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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기행문 쓰기방법이랑 기행문 쓸 때 준비물 좀 알려 주세요 내공 50 겁니다
ga**** 조회수 3,091 작성일2012.08.18
 기행문 쓰기방법이랑  기행문 쓸 때  준비물  좀  알려주세요 내공 50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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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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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24위, 한국사 70위, 사회학 14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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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紀行文)쓰는 법

 

이 글에서는 우선 기행문에 대한 전반적인 것을 알아보고, 이어서 수학여행 기행문을 쓰기 위한 기록문(여정과 견문에 대한 메모와 여행지 자료)을 살펴보겠다.

 

1. 기행문의 뜻

여행을 하는 동안에 일어난 일이나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시간 순서나 여정에 따라 기록한 글.

 

2. 기행문의 성격

가. 수필의 한 형식이지만 여정에 따라 쓴다는 점에서 다름.
나. 새로운 사실이나 경험 등을 소개한다는 점에서 정보 전달의 성격을 지님.
다. 글쓴이에게는 여행기나 탐험기가 되고 읽는이에게는 여행안내서가 됨.

 

3. 기행문의 특징

가. 글쓴이에게는 기념문, 독자에게는 안내문이 됨.
나. 여행 동기와 목적이 나타나고 여정에 따라 쓰임.
다. 글쓴이의 감상이나 느낌이 솔직하게 드러남.
라. 생동감을 주기 위해 현재형 문장으로 쓰는 경우가 많음.
마. 구성 형식에 일정한 틀이 없음.
바. 보고들은 것을 사실대로 씀.
사. 지방색이 드러남.
아. 서경문의 특색이 많음.
*서경문 : 눈앞에 전개되는 자연 풍경 같은 것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글.
*서정문 : 작가의 내면적 심정을 주관적으로 표현한 글.
*서사문 : 사건이나 사실을 중심으로 기록한 글

 

 

4. 기행문의 소재

출발에서부터 돌아올 때까지의 모든 것이 소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일상적이거나 다 알고 있는 사실보다는 여행지의 특유한 경치, 풍속, 인정,  여행지의 문화와 역사, 사투리, 나그네로서의 느낌 등이 좋은 소재다.

 

 

5. 기행문의 요소

가. 여정(旅情) : 여행한 경로. 언제, 어디를 거쳐갔는가의 경로를 시간적, 공간적 순서로 씀. (서사문적 성격)
나. 견문(見聞) : 여행 중 보고 들은 것. 그 고장의 경치, 풍속, 문화와 역사, 인심이나 사투리 등을 서술함. (서경문적 성격)
다. 감상(感想) : 여행하면서 느낀 점이나 보고 들은 사실에 대한 생각을 서술함. (서정문적 성격)
* 출발할 때의 모습과 상황, 기분 등과 도착해서의 모습과 상황, 기분 등을 인상 깊게 기록함.

 

 

6. 기행문에 나타나는 내용

가. 여행 동기나 목적 : 여행하는 이유나 목적. 대개 글의 앞부분에 씀.
나. 여행 방법과 일정 : 여행기간과 수단, 여행지 등.
다. 견문 : 여행하면서 보고들은 것.
라. 지방색 : 그 지방 특유의 풍습, 풍물, 사투리 등.
마. 감상 : 여행하면서 느낀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함.
바. 객창감 : 여행하면서 느낀 낯설음이나 집에 대한 그리움 등.
사. 반성 : 여행하는 동안의 전체적인 느낌, 반성, 성과 등.
아. 기타 : 그림이나 사진, 시 등을 곁들이면 시각적인 효과와 강한 인상을 주어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음.

 

 

7. 수학여행 기행문 작성 요령

 

가. 여행의 여정과 여행지에 대해서 미리 알아둠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본 만큼 느끼며, 느낀 만큼 알 수 있다.”고 한다. 낙화암에 올랐을 때 3천 궁녀가 백제 멸망과 함께 꽃처럼 떨어졌다는 전설을 알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느낀 점은 분명 다를 것이다.  마이산의 백미는 이갑용 처사가 쌓은 80여 개의 돌탑이다. 이것을 모르면 마이탑사 입구에서 그대로 옆으로 지나쳐서 부지런히 산길만 오르는 어리석은 여행을 할 수도 있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중학 또는 고교에서 학창 시절의 수학여행이다. 이 좋은 기회를 허송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많이 알고 가서, 많이 보고, 아울러 많이 느껴 보자. 그래야 생활에서 더 많이 알고 보며 느끼는 것이 반복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나. 필기구를 상비하고 자주 메모함

수학여행은 대개 일정이 빡빡하다. 따라서 여행 후에 기행문을 쓰려면 어디서 무엇을 보았는지 혼란스러운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어떤 절 뒤에서 샘물을 마셨는데 그 절이 고란사인지 관촉사인지, 커다란 불상을 보긴 했는데 그곳이 관촉사인지 은수사인지… 이런 기억으로 기행문이 제대로 될 리 없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필기구(목걸이 볼펜과 수첩공책)를 상비하고 수시로 기록하면 도움이 된다.

 

다. 요령 있게 메모를 할 것

 “사적 제5호로 사비성(泗侁城)이라고도 부르며,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해서 1차적으로 테뫼식(式) 산성을 축조하고, 다시 그 주위를 포곡식(包谷式)으로 약 1.5 km에 걸쳐서 축조…, 이곳에서는 탄화미(炭化米)가 많이 나오며 토축(土築)성벽도 완연히 남아 있다.”

 

부소산성(扶蘇山城)에 대한 안내문이다. 읽기도 힘들고 읽었다고 해도 무슨 말인지 이해도 안 될 것이다. 이것을 메모하려면 10분 이상 걸리고 그러노라면 더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한다. 테뫼식이니 포곡식이니 하는 것은 무엇이며 탄화미는 무엇인가. 또, 그것을 안다고 한들 무엇하겠는가. 이런 안내문보다는 견문과 느낌을 적어라. 사적지에 대한 그런 안내문을 적고 싶다면 쓰기보다는 카메라에 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라. 적당히 수면과 휴식을 할 것

수학여행을 가면 2박 3일(또는 3박 4일) 동안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 특히 밤에는 모처럼 학급 친구들과 한 방에서 자게 되니 여행기간 내내 잠을 설치기 쉽다. 신심이 피곤하면 제대로 보기 어렵다. 어떤 학생은 여행 기간 내내 밤을 새우고 차만 타면 잤고, 꿈꾸듯 비몽사몽간에 여행지를 헤매다 왔다는 경우도 있다. 그런 학생은 ‘차에 탔다. 잤다. 어딘가에 내렸다. 졸면서 걷다가 차에 탔다.’ 밖에는 쓸 것이 없을 것이다.

 

마. 식사와 간식을 맛있게 먹을 것

음식이 맞지 않다고 수저를 드는 둥 마는 둥하며 밥을 그대로 남기는 학생도 있다. 수학 여행은 몹시 피곤한 여정이다. 식사를 제대로 못한 몸으로는 힘든 일정을 견디기 어렵고 기행문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타지에서 식사를 하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이다. 여행의 3대 즐거움은 견문(새로운 것을 보고 들음), 식사(여러 지방의 색다른 음식을 맛봄),  쇼핑(여러 지역의 특산물을 구입)이라고 한다. 견문이야 당연한 것이고, 쇼핑은 학생 신분에는 아직 이를 지 모르지만, 식사의 즐거움을 잃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맛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추억이 되는 것이다. 맛있게 먹고 즐겁게 느끼면서 깊은 생각을 하자.

 

 

8. 수학여행 기행문 작성을 위한 기초 자료 기록의 실제

 

다음은 2박 3일간의 일정과 느낌을 그때그때 적은 메모에 여행지의 참고 자료를 조사하여 덧붙인 글이다. 기행문이라기보다 기행문을 쓰기 위한 기초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아래와 같은 순서로  수학여정 기록문을 쓴 뒤, 그것을 기초로 기행문을 작성하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①떠나기 전에 여행지에 대한 파악,

②여행 중에 수시로 메모 (이것을 정리하면 여정 기록문이 됨) 

③1박 이상의 여행일 경우 자기 전에 그 날 의 견문을 간단히 정리하여 기록 (여정 기록문에 보충)

④돌아오자마자 여행지에서의 메모와 참고 자료 정리 (시일이 지나면 잊어버릴 염려가 있음) 

⑤기행문의 주제를 정한 뒤 기행문 작성

 

 

 

백제권 수학여행 여정과 견문 기록문

 

2000년 5월 17일 수요일, 05:20분, 오전에는 안개가 있었으나 맑음

 

한겨레신문 톱뉴스 : [한-미 ‘현안’ 방치] / 남북회담 앞두고 ‘소파’ 개정등 뒷전 / 127개 시민단체 “적극해결” 촉구나서 // [매향리 우라늄탄 논란] / 미 조종사출신 “사격훈련때 사용”…미군은 부인 / 한-미 합동조사단 첫 구성 (참고로 여행 당시의 나라 정세를 알기 위해 신문의 톱기사 표제를 기록했음)

 

05:20 여행 전에 사나흘간 회식이 이어진 뒤에 긴장까지 한 탓인지 몸이 무거웠다. 평소에는 5시쯤이면 일어났는데 오늘은 늦은 셈이다. 한동안 수선을 피우며 여장을 준비했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경황이 없었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전체 회계를 담당하여 관람료와 간식비 등 590여만원을 지녀야했으므로 전대 가방을 준비했다. 200여만원은 수표로 바꾸었지만 그래도 현금이 전대에 꽉 찰 만큼 두툼했다.

 

06:40 집에서 나왔다. 부지런히 걸어가는데 어떤 승용차가 내 옆에서 멈춘다. 오XX의 어머니였다. 그 차로 집합 장소인 치악예술관까지 왔다. 담임선생님들이 각 반의 인원을 파악 중이었고, 교장선생님을 비롯하여 환송을 나온 20여명의 선생님들이 보인다.

 

07:20 버스에 승차했다. 나는 4호차(F호)다. 4반의 최00 담임선생님과는 허물이 없는 터다. 부담 없는 길동무가 될 듯하다.

07:30 버스가 치악예술관을 출발했다.

 

07:39 버스가 남원주 인터체인지를 통과했다. 짙은 안개가 가시지 않고 있다.

 

08:05 여주휴게소를 통과했다. 초등학생 세 명이 논둑 길을 뛰어가고 있다. 학교에 등교하는 모양이다. 그 모습이 평화스러웠다.

 

08:15 중부고속도로 대전방향에 진입했다. 모내기를 준비하는 농부의 모습이 정겨웠다.

 

08:31 음성휴게소에 도착했다. 휴게소 주변에는 야외 동물원을 꾸며져 있어서 닭과 토끼 등을 방목하는 모습이 특이했다.

 

09:22 증평교차로를 통과했다. 이곳(도안면)에는 우리 성씨(곡산연씨)의 집성촌이 있다.

 

09:30 버스가 청주 인터체인지를 통과했다.

 

10:05 버스가 공주시 연기면에 진입했다.

 

10:30 무령왕릉(武寧王陵)에 도착했다. 날씨는 좋았으나 아직 안개가 걷히지 않았다. 무령왕릉은 공개하지 않으므로 모형만 관람했다. 주차비는 2.000원, 관람료는 없었다. 정식 명칭은 공주송산리고분군(1~7호)인데, 7호분이 무령왕릉이다. 5호까지는 도굴되어 부장품이 없고, 6호분의 유물도 일제 때 도굴한 일인 교사가 모든 일본으로 훔쳐갔다.

 

11:05 버스가 무령왕릉을 출발했다.

 

11:10 국립공주박물관에 도착했다. 관람비와 주차비는 무료였다. 충남 공주시 중학동에 있는데 백제 문화재를 중심으로 전시되고 있다. 무령왕릉 체험실 등 출토유물(108종 2906점)이 진열실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곰과 인간과의 사랑이 얽혔다는 곰나루 설화가 재미있다. 마당에는 불상 석조물이 있는데, 대부분의 불상들이 머리나 팔 등이 파손되어 있다. 반죽동 석조(149호)와 중동 석조(147호)는 보물이다. 박물관 출입구에는 일본산 소나무인 금송이 심어져 있었다. 무령왕의 관재가 금송이라고 한다.

 

11:50 버스가 국립공주박물관을 출발했다. 안개가 걷힌 하늘이 매우 맑았다.

 

12:35 구드레 조각공원에 도착했다. 원래 계획은 부소산성에 주차하여 식사를 할 예정이었으나 주차장이 만원이라 이리로 온 것이다. 여기서도 주차비는 2.000원씩 냈다.
공원에서 점심을 들었다. 이곳은 넓으면서도 매점․수도․화장실 등의 시설이 갖춰져 있어서 식사하기에는 오히려 좋았다. 또, 구드레 공원 내에는 장승 공원이 있어서 전국의 장승을 30여개 전시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거의 안 보는 듯했다.

 

13:30 구드레 조각공원에서 부소산성을 향해 걸어서 출발했다. 1km 정도라고 한다.

 

13:40 부소산성 후문에 도착하여 입장했다. 관람비는 650원이었다. 입구에 파월장병 혼령을 위로하는 비각과 정인지 후손들의 정려문이 있었으나 대부분 지나쳤다. 하긴 그것들은 이곳에서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부소산 서복사지 역시 그대로 지나쳤다.

 

14:10 낙화암(落花岩)에 도착했다. 바위 위에 백화정이 있는데 1929년에 군수 홍한표가 지었다고 한다. 절벽 아래에는 落花岩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가보지 못했다. 그 아래를 흐르는 강이 백마강이다. 이곳에서 학급 단체 사진을 찍었다.

 

14:20 고란사(皐蘭寺)에 도착했다. 이 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내력은 전하지 않는다. 절 옆의 종각이 영종각인데, 종은 꽤 오래된 듯 보였다. 절 뒤 바위틈에 고란정(皐蘭井)이 있다. 표지판에는 샘 위의 바위틈에 고란초(皐蘭草)가 나 있다고 적혀 있다. 유심히 보았으나 고란초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고란사 벽에 붙은 액자에서 바짝 마른 풀잎 표구를 보았을 뿐이다. 고란정의 약수는 수량이 많지 않아서 줄을 서서 기다리며 마셔야 했다. 바위틈의 그늘에서 샘솟고 있는 샘의 자태를 보니 보약까지는 아니더라도 몸에 좋을 듯 싶었다. 이 절은 백제의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 의하면 백제가 멸망할 때 낙화암(落花岩)에서 사라져간 삼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1028년(고려 현종 19)에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절 안에는 의자왕과 태자 융을 위로하는 상이 차려져 있고, 부여군수의 조문(弔文)이 있었다.

 

14:40분 돌아오는 길에 사자루를 찾았다. 원래 사비루인데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 이강이 사자루라는 현판을 붙였다고 한다. 이 누각은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고 한다. 누각에 올랐지만 짙은 녹음 때문에 경치를 감상하지 못했다. 봄보다는 낙엽이 진 가을에 오는 것이 망국의 경치에 어울릴 듯 싶다. 예전에는 ‘늦가을, 비오는 날, 저녁 무렵 혼자서 찾을 때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시문이 사비루에 있었다고 한다.
부소산 비탈 곳곳에 위험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었다.
“사고의 위험이 있아오니 절대 올라가지 마십시오.”
“있아오니”는 “있사오니”로 해야 바른 표기이다. 관광지에서 자주 보이는 오기이다.
15:00 구드레 공원에 돌아와서 버스에 승차했다. 한심한 것은 방금 돌아본 곳이 부여부소산성(扶餘扶蘇山城)인데 막상 산성은 보지 못한 것이다. 부소산성은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雙北里)에 있는 백제시대의 산성으로 사적 제5호이며 사비성(泗侁城)이라고도 불린다. 538년(성왕 16) 웅진(熊津)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 때를 전후하여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던가. 그런데 성은 어디에 있을까? 지금은 허물어져서 없는 것인지, 남아있기는 하지만 내가 보지 못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15:05 버스가 구드레 공원에서 출발했다.

 

15:25 논산시라는 표지판을 통과했다.

 

16:00 관촉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관람비는 1000원, 주차비는 3.000원씩이었다.

 

16:10 산길을 2~3분 걸어서 관촉사(灌燭寺)에 입장했다. 관촉사는 충남 논산시 은진면(恩津面) 반야산(般若山) 기슭에 있는 절로 고란사와 마찬가지로 마곡사의 말사이다. 968년(광종 19)에 혜명(慧明)이 창건하였고, 법당은 1386년(우왕 12)에 세웠으며, 1581년(선조 14) 백지(白只)가 1674년(현종 15)에는 지능(知能)이 낡은 부분을 고쳐지었다. 옛날 중국의 지안(智安)이라는 명승(名僧)이 여기에 왔다가 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은진미륵)을 보고 “아아, 마치 촛불(촉燭)을 보는(관灌) 것같이 미륵이 빛난다”라면서 예배하였다고 하여 관촉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덩치만 컸지 볼품은 별로 없는 듯했다. 경내에는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218호)을 비롯하여 석등(石燈:보물 제232호)․사리탑(舍利塔)․연화배례석(蓮花拜禮石:충남유형문화재 제53호)․사적비(事蹟碑)․관음전(觀音殿)․삼성각(三聖閣)․사명각(四溟閣)․해탈문(解脫門)․현충각(顯忠閣)․기미독립운동기념비 등이 있다. 절 입구에 있는 반야교(般若橋)는 현대식 구름다리인데 1914년에 만들었다고 한다. 은진미륵 앞에서 학급 단체 사진을 찍었고, 인솔 선생님들도 단체사진을 찍었다.

 

16:35 버스에 탔다.

 

16:40 버스가 관촉사를 출발했다.

 

17:27 멀리 원주아파트라는 건물이 보인다. 가까이 가니 원주마을이라는 표지판도 있다. 그러나 한문으로는 原州가 아니라 元柱였다. 내가 “여기에도 원주가 있네요.”라고 말하니, 최00 선생님도 “그러게요.”라며 따라 웃었다. 그러자 운전기사가 “원주라는 지명은 아주 흔해요.”라며 아는 체 했다.

 

17:50 목마회관 휴게소(만남의 광장)에서 휴식했다. 여기는 전라북도 진안군이라고 한다.

 

18:08 버스가 출발했다. 덕유산의 경사가 심했다. 2호차와 3호차가 언덕길을 제대로 오르지 못해서 짜증이 났다. 버스도 무진장(무주․진안․장수) 계곡이 힘겨운가 보다.

 

19:26 무주리조트에 도착했다. 호텔 수준인 이곳 시설은 매우 좋았다. 각 동은 민들레동․진달래동․들국화동 등 꽃이름을 붙였다. 각 동의 건물은 약간씩 변화를 주어 서로 다르게 짓는 등 신경을 쓴 흔적이 보였다. 우리 학교의 숙소는 해바라기동이었다. 그러나 리조트 측에서 안내인이 나오지 않아서 방을 배정할 때 혼란스러웠다. 특히 카드식으로 되어 있는 방 열쇠가 아이들은 물론 선생님들에게도 생소했고, 문을 열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나는 변00 선생님과 함께 606호를 썼다.

 

20:20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는 돈까스에 반찬은 크림스프․마카로니 샐러드․포기김치였다. 식단은 깔끔했으나 반찬의 양이 적었다. 남자 선생님들은 곰탕을 들었다. 좌석이 충분하고 10여명의 종업원이 배식하니 식사시간은 30여분 정도 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식사가 부족하여 7명의 학생이 늦게 식사를 하는 등 약간의 혼선이 있었다.

 

21:30 객실에 돌아왔다. 침대가 2개 있고, 조리시설까지 갖춰져 있는 등 콘도식이었다. 화장실에 수건과 비누는 충분히 있었지만 치약과 칫솔은 없었다.

학생 몇몇이 몸이 아프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준비한 것은 간단한 진통제와 감기약 정도였다. 이곳에는 약국이 없었다. 슈퍼마켓에서 약도 판다기에 위생을 맡은 이00 선생님과 함께 무주리조트의 메인 슈퍼마켓에 가보았다. 하지만 구급약 정도였고 그나마 값이 시중보다 2배정도 비쌌다. 감기약과 진통제를 약간 구입했다.


21:40~22:30 선생님들이 본부에 모여 평가회의를 했다. 회의에서는 내일 마이산을 넘을 것인가, 마이탑사만 보고 되돌아 올 것인지를 논의했다. 선생님들은 이곳은 다시 오기 힘든 곳이니 특별한 일이 없으면 산을 넘자는 의견이 많았다. 회의를 마친 뒤 한00 선생님의 운동화가 보이지 않았다. 분실된 줄 알고 30여분간 소동이 있었다. 구내 마이크 시설이 없으므로 방마다 확인했다. 사실은 최00 선생님이 실수로 신고 갔었다.

 

23:00~01:00 객실의 텔레비전을 통해 이정현이 주연한 <꽃잎>을 시청했다. 이정현의 오빠는 군대에서 의문사 했고, 어머니는 80년 광주민주화 운동 때 죽었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된 충격으로 정신 이상이 된 그녀는 이곳저곳을 방황한다. 여러 남자들이 그녀를 농락하는데 마지막 남자가 80년 당시 공수부대원이었다. 그는 그녀의 과거를 알고 괴로워한다. 묘지에 엎드린 이정현이 진압대원에게 희생되는 어머니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데모군중의 함성과 함께 그녀의 절규가 오버랩 되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오늘이 5․18 전야. 백제의 옛 터전인 호남 땅에서 백제의 유물을 관람한 날이다. 밤늦도록 백제 후예들의 고통을 주제로 한 영화를 보노라니 묘한 감회가 일었다.

 

01:30 잠자리에 들었다.


2000년 5월 18일과 5월 19일은 생략. 위 글은 수학 여행 인솔 때 수시로 메모 수첩에 기록한 것을 그날그날 자기 전에 간단히 정리했고, 여행에서 돌아온 뒤 보완한 것임 

 

2012.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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