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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우리나라 위대한 여성(나라사랑)
비공개 조회수 2,246 작성일2015.05.15

나라사랑을 가장 잘 실천한 인물을 골라주세요.

 

김마리아, 백선행, 곽낙원, 고대수, 남지현, 권기옥, 나혜석, 윤희순, 최용신 (그 외에도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면 적어주세요)

 

두세 사람 골라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D 

골라주신 인물의 일대기와 업적을 알려주시고,

그 인물을 고른 이유도 자세히 써주세요.

 

내공 30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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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탐섹대
지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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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행
그 엣날에 서프라이즈 나온 백과부 아니예요?
곽낙원 김구 엄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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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순은 여성 최초 비행사이자 독립운동가죠 그덕에 독립하는데에 큰 영향을 주신분이죠 (1901-1988)
곽낙원은 김구 엄마입니다 비록 18살에 낳지만 김구를 훌룡하게 키워서 김구가 독립운동가 쪽으로 가는 계기였다
(1859-1939)

2015.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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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신

(우리나라의 위대한 여성들)

 

1.김만덕 (1739~1812) 
 
본관은 김해김씨이며 아버지 김응열과 어머니 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양인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외삼촌 집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다가 퇴기에게 맡겨져 기생 수업을 시작하였다. 제주도 관부의 기생(관기)이었으나 양인으로 풀려난 후 객주를 꾸려 큰 재산을 모았다.


1795년 제주도에 몰아친 폭풍과 폭우로 인해 굶어죽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재산의 대부분을 구휼미로 내놓아 제주도 백성들을 기아에서 구하였다. 구휼 선행이 중앙에 알려져 당시 임금이었던 정조를 가까이 에서 알현하였으며 왕에게 청한 소원대로 제주도를 벗어나 금강산을 유람하기도 하였다.  채제공, 정약용, 조수삼, 김정희 등의 명사와 시인들이 만덕의 선행을 기리는 많은 글과 시를 남겼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으며 죽기 직전 가난한 이들에게 남은 재산을 골고루 나누어 주고 양아들에게는 살아갈 정도의 적은 재산만을 남겼다고 전한다. 1812년 10월 22일 74세를 일기로 제주도에서 사망하였다. 현재 '만덕 기념사업회'와 '만덕상'이 제정되어 그녀의 자선을 기리고 있다.

 

2.논개 ( ? ~ 1593)


성은 주씨이고, 본관은 신안(중국)이다. 전북 장수 임내면 주촌마을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데 출생일에 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논개에 대한 기록은 조선 광해군 때인 1621년 유몽인이 저술한《어우야담》에 전하는데 "진주의 관기이며 왜장을 안고 순국했다"는 간단한 기록만 남아 전한다. 그때문에 논개는 기생이었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원래 양반가의 딸이었으나 아버지 주달문이 사망하고 집안에 어려움이 겹쳐 가산을 탕진하자 장수현감이었던 최경회의 후처가 되었다고 전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5월 4일에 이미 서울을 빼앗기고 전라도 지역에서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자 최경회가 의병장으로 나서 싸우게 되었다. 경상도에서 진주성만이 남아 왜적과 싸우고 있었는데 최경회는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을 지원하여  승리를 거두었다(제1차 진주성 싸움). 1593년 최경회는 경상우병사로 임명되어 싸웠으나 수많은 군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하고 28일만에 진주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최경회는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제2차 진주성 싸움).


1593년 7월 일본군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된다.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계획대로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가락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꾀어 벽류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었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이라 불렀으며, 사당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1846년(헌종 12) 당시의 현감 정주석이 장수군 장수면 장수리에 논개가 자라난 고장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논개생향비를 건립하였다. 그가 비문을 짓고 그의 아들이 글씨를 썼다. 1956년 '논개사당'을 건립할 때 땅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현 위치에 옮겨놓았다. 비문에는 "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라고 씌어 있다. 장수군에서는 매년 9월 9일에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논개제전을 열고 있다.
 

 

3.황진이 (?~?)


일명 진랑. 기명 명월. 개성 출생. 중종 때 진사의 서녀로 태어났으나, 사서삼경을 읽고 시 ·서 ·음률에 뛰어났으며,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다. 15세 무렵에 동네 총각이 자기를 연모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자 기계에 투신, 문인( ·석유들과 교유하며 탁월한 시재와 용모로 그들을 매혹시켰다. 당시 10년 동안 수도에 정진하여 생불이라 불리던 천마산 지족암의 지족선사를 유혹하여 파계시켰고,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 사제관계를 맺었다.


당대의 일류 명사들과 정을 나누고 벽계수와 깊은 애정을 나누며 난숙한 시작을 통하여 독특한 애정관을 표현했다. ‘동지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둘에 내어’는 그의 가장 대표적 시조이다.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로 불렸다. 작품으로 《만월대 회고시》《박연폭포시》《봉별소양곡시》《영초월시》 등이 있다.

 

4.소서노 (?~?)


백제의 건국설화에 나오는 인물로서,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이다. 백제의 건국설화는 여러 가지가 전하는데, 그중 널리 알려진 온조설화에는 소서노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해 졸본부여에 이르자 아들 없이 딸만 셋을 둔 졸본부여의 왕이 주몽을 둘째 사위로 삼고 왕위를 잇게 하였으며, 부부는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낳아 길렀다는 이야기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비류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꾸민 비류설화에는 '백제의 시조는 비류왕으로서, 그의 아버지인 우태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며, 어머니인 소서노는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이다. 소서노가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으니, 맏아들이 비류이고 둘째 아들이 온조이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과부가 되어 졸본에서 살다가 주몽과 재혼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리고 뒤이어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서 낳은 아들인 유유가 오자 그를 세워 태자로 삼고 왕위를 잇게 하였다. 이에 비류가 아우인 온조에게 이르기를 "처음에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집안의 재산을 기울여가며 도와 방업을 이루니, 그 노고가 많았다. 그런데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국가가 유유의 소유로 되었으니 우리가 이곳에서는 한낫 혹과 같아서 답답할 뿐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국도를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드디어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살았다'고 해서 주몽이 나라를 세울 때 소서노가 경제적으로 많이 도왔다고 적혀 있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온조왕 13년에 '왕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에 소서노가 아들들과 함께 졸본부여 곧 고구려를 떠나 한강유역으로 내려왔으며, 백제를 세운지 13년째 되던 해에 죽었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5.고대수 (? ~ 1884)


본명은 전하지 않는다. 궁녀로 있으면서 왕후의 사랑을 받아 궁중의 기밀에 쉽게 접할 수 있었다. 힘이 일반 장정 5,6인을 당해낼 정도로 장사여서 《수호지》에 나오는 여장부 고대수의 이름과 같은 별명을 얻었다.


일찍이 개화당에 포섭되어 수시로 궁중의 비밀과 동태를 알려주었으며,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일어난 날에도 궁궐문을 열어 개화파의 군사들이 진입하도록 도왔다. 뿐만 아니라 궁궐 내의 통명전에 불을 질러 혼란을 부채질함으로써 개화파가 궁궐을 쉽게 장악하도록 하였다. 정변이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가자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하여 죽었다고 한다.

 

6.곽낙원 (1859.2.26 ~ 1939.4.26)


1859년 2월 26일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하였다. 김순영의 부인이며 독립운동가인 김구의 어머니이다. 《천자문》을 가르치고 《동몽선습》 《사서삼경》 등을 읽히는 등 아들 김구의 교육에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17세 때 남편이 반신불수가 되자, 안악 · 신천 · 장연 · 해주 등지로 의사를 찾아 안정을 되찾게 하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충격을 받고 봉기한 김구가 치하포에서 일본군 중위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인천형무소 등지로 전전할 때, 매일같이 면회가서 아들을 격려하였다. 김구가 탈옥하자 남편과 같이 체포되어 인천형무소에 3개월간 투옥되었던 일도 있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피탈되고, 또한 남편의 죽음으로 집안형편이 어렵게 되자 삯바느질과 남의 집 가정부 노릇을 하며 김구를 키웠다. 아들 내외가 모친의 환갑잔치를 베풀려 하였으나 시국의 어려움을 들어 거절하였다. 1922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아들을 따라 옮겼다가 1926년 귀국하였다. 1934년 다시 중국으로 가서 김구를 격려하고 아들이 마련하는 생일비용은 전액 무기구입자금으로 돌렸으며 찬거리를 줄여 군자금으로 충당하였다. 82세로 충칭에서 생을 마쳤다.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7.백선행 (1848 ~ 1933)


본관 수원. 수원 출생. 16세에 남편과 사별한 후 평생 수절하며 근검절약으로 큰 재산을 모았다. 1908년(융희 2) 회갑 기념으로 대동군 고평면 송산리에 백선교를 놓았으며 1922년 평양에 3층 공회당을 건립하였다. 1923년 광성(光成)보통학교에, 이듬해에는 창덕보통학교에 각각 300여 섬지기 농지를 희사하였다.


미국 선교사 S.A.모펫이 설립한 학교에 부동산을 기부하여 재단법인을 만들었으며, 평양 숭현학교에도 2만 6000평의 토지를 기부하였다. 1925년에는 전재산을 구빈을 위한 사회단체에 내놓았으며, 당시 총독부에서 주는 표창을 거절하였다.

 

8.신사임당 (1504~1551)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는 조선중기 여류 서화가. 시문과 그림에 뛰어나 여러 편의 한시 작품이 전해진다. 화풍은 여성 특유의 섬세 정묘함을 더하여 한국 제일의 여류화가라는 평을 듣는다.

 
본관은 평산이고, 호는 사임당·시임당·임사재이다.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으며 어려서부터 경문을 익히고 문장·침공·자수에 능했으며, 특히 시문(詩文)과 그림에 뛰어나 여러 편의 한시 작품이 전해진다. 또한 안견의 영향을 받은 화풍은 여성 특유의 섬세 정묘함을 더하여 한국 제일의 여류화가라는 평을 듣는다. 산수·포도·풀·벌레 등을 잘 그렸다.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었다.

 

9.유관순(1902~1920)

 

유관순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학교 고등과 1년생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1일 아오내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격렬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헌병에 의해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 당하고 유관순은 주모자로 잡혀 고된고문을 받았지만 끝내 굴하지 않았다.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으나 이에 불복,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일제의 한국침략을 규탄, 항의하고, 일제법률에 의하여 일제법관에게 재판받음이 부당함을 역설하다가 법정모욕죄까지 가산되어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에도 틈만 있으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고, 그때마다 형무관에게 끌려가 모진 악형을 받았다.  불굴의 투혼으로 계속 옥중항쟁을 전개하다가 1920년 17세의 나이로 끝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10.허난설헌 (1563~1589)
 

본관 양천. 호 난설헌. 별호 경번. 본명 초희. 명종 18년(1563년) 강릉에서 출생하였다.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의 누나이다.


이달에게 시를 배워 8세 때 이미 시를 지었으며 천재적인 시재를 발휘하였다. 1577년(선조 10) 15세의 나이에 김성립과 결혼하였으나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연이어 딸과 아들을 모두 잃고 동생 허균이 귀양을 가는 등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작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여인의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한 시세계를 이룩하였다.


허난설헌이 죽은 후 동생 허균이 작품 일부를 명나라 시인 주지번에게 주어 중국에서 시집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 분다이야 지로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 애송되었다. 선조 22년(1589년) 27세로 요절하였으며 유고집에 《난설헌집》이 있다.


작품으로는 시에 《유선시》 《빈녀음》 《곡자》 《망선요》 《동선요》 《견흥》 등 총 142수가 있고, 가사에 《원부사》 《봉선화가》 등이 있다.  

 

2015.05.16.

  • 출처

    lt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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