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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포석정에 대해.. 급합니당 ㅠ
girl**** 조회수 4,214 작성일2011.03.18

안녕하세요..ㅠ

지금 1분1초가 너무나도 급해요,, 될수있음 빨리 답해주세용..ㅠ

제가 사회 숙제를 해야되는뎅 '포석정' 에 대해 알아오라해서..ㅠ

 

질문!

 

포석정은 삼국중 어느 나라 문화재??

 

언제 만들어졌는가?

 

보물/국제 지정 번호는??

왜 만들어졌는가??

 

어디에 보관되었는가??

문화재 특징,설명??

확실하게 답해주세요..ㅠ

 

내공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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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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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포석정지

 

위치한 곳:경북 경주시 배동 454-3번지로 남산 서쪽계곡 포석계의 계류가에 있다.

 

만들어진 시대 : 통일신라시대

 

역사적 사실 : 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젊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기상을 배우던 곳이다.

 

신라천년의 종말을 내린 슬픈 자취가 기록되었으니 55대 경애왕때 일이다. 왕 4(927)년 9월 후백제의 견훤은 신라를 침범하여 지금 영천까지 쳐들어 왔다. 견훤이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받은 경애왕은 고려의 왕건에게 도움을 청해놓고 이 곳 포석정에서 술잔치를 베풀었던 것이다. 왕과 왕비를 위시하여 신하들은 곡수에 술잔을 띄워놓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이 기회를 노린 견훤이 불시에 쳐들어오니 왕은 왕비와 같이 숨어 버렸고 신하들은 붙잡혀 종이 되더라도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견훤의 손에 모두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왕궁을 차지한 견훤은 왕을 잡아오게 하여 스스로 죽게 하고 마음대로 횡포를 부렸다. 견훤의 군사들은 재물을 약탈하고 여자와 남자들은 종으로 잡아가니 그 영화롭던 신라의 서울은 수라장으로 변했고, 찬란하던 거리는 피로 물들었다. 견훤은 김부(경순왕)를 왕위에 앉혀놓고 왕의 아우 효렴과 재상 영경등을 인질로 데려가니 신라는 다시 일어설 기력을 잃고 그 후 10년도 못되어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으니 신라 천년의 종말을 이곳 포석정에서 내리게 되었다. 

 

유래 : 언제인지는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통일 신라시대 때 만들어졌다고 추정된다.

 

모양과 형태 : 물길은 22m이며 높낮이의 차가 5.9㎝이다. 좌우로 꺾어지거나 굽이치게 한 구조에서 나타나는 물길의 오묘한 흐름은, 뱅뱅돌기도 하고 물의 양이나 띄우는 잔의 형태, 잔 속에 담긴 술의 양에 따라 잔이 흐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고 한다.

 

가치와 의의:1963년 1월 21일 사적1호로 지정되었다.포석정은 유상곡수연으로 좌우로 꺾어지거나 굽이치게 한 구조에서 나타나는 물길의 오묘한 흐름은, 뱅뱅돌기도 하고 물의 양이나 띄우는 잔의 형태, 잔 속에 담긴 술의 양에 따라 잔이 흐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고 한다. 유상곡수연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있었으나, 오늘날 그 자취가 남아있는 곳은 경주 포석정 뿐으로, 당시 사람들의 풍류와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  

 

보존상태:포석정만 남아 있을 뿐 여러 건축터는 알지 못하고 있다.즉 이궁으로 쓰였던 건축물은 모두 사라졌다. 

 

쓰임새 포석정터의 틈 사이로 물이 흘러 들어오면 그 위에 술잔을  놓고 동동 띄워 술을 마셨다.

 

 

2011.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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