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에서 교조신원(敎祖伸?)의 첫 발을 내딛다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기사승인 : 2018-08-22 16:3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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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평전
복원된 충청감영. 공주박물관 옆에 복원된 충청감영의 동헌(좌)과 선화당. 원래 충청감영자리는 현재 공주사대부속고등학교 자리이다.
복원된 충청감영. 공주박물관 옆에 복원된 충청감영의 동헌(좌)과 선화당. 원래 충청감영자리는 현재 공주사대부속고등학교 자리이다.

 


충청도관찰사 조병식의 동학 탄압


1880년대 중반 이후 동학의 교세 확장은 충청도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번지고 있었다. 1890년대에 이르면 동학의 교세는 강원도를 위시해 충청도와 전라도, 경기도에 이르기까지 도인수가 급증했다. 도인수가 늘어 사회세력화하자 동학도인들은 숨어서 은밀하게 활동하는 것을 벗어나 드러내놓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동학이 수면 위로 드러나자 지방의 관리와 토호들은 동학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탄압에 들어갔다. 특히 1891년 충청감사에 임명된 조병식은 방곡령의 실패로 실추된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동학 탄압에 열을 올렸다. 해월도 탄압을 피해 충청도의 공주와 음성, 진천으로 전전해야 했고 마침내 충청도를 벗어나 경상도 상주의 왕실마을로 피신할 정도로 탄압이 극심했다.


1892년 5월이 되자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관리와 토호들의 탄압에 가산을 탕진하고 마을에서 쫓겨나 길거리로 나앉는 도인들이 발생했다. 즉, 동학이 이단이라는 빌미로 동학도들의 사회 경제적 기반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렸다. 이전에는 동학도를 잡으면 처벌하거나 유배를 보냈지만 가산의 몰수와 마을에서의 추방은 없었다. 1893년 보은 교조신원운동 당시 양호선무사인 어윤중(魚允中)이 올린 장계 가운데 조병식의 동학도 탄압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다.


동학을 금지하고 단속한다고 말하는 것은, 말은 비록 이단을 배척한다고 하면서 생각은 모두 재물을 훔치려는 것입니다. 전 영장 윤영기(尹泳璣)는 귀신과 같은 거간꾼이 되어 그 사이를 조종하였고, 전 공주진 영장 이존필(李存馝)은 손가락질하며 사주하고 멋대로 불러들여 그로 하여금 그 무리들을 끌어들이도록 하여, 돈이 있는 사람은 재산을 탕진하고서 다행히 달아나게 무사하지만, 돈이 없는 사람은 혹은 죽고 혹은 유배시킵니다. 또한 백성이 조금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있는 사람은 동학의 이름에 멋대로 집어넣어 모두 없는 죄를 교묘하게 꾸밉니다. <취어(聚語)>


조병식은 수하를 동원해 조직적으로 동학도의 재산을 몰수하고 동학도를 처형하거나 유배시키는 가혹한 탄압을 일삼았다. 이와 함께 경제적 여유가 있는 양민을 동학도를 빙자해 탐학했다. 이에 동학도인들이 “무고히 남편과 아버지를 이별하게 하여 엄동설한에 길가에서 울부짖게 하니 무슨 죄가 있어 이처럼 내몰고 있는가?”라며 호소했다. 각지의 접주들은 도인들의 참혹한 상황을 도소에 전달했다. 삶의 터전을 잃은 충청도의 도인들은 대도소가 있는 보은 장내리로 모여들었고, 전라도에서 내몰린 도인들은 김덕명 대접주가 있는 금구 원평으로 몰려들었다.


충청도관찰사 조병식 영세불망비로 공주시청의 여러 선정비와 함께 있다. 충남 논산시 부적면 마구평리 부적지서 앞의 양조장 터 담 밑에도 조병식의 불망비가 세워져 있다.
충청도관찰사 조병식 영세불망비로 공주시청의 여러 선정비와 함께 있다. 충남 논산시 부적면 마구평리 부적지서 앞의 양조장 터 담 밑에도 조병식의 불망비가 세워져 있다.

 


천주교는 포교의 자유 획득


이렇게 동학이 관과 지역의 토호들에 의해 탄압받는 것과는 달리 서학인 천주교는 탄압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1886년 프랑스와의 수교 이후 천주교와 개신교의 전교는 묵시적으로 허용되고 있었다. 프랑스와의 조약에서 공식적으로 전교(傳敎)의 자유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교회(敎誨), 즉 선교를 위해 공개적으로 교리를 가르칠 수 있었다는 조항이 들어 있어 천주교와 개신교는 이 조항을 활용해 포교의 자유를 얻었다. 또한 치외법권(治外法權)과 최혜국(最惠國) 대우를 인정받은 열강의 선교사들은 호조(護照, 외국인에게 주는 여행권)를 가지고 전국을 다니면서 직접적인 선교활동을 했다.


프랑스와의 조약에 개항지(開港地)가 아닌 곳에서는 선교사의 토지 매입이나 교회 건축이 금지돼 있었다. 그러나 천주교회는 개항장 이외의 지역에서도 성당과 사제관(司祭館)을 신축하기 위해서 토지나 가옥을 매입했다. 1889년에 금구현(金構縣)의 배재(梨峙)에, 1891년에는 전주부성의 정문인 풍남문 밖에 있는 구례(求禮) 영저리(營邸吏)의 집을 매입해 선교사가 상주하며 공식적인 전교 활동을 시작하는 등 전라도 곳곳에서 성당을 세우고 전교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천주교인과 지역민간에 발생하는 충돌은 프랑스공사관을 통해 정치적으로 해결했다.


 


교조신원운동으로 합법화 꾀해


관의 용인 속에서 교세를 확장하고 있던 천주교는 달리 동학에 대한 관의 수탈과 탄압의 빈도는 오히려 늘어나고 있었다. 특히 1892년 5월 들어 탄압이 더욱 심해지자 동학도인들은 종교의 자유 획득을 위한 교조(敎祖)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교조신원이란 이단(異端)으로 몰려 처형당한 수운의 억울함을 씻어 조선 정부로부터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받음을 의미한다. 비록 성리학적 통치이념 아래 있었지만 불교와 서학, 즉 천주교처럼 동학도 자유로운 종교 활동의 근거로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사면 받고자 했다.


교조신원운동이 처음으로 제시된 시기는 1892년 7월이었다. 서인주(徐仁周)와 서병학(徐丙鶴)이 상주 왕실로 찾아와 충청도에서의 상황을 전하며 교조신원운동을 요구했다. 그러나 해월은 두 사람의 뜻을 알았지만 선뜻 동의하지 못하고 “일이 제대로 안될 것이니 조용히 들어앉아 수도하면서 때를 기다림만 못하다.”라고 거절했다. 이는 1871년 영해에서의 신원운동으로 거의 괴멸 당했던 기억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건의 이후 해월은 각지의 지도자를 왕실로 불러 대책은 논의했지만 가중되는 탄압 속에서 교조신원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더욱이 천주교가 포교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상황에서 동학에 대한 일방정인 탄압은 신원의 명분이 된다고 파악했다. 해월은 여러 사람의 뜻을 좇아 10월초부터 교조신원의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세워나갔다. 신원운동의 명분으로는 동학이 이단이 아니라는 점과 일본과 청의 침략에 대항하는 보국안민의 도학에서 찾았다. 상대할 지방관으로는 가장 극심하게 동학을 탄압하는 충청도관찰사를 선정했다. 신원의 시기는 추수가 끝난 10월말에서 11월초로 정했다.


 


청주 솔뫼 손천민의 집에 의송소(議訟所) 설치


이렇게 방침을 정한 해월은 청주 남쪽 솔뫼(현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신송리)에 있는 손천민(孫天民)의 집에 의송소(議訟所)를 설치하고 도차주 강시원과 김연국, 손천민, 손병희, 임규호, 서인주, 서병학, 황하일, 조재벽, 장세원 등 동학의 지도부를 모아 신원 운동을 주관하게 했다. 충청감사에게 제출한 의송단자(議訟單子, 소원문)는 손천민이 집필했다. 그리고 신원운동에 참여할 각 접주에게 입의통문(立義通文)을 보냈다. 이 통문에서 해월은 ‘교조인 수운이 원통히 돌아가신 지 30년이 되었으니 제자 된 자 황천에라도 따라가서 의리를 다하도록 하자’라고 적극적인 참여를 역설했다.


충북대학교 신영우 교수는 솔뫼를 찾아 이 지역의 접주였던 강영문의 집안 손자 학수 씨가 부친으로부터 들었던 솔뫼에서의 신원운동과 동학혁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남일면 솔뫼에는 옛날에 동학이 심했다고 해요. 동학하는 이들이 대청에 모여앉아서 주문을 외웠지요. 그리고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네 것 내 것 없이 음식을 만들어서 같이 나누어 먹었다고 해요. 보은에두 갔었대요. 솔뫼에서 사람이 들끓다가 보은에 몰려갔는데 한 관원이 연설해서 설득되어 헤어져서 왔답니다. 동학을 해서 크게 일으킨 사람도 인물이었고, 연설을 하여 설득해서 수만 명을 헤어지게 한 사람도 큰 인물이었다구 하대요. 어른들 말로는 솔뫼에 동학하는 이가 많아서 병정들이 몰려와 총을 쏘고 난리가 나서 피난했다고 합니다. 총을 쏴서 누가 배를 맞기도 했대요. 어느 할머니는 어린 손자한테 총소리 때문에 솜으로 귀를 막아주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학수 씨의 증언에 따르면 솔뫼에는 유무상자 이념을 실천할 정도로 동학도들이 많았던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솔뫼에서 동학혁명 당시 전투가 벌어졌음을 증언했는데 실제 솔뫼에서 2차 기포 때 관군과 전투가 있었다.


솔뫼마을.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신송리에 있는 솔뫼마을 손천민의 집에서 공주 교조신원운동을 위한 의송소가 차려져 의송단자(소원문)이 만들어졌다.(출처: 충북인뉴스)
솔뫼마을.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신송리에 있는 솔뫼마을 손천민의 집에서 공주 교조신원운동을 위한 의송소가 차려져 의송단자(소원문)이 만들어졌다.(출처: 충북인뉴스)

 


교조신원의 소원문 제출


10월 20일 공주로 모여든 동학도들은 1천여 명에 달했다. 해월의 분부대로 도인들은 의관을 정제하고 나타났다. 이튿날인 21일 아침에 의관을 정제한 동학도들이 줄줄이 충청감영으로 들어갔다. 서인주와 서병학 등 8명의 지도자가 장두(狀頭)로 앞장섰다. 의송단자를 상에 받쳐 들고 충청감사 조병식이 집무하는 관아 아래로 나아갔다. “각도동학유생(各道東學儒生) 의송단자(議訟單子)”라는 제목의 소원문에서 ‘동학이 유불선(儒佛仙)을 통합한 도로 이단이 아니며, 서양 오랑캐의 침입과 일본의 경제적 침투 속에서 광제창생과 보국안민을 염원하는 도학’임을 강조하고, ‘교조의 신원과 동학도에 대한 탄압의 부당함’을 담고 있다.


충청감사 조병식은 다음날인 22일 제사(題辭, 백성의 소장이나 원서에 쓰던 관부의 판결이나 지령)를 동학도들에게 전해주었다. 그 핵심은 “동학도를 금하고 금치 않는 권한은 내게 없다. 조정의 명령에 따를 뿐이다.”였다. 최제우의 신원은 지방관의 업무 범위를 넘어선 중앙 정부의 권한이라고 했다. 다만 그는 “앞으로는 충청도 내에서 억울하게 침탈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으니 물러가라”고 경제적 침탈을 중지할 것을 약속하며 해산을 종용했다. 그러나 동학도들은 감사의 답변에 특별한 조치가 없음을 알고 시위를 지속했다. 그러자 조병식은 각 군현의 수령들에게 “교졸과 관예에 명하여 횡포와 침탈을 못하게 할 것과 생업에 편안케 하라.”는 감결(甘結)을 보내 동학도를 달래 해산시키려 했다.


동학도들은 자신들의 요구에 충청감사가 답을 보내자 고양됐다. 몇몇은 정배 간 도인들이 석방되지 않았음을 들어 시위를 장기화하려고 했다. 이처럼 동학도들의 시위가 생각보다 거세게 지속되자 충청감사는 관원들을 풀어 강제로 해산했다. 그리고 조병식이 음식업자와 숙박업자에게 동학도들에게 밥과 잠자리를 제공하면 옥에 가둔다고 위협하자 동학도들이 흩어졌다. 서인주와 서병학 등 교조신원운동을 이끌던 지도부는 25일경 철수했다. 첫 신원운동에서 동학도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당당히 관에 요청했으나 별다른 희생 없이 마무리되자 앞으로 교조신원운동을 지속하기로 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성강현 전문기자.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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