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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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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비중 높으신 위인이라면..
여운형/김규식/윤봉길/지청천/양세봉/나석주/김원봉 등등등
2018.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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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1급: 대한민국장 (30명)
독립유공자 2급: 대통령장 (93명)
독립유공자 3급: 독립장 (806명)
독립유공자 4급: 애국장 (3,886명)
독립유공자 5급: 애족장 (5,016명)
그외 이름없는 독립운동가는 아마도 1만명정도
박재혁(朴載赫,1895년5월 17일~ 1921년5월 27일)
독립운동가이다. 부산 경찰서 서장 하시모토(橋本秀平)를 향해 폭탄을 투척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 받고 옥중(獄中) 단식(斷食)을 하여 함구하다 순국(殉國)하였다.1962년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백정기(白貞基,1896년1월 19일∼1934년6월 5일)
1919년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과 전단을 가지고 고향에 내려가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그후 동지들과 경인(京仁)간의 일본 군사시설 파괴를 공작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본적지와 행적을 속여 나올 수 있었다.
그후 각지를 몰래 다니며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여중국베이징으로 망명, 일본 군사시설 파괴에 전력하였으며,1924년일본 천황을 암살하려고 도쿄에 갔으나 실패하였다.1924년상하이로 가서 우당 이회영, 화암 정현섭, 우근 유자명, 회관 이을규, 우관 이정규등과 함께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거사를 준비했다. 때마침이토히로부미가 수원 관광을 다녀온 후 서울로 되돌아간다는 첩보를 입수한 원태우는 안양에서 진을 치고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를 전복시키기 위해 레일에 바위를 깔아놓는 것을 시도했으나 겁을 먹은 이만려가 바위를 치웠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래도 원태우는 어떻게든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해 짱돌을 들고 안양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가 지나가자 이토 히로부미에게 돌을 던졌다. 원태우가 던진 돌은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의 창문을 깨고 정확하게 이토 히로부미의 머리에 명중되었으며 이때 깨진 유리파편 중 8조각이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에 박혔다.
이토 히로부미는 뇌진탕을 일으키는 등 생명이 위독한 상태가 되었으나 급하게 치료를 받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원태우는 현장에서 바로 체포되었으며 이 사건은 전 일본을 떠들썩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후 원태우는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겪었다. 온몸에 고문으로 인한 상처자국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매우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안중근등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시도하는 사람이 계속 생겨나게 되었으며 한반도에서 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후 원태우는 일제의 혹독한 감시와 착취로 인하여 매우 힘겹게 살아가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그 후 원태우는 1950년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사망했다. 향년 69세
전명운 장인환 선생
한국외교고문 미국인 출신 스티븐슨 암살
미국인 수지분(스티븐스)이란 자는 1905년 6월 일본 정부의 추천으로 한국 외교고문직을 맡게 되었으니 각부의 일본인 고문과 동일한 인물이다. 이등박문이 보호조약을 체결할 때 외부에 있으면서 극력 알선하여 일본에 충실하였다. 한국의 국록을 먹고 한국을 망하게 하였으니 그가 한 짓은 즉 인류라면 함께 할 수 없는 한국인의 구적.
전명운(田明雲, 1884년 6월 25일 ∼ 1947년 11월 19일)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1908년 친일파 미국인으로 대한제국의 외부 고문을 맡고 있던 D. W. 스티븐스를 암살할려는계획을 장인환과 공동으로 수립
장인환(張仁煥, 1876년 3월 10일 ∼ 1930년 5월 22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백관수
귀국 후 중앙학교에서 잠시 교육활동을 하다가 동아일보에 투신, 언론계에서 활동하였고, 광복 이후에는 제헌국회의원으로서 헌법기초를 담당 한국전쟁당시 북한군에 납치 이후 행방묘현.
최팔용
조선청년독립단의 결성을 선포했다가 체포되어 금고 9개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그러나 출옥 직전 송계백이 옥사하는 등 이들이 갇혔던 스가모형무소 수형 생활은 가혹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최팔용도 옥중 후유증을 앓으며 건강이 급격히 쇠약해져, 출옥 후 2년 여가 지난 1922년32세의 나이로 경성에서 사망했다.
여학생참여
당시 동경 여자학원졸업생 김마리아 와 황애덕여사
김마리아(金瑪利亞, 1891년6월 18일~ 1944년3월 13일)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김진상(金眞常)이며, 임시정부 김규식의 부인입니다
황애덕(黃愛德, 1892년4월 19일~ 1971년8월 24일)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이름은 '에스터(Esther)'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평양의 숭의여학교교사로 근무하면서 1913년비밀결사 송죽회를 구성해 운영했다.
도쿄에 유학 중 2·8 독립선언에 참가했고, 3·1 운동때는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했다. 3·1 운동 가담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뒤 대한민국애국부인회(회장 김마리아)에 참여했다가, 조직이 적발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사건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3·1여성동지회초대 회장을 지냈다. 1990년건국훈장애국장이 추서되었다.
1926년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웨슬리안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유학 중에 김마리아, 황애덕등과 함께 민족주의적인 여성 유학생 모임인 근화회를 조직하여 국내 정세를 외국인들에게 알리는 활동을 하였다. 해외 선교를 위한 학생자원운동에 가담하여 미국와 유럽을 순회하며 강연을 하고 1931년귀국했다.
2018.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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