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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송대관 네박자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16,420 작성일2005.05.26
송대관의 '네박자' 가사 해석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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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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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기쁠때

내가 슬플때


누군가 슬퍼하는 반면 또 누군가는 기쁘다는 대구로 율격을 맞추고 있습니다.

네가도 아닌 니가 라는 비문을 굳이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문자가 아닌 음성 상으로는 둘 사이에 뚜렷한 차이를 느낄 수 없고

이를 구분 짓기 위해 흔히 방송가에서 상용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기쁘고 내가 슬플 때 아무 때나 노래를 불렀다 칩시다. 일종의 북치고

장구 친다는 표현으로 생뚱맞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의미전달에는

큰 차이가 없겠으나 작가가 의도하는 가슴 저리고 애잔한 표현이 묻어 나오질

않습니다. 내가 슬픈데도 불구하고 네가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뻐한다 함은

나로 하여금 더욱 모질고 극적인 슬픔으로 몰아넣고 있단 얘기 일겁니다.

둘의 관계를 비추어 봤을 때 한때 사랑하던 연인 관계에서 이별을 목전에 둔

사이라 해석 할 수 있겠습니다. 둘의 사이가 혹 불륜관계는 아니겠느냐 하는

의혹도 제기해 볼 수 있겠으나 어떠한 명확한 증거가 없기에 일단은 연인관계라

규정짓습니다. 그렇다고 불륜관계를 원천적으로 배격하는 바는 아닙니다.

둘 사이의 희비가 엇갈린다 함은 너를 향한 나의 희생을 의미합니다. 내가

제아무리 슬플지라도 너 하나만은 기쁘고 행복하길 바란다는 숭고하고 거룩한

희생정신을 우리는 엿볼 수 있는 거죠. 




누구나 부르는 노래

내려 보는 사람도

위를 보는 사람도


경험해 본 사람은 아시겠지만 주체할 수 없는 슬픔 앞에서 사람들은 외려

허탈한 웃음을 짓기 마련이죠. 과연 미쳐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역설이고 아이러니 한 것이 원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일이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네가 기뻐서 부르는 노래이지만 나는 슬픔에도 불구하고 노래를

부를 수 있단 겁니다. 기뻐서 부르는 노래는 그 흥을 배가 시킬 수 있듯이

슬퍼서 부르는 노래는 슬픔과 절망의 수위를 더욱 짙게 합니다.


내려 보는 사람과 위를 보는 사람 또한 대조를 이루면서 율격을 지키고 있음은

서두에서 밝힌바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내려보는 사람은 누굴 지칭하는 걸까요. 혹자는 위에서 기뻐하는 너와 

동일 인물이 아니겠느냐 섣불리 판단을 내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려 본다는

의미를 정확히 해석하지 못한 것에서 오는 어불성설입니다.

내려본다 함은 도도함과 거만함을 의미합니다. 이별을 뒤로 하고 상대방을 거만하게

내려다본다는 것이 이치에 맞을까요. 배신과 증오라는 특별한 상황에서는 상정할 수도

있겠으나 일반적인 상황 하에서는 대단히 힘든 일일 것입니다. 더구나 상대방은

슬픔에 휩싸여 되도 않는 노래를 중얼거리고 있는 중입니다. 옆에서 반주는 못

넣어줄 망정 염장을 지르는 그와 같은 행위는 인간의 탈을 쓰고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요. 벌써 눈치 채셨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바로 이 사회의 상류층이자 지배층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들이 고매하고

하늘을 찌를 듯한 품격이 과연 송대관의 네박자를 소화해 낼 수 있겠냐고 항변하는

분들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라 하여 날 때부터 배에 금테 두르고

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식단을 볼라치면 모두 그 나물에 그 밥일 것입니다.

화면상으로 비춰지는 부자들의 식단이 실제보다 네배에 가까운 과장을 보이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그것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고기만 먹으면 질리기 마련이죠.

소설가 양귀자가 말합니다. 몰랐는데 어느 순간부터 트로트가 귀에 익숙하게 들려

오더라는. 그들이라 하여 허구한 날 방구석에 들어앉아 클레식을 들으며 뜨게질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송대관의 네박자는, 더 나아가 트로트라고 하는 한국 대중음악이 낳은 독특한

장르는 신분과 계급을 떠나 다양한 층을 포섭하고 섭렵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지금보다도 더욱 많은 연령층과 세대에 트로트가 전파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는

작가의 소박한 속내를 우리는 엿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쿵짝이라네.

쿵짝 쿵짝 쿵짜자쿵짜

네박자속에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고 눈물도 있네.


이 노래의 핵심 키워드가 드디어 등장했습니다. 쿵짝!

사전에도 안 나오는 이 쿵짝이란 말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요.

잘은 모르지만 분명 상류층이 사용하는 소위 교양이 철철 넘친다는 표준어만큼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속어 내지 은밀한 내용을 담은 비어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은밀한 내용이란 무얼 의미하는 걸까요.

우리는 흔히 그렇고 그런 사이를 두고 쿵짝이 맞는다 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렇고 그런 사이란 또 무얼 의미하는 걸까요. 아마도 서로 간에 은밀하고 원칙에

어긋나는 거래가 성사될 경우를 두고 쓰는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상식과 원칙에

맞지 않는 관계. 이걸 조금 더 광의적으로 해석을 하자면 위에 언급한 불륜 관계도

포함이 될 듯 합니다. 그렇다면 작가는 대중들로 하여금 은밀하고 비밀스런 거래를

조장하고 있는 것일까요. 트로트란 장르를 젊은 세대가 쉬이 소화 해 내지 못하는

한계가 바로 그런 은밀함과 끈적함이란 이미지와 연계가 있다는 것을 과연 작가가

눈치 채지 못했을까요. 그렇지는 않다고 여겨집니다. 작가 역시 트로트라는 대중

음악인의 한사람으로서, 트로트의 무궁한 발전을 바라마지 않는 당사자로서

그런식의 반도덕적이고 반인륜적인 시도를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쿵짝의 의미를 제한적이고 협의로 봐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라 할 수 있죠.

원칙과 도리에는 벗어날지언정 그렇다고 법의 잣대로 함부로 들이댈 수도 없는

세상의 온갖 잡다하고 인지상정이란 미명하에 통용되는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

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이 있듯이 안 그래도 복잡다단한

세상에 좀더 쉽고 편하게 살아가자는 우리 모두의 암묵적인 동의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차피란 단어에 함축된 의미가 그렇습니다.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하리 식의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 살아가자는 내용이

말이죠. 인지상정 즉, 이상과 꿈이라는 허황된 생각에 얽매이지 말고 현실에

충실하자는 의도로 해석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쿵짝 쿵짝 쿵짜자 쿵짝 이란 의성적 요소의 조합으로 이 노래가 삼박자가 아닌

의심의 여지가 없는 네박자 임을 강조하고 확인하는 후렴구 입니다. 단순한 요소이지만

트로트에서 또한 빠질 수 없는 단골 메뉴이기도 하죠. 우려 할 것은,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이 후렴구만 인식한 나머지 네박자란 제목 대신 쿵짝이란 잘못된 제목을

숙지할 수도 있다는 점이지만 이미 온국민의 정서에 가득 담긴 노래로써 제목을 몰라

노래방 기기 앞에서 쩔쩔 매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게 저의 주장이자

바로 작가의 의도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네박자 속에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다고 작가는 대중에게 호소하고

있지요. 사랑과 이별은 단순한 연정의 결과물로서가 아닌 이 세상에 산적해 있는

온갖 신산과 풍파의 결합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입니다. 지극히도 이분법적이고

흑백논리적인 사고 방식이 허물없이 허용 되는 분야가 바로 이 트로트가 아니겠는가

보여집니다.

쿵짝으로 대변되는 네박자 속에는 사랑과 이별 아니라 어떠한 것이든 다 집어 넣을 수가

있을 겁니다. 그것이 우리네의 세상살이와 관련된 일들이라면 말이죠.

작가는 사랑에 대조되는 이별을 접목시킴으로써 초지일관 노래하는 이의 애달픈

심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구절 한고비 꺾어 넘을 때

우리네 사연을 담는 울고 웃는 인생사

연극같은 세상사

세상사 모두가 네박자 쿵짝.


이 부분을 노래할 때 우리는 실제 송대관씨가 숨넘어갈 정도로 무리하게 음을 꺾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꺾는 창법이야말로 트로트의 꽃이자 생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꺾다라는 의미는 세상을 헤쳐나간다는 의미로도 해석 될 수 있으나

역시 트로트에서의 꺾는 기교를 의미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에 상응하는 말이 바로

한구절로 역시 한고비에 상응하는 험난한 세상사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노래에서

꺾여지는 대상으로서 가사를 의미하기에 모두 중의적인 표현이라 보면 되겠습니다.

한 고비는 사전적 정의 그대로 해석하셔도 무리가 없을 듯 보입니다. 세상살이의

간단없는 역경과 고난을 굽이굽이의 고개로 비유 한 것이죠.

간신히 고비를 넘었다지만 우리 앞에는 이전보다 훨씬 힘들고 고단한 고비가 언제든지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죠. 그 속에서 나약한 우리 인간들은 웃기도 울기도 하는 모순적인 

사연을 담아내게 될 것입니다.

울고 웃는 우리의 인생사가 한편의 연극과도 같다는 말은 다소 고차원적이고 철학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이미 우리 모두가 무대에 서서 연극을 열연하고 있는 배우인  

마당에 그것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줄로 압니다. 다만 너무도 연극에 심취하고

열연하는 나머지 연극을 하고 있단 사실조차 잊고 살아간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로

남을 것입니다.

 

 

추가 질문이 들어왔군요. '어차피 쿵짝이라네' 에서 여전히 쿵짝이란 의미에 대해

모호하시다고요. 사실 쿵짝이란 말을 두고 처음부터 쉽게 가볼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단순한 의성어로써 흥을 돋울 때 쓰이는 말에 불과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아싸'나 '얼씨구'와 같은 노래나 가락 중간 중간에 들어가는 추임새의

역할로 이해 하셔도 좋을 겁니다. 이럴 때 우리는 '아싸' 또는 '얼씨구'가 무슨 의미입니까

묻지는 않습니다. 국어를 연구하는 학자가 아닌 이상 말이죠.

하지만 이미 시도 되어진 바 조금 더 고차원 적인 의미까지 도달해 보기로 하죠.

 

주의 해야 할 것은 쿵짝이란 단어 하나만을 두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쿵짝이라네 라는 구절과 그 앞에 전제 되어지는 구절이 하나의 맥락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즉, '내려 보는 사람도 위를 보는 사람도 어차피 쿵짝이라네'

이 전체 구절을 하나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애초에 이 구절들을 하나로 묶지 않은

것에서 혹시 혼동을 일으켰다고 여겨집니다.

내려 보는 이들은 이른바 고매한 학식과 인격을 갖춘 소위 지배층내지 상류층으로 분류

되는 지식인 층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물론 상류층내지 지배층이 모두 지식인이란

말은 아닙니다. 그런 착각은 그들의 오만과 거들먹거림의 결정체 일 뿐입니다.

그들의 도도함과 뭇 아래 사람들을 깔보는 방자무기,  안하무인 격은 이미 위험 수위를

넘어 겉잡을 수 없는 수준까지 왔다고 보여집니다. 열이면 열 모든 방면에서 위를 보는

뭇 사람들과 차별을 두고 선을 그으려는 그들의 썩어빠진 선민의식은 불치병이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교양과 인격 학식을 비롯해서 죽어 누울 자리조차도 품격과

격식을 따져 남들과 차등을 두고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들의 작태는 이미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재래시장이니 할인마트 상설할인매장을 위시해서 서민들의 발길이  닿고 서민들의

눈과 귀를 끄는 곳이라면 선민의식에 젖어 사는 그들은 꺼립니다. 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존심의 문제로 치부합니다. 어쩌면 그들에게 있어

인격이란 단어는 부와 명예보다 하위의 개념으로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소설가 양귀자 씨의 언급을 예로 들었듯이 그들 또한 평범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클레식이 어떻고 오페라 공연이 어떻고 입방정을 늘어놓지만 그들 또한 주말 연속극에

눈물 콧물 흘리고 심지어는 저 나쁜 새끼 욕도 해가며 즐겨 보는 족속들일 뿐입니다.

그들의 서가에 고전 문학을 비롯 얼마나 방대한 양의 교양서적이 즐비할 지는 모르지만

그들 또한 인터넷 검색어 순위를 좇아 유머 글에 폭소를 자아내고 갓 올라온 미소년

동영상에 마스터베이션을 즐길 것입니다.

그들의 겉다르고 속다른 행동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행태를 교묘히

가려줄 가면 또한 그 누구의 것보다 두껍고 질긴 철면피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간해선 그들의 속내를 보기 힘들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인격인양, 명예인양 착각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들의 생명보다도 소중한 것들이 아닌지 모릅니다.

그들의 겉다르고 속다른 행태를 단적으로 표현 한 것이 바로 위에 설명한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것은 클레식이 아니고 바로 서민들의 애환과 한이 서려있는

뽕짝이고 트로트 일 뿐입니다. 어차피 모두가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사람인 이상 클레식에서 안정과 만족을 찾기 보다는 귀가 즐겁고 저절로 어깨춤이

들썩여지는 트로트에서 만족과 즐거움을 찾는 것이 인지상정일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지극히도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뽕짝이란 교양없는 행동이고 격식 없는 처사라 여겨지는 것입니다.

불합리죠. 그들의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죠. 그들의 내부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할

대상이죠. 그들만이 쳐놓은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분야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어물쩍

넘기는 처사 바로 이를 두고 쿵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 세계에서도 어쩌면

그들만의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통하는 루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들만의 쿵짝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죠.

 

 

2005.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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