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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포석정에 쓰임세좀알려주세요
wp**** 조회수 991 작성일2010.04.08
포석정에쓰임세좀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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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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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정쓰임새

이것은 포석정의 경우 물이 흘러가는 경로가 다양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위치에서 잔을 출발시킬 경우 술잔이 같은 경로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는 신라인들은 경사가 급격히 변하는 지점이나 꾸부러진 지점에서는 수로 폭을 확장하거나 내부의 바닥 면의 굴곡을 세심하게 설계하여 술잔이 전복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이처럼 회돌이 형성 부분에 따라 구조를 다르게 만든 것은 신라인들이 유체 이동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뜻한다.

최근에는  포석정이 단순한  놀이터가 아니라 왕과 귀족들의 중대한 회의 장소 또는  제사장소이기도 했다는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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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정(鮑石亭)

 

종목: 사적 제 1호

포석정터가 있는 곳(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탑정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구.

지정번호 : 사적 제1호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크기 : 면적 7,432㎡

있는 곳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탑정동


구조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호로 지정되었다. 면적 7,432㎡이다. 신라 헌강왕 때 이 포석정에 대한 기록이 처음 쓰여 졌으나, 언제 만들어졌는지 확실하지 않다. 경주 남산 서쪽 기슭의 이궁원내에 유연을 위한 자리로 만든 이 석구는, 유상곡수라는 시회를 벌일 수 있도록 특이한 구조로 만들었다.


 

역사적사실

포석정일대는 성남이궁터라 한다. 이궁이란 임금이 행차하셨을 때 머무시는 별궁을 가리키는 말이다. 화랑들이 남자다운 기상을 배우던 장소이기도 하다. 『삼국유사』의 처용랑 망해사조에 헌강왕(875∼885)이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신이 나타나 춤을 추는 모습을 왕이 보고 따라 추었던 데서 어무산신무또는 어무상심무라는 춤이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통일신라시대 헌강왕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곳은 신라 패망의 현장으로 더 잘 알려진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신라 말기, 고려 태조 왕건은 왕위에 올라 신라를 위협했다. 그리고 왕건이 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기자 신라에서는 왕건과 친교를 맺어 국가의 운명을 연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달이 차면 기울게 마련, 신라에서 고려로 투항하는 병사들이 점점 늘어나는 등 민심이 이반되기 시작하자, 신라는 풍전등화의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경명왕이 사망하고 경애왕이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왕위가 바뀌었어도 신라의 위엄은 서지 않고 장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여 몸을 부지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경애왕은 왕위에 오른 지 3년째 되던 해 11월 비빈과 종척들을 데리고 포석정에서 연회를 열었다. 『삼국사기』에 이 당시의 정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경애왕 4년(927) 11월, 견훤의 궁대가 왕경(王京, 경주)에 쳐들어왔다. 왕은 왕비 궁녀와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이느라 적이 오는 줄도 몰랐다.] 이 기록에 의하면 경애왕은 갑자기 후백제 견훤의 군사들이 쳐들어오는 것도 모를 정도로 소위 노천 파티를 벌이다가 습격을 당한다. 경애왕은 호위병도 없이 병풍을 손수 가리고 광대들에게 군사를 막게 한 후 이궁으로 달아났지만 곧바로 견훤에게 사로잡혀 왕비와 부하들 앞에서 자결한다. 이후 효종 이찬의 아들 부(傅)가 왕위에 올라 신라 최후의 경순왕이 되지만 그도 왕위에 오른 지 몇 년 안 되어 견훤에게 항복함으로써 신라는 패망한다.


보존상태

건물은 없어지고 역대 임금들이 잔을 띄우고 시를 읊으면서 놀이를 즐겼던 전복 모양의 석조구조만 남아 있다고 한다. 손상은 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는 상태다.

 

가치와 의의

신라시대 왕이나 화랑이 풍류를 즐기고 술잔을 기울이는 곳이었으므로 그다지 좋은 문화재는 아니지만 물이 흘러가는 원리를 잘 이용한 것이 그 가치를 평가했다.

 

포석정 문화재가 있는 곳

경주 남산 서쪽계곡 포석계의 계류 가에 위치해 있다.

포석정터의 틈 사이로 물이 흘러 들어오면 그 위에 술잔을  놓고 동동 띄워 술을 마셨다. 

 

쓰임새

이것은 포석정의 경우 물이 흘러가는 경로가 다양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위치에서 잔을 출발시킬 경우 술잔이 같은 경로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는 신라인들은 경사가 급격히 변하는 지점이나 꾸부러진 지점에서는 수로 폭을 확장하거나 내부의 바닥 면의 굴곡을 세심하게 설계하여 술잔이 전복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이처럼 회돌이 형성 부분에 따라 구조를 다르게 만든 것은 신라인들이 유체 이동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뜻한다.

최근에는  포석정이 단순한  놀이터가 아니라 왕과 귀족들의 중대한 회의 장소 또는  제사장소이기도 했다는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만들어진 시대

포석정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기록에 없다. 49대 헌강왕(876∼886)이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향연을 베풀었을 때, 남산신이 임금 앞에 춤을 추었는데 여러 신하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임금은 신하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명하였다. 남산 신이 산으로 돌아간 다음 이제는 놀아도 좋다고 하니 신하들은 물었다."그 동안 어찌하여 놀지 못하게 하셨습니까?" "그 동안 남산신이 내려오셔서 춤을 추고 가셨기 때문이다." "남산신이 어떻게 춤을 추었습니까?"신하들이 재차 물으니 임금은 손수 일어서서 남산신이 춤추던 모습을 흉내 내어 보였다. 그 후부터 그 춤이 널리 행하여 졌는데 남산신의 이름을 따서 상심무라 하였으며, 이 춤은 고려시대까지 유행되었다 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포석정은 9세기 중엽에는 이미 만들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곡선미는 안압지 해안에서도 볼 수 있는데 포석정에서는 안압지에서처럼 강한 기백을 느낄 수 없다. 그러나 묘하게 흘러가는 가락의 아름다움과 돌을 뜻대로 다루는 정교한 솜씨를 볼 수 있으니 신라예술이 가장 왕성하던 때를 지나 조각기술이 무르익어 가던 시대인 9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만들어진 중요한 이유
이문화재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사적 제 1호로 지정되었을 만큼 가치가 있습니다. 신라의 귀족들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절묘한 과학적 신비로 만들어져,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는것 같습니다.

 

 사용했던 사람

포석정은 신라왕들의 놀이터가 아니라 성스러운 의식이 행해지는 신라의 성지였다고 알려졌습니다.

 

포석정(鮑石亭)에 얽힌 전설( 이야기)

금오산 정상에서 시작하여 북을 향해 약 1km쯤 흘러오다가 부엉드미 부근에서 서서히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윤을곡 여울물을 합치고 배실 여울을 합쳐 포석정 기슭을 씻으며 기린내로 들어가는 장장 2.5km되는 깊은 골짜기이다.

이 계곡의 물은 높은 바위에서는 폭포를 이루고 거대한 바위 밑에서는 소(沼)를 이루며 경사가 급한데서는 멋진 여울을 이루고 흘러내려 남산에서도 손꼽히는 절경이라 하겠다. 옛날 신라 왕실에서 향락의 쉼터로 만들었던 포석정(鮑石亭)이 이 골짜기의 어귀에 있었다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뭐...대충 퍼왔습...

포석정일대는 성남이궁(城南離宮)터라 한다. 이궁이란 임금이 행차하셨을 때 머무시는 별궁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금은 돌홈을 파서 물을 흐르게 하고 그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놓고 술잔을 주고받으며 즐기던 곳인 포석정만 남아 있을 뿐 여러 건축터는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근래에 경주문화재연구소가 포석정 모형을 만들기 위해 이곳을 발굴 조사하던 중 가로 5.5cm, 세로 8cm의 네모난 선 안에 가로로 '砲石(포석)'이라고 음각된 문자기와가 발견되어 이 기와를 사용했던 건물이 있었음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이 포석정의 돌홈을 보고 있으면 떠가는 술잔이 굽이굽이 흘러가다가 어느 곳에서는 느릿느릿, 어느 곳에서는 빠르게 또는 빙글빙글 돌다가 흘러가는 율동을 느끼게 된다. 물도 잔도 춤추며 흐르는 것은 돌홈의 경사와 굽이치는 곡선으로 알 수 있다.

포석정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기록에 없다. 49대 헌강왕(876∼886)이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향연을 베풀었을 때, 남산신이 임금앞에 춤을 추었는데 여러 신하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임금은 신하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명하였다. 남산 신이 산으로 돌아간 다음 이제는 놀아도 좋다고 하니 신하들은 물었다.

"그 동안 어찌하여 놀지 못하게 하셨습니까?" "그 동안 남산신이 내려오셔서 춤을 추고 가셨기 때문이다." "남산신이 어떻게 춤을 추었습니까?"

신하들이 재차 물으니 임금은 손수 일어서서 남산신이 춤추던 모습을 흉내내어 보였다. 그 후부터 그 춤이 널리 행하여 졌는데 남산신의 이름을 따서 상심무(祥審舞)라 하였으며, 이 춤은 고려시대까지 유행되었다 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포석정은 9세기 중엽에는 이미 만들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곡선미는 안압지 해안에서도 볼 수 있는데 포석정에서는 안압지에서처럼 강한 기백을 느낄 수 없다. 그러나 묘하게 흘러가는 가락의 아름다움과 돌을 뜻대로 다루는 정교한 솜씨를 볼 수 있으니 신라예술이 가장 왕성하던 때를 지나 조각기술이 무르익어 가던 시대인 9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원래는 큰 돌거북을 만들어 놓고 저수지에서 물을 끌어다가 그 거북의 입으로 물이 나와 돌홈으로 흘러가게 한 것인데, 이 돌거북은 조선조 말엽 어느 부윤(府尹)이 옮겨다가 자기 조상 무덤의 비석대로 사용했다고 구전되어 오고 있으나 거북의 행방은 알지 못하고 있다. 이곳에서 동북쪽에 배성못자리가 있는데 그 못이 포석정 수원지라 전하며, 북쪽 개울을 건너 대밭속에 있는 마을이 성남이궁터라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신라천년의 종말을 내린 슬픈 자취가 기록되었으니 55대 경애왕(景哀王)때 일이다. 왕 4(927)년 9월 후백제(後百濟)의 견훤은 신라를 침범하여 지금 영천까지 쳐들어 왔다.

견훤이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받은 경애왕은 고려의 왕건에게 도움을 청해놓고 이 곳 포석정에서 술잔치를 베풀었던 것이다. 왕과 왕비를 위시하여 신하들은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워놓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이 기회를 노린 견훤이 불시에 쳐들어오니 왕은 왕비와 같이 숨어 버렸고 신하들은 붙잡혀 종이 되더라도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견훤의 손에 모두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왕궁을 차지한 견훤은 왕을 잡아오게 하여 스스로 죽게 하고 마음대로 횡포를 부렸다. 견훤의 군사들은 재물을 약탈하고 여자와 남자들은 종으로 잡아가니 그 영화롭던 신라의 서울은 수라장으로 변했고, 찬란하던 거리는 피로 물들었다.

견훤은 김부(경순왕)를 왕위에 앉혀놓고 왕의 아우 효렴과 재상 영경등을 인질로 데려가니 신라는 다시 일어설 기력을 잃고 그 후 10년도 못되어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으니 신라 천년의 종말을 이곳 포석정에서 내리게 되었다.

2010.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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