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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순흥안씨 뿌리 찾는다고 했는 사람인데요
하얀아기사자 조회수 5,265 작성일2011.06.20

순흥안씨 뿌리 찾는다고 했는 사람인데요

제가 본관을 안적었었네요 죄송요 본관은 순흥입니다.

근데 아버지는 세자 돌림이 맞아요~! 세락 세걸 세탁 세웅

근데 고조 할아버지 한문이 돌림자 하고 조금 틀린 것 같아서요

교를 한문으로 검색했는데 제적등본에 한문이랑 틀린것 같네요


 

잘 못써서 그런데 이런 씩으로 써져있거든요 한문을 잘 못읽어서 ;;

만약 님이 알려주신대로 1파라면 제가 누구 몇대 손인가요?

그리고 문파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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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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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질문에 답변을 드립니다.

 

순흥안씨 뿌리 찾는다고 했는 사람인데요

제가 본관을 안적었었네요 죄송요 본관은 순흥입니다.

근데 아버지는 세자 돌림이 맞아요~! 세락 세걸 세탁 세웅

근데 고조 할아버지 한문이 돌림자 하고 조금 틀린 것 같아서요

교를 한문으로 검색했는데 제적등본에 한문이랑 틀린것 같네요


 

잘 못써서 그런데 이런 씩으로 써져있거든요 한문을 잘 못읽어서 ;;

만약 님이 알려주신대로 1파라면 제가 누구 몇대 손인가요?

그리고 문파좀 알려주세요

 

위에서 작성한 부연(부)이란 한문 같은데 누구의 함자이신지 족보를 가지고 계신다면 쉽게 찾을 수 있겠지요.

그리고 1파에 대한 어느정도의 서술입니다. 다시분파된 1파는 14개파로 나눠지면서 자칫하면 혼류관계로 다를 올려드리지 못한점 송구스럽게 생각하며 양해가 있으시길 빕니다.

다른 것은 제공 하기가 쉽지않고 순흥안씨 1파의 유래를 순서 대로 올려드립니다.

1파의 몇 세손인지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전번에 올린 그대로 입니다.

순흥안씨에서는 세자 돌림이 없습니다.

 

순흥안씨 각파 항렬표

/

1파

2파

3파

문숙공파

소이공파

제주공파

24

ㅇ열(烈)

ㅇ섭(燮)

ㅇ경(慶)

ㅇ열(烈)

ㅇ흡(潝)

ㅇ환(煥)

25

(敎)ㅇ

(致)ㅇ

(在)ㅇ

ㅇ중(中)

(聖)ㅇ

(致)ㅇ

26

ㅇ호(鎬)

ㅇ용(鎔)

ㅇ진(鎭)

(商)ㅇ

ㅇ상(商)

ㅇ범(範)

ㅇ진(鎭)

27

(承)ㅇ

(洙)ㅇ

(泳)ㅇ

ㅇ준(濬)

(國)ㅇ

(注)ㅇ

28

ㅇ영(榮)

ㅇ모(模)

ㅇ식(植)

(秉)ㅇ

ㅇ선(善)

ㅇ춘(春)

29

(熙)ㅇ

ㅇ병(炳)

(熙)ㅇ

(光)ㅇ

(鎔)ㅇ

(思)ㅇ

30

ㅇ균(均)

ㅇ기(基)

ㅇ기(基)

(致)ㅇ

ㅇ원(源)

ㅇ기(基)

31

(鐘)ㅇ

(商)ㅇ

(鐘)ㅇ

ㅇ진(鎭)

ㅇ록(錄)

(炳)ㅇ

(鐘)ㅇ

32

ㅇ구(求)

ㅇ태(泰)

ㅇ태(泰)

ㅇ철(徹)

ㅇ열(烈)

ㅇ구(求)

33

(秀)ㅇ

(相)ㅇ

(崎)ㅇ

(東)ㅇ

(基)ㅇ

(東)ㅇ

34

ㅇ섭(燮)

ㅇ도(燾)

ㅇ섭(燮)

ㅇ묵()

ㅇ석(錫)

ㅇ섭(燮)

35

(孝)ㅇ

(圭)ㅇ

(圭)ㅇ

(載)ㅇ

(泰)ㅇ

(在)ㅇ

36

ㅇ택(澤)

ㅇ영(泳)

ㅇ건(鍵)

ㅇ용(鏞)

ㅇ표(杓)

이하는 문숙공

항열표 준함



 

1파  2세 - 순흥안씨 3파보

 

영유(永儒) 세 : 2세 부(父) : 안자미(安子美) 관계 : 子

 

子 永儒(영유)

 

韓譜에儒가濡로되다一二○一年宋나라寧宗嘉泰辛酉生이며樞密院副使上護軍에追封되시다◁

 

配는姓氏失傳이다○墓는順興道講里智藏山辛坐다後孫判決事인상이榮州의長일때永慕庵을창立하고三月十月두번行祀하고判書瑋가撰碣하며應昌이撰誌하니總錄에있다○慶州朴氏譜를본즉大阿손文忠公仁範後孫인門下侍中文烈公璜이松菊齋平章事月山君節孝公소를生하며石灘平章事鷄林君忠文公純을生하며그女에安永儒라하였으니前譜에실리지않았으나朴氏舊譜에이미있어관甥이昭然하여기록한다◁

 

1派2世- 안영유(安永儒) *길영, 선비유

 

추봉(追封)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상호군(上護軍)

 

할버님은 시조 상호군 공의 장남이시다. 1201년 즉 고려 20대 신종4년 신유(辛酉)생 이시다.

고려23대 고종때 추밀원부사(정3품),상호군(정3품)을 각각 추봉(追封)받으셨다

 

1233년 33세에 별세하시고 묘(墓)는 순흥 동북간 약6k지점이다.

 

부석면 감곡리(浮石面 甘谷里=구道講里)지장산(智藏山) 서록(西麓)신좌을향지원(辛坐乙向 之原)이시다. 세전(世傳)하는바에 의하면 이 묘소(墓所)는 상주(喪主)인 아드님 안부(安孚)-태사공(太師公)孚)이 14세때(1233년)부친상을 당하자 상중에 유명한 지관(地官=풍수)에게 위촉해서 얻은 길지(吉地)즉 명당(明堂)이라고 한다.

 

1588년 즉 명종13년에 당시 영천군수로 재임중인 후손 판결사(判決事) 안상(安瑺-14世)이 성묘(省墓)하고 묘역(墓域)을 돌아보니 타인의 투장(偸葬) 흔적(痕迹)이 발견되고 묘봉(墓封)도 많이 허물어진 상태이므로 타장(他葬)을 일체 파묘(破墓) 제거(除去)하고 개사초(改莎草)한 후 묘비급상석(墓碑及床石)등 의물(儀物)도 다시 만들어 세웠다.

 

그리고 그 형(兄)인 당시 병조판서(兵曹判書) 안위(安瑋)가 비명(碑銘)을 찬(撰)하여 각명(刻銘)수비(竪碑)하였으며 묘하에 재실을 건립(建立)하여 영모암(永慕庵)이라 명명하고 제전(祭田)도 마련해서 제사를 올렸다.

 

그후 매년 음3월과 10월 상정일(上丁日)에 세향을 올려오다가 해방후 종의에 따라서 매년 음10월 2일로 다시 정해서 봉향한다.

 

또한 재실을 마련한 후로는 수호군(守護軍)즉 요즘의 산지기를 상주시켜 산소를 엄중히 지키도록 하였다 그 후 1648년 인조때 후손 순원군(順原君)안응창(安應唱)이 묘지(墓誌)를 만들어서 묘 광남(壙南)에 묻어놓았다.

 

부인(夫人)은 실전(失傳)되었는 바 경주박씨 족보(慶州朴氏族譜)를 보면 *대아손 문충공(大阿飡 文忠公)인범(仁範)후손 ... 평장사 계림군(平章事 鷄林君)충문공(忠文公) 박순(朴純)여(女) 안영유(安永儒)* 라고 입보(入譜)돼 있다.

 

따라서 부인은 경주박씨(慶州朴氏)이셨다는 사실(史實)은 확인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전보(前譜)에는 부재(不載)되었으므로 좀더 심사숙고(深思熟考)하여 신중히 처리해야 한다는 사유만을 우리 족보에 주록(註錄)해서 전해 내려온다.

 

슬하에 아드님 부(孚) 한 분을 두셨다

 

순흥안씨(順興安氏) 시조(始祖) : 안자미(安子美)

 

2세 : 영유

 

3세 : 안득재

3세조(世祖) 득재(得財)

ㅇ. 고려때 흥녕현(興寧縣 : 지금의 순흥)에서 호장(戶長)의 벼슬에 계시다가 호부랑중(戶部郞中)이라는 벼슬에 오르셨다.

ㅇ. 배(配)와 묘(墓) 모두 실전(失傳)하였다.

ㅇ. 아버지이신 2세(世) 휘 영화(永和)와 마찬가지로 함께 한곳에 단(壇)를 세워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다.

ㅇ. 형제로는 휘 득인(得仁)이 계시다.

ㅇ. 자(子)는 희서(希諝) 한분이시다.

 

4세 : 안희서

4세조(世祖) 희서(希諝)

ㅇ. 고려때 흥녕현(興寧縣 : 지금의 순흥)에서 호장(戶長) 벼슬에 계시다가 판전객사사(判典客寺事)라는 벼슬에 오르셨다.

ㅇ. 배(配)와 묘(墓)는 역시 실전(失傳)되었다.

ㅇ. 할아버지이신 2세(世) 휘 영화(永和), 아버지이신 3세(世) 휘 득재(得財)와 마찬가지로 함께 한곳에 단(壇)을 세워 같이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다.

ㅇ. 자(子)는 석(碩) 한분이시다.

 

5세 : 안석(밀직제학)

5세조(世祖) 석(碩) 

ㅇ. 고려 충열왕(1282년) 임오년에 과거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덕만을 쌓고 벼슬은 하지 않고 계시다가 뒤에 봉익대부밀직제학(封翊大夫密直提學)이라는 벼슬을 받으셨다.

 

또한 정당문학 문경공(文敬公)이란 시호를 받으셨다고 증보문헌비고에 실려있으나 아들인 3남보(輔)와 혼돈을 일의킨데서 일어난 착오였던것 같다.

 

ㅇ. 묘(墓)는 순흥군 단산면 병산리 서창동에 있으며 좌향은 임좌이시다.

 

ㅇ. 배(配)는 흥녕군대부인(興寧郡大夫人) 안씨이시고 묘(墓)는 합장하셨다.

 

ㅇ. 자(子)는 헌(軒), 축(軸-문정공), 보(輔-문경공), 집(輯-좨주공), 을수(乙壽) 다섯분이시다.

 

증손인 좨주공파 덕봉공(德峰公) 질이 세종 21년(1439) 묘앞에 작은 비를 세워 표적을 남겼으나 정축지변 후 자손들이 순흥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어 실전되었다가 선조 25년(1592) 11대손 사촌공 덕린(沙村公 德麟)이 다시 묘소를 찾아 선조 40년(1607) 묘비를 세웠다. 1998년 주변에 묵은 묘를 파내고 경내를 단장했다.

[출처] 5세조(世祖) 석(碩) (순흥안씨문숙공파종회) |작성자 치워니

 

5세 제학공 석 묘소(五世 提學公 碩 墓所)

소재지 : 경북 영주시 단산면 병산리 서창 산21

문과에 급제하여 은덕불사(隱德不仕)하고 아들들의 교육에 힘썼다. 증손인 좨주공파 덕봉공(德峰公) 질이 세종 21년(1439) 묘앞에 작은 비를 세워 표적을 남겼으나 정축지변 후 자손들이 순흥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어 실전되었다. 선조 25년(1592) 11대손 사촌공 덕린(沙村公 德麟)이 다시 묘소를 찾아 선조 40년(1607) 묘비를 세웠다. 1998년 주변에 묵은 묘를 파내고 경내를 단장했다.

 

☞. 3대 묘소가 같은 장소에 있다.

 

6세 감천군부인 묘소(六世 甘泉郡夫人 墓所)는 오른쪽에 7세 문간공 종원 묘소(七世 文簡公 宗源 墓所)는 아래 장소에 있다.

 

6세 : 안축(문정공)

6세조(世祖) 축(軸)

 

ㅇ. 자(子)는 당지(當之)이고 호(號)는 근재(謹齋)이며 시호(謚)는 문정공(文貞公)이시다.

 

ㅇ. 충열왕 임오년(1282년)에 낳으시고 고려충목왕 5년인 무자년(戊子年-1348년) 6월 21일(67세)에 돌아 가셨다.

 

ㅇ. 묘(墓)는 장단(長端), 대덕산에 있고 좌향 해좌(亥坐)이시다.

 

ㅇ. 고려 충숙왕때 과거 문과에 합격하시어 사헌부 규정에 제수(除授 - 추천없이 왕이 직접 관리를 임명하는 것) 되시었으며 충숙왕 11년(1324년)에는 원나라 과거에도 합격하여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盖州判官)이라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으셨다.

 

그 무렵 충숙왕이 원나라에 잡혀가게 되었는데 문정공께서 종자(從者)들에게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가 욕되고 또한 임금이 욕되면 신하 또한 죽는 것이라” 하고 글로서 왕의 무죄함을 주장하니 왕이 이를 갸륵하게 여기시고 성균관 악정을 제수하셨다.

 

그 후로 다시 우사헌대부(右司議大夫)라는 벼슬로 높이 오르셨다.

 

충혜왕 즉위(1331년)한 후에는 강원도 조무사(지금의 도지사)로도 제수 받으셨다.

 

공은 민정(民政)을 잘 다스렸으며 특히 관동지방을 기행(紀行)하시며 관동별곡을 지으셨고 그 후 죽계별곡(竹溪別曲)을 지으시어 오늘에 전하니 이 두 작품은 한림별곡(한림의 여러 선비들이 지은 것)과 아울러 고려시대의 귀중한 국문학이다.

 

그 후에도 계속하여 많은 글을 지어 전하니 이 문집을 관동와주집(關東瓦注集)이라고 한다.

 

후에 내직인 판전교지전법사(判典校知典法事)가 되시었으나 충숙왕이 부위되면서 면직되었다가 다시 전법판사(典法判事)로 되셨는데 내시들의 미움을 받아 또다시 직(職)을 물러나셨다.

 

그러다가 충혜왕이 복위되면서 감찰대부(監察大夫)로 등용되고 이어 검교평리(檢校評里)로 있다가 상주목사(尙州牧師)가 되시었는데 이때 순흥에 계시는 부친께 효도를 극진히 하시었다.

 

충목왕의 즉위후 밀직부사, 첨의찬성사, 판정치도감사, 산림감춘추관사 등을 하시며 승진을 거듭하셨으며 이재현(李齋賢)들과 함께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증수(增修)하셨다.

 

이어 충열왕, 충선왕, 충숙왕, 삼조의 선록을 닦으시다 보니 집사자들이 좋아하지 않아 사직(辭職)을 하셨다.

 

그 후 흥녕부원군 우문관 대제학 직을 받고 계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작고하신 후 왕이 시호 문정공(文貞公)을 하사 하시고 칭찬을 하시기를 “가정에서는 근검하고 항상 언어 행동을 옳게 하였으며 네 번이나 사사(師士), 옥관(獄官)이 되어 백성의 억울한 일을 옳게 처리하였다.”고 하셨다 한다.

 

일찍 아버지를 여위였었기 때문에 두 아우인 보(輔 : 문경공)와 집(輯 : 좨주공)을 잘 보살폈으며 그로 인하여 두 분이 다 과거에 급제하시었다.

 

현재 순흥 소수서원 및 음성 도통사에서 아우인 보(輔)와 함께 배향(配享)되고 있다.

 

ㅇ. 배(配)는 감천군부인(甘泉郡夫人) 문씨(文氏)로 검교(檢校) 군기감(軍器監) 구(龜)의 따님이다.

 

묘(墓)는 순흥면, 수민의 방손동 후곡에 있으며 임좌향이다.

 

ㅇ. 자(子)는 종기(宗基), 종원(宗源 : 文簡公) 두분이시다.

 

6세조(世祖) 문정공(文貞公)께서는 묘소가 38이북(以北)인 장단(長湍)에 계시고 7세조(世祖) 문간공(文簡公) 배위(配位) 경혜택주(慶惠宅主) 광주김씨 묘소 또한 동 지역내에 계시는 바 서기 1950년에 인동유사(仁洞有司) 2명이 묘전에 봉향한후 지금까지 중단되고 있으며 동 지역내 전제리(田薺里) 57번지 대지 364평과 59번지 논 698평, 86번지 논 1151평, 밭은 같은 장소에 26번지 598평, 37번지 298평, 41번지 781평, 42번지 499평, 43번지 3482평 등 총 9필지 9969평의 위토(位土)기 있었기에 후일을 위하여 기재한다.

 

6세 : 안보(문경공)

음성 도통사 문경공(휘 安輔) 선조의 호(號)사용에 대해

 

문경공(文敬公) 안보(安輔)선조는 국내에서 발굴된 역사 자료 어느 곳에서도 사용된 호(號)가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 음성도통사에서는 제향시에 사용되고 있다.

 

1928년∼1931년 자료인 음성도통사 전신인 충주도통사 관련 통문 및 홀기에 호가 경재(敬齋)로 되어 있으며 그에 따라 현재 음성도통사 봉향시 홀기에 사용되고 있다.

 

원래 1734년 도통사 창건이래 3성6현을 봉향했었으나 1864년이후 사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면서 중단되어 오다가 1926년 음성 생극면 팔성리 지현서원 향사때 발의된 통문에도 문경공 안보(文敬公 安輔)로만 되었었는데 1928년 9월 도통사 유림통문에 8인의 성현들 행적(行績)을 덧 붙이면서 표시되었다.

 

아마도 필자 생각에는 봉향 성현들 모두가 호(號)가 있으나 문경공께서는 알려진 호가 없어 이의 필요성을 느낀 당시 안경렬을 비롯한 후손들이 문경공의 경(敬)자와 형님인 문정공의 호인 근재(謹齋)의 재(齋)자를 차용하여 경재(敬齋)로 만들지 않았나 하는 조심스런 개인적인 생각이다.

 

공경하는 선조에 대한 호를 당시 후손들이 고(古) 자료를 통해 발견을 했는데 세월이 흘러 또다시 분실되었거나, 아니면 후손들이 만들어 사용 했는지 모를 일이지만 중수한 이후인 1931년 도통사 통문에서부터 홀기에 사용한 이후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것에 대해 언젠가는 진위가 밝혀지길 기대한다.

 

6세 : 안집( 제유공)

牧隱은 1328년생으로 문간공(휘 安宗源)보다 3년 年下이고 문경공(휘 安輔)보다 26년 년하이기 때문에 좨주공(휘 安輯)보다는 28∼29년 年下인 듯 하다.

 

좨주공(祭酒公)에 관한 타현(他賢)의 詩文은 희소하나 牧隱文集에 좨주공에 대해 다음 4수(首)의 詩를 전하고 있다.

 

題 寄 安常侍 輯

 

牧隱 李穡

 

三安繼起振斯文

 

伯仲俱亡季氏存

 

壽夭在天休更問

 

安心奉母送寒溫

 

삼안이 잇달아 일어나 이 나라 글을(儒學) 진흥시켰습니다.

 

중씨, 백씨는 돌아가시고 계씨만이 생존이시라

 

壽夭는 하늘에 달렸으니 다시 묻지 말 것입니다.

 

편안히 노모 모시고 차고 따사로움으로 보내시도다.

 

安簽書作同年會

 

牧隱 李穡

 

九十餘人今幾人

 

松堂羯鼓化爲塵

 

蓋簪只今簽書宅

 

爲謝昌和土地神

 

 

急管繁絃擁主人

 

無衫歌扇動香塵

 

題詩欲當纏頭錦

 

下筆何曾如有神

 

구십여인 우리동년 몇사람 남았는기

 

송당에 놀던 시절 흘러간 과거일세.

 

남은친구 안첨서댁에 모여 즐기니

 

고맙네, 친구여, 번영을 비네

 

피리소리 거문고소리 주인 옆에 울리고

 

무희의 춤바람 향내가 진동하네.

 

잘했다 주는 비단 시제 삼아서

 

붓을 대니 글자마다 그리도 신묘한가!

 

(牧隱詩集 卷二十. 三十)

 

좨주공이 유학진흥의 유래있는 가문에서 태어났고 백씨인 헌(軒)과 중씨인 축(軸).보(輔)가 세상을 뜨고 계씨인 좨주공만 남아 봉모(奉母)의 정성을 다 한다는 뜻이다.

 

題 奉送安密直歸山 名輯

 

牧隱 李穡

 

老年田舍幽情熱

 

當日班行物望歸

 

上國早知通桂籍

 

高堂晩獨舞斑衣

 

 

노년 전사에는 그윽한 정이 무르익고

 

당일 벼슬 반열에 물망이 돌았도다.

 

상국의 향기로운 주적이 일찍 알려지고

 

고당에 늦게 홀로 아롱진 옷으로 춤추도다.

 

좨주공이 官界에서의 무한한 가능성을 축하한다는 詩이다.

 

 

題 同 次韻

 

牧隱 李穡

 

竹溪月是庭中月

 

華巖雲連屋上雲

 

共說我公眞傲世

 

似聞稚子㧾能文

 

죽계의 달은 뜰 가운데 가득하고

 

화암산에 걸린 구름은 층층히 연했도다.

 

나와 더불어 세상사 얘기할 때

 

어린이에 좋은 글 모아서 돌려줌만 같았습니다.

 

좨주공의 탁월한 식견(識見)을 나타낸 詩이다.

 

 

 

題 同(次韻)

 

牧隱 李穡

 

溪頭野徑僧頻過

 

松頂雲巢鶴獨歸

 

怡似輞川風景好

 

何人解畵拂塵衣

 

시냇가 오솔길에 스님들 왕래가 잦고

 

솔가지 위 집을 튼 학이 외로이 돌아오네

 

누구라 그림으로나마 티끌묻은 옷 털어줄까.

 

산천이 수려한 고향에서의 고고(孤高)한 삶을 은유법으로 읊은 詩이다.

 

   

순흥군대부인 만장(順興君大夫人 挽章)-급암(及菴) 민사평(閔思平)

 

芳年鵠寡不嫌貧(방년곡과불혐빈)

 

能爲諸孤擇孟鄰(능위제고택맹린)

 

始播婦儀歸茂族(시파부의귀무족)

 

勤備母道化良臣(근비모도화양신)

 

歲資凜給因三子(세자름급인삼자)

 

終致恩封享九旬(종치은봉향구순)

 

慘綠少年今白髮(참록소년금백발)

 

遙瞻絳帳淚霑巾(요첨강장루점건)

 

꽃다운 나이에 과부되나 가난을 싫다 않고

능히 여러 아들 위하여 맹모(孟母)같이 이웃 가렸네.

비로소 부덕을 널리 펴서 번성한 가족 이루고

부지런히 어미의 도리 다하여 어진 신하 만들었네.

세 아들 급제함으로 해마다 나라에서 미곡을 받으시고

구십연세 누리시어 마침내 은봉을 받으셨네.

푸른머리 소년 이제 백발되어 몹시 슬퍼하니

아득히 스승님의 자리 바라보며 눈물이 수건 적시네.

 

근재선생의 모친을 그리워한 시(詩)로 근재선생도 타계하였고 대부인의 상을 당하여 순흥군(順興君) 휘 집(輯)의 슬퍼하는 모습을 그린 시이다.

[출처] 순흥군대부인 만장-급암(及菴) 민사평(閔思平) (순흥안씨문숙공파종회) |작성자 치워니

 

 

7세 : 안종원(문간공)

7세조(世祖) 종원(宗源)

 

ㅇ. 자(字)는 사청(嗣淸)이고 호(號)는 쌍청당(雙淸堂)이며 諡號(시호)는 문간공(文簡公)이시다.

 

ㅇ. 고려 충숙왕 11년(1324) 을축년 5월에 낳으시고 근세조선 태조 3년(갑술년) 3월 24일에 돌아가셨다.

 

ㅇ. 묘는 경북 봉화군 봉화읍 문단1리 산183 자좌에 있었으나 2008년 4월 순흥으로 이장하였다.

 

ㅇ. 배(配)는 광주김씨 경혜택주(慶惠宅主)이고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대덕산 종포동이며 휴전선 이북에 있으며 을좌이다.

 

ㅇ. 자(子)는 경온(景溫), 경량(景良), 경공(景恭)(良度公)), 경검(景儉) 네분이시다.

 

ㅇ. 충혜황 3년(1342년), 17세로 문과에 급제하시어 삼사도사를 거쳐 공민왕초에 전법정랑(典法正郞)으로 계실때 송사를 잘 처리하여 칭송을 받았으며 그 후 경상도 안렴사(安廉使)가 되셨다.

 

공민왕 10년(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죽주(竹州)에 이르렀을때에는 양광도 안렴사(按廉使)로 있었는데 문제점이 생겨 지청풍군사(知淸風郡事)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전법총랑(典法總郞)으로 승진되었다.

 

그러나 신돈의 미움을 받아 강릉부사로 또 좌천되었다가 신돈이 처형된 뒤에 다시 사헌시사를 거쳐 우왕 초에는 우사의대부로 있었는데 이때 좌사의대부인 유구등과 같이 환관들의 횡포를 시정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셨다.

 

마침내 대사성우상시(大司成右常侍), 대사헌을 거쳐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시고 이어 판숭경부사(判崇敬府事) 가 되셨으며 또한 흥녕군으로 봉해지셨다.

 

이어 문하평리(門下評理) 겸대사헌(兼大司憲)에 순성보조공신(純誠輔祚功臣)이 되신 뒤 순흥군으로 봉해 졌으며 다시금 순성익대보리공신(純誠翊戴輔理功臣)이 되시었다.

 

그 후 최영에게 발탁되어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으며 공양왕 2년(1390년)에는 다시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시고 이듬해에 흥녕부원군에 봉하게 되셨다.

 

1392년에 조선조가 개국되면서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시고 다음해에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계시다가 태조 3년(1394년)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 오시기도 하였다.

 

근세조선에서 공에게 특별히 보국숭록대부, 판문하부사, 집현전대제학(輔國崇祿大夫, 判門下府事, 集賢殿大提學)이라는 높은 벼슬을 받으셨다.

 

■ 문간공(文簡公) 안종원(安宗源, 1325~1394)의 가계

 

▻ 부인 경혜택주(慶惠宅主) 김(金)씨

 

봉익대부 우상시(奉翊大夫右常侍) 김휘남(金輝南)의 딸이며 4남 1녀를 낳았다.

 

▻ 1남 중온(中溫:일명 景溫)

 

봉익대부 밀직제학 집현관제학 상호군(密直提學集賢館提學上護軍)으로 판도판서(版圖判書) 김안리(金安理)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후사를 못 둔 채 공보다 먼저 죽었다.

 

▻ 2남 경량(景良)

 

자헌대부 서북면도순문사 동중추원사(資憲大夫西北面都巡問使同中樞院事) 및 양광도 관찰사(楊廣道觀察使)역임하였다. 대방군(帶方君) 양천룡(梁天龍)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아들이 없고, 이실(二室) 정씨(鄭氏)가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은 민수(民秀)라고 한다.

 

▻ 3남 경공(景恭)

 

추충익대개국공신 자헌대부 흥녕군(推忠翊戴開國功臣資憲大夫興寧君)이며 대사헌으로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지냈다. 정당문학(政堂文學) 정사도(鄭思道)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순(純)을 낳았으며 순(純:靖肅公)은 정당문학(政堂文學) 정공권(鄭公權)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숭직(崇直:寧原君), 숭선(崇善:文肅公), 崇信(숭신:奉正大夫仁壽府少尹), 숭효(孝崇:安川君) 3녀가 있다.

 

▻ 4남 경검(景儉:嘉善大夫工曹典書)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전서(工曹典書) 및 대간(臺諫)을 역임하였으며 청성군(淸城君) 한수(韓脩)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민동(民同:倉庫都監判官) 5녀를 낳았다.

 

▻ 1녀 유후(柳厚)에게 시집갔다.

 

1남 기(沂)는 목은선생의 장남 종덕(種德)이 장인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손자인 이숙주(李叔疇)는 정숙공(靖肅公:純)의 맏사위이고, 숙야(叔野)는 소윤공(小尹公:崇信)의 장인이며, 숙무(叔畝)는 감사공(監司公:崇孝)의 장인이다. 역시 목은선생의 손자인 맹진(孟畛)은 11세 참의공(參議公:訓.문숙공의 장남)의 처외조이다.

 

얼마나 친교가 깊었으면 이토록 인척(姻戚) 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까?

 

7세 문간공(文簡公) 휘 안종원(安宗源) 관력사항

 

안종원(安宗源) 1325 ∼1394

 

본관 순흥(順興)

 

자 사청(嗣淸)

 

호 쌍청당(雙淸堂)

 

시호 문간(文簡)

 

왕대 왕력 년 월 일 관력

 

태조 1 1392 7 28 영삼사사(領三司事)

 

태조 2 1393 1 19 영삼사사(領三司事)

 

태조 2 1393 7 22 영삼사사(領三司事)

 

태조 2 1393 8 18 판사(判事)

 

태조 2 1393 9 13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태조 3 1394 1 16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태조 3 1394 3 7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태조 3 1394 3 24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세종 0 1418 6 2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8세 : 안경공(양도공)

8세 양도공(良度公) 휘 안경공(安景恭) 관력사항

 

 안경공(安景恭)  본관  순흥(順興)

 

자 손보(遜甫) 시호 양도(良度) 생년 1347∼몰년 1421

 

 왕대 왕력 년 월 일 관력 형태 해당기사

 

1365 사마시 합격(19세)

 

1372 산원(散員:정8품) 출사(出仕) 26세

 

1373 낭장(郎將:정6품) 특진(27세)

 

1376 의영고부사(義盈庫副使)

 

1376 문과(文科) 급제(30세)

 

전리사(典理司)와 전법사(典法司) 좌랑(佐郞)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예의정랑(禮儀正郞)

 

삼사좌윤(三司左尹)

 

비순위 상호군겸 판통례문사

 

진현관제학

 

판전교시사 및 지제교

 

예의판서

 

전법판서

 

공민 황주목사(黃州牧使)

 

우왕 8 1382 5 경주감사

 

공양 3 1391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공양 4 1392 4 좌부대언(左副代言:左副承旨)

 

태조 1 1392 7 28 도승지(都承旨) 현직

 

태조 1 1392 8 19 도승지(都承旨) 현직

 

태조 1 1392 8 20 도승지(者承旨) 현직

 

태조 1 1392 8 23 도승지(都承旨) 현직

 

태조 1 1392 9 16 도승지(者承旨) 현직

 

태조 1 1392 11 12 도승지(者承旨) 현직

 

태조 2 1393 2 11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현직

 

태조 3 1394 3 17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 현직

 

태종 6 1406 8 11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현직

 

태종 11 1411 8 11 우정승(右政丞) 현직

 

태종 11 1411 8 11 우정승(右政丞) 현직

 

태종 11 1411 9 24 개국 공신(開國功臣) 현직

 

태종 11 1411 9 24 개국 공신(開國功臣) 현직

 

세종 3 1421 1 10 75세로 별세

 

 

9세 : 안순(정순공)

9세조(世祖) 순(純)

 

ㅇ. 자(字)는 현지(顯之) 호(號)는 별야(別野) 시호는 정숙공(靖肅公)이시다.

 

ㅇ. 고려 공민황 20년(1371년)인 신해년 10월 18일에 낳으시고 이조 세종 21년인 경신년(1440년)

 

11월 28일에 70세로 돌아가셨다.

 

ㅇ. 묘(墓)는 서울시 금천구 시흥(始興) 4동 북백사동(北柏寺洞)(아버지 양도공 묘 오른편 기슭)에

 

있으며 갑좌향이시다.

 

ㅇ. 배(配)는 정숙부인 청주정씨이시고 세종때 갑인년(1434년)에 돌아가셨다.

 

묘는 합장이시다.

 

ㅇ. 자(子)는 숭직(崇直), 숭선(崇善)(문숙공), 숭신(崇信), 숭효(崇孝)네분이시다.

 

ㅇ. 고려 우왕 4년(1388년) 사마사(司馬使)에 합격하시고 공양왕 원년(1389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사간원 좌습유(左拾遺)에 등용되고 성균관 학유를 지내셨다.

 

이조 태조 7년(1398년)에 사헌부 잡단(雜端)으로 계시다가 이어 승정원 우대언과 이조참의를 지내셨으며 태종9년(1409년) 동지 총판(總判)에 이어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셨다.

 

세종원년에 호조참판으로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셨으며 그 후 공조판서가 되셨고 1423년에 함길도관찰사를 지내셨으며 이어 참찬 의정부사를 역임하셨다.

 

1424년에 진위사로 명나라에 다시 다녀오셨으며 그 후 호조판서가 되시었다.

 

<세종조에 17년간 국가의 토지 및 재산을 관장하는 최장수 호조판서로서 그 직을 다하셨다.>

 

1432년 판중추원(判中樞院) 겸 호조조사와 의정부 찬성사를 거쳐 1437년 판중추원사가 되셨다. 이때 충청도에 기근(饑饉)이 일어나 도순문 진휼사(都巡問 賑恤使)로 임명되어 이를 잘 수습하므로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오르셨다가 참찬(參贊)과 호조조사를 겸하여 전곡(錢穀)을 관장하셨다.

 

그후 조선조의 벼슬인 숭록대부판중추언사(崇祿大夫判中樞院事)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 겸 호조사(戶曺事)를 지내시다가 사직하시었다.

 

안순(安純)의 8고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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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 : 안숭선(문숙공)

10세조(世祖) 숭선(崇善)

 

ㅇ. 자(字)는 중지(仲止), 호는 옹재(壅齋) 시호는 문숙공(文肅公)이시다.

 

ㅇ. 이조태조 원년(1392년)인 임신년 9월에 낳으시고 문종 2년인 단종원년(1452년) 즉 임신년 4월 16일 61세로 돌아가셨다.

 

ㅇ. 묘(墓)는 파주 조리면에서 1989년 3월13일 양도공 묘소 아래로(1992년) 이장하였다.

 

ㅇ. 배(配)는 정부인 야로송씨이시고 묘는 문숙공과 합장하였으며 묘좌이시다.

 

ㅇ. 자(子)는 훈(訓), 의(誼) 두분이시다.

 

ㅇ. 태종 11년(1411년)인 신묘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계성전직(啓聖殿直)에 임명 되셨으며 감찰이 되시었다.

 

세종 2년(1420년)에 다시 문과에 장원급제 하시어 지평(持平)에 등용되시었다가 1424년에 이조정랑(吏曺正郞), 1427년에 형조좌랑 1433년에 지신사(知申事) 등을 역임하셨다.

 

1437년 세종대왕께서 파저강(婆猪江)의 야인(野人)을 정벌하실 때 동부대언(同副代言)으로서 정벌(征伐)을 적극 주장하며 뜻을 같이 하셨다.

 

그해에 대사헌 다음해에 경기도 관찰사를 지내셨으며 1444년에는 형조판서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시어 명나라에도 다녀오셨다.

 

그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집현전대제학을 거쳐 1445년에 병조판서 지춘추관사로서 고려사수찬(高麗史修簒)에 참여하시었다.

 

문숙공께서는 세종이 뽑은 18명의 도승지 중에서도 임기가 가장 길었던 4년 1개월동안 재임하여 세종의 측근 중 최고의 측근으로 활동 하시었다.

 

안숭선(安崇善)의 8고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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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 : 안숭신(소윤공)

참의공을 찬양함 - 안숭신

 

先生事業冠群賢 (선생사업관군현) 선생의 사업은 현자들 중에 으뜸이니

 

忠孝當時儘兩全 (충효당시진양전) 충효한 그 당시 둘 다 완전 하도다.

 

竇氏椿齡堪樂只 (두씨춘령감락지) 두씨의 오랜 나이 군자들이 즐거워하고

 

謝家蘭馥亦依然 (사가난복역의연) 사씨 집의 난초 향기는 또한 의연 하구나

 

歸來自擬胸元亮 (귀래자의흉원량) 고향으로 돌아 온 것을 도연명에 비기고

 

高尙人言魯仲連 (고상인언노중연) 사람들이 말하기를 진실로 높기가 노중연과 같다하네

 

身退名成終始具 (신퇴명성종시구) 몸은 물러나되 이름을 비로소 가추니

 

端知令聞墦秋千 (단지령문번추천) 다못 천추에 전해질 것을 알만 하도다.

 

 

* 안숭신 : 조선 세종 때 문신. 안숭선의 동생.

 

최덕지 선생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호는 연촌(烟村) 또는 존양당(存養堂)이다.

 

예문관(藝文館) 직제학(直提學)을 지냈다.

 

 

10세 : 안숭효(대사헌)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1)/안종화(安鐘和(朝鮮)會纂) 간행 1909년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는 안종화(安鍾和, 1902~1966)가 1909년 조선초부터 철종 때까지의 주요 인물의 행적을 기술한 책이다.

 

(世宗朝)安崇孝 3파10세

 

字季忠號寒柏堂順興人崇善弟進士蔭補大司憲歷按畿完錦三營諳鍊事理迎刃而解宣化大著世祖元年呈病還山越五年湖西大侵上欲遣才德重望者治之難其人朝堂咸薦之曰安崇孝非特才德兼之且其世有遺愛於該道合膺是選卽拜都觀察使旣至論罷汚吏撫賑流民全省賴寧卒于官[주:人物考]

 

 

11세 : 안훈(참의공)

11세조(世祖) 훈(訓)

 

ㅇ. 자(子)는 훈지(訓之)이며 영락(永樂) 경자생(1421년)으로 세종(世宗) 2년에 종묘서령(宗廟署令)으로 음임(陰任: 왕이 특별히 임용)하고 장령(掌令)집의(執義)를 역임하여 대호군(大護軍)에 승진되어 경기도 및 평안도를 순심(巡審) 하였다.

 

절충장군행의흥위(折衝將軍行義興衛) 정3품 당상관에 오르고 성화경인(成化庚寅)에 돌아가시다. 증통정대부이조참의(贈通政大夫吏曹參議)하셨다.

 

ㅇ. 배(配)는 숙부인(淑夫人) 청주이씨(淸州李氏)이고 부친은 판관(判官) 후(厚)요, 조부는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인 경숙공이시며 증조부는 좌정승(左政承)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거역(居易)이다.

 

ㅇ. 묘는 경기도 양주군 방학리에 고위와 같이 모시었으나 서울시가 되어 도시개발로 1969년 5월 8일에 지금의 화성군 태안읍 병점리 옮겼으나 또다시 도시개발로 2001년 신사년(辛巳年) 6월에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 종산을 매입하여 배위(配位)와 합폄(合窆)으로 다시 이장(移葬)하였다.

 

ㅇ. 차녀는 죽산안씨 안맹담(安孟聃)의 셋째아들인 안상계(安桑鷄)와 혼인을 했다.

 

ㅇ. 자(子)는 우연(友淵), 우상(友商), 우석(友晳) 세분이시다.

 

안훈(安訓)의 8고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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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 : 안의(참판공)

11세조(世祖) 의(誼)

 

ㅇ. 자는 의지(宜之)이며 영락(永樂) 계묘생(1423)으로 세종 29년(1447)에 생원시에 급제하였고, 음보(蔭補)로 궁중에서 소요되던 기름 꿀 채소 등의 출납을 맡아보던 의영고(義盈庫)의 직장(直長)이 되었다. 이어 사헌부 지평(持平), 연안부사(延安府使)를 거쳐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재직하던 중 지병으로 순직했다. 사후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공은 타고난 자질과 품성이 빼어나고 효심과 우애가 돈독하고, 동료 간에 신의를 지켜서 주변 사람들이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히 수(壽)를 다 못하고 명성에 걸 맞는 벼슬에 이르지 못하여 지인(知人)들이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ㅇ.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파평윤씨(坡平尹氏)이며 부친은 감찰(監察)인 효동(孝童)이고 조부는 병조판서(兵曹判書) 소도공(昭度公)인 향(向)이며 증조는 평리충간공(評理忠簡公)인 승순(承順)이고 외조는 판결사(判決事)인 문화유순(文化柳恂)이다.

 

 

 

ㅇ. 묘는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 수리산(修理山) 초막동(草幕洞) 술좌(戌坐)이다.

 

1996년 3월 28일 경모재(景慕齋)를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1057-11에 이건(移建)하였다.

 

 

안의(安誼)의 8고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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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 : 안우연(부사공)

13세 : 안후(군수공)

14세 : 안자우(별제공)

15세 : 안온(군수공)

16세 : 안상문(별제공)

 

378년만에 별좌공(別坐公) 선조(先祖)의 합장을 모시고

 

부회장 秉根

 

휘(諱) 상문(尙文)은 양도공(良度公:휘 景恭)의 8대손이시다. 문숙공(文肅公:휘 崇善)께서 형제를 두셨는데 장(長)은 휘 훈(訓)이요, 차(次)는 휘 의(誼)이시다.

 

휘 훈(訓) 참의공(參議公)께서는 3남을 두셨으니 장은 부사공(府使公) 휘 우연(友淵)이시고 공은 별좌공의 고조(高祖)가 되신다. 증조(曾祖)는 낙안군수 휘 후(煦)이시고 조부(祖父)는 별제공이신 휘 자우(自祐)이시다. 부친은 휘 온(穩)이시고 통훈대부 안성군수이시다.

 

 

자손이 귀한 종가(宗家)집이어서 조부와 부친 양대(兩大)가 계자(繼子)로 들어오셔서 가계(家系)를 이으셨다. 즉 우리 양도공파(良度公派)에 종가(宗家)가 된다. 이렇게 이어져서 내려와 30세손 현 종손 致鎬에 이르고 있다.

 

 

공은 1560년대에 탄생하시어 우리 가문의 전통을 이어 열심히 공부하셨고 벼슬이 궁중정원에 꽃과, 나무, 과일나무 등을 맡아 관리하는 장원서별좌(掌苑暑別坐) 정6품이시다. 동생이 한분 계셨는데 충좌위(5위중에 하나) 부사과 종6품의 무관이신 휘 상충(尙忠)이시며 후에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증직되시었다. 공의 손자이신 휘 홍성(弘成)께서 지금의 김해산본으로 낙향하시어 현재 후손이 200호에 약 600명에 이르고 있다.

 

 

이괄(李适)은 1587년 선조 20년∼1624년(인조 2) 조선 중기의 충신반란자로 본관은 고성(固城) 자(字)는 자규(自圭) 병조참판 육(陸)의 후손이다.

 

선조때 무과에 급제한뒤 형조좌랑 태안군수를 역임하였다. 1622년(광해군 14)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임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즈음 평소에 친분니 있던 신경유(申景裕)의 권유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새왕을 추대하는 계획에 가담하게 되고 1623년 3월에 일어난 인조반정때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반정과정에서 주도세력인 거의대장(擧義大將) 김류(金瑬)의 우유부단한 처사에 크게 반발하여 불화하게 되어 반정뒤에 겨우 한성부 판윤의 벼슬을 받게 되어 불만이 많았다. 같은해에 포도대장을 지낸뒤 평안병사겸 부원수에 임명되었다.

 

평안영변에 출전하여 군사훈련에 힘쓰는 한 편 그 지방의 성책(城柵)을 보수하여 진의방비를 엄히 하였는데 이는 당시 후금과의 국제관계가 긴박하여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해 윤 10월 반정때 참가한 공신들의 공훈을 책정할 때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의 첫째가 되었다. 1624년 정월에 외아들 전(旃)과, 한명련(韓明璉), 정충신(鄭忠信), 기자헌(奇自獻), 현집(玄집), 이시언(李時言)등과 함께 반역을 꾀하였으나 한때 서울 점령 기세를 떨쳤으나 곧 관군에게 대패해 피신중 부하장수에게 살해되었다.

 

 

별좌공께서는 돌아가신 연대를 알 수 없으나 이괄의 난이 일어난 1624년 인조 2년에 별세하신 듯하다. 공께서는 화(禍)를 입어 두 아들과 같이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공의 배위이신 연안김씨(延安金氏)께서는 공인(恭人:정5품)의 칭호를 받으셨다. 4남을 두셨는데 장은 휘 길(佶)로 학덕이 출중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 후4품 조산대부이시다. 차남은 휘 준(俊)이신데 궁중에 가마, 말목장 등을 맡아 보던 사복시정(司僕寺正) 정 3품의 당하관이란 높은 벼슬에 오르셨다. 현재 약 100호에 300여 후손이 수원을 중심으로 각지에 살고 있다. 3남은 휘 수(修)이며 토목, 영선에 관한 일을 맡은 선공감(繕工監) 감역공(監役工)을 지내셨다.

 

 

현재는 보은, 관동, 사직파로 후손이 약100호에 300여명이 각지에 살고 있다. 4남은 휘 경(儆)이시나 목천지동파(木川池洞派)였으나 근래 족보에 입보하지 않아 자손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여러 차례에 걸쳐 천안시 목천일대에 가서 알아봤으나 사는 곳을 찾지 못하고 현재까지 미상이다.

 

 

할머니 연안김씨는 난리통에 남편과 두 아들을 잃어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과 쏟아지는 눈물을 억제하며 난리를 피하여 집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 난리속에 남편과 두 아들의 시신을 예도 차리지 못하고 지금의 노량진 흑석동 종산에 장사지내고 대대로 살던 서울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할머니께서는 홀로된 두 며느리와 3남 수(修)와 4남 경(敬) 어린 형제와 손자 홍주(弘冑)를 데리고 양도공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서울을 빠져나와 갖은 고생을 다해가며 400여리를 노숙과 걸식을 하다시피 하여 지금의 보은 길상리(吉祥里 )에 이르러 정착하셨다.

 

그 후 그곳에 양도공(良度公)이하 선대조상(先代祖上)의 위패를 모시고 사당을 세우게 되었다. 오늘날 후손들이 낙향선조로 할머니의 거룩한 정신과 유덕을 기르고 숭모의 정을 두텁게 쌓아 가고 있다. 우리 3파의 후손들은 종갓집에 며느리로서 갖은 고초와 역경을 이기고 조상을 받드신 그 정신을 길이 추앙해야 할 것이다.

 

 

공(公)의 묘는 서울 흑석동 불당곡(佛堂谷)에 계셨는데 313년 후인 1937년 2월11일에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병점리 방축산(防築山)으로 이장(移葬)하였고, 65년 후인 2002년 참의공종회 후손들의 오랜 숙원이던 별좌공 내외분을 합장하기로 합의하고 매화리 할머니를 돌아가신지 약 378년만에 합장으로 모셨다.

 

장자(長子) 휘 길(佶)은 나리통에 가매장 되어 있는 것을 자손들이 돌보지 못하여 실전되므로 매화리 종산에 모셔져있는 배위(配位) 양성이씨 (陽城李氏)할머니 묘에 사단비(祀壇碑)를 세우고 세사(世祀)를 매년 음력 10월11일에 올리고 있다.

자료제공 : http://cafe.naver.com/iahn.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367&

 

 

17세 : 안길(동몽교관)

18세 : 안홍주(북부참봉)

 

끝으로 님의 건강과 행복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하나이다.

 

 

2011.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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