도 보면 바울이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복음을 전수받은 간수와 그의 가족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받았고 구원받은 후에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바울에게 세례 받은 후에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피공로를 믿는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 것이지 결코 사제들의 성사에 참여하는 것으로 죄사함 받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죄를 용서받고 구원에 이르는 방편은 전적인 주님의 은혜로,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되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원죄도 전적인 주님의 은혜로 사해지는데, 자기가 그 분과 그분의 대속 공로를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고, 자범죄도 전적인 그분의 은혜로 사해지는데, 이도 자기가 그분의 공로를 의지하여 회개함으로만 되는 것임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외에 다른 절차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 죄를 사하기에 충분한 완전 대속을 이루어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시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다리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에베소서2:8-9, 로마서4:16, 요한1서1:9)

실제로 예수님 당시나 예수님의 승천후에 이루어진 죄 사함 받는 즉 구원의 역사는 다 이렇게 개인이 복음을 들은 후 주님을 상대하여 믿고, 회개하는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 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사도들이나, 복음의 일꾼들은 모든 개개인이 그렇게 주님을 직접 만나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깨우치는 돕는 사역을 한 것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도움을 받아 주님을 만난 자들이 많이 있음과 동시에, 이런 하나님의 종들의 도움 없이도 주님과 직접 교통하여 구원받은 자도 많이 있는 것을 성경이 말씀한 것입니다.(사도행전2:38, 3:16, 10:1-2, 10:43-48)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부활 후에 주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며 “누구에게든지 죄를 사해 주면 사해주고, 그렇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으리라”하신 말씀을 성경전체와 조화시켜 해석하면 이 말씀은 사도행전1:8의 말씀처럼 너희들이(제자들) 성령의 권능을 받아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을 증거하여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므로 죄 사함을 받게 하라는 말씀이요, 그 일을 하면 곧 바로 죄를 사함받는 역사가 일어나고, 복음 전하는 일을 안 하면 그를 그대로 죄인으로 두는 것이니 심각히 여겨 나의(예수님의 구원의 도) 복음을 전하는데 힘쓰라는 주님의 간곡한 부탁의 말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단순히 사도들에게 죄사함을 얻게 하는 권세를 주신다는 말씀이 아니고 사도들이 전하는 예수의 복음이 그 복음을 받고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사함의 은총을 준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을 할 때 그것이 성경의 뜻과 모순이 되지 아니하고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님의 복음과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에게 그 명령을 받은 제자들의 행동을 보십시요!

그들이 무엇에 집중하여 힘썼습니까?

사람들에게 천주교에서 말하는 성사를 행하기에 힘을 썼습니까?

자기들이 직접 다른 이의 죄를 사해 줄려고 힘을 썼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관심을 갖고 힘쓴 것은 성령 받아 예수님의 복음을 능력있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자기들에게 주신 명령이요 사명인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예수님의 복음을 전수받은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믿고 회개할 때에 죄 사함을 받는 구령의 열매가 수없이 많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사도행전20:24, 고린도전서1:17)

생각건대 만일 신부를 통해서, 신부가 주관하는 성사를 통해서만 죄를 사해 줄 수 있다면 신부를 만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은 죄 사함 받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얘기인데 그렇게 무리하고 불공평하고 무자비한 하나님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의 대속이 그런 중재자나, 중재의 행위를 통하여만 효력을 발휘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성경이 가르치는 예수님의 대속의 완전성을 제한하는 것이니 이런 교리를 어떻게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가정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정말로 사죄권을 주었다면 그것이 또한 천주교회의 사제에게만 다시 주어졌다는 근거는 또한 성경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는 대로 죄 사함과 구원의 문제는 개인과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들이 예수의 복음을 듣고 주님을 믿을 때, 주님의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 자기의 죄를 고백할 때, 어떤 사람이든지 과거의 죄가 사해지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이 우리의 사죄에 필요한 조건을 더 요구할 것 없이 완전하게 이루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감사함으로 믿고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주교 사제들의 성사를 통해서만 죄가 사해지고,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하는 교리는 성경에 없는, 성경을 곡해한 교리요, 주님의 완전 대속을 제한하는 아주 탈선된 교리입니다.

이러한 교리로 천주교회가 어떠한 유익과 권위를 향유하려고 할지라도 이는 결국 신자들이 어떠한 환경에서도 주님께 나아가 죄 사함 받을 수 있는 은혜의 길을 차단하고 있는 무서운 죄임을 알고 돌이켜 회개하고 철폐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징게의 채찍을 받아 결국은 망할 수 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2012.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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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수
맨 위에 분이 고해성사 보는 방법에 대해서 알려 주셨기에 그분 말씀대로 그대로 하시구요
참고로 고해 성사 볼때 ㅇ어떻게 고해를 하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밑에 글 시간 나시면 꼭 읽어 보시고 참고 하세요 고해 성사에 관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옥에 떨어지는 가장 큰 원인


어떤 처녀가 불행하게도 부끄러워서 고해하지 못할 큰 죄를 범하고 너무나 답답하고 걱정스러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친구들은 사연을 모르고 그녀를 위로하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시간이 흐르면 조금 나아질까 생각했지만 더욱 무서운 가시에 마음이 찔리는 듯했다.
  그러는 사이에 매우 열심하고 거룩한 친구 한 사람이 중병에 걸린 지 며칠 만에 죽게 되었다. 그 친구는 어떻게 죽음을 잘 예비하였던지 천사처럼 깨끗하게 임종했다.
  친구를 장례지낸 지 며칠 지난 어느 날 밤에 이 불쌍한 처녀가 깊이 잠이 들었을 때다. 누군가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놀라 깨었다. 그런데 그 소리는 분명히 죽은 친구의 목소리였다. 처녀는 겨우 정신을 차려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때 또 다시 소리가 들리기를, “잘 고해하라… 예수님이 얼마나 인자하신 어른이신지 알거든! 고해하라… 예수님이 얼마나 인자하신 어른이신지 알거든!” 한다.
  불쌍한 처녀는 이것은 분명히 하느님께서 죽은 친구를 시켜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비로소 용기를 내어 그렇게도 부끄럽고, 그렇게도 근심스럽고, 그렇게도 고통스러웠던 그 죄를 시원하게 고해해 버렸다.
  아! 고해소에서 나오는 처녀의 마음은 마치 무겁게 짓누르던 짐을 벗어버린 것처럼 거뜬하여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그 처녀는 친구들에게 “고해하라. 그러면 예수님이 얼마나 어진 어른이신지 네가 알 것이다. 고해하라. 그러면 예수님이 얼마나 사랑이 가득한 어른이신지, 이 말을 깨닫게 될 것이다.” 라고 거듭거듭 말했다고 한다.

  자주 고해하는 우리들이 지금까지 고해를 잘해왔으면 하느님께 감사하고 이후에도 항상 올바른 고해를 하도록 힘쓰자. 그렇지 않고 고해를 모독한다면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모고해의 결과는 의심할 여지없이 지옥으로 가는 영원한 벌이다.
  어쩌다가 한번 모고해를 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모고해를 하기 쉽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 영원한 멸망을 취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바른 고백을 하지 않기에 지옥으로 빠진다. 이것은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며, 내가 하는 말이 아니다. 성인 성녀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다.
  성녀 데레사는 이러한 초성적 영시를 보았다. 성녀가 어느 날 기도하고 있을 때 갑자기 눈앞에 불꽃이 활활 타오르지 않겠는가! 그 불꽃 사이로 큰 구멍이 열리더니 불행한 영혼들이 셀 수 없이 그 안으로 떨어졌다. 성녀는 너무 무서워서 눈을 하늘로 치뜨고 “오, 하느님!” 하고 소리쳤다. “오, 하느님! 지금 제가 보는 이 광경이 대체 무엇입니까? 지옥으로 떨어지는 이 많은 영혼들이 누구 것들이란 말입니까? 정년 이방인들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미신자들이겠죠? 헤브리아 사람들입니까? 터키 사람들입니까?”라고 물었다. “아니다, 데레사야, 그렇지 않다. 네가 지금 보는 저 영혼들은 너와 같은 신자들의 영혼들이란다.”라고 하느님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신앙심이 없는 영혼들입니까? 신자의 본분을 다 하지 못했거나 성사를 자주 보지 않은 냉담자들의 영혼이겠지요?”
  “아니다, 데레사야! 그렇지 않다. 이 영혼들은 너처럼 세례를 받아 신앙심을 가졌고, 너처럼 본분을 잘 지키던 사람들 것이란다.”
  “그러면 고해성사를 잘 안 보던 사람들이겠죠? 임종 때에도…”
  “아니다. 고해성사도 보았고, 임종 때에도 고해뿐 아니라 갖은 성사를 다 본 사람들이란다.”
  “주님이시여, 그렇다면 어째서 이 영혼들이 지옥으로 떨어진단 말입니까?”
  “그것은 고해를 잘못했기 때문이다. 데레사야! 너는 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 계시를 말해주고, 신부들에게도 고해의 중요함과 모고해에 대해서 자주 강론하고 자주 권하라고 해라. 나의 신자들이 이 좋은 약을 독약으로 만들고, 불쌍한 영혼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이 고해성사를 악용하기 때문이다.” 라고 하셨다.
  설마 모고해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으랴 하고 생각할 것이다. 성 알퐁소와 성 필립보 네리와 성 레오나르도 마우리시오는 불행하게도 모고해하는 사람이 많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뿐이 아니라 고해소에서나 임종하는 사람의 베개 옆에서 무수한 고백을 듣던 신부들이 자주 이 슬픈 경험을 했다. 묵상기도를 지도하던 신부들도 이러한 사실을 입증해서 지적했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사르네리 신부는 “불행하게도 모고해하는 사람이 많다. 오랫동안 경험한 신부들은 이를 잘 안다. 이것은 모두 최후 심판 때 알고 나서 깜짝 놀랄 일이다. 큰 도시뿐만 아니라 작은 시골에서도, 심지어 수도원에서도, 열심한 사람 중에도 모고해가 가끔 있다.”라고 말했다.
  한 예수회 신부가 중병에 걸린 어느 부인의 초청을 받아 마지막 고해를 듣고 사죄경을 염하려고 손을 드는데 시커먼 쇠손이 그 손을 잡아챘다.
  신부는 이상히 생각하고 부인에게 “여보세요, 부인! 당신이 혹시 무슨 죄를 빠뜨린 것이 없소?” 라고 물었다.
  “결코 그런 일이 없습니다. 신부님 저는 나흘 동안 고해를 준비했습니다.” 라고 부인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신부는 잠깐 눈을 감고 기도하고 나서 사죄경을 염하려고 하는데 또 다시 그 쇠손이 말렸다. 신부는 다시 부인에게 “여보세요, 부인! 혹시 부끄러워서 고해하지 못한 죄가 없습니까?” 라고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신부님은 저를 모욕해도 분수가 있지요. 제가 그래 모고해를 하는 줄 아십니까?” 라고 분개했다.
  신부는 또 다시 사죄경을 염하려고 했지만 그 시커먼 쇠손 때문에 할 수가 없었다. 이 이상한 사실 속에는 하느님의 무슨 암시가 숨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신부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부인에게 애원했다.
  “부인! 당신의 영혼을 스스로 배반하지 마시고, 당신의 영혼을 지옥에 빠지지 않게 하십시오!”
  그때야 부인이 부르짖기를, “신부님! 사실 제가 15년 전부터 모고해로 살아왔습니다.”라고 한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모고해는 생각만 해도 머리털이 곤두서는 일이다. 지옥불에 타는 것도 참혹한 일이겠지만 이 세상에서 느끼는 양심의 가책과 공포와 불안과 떨림도 참혹한 일이다.
  참으로 죽음은 바른 고해를 우리에게 가르친다. 성서도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거룩하고도 유익한 생각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고해할 때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은 준비가 된다. 이번 고해가 임종의 고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말은 일부러 그런 생각을 하라는 뜻이 아니다. 다음에 고해하기까지 우리가 살아 있으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갑자기 죽은 예가 드물지 않다. 저녁 식사를 잘 하고 밤에 이불 속으로 들어간 우리가 아침에 꼭 일어나리라고 누가 보증하겠는가?

  성 돈 보스코에 대해 전해오는 많은 일화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토리노에 있는 살레시오 수도원 성당에서 피정기도가 열리던 때였다. 원생들은 모두 착실하고 열심히 자신의 영혼을 위해 이 피정기도에 잘 참여했다. 그러나 그들 중에 단 한 원생만이 성 돈 보스코와 다른 신부들의 간곡한 지도와 좋은 권면에 따르지 않고 다른 원생들이 열심히 준비하고 고해성사를 보는데 자신만은 이번에는 고해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신부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갖은 애를 써보았다.
  그러나 그는 한결같이, “다음에 잘 고해하지요. 이번에는 못하겠습니다…. 차차 생각해보지요…. 지금 같아서는 제 마음을 제가 결정하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돈 보스코 신부는 그가 피정 마지막날까지 이러한 고집을 부리면서 마음을 돌리지 않는 것을 보고 한 가지 묘책을 생각해냈다. 돈 보스코 신부는 조그만 종이에 “오늘 밤에 네가 죽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 -돈 보스코-” 라고만 써서 그 생도의 이불 속에 넣어두었다.
  그럭저럭 밤이 되어 모두 자기 침실로 갔다. 고집쟁이 생도도 옷을 벗고 막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다가 뜻밖의 일을 당한지라 “아!”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그 종이 조각을 읽어보았다. 눈은 동그래지고, 가슴은 뛰고, 정신은 아찔해진다. 종이에는 “오늘 밤에 네가 죽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 -돈 보스코-” 이렇게 적혀있지 않은가!
  그 생도는 “돈 보스코! 돈 보스코!” 라고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외어보았다. “돈 보스코는 성인이다. 장래 있을 일을 잘 아는 분이다. 나는 오늘 밤에 죽을지도 모른다. 만일 오늘 밤에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될까? 나는 죽고 싶지 않다. 나는 더 살련다. 나는 결코 안 죽는다….” 이렇게 마음을 다지면서 다른 친구들이 눈치 채지 않게 이불 속으로 가만히 들어가서 이불자락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용기를 내서 억지로 잠을 청했지만 헛일이었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무엇이 뾰족한 가시처럼 마음을 몹시 찌른다. 내가 죽는다라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빼버리고 자려고 애써보았지만 눈은 점점 환해지고, 정신은 점점 더 맑아질 뿐이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눈을 꽉 감아도 보았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돈 보스코 성인의 말씀이 머리에 떠오르고, 불길이 이글이글 치솟는 지옥이 요지경처럼 나타나기도 하며, 너는 지옥으로 가라고 판정하시는 예수님의 엄숙한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불쌍한 내가 만일 오늘 밤에 정말로 죽으면….” 갑자기 한기가 들고 식은땀이 온몸으로 스며든다. “싫다. 지옥에는 가고 싶지 않다. 고해를 해야지, 고해를 해….”
  신자들의 의탁이신 성모 마리아와 자신의 주보 성인께 열심히 기구한 그는 이불을 확 걷어차고 옷을 주워 입은 후 침실을 빠져 나왔다. 그는 계단을 내려가 복도를 지나서 돈 보스코 신부의 방 문 앞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사랑이 깊으신 아버지처럼 그 생도가 오기를 기다린 성인은 문을 열고 친절하게 맞으며 “오, 그대! 이 밤중에 무슨 일로 오셨나요?” 하고 물었다.
  “신부님, 고해하려고요.” 하는 그는 고개를 숙였다.
  “네, 그래요? 들어오세요. 오랫동안 그대를 기다렸답니다.” 라고 신부는 친절하게 그를 안내했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 마루 위에 무릎을 꿇고 진정한 통회를 하면서 올바른 고해를 하고, 예수님의 용서를 받아 기쁨과 평화가 가득한 마음으로 자기 침실로 돌아갔다. 이제는 무서울 것이 없다. 죽음을 생각한 들 무서울 것이 없다라고 그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오! 나는 행복한 사람! 이제 죽은들 어떻단 말이냐! 하느님의 성총을 입어 예수님의 벗이 되었으니 이제 죽은들 무서울 것이 무엇이냐!”
  마음의 안정, 스스로의 위로, 말할 수 없는 행복감 속에서 그는 평안히 잠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꿈을 꾸었다. 눈앞에는 천국이 열리고, 그 주위에는 아름답고 장엄한 찬미가를 부르면서 하늘하늘 날아드는 천사들의 무리… 아, 얼마나 황홀하고 만족한 광경이냐!
  이 학생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정말로 이 학생처럼 고해의 유익한 점을 믿고 고해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이와 반대로 모고해를 한 사람은 얼마나 불행하고, 얼마나 참혹한 지경에 이를 것인가!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성 레오나르도 마우리시오가 어느 임종하는 여성의 청을 받아 한 수사를 데리고 급히 그곳으로 갔다. 성인은 그녀의 고백을 듣고 사죄경을 염한 뒤에 가만히 그 방에서 나와 옆방에서 기다리고 있는 수사와 함께 그 집을 막 나오려는데 수사가 매우 슬프고 무서워하는 모습으로 성인에게 나직이 말하였다.
  “신부님, 제가 본 것이 무엇일까요?”
  “당신이 무엇을 보았는데?”
  “저 응접실 가운데를 빙빙 돌아다니는 시커먼 손을 보았습니다. 아! 무서워…. 그런데 신부님이 나오시니까 그 무서운 손이 번개같이 병자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수사는 아직도 벌벌 떤다.
  성인은 그 말을 듣고 발길을 돌려 다시 병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 얼마나 무서운 광경이냐! 그 시커먼 손이 병자의 목을 조르고 있지 않은가! 병자의 눈알은 튀어나오고, 혀는 길게 늘어졌다.
  그녀는 “무서운 독성(瀆聖)…. 오, 기막히는 독성죄…”하고 벼락같은 소리를 지르면서 숨이 진다.
  참으로 고해 잘못한 죄가 영원한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이다. 우리는 항상 거짓과 싸우면서 정직하고 올바르게 고백하지 않으면 이 불쌍한 여성과 같은 길을 밟을 것이다.


어째서 모고해가 이렇게 많을까?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중요한 원인은 죄를 범한 후에 부끄러워서 바로 고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부끄러움 때문에 많은 사람이 마귀에게 입을 틀어 막혀 어떤 죄는 그 범행 실황과 횟수를 발표하지 못하고, 또는 똑똑하게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귀는 누구에게든지 죄를 저지르도록 부추길 때는 그 사람 옆에 와서 속삭이기를, “이 죄를 범한다 해도 너에게 무슨 해가 있겠는가? 하느님은 무한히 인자하시니까 구태여 너를 벌하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너는 고해하면 되지 않느냐? 하느님은 몇 번이고 사해주시지 않느냐? 젊은 때는 이런 죄를 범하기 쉬운 것이다. 이 다음에 나이 들어서 보속을 많이 하면 될 것 아니냐?” 라고 오늘도 내일도 되풀이 한다. 사람들은 결국 마귀의 꾐에 빠져 죄를 범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한 번 범한 죄는 거듭 범하기가 쉽다. 이미 한 번 범한 죄이니, 두 번 범하나 세 번 범하나 고해하면 마찬가지 아니냐? 이러한 마귀의 속삭임과 마음의 느슨함이 그 사람의 지혜를 흐리게 하고, 자유의지를 약하게 만들어 버린다.
  한 번, 두 번 죄를 범한 뒤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고해하려고 할 때 마귀의 전술은 또 달라진다. “어떻게 네가 이 죄를 남에게 말할 수 있나? 고해 사제가 너를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나무랄 것이다. 너를 나쁘게 여길 것이다. 좀처럼 용서도 안해줄 것이다.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차차 기회를 봐서 고해하면 되지 않느냐? 아직 바쁘지 않다. 다음에 얼마든지 기회가 있을 것이 아니냐?” 마귀는 이렇게 속삭인다. 
  큰 죄를 한 번 범한 사람은 흔히 이 속삭임에 속아 입을 다물게 되고, 신부 앞에 가서 바로 고백할 용기를 내지 못하여 마침내 모고해를 하게 된다.

  마귀란 놈이 이 술책을 쓰는 것을 피렌체 대주교 성 안토니오에게 솔직하게 고백했다. 어느 날 성인이 고해소 옆에 숨은 마귀를 보시고 꾸짖으며 다음과 같은 문답을 했다.
  “이놈, 너 거기서 무엇을 하느냐?”
  “네, 대답을 하지요.”
  “무슨 대답이냐? 똑똑히 말해보아라. 바로 말하지 않으면 단단히 혼을 내줄 테다.”
  “죄를 범할 때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공포심과 수치심을 지금 돌려주려고 여기 서 있습니다.”
  성 돈 보스코도 이런 깜찍한 짓을 하는 마귀를 보았다.
  어느 날 성인이 토리노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서 고해를 받고 있었다. 고해하려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데 특히 젊은이들이 많았다. 순서대로 들어와 고해를 하는데 한 젊은이가 들어와 고해대에 꿇어 절반쯤 고백하다가 갑자기 입을 닫아버린다. 돈 보스코 성인은 하느님의 특별한 성총의 빛으로 자기 제자들의 마음속까지 들여다보는 성인인지라 친절히 말하기를, “계속하시오. 또 다른 고해거리는 없소?”
  “예, 없습니다. 이뿐입니다.”
  “이 사람아, 그대는 왜 모고해를 해서 마귀를 기쁘게 하고 우리 주 예수님을 울리려 하는가?”
  “신부님, 정말입니다. 별로 다른 죄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계시로써 이 불쌍한 젊은이가 어떤 위험에 놓여 있는가를 잘 아시는 성인은 쓸데없는 문답을 그치고 나서, “자, 그대 어깨 뒤에 무엇이 있는가 보라!” 하고 말하였다.
  그 젊은이는 신부의 말씀대로 돌아다보고는 갑자기 쓰러지는 듯한 소리를 지르며 성인의 목을 끌어안고, “예, 예, 신부님! 저, 저, 또 고해할 죄가 있습니다.” 하고 지금까지 말할 용기를 잃었던 그 죄를 고해했다.
  성당 안에서 그 젊은이의 고함을 들었던 친구들이 그가 성당을 나올 때 그를 둘러싸고 이유를 물었다. 젊은이는 아직도 무서움에서 덜 풀려 벌벌 떨면서 미소를 짓고 말하기를, “아니, 참으로 큰일 날 뻔했다. 최후로 고해할 것이 한 가지 꼭 있었는데 도저히 고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그만 말문이 콱 막혀버렸지. 신부님이 다른 고해할 것이 없느냐고 물으시기에 없다고 했다. 그러자 신부님이 네 뒤를 돌아다보라 하시기에 돌아다보았더니… 아이구 무서워, 눈동자는 타는 불같고, 원숭이처럼 생긴 마귀가 기다란 발톱으로 나를 움켜잡으려고 하지 않겠어….” 하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겨우 말을 마친다.
  물론 돈 보스코는 성인이시다. 고해 사제가 성인이신 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다. 모든 고해 사제가 이 돈 보스코와 같이 다 성인은 아닐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모든 것을 다 아시며 또한 한없이 인자하시어 항상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그의 대리자인 고해 사제도 예수님의 그 무한하신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신다. 그러면 우리는 어째서 그를 신뢰하지 않고 바르게 고해할 것을 꺼리는가? 어째서 우리는 마귀의 꾐은 달게 받고, 안자하신 하느님에게는 부끄러움과 무서움 때문에 거짓말을 할 것인가?

  마귀는 항상 이러한 수단을 쓴다. 마치 승냥이가 양을 잡아먹으려면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먼저 양의 목을 졸라매는 것과 같이 사람의 영혼을 그 방법으로 잡는다. 죄를 숨겨 말을 못하도록 그 사람의 목을 졸라매어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한번 마귀에게 속은 사람은 몇 번이고 그 올가미에 걸리게 된다. 참으로 이런 사람이 많다. 모고해를 하기 시작하는 사람은 매우 불행한 지경에 빠진다. 6계를 범하는 사람들이 흔히 이러한 구렁텅이에 빠지기 쉽다. 신덕의 도리를 의심한다든가, 남을 욕했다든가, 원수의 죄를 고해하려고 할 때는 그만 부끄러워져서 죄를 둘러대서 범행 사실을 바르게 말하지 않거나, 여러 번 범한 횟수를 바로 대지 않아 모고해를 하기 시작한다.
  그 다음, 또 그 다음 계속해서 모고해를 거듭하게 된다. 이와 같이 몇 해를 계속할 뿐 아니라 모고해를 한 다음에는 모령성체가 저절로 따라다니게 된다. 소년시절에 범한 어떤 대죄를 숨겨, 늙어 죽을 때까지 모고해를 계속하다가 한 번도 바른 고해를 못한 채 죽은 사람도 있다.
  특히 젊은 남녀에게 이 '부끄러움의 약점'이 대단히 강하다.

  성 레오나르도는 세 번이나 임종할 듯하면서도 그 부끄러움 때문에 모고해한 사람을 보았다고 말했으며, 성 알퐁소 교리를 가르칠 때나 강론할 때, 종종 죄를 감추게 하는 부끄러움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기도 하고, 모고해 때문에 생기는 해독을 명시하려고 힘썼다. 왜 이 성인이 이 문제에 그렇게 주의를 기울였느냐 하면 어디서든지 이런 나쁜 습관이 생기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어떤 소녀가 7살 때 정절을 더럽힌 죄를 범했다가 너무나 부끄러워서 첫 고해 때부터 계속해서 그 죄를 아뢰지 못하고 중병에 걸려 고해 사제를 청하여 임종의 모든 성사를 잘 받고 죽었다.
  그 어머니와 형제자매들과 친구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다가도  평소에 열심하고 착하게 살았으니 영혼을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서로를 위로하면서 장례를 지냈다. 사흘만에 신부가 그 영혼을 위하여 미사를 지내려고 제대로 올라가려 할 때 누군가가 제의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갑자기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기를, “신부님! 저를 위해 미사를 지내지 마십시오. 저는 지옥에 떨어져 있습니다. 7살 때 지은 죄를 고해하지 못하고 죽는 순간까지 모고해를 했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져 있습니다.” 라고 했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13살 먹은 어떤 소녀가 부활주일에 다른 친구들과 함께 영성체 난간에 꿇어 막 성체를 받아 삼키고 나서 별안간 경련을 일으켜 쓰러졌다. 깜짝 놀란 사람들은 소녀를 안고 가까운 집으로 데리고 갔다. 미사가 끝나고 주임신부가 그 소녀에게 갔더니 그녀는 미친 듯이 중얼대며 몸을 비틀고 돌아다니다가 쓰러진다. 신부는 그 아이 이름을 부르며 말하기를, “정신을 차려라. 예수님께 단단히 맡겨라. 금방 성체를 영한 그 예수님을 신뢰하라.” 고 천천히 타일렀다.
  신부의 말을 듣고 그 아이는 눈을 두리번 거리며 무서워하는 기색으로 소리지르기를, “예수님! 저는 모령성체를 했습니다. 고해할 때 숨긴 죄 때문에 모령성체를 했습니다.” 라고 말한다. 그러더니 또 미치광이처럼 돌아다니다가 얼마 후에, 거기 모인 여러 사람들의 커다란 충격과 공포속에서 죽고 말았다.
  여러분은 이러한 예를 보아도 모고해가 얼마나 무섭고 흔히 있을 수 있는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고해할 때는 죄를 바로 고할 것을 힘써야 한다. 조금도 무서워할 것이 없고, 조금도 부끄러워할 일도 없다. 예수께서는 잘만 고해하면 무슨 죄든지, 몇 번을 범했든지 모두 용서해주신다. 고해 사제는 혹독한 사람이 아니요, 정이 갚은 아버지의 마음씨를 지녔다. 그래서 고해할 때 들은 죄를 즉시 잊어버린다. 천주교가 시작된 후로 오늘까지 고해 때 들은 죄를 다른 사람에게 드러낸 일이 한 번도 없었고, 이것을 다른 방도로 이용한 일도 없었다. 그러니 무서워할 것이 무엇이냐? 어떤 죄든, 몇 백 번을 범했든, 항상 바로 고해만 하면 의심 없이 용서받는다



모고해를 시작하는 사람은 과연 불행하다


모고해는 이와 같이 많다. 마귀가 신자들에게 죄를 고해하지 않도록, 모고해를 하도록 항상 작용한다는 사실을 고해 사제들이 버젓이 알고 있으면서 어째서 고해자에게 샅샅이 들어서라도 바른 고해를 하도록 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 점은 고해 사제를 탓할 일이 아니다. 신부들은 종종 이 사람이 바른 고해를 하는가 의심하는 때가 있지만, 의심이 가는 것을 질문하다가 도리어 좋지 못한 결과를 내지 않을까 걱정한다. 비유하건대 신부가 고해자에게 “이러저러한 죄를 범하지 않았는가?” 하고 물으면 신부가 나를 그런 죄를 범하는 줄 알고 평소부터 의심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고해자가 이런 생각이 들면 바로 고해할 것도 숨기기 쉽고, 둘러대기 쉬운 역효과를 낼지 모른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고해자 자신이 항상 바른 고해를 할 의무가 있다.
  한 번 모고해를 하기 시작하면 양심의 가책으로 못 견디게 괴로워하면서도 하느님의 특별한 조치가 없이는 늘 모고해를 계속하기 쉽다.
  여기에 내가 직접 당한 사실을 한 가지 이야기하겠다.
  어느 성당에서 피정 기도가 있었다. 나는 수개월 전부터 내가 고해를 들을 때 항상 고해소 언저리를 돌아다니며 근심을 이기지 못하던 여성이 이 피정 기도에 참석한 것을 보았다.
  어느 날 밤 그 여성은 드디어 나에게 와서 내 발 앞에 엎드리고는, “신부님, 저를 좀 도와주셔요. 저는 불행한 여자입니다. 15년 전부터 모고해에 모고해를 거듭하며 지내왔습니다.” 하면서 운다.
  나는 그녀를 위로하고 권면하면서, “자, 그러면 용기를 내시오. 하느님은 당신에게 사랑을 베푸십니다. 예수님도 당신에게 지극히 인자하십니다. 자, 바로 말하시오. 몇 살 입니까? 어째서 그런 죄에 빠지게 되었습니까?” 라고 물었다.
  “27살 입니다. 12살 때 좋지 못한 호기심으로 뒤에 고해할 용기를 내지 못할 만한 큰 죄를 처음으로 범했습니다. 모고해하고 모령성체를 했습니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17년 동안 늘 모고해, 모령성체를 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열심히 기도도 하고, 울기도 많이 했습니다. 성지순례도 여러 곳을 했습니다마는 모두 헛일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달마다 자주 고해를 했습니다. 피정 기도 때는 일생의 총고해도 했습니다. 그러나 부끄러워서 처음 숨긴 그 죄만은 언제든지 바로 고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한다.
  “당신, 그런 고해로 만족했습니까? 영성체를 안심하고 했습니까?” 하고 내가 물었더니, “아, 신부님!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얼마나 가책을 받았겠습니까? 고해 때나 영성체할 때마다 제 마음은 무서운 가시가 찌르는 듯 괴로웠답니다.” 라고 말한다.
  “그렇게 괴로워하면서 왜 그대로 모고해를 계속해왔습니까?”하고 물으니, “저는 참으로 미련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죄를 바로 고해하면 신부님이 저를 나무랄 줄 알고 무서워서 그것을 감추었고, 영성체를 하지 않으면 친구들이 이상히 여길 것 같아서 그대로 늘 성체를 영했지요.”
  “그러면 최근에 고해는 언제쯤 했습니까?” 하고 물으니, “신부님, 피정기도 시작하고 나서 벌써 3번 고해했는데 그 때마다 다른 신부님께 했습니다. 이 신부님, 저 신부님께 고해할 때마다 이번에는 바로 고해하겠다고 결심해보았습니다만 죄를 고하려고 하면 꼭 새끼로 제 목을 졸라매는 것 같아서 그만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째서 그 죄를 고할 용기를 얻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바른 고해가 절대로 필요하다는 오늘 밤 신부님의 강론에 제가 깨달은 바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이 ‘해보아라. 그러면 예수님이 얼마나 인자하신 어른이신지 알 것이다’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시기에, 저는 어떻게 되든지 이번에는 바로 고해를 하리라고 단단히 결심하고 온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녀는 고해 사제의 명철한 지도 아래 지금까지의 모든 죄를 깨끗이 고해하여 사죄를 받고, 15년 동안 불안에 싸였던 마음이 비로소 평온해졌다. 그녀는 너무나 기쁘고, 너무나 감격하여, “신부님! 모고해, 모령성체한 죄가 말할 수 없이 많았습니다. 저는 이제 마음이 시원하고, 괴롭고 무거운 짐을 벗은 것 같습니다. 저는 누구에게든지 예수님이 얼마나 인자하신 어른이신지 말할 수 있습니다.”라는 말을 거듭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임종 때라도 이와 같은 은혜를 받게 되는 사람은 얼마나 다행이리오만 고해를 잘못하는 중에 임종 때까지 모고해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고도 슬픈 일이다. 곧 한 발을 무덤 속에 넣고도 소년시절에 숨겼던 죄를 그대로 가지고 남은 한 발마저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
  하느님의 인자하심이 무한하지만 일생 동안 그 인자하심을 악용하며 독성죄를 범하여 하느님을 모욕한 사람을 하느님께서 무조건 용서해주실지는 모를 일이다. 그뿐 아니라 대개 이런 유에 속한 사람들은 임종을 당하여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바라는 대신 도리어 그를 경멸하게 되는 두 서너가지 실례를 들어보기로 한다.
  다르 비오 신부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안주인의 권면에 따라 어느 가정부가 자주 고해성사를 보기는 하는데 한번 범한 6계의 죄가 너무 부끄럽기도 하고 고집도 세서 고해를 하지 않았다. 한 번은 그녀가 중병에 걸려 안 주인의 친절한 주선으로 고해 사제를 청하여 고해성사를 받게 되었지만, 또 모고해를 했다. 그 뿐 아니라 안주인의 각별한 간호로 병이 나아서는 안주인과 고해 사제가 바른 고해를 하도록 애쓴 것을 도리어 자기 친구들에게 비웃기까지 했다.
  그러던 중, 그녀는 다시 중병에 걸렸다. 안주인은 또 다시 신부를 청하느니, 간호를 하느니, 매우 당황했다. 신부가 와서 고해성사를 주는데, 이런 경우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인내심과 친절을 다하여 그 불행한 여성에게 간절한 통회로 바른 고해를 하도록 꽤나 노력했다. 그러나 또 헛일이었다. 그녀는 임종이 오래 걸리는 동안에 고집을 부려 그 죄를 끝까지 고해하지 않고 통회의 기도를 외우라는 신부의 말씀도 거절했을 뿐 아니라 그가 곁에 있는 것까지 귀찮게 여겼다.
  신부는 그녀가 점점 죽어가는 것을 보고는 안타까워서 그녀에게 십자고상에 친구를 하라고 입술에 대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최후의 발악을 하며 신부를 어서 가라는 눈치로 잔뜩 흘겨보면서, “그리스도고 무엇이고 다 싫소. 나는 귀찮습니다.” 라고 하며 돌아눕더니 무섭게 긴 한숨을 쉬며 독성죄 그대로 죽고 말았다. 이런 사람에게 앙화로다!
  부지니아의 아우구스티노 신부도 자신이 당하고 목격한 사실을 이야기했다.
  어느 불행한 여성이 고해할 때 항상 제일 큰 죄만을 숨겼다. 이렇게 모고해를 하면서도 부끄러워서 강론을 들을 때나 친절히 권면 받을 때 양심의 가책을 무한히 받기는 하지만 바르게 고백하기를 꺼렸다. 오랫동안 그녀의 회개를 기다리시던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그녀에게 무서운 병을 보내주셨다. 그녀는 그 병으로 거의 죽게 되어서 빨리 신부를 청했지만 신부를 보자 즉시 소리 지르기를, “신부님! 당신은 고해할 때 거짓말을 한 여성이 지옥에 빠지는 꼴을 보시려고 마침 잘 오셨습니다. 저는 종종 고해는 했습니다만 언제든지 제일 큰 죄만은 숨겼습니다.”라고 한다.
  신부는 너무나 기가 막혀서, “그러면 지금이라도 그것을 잘 고해하시죠.”라고 친절히 타일렀다.
  “안됩니다. 안돼요. 자비를 받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지금은 정의의 때입니다.”라고 소리를 지르더니 미친 사람처럼 발광하다가 주위 사람들의 마음속에 엄청난 절망과 슬픔을 남긴 채 영원히 가고 말았다.
  참으로 이런 고해를 시작하는 사람에게 앙화로다!
  또 성 알퐁소도 이런 이야기를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도 열심하면서도 늘 모고해를 하는 습관이 있는 사람이 역시 중병에 걸렸다. 그는 본당신부를 청했다. 신부는 그 사람에게 매우 위중하니 임종에 필요한 성사와 임종 전 대사를 잘 받도록 권했다. 그러나 그는 종래 고집을 부리며 고해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어째서 당신은 곧 임종할 터인데 고해하기를 싫어하시오?” 하고 물으니, “아, 저는 벌써 틀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가 이때까지 모고해, 모령성체한 그 독성죄를 바로 고할 생각과 힘을 제게서 다 떼어버렸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자기 혀를 깨물어 발광하면서, “요 망할 혓바닥! 망측한 무언! 저주스러운 독성!”이렇게 횡설수설하다가 그만 숨지고 말았다.
  아!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이러한 실례를 듣고도 또 모고해할 사람이 있을까? 어떤 일이 있어도 모고해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결심을 하지 못할까? 어째서 벙어리 마귀에게 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밟고, 거룩한 약인 고해를 독약으로 바꾸며, 영원한 멸망으로 스스로 원해서 떨어질 까닭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우리는 항상 바른 고해를 하도록 힘쓰자.


음란의 죄에 꼭 따라다니는 벙어리 마귀


벙어리 마귀, 무언의 마귀란 것은 곧 음란함의 마귀, 사음의 마귀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복음서에서 말씀하셨다.
  사음죄란 무엇인가? 하느님의 제6계와 제9계가 금하는 모든 죄를 말한다.
  음란함은 매우 큰 죄로서 하느님이나 사람 앞에서 가장 추잡하고도 가증스런 죄악이다. 이 죄를 범한 사람은 짐승의 세계로 떨어져도 시원치 않다. 이 죄는 다른 많은 죄를 덩달아 범하게 하는 원인이 되어, 현재나 미래의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벌을 받는다.
  성서는 이 음란의 죄는 가장 추하고 더러운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극도로 악한 범죄요, 가장 싫고 꺼리는 행위이므로 들먹이기조차 거북한 추잡하고도 무서운 죄악이다. 성 바오로 사도께서도 이런 죄를 범한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지 못한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교부들도 이구동성으로 지옥으로 제일 많이 떨어지는 영혼은 사음죄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하기를 마귀는 교만으로 지옥에 떨어졌고, 사람은 사음으로 지옥을 채운다고 했다. 성 알퐁소는 지옥에 빠지는 신자는 대개 사음죄 때문이요, 적어도 사음죄 아니고는 지옥에 빠지는 사람이 없다고 극단적으로 말했다.
  어째서 그러할까? 중요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음란함의 죄는 매우 범하기 쉬운 죄요, 둘째는 이 죄는 매우 고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왜 범하기 쉬운가 하면 사음이 죄가 되는 불결한 행위일 뿐 아니라 그 극단에 이르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쁜 눈짓, 고약한 책, 추잡한 노래, 더러운 몸짓, 악한 이야기, 방탕한 교제와 연애뿐 아니라 마음으로 즐기는 것까지 모두 사음죄가 된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죄는 고치기 어려운가? 이 죄를 한번 범하게 되면 자연히 계속해서 범할 쾌락에 빠지게 되고, 그 횟수가 거듭될수록 고칠래야 고치기 어려운 관습의 사슬로 스스로 자기 몸을 묶고 말기 때문이다.
  이런 죄로 떨어지는 사람이야말로 불행하다!
  그런데 고해가 어째서 이 무서운 사슬을 끊는 데 효력이 없을까? 그 고해가 바른 고해였다면 매우 강력한 무기가 되겠지만 바로 여기에 벙어리 마귀가 발동하기 때문이다. 이 마귀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 사람의 입을 막고 죄를 고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죄를 바로 고해하면 의심 없이 사함을 받고, 또한 음란의 악한 야욕을 차츰 눌러 이길 수가 있다. 왜냐하면 고해는 악한 야욕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무언의 마귀는 어둠을 좋아한다. 그러나 고해는 빛을 가져오고, 이 빛으로 마귀를 쫓으며 죄인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죄가 얼마나 더럽고 고약한 것인가를 알게 해준다.
  마귀는 있는 힘을 다하여 바른 고해를 못하도록 노력한다. 그래서 이 꾐에 걸려든 사람은 대개 모고해를 하기 시작하고, 한번 모고해를 하면 그 다음은 계속해서 모고해, 모령성체까지 하게 된다. 하느님은 이런 죄인을 아주 버리시지는 않지만, 음란함의 죄의 버릇이 든 사람은 스스로 하느님을 멀리하고, 하느님을 생각지도 않으려 하고, 점점 죄가 깊어지면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래서 사음은 참혹한 죽음의 어머니라고 불리운다.
  어느 성인이 말하기를 “부정한 생활은 부정한 죽음을 부르나니 그 이유는 흔히 음란의 버릇이 든 사람은 임종 때도 고해를 잘 하지 않으려 하며, 죄를 통회하여 다시는 그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결심도 못하여 고해하기를 꺼리고, 해봐야 모고해를 하여 스스로 하늘나라를 잃고 지옥으로 떨어진다.” 라고 했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이른바 종교개혁가라는 마르틴 루터는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수사였다. 그는 불결한 사랑 때문에 수도원에서 나왔고, 모교를 떠나 이교를 세워 신자들에게 매우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고, 마침내 그 불결한 사람들 속에서 죽고 말았다.
  그의 자서전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밤 루터는 애인 가타리나와 함께 어떤 여관 창문 곁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가타리나는 맑고 푸르고 드높은 하늘에 무수한 별이 반짝이고 있는 것을 쳐다보고는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다 못해 그에게, “마르틴! 저 하늘을 보세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루터는 깊은 한숨을 쉬더니, “오 가타리나! 하늘은 곱고 아름답지만 우리를 위해 있는 것은 아니오.” 라고 대답했다.
  이 불행한 사람은 자신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자기가 죄악에서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다. 그는 잠깐 그 여관에 머무르다가 거기서 무서운 실망 끝에 죽고 말았다 한다.
  불결한 생활은 불행한 죽음을 부른다!
  또 다른 종교개혁가라던 칼빈의 상속자이며 다른 종교의 기둥이라고 불리우던 테오도르 베사가 중병에 걸렸을 때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이 그를 방문했다. 성인은 열심히 그가 다른 종교를 버리고 카톨릭으로 돌아오도록 권하고 갖은 수단을 다했다. 테오도르는 성인의 따듯한 권유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때때로 깊은 한숨만 쉴 따름이었다.
  할 수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성인이 그에게 물으니 테오도르는 겨우 윗몸을 일으키더니 옆에 숨겨놓은 침대의 휘장을 잡아당기며 그곳에 있던 여성을 가리키면서 “제가 회개하여 영혼의 구함을 받지 못하는 것은 저 여성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며 또 다시 땅이 꺼지도록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보라! 이런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런 사람은 아무래도 죄악에서 떠나지 못한다.
  또 무서운 다른 이야기 한 가지를 들어보자.
  어떤 읍내 향락과 허영에 빠져 춤에 미친 계집아이가 있었다. 그녀는 두어 차례 회개하라는 권면도 받았지만 교만한 마음으로 그것을 비웃을 뿐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명랑하고, 재빠르고, 활달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했다. 어머니는 여러 사내가 딸의 곁으로 모여드는 것을 보고 매우 만족하며 그 중에서 좋은 사윗감을 골라 결혼만 시키면 딸도 침착해지리라 생각하고 딸의 방탕한 생활을 마음대로 하라고 맡겨두었다.
  이 세상에는 이렇게 천박한 생각으로 딸의 참된 행복을 그르치는 어머니들이 적지 않다. 도대체 그 딸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중병에 걸렸다. 간병하러 온 이웃집 착한 부인이 신부를 청해 갖은 성사를 받고 임종 준비를 하라고 권했더니 그 딸은 고집을 피우며 말하기를, “무엇이라고요? 이렇게 젊고 아름다움 제가 죽을 것 같습니까? 저는 안 죽으렵니다. 어떻게든 저는 죽지 않아요.”라며 자신만만했다.
  결국 신부가 와서 매우 위중하니 진심으로 회개하고 성모 마리아께 기도하라고 권했다.
  “죽다니요? 제가 죽어요? 저는 살고 싶은데요. 저는 죽기 싫습니다!”라고 그녀는 대답한다.
  그래도 신부는 열심과 인내로써 구너하는데, 점점 기운이 빠지고 정신이 흐려짐을 깨달은 그녀는 마지막으로 용을 쓰며 맹수처럼 소리지르기를, “아, 저는 아무래도 죽을 것이니까! 마귀야, 네가 와서… 네가 내 영혼을 가지고 가라…”고 말하더니, 홑이불로 얼굴을 가리고 실망하면서 그만 숨지고 말았다.
  아, 참으로 불결한 생활은 불행한 죽음을 가져온다!
  또 한가지 실례를 들어보기로 한다.
  어떤 신사가 자기 집에 나쁜 계집을 데려다 놓고 함께 살았다. 친구들이 그 계집을 쫓아내라고 권해도 그는 항상 거절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두 남녀는 갈라지지 않으면 안될 일이 생겼다.
  그 불쌍한 신사가 중병에 걸려 거의 임종에 다다르게 되었다. 신부가 오고 마지막 성사를 베풀 준비가 되었다. 신부는 간곡하게 권하여 선종하도록 노력했다.
  신부의 열심과 간곡한 권면에 못이겨 그 신사는 아주 회개하는 것처럼 신부에게, “신부님! 기쁜 마음으로 당신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해온 나쁜 생활을 청산하고 올바른 고해를 해서 선종하고 싶습니다.” 라고 말했다.
  신부는 너무나 반가워서, “아, 그렇습니까! 착한 신자들과 같이 당신도 최후 성사를 다 잘 받겠습니까?” 라고 물었다.
   “예, 신부님이 주시면 기쁘게 다 잘 받겠습니다.”라고 그는 태연히 말한다.
  “그러나 요전까지 같이 지내던 그 여성을 아주 버리지 않으면 당신은 성사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신부가 따지니, “오, 신부님! 그것은 안될 말입니다.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딱 자른다.
  “어째서 안돼요? 할 마음만 있으면 안될 일이 아닌데요. 당신이 선종하고 싶다면 그 여자를 버리지 않고는 절대로 안됩니다.”라고 신부도 강경하게 말했다.
  “늘 같은 말입니다. 안됩니다. 그 여성을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아무래도 죽을 모양인데, 죽는 마당에는 그 여자와 아무래도 헤어져야 할 것 아닌가요? 잘 생각해보세요!”
  “안됩니다. 신부님! 그것만은 못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대로는 당신 죄를 사해줄 수가 없소. 다른 성사도 줄 수 없고, 당신은 하늘나라를 잃고 지옥으로 가는 수밖에 없소.”
  “안됩니다. 신부님!”
  “여보시오. 안된다, 안된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명예를 좀 생각해보시오. 기절한 그대로 죽으면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 무어라고 하겠나요?”
  “안됩니다. 안돼요!” 하면서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그는 그 소리만 중얼거리다가 끝내 그 여자를 곁으로 불렀다. 그리고는 여자를 끌어안은 채 죽고 말았다.
  아! 불결한 생활은 불행한 죽음을 가져온다!
  참으로 무섭지 않느냐? 그러나 무슨 죄든지 떠나려면 떠날 수 있는 것이요, 떠나기 싫으면 할 수 없는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도 이런 이야기를 했다.
  어떤 사람이 부정한 여성의 집을 드나드는 습관이 있었다. 다른 친구들이 말렸지만, 그는 늘 할 수 없다면서 거절했다. 어느 날 그 사람이 여느 때처럼 그 여자의 집으로 들어갔다가 뜻밖에 몽둥이로 얻어맞았다.
  그는 그 날부터 이상하게도 다시는 그 집에 가지 않았다. 전에는 절대로 할 수 없다던 것이 이제는 절대로 할 수 있게 된 셈이다.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할 수 없다던 것을 몽둥이로 변화시킨 것이라고 성인은 말했다. 절대로 안된다는 것도 몽둥이로는 되거늘, 하물며 무슨 죄든지 떠날 수 없다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 소리요, 떠나고 싶지 않다는 말이란 점도 우리는 잘 알았다.

2012.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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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

 대단하다..

나팔수 천성길선생

뭐..네이버 안쓴다며??

다음에서의 협박이 안먹히니

네이버로 둥지 틀었니??

 

누가 무식하게 신부의 사죄권이라고 하냐??

 

정말...

 

=================================================

 

질문자님...

고해소안에 들어가면

기도서를 눈높이에 붙여놓았습니다...

그거 대로 하시면 되고요...

죄를 다고백한후

● 이 밖에도 알아내지 못한 죄도 모두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부분을 꼭해주셔야합니다...

아니면

고해자도 신부님도 마냥기다리십니다..

고해자는 보속을

신부님은 고백할죄가 또 있는지요..

 

그리고 고해소 들어가기전에

성찰잘 하시고요...

십계명과 칠죄종을  참고로 하시면 되겠습니다...

 

2012.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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