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김삿갓의 업적만요~내공겁니다..딱업적만..찾아주십쇼...!!부탁드립니다..
happ**** 조회수 7,549 작성일2005.05.13
딱~업적만 올려주세여~
뭐..생애밎업적말공..지발루여.

다섞여있어서여...내공후하게드리겠습니다...
도와주십쇼제발,,,
프로필 사진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3 개 답변
2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lma7****
초수
본인 입력 포함 정보

김병연(김삿갓)<1807년~1863년>

 <*이 써 있는 곳은 업적은 아니지만 김삿갓의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 되었는지 알려주는 것 입니다. >

 

조선 시대의 방랑 시인으로, 김삿갓 또는 김립으로 불렸어요.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난 김병연은 선천부사였던 할아버지 김익순이 홍경래의 난 때 투항한 죄로 집안이 멸족을 당하였으나,

 

형 병하와 함께 노복 김성수의 도움으로 황해도 곡산으로 도망가 목숨을 건졌어요. *

 

후일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어 강원도 영월로 옮겨 살사다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였으나,

 

자신의 집안 내력을 모르고 할아버지 익순을 조랑하는 시제를 택한 자책과 주변 사람들의 멸시 등으로 방랑길에 올라 평생 전국을 떠돌다 죽었어요.

 

할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에 집을 나온 김병연은 그 뒤 삿갓을 쓰고 방방곡곡을 떠돌며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기발한 시구들을 남겼어요.

 

그의 작품은 거의가 재치와 익살에 넘친 시구로 세상을 풍자하고 개탄한 내용들로 당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어요.

 

그는 집을 떠난 뒤 24때 한번 집에 들렸으나, 57세로 일생을 마칠 때 까지 다시는 들르지 않았다고 해요.

 

김병연은 절라남도 동복에서 죽을 떄까지 삿갓을 쓰고 전국각지를 유랑하며 발걸음이 미치는 곳마다 많은 일화와 함께 주옥같은 시를 남겼어요.

 

                                                         그 후,

 

일제 시대에 이응수라는 사람이 그의 시를 모아 김립시집 을 출간하였어요.

 

1978년 수손들이 광주 무등산 기슭에 시비를 세웠고 1987 에는 영월에도 그를 기리는 시비가 세워졌어요.

 

 

이만 줄이겠습니다. 오늘 13일의 금요일이네요!! 으시시~~

아무튼 오늘 하루도 잘 보내시고 남은시간 즐겁게 보내세요. 그럼....

(가끔 오타 난 곳도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요.. 그건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제가 틀린 부분이 있거나 오타난 곳이 있으면 이의제기로 해주세요. 그럼 감사하겠습니다.)

2005.05.13.

  • 채택

    질문자가 채택한 답변입니다.

  • 출처

    맹꽁이서당 인물설명 참고함.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1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탈퇴한 사용자 답변
없습니다.그냥 조선팔도를 방황하다가 시를 남긴거 이게 답니다.

자신의 할아버지 김익순을 꾸짓는 시를 써서 상을 받았는데 그것이 자신의 할아버

지를 욕한걸 알고 삿갓을 쓰고 다녔습니다.아 그리고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

2005.05.13.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3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ltig****
시민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출생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이고 1807년에 태어났다.

김삿갓은 6살때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하여 숨어서 지냈고 일찍이 시적인 질은 인정받은 천재였다고 할 수 있다.

가정배경

안동 김씨로 형 병하 종 김성수 어머니와 같이 피신을 가서 살았고 병연의 아버지는 홧병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김삿갓의 가족

많이는 모르겠으나 형 김병하 어머니 아버지(일찍 돌아가심) 할아버지 등이 있음

김삿갓의 어릴때

어릴때 신동으로 김시습의 뛰어남이 조선 한양에 소문이 자자 하여 세종대왕께서 친이 부르셨습니다.
어린아이 하나가 조선 궁중에 임금님을 만나게 된거죠. 그리고는 시와 글에 대해 물어보고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김시습의 충줄한 대답에 왕과 신하가 감탄을 금치 못하죠. 그래서 세종대왕께서 큰 상은 내리십니다. 비단 수십필을 내리시는데, 신하들과 왕께서는 이 무거운 비단을 이 어린아이 어떠케 하나 보자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무거운 비단을 못들고 갈꺼라고 모두 생각했죠. 그러나 어린 김시습은 타연 자약하게 비단을 술술 펼서 끝모서리와 끝모서를 하나하나씩 잇더니 큰 줄로 만들어 자기 허리에 동여매고 그 긴 비단줄을 질질 끌며 궁궐문을 나가게 됩니다.
세종대왕께서는 또한번 놀라시고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한양 백성들도 시습의 긴 비단줄을 보고 이야기를 듣고 칭찬이 했다고 합니다.

김삿갓의 청년때

그는 본시 글공부만 좋아하고 출세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홀어머니 이씨의 간곡한 부탁으로 20살되던 해에 과거 예비고사격인 백일장에 참가하게 됩니다. 이날 백일장의 시제는 '정가산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논하고,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이를 정도였음을 통탄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1811년(순조11년) 12월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과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 가산군수였던 정시(鄭蓍)는 반란군과 용감하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으나 선천방어사였던 김익순(金益淳)은 국가안보의 중책을 맡고 있는 무관임에도 불구하고 반란군이 쳐들어오자 싸우기는커녕 즉석에서 항복해 버렸습니다. 이듬해 봄, 난이 평정되자 김익순은 역적이라는 낙인이 찍혀 처형당하고 맙니다.김병연은 평소부터 가산군수 정시를 '천고의 빛나는 충신' 이라고 존경해왔던 반면 김익순을 '백번 죽여도 아깝지 않은 만고의 비겁자'라고 몹시 경멸해 오던 터라 김익순을 탄핵하는 글을 거침없이 적어 내려갔습니다. 장원을 차지한 그는 술한잔 걸치고 기쁜 맘으로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자랑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기뻐하기는커녕 눈물을 흘리며 이제까지 숨겨오셨던 집안내력을 가르쳐 주시니 반역자 김익순이 바로 김병연의 할어버지였던 것입니다.
반역자는 삼대를 멸하라는 그 당시의 법대로 김병연 역시 죽어 마땅하였지만 어머니가 아들 삼형제를 데리고 도망쳐 숨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조부의 행적을 모르고 자랐던 선생은 영월도호부 동헌 백일장에서 조부를 지탄한 죄책으로 번민끝에 궁핍한 山峽(산협)인 하동연 와석리 於屯(어둔)으로 이주했다.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얘기를 들은 김병연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죽을 생각도 하며 울기도 하다가 그의 아내와 낳은 지 얼마 안되는 아이와 홀어머니를 뒤로한 채선생은 자책과 통한을 이기지 못하여 22세에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나섰으며 김삿갓이라고 별명을 얻게 되었다. 역적의 자손인데다 그 조부를 욕하는 시를 지어 상을 탔으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여 삿갓을 쓰게 되었고 이름도 김병연 대신 김삿갓이라 스스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술을 좋아하고 금강산을 특히 좋아했던 그는 서민속에 섞여 상류사회를 풍자하는 시를 짓고 재치와 해학으로 서민의 애환을 읊으며 한평생을 보냅니다.
모든 희망을 버리고 전국을 유랑걸식하며 언문시,국한문혼용시,해학시,고풍과시에 이르기까지 많은 명시를 지었으며 특히 풍자, 해학시는 전무후무한 절세의 것을 남겼고 공령시(고풍과시)는 후세 과거 지망자들의 교과서로 쓰일 뿐 아니라 특히 평민들의 생활상을 시로 읊어 빛나는 庶民文學(서민 문학)을 남겼다. 삼천리방방곡곡을 두루 살펴보며 수많은 시를 뿌려놓은 난고 김삿갓은 1863년 3월 29일, 57세의 나이로 마침내 전라도  동북땅

적벽강흔들리는 배에 누워 기구했던 한평생을 회고하며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시신은 3년후 차남인 익균맏아들은 형에게 양자를 줌)이 거두어 영월군 하동면 노루목에 외로웠던 육신을 모셔 놓았습니다.그는 해학시뿐만 아니라 한시의 정통규범을 파과하는 파격시의 세계를 형상화한 민중시인으로 이름이 높다

김삿갓의 업적

후일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어 강원도 영월로 옮겨 살사다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였으나,

자신의 집안 내력을 모르고 할아버지 익순을 조랑하는 시제를 택한 자책과 주변 사람들의 멸시 등으로 방랑길에 올라 평생 전국을 떠돌다 죽었어요.

할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에 집을 나온 김병연은 그 뒤 삿갓을 쓰고 방방곡곡을 떠돌며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기발한 시구들을 남겼어요.

그의 작품은 거의가 재치와 익살에 넘친 시구로 세상을 풍자하고 개탄한 내용들로 당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어요.

그는 집을 떠난 뒤 24때 한번 집에 들렸으나, 57세로 일생을 마칠 때 까지 다시는 들르지 않았다고 해요.

김병연은 절라남도 동복에서 죽을 떄까지 삿갓을 쓰고 전국각지를 유랑하며 발걸음이 미치는 곳마다 많은 일화와 함께 주옥같은 시를 남겼어요.

할아버지

방랑시인 김립의 할아버지인 전 선천부사 김익순은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그에게 항복하였다. 뒤에 홍경래가 관군에게 패하여 죽자, 자기 죄를 면하려고 농민 조문형에게 1,000냥을 주는 대가로 장수 김창시의 목을 베어 오게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자기 공으로 꾸며 조정에 바쳤다. 그러나 약속한 돈을 받지 못한 조문형의 고소로 탄로되어, 김익순은 처형되었다.

2008.05.29.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