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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물사전

조참

[ 曹參 , cáo cān ]

요약 서한의 개국공신
조참의 초상화

조참의 초상화

시대 서한(西漢, 전한)
출생 - 사망 미상 ~ BC.190년 추정
관련 고사성어 소규조수(蕭規曹隨)

1. 일개 옥리에서 재상이 되다

사수(泗水) 패1) 사람으로 자는 경백(敬伯)이다. 진(秦)나라의 옥리(獄吏)로 있던 그를 소하가 주리(主吏, 군 · 현에 소속된 관리)로 삼았다.

BC.209년 유방(훗날의 한고조)이 패현(沛縣)에서 거병하자 한신과 함께 그를 보필했다. 함곡관에 들어와 진을 격파한 뒤 건성후(建成侯)에 봉해졌으며, 초한전쟁 때 한신과 위(魏) · 제(齊)를 평정하는 등 여러 차례 공을 세워 공신 중에 서열이 두 번째가 되었다.

고조 6년(BC.201) 평양후(平陽侯)에 봉해진 뒤 제국의 상국(相國, 재상)이 되었다. 고조의 장자 유비(劉肥)가 군(郡)으로 조정된 제(齊)국의 도혜왕(悼惠王)에 분봉되면서 조참의 지위도 상승한 것이다. 이때 진희(陳豨) · 경포(黥布, 英布)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죽읍(竹邑), 상(相), 소(萧), 유(留) 등의 각 현(縣)을 수복하였다.

조참의 초상을 새긴 벽

조참의 초상을 새긴 벽

2. 소규조수의 미담을 남기다

고조 유방의 뒤를 이은 혜제 2년(BC.193) 소하의 유지에 따라 승상(丞相)이 되었다. 조참은 소하의 방책을 개정 없이 잘 수행하여 ‘소규조수’라는 미담을 남겼는데 “소하는 정연한 법령을 만들고, 조참은 그를 이어받아 준수하며 청정한 정치를 하였다”는 내용이 당시 안정된 사회풍토를 대변하고 있다.

사마천은 그가 재상으로 있는 동안 청렴하고 도리에 합당한 정사를 펼쳤다고 하면서 조참이 추진한 ‘일부러 일을 만들지 않고 백성들을 편히 쉬면서 생업에 종사하게 한’ 정책은 천하에 미덕으로 남을 만하다고 하였다.

평생 동안 전투에 참여하여 두 나라와 122개 현을 함락시키는 공을 세운 조참은 재상을 지낸지 3년 만에 병사하였다. 그의 무훈(武勳)은 경제회복과 함께 민심을 수렴한 정치적 성과와도 함께 기록되어 공으로 남아 있다.

조참의 석상

조참의 석상
조참의 석상

3. <참고자료> 소규조수

예기』에 보면 ‘검우위(儉于位), 이과우욕(而寡于欲), 양우현(讓于賢)’이란 구절이 나온다. “지위에 검소하고 욕심을 덜 부리고 유능한 사람에게 양보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유능한 사람에게 자리나 일을 양보한다는 ‘양현(讓賢)’이란 개념이 나왔다.

‘양현’은 중국 역사상 리더십이나 인재 문제와 관련하여 많이 강조된 미덕의 하나이다. 리더나 지도층이 능력도 되지 않으면서 부와 권력을 탐하면 그 피해가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직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 옛날 상고시대 임금이 아들이 아닌 민간인 을 발탁하여 자신의 자리를 물려준 ‘선양(禪讓)’의 고사가 수천 년 동안 칭송되었으며, 춘추시대 포숙이 자신에게 돌아올 재상 자리를 유능한 관중에게 양보한 ‘관포지교’가 최고의 가치로 평가되었던 것이다. 이밖에도 수많은 ‘양현’ 사례가 전하는데, 한나라 초기 사이가 좋지 않았던 소하와 조참의 ‘양현’도 귀감이 될 만하다.

서한 혜제 때인 기원전 194년 승상 소하의 병이 깊어졌다. 소하는 자신의 후임으로 조참을 추천했다. 혜제가 자신의 추천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접한 소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며 기뻐했다. 조참은 소하가 만들어 놓은 법과 규정을 잘 이어받았다. 여기서 ‘소하가 만들고 조참이 지켰다’는 ‘소규조수’의 고사성어가 탄생했고, 이 덕에 정권 초기 불안정한 정국을 안정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사실 성격이나 기질이 달랐던 소하와 조참은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소하는 사심을 버리고 자신의 후임으로 주저없이 조참을 추천했다. 조참 또한 꼼꼼한 소하가 만들어 놓은 법과 규정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따르면서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함으로써 소하의 ‘양현’에 보답했다.

조참과 함께 ‘소규조수’란 미덕을 남긴 소하

조참과 함께 ‘소규조수’란 미덕을 남긴 소하

4. 관련 유적

조참의 무덤으로 알려진 조총한묘(曹冢汉墓)가 산둥성 더저우(德州)시 린이(臨邑)현 덕평진(德平镇)에 남아 있는데, 무덤은 한나라 양식을 따르고 있다.

조참의 초상화

조참의 초상화

참고문헌

  • 『사기(史記)』 권54 「조상국세가(曹相国世家)」 제24
  • 『한서(漢書)』 권39 「소하조참전(萧何曹参傳)」 제9
  • 「조총한묘(曹冢漢墓)」, 『임읍여유(臨邑旅游)』 2013.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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