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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우리나라의 위인들
smct**** 조회수 3,352 작성일2008.08.10

제발 저좀 도와주세요!!

우리나라 위인들을 조사하는 건데

1. 백선행

2. 허난설헌

3. 만덕

4. 곽낙원

5. 김마리아

6. 나예석

7. 고대수

8. 양만춘

9. 길재

10. 지눌국사

11. 김소월

이렇게 11명을 간단하게 써주세요. 너무 간단하겐 말고요..

내공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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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신

백선행(1848년 - 1933년)

자선 사업을 많이 한 조선 시대의 여성 사업가이다.

1908년에는 대동강을 가로지르는 백선교 공사에 기부했다.

1922년에는 평양에 3층 규모의 공공 회관을 지었다.

1923년에는 광선 학교에 땅을 기부했다.

1924년에는 창덕 학교에 땅을 기부했다.

1925년에는 그녀는 자기의 전재산을 자선 단체에 기부했다

 

허난설헌(1563년 - 1589년)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이다.

허난설헌의 재능을 알아본 허균의 배려로 글을 배우게 되었다.

허난설헌은 사회의 불공평을 비평하는 사회비평, 도교적인 가치관등 다양한 가치관을 시로 표현했다.

아버지가 병에 걸려 죽었으며,

오빠가 방랑하다 금강산 근방에서 죽고

어머니가 전라도 진산에서 여행하다가 소화불량으로 죽었으며

아들과 딸을 일찍 잃는 등 불행한 일도 많이 겪었다.

 

만덕(?~?)

신라 진흥왕 때의 무용가이다.

가야의 음악가 "우륵"이 신라에 항복하자 진흥왕은 "만덕", "계고", "법지"에게 명령하여

우륵으로부터 음악을 배우게 하였는데, 만덕은 무용을 배웠다.

우륵으로부터 음악을 배운 뒤 진흥왕 앞에서 보여주자

진흥왕은 기뻐하여 후한 상을 주었으며, 이 음악은 후에 신라의 궁중음악인 "대악"이 되었다

 

곽낙원(1859년~1940년)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김구의 어머니로, 1922년에 임시 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아들을 따라가 뒷바라지하였다.

 

김마리아(1891년 ~ 1944년)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도쿄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2·8 독립 선언이 일어나자 황애덕 등과 함께 적극 참가했다.

곧이어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미리 귀국하여 황해도 지역의 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었다.

1920년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상하이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에 참가했다.

1933년 귀국하여 교육활동에 힘쓰다가 사망하였다.

 

나예석 자료 없음

나혜석(1896년 ~ 1948년 12월 10일)

한국화가이다.

일제 강점기의 유명한 신여성이었으며,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꼽힌다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일본유학을 하고

1918년 귀국하여 교사로 근무하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매년 수상을 거듭하여 실력을 인정 받기도 하였다.

나혜석은 여성들을 위해서 야학을 열었고,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에도 도움을 주었다.

고대수(?~?)

조선 말기의 궁녀이다.

힘이 남자보다 강하여 ≪수호지≫에 나오는 여장부의 이름을 따서 고대수라는 별명을 가졌다.

일찍부터 개화당에 포섭되어 갑신정변 수행과정에서 도움을 주었다.

갑신정변 당일 궁궐문을 열어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을 맞아들이고

궁궐에 화약을 터뜨려 불을 붙임으로써 난이 일어난 것처럼 꾸미는 일을 맡았다.

 

양만춘(?~?)

고구려 보장왕안시성)의 성주이다.

645년 당나라 100만 대군을 상대로 임기응변의 전법으로 끝까지 성을 지켜내며 버텼다.

이 전투에서 당나라의 황제는 양만춘의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을 잃었다고 한다.

길재(1353년 ~ 1419년)

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이다.

"이색"과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의 "3"으로 불린다.

고려 말 고려가 쇠망할 기운을 보이자 사임하고 낙향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벼슬을 받지 않고 숨어 지냈다

 

지눌(1158년 ∼ 1210년)

고려 중기의 승려이다.

"선종"의 "중흥조"이다.

성은 정씨. 황해도 서흥 출신이다.

아버지는 "정광우"이고, 어머니는 개흥군 출신의 "조씨"이다

 

김소월(1902년  ~ 1934년 12월 24일)

한국시인이다.

서구 문학이 범람하던 시대에 민족 고유의 정서에 기반을 둔 시를 쓴 민족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초기에는 민요조의 여성적이고 서정적인 목소리의 시작활동을 하였으나

후기작(〈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등)에서는

민족적 현실의 각성을 통해 남성적이며 참여적인 목소리로 기울었다

 

 

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B%B0%B1%EC%84%A0%ED%96%89

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A%B9%80%EC%86%8C%EC%9B%94

출처 :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s=K&i=270232

출처 :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s=K&i=281350

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A%B8%B8%EC%9E%AC

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C%96%91%EB%A7%8C%EC%B6%98

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A%B9%80%EB%A7%88%EB%A6%AC%EC%95%84

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B%82%98%ED%98%9C%EC%84%9D

출처 : http://people.empas.com/people/info/kw/ac/kwacknakwon/

출처 :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s=K&i=237268

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D%97%88%EB%82%9C%EC%84%A4%ED%97%8C

출처 : http://alldic.empas.com/search/krdic.html?category=E&q=%EA%B3%BD%EB%82%99%EC%9B%90&wi=51&po=Y&wv=51&ob=1&ds=44

2013.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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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尹奉吉) : 1908년 6월 21일 ~ 1932년 12월 19일

1931년 겨울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1932년 4월 29일 상하이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사건의 임무를 맡게된다.

윤봉길은 오른손에는 일장기, 왼손에는 물통과 도시락으로 위장한 폭탄을 들고

삼엄한 경계망을 뚫으면서 훙커우 공원 안으로 들어가 폭탄을 던져

많은 일본관리들을 사망시키거나 부상당하게 한뒤,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 받고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에서 총살 당했다.

중국의 대총통 장제스가 조선에 관심을 갖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유관순(柳寬順) : 1902년 11월 17일~1920년 10월 12일

충청남도 천안에서 5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1916년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하였고,

1919년 서울에서 3·1 운동에 참가한 뒤,

고향으로 내려가 아우내장터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지휘했다.

일본 헌병대는 가족을 죽이고 유관순을 체포하였다..

1920년 서대문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방광 파열로 인해 사망하였다.

 

안창호(安昌浩) : 1878년 11월 9일 ~ 1938년 3월 10일

평안남도 강서에서 안흥국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1895년 교육을 통해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하여 구세학당에 입학하여 서구문물과 접하게 되었다.

1907년 안창호는 대한사람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하는 계몽활동외에도,

1904년 공립협회를 창립하였고

1908년 대성학교평양에 설립하였으며,

1909년 서북학회를 창립하는 등 민족교육활동을 하였다.

1937년 동우회사건으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1938년 60세에 병을 앓아 사망하였다.

 

이봉창(李奉昌) : 1900년 8월 10일 ~ 1932년 10월 10일

1931년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일본 천황 히로히토 암살 계획을 세웠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히로히토를 겨냥하여 수류탄 2개를 던졌다.

근위병 1명이 다쳤으나 히로히토는 다치지 않아 거사는 실패했고 그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비밀 재판을 통해 사형 선고를 받고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김좌진(金佐鎭) : 1889년 12월 16일~1930년 1월 24일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이다.

놀라운 전술과 전략으로 청산리 전투을 승리로 이끈 지휘관이었으며,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피살되었다.

 * 청산리전투 :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별 피해가 없었으나, 일본군은 약 1000명을 사살한 아주 큰 승리를 하였다.

 

김홍집(金弘集) : 1842년~1896년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정치가이다.

1880년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와서,

서양 근대의 기술적 성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일본의 문물제도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신사유람단의 일본 파견을 상주하게 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정권을 도맡아 여러가지 개혁을 진행햇다.

 

이상설(李相卨) : 1870년 12월 7일~1917년 3월 2일

1907년 고종의 명을 받아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되었다.

헤이그 특사들의 임무가 실패로 돌아가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힘을 썻다.

 

이준(李儁) : 1859년 1월 21일 ~ 1907년 7월 14일

1907년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되어 외교활동중 사망한 구한말의 외교관이다.

그러나 을사조약 체결이 일본에 강제에 의한 것이었음을 폭로하려 했던 계획은

영일동맹으로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의 방해로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준은 헤이그의 숙소에서 울분을 못 이겨 앓다가 사망하였다.

 

박영효(朴泳孝) : 1861년~1939년 9월 21일

조선 말기 급진 개화파의 주요 인물이다.

1870년대 중반, 형 박영교를 따라 재동 박규수의 사랑방에 드나들면서 개화사상을 익히기 시작하였다

1882년제물포조약에 따른 사과 사절로 일본에 다녀왔다.

이때 그가 대한민국의 국기 태극기의 원형이 되는 깃발 도안을 처음 그려서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서재필(徐載弼) : 1864년 1월 4일~1951년 1월 5일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신문인 《독립신문》을 순한글과 영어로 발간하였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에서 띄어쓰기를 도입한다고 밝혔다.

독립신문을 통해 서재필은 독립된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내부적으로는 교육 확대 및 산업 발전을 강조하였고,

그를 위해 의무 교육 도입, 서양 과학 기술의 도입,

식생활과 위생의 개선에 대한 여러 가지 안들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중립외교를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일 이외에도, 서재필은 목요일마다 배재학당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쳤고,

독립협회를 조직한 뒤, 독립문을 건설했다.

 

민영환(閔泳煥) : 1861년 7월 2일~1905년 11월

1905년 11월 30일 을사조약의 체결을 개탄하며,

'대한 이천만 동포에게 남기는 글'을 국민들에게 유음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홍범도(洪範圖) : 1868년~1943년

1910년 한일 병합 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으며,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청산리 대첩에서 김좌진을 지원하였다.

 

어윤중(魚允中) : 1848년~1896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청나라·러시아 등과 국경을 정하는 데 노력했다.

1894년 김홍집 내각의 탁지부대신이 되어 온건개화파로서 활약하였다.

 

홍영식(洪英植) : 1855년~1884년

1881년신사유람단의 일행으로 김옥균, 박정양 등과 함께 일본을 시찰했다.

1882년에는 김옥균·박영효·서광범과 함께 국가의 개혁방안을 토론하였다.

1883년 미국의 사신에 대한 답변으로 보빙사가 파견될때 민영익, 서재필 등과 함께 미국에 파견되었다.

1884년 3월 27일 우정총국을 창설하게 되었고, 우정국총판에 임명되었으며,

1884년 개화파 주도로 갑신정변이 단행되었으나 청나라의 주둔으로 실패하였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1884년 11월 1일 부친 홍순목과 형 홍만식은 모든 관직에서 삭탈되었다. 11월 1일 부친 홍순목의 명령에 의해 일가 20여명은 독약을 받고 집단 자살하고,

그도 마지막으로 자택 대들보에 목을 매어 자결로 생을 마감하였다.

 

김옥균(金玉均) : 1851년 1월 23일 ~ 1894년 3월 28일

1881년신사유람단의 일행으로 박정양, 홍영식등과 함께 일본을 시찰했고,

일본의 힘을 빌려 국가제도의 개혁을 꾀할 결심을 굳혔다.

1882년 수신사 박영효 일행의 고문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과 함께 국가의 개혁방안을 토론하였다.

1883년 김옥균은 고종을 설득하여 서재필과 그의 동생 서재창을 비롯한 17명의 청년들을

일본으로 보내 근대식 군사기술을 배워오도록 하였다.

1884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군인 양성을 위한 300만 원의 차관을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을 주도하였으며

갑신정변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삼일천하로 끝나자 일본으로 망명했고,

김옥균은 10년간 일본 각지를 방랑한 후

1894년 3월 28일 본국 정부에서 보낸 홍종우에게 권총으로 살해되었다

2008.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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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행(1848년 - 1933년)

자선 사업을 많이 한 조선 시대의 여성 사업가이다.

1908년에는 대동강을 가로지르는 백선교 공사에 기부했다.

1922년에는 평양에 3층 규모의 공공 회관을 지었다.

1923년에는 광선 학교에 땅을 기부했다.

1924년에는 창덕 학교에 땅을 기부했다.

1925년에는 그녀는 자기의 전재산을 자선 단체에 기부했다

 

허난설헌(1563년 - 1589년)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이다.

허난설헌의 재능을 알아본 허균의 배려로 글을 배우게 되었다.

허난설헌은 사회의 불공평을 비평하는 사회비평, 도교적인 가치관등 다양한 가치관을 시로 표현했다.

아버지가 병에 걸려 죽었으며,

오빠가 방랑하다 금강산 근방에서 죽고

어머니가 전라도 진산에서 여행하다가 소화불량으로 죽었으며

아들과 딸을 일찍 잃는 등 불행한 일도 많이 겪었다.

 

만덕(?~?)

신라 진흥왕 때의 무용가이다.

가야의 음악가 "우륵"이 신라에 항복하자 진흥왕은 "만덕", "계고", "법지"에게 명령하여

우륵으로부터 음악을 배우게 하였는데, 만덕은 무용을 배웠다.

우륵으로부터 음악을 배운 뒤 진흥왕 앞에서 보여주자

진흥왕은 기뻐하여 후한 상을 주었으며, 이 음악은 후에 신라의 궁중음악인 "대악"이 되었다

 

곽낙원(1859년~1940년)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김구의 어머니로, 1922년에 임시 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아들을 따라가 뒷바라지하였다.

 

김마리아(1891년 ~ 1944년)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도쿄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2·8 독립 선언이 일어나자 황애덕 등과 함께 적극 참가했다.

곧이어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미리 귀국하여 황해도 지역의 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었다.

1920년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상하이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에 참가했다.

1933년 귀국하여 교육활동에 힘쓰다가 사망하였다.

 

나예석 자료 없음

나혜석(1896년 ~ 1948년 12월 10일)

한국화가이다.

일제 강점기의 유명한 신여성이었으며,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꼽힌다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일본유학을 하고

1918년 귀국하여 교사로 근무하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매년 수상을 거듭하여 실력을 인정 받기도 하였다.

나혜석은 여성들을 위해서 야학을 열었고,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에도 도움을 주었다.

고대수(?~?)

조선 말기의 궁녀이다.

힘이 남자보다 강하여 ≪수호지≫에 나오는 여장부의 이름을 따서 고대수라는 별명을 가졌다.

일찍부터 개화당에 포섭되어 갑신정변 수행과정에서 도움을 주었다.

갑신정변 당일 궁궐문을 열어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을 맞아들이고

궁궐에 화약을 터뜨려 불을 붙임으로써 난이 일어난 것처럼 꾸미는 일을 맡았다.

 

양만춘(?~?)

고구려 보장왕안시성)의 성주이다.

645년 당나라 100만 대군을 상대로 임기응변의 전법으로 끝까지 성을 지켜내며 버텼다.

이 전투에서 당나라의 황제는 양만춘의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을 잃었다고 한다.

길재(1353년 ~ 1419년)

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이다.

"이색"과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의 "3"으로 불린다.

고려 말 고려가 쇠망할 기운을 보이자 사임하고 낙향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벼슬을 받지 않고 숨어 지냈다

 

지눌(1158년 ∼ 1210년)

고려 중기의 승려이다.

"선종"의 "중흥조"이다.

성은 정씨. 황해도 서흥 출신이다.

아버지는 "정광우"이고, 어머니는 개흥군 출신의 "조씨"이다

 

김소월(1902년  ~ 1934년 12월 24일)

한국시인이다.

서구 문학이 범람하던 시대에 민족 고유의 정서에 기반을 둔 시를 쓴 민족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초기에는 민요조의 여성적이고 서정적인 목소리의 시작활동을 하였으나

후기작(〈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등)에서는

민족적 현실의 각성을 통해 남성적이며 참여적인 목소리로 기울었다

 

2008.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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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1545~1598)

1545년 서울 건천동 에서 태어나 충남 아산으로 이사 하여 살았다.


1577년 32세가 되어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권지훈련원봉사로 첫 관직에 올랐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과 발포수군만호가 되었다.


1586년 사복시 주부를 거쳐 조산보만호가 되었다. 이때 호인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그 뒤 전라도 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이 되었다.


1589년 선전관과 정읍현감 등을 거쳤다.


1591년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승진한 뒤,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 척을 격파하였다. 이어 사천포해전 에서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격파하였다. 또 당포해전과 1차 당항포해전에서 각각 적선 20척과 26척을 격파하는 등 전공을 세워 자헌대부로 품계가 올라갔다.


1592년 7월 한산도대첩에서는 적선 70척을 대파하는 공을 세워 정헌대부에 올랐다. 또 안골포에서 가토 요시아키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 9월 일본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진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무찔렀다.


1597년 일본은 이중간첩으로 하여금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생포하도록 하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는 계략을 꾸몄다. 이를 사실로 믿은 조정의 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의 계략임을 간파하여 출동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도원수 권율의 밑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을 했다.


1597년 7월 원균이 칠천해전에서 일본군에 참패하고 전사하였다. 이에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그는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3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명량대첩). 이 승리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1598년 2월 고금도로 진영을 옮긴 뒤, 11월에 명나라 제독 진린과 연합하여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노량해전).








김유신장군


595년 태수 김서현의 장남으로 태어남.


609년  화랑이 되어 용화 향도를 거느림.


629년 낭비성 싸움에서 큰 승리를 거둠.


632년 진평왕이 죽고 선덕 여왕이 왕위에 오름.


642년 압량주 군수가 됨


644년 상장군이 되어 백제 일곱 성을 빼앗음.


647년 선덕여왕이 죽고 진덕여왕이 왕위에 오름.


649년 도살성으로 쳐들어온 백제군을 무찌름.


654년 진덕 여왕이 죽자 김춘추를 왕위에 추대함.


655년 고구려를 침략하고, 백제 도비성을 공격함.


660년 5만 대군을 이끌고 당나라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정벌함.


661년 태종 무열왕이 죽고 문무왕이 왕위에 오름.


668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정벌하여 삼국 통일을 이룸.


671년 태대각간이 되어 당나라군을 내쫓음.


673년 79세 세상을 떠남.









 




장보고는 810년에 당나라에 건너가 생활하다가,


817년 서주 무령군에 복무해 장교가 되었다.

그 무렵 당나라나 신라 모두  도적이 많아 졌고 바다에서도 해적이 신라 해안에 출몰해 많은 피해를 입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보고는 해적들이 신라인을 잡아가는 것에 대해 분노했고,


828년에 신라로 귀국한 그는 장보고는 왕에게 완도에 해군기지를 건설해 무역로를 보호하고 해적을 근절시킬 것을 주청하였다.

장보고는 왕의 승인을 받아 청해진을 건설하였다.

청해진을 건설한 뒤, 곧 해적을 소탕해 동중국해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했는데,

이 해상권을 토대로 당·신라·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을 주도하였다.

장보고는 무역 활동과 함께 외교 교섭까지 시도하였다.


836년 수도에서 왕위계승분쟁에 패배한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피난 와서 그에게 의탁하였다


838년 수도에서 다시 왕위를 둘러싼 분쟁이 터져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였다.


839년 김우징 일파를 강력히 지원하여 김우징이 왕으로 즉위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신무왕은 그를 감의군사로 삼았다


845년 문성왕이 딸을 차비로 보내려 했으나 신하들이 반대하였다.

그 뒤 청해진과 중앙정부 사이에는 대립과 반목이 심화되었다.


846년 중앙정부에서 보낸 자객에 암살당했다.
















강감찬

948년 금주에서 태어났다


983년 과거에 갑과 장원으로 급제한 뒤 예부시랑이 되었다.


1010년 거란의 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내세워 서경을 침공하자 전략상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현종은 나주로 피난해 사직을 보호케 하였다.


1011년 국자좨주가 되고, 한림학사·승지·좌산기상시. 중추원사·이부상서 등을 지냈다.


1018년에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였다. 그는 총사령관격인 상원수대장군이 되어 부원수 강민첨 등과 함께 강감찬은 개경 근방까지 후퇴하여 적을 유인하여

되돌아가려는 거란군을 귀주에서 크게 무찔렀다.


1020년 벼슬에서 물러났다.


1030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에 올랐다.

 

1031년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퇴계 이황


1501년경상도 경북 안동, 도산에서 아버지 이식과 어머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남


1513년 12살 때 작은아버지 '이우'로부터 학문을 배움.  이우는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을 지냈을 뿐 아니라 학문이 깊은 이름난 학자였다.


1520년 영주 허씨와 결혼


1524년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았으며, 


1528년 진사시에 합격


1534년 임금이 참석하는 전시 시험에서 장원으로 합격함


1539년에는 수찬으로 지제교, 검토관을 겸직하였으며,  첫 부인이 사망한다.


1543년 충청도 암행어사를 다녀와 대사성에 올랐으며, 둘째 부인을 맞음


1545년 을사사화때, 이기의 모함에 의해 파직되었으나 사실이 아님을 알고 복직되어 사복시정이 됨


1548년 단양과 풍기군수를 지냈고, 1552년 대사성에 오름


1556년 부제학을 거쳐 공조 판서 및 예조 판서를 두루 거침


1570년 12월 8일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남












황희


1363년 송도에서 아버지 황군서와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남


1389년 27세, 문과 시험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글을 가르치는 학관이 됨


1392년 30세때, 고려가 망하자 스승 이색을 찾아갔으나, 스승이 '백성들을 위해 벼슬하라.'는 말을 듣고 실망하여 송악산 두문동으로 들어감


1394년 32세때, 태조의 간청으로 경명행수에 뽑혀 세자를 가르침


1400년(47세), 지신시가 된 후, 형조, 예조, 병조, 이조, 호조 판서를 지냄


1416년 (54세) 이조 판서로 세자 양녕대군 폐출에 반대하다 공조 판서로 좌천


1418년 세자인 양녕대군이 폐출되고 세종이 세자로 책봉되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다 서인이 되어 교하 및 남원으로 유배


1422년 (60세) 세종 4년 귀양에서 풀려나 예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됨


1427년에 좌의정이 되었으며,


1430년 (68세), 태석균의 감형을 사헌부에 부탁한 일로 파직


1431년 관직이 복직되어 영의정이 되었으며, 1449년 관직을 물러날 때까지 18년간 영의정을 지냄,


1452년 90세로 세상을 떠남



2008.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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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사진
youn****
고수
사회, 도덕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김홍집(金弘集) : 1842년~1896년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정치가이다.

1880년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와서,

서양 근대의 기술적 성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일본의 문물제도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신사유람단의 일본 파견을 상주하게 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정권을 도맡아 여러가지 개혁을 진행햇다.

2008.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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