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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북한산조사 ☆
wpwn**** 조회수 954 작성일2008.09.19

안녕하세요 지식인 여러분

 

선생님께서 산을 조사해오라고 하셨는데

 

북한산을 조사할거거든요..

 

그래서 사진은 필요없지만

 

높이등 그런거글있잖아요 그런거 글로 해주시고

 

길게는 말고 ...

한 10줄정도.. 간단하게만 써주세요!!

북한산입니다!

내공냠냠,숙제는알아서해야한다그런거 !!신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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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은 백운대(836m), 인수봉(810m), 국망봉(만경대 800m)등 세 봉우리가 삼각의 모양으로 서 있다 하여 삼각산이라 불러왔다.

화산 또는 부아악으로도 불리어 왔는데 산이 높고 깍아지른 듯 험준하여 등반하기 어려운 반면 주봉인 백운대 정상에 오르면 사방 1백리 반경이 모두 발 아래 내려다 보여 그 경관은 실로 아름답다.


백운대 정상에 서면 맞은편의 깍아지른 듯 서 있는 인수봉에 아슬아슬 달라붙은 암벽등반인들이 눈낄을 끈다. 국망봉, 노적봉 등 높은 봉우리들이 모두 발밑에 있음은 물론 도봉, 북악, 남산, 남한산, 관악산 등 멀고 가까운 산들이 모두 눈앞에 들어온다.

서쪽으로는 바다건너 강화도, 영종도 등 서해상의 섬들도 볼 수 있다.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있는 비봉을 중심으로 승가사와 진관사, 문수사 등의 사찰이 있으며 북한산 기슭에는 또한 세검정과 성북동, 정릉, 우이동 등 여러 계곡들이 있으며 1983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주요 봉우리 
백운대(836.5m), 인수봉(810.5m), 만경대(799.5m), 노적봉(716m), 원효봉, 영봉(604m), 비봉(560m), 문수봉(715.7m), 나한봉, 증취봉, 용출봉, 의상봉, 보현봉(700m),형제봉(462m) 
북한산은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한 서울에 인접하여 우리나라의 이천년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북한산의 최초 명칭은 부아악(負兒岳)입니다. 부아악이란 명칭은 암봉 뒤에 애를 업은 형상의 바위가 붙어있다 해서 불렀다는 설(說 )과 산봉이 뿔처럼 뾰족하게 생겨 불렀다는 (부아 →불→뿔)설이 있습니다.
삼국시대에 부아 또는 횡악으로 불렀던 북한산은 고려시대 성종 이후부터 1900년대까지 약 1천년동안 정상의 세 봉우리를 의미하는 삼각산, 또는 조선시대 중기까지 화산, 화악으로 불렸습니다. 북한산이란 명칭은 1711년 조선 중기의 숙종이 축조한 북한산성을 염두에 두고 남한산(성)과 대비하여 "한강 북쪽의 큰 산" 이란 의미로 1900년대 초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18년경에 고구려 동명성왕의 아들인 온조와 비류가 남쪽에 새나라(백제)를 건국하고자 내려와 지금의 한강 이북 지역을 도읍으로 물색코자 북한산(부아악)에 올랐다고 하며, 백제의 개로왕이 서기132년 산성을 쌓았다고 합니다. 삼국시대에는 전략요충지인 북한산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여러번의 격전이후 진흥왕이 이 곳을 국경으로 삼는다는 순수비(巡狩碑)를 비봉에 세우고, 557년 한강 이북지역에 행정구역인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습니다. 신라시대의 명승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들어와 수도를 하여 원효봉과 의상봉이라는 지명을 남겼으며, 원효대사가 상운사와 삼천사를 창건하였고 이어서 승가사와 도선사가 창건되었습니다.

고려 시대 태조 왕건이 중흥사를 창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고려 8대 현종이 북한산에서 승려 생활을 할 때 진관 스님의 은공을 기려 그를 국사로 봉하고 1011년 진관사를 창건하였으며, 거란족이 침입 하였을 때 북한산성 계곡 중흥동에서 피난 생활을 하였습니다. 고려 예종 1109년 탄연이 문수사를 세웠습니다. 고려 말 우왕 1388년 최영장군은 중흥성(북한산성의 전신)을 축조하여 군대를 주둔시킨 바 있으며, 원증국사 보우가 중흥사를 중건하고 그 옆에 태고암을 지었습니다.

조선 건국 초에 무학대사가 한양을 조선의 도읍으로 삼기 위해 북한산을 답사하였으며, 수양대군 (세조)이 천문관측을 위해 보현봉을 올랐고, 많은 신하와 선비, 승려들이 풍수 지리, 학문 정진, 수도를 위해 출입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수도 한양이 점령당하고 왕이 멀리 피신하는 사태가 발생된 이후 북한산성 축조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이에 대한 오랜 기간의 찬반양론 끝에 숙종이 1711년 전란 시 피난처 및 방어지로 삼기 위해 단 6개월만에 7,620보, 약 8.5㎞에 이르는 오늘의 북한산성을 축조하였습니다. 이어 북한산성의 외성으로 1713년 탕춘대성을 축조하기 시작했으나 신하들의 반대 의견이 많아 완성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숙종 이후 북한산성에 대한 전략적 중요성이 약화되어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한 방치와 전란 시의 화재, 자연재해 등으로 성곽을 비롯한 주요시설, 사찰들이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일제 시대 때에는 일본 헌병대가 주둔하여, 의병과 독립군이 북한산을 거점으로 삼을 것을 우려, 북한산 성내 대부분의 시설과 사찰을 불태웠다고 하며, 1927년 백운대에 쇠난간을 설치하고 철심을 박아 민족정기를 훼손하려하였습니다. 철심은 1980년대 모두 철거되었습니다.

북한산의 문화유적
태고사 원증국사탑비(제611호), 태고사원증국사탑(제749호)
삼천사 삼천사지마애여래입상(제657호)
승가사 북한산구기리마애석가여래좌상(제215호)
북한산성(제162호)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유지(제228호)
홍지문및탕춘대성(제33호)
원도봉 망월사천봉당태흘탑(문화재자료제66호), 망월사천봉선사탑비(문화재자료제67호), 망월사혜거국사부도(제122호)
북한산성 북한산성금위영이건기비(제87호), 북한산중흥사지(기념물136호), 북한산성행궁지(기념물160호)

북한산의 사찰.
원도봉 망월사, 회룡사, 쌍용사, 대원사, 법화사, 덕천사, 석천사, 홍법사, 원효사, 천문사, 지장사, 호암사 송추 원각사, 송암사, 도성암, 석굴암 북한산성 태고사, 진관사 원효사, 상운사, 노적사, 국녕사, 덕암사, 무량사, 선봉암, 묘법사, 대동사, 용학사, 봉성암, 중흥사, 삼천사, 백화사, 용암사, 각황사

출처 : 북한산 국립공원.http://www.npa.or.kr/bukhan/

2008.09.19.

  • 출처

    ethnos44 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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