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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조선시대 3대 기생이라 함은 누구누구를 말함인가요?
jwon**** 조회수 42,305 작성일2011.10.26

 제가 알고 있기로는 황진이가 단연 으뜸이요, 그 다음이 부안기생 매창 계랑이요, 그 다음이 함경도 기생 홍랑으로 알고 있는데...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운초 김부용이 3대 여류시인이라 되어 있네요..

김부용도 기생이라는데...

 

조선조 3대 기생은 누구누구인가요?

아! 관점은 장구잘치고 노래 잘하는 기생말고, 시를 잘 짓는 쪽에서 봤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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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머프할배학당
태양신
한국사 17위, 흉부외과 12위, 정부기관 8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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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님, 우선 첫번째로 황진이로 조선시대의 시인 겸 명기입니다.

시와 서예 및 음률에 뛰어났으며,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습니다.

 

황진이는 지금까지 어느 자료에도 태어난 시기와 죽은 날이 기록이 없으며, 어느 황씨인지도 역사적 자료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녀의 성이 황씨고 본명이 진(眞)이라고 알려졌고, 일명 진랑(眞娘)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기명(기생의 이름)은 명월(明月)이며, 개성 출신이라고 합니다.

황진이에 대하여 살펴볼 수 있는 직접적인 사료는 없고 간접자료인 야사만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 자료들은 황진이에 대한 일화가 과장되어 있거나 미화되어 실제적인 면이 어디까지인지 확연히 구분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녀의 생존 연대는 불확실한데 여러 가지 자료에 의해서 유추한 기록은 대략 연산군 말년인 1502년경에 태어나서, 중종이 17년경인 1522년쯤에 한창 꽃다운 나이에 명성을 날리고 1540년(중종 35)경 40세 미만의 젊은 나이에 죽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출생에 대해서는 황진사의 서녀로 태어났다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라고도 하는데 서녀설이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그녀는 사서삼경을 읽고 시도 잘짓고 서예에도 능하며, 특히 음률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답니다.

15세 무렵 동네 총각이 그녀를 연모하다 상사병으로 죽자, 기생이 되어 문인과 유학자들과 교유하며 탁월한 시서 및 가창과 출중한 용모로 그들을 매혹시켰다고 합니다.

당시 10년 동안 수도하여 생불(살아있는 부처)이라 불리던 천마산의 지족선사를 유혹하여 파계시켜서 유명했답니다.

그러나 대학자였던 서경덕을 꾀려다 실패한 뒤 사제관계를 맺었다는 등 많은 일화가 전합니다.

당대의 일류 명사들과 정을 나누고 벽계수와 깊은 애정을 나누며 난숙한 시작을 통하여 독특한 애정관을 표현했습니다.

 

황진이는 기생 신분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제한된 신분상의 어려움을 오히려 문학적 소질로 발달시킴으로써 자신만의 문학 세계를 펼쳐 독자성을 인정받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세련되고 절제된 감정의 표현을 이룬 한시 작품이나 인간의 정서와 애정을 고운 우리말로 표현한 시조에서 보여준 다양한 수사법과 언어의 적절성은 자신의 정서나 감정을 자신의 의지로 승화시켜 서정적으로 표현한 최고의여성 작가라 할 수 있습니다.

기발한 이미지와 세련된 언어구사 등으로 조선시대 시조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그녀의 시조는 '청산리 벽계수야'와 '동짓달 기나긴 밤을' 및 '산은 옛 산이로되' 등 6수가 '청구영언' 등에 전하여 집니다.

그래서 황진이는 서경덕과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로 불리고 있습니다.

 

 

두번째 매창(1573~1610)은 조선시대 여류시인이며 가사와 한시 및 시조와 가무, 그리고 현금에 이르기까지 다재 다능한 예술인이었습니다.
매창은 1573년(선조 6)에서 1610년(광해군 2)에 죽은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이며 기생입니다. 
본명은 향금, 자는 천향, 매창은 호라고 합니다.
계유년에 태어났으므로 계생이라 불렀다 하며, 계랑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아전 이탕종의 딸로서,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나 당대의 문사인 유희경과 허균 및 이귀 등과 교유가 깊었다고 합니다.
부안의 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습니다.
부안에 있는 묘에 세운 비석은 1655년(효종 6) 부풍시사가 세운 것인데, 1513년(중종 8)에 나서 1550년에 죽은 것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문집 매창집 발문에 기록된 생몰연대가 정확한 것으로, 그는 37세에 요절하였습니다.
유희경의 시에 계랑에게 주는 시가 10여편 있으며, 가곡원류 에 실린 "이화우(梨花雨) 흣날닐제 울며 쟙이고 이별한 님"으로 시작되는 계생의 시조는 유희경을 생각하며 지은 것이라는 주가 덧붙어 있습니다.
허균의 성소부부고에도 계생과 시를 주고받은 이야기가 전하며, 계생의 죽음을 전해듣고 애도하는 시와 함께 계생의 사람됨에 대하여 간단한 기록을 덧붙였습니다.
계생의 시문의 특징은 가늘고 약한 선으로 자신의 숙명을 그대로 읊고 있는 것이며, 자유자재로 시어를 구사하는 데서 그의 우수한 시재를 엿볼 수 있습니다.
여성적 정서를 읊은 추사(秋思)와 춘원(春怨) 및 견회(遣懷)와 증취객(贈醉客), 부안회고(扶安懷古), 자한(自恨) 등이 유명하며, 가무와 현금에도 능한 다재다능한 예술인이었습니다.
부안의 묘에 비석이 전하며, 1974년 그 고장 서림공원에 시비를 세웠습니다.
 
질문자님, 그외에 김부용과 산홍이 있는데 김부용을 먼저 3대 기생에 넣는 분도 있고 산홍을 넣는 분도 있으니 각자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요.
 

운초 김부용은 조선시대의 여류 문인으로 호는 운초(雲楚)입니다.

정조 때 평남 성천에서 이름 높은 기생이었으나, 뒤에 김이양의 소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김부용을 높게 안봅니다.

 

시를 잘 지어 유고집에 운초집(雲楚集)이 있고, 일제 때 김호신이 편찬한 부용집(芙蓉集)이 전하며, 안서 김억이 가지고 있던 사본으로 출판한 것이 조선역대여류문집(朝鮮歷代女流文集)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88787

 

산홍은 진주 교방 소속의 기녀이었습니다.

을사오적의 한사람인 이지용이 1906년(광무 10)에 진주에 와서 산홍을 보고 마음을 빼앗겨 천금을 내놓고 첩이 되어달라고 했으나, 산홍이 큰소리로 "세상사람 역적의 첩이 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지용이 노하여 산홍을 때렸다고도 하고 죽였다고도 하는데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http://jinju.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0401198

 

2011.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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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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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입시, 진학, 안드로이드폰, 피부과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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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장연홍, 왕수복 입니다

2011.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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