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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윤봉길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한 점이 뭐죠? (급합니다 !!)
OoOoOoO 조회수 1,297 작성일2018.05.21

6학년 사회 조사 하는데요.

제가 윤봉길선생님의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노력한 점을 알아봐야 해서요.

대도록이면 빨리 답변 부탁드립니다 !!

자세히 적당하게 써주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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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윤봉길(, 1908. 6. 21~1932. 12. 19)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부친 윤황()과 모친 김원상()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우의(), 봉길은 별명이며, 호는 매헌이다. 11세 때인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ㆍ1독립운동의 함성과 함께 학교를 자퇴하고, 이후 1921년 매곡() 성주록()의 문하에 들어 오치서숙()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전통 교육을 받으면서도 윤 의사는 당시 민족잡지인 [개벽] 등을 구독하며 민족운동의 방향을 정립하여 갔다.

1926년 서당에서 수학하던 중, 윤 의사는 산책길에 건너편 공동묘지에서 여러 묘표()를 뽑아들고 선친의 무덤을 찾아달라고 간청하는 한 무지한 청년을 만나게 된다. 이때 의사는 묘표를 뽑아 무덤의 위치조차 알 수 없게 만든 그 청년의 무식이 나라까지 잃게 한 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윤 의사는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인근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학생들이 늘어나자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 문맹 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농민 계몽은 야학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윤 의사는 1927년 [농민독본()] 3권을 저술하여 본격적으로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다. [농민독본]의 구성이 ‘낙심말라’, ‘백두산’, ‘조선 지도’, ‘자유’, ‘농민과 공동정신’ 등이었던 것만 보아도 당시의 농촌계몽운동이 단순히 계몽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민족 얼의 부흥을 목적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928년에는 부흥원을 세워 구체적인 농촌 개혁을 실시하여 갔다. 주된 사업은 농가 부업 장려 등의 증산운동과 공동판매, 공공구입의 구매조합 설치, 토산품(국산품) 애용과 일화배척(), 생활 개선 등이었다. 이듬해에는 월진회를 조직하여 농촌개혁운동을 추진할 중심 인물들을 규합하였고, 위친계(), 수암체육회 결성을 통한 친목 도모 및 체력 향상 등 윤 의사의 활동은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1929년에 접어들자 농민계몽, 농촌개혁 운동의 성과가 드러나기 시작하였지만, 이 과정에서 윤봉길 의사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운동이 결국 민족운동, 즉 독립운동으로 귀결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한국인의 진정한 행복은 개량과 개혁의 수준에서 머물 수 없었고, 완전한 독립을 달성할 때 비로소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1929년 12월 16일자 일기에 윤 의사는 “함흥수리조합 일본인들이 조선인 3명을 타살. 아! 가엾어라, 이 압박 어느 날 갚을는지”라고 적어 넣기도 했다. 이는 윤 의사가 막연하나마 일제의 압박을 벗어나기 위한 구체적 행동의 싹을 틔우고 있었던 사실을 잘 보여준다.

[네이버 지식백과] 윤봉길 [尹奉吉] - 독립 위해 산화한 영원한 청년 의사 (독립운동가)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1756&cid=59011&categoryId=59011

자세한사항은 여기에더있어요


2018.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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