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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화차와 수원화성에 대하여....
did5**** 조회수 2,540 작성일2009.11.22

제가 숙제로

 

수원화성, 화차 를 조사 해야 하는데요

 

먼저 수원화성은

언제 지어 젔고, 왜 지어 졌으며, 언제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는지

 

그리고 화차는

무슨용도로 쓰이고, 어떤 왕때 만들어 졌고, 사용법이 무엇인지

 

이거 말고도 수원화성과 화차에 대한건 모두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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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火車] 조선시대의 병기().

제작국가조선
제작연도1409년(태종 9) 1월
사용국가조선

 

1409년(태종 9) 1월 군기소감() 이도()와 군기감승() 최해산() 등에 의하여 제작 ·시험되어 성공을 거두었다. 이 화차는 ‘철령전() 수십 개를 장탄한 동통을 소차()에 싣고 달리면서 화약을 사용하여 발사’하는 일종의 장갑차라고 《태종실록()》에 전하고 있다. 태종 때 화차는 실전()에 사용되지 않았으며, 문종()에 의하여 발명된 화차를 임진왜란 중인 1592년(선조 25) 변이중()이 개량하여 실전에서 활용하였다. 1451년(문종 1) 2월 문종의 창안에 의하여 임영대군()이 만든 화차를 시험하였는데, 그것은 차 위에 가자()를 만들어 그 안에 중신기전() 100개 또는 사전총통() 50개를 설치하고 심지에 불을 질러 차례로 발사하게 한 것으로 평탄한 곳에서는 2명이 쉽게 끌 수 있었다.

 

고려말기에 최무선이라는 화약제조법을배운사람이 만든것인데 화차는 전쟁때에 대나무앞쪽에 쇠로된 화살촉을 단다음뒷부분에 원통형약통을꽂아 약통에 불이 붙어 폭발할때의 힘으로 화살촉을 날려 보내고전쟁때 아주유용하게 쓰엿습니다그리고 가볍게 만들어 두명이서 들기가 쉬웠습니다.

참고로 망암(望庵) 변이중 선생은 1546년 장성읍 장안리에서 승지벼슬을 증적 받은 변 택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특히 수리에 밝아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15세때 서경(書經)을 배우다가 하늘과 땅의 이치를 가르치는 대목에 이르러 그의 스승이, "너는 아직 이치를 알기 어렵다." 하고 설명해 주지 않은 것을, 선생이 스스로 생각하고 홀로 연구하여 깨우쳤다는 기록만 보아도 어려서부터 과학에 소질이 뛰어났고 탐구심이 강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선생은 과학자일 뿐 아니라 성리학(性理學)에도 뛰어나 유명한 율곡 선생을 찾아 배움을 청하였을 때. 몇마디 말을 주고 받은 율곡 선생은 극구 칭찬하면서, " 요즈음, 망암을 따를 만한 선비가 없겠다."고까지 말할 정도 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생은 화차 300대를 스스로 만들었다. 화차란 오늘날의 탱크와 비슷한 것인테, 구멍을 사방으로 40개를 내어 이 구멍으로 화포를 쏠수 있도록 장치하였다.

이 화차는 새롭고 위력있는 병기로써 이 장손이 만든 비격진천뢰와 더불어 왜적을 쳐부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선생이 만든 화차 300대 중 40대를 권율 장군에게 보냈고, 이 화차를 이용하여 저 유명한 행주 싸움에서 물밀 듯이 몰려드는 왜적을 통쾌하게 쳐부순 것이다. 이와같이 선생은 별로 넉넉하지도 못한 재산을 모두 바쳐서 평소에 익혀오던 병서의 지식으로 연구와 실험을 거듭하여 화차를 만들어냈으며, 언제나 나라의 위기를 미리 방비하기 위하여 연구에 골몰하던 선생이었기에 어려움을 무릅쓰고 화차와 같은 훌륭한 병기를 만들 수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선생이 지은 "망암집"에 화차를 그림으로 그려 설명해 놓은 "화차도설"을 비롯하여 18가지의 병기 만드는 법을 그림과 함께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첫 손에 꼽히는 국방 과학의 기록이며 참으로 귀중한 조상의 유산이 되고 있다.

선생은 화차 발명에 이어 전라도 소모사(의병을 모집하는 직책)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였고, 조도사가 되어 군량미 30만 섬을 조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천에 주둔해 있을 때, 묘책을 써서 왜적을 물리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런데, 이토록 애국하는 선생을 모함하고 비웃는 어리석은 신하들도 없지 않았다. 선생이 권율 도원수에게 올린 편지 한귀절에, "저로서는 분에 넘치는 소임을 맡아 제 역량을 생각하지 않고 전차며 총통등을 만들어 비웃고 헐뜯음을 받게 된 것은 생각할수록 두렵습니다."라고 하였으니, 그 당시 조정의 일부 신하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어리석은 짓을 하였음을 잘 알수 있다.

그러나, 선생이 돌아가시자 조정에서는 선생의 공을 다시 인정하여 벼슬을 내렸으며, 한편 호남 지방의 선비들이 봉암 서원을 세워 선생을 모셨다. 이는 훌륭한 일을 한 분은 언젠가는 빛을 보게 되는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도 선생은 많은 일을 하였다.

경상도 함안 군수를 그만두고 61세되던 겨울에 고향인 장성 장안 땅에 내려온 선생은 여러 벗들과 학문을 토론하고 후배들을 길렀으며, 뜻한 바있어 이퇴계, 이율곡 등의 향약을 본받아 향헌(鄕憲)을 만들어 고을 사람들에게 지키도록 하여 이 고장의 풍속이 크게 달라졌다. 선생의 화차를 이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던 행주산성(경기도 고양군에 있음)은 지금 성역화(聖域化)되어 기념관이 세워지고, 선생이 발명한 화차모형을 전시하게 된 것은 참으로 뜻 깊은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수원화성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선왕인 영조의 둘째왕자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되었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의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 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咆)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성곽의 전돌, 건조물의 기와 등이 독특한 방법으로 제작되어 있어 현재의 기술로 이를 재현하기 어려워 보수시 문제점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계속 연구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수원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돌의 교축, 현안·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 (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8세기에 완공된 짧은 역사의 유산이지만 동서양의 군사시설이론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약 6km에 달하는 성벽안에는 4개의 성문이 있으며 모든 건조물이 각기 모양과 디자인이 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사적 제3호로 지정된‘수원화성’은 정조 18년(1794)에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과학기기를 이용하여 성을 쌓아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된 성입니다.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수원화성 세부배치도

 


 

 

화성의 모습

 
 
 
 
 

2009.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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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되었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의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 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실전에 사용했던 전차(戰車)로 수레 위에 발사장치를 부착하여, 이동이 순조롭고 단번에 여러 개의 활 또는 총을 쏠 수 있게 고안된 무기이다.

 조선시대에만 5가지 화차가 있었는데, 첫번째 화차는 1409년(태종 9) 군기감소속 이도(李韜)·최해산(崔海山) 등이 화약무기를 연구하던 끝에 철령전(鐵翎箭) 수십 개를 장탄한 동통을 수레에 장치하여 달리면서 발사하였다.

  두번째 화차는 1451년(문종 1) 문종이 손수 창안한 문종화차이다.

우리에게 흔히 신기전으로 알려진 무기가 바로 문종시대 때 고안된 화차이다. 이는 수레 위에 틀을 만들어 중신기전(中神機箭) 100개와 사전총통 50개를 설치하여 심지에 불을 붙이며 차례로 발사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공들여 만든 신기전및 총통무기는 과연 실전에 사용된 일이 있었으며 그 위력은 어느정도였을까?  재차 언급하자면 총통무기는 지자총통, 천자총통처럼 함포화기까지 포함하는 화포무기의 총칭이다.  임진왜란때 우리나라는 오직 해전에서만은 화력의 우위를 보였는데,  그러한 우위가 총통무기의 우수성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입증된 사실이다.

 반면 신기전은 개인화기로서는 별다른 위력을 보여주지 못하였지만, 신기전이 위력은 역시 화차에 장착하였을 때야 다연장 로켓포로서의 위력을 발휘하였다.  이 화차는 임란당시 1차적으로 평양성등에 배치되어 일본군의 북진을 상당기간 저지하는데 활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박진(朴晉)장군이 경주 탈환시 사용하여 큰 효과를 거두었으며, 권율(權慄)장군이 행주산성 전투에도 사용하여 그 위력을 보여 주었다.

 

 

 

 

 

출처...수원화성 - unesco 외사이트검색

 

2009.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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