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성함 : 한국영
-아버지 : 한성봉(큰아버지 성함 한원봉)
-남동생 : 한기문(기자 돌림)
*청주한씨 양절공파 34대손인지 36대손인지
헤깔려서 질문드립니다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님의 질문에 답변을 합니다.
청주한씨 양절공파 질문드립니다.
-할아버지 성함 : 한국영
-아버지 : 한성봉(큰아버지 성함 한원봉)
-남동생 : 한기문(기자 돌림)
*청주한씨 양절공파 34대손인지 36대손인지
헤깔려서 질문드립니다
답변 : 님은 청주 한씨 양절공파이시군요.
양절공파 항렬표에 분파한 지파에서 찾아본 결과로는,
이런때는 님의 말씀대로 양절공파라고 합니다.
조부님 : ?세 국자 영자 두자 중에 한자가 돌림이라 하셨고,
부친님 : ?세 성자 봉자 두자 중에 봉자가 돌림인 것 같으시며,
님은 : 31세손 기⊙자 돌림이라 하셨습니다.
하나! 고조부님 ?자 → 증조부님 ?자 → 조부님 국자 영자 → 부친님 봉자 → 님은 기자로 이어지는 돌림자가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항렬표 돌림자 위주로 성함을 지으신 것이 아닌듯 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정확도를 기하기 위하여 먼저 일가친척 어른들에게 항렬자를 여쭤보시고 모르신다면, 이때는 족보를 보시던가 족보책을 소장하고 계시지 않는다면, 조부님 증조부님 고조부님의 지금 사시는 관할 동사무소나 읍면사무소에 가셔서 제적등본을 발급 받아 대조해 보시고, 그래도 모르시면, 존함과 과거에 사시던 연고지가 다 나옵니다. 그리고 연고지에 사시는 종친을 찾아 무슨파 항렬자냐고 여쭤보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항렬표 돌림자를 알지 못하여 항렬자를 찾아 드리지 못해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이점 양해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돌림자를 쓰시지 않고 파도 모르시면 저 능력의 한계로 찾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님은 청주 한씨 뼈대 있는 가문의 후손이시니 자긍심을 가지시고 꼭 찾으시길 바랍니다.
아래는 한글과 한문을 병행해서 올려드리는 것은 한문에는 그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점 양해가 있으기기 바랍니다. 해당 자료와 항렬표를 올려드리겠으니 님도 한번 대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래는 청주 한씨에 대한 정보입니다.
청주 한씨(淸州 韓氏)에 대(對)하여
1. 청주 한씨(淸州 韓氏)시조(始祖) : 한란(韓蘭)
2. 청주 한씨(淸州 韓氏) 유래(由來) :
청주 한씨(淸州 韓氏)의 유래(由來)는 후조선(後朝鮮)인 기자조선(箕子朝鮮)에서 기원(起源)한다.
마한(馬韓) 원왕(元王)의 아들 3인이 있어 우평(友平), 우량(友諒), 우성(友誠)이니, 나라가 쇠(衰)하자 우평(友平)은 고구려(高句麗)에 입사(入仕)하여 북원선우씨(北元鮮于氏)가 되고, 우량(友諒)은 신라(新羅)에 입사하여 상당한씨(上黨韓氏) 즉(卽) 청주한씨(淸州韓氏)가 되었고, 우성(友誠)은 백제(百濟)에 입사하여 덕양기씨(德陽奇氏)가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한씨(韓氏)는 모두 기자(箕子)의 후예(後裔)가 되는 것이다. 기자는 은(殷)나라의 종실(宗室)로서 주왕(紂王)의 숙부(叔父)가 된다. 주왕((紂王)이 잔인(殘忍)하고 포악(暴惡)하여 국정(國政)이 쇠퇴(衰頹)함으로 주(周)나라 무왕(周. 武王)이 이를 토멸하고 기자(箕子)에게 치국(治國)하는 대도(大道)를 청문하기로 홍범(洪範)을 자문하여 주고. 의리상(義理相) 신복(臣僕)이 될 수는 없다하여 고조선(古朝鮮)에 망명(亡命)하였는데 때마침 단군조선(檀君朝鮮)이 종말(終末)을 고하게 되자 백성(百姓)들의 추대를 받아 후조선(後朝鮮)을 건국하고 예의(禮儀)로 교화(敎化)하여 예의군자국(禮義君子國)이 되었다고 한다.
청주 한씨(淸州 韓氏) 시조(始祖) 한란(韓蘭)은 지금의 충청북도(忠淸北道) 영동군 황간면 난곡리에서 탄생(誕生)하여 향학(鄕學)을 일으키고 청주(淸州) 방정리에 무농정(務農亭)을 세우고 농업(農業)을 권장하여 마침내 부농을 이루었는데 이때에 왕건(王建)이 고려(高麗)를 창업(創業)하는 공(功)을 세워 개국공신(開國功臣) 이 되었으니 벼슬은 삼중대광 태위(三重大匡 太尉)이다
천지(天地)는 신묘(神妙)한 위광(威光)으로 강산(江山)의 기이(奇異)함을 만들고 영웅(英雄)의 자품을 타고나서 나라의 훈업(勳業)을 이루었으니 한란(韓蘭) 그의 시호(諡號)는 위양(威襄)이라 하였다. 속리 산맥(山脈)을 타고 내려와 황간(黃澗) 땅에 이르러 우뚝 솟은 지장영봉(芝庄靈峰)은 사위(四圍)를 거느리고 멀리 백리에 뻗쳐 영기(靈氣)가 모였으니 이곳에서 당대(當代)의 위인(偉人) 한란(韓蘭)이 탄생(誕生)하셨다. 옛부터 전(傳)하는 말에 의하면 태조(太祖)가 견훤(甄萱)을 정벌하려 청주(淸州) 고을에 당도하자 태위공께서 군례(軍禮)을 갖추고 이를 맞이하여 창고에 비축한 곡식을 풀어 10만 군사를 배불리 먹이고 참전하여 전공을 세워 고려 왕조의 터전을 다졌으니 참으로 위대한 분이다.
이세(二世) 영(穎)의 벼슬이 용호군 교위(龍虎軍 校尉) 이고 삼세(三世) 상휴(尙休)는 별장 동정(別將同正)이다. 그리하여 여음(餘蔭)이 후세까지 끼쳐 공경대부(公卿大父)가 이어 왔으니 묘(墓)는 충북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에 안장하였고 묘비· 신도비 (神道碑)와 청주시 방서동의 무농정(務農亭)과 방정(方井) 제단비(劑壇碑)는 후손들의 정성의 표상이다. 특히 충북 영동군 황간면 난곡리 입구(入口)에는 태위공의 탄생지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졌으며 공(公)의 묘하(墓下)에는 세일재 (歲一齋)가 세워져 있다.
3. 청주 한씨(淸州 韓氏) 계파(系派)
- 서제공파
- 문열공파
- 충성공파
- 이양공파
- 문간공파
- 천령공파
- 문양공파
- 문정공파
- 참판공파
- 양평공파
- 충간공파
- 찬성공파
- 절제공파
- 안양공파
- 첨추공파
- 절도공파
- 판사공파
- 정당공파
- 서원군공파
- 감사공파
- 양절공파
- 참의공파
- 이조정랑공(이랑공)파
- 학사공파
- 정혜공파
- 예빈윤공파
- 평장공파
- 전교공파
- 등제공파
- 중랑장공파
- 몽계공파
- 장열공파
- 문절공파 등이 있다.
서재공파(恕齋公派), 문열공파(文烈公派)
-충성공파(忠成公派)·이양공파(夷襄公派), 문간공파(文簡公派)
-검교참판공파(檢校叅判公派)·문양공파(文襄公派)·문정공파(文靖公派)·참판공파(參判公派)·양평공파(襄平公派), 충간공파(忠簡公派)
-찬성공파(贊成公派)·절제공파(節制公派)·안양공파(安襄公派)·첨지공파(僉知公派)·절도공파(節度公派)·이랑공파(吏郞公派)ㆍ양이공파(襄夷公派)ㆍ판사공파(判事公派), 정당공파(政堂公派), 서원군파(西原君派)
-감사공파(監司公派)ㆍ양혜공파(襄惠公派)ㆍ현령공파(縣令公派))
-양절공파(襄節公派)ㆍ공안공파(恭安公派)ㆍ장도공파(章悼公派)ㆍ장간공파(莊簡公派)) 등
-감사공파(監司公派)
-정랑공파(正郞公派), 학사공파(學士公派)
-세마공파(洗馬公派)), 충정공파(忠靖公派), 정혜공파(正惠公派),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전교공파(典校公派), 등제공파(登第公派), 직사관공파(直史館公派), 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 예빈윤공파(禮賓尹公派), 몽계공파(夢溪公派), 장렬공파(壯烈公派), 문절공파(文節公派)
4. 청주 한씨(淸州 韓氏) 양절공파(襄節公派) 계파도(系派圖)
襄節公派13世 諱 確 (양절공파 휘 확) 정조 2년~세조2년(1400~1456) | (공안공파) | 14世諱 致仁(치인) | 세종 3년 ~ 성종 8년(1421 ~ 1477) |
(서원군) | 20世諱 好問(호문) | ? ~ ? | |
(판서공) | 20世諱 仁及(인급) | 선조 16년 ~ 인조 22년(1583 ~ 1644) | |
(서윤공) | 21世諱 율(嵂) | 선조 26년 ~ 인조 14년(1593 ~ 1636) | |
(청은군) | 23世諱 配夏(배하) | 효종 1년 ~ 경종 2년(1605 ~ 1722) | |
(판사공) | 24世諱 師得(사득) | 숙종 15년 ~ 영조 42년(1689 ~ 1766) | |
(정혜공) | 24世諱 師直(사직) | 숙종 21년 ~ 정조 2년(1695 ~ 1778) | |
(충정공) | 25世諱 光肇(광조) | 숙종 41년 ~ 영조 44년(1715 ~ 1768) | |
(판사공) | 25世諱 光會(광회) | 숙종 41년 ~ 정조 16년(1715 ~ 1792) | |
(판서공) | 25世諱 光경(광경) | 영조 1년 ~ 정조 21년(1725 ~ 1797) | |
(판사공) | 26世諱 晩裕(만유) | 영조 22년 ~ 순조 12년(1746 ~ 1812) | |
(정헌공) | 27世諱 用鐸(용탁) | 영조 35년 ~ 순조 17년(1759 ~ 1817) | |
(효정공) | 29世諱 正敎(정교) | 순조 10년 ~ 고종 5년(1810 ~ 1868) | |
(제학공) | 31世諱 光洙(광수) | 철종 9년 ~ 일제 1913(1858 ~ 1913) | |
(장도공파) | 14世諱 致義(치의) | 세종 22년 ~ 성종 4년(1440 ~ 1473) | |
(공평공) | 15世諱 偉(위) | 세조 11년 ~ 중종 6년(1465 ~ 1511) | |
(장간공파) | 14世諱 致禮(치례) | 세종 23년 ~ 연산군 5년(1441 ~ 1499) |
5. 청주 한씨(淸州 韓氏) 양절공파(襄節公派)에서 분파한 지파 항렬표(行列表)
공안공파(恭安公派) 휘(諱) 치인(致仁 14世)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用(용) ○思(사) ○洪(홍) | ○履(이) ○廷(정) ○洛(낙) 容(용)○ | ○敎(교)
友(우)○ | ○錫(석) ○鉉(현) ○鎬(호) | ○洙(수)
汶(문)○ | 相(상)○
楨(정)○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
○熙(희) ○燮(섭) ○悳(덕) | ○奎(규) 載(재)○ | 鍾(종)○ ○鐸(탁) | 泰(태)○ ○泳(영) ○浩(호) ○鎔(용) | - | - |
장간공파(莊簡公派) 휘(諱) 치례(致禮 14世)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用(용)○ ○大(대) | ○履(이) 永(영)○ | ○敎(교) ○應(응) | ○錫(석) | ○洙(수) | 相(상)○ ○東(동)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熙(희) | ○奎(규) ○均(균) | 鍾(종)○ | - | - | - |
장도공파(章悼公派) 휘(諱) 치의(致義 14世)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用(용)○ ○燮(섭) | ○履(이) ○燦(찬) | ○敎(교) 在(재)○ | ○錫(석) ○鎰(일) | ○洙(수) 泳(영)○ | 相(상)○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
○熙(희) ○悳(덕) | ○奎(규) 載(재)○ | ○大(대) ○鍾(종) ○鐸(탁) | - | - | - |
참의공파(參議公派) 휘(諱) 전(磌) 13世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用(용)○ 致(치)○ ○鍾(종) 玉(구슬옥변) | ○履(이) 容(용)○ 澤(택)○ 翊(익)○ | ○敎(교) ○基(기) ○桓(환) 日(낮일변) | ○錫(석)
○命(명) | ○洙(수) 晳(석)○ 心(심방변) | 相(상)○ 承(승)○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
○熙(희) ○燮(섭) ○悳(덕) 木(나무목변) | 載(재)○ ○培(배) 基(기)○ | ○鐸(탁) | 泰(태)○ | ○植(식) | - |
6. 청주 한씨(淸州 韓氏) 주요(主要) 세거지(世居地)
1세 한 란(韓 蘭)이래로 4대의 묘영(墓塋)이 충북 청원(淸原)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일찍이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았다고 믿어진다.
그러다가 대체로 9세 한악(韓渥)의 대 이후에 장단(長湍)ㆍ양주(楊州)ㆍ파주(坡州) 등 경기지역으로 옮겨가 살았던 것 같다.
11세 한천(韓蕆)이 조선초(朝鮮初)에 조선조를 섬기기를 거부하고 제주(濟州)로 낙향한후 그의 후계(後系)가 제주에 세거하게 되었고 11세 한수(韓脩)의 자손들은, 14세 한명회(韓明澮)의 후계가 시흥(始興)ㆍ강화(江華)ㆍ양주(楊州) 등 경기지역과 청주(淸州)ㆍ경주(慶州)ㆍ천안(天安)ㆍ서천(舒川)ㆍ무안(務安)ㆍ영광(靈光)ㆍ함평(咸平)ㆍ황해도 장연(長淵)ㆍ연백(延白)ㆍ옹진(甕津) 등지에 살았고 한명진의 후계는 횡성(橫城)ㆍ연천(漣川)ㆍ부천(富川)ㆍ연백 등지에 살았다.
또한 14세 한계윤(韓繼胤)의 후계(後系)는 부여(扶餘)ㆍ서산(瑞山)ㆍ예산(禮山) 등 충청도 일원과 경산(慶山)ㆍ청도(淸道)ㆍ금릉(金陵) 등 경북 일원에, 한계미(韓繼美)의 후계는 고양(高陽)ㆍ성주(星州)ㆍ강릉(江陵)ㆍ진주(晋州)ㆍ울산(蔚山)ㆍ묵호(墨湖) 등지에, 한계희(韓繼禧)의 후계는 성남(城南)ㆍ여주(驪州)ㆍ충주(忠州)ㆍ원주(原州)ㆍ진주ㆍ김해(金海) 등지에 산거하였다.
14세 한계선(韓繼善)의 후계(後系)는 황해도 옹진(甕津)ㆍ서흥(瑞興)ㆍ송화(松禾), 충남 대덕(大德)ㆍ논산(論山)ㆍ서산(瑞山), 전북 순창(淳昌)ㆍ정읍(井邑)ㆍ임실(任實), 경기도 여주(驪州)ㆍ파주(坡州)ㆍ강화(江華)ㆍ안산(安山)ㆍ연천(漣川) 등지에 많이 살았으며 한계순(韓繼純)의 후계는 선대(先代)부터 경기도 양주(陽州)에 있는 선영(先塋)아래와 서산ㆍ안동(安東)에 살았다고 믿어지고, 청주(淸州)를 세거의 터로 삼았던 것 같다.
11세 한 리(韓 理)의 자손들은, 한리의 증손 한종손(韓終孫)의 부인 김씨(金氏)가 두 아들 한의(韓의)ㆍ한 절을 데리고 전북 남원(南原) 광동(廣洞)으로 옮겨간 것을 비롯하여 대체로 14세 이후에 각지로 산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14세 한중손(韓仲孫)의 후계(後系)가 정읍(井邑)ㆍ부안(扶安)ㆍ횡성(橫城)ㆍ진도(珍島)ㆍ당진(唐津)ㆍ고창(高敞) 등지에 살았고, 한종손(韓終孫)의 후계는 곡성(谷城)ㆍ구례(求禮)ㆍ남원(南原)ㆍ정읍(井邑)ㆍ순창(淳昌)ㆍ창령(昌寧)ㆍ함양(咸陽) 등지에, 한만손(韓萬孫)의 후계는 성주(星州)ㆍ봉산(鳳山)ㆍ재령(載寧)ㆍ정선(旌善)ㆍ경산(慶山) 등지에 자리잡았다.
그리고 12세 한계복(韓季復)의 자손들은 강화(江華)ㆍ구례(求禮)ㆍ임실(任實)ㆍ김포(金浦)ㆍ광주(光州) 등지와 청도(淸道)ㆍ달성(達城)ㆍ당진(唐津)ㆍ무안(務安)ㆍ고창(高敞)ㆍ나주(羅州)ㆍ평택(平澤) 등지에 나뉘어 정착했던 것 같다.
한편 11세 한 령(韓 寧)의 자손들 중에서 13세 한 확(韓 確)의 후계(後系)는 청주(淸州)에서 살다가 여주(驪州)ㆍ단천(端川)ㆍ서산(瑞山)ㆍ금릉(金陵)ㆍ옥천(沃川) 등지로 옮겨가 터를 굳혔고, 한 전의 후계는 정읍(井邑)ㆍ청양(靑陽)ㆍ광주(光州)ㆍ전주(全州)ㆍ당진(唐津)ㆍ남원(南原)ㆍ금화(金化) 등지에 많이 살았다.
13세 한 절(韓 石+失)의 후계(後系)는 무안(務安)ㆍ옥구(沃溝)ㆍ아산(牙山)ㆍ서산(瑞山)ㆍ연백(延白)ㆍ충주(忠州)ㆍ김포(金浦) 양주(楊州)등지에 세거하였다.
10세 한방도(韓方道)의 자손들은 칠곡(漆谷)에서 살았으며, 9세 한 영(韓 泳)의 자손들은 괴산(槐山)ㆍ천안(天安)의 직산(稷山) 성환(成歡), 칠곡에 자리 잡았다.
7세 한 연(韓 連)의 대부터 함남 안변에도 자손들이 살게 되었으며, 대체로 10세 한 경(韓卿)의 대 이후 영흥(永興)ㆍ함흥(咸興)ㆍ정평(定平)ㆍ북청(北靑)ㆍ홍원(洪原)ㆍ고원(高原)ㆍ종성(鐘城) 등지로 옮겨가 이들 지역에 산거했다고 믿어진다.
또한 13세 한철충(韓哲冲)이 조선조에의 협력을 거부하고 상주(尙州)ㆍ고령(高靈)을 거쳐 경남 합천(陜川)으로 낙향한 뒤에 자손들이 아산(牙山)ㆍ의주(義州)ㆍ진천(鎭川)ㆍ합천ㆍ상주ㆍ천원(天原)ㆍ춘천(春川) 등지에 살게 되었다.
그밖에 서천군파(西川君派)가 천안(天安)ㆍ화순(和順)ㆍ당진(唐津)ㆍ괴산(槐山)ㆍ옥천(沃川) 등지에, 판관공파(判官公派)는 함안(咸安)ㆍ순창(淳昌)ㆍ전주(全州)ㆍ김제(金堤)ㆍ담양(潭陽)ㆍ영암(靈岩)ㆍ경산(慶山)ㆍ사천(泗川) 등지에, 삼등공파(三登公派)는 담양ㆍ칠곡(漆谷)ㆍ고창(高敞)ㆍ밀양(密陽)ㆍ금릉(金陵)ㆍ해주(海州) 등지에 많이 살았으며, 영흥공파(永興公派)는 나주(羅州)ㆍ당진ㆍ공주(公州)ㆍ충주(忠州)ㆍ청도(淸道)ㆍ해남(海南)ㆍ평산(平山)ㆍ논산(論山) 등지에 세거하였다.
그리고 충정공파(忠靖公派)는 익산(益山)ㆍ금릉(金陵)ㆍ청양(靑陽)ㆍ김해(金海)에 살았고, 충장공파(忠莊公派)는 춘천(春川)에, 장성공파(章成公派)는 통천(通川)ㆍ구례(求禮)ㆍ영덕(盈德)ㆍ신천(信川)ㆍ순천(順天)ㆍ나주(羅州) 등지에, 구와공파(龜窩公派)는 순창(淳昌)에 정착하였다.
추월당파(秋月堂派)는 청주(淸州)와 옥천(沃川)에 나뉘어 살았다. 또한 송재공파(齋派)는 익산(益山)ㆍ순창(淳昌)ㆍ금릉(金陵)ㆍ연기(燕岐) 등지에, 청원위파(淸原尉派)는 장수(長水)ㆍ곡성(谷城)ㆍ용인(龍仁)ㆍ보령(保寧)ㆍ홍성(洪城)ㆍ완도(莞島) 등지에 정착했고,
조봉공파(朝奉公派)는 정읍(井邑)ㆍ임실(任實)ㆍ김제(金堤) 등 전북 일원에, 월탄공파(月灘公派)는 당진(唐津)ㆍ단천(端川)ㆍ서산(瑞山) 등지에 세거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경, 청주 한씨(淸州 韓氏)는 경기도 용인군(龍仁郡) 수지면(水枝面), 화성군(華城郡) 우정면(雨汀面), 강화군(江華郡) 일원, 충북 청원군(淸原郡) 남일면(南一面), 중원군(中原郡) 가금면(可金面), 전북 진안군(鎭安郡) 안천면(顔川面), 장수군(長水郡) 천천면(天川面), 임실군(任實郡) 삼계면(三溪面)ㆍ임실면(任實面), 경남 진양군(晋陽郡) 이반성면(二班城面)ㆍ지영면(智永面), 합천군(陜川郡) 가야면(伽倻面), 경북 고령군(高靈郡) 우곡면(牛谷面), 제주도 북제주군(北濟州郡) 구좌면(舊佐面)ㆍ조천면(朝天面), 황해도 송화군(松禾郡) 장양면(長陽面), 평남 성천군(成川郡) 영천면(靈泉面), 용강군(龍岡郡) 용강면(龍岡面), 평원군(平原郡) 일원, 영원군(寧遠郡) 영원면(寧遠面), 평북 영변군(寧邊郡) 오리면(梧里面), 박천군(博川郡) 동남면(東南面), 선천군(宣川郡) 수청면(水淸面), 삭주군(朔州郡) 수풍면(水豊面), 함남 함주군(咸州郡)ㆍ정평군(定平郡)ㆍ북청군(北靑郡) 일원, 신흥군(新興郡) 서고천면(西古川面)ㆍ영고면(永高面), 장진군(長津郡) 일원, 함북 학성군(鶴城郡) 학동면(鶴東面)ㆍ학서면(鶴西面)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1980년대에 자손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대표적 집성촌은 충북 청주시(淸州市) 방서동(方西洞)마을이다. 일명 대머리마을로도 불리는 이곳 방서동 마을은 1세 한 (韓 蘭)이터를 잡은 뒤 오랫동안 지켜온 청주한씨(淸州韓氏)의 터밭이다.
지금은 마을 전체 2백여 가구 중 70여 가구가 청주 한씨(淸州 韓氏) 자손들이며 31세에서 37세까지 2백년 터울의 7대가 살고 있다.
7. 청주 한씨(淸州 韓氏) 인구수(人口數)
- 인구 : 2000년 인구조사에서 청주 한씨는 199,642가구 총 642,992명이 있는 것으로 되었다.
끝으로 님의 건강과 행복이 충만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2018.06.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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