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첨성대는 왜 도자기 모양일까?
yoon**** 조회수 1,434 작성일2004.10.26
첨성대에 관련된 우리반 친구들의 질문입니다. 숙제니 답변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한 글 미워할꺼야! 그냥 왜 도자기 모양으로 만들었는지만 필요합니다.

꼭 좀 부탁드려요
프로필 사진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2 개 답변
1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scor****
시민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아래의 사이트에 가시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사이트 관리자 분께서 다른 곳에 퍼가는걸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 링크만 시켰습니다.


http://user.chollian.net/%7Eshs0902/korea/chumsungdae.htm

2004.10.26.

  • 채택

    질문자가 채택한 답변입니다.

  • 출처

    지식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2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탈퇴한 사용자 답변
예로부터 하늘의 변화를 하늘의 뜻이거나 하늘의 명을 반영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옛 사람들은 하늘을 주의 깊게 관찰하였다.

하늘을 받드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던 그때 사람들은 제단을 만들어 여러 가지 제천의식을 하였다. 그래서 해와 달 그리고 별을 관측하여 시간과 계절의 흐름을 깨닫고 하늘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는 농경국가로서 비와 바람 등 천기의 변화가 지대한 관심사 중의 하나여서 천문관측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또한 하늘의 변화는 왕실과 백성들의 평안과 직결되는 신의 뜻이라고 여겨 항상 주의 깊게 하늘을 관찰하고 기록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국조 단군(檀君)이 세웠다는 참성단(塹星檀)이 강화도 마니정(摩尼頂)에 남아 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별(星)자가 붙은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이 곳에서 개천절(開天節)에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우리 민족이 옛날부터 천문관측과 농경의 풍요로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증명한다.

별자리의 기본인 28수 중 그 하나인 기수(箕宿)와 연관을 가졌다는 기자조선을 시작으로 한 한국의 고대천문학은 먼저 고구려의 무덤에 그려진 별자리, 신라의 첨성대 등 여러 가지 유물을 남겼다.


삼국시기 우리 선조들은 우주에 대한 관측에 기초하여 우주에 관한 넓은 견해와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천문기상관측을 위한 첨성대도 건설하고 과학적인 석각천문도도 만들었다.

그리하여 오랜 기간 천문관측을 진행하여 여러 천문현상들을 관측하고 기록에 남겼다.


문헌자료에 의하면 고구려에서는 천문관측을 전문으로 하는「일자(日者)」라는 직제가 있었고, 백제에서는「일관(日官)」있어 해와 달, 별들에 대한 관측과 계산, 기록을 담당하였고, 신라에서는 누각박사(漏刻博士)와 천문박사(天文博士)들이 천문관측을 담당 수행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삼국에서 혜성관측과 일식을 관측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혜성(彗星)은 고구려에서는 10회, 백제에서는 15회, 신라에서는 32회나 관측되었고, 일식은 고구려는 기원전 114년부터 559년까지 445년 동안 11회, 신라는 기원전 54년부터 911년까지 965년 동안 29회, 백제는 서기 14년부터 592년까지 606년 동안 26회의 관측을 한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독자적인 천문관측체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첨성대를 평양성에 두었다는 문헌기록들이 남아 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권154 지리지 평양부에는 “성안에는 9개의 사당과 9개의 못이 있는데 9개의 사당은 바로 9가지의 별이 날아들어 간 곳이며 9개의 못 옆에는 첨성대가 있었다”는 내용이 보인다.

또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권51 평양부 고적조에는 “첨성대는 부의 남쪽 3리 되는 곳에 있다.”는 기록에서 고구려 첨성대의 존재를 확인 할 수 있다.


경주의 신라 첨성대(瞻星臺)는 경주시 인왕동(慶州市 仁旺洞)에 자리잡은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대(天文臺)로 알려진 석조건물로, 우리나라의 천문학과 기상학의 높은 수준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국보 제31호인 첨성대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라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16년(서기 647년)에 백제인(百濟人) 아비지(阿非知)가 건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립질의 질 좋은 화강암으로 기단에서부터 높이 9.108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로 쌓아 만든 이 첨성대는 건축학적으로 정교하며 역학적으로 균형이 잘 잡히고 약 1천4백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 첨성대는 천문학적으로 볼 때 당시 천문학부문에서 지배하던 『천원지방』설에 따라 위는 둥근 몸체, 기초에는 네모난 지대석을 놓았고 그 대석 위로 돌을 모두 28개 층을 쌓아 천체의 별자리 28수를 나타내었다.

몸체는 27단이나 맨 위의 정자석을 합치면 28단이고 기단석을 합치면 29단이며, 원주부(圓柱部)에 사용된 석재수(石材數)는 하층부터 27단까지 3백62개다.





의미를 부여하자면 27단은 선덕여왕의 27대, 28단은 기본 별자리 28수, 29단은 한달 29일을 의미하고, 3백62개는 1년의 일수(日數)를 상징한다.

그리고 아래로부터 중간에 있는 네모난 출입구의 밑단까지는 마치 1년을 12개월로 나누듯 12개 단으로 쌓았고 그 위부터 출입구 높이까지는 1년을 4계절로 나누듯 4개 단으로 쌓았다.

또한 대석(臺石)으로부터 높이 약 4.16m되는 곳에 정남(正南)을 향하여 1변의 길이가 약 1m인 네모난 출입구를 통하여 햇빛이 그 안벽에 비추는 그림자의 위치와 그 길이에 따라 시간과 절기를 대략적으로 알 수 있게 하였다.

춘분과 추분에 태양광선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비추게 돼 있고 하지와 동지에는 아랫부분에서 광선이 완전히 사라져 춘하추동의 분점(分点)과 지점(至点)을 측정하는 역할을 한다.

첨성대의 건축학적 연구는 재미교포 건축공학자 이동우 박사가 1972년 이래로 여러 면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첨성대 설계자는 특이한 반곡선적 형태를 창안하여 축조시 구조적 안정성과 심미적이고 기능적인 요소를 고려했음이 찾아진다는 것이다.


즉, 축조시 안정성과 완공뒤의 안정성을 특별히 고려하여, 1단에서 12단까지는 부드럽고 완만한 곡선으로, 13단에서 20단까지는 비스듬한 직선, 21단에서 23단까지는 경사된 직선과 수직 직선을 이어주는 이변곡선(移變曲線), 24단에서 27단까지는 수직직선(垂直直線) 부분으로 돼 있다.

이런 점에서 첨성대의 전체적인 외형은 하나의 완전한 곡선이라기보다는 두 곡선과 두 직선으로 된 완만한 복합곡선으로 이 부드러운 반곡선으로 첨성대는 안정되고 조화된 인상을 갖게 되는 것이다.





또한 첨성대 설계자는 내부정자석의 배치, 원주부의 하부에 채운 흙, 남쪽창의 위치는 창을 중심으로 아래는 밖으로 부풀은 경향을, 위쪽은 오그라드는 경향을 보이는데, 그 중심점에 창을 내어 구조자체의 약체화를 최소화하는 등 주도면밀하게 여러 석축공법을 종합 응용하여 그 안정성에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특히 11단 아래에 차있는 흙은 원형의 변형에 저항하는 내력을 발생시켜 축조시 무너지는 위험성을 낮추었고, 완공뒤에는 무게중심이 아래에 있게 되어 외력과 기초부등침하(基礎不等沈下) 및 지진 등으로 인한 진동 등에 대비할 수 있어 첨성대의 원형을 보존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같은 구조는 세계 건축물에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첨성대 설계자가 뛰어난 건축기법과 과학기술, 그리고 심미안적 사고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경주첨성대는 삼국시대 우리나라 천문학의 높은 발전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전체적 형태와 크기, 석재의 경제적 처리 및 배치, 역학적 안정성, 미학적 곡선미·기능성 등을 두루 갖춘, 그야말로 가장 치밀한 설계를 밑바탕으로 건축된 석조건물로, 뛰어난 예술성과 과학기술이 최상의 조화를 이룬, 우리겨레의 독창적인 과학기술 세계를 보여주는 세계적 유물이다.


윤용현/국립중앙과학관 학예연구사




뽑아주세요~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