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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똑같이 만주 기반이었지만 금,청은 중원정복에 성공했고 고구려는 불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비공개 조회수 1,891 작성일2018.12.29




고구려도 기반이 만주였고 유목민족의 특징이 있던 걸로 압니다.

그런데 혼란스러웠던 중국이 5호16국 , 남북조에서 수,당으로 통합되자마자 고구려는 밀렸고

그에 반해 남송-금-서하 때나 후금(청)처럼 똑같이 만주기반이던 유목민족들이

중원을 정복해 이민왕조를 세운 데에는 무슨 차이가 있어서 인가요?



1. 고구려는 기반이 북쪽 척박한 땅보다는 평양~한반도 안쪽이어서 인가요?

유목민족과는 거리가 있었는지? 그렇다면 고구려 멸망후 고려~조선시기 그 땅은 대부분 고구려 밖의 유목민족들이 차지한 건가요?


2. 당나라때와 명나라말기의 상황이 너무나 달라서 일까요?

명나라는 이자성의 난으로 사실상 이미 멸망당한 후 오삼계가 산해관을 열어준덕에

천운으로 중원을 정복한 걸로 압니다.

국력의 차이가 비교적 넘사벽이었나요?


3. 5호16국 ~ 남북조 시대의 혼란에 왜 고구려는 중원정복의 적극적인 시도가 없었나요?

서진이 멸망한후 여러 이민족들이 침투하고 수십의 한족국가가 세워졌는데

고구려는 그당시에도 아직 주변 소국들을 정벌하지 못 했던 건가요?

북송때 요나라도 아직 혼란스러운 틈을타 화북 일부를 점령했었는데

더 극심했을 때인 5호 16국때 아무 일이 없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4. 고구려 멸망후 약 30년 후에 발해를 세웠는데

교과서에 배우는 대로 순식간에 고구려 유민이 사라지고 피지배층이 말갈이고 지배층이 고구려,말갈 이었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1세기도 지나지 않았는데 고구려 유민들이 싹 다 어디로 사라진 건가요?

아니면 원래 고구려도 소수의 농경민족(고구려인)이 다수의 유목민족들을 지배하던 방식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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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내용이 있는데 사실인지 정확한 내용인지 잘 모르겠네요. 님이 확인해 보시고 참조만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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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장수왕이 붕어하자, 이를 들은 효문제가 흰 색 위모관과 베로 심의를 지어입고 동쪽 성 밖에서 제사를 지내며 애곡(통곡)하였다."
... 王薨 ... 號長壽王 魏孝文聞之 制素委貌布深衣 擧哀於東郊 ...
(... 왕훙 ... 호장수왕 위효문문지 제소위모포심의 거애어동교 ...)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第六 長壽王    491년 12월(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6 장수왕 491년 12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sg_018r_0060_0710



북위(北魏)가 고구려의 속국이었죠. 북위(北魏)의 황태후와 그의 아들인 황제가 고구려 사람입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8874


https://news.joins.com/article/5182936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2/16/2007021600636.html


중국 남쪽은 백제의 영향력 아래 있어서 고구려가 손을 못댓죠.

<‘송서(宋書)’ 97권 백제전>
百濟所治 謂之晋平郡 晋平縣
"백제의 수도는 진평군 진평현이라 일컫는다."

<송서 97권 동이열전 백제(5세기 후반)>
其後 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그후 고려가 요동을 침략하여 점유하자 백제는 요서를 침략하여 점유하다."

< 통전 백제전 >
晉時 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 今柳城北平之間
"진나라 때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침략하여 점유하였다. 백제 역시 요서 진평 2군에 웅거하여 점유하였다. 지금의 유성과 북평의 사이이다."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
初 夫餘居於鹿山 ?百濟所侵 部落衰散
"초기에 북부여(北夫餘)는 록산에 머물렀는데, 백제가 침노하여 부락이 쇠하여 흩어졌다."

<구당서>
東北至新羅 西海至越州  南渡海至倭國 北渡海至高麗
"(백제는) 동북쪽으로 신라에 이르르며,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서 월주(현재의 중국의 절강성 소흥시)에 이르르며,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서 왜에 이르르며, 북쪽으로 바다를 건너서 고려에 이르른다."

<삼국사기>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 隋皇失馭
"고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한 군사 백만 명을 보유하여 남쪽으로 오월(양쯔강 중, 하류)을 침노하였으며, 북쪽으로 유연(하북에서 요령 지역)과 제노(산둥반도와 하남성)을 흔들어서 중국의 큰 해로움이 되었는데, 수나라의 황제가 막지 못하였다."



백제와 고구려는 멸망하지 않았으며, 건안고성 백제와 일본과 소고구려로 유지되다가 대조영의 진국과 합병하여 발해가 되었으며, 발해는 거란의 요나라가 되었으며, 거란의 요나라는 여진의 금나라가 되었으며, 여진의 금나라는 몽골의 원나라가 되었으며, 몽골의 원나라는 여진의 청나라가 되었으니,

금나라와 청나라가 고구려와 백제예요.




이하는 시간이 있으실 때에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https://www.ytn.co.kr/_ln/0103_201609151102451040




1. 신라는 한민족(韓民族)이 아니며, 갈족이죠. 고인골 유전자를 조사하여, 신라인는 스키타이 계통의 갈족(소그드인)이라는 백인이라는 것을 밝혀냈지요.




스키타이 계통의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백인종인 월지의 하위부족 카시(kush)족이죠.
카시(kush)는 쿠시라고도 발음하는데, 옥(玉)을 뜻해요. 한족(漢族)들이 카시족을 한자를 음차하여 거사족(車師族)이라 적다가 멸시하는 의미로 갈족((?族)이라 적었죠. 거사족의 우두머리를 왕을 뜻하는 칸을 붙여서 거사간이라 불렀어요.
 신라인(갈족)들은 호게국 사람들인데, 흉노에 정복된 후에 흉노의 노예부족이 되어서 오르도스로 강제이주를 당하였다가 흉노의 위만이 기자조선을 멸망시킨 후에 흉노의 괴뢰국 위만조선을 세우자 위만조선으로 강제이주당했죠.
 이 갈족(신라인)들이 도망하여서 마한에 난민신청을 하였는데, 마한의 왕이 마한의 동쪽을 분할하여 거대한 난민촌을 건설하여서 신라인들을 수용하고 중국의 진(秦)나라에서 노역을 피하여 도망온 자들이라 해서 진한(秦韓)이라 불렀어요.
 이 신라인들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나라를 세우는데, 하타씨(秦氏)가 신라인들이며 이즈모족이예요. 그래서 일본인들 중에서 백

인종의 혈통이 있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죠.

KBS역사스페셜 <3회> 신라 왕족은 정말 흉노의 후예인가

우리 역사 세계와 통하다 ㅡ 신라 왕족은 정말 흉노의 후예인가 ㅡ KBS역사스페셜 제작팀

http://www.etnews.com/20150901000079



"중국 사람들이 진(秦)나라의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왔는데, 마한의 동쪽에 많이 머물렀으며, 진한에 더불어 섞여 살았다. 이때 이르러서 점점 번성하니, 마한이 이를 꺼려서 책망한 것이다."
中國之人 苦秦亂東來者衆 多處馬韓東 與辰韓雜居 至是寖盛 故馬韓忌之 有責焉
(전차 중국지인 고진란동래자중 다처마한동 여진한잡거 지시침성 고마한기지 유책언)

<三國史記 王氏高麗 金富軾 卷第一 新羅本紀 第一 赫居世 居西干 三十八年春二月 (삼국사기 왕씨고려 김부식 권제1 신라본기 제1 거사간 기원전 20년)>

신라 사람은 그 선조가 본래 진한종족이다. 진한(辰韓)은 또한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서로 전하여 말하기를 진(秦)나라 때 노역을 피해 도망쳐온 자들(난민들)인데, 마한이 그 동쪽 영토를 분할하여 (난민촌을 건설하여서) 거주하게 하였으며, 진나라 사람인 까닭에 (그 중국에서 온 난민들의 난민촌을) 진한(秦韓)이라 하였다. 그 언어와 사물을 일컫는 것이 중국 사람과 비슷하다... 마한과 같지 않다. 또 진한은 항상 마한 사람을 임금으로 세웠다. 대대로 서로 이어갔으니 진한은 스스로 왕을 세우는 권리를 얻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흘러들어온 사람들이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항상 마한의 통제를 받았다.

新羅者,其先本辰韓種也。辰韓亦曰秦韓。相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馬韓割其東界居之,以秦人,故名之曰秦韓。
辰韓亦曰秦韓。相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馬韓割其東界居之,以秦人,故名之曰秦韓。其言語名物,有似中國人 ... 不與馬韓同。又辰韓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傳,辰韓不得自立王,明其流移之人故也。恒爲馬韓所制。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3338&C_CC=AZ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403100027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度浿水, 詣準降.
(연인위만망명, 위호복, 동도패수, 예준항)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하여, 흉노옷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나아가서 준왕에게 투항하였다.

삼국지를 읽다: 중국 사학계의 거목 여사면의 문학고전 고쳐 읽기

『西漢文紀』 卷 19 平當 劉歆武帝廟不宜毁議(서한문기 권 19평당 유흠무제묘불의훼의)
東伐朝鮮 起元菟樂浪 以斷匈奴之左臂 西伐大宛 并三十六國 結烏孫 起敦煌酒泉張掖 以鬲婼羌 裂匈奴之右肩
(동벌조선 기원도낙랑 이단흉노지좌비 서벌대완 병삼십육국 결오손 기돈황주천장액 이격야강 열흉노지좌견)
동쪽의 조선 지역을 정벌하여 흉노의 왼 팔을 잘라서 현토낙랑을 세웠다. 서쪽의 대완 지역을 정벌하여 36국을 병합하고 오손과 연결하여 돈황과 주천과 장액을 세우고 야강을 막아서 흉노의 오른쪽 어깨를 찢었다.

<한서> 권73 ‘위현전(韋賢傳)’
東伐朝鮮 起玄菟樂浪 以斷匈奴之左臂
(동벌조선 기현도낙랑 이단흉노지좌비)
동쪽의 조선 지역을 정벌하여 흉노의 왼 팔을 잘라서 현토낙랑을 세웠다.



북사 당 이연수 열전 사이(北史 唐 李延壽 列傳 四夷)
初附庸於百濟
(초부용어백제)
신라는 초기에 백제에 부용(附庸, 속국, 식민지)되어 있었다.

남사 당 이연수 이맥(南史 唐 李延壽 夷貊)
其國小不能自通使聘梁普通二年王姓募名泰始使使隨百濟奉獻方物
(기국소불능자통사빙량보통2년성모명진시사사수백제봉헌방물)
"신라는 나라가 작아서 스스로 사신을 보낼 수 없었다. 서기 521년에 성이 '모', 이름이 '진'인 신라의 법흥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어 백제를 따라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삼국사기 列傳 第一 金庾信 上 (삼국사기 열전 제1 김유신 상)
庾信 告大王曰請伐百濟以報大梁州之役.”王曰以小觸大, 危將奈何
(유신 고대왕왈청벌백제, 이보대량주지역왕왈이소촉대위장내하)
"김유신이 진덕여왕에게 '백제를 칩시다.'라고 말했다. 진덕여왕은 '보잘 것 없는 작은 나라인 신라가 대제국 백제를 건드렸다가 장차 위태로워지면 어찌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삼국유사』 권1 기이2 태종춘추공조와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6 의장왕20년조, 『삼국사기』 권37 지리4
國本有五部 三十七郡 二百城
"백제에는 본래 5부와 37군 200성이 있었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태종춘추공조(太宗春秋公條)
其國本有五部 三十七郡 二百城 七十六萬戶
백제에는 본래 5부 37군 200성 76만호가 있었는데 ...

『삼국유사』 권1 칠십이국조(七十二國條)
구당서(舊唐書)』의 고종건봉3년(高宗乾封三年) 계사조(癸巳條)
“고구려 멸망 때(668) 민호(民戶)의 수가 총계 69만7000호
삼국사기 보장왕
五部百七十六城六十九萬餘戶
(오부백칠십육성육십구만여호)
고구려 멸망 때(668) 5부 176성 69만여호였다.

삼국사기 卷第二十七 百濟本紀 第五   威德王 十八年(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제5 위덕왕 18년)
十八年高齊後主又以王爲使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東靑州刺史
(18년고제후주우이왕위사지절도독동청주제군사동청주자사)
571년에 북제(北齊)가 백제 위덕왕(백제 성왕의 아들인 태자 여창)에게 ‘사지절도독동청주자사(使持節都督東靑州刺史)’의 직을 수여했다. (이는 이 지역에 대한 백제의 지배를 인정한 것으로 간주되는데 동청주는 오늘날 산둥성 자오저우완 일대에 해당된다.)

삼국사기 제37권 잡지 제6(三國史記 卷第三十七 雜志 第六) 백제[百濟]
舊唐書云 百濟 扶餘之別種 東北新羅 西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 北高麗 其王所居 有東西兩城
(구당서운 백제 부여지별종 동북신라 서도해지월주 남도해지왜 북고려 기왕소거 유동서양성)
“구당서에 이르길, 백제는 부여의 별종으로서 동북쪽에 신라가 있으며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서 중국의 월주(越州; 양자강 중류와 하류)에 이르고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서 왜(倭)에 이르며 북쪽에 고구려가 있고 백제왕은 동(東)과 서(西)쪽의 두 곳의 성에 수도를 두어 거주한다.”
百濟西界越州 南倭 皆踰海 北高麗
(백제서계월주남왜 개유해북고려)
“백제의 영토는 서쪽으로는 월주가 경계이며 남쪽으로는 왜가 경계인데 모두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고 북쪽에 고구려가 있다.”

삼국사기 卷第四十六 列傳 第六 崔致遠(삼국사기 권46 열전 제6 최치원)
高麗百濟全盛之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隋皇失馭
(고려백제전성지시강병백만남침오월북요유연제노위중국거?수황실어)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 시에는 강한 군사가 100만이었다. 남으로는 오월(양자강 하류 지역)을 침공했고, 북으로는 유연(하북에서 요령 지역), 제노(산동반도 일대)의 지역을 흔들어 중국의 커다란 해로움이 되었다. 수(隋)나라 황제가 고구려와 백제를 막지 못하였다."

삼국사기 卷第二十六 百濟本紀 第四 東城王 十年{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동성왕 10년(488년)}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십년위견병래벌위아소패)
"동성왕 10년에 위나라(북위)가 병사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우리(백제)에게 패하였다."



또한 단군은 시조가 아니며, 복희가 시조예요.

아리랑은 우즈베키스탄에 아무강(북강)과 쓰르강(남강)이 흐르다가 모여서 아랄해가 생겨나는데,
아무강이 변음이 되어서 아리랑, 쓰르강이 변음되어서 쓰리랑이 되었으며, 아랄해가 변음이 되어서 아라리가 되어서
'아리 아리랑(아무강) 쓰리 쓰리랑(쓰르강) 아라리(아랄해)가 났네(나왔네).'가 됐다고.

국악도 소그드 음악(속악)에서 유래됐다네요?

'구자악은 속악의 근본이거니와 속악은 구자악과 서역악(西域樂)을 포함하며 또한 구자도 서역을 일컬으므로 속악을 통칭 서역악(소그드 음악)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향악은 ...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토착화된 서역(西域) 지방의 음악까지 아우르는 용어이다.
고려시대에는 향악이란 용어 대신 속악(俗樂)이라 썼다. 서역(소그드)에서 유래한 음악인 속악(俗樂)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D%96%A5%EC%95%85(%E9%84%95%E6%A8%82)



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41107.010350809050001



조선음악사 안확 저

https://ko.wikipedia.org/wiki/%EC%86%8C%EA%B7%B8%EB%93%9C%EC%9D%B8



http://www.kbyn.co.kr/default/index_view_page.php?part_idx=229&idx=74171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07083.html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7081711554973922



치킨로드 : 문명에 힘을 실어준 닭의 영웅 서사시 앤드루 롤러 저, 이종인 역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18858&C_CC=AH


http://kr.christianitydaily.com/articles/92571/20170707/%EC%84%B1%EA%B2%BD%EA%B0%95%EC%A2%8C-%EB%B0%94%EB%B2%A8%ED%83%91-%EC%82%AC%EA%B1%B4%EC%9D%98-%EC%9D%98%EB%AF%B8.htm


https://ko.wikipedia.org/wiki/%EB%8B%88%EB%88%84%EC%8A%A4


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B%8C%80_%EA%B7%BC%EB%8F%99%EC%9D%98_%EC%A2%85%EA%B5%90


원화와 화랑은 바알 신전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서 바알(탐무스)과 바알의 애미 아슈타르테(세미라미스)와 바알의 애비 다곤(니므롯)을 성적인 행위로 흥분시켜서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해서 동원된 여성과 남성 사제들이었다네요?

원래 원화라는 여성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살인사건이 나서 남성들을 곱게 화장시켜서 화랑을 구성하였다네요? 화랑의 의미가 꽃 화 어린 여성 랑을 써서 꽃처럼 어여쁜 어린 여자라는 뜻이라네?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3&cp_code=cp0318&index_id=cp03181361&content_id=cp031813610001&search_left_menu=


http://sports.khan.co.kr/bizlife/sk_index.html?art_id=201407162259026&sec_id=561801


http://legacy.h21.hani.co.kr/section-021163000/2008/06/021163000200806260716011.html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17817.html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第2冊 新羅 碑文  金仁問碑 解釋文(역주 한국고대 금석문 제2편 신라 비문 김인문비 해석문)을 참조하였네요...
정관 21년
당 태종황제께서 김춘추에게 정2품의 관작을 내리시니 그 영예는 … 만큼 높은 것이라 …
…  김춘추가 진덕왕 2년 당태종황제께 당나라의 관복을 하사받고 돌아와 신라의 의관제를 당나라식으로 고치서, 이듬해부터 신라의 왕과 관원들이 모두 당나라의 관복을 입고 당태종황제의 신하가 되었다.
… 당나라의 고종황제께서도 사람을 보내 말하기를, “김춘추로 신라왕을 삼노라” 하였다.
당나라의 황제께서는 김춘추가 멀리 푸른 바다를 건너와 궁궐에 조회하여 열심히 조공을 바치는 것을 가상히 여겼다. …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참조하였네요...
김춘추가 당태종을 보고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으로 신라가 거의 멸망하여 위급함을 알리고, 많은 예물을 바쳐서 당나라의 구원병을 요청하며 아들 법민(문무왕)과 인문 등을 당나라에 인질로 두고 신라의 의복과 관을 버리고 당의 관복을 입고 신라의 연호를 버리고 당의 연호를 썼다. {신라는 당나라의 지방정부가 되었다.}
김춘추는 '조선'을 업신여기고 모욕하는 글을 그대고 가져다가 신라에 유포시켜서 사대주의의 병균을 퍼뜨렸다.



한나절에 읽는 발해의 역사 이윤섭, 이선영
- 672년 이근행은 20만 명이 아닌, 자신의 부족인 말갈족 병사 3만을 지휘해 한반도에 왔다.
- 신라군이 이근행이 이끄는 말갈군을 패주시킨 게 아니라, 토번과의 전쟁을 위해 이근행 부대가 소환돼 철수했다.
- 675년에 당의 신라 원정군 대부분이 철수한 상태에 매초성(매소성) 전투는 벌어졌다.

<삼국사기 제7권 신라본기 제7(三國史記 卷第七 新羅本紀 第七), 문무왕 12년 - 문무왕이 당 고종에 올린 사죄 표문(表文)>
九月 彗星七出北方
9월, 혜성(불길한 징조)이 북방에 일곱 번 나타났다.
王 獲罪大朝 遂遣級飡原川 奈麻邊山 及所留兵船 郞將鉗耳大侯 萊州司馬王藝 本烈州長史王益 熊州都督府司馬?軍 曾山司馬法聰 軍士一百七十人 上表乞罪曰
임금은 ... 당 조정(큰 조정)에 죄를 짓게 되었으므로 ... 급찬 원천(原川)과 나마 변산(邊山) 및 붙잡아 두었던 당의 병선(兵船) 낭장(郞將) 겸이대후, 내주(萊州) 사마(司馬) 왕예(王藝), 본열주(本烈州) 장사(長史) 왕익(王益), 웅주도독부 사마 예군(?軍), 증산(曾山) 사마 법총(法聰)과 병사 1백7십 명을 돌려보내고, 아울러 다음과 같은 표(表)를 올려 죄를 빌었다.
臣某死罪謹言 昔臣危急 事若倒懸 遠蒙拯救 得免屠滅 粉身?骨 未足上報鴻恩 碎首灰塵 何能仰酬慈造
“신(臣) 아무개는 죽을 죄를 짓고 삼가 아뢰나이다. 전일에 신의 위급한 처지가 마치 거꾸로 매달린 것과 같았을 때 멀리서 황제 폐하의 구원을 입어 도멸(짐승처럼 찢어 죽임을 당하여 도살되어 멸망)을 면하게 되었사옵니다. 몸과 뼈가 부수어 바스러진다 하여도 크나큰 은혜를 갚기엔 부족하고 머리가 부수어져 재와 먼지가 되어도 어찌 황제 폐하의 자애로운 은덕을 갚을 수 있겠나이까?
然深讐百濟 逼近臣蕃 告引天兵 滅臣雪恥
그러나 깊은 원수인 백제는 신의 변방을 침범하여 핍박하고, 하늘의 군대(황제 폐하의 군대)를 이끌어 신을 멸하여 치욕을 갚으려 하므로
臣懼破滅 自欲求存
신은 파멸의 지경에 이르러 스스로 살 길을 찾으려다가
枉被凶逆之名 遂入難赦之罪
억울하게도 흉악한 역적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마침내 용서받기 어려운 죄를 짓게 되었나이다.
臣恐事意未申 先從刑戮 生爲逆命之臣 死爲背恩之鬼
신이 미처 사정을 아뢰지 못하고 먼저 죽음을 받는다면, 살아서는 천자의 명령을 거스른 신하가 되고 죽어서는 은혜를 저버린 귀신이 될까 두려워
謹錄事狀 冒死奏聞 伏願少垂神聽 炤審元由
삼가 사실을 기록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오니, 잠시라도 신령스런 귀를 기울여주시어 근본되는 이유를 밝게 살펴주시기를 엎드려 바라나이다.
臣前代已來 朝貢不絶 近爲百濟 再虧職貢
신은 전대(태종무열왕 김춘추) 이래로 조공을 끊이지 않다가 근래에 백제 때문에 거듭 조공을 빠뜨려서
遂使聖朝出言 命將討臣之罪
드디어 성스러운 황제 폐하의 조정에서 말이 나게 하고, 장수에게 명하여 신의 죄를 토벌하게 하셨나니
死有餘刑 南山之竹 不足書臣之罪 褒斜之林 未足作臣之械
죽어도 받아야 할 형벌이 남음이 있어, 남산(南山)의 대나무도 저의 죄를 적기에 부족할 것이며, 포야(褒斜, 중국 종남산의 골짜기)의 숲도 신을 벌할 손발을 붙들어 매는 형틀을 만들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池宗社 屠裂臣身 事聽勅裁 甘心受戮
종묘와 사직을 헐어 연못을 만들고 신의 몸을 찢어 죽이더라도 (황제 폐하께서) 이 사정에 귀를 기울여 판단해주신다면 달가운 마음으로 죽음{육시하다(戮屍--: 이미 죽은 사람의 시체에 다시 목을 베는 형벌을 가하다}을 받겠나이다.
臣?轝在側 泥首未乾 泣血待朝 伏聽刑命
신의 관과 상여가 곁에 있고 머리를 진흙땅에 대고 죄를 빌다가 아직 마르지 않은 채 피눈물로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고 형벌을 엎드려 청하나이다.
伏惟 皇帝陛下 明同日月 容光?蒙曲炤 德合乾坤 動植咸被亭毒 好生之德 遠被昆蟲 惡殺之仁 爰流翔泳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께서는 밝으심이 해와 달과 같아서 얼굴의 광채를 온 세상 구석까지 비추시고 덕은 천지와 합치해 동식물이 다 그 은덕으로 살아가며 살리시기를 좋아하시는 덕은 멀리 벌레에까지 미치고 죽이기 싫어하시는 어짐은 새와 물고기에까지 흐르나니
?降服捨之宥 賜全腰領之恩 雖死之年 猶生之日
만일 석방의 용서를 내리시어 허리와 머리를 보전할 수 있는 은혜를 내려 주신다면, 비록 죽는다 해도 산 것과 다름이 없겠나이다.
非所希冀 敢陳所懷 不勝伏劒之志 謹遣原川等 拜表謝罪 伏聽勅旨
바라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감히 마음 속의 품은 바를 아뢰오니, 칼에 엎드려 죽을 생각을 누를 길이 없사옵니다. 삼가 원천 등을 보내 표를 올려 죄를 빌고 칙지를 엎드려 들으려 하나이다.
某頓首頓首 死罪死罪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리고 조아리고 죽어 마땅하고 또 마땅합니다.”
兼進貢銀三萬三千五百分 銅三萬三千分 針四百枚 牛黃百二十分 金百二十分 四十升布六匹 三十升布六十匹
이와 동시에 은 3만3천5백 푼, 구리 3만3천 푼, 바늘 4백 개, 우황 1백20 푼, 금 1백2십 푼, 40승포 6필, 30승포 60필을 진상하였다.
是歲 ?貴人飢
이 해에 곡식이 귀하여 사람들이 굶주렸다.

당나라 현종이 신라에게 발해를 치면 대동강 이남에 대한 신라의 지배권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하여서 신라가 발해의 남쪽 경계를 공격하였으나 군사의 절반 이상이 사망하였죠.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764057&cid=49346&categoryId=49346#TABLE_OF_CONTENT8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1021023007


https://ko.wikipedia.org/wiki/%EC%86%8C%EA%B3%A0%EA%B5%AC%EB%A0%A4




2. 진

'진이 한민족(韓民族)입니다.

'진'은 동방이며 부유이며 숙신이며 한이다. 부유가 부여이다. 부여가 기자조선과 북부여가 되었다. 기자조선이 동호이며 스스로 한(韓)이라 칭하였다.

제왕(태호 복희씨)이 진(震)에서 나왔고 만물이 진(震)에서 나왔고 진(震)은 동방이다.
帝出乎震 萬物出乎震 震東方也.
<주역(周易) 설괘전(設卦傳) 제5장>

태호(太?) 포희씨(?犧氏)는 복희씨(宓羲氏)라고도 한다.
주역(周易)에, ‘제왕이 동방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 사기(史記) 삼황본기(三皇本紀)>

"{대조영이 건국한 진국(震國)의} 진(震)은 주역(周易)의 “제출호진(帝出乎震)”에서 나온 것으로 동방(東方)을 의미한다."
<稻葉岩吉, 1915, 『增訂滿洲發達史』, 日本評論社>



3. 부유

1) 부유가 부여이다.

“산둥성 추현 부산에서 복희가 팔괘(八卦)를 그었다고 한다.”
<‘여지지(輿地志)’>

“한나라 이전에 부여족의 발원지는 산둥성 추현 부근에 있는 부산, 즉 부유이다. 동북지역 구이의 다섯 번째인 부유는 동방의 나라

이름인데 부유가 부여다.”
<이순의 이아석지주, 형병의 논어주소, 자회보, 논어, 허광웨(何光岳)의 동이원류사(東夷源流史)>
http://shindonga.donga.com/Library/3/02/13/103822/1

2) 북부여(北夫餘)는 부여의 한 갈래이다.

“부여는 산둥성 린이 일대에 살다가 뒤에 부여왕족의 한 갈래는 고조선 남쪽으로 옮겨가서 백제를 세우고 다른 한 갈래는 서진하여

하남성 내향의 어중으로 옮겨갔고, 또다른 한 갈래는 동북지방으로 옮겨가 북부여(北夫餘)를 세웠다.”
<허광웨(何光岳)의 동이원류사(東夷源流史)>
http://shindonga.donga.com/Library/3/02/13/103822/1

3) 백제는 부여의 한 갈래이다.

산둥성 동부 지역에는 래이(來夷)라고 불렸던 이민족이 살고 있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2%B0%EB%91%A5%EC%84%B1

"백제는 옛적 래이(來夷)이며, 마한(고구려)의 족속이다."
百濟舊來夷馬韓之屬
<양직공도(梁職貢圖) 백제국기(百濟國使)>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http://db.history.go.kr/id/ko_043_0010_0010

"백제(百濟)의 ‘제(濟)’는 산둥성의 제수(濟水)에서 유래한 것이다."
<허광웨의 ‘동이원류사’>
http://shindonga.donga.com/Library/3/02/13/103822/2

"백제국은 본래 또한 부여의 종족이다. 경사 동쪽의 6200리에 있다. 동북쪽으로 신라에 이르르며,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서 월주[州名(

주명)으로서 지금의 浙江省(절강성) 紹興市(소흥시) 부근을 가리킨다. 隋(수나라) 煬帝時(양제 때)에 처음으로 越州(월주)라 하고, 이

를 고쳐 會稽郡(회계군)이라 하였다가 唐代(당나라 때)에 江南道 所屬 越州(강남도 소속 월주)라 하였다.]에 이르르며, 남쪽으로 바다

를 건너서 왜국에 이르르며, 북쪽으로 바다를 건너서 고려에 이른른다. 그 왕은 동서 두 성에 거주한다."
百濟國 本亦扶餘之別種 ... 在京師東六千二百里 ... 東北至新羅 西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國, 北渡海至高麗. 其王所居有東西兩城.
(백제국, 본역부여지별종 ... 재경사동6200리 ... 동북지신라, 서도해지월주, 남도해지외국, 북도해지고려. 기왕소거유동서양성.)
<舊唐書 東夷列傳 百濟(구당서 동이열전 백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jo_014_0010_0020_0010

"백제는 부여족이다. 경사에서 직선으로 6000여리에 있으니, 바닷가의 양지에 있으며 서쪽의 경계는 월주[越州(월주)는 州名(주명으로

서 지금의 浙江省(절강성) 紹興市(소흥시) 부근이다.]이며, 남쪽의 경계는 왜이며, 북쪽의 경계는 고려인데, 모두 바다를 건너야 비로

서 이르르며 그 동쪽은 신라이다. 왕은 동서 두 성에 거주한다."
百濟 扶餘別種也. 直京師東六千里而? 濱海之陽 西界越州 南倭 北高麗 皆踰海乃至 其東 新羅也. 王居東西二城.
(백제 부여별종야. 직경사동6000리이양 빈해지양 서계월주, 남왜, 북고려, 개유도내지, 기동, 신라야. 왕거동서이성.)
<新唐書 東夷列傳 百濟(신당서 동이열전 백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jsessionid=B8205AF75CE8181F76AD7D53D85F76A8?levelId=jo_015_0020_0020_0010

3) 고구려는 부여의 한 갈래이다.

"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종족이다."
高麗, 本扶餘之別種.
<舊五代史 卷一百三十八 外國列傳 第二 高麗(구오대사 권138 외국열전 제2 고려)>

『(백제의)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온 까닭에 부여로 씨를 삼았다.』
百濟. 其世系, 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三國史記 卷第二十三 百濟本紀 第一 溫祚王 一年(삼국사기 권제23 백제본기 제1 온조왕 1년)>

4) 발해는 부여의 한 갈래이다.

"발해는 부여의 종족이다."
<武經總要(무경총요)>
http://contents.history.go.kr/mfront/nh/view.do?levelId=nh_004_0040

"(발해는) ... 부여의 유속(정신)을 가지고 있다."
復高麗之舊居 有夫餘之遺俗
(보고려지구거 유부여지유속)
<속일본기 신구 5년 1월 17일조>

"대조영은 ... 이내 나라를 건국하고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라 호칭하였다... 부여, 옥저, 변한, 조선 바다북쪽의 여러 나라를 모두

얻었다."
祚榮 ... 乃建國,自號震國王 ... 盡得扶餘、沃沮、弁韓、朝鮮海北諸國。
<『新唐書』卷219「列傳」第144 ‘北狄’(신당서 권219 열전 제114 북적)>

"『통전』에 이르길, 대조영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진단(震旦)이라 하였다."
通典云 “祚榮立國自號震旦
<三國遺事 卷 第一 紀異第一 靺鞨·渤海(삼국유사 권 제1 기이제1 말갈·발해)>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http://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sy_001_0020_0100_0010

"{대조영이 건국한 진국(震國)의} 진(震)은 주역(周易)의 “제출호진(帝出乎震)”에서 나온 것으로 동방(東方)을 의미한다."
<稻葉岩吉, 1915, 『增訂滿洲發達史』, 日本評論社>



4. 숙신

1) 숙신이 부유이다.

"순임금 25년에 숙신이 와서 활과 화살을 조공하다."
帝舜二十五年息愼來朝貢弓矢
{제순25년식신(숙신)래조공궁시}
<죽서기년(竹書紀年)>

"무왕이 이윽고 동이를 정벌하자 숙신이 와서 하례하다."
武王旣伐東夷 肅愼來賀
(무왕기벌동이 숙신래하)
<상서(尙書)>

2) 숙신이 조선이다.

숙신(肅愼)은 기원전 7세기 이전 북경 동북 지방에 있다가 기원전 8∼7세기 이후에는 길림성 북쪽 일대로 이주하였다. 숙신(肅愼)은

조선(朝鮮)이라는 왕조명을 갖기 이전에 기자조선인들을 부르던 호칭이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1813

"숙신과 조선의 어원은 같다."
최남선(崔南善)·신채호(申采浩)·정인보(鄭寅普) 등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1813

"조선이란 말은 숙신에서 나왔다."
 시로코고로프(S. M. Shirokogoroff, 『Social Organization of the Northern Tungus(북 퉁구스족의 사회 체제) 』pp.147~169)
중국인들이 주나라 때에는 숙신(肅愼, Suk-chin),
한나라 때는 주신(朱申, Su-shin),
삼국시대 때는 읍루(?婁, Dy?r),
당나라 때는 철아적(徹兒赤, Dzur-chi),
송나라 때는 주리진(朱里眞, Jur-chin),
명나라 때는 여진(女眞, Jur-chin)이라 한자로 적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jo_003r_0010_0010_0040

"조선이라는 말이 숙신에서 나왔다."
L. R 꼰제비찌 『한국의 역사적 명칭』(모스크바 : 1970) 63~67쪽

"조선이 숙신이다.
발숙신(發肅愼)이 발조선(發朝鮮) 대신 사용되었다. 만주원류고에서 건륭제가 숙신의 원음을 주신(珠申)이라 하였다. 조선의 원음도

주신이다."
신채호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46588#09T0



5. 한(韓)



1) 한(韓)으로 불린 부유(숙신)

"산해경에서 말하길 한안은 해중의 도읍이 있는 주의 남쪽에 있다. 옛적에 누군가 일컫길, 이미 하나라(夏 , 기원전 2070년경 ~ 기원

전 1600년경)와 상나라(商, 기원전 1600년경 ~ 기원전 1046년경)와 주나라(周,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56년) 때부터 한(韓)의 명칭

이 있었다하며 ... 산해경 모든 설(設)에 '이미 한(韓)의 명칭이 하·상·주 때부터 있었다'하도다."
山海經曰 韓雁在海中都州南 故或謂韓之稱已在於三代時也 苟如尙書傳 ... 山海經諸說 韓之稱已在三代(夏·商·周)時矣
(산해경왈 한안재해중도주남 고혹위한지칭이재어삼대시야 구여상서전 ... 산해경제설 한지칭이재삼대시의)
<叢史辨疑(총사변의)>

2) 기자조선

ㄱ. 한(韓)으로 스스로 칭한 기자조선(기자숙신)

"한시는 멀고도 먼 고대에 일찍이 '옛적 누군가가 기씨(기자)가 또한 일찌기 한(韓)을 칭하였다'고 전수되어왔다풀이하는데 ... 왕부

의 설은 '한시가 일컫는 바는 한후가 곧 기씨(기자)이다'이다."
漢時去 古末遠嘗有傳授 故或謂箕氏 亦曾稱韓也 ... 王符之說 詩所云 韓侯卽箕氏也
(한시거 고말원상유전수 고혹위기씨 역증칭한야 ... 왕부지설 시소운 한후즉기씨야)
<叢史辨疑(총사변의)>

"(기원전 9세기~8세기에) 한후(韓侯)가 책명을 받았다. 왕이 친히 그에게 명하였다[한의 임금이 주(周)나라의 宣王{선왕, 주나라의 제

11대 왕(재위: 기원전 827년 ~ 기원전 782년)}에게 조회하러 오자, 선왕은 친히 그를 제후에 봉하는 책명을 내렸다]."
韓侯受命 王親命之
(한후수명 왕친명지)
<詩經 韓奕編{시경 한혁(한후의 위대함)편}>
https://ko.wikipedia.org/wiki/%EC%A3%BC_%EC%84%A0%EC%99%95

"옛 주나라 선왕때 또한 한후(韓侯)가 있어 그 나라가 연나라와 가까웠는데, 그러므로 시경에 이르기를 넓은 저 한(韓)의 성(城)은 연

나라 군대가 완성했다고 하였다. 그후 한(韓) 서쪽 또한 성씨가 한(韓)인데, 위만이 정벌하여서 이동하여 해중에 머물렀다."
昔周宣王亦有韓侯,其國也近燕,故詩云:普彼韓城,燕師所完. 其後韓西亦姓韓, 爲魏滿所伐,遷居海中
(석주선왕역유한후, 기국야근연, 고시운 : 보피한성, 연사소완. 그후한서역성한, 위우만소벌, 천거해중)
<『잠부론』권제9>

"{한(韓)의} 제후 준이 참람하게도 왕으로 호칭하다가 연나라 망명인 위만에게 공격을 당하여 {한(韓)을} 빼앗겼다."
侯準 旣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
(준후 기참호칭왕, 위연망인위만소공탈)
<三國志 魏書 30 東夷傳 韓{삼국지 위서 30 동이전 한(韓)}>

ㄴ. 동호(東胡)로 불린 기자조선(기자숙신)

동호는 흉노가 아니다. 흉노를 호(胡)라 했는데, 흉노의 동쪽에 있어서 동호라 한 것일 뿐이다.

"동호는 ... 흉노에 동쪽에 있는데, 그런 까닭에 동호라 일컬었다."
服虔云「東胡 ... 在匈奴東 故曰東胡。」
(복건운「동호 ... 재흉노동 고왈동호. 」)
『史記』匈奴列?註所引『索?』(『사기』흉노열운주소인인 『색은』)
https://ja.wikipedia.org/wiki/%E6%9D%B1%E8%83%A1

고인골 DNA 분석 결과 고대 몽골과 기자조선과 백제와 현재의 대한민국국민이 동족으로 나오죠.
동호에서 선비, 오환, 거란, 실위 등 고대 몽골리안들이 나왔는데, 이들이 고조선과 백제와 현재의 대한민국국민과 동족이므로 동호는

기자조선이죠.

KBS역사스페셜 <3회> 신라 왕족은 정말 흉노의 후예인가

우리 역사 세계와 통하다 ㅡ 신라 왕족은 정말 흉노의 후예인가 ㅡ KBS역사스페셜 제작팀

http://www.etnews.com/20150901000079


"동호는 오환의 선조이며, 후에 선비가 되었다. 흉노의 동쪽에 있는데, 그런 까닭에 동호라 일컬었다."
服虔云「東胡,烏丸之先,後?鮮卑。在匈奴東,故曰東胡。」
(복건운「동호, 오환지선, 후위선비. 재흉노동, 고왈동호. 」)
『史記』匈奴列?註所引『索?』(『사기』흉노열운주소인인 『색은』)
https://ja.wikipedia.org/wiki/%E6%9D%B1%E8%83%A1

"또한 해도 동호의 종족인데, 동호가 흉노에 멸망하자 오환산을 점령하여 의지하였다."
奚亦東胡種 爲匈奴所破 保烏丸山.
(해역동호종 위흉노소파 보오환산.)
<新唐書 卷219 列傳 第144 奚(신당서 권219 열전 제144 해)>

거란은 본래 동호종족인데, 동호가 흉노에게 멸망하게 되자, 선비산을 차지하여서 의지하였다.
契丹, 本東胡種, 其先爲匈奴所破, 保鮮卑山.
(계단, 본동호종, 기선위흉노솨, 보선비산.)
<新唐書 卷二百一十九 列傳 第一百四十四 契丹(신당서 권219 열전 제144 거란)>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ko_035_1840_0010

"실위(室韋, 失韋)는 북위를 건국한 탁발선비(拓跋?卑)이다.
<장지우허 지음, 북방사연구팀 옮김(2009), 『몽골인 그들은 어디서 왔나』, 소나무, 60~73쪽>
https://ko.wikipedia.org/wiki/%EC%8B%A4%EC%9C%84

"실위의 음역명이 선비와 서로 같다.  음운학적인 면에서 볼 때, 실위와 선비의 원문은 동일한 것으로서 ‘실위’가 ‘선비’다."
<펠리오, 윤은숙ㆍ연규동ㆍ장준희ㆍ최준ㆍ김선자ㆍ김정열ㆍ장석호ㆍ박소현ㆍ김주용. 《만주 이야기》. 동북아역사재단. 46~51쪽. ISBN

978-89-6187-305-5.>

"실위족의 주류는 대체로 선비 계통이었다."
<亦?眞(1979), 「中國北方民族與蒙古族族源」, 『內蒙古大學學報』, 內蒙古大學出版社>

"실위는 거란의 종족으로서 ... 실위의 언어는 말갈의 언어이다(실위의 언어는 말갈과 같다)."
室韋 契丹 別種 ... 其語言 靺鞨也.
(실위 계단 별종 ... 기언어 말갈야.)
<新唐書 卷219 列傳 第144 室韋(신당서 권219 열전 제144 실위)>

"두막루국은 옛적 북부여이다."
豆莫婁國 ... 舊北扶餘也.
(두막루국 ... 구북부여야.)
<《魏書》 列傳 第88 豆莫婁조(위서 열전 제88 두막루조)>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setId=-

1&prevPage=0&prevLimit=&itemId=kn&types=&synonym=off&chinessChar=on&levelId=kn_029_0020_0020&position=-1

"두막루는 스스로 북부여의 후예이다라고 말하였다."
達末婁自言北扶餘之裔
(달말루자언북부여지예)
<신당서 동이전>

"해족과 더불어 거란과 두막루국(북부여)의 언어가 같다."
語與庫莫奚、契丹、豆莫婁國同。
(언어고막해, 계단, 두막루국동.)
<위서 실위전>

(발해의) 풍속은 고구려와 거란과 같다.
風俗與高麗及契丹同
『舊唐書』卷199下, 「列傳」149下 北狄 渤海靺鞨(구당서 권199하, 열전 149하 북적 발해말갈)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compare.do?treeId=010301&levelId=hm_030_0010

유전자 조서해 보니 청나라 황실은 신라의 후손이 아니라네요?
https://news.joins.com/article/21006551


몽골은 왜 고려를 멸망시키지 않았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29472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6&mcate=M1005&nNewsNumb=20150817999&nidx=20018


< 왕건군(王健群),「고구려족속탐원(高句麗族屬探源)」『學習與探索』53 : 1987-6] >
“고구려는 부여(夫餘)에서 왔고 부여는 숙신(肅愼) 계통의 퉁구스족, 즉 후대의 여진족이므로 고구려인도 여진족과 동일하다”

ㄷ. 고구려(마한), 백제(변한)이 된 기자조선(기자숙신)

고구려와 백제와 발해는 '북부여(北夫餘)'의 후예가 아니라 산둥성 추현 부산에 있었던 '부유'의 후예이다.
복희가 산둥성 추현 부산에 있었었던 부유족이며, '부유'가 '부여'다! 그러므로 고구려와 백제와 발해의 시조는 복희다.

"위지에 이르기를 위만이 조선을 공격하여 조선왕이 좌우궁인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서 남쪽으로 가서 한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건국

하고 이름을 마한이라 하였다. ... 최치원이 말하길 마한이 고구려이다."
魏志云 魏滿擊朝鮮 朝鮮王準率宮人左右 越海而南至韓地開國 號馬韓 ... 崔致遠云 馬韓麗也
<삼국유사 권1 기이1 마한>

"백제는 옛적 래이(來夷)이며, 마한(고구려)의 족속이다."
百濟舊來夷馬韓之屬
<양직공도(梁職貢圖) 백제국기(百濟國使)>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http://db.history.go.kr/id/ko_043_0010_0010

“(백제의) 언어와 복장은 대체로 고려와 같다.”
(百濟) 言語服章略與高麗同
<南史 唐·李延壽 夷貊(남사 당·이연수 이맥)>

"백제는 ... 마한(고구려)의 족속이다."
百濟舊來夷馬韓之屬
<양직공도(梁職貢圖) 백제국기(百濟國使)>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http://db.history.go.kr/id/ko_043_0010_0010

ㄷ. 발해가 된 기자조선(기자숙신)

"발해는 옛적 고려국이다."
渤海郡者 舊高麗國也
(발해군자 구고려국야)
<속일본기 신구 4년 9월12월 29일조>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려(高麗)의 종족이다."
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舊唐書(구당서)』 권199하 열전149하 북적 발해말갈(渤海靺鞨)조>

"발해는 본래 말갈(靺鞨)이라 불렀는데, 고려의 종족이다."
渤海本號靺鞨 高麗之別種也
<『신오대사』 권74 사이부록(四夷附錄)3 발해조>



II. 일본 나라 이름의 유래

중국에서 백제를 해뜨는 곳이라 해서 일본이라 불렀죠.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36435.html



‘예군’(禰/軍:613~678)이란 인물의 묘지명 문장에 새겨진 ‘일본’ 은 백제의 다른 표현이다.
중국에서 백제를 해뜨는 곳이라는 의미로 일본이라 불렀고 왜국은 ‘해좌(海左)’, ‘영동(瀛東)으로 표기되었다."
ㅡ 도노 하루유키 나라대 교수

701년 백제유민들이 왜의 국호를 일본으로 바꿨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倭國更號日本. 自言, 近日所出以爲名
왜국이 일본으로 국호를 바꾸었다. '일본이 된 원인은 왜국이 해 뜨는 곳과 가까워서이다.'라며 왜국이 스스로 말하였다.

<구당서> '동이열전' 일본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 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爲名
일본국은 왜국의 별종이다. 그 나라가 태양 쪽에 있기에 일본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일본, 한국 등 아시아 4개국 유전학자들이 1996년 유전자를 통해 일본인의 기원을 밝힌 논문 - 한국인과 일본인의 유전적 거리는 영(0)이다”
https://www.sciencetimes.co.kr/?news=dna%EC%97%90%EB%8A%94-2%EC%B2%9C%EB%85%84-%EC%A0%84-%ED%95%9C%EB%AF%BC%EC%A1%B1%EC%9D%98-%EC%9D%BC%EB%B3%B8-%EC%9D%B4%EB%AF%BC%EC%82%AC%EA%B0%80-%EA%B8%B0%EB%A1%9D%EB%8F%BC-%EC%9E%88%EB%8B%A4


일본은 신라인과 백제인이 뒤섞여 있죠.
http://shindonga.donga.com/Library/3/04/13/101531/2



http://www.ksmnews.co.kr/default/index_view_page.php?part_idx=321&idx=22536


일본에 고함: KBS 국권 침탈 100년 특별기획 김종석, ‎최지원, ‎고은희

http://news.donga.com/Culture/more24/3/all/20011224/7772500/1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16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58791





"상서대전에서 이르길 바다 동쪽의 모든 동이족은 구려(고리)·부여(부유)·간(한)·맥의 족속인데, ... 상서에서 전하여 말하기를 '바다 동쪽의 모든 이족은 구려(고리)·부여(부유)·간(한)·맥의 족속이며, 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키자 모두 길을 열었도다'라고 하였다."
尙書大傳云 海東諸夷 駒麗扶餘?貊之屬 ... 尙書傳曰 海東諸夷 駒麗扶餘?貊之屬 武王克? 皆通道焉
(상서대전운 해동제이 구려부여간맥지속 ... 상서전왈 해동제이 구려부여간맥지속 무왕극상 개통도언)
<叢史辨疑(총사변의)>

"맥(貊)은 종족명(種族名)이고 예(濊)는 지명(地名) 또는 수명(水名)이라고 보아, 예맥(濊貊)은 9맥(九貊) 중의 일종(一種)을 지칭한

것이다."
<정약용의『강역고(疆域考)』「예맥고(濊貊考)」>

"예(濊)는 예수지역(濊水地域)에 거주하였던 맥족(貊族)이다."
<능순성(凌純聲)의『송화강하족적혁철족(松花江下游的赫哲族)』p. 30>



===



라는 내용이 있는데, 사실인 지 정확한 내용인 지 잘 모르겠네요. 님이 확인해 보시고 참조만 하세요.

2018.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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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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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유목민족과는 좀 차이가 있었긴 합니다만 그게 결정적인 이유는 아닌 것 같고요, 장수왕 이래 남수북진의 자세를 버리고 북수남진, 즉 백제와 신라를 공격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던게 원인인것 같습니다. 장수왕 이전에는 북쪽의 선비족과의 싸움에서 크게 지는 바람에 국력이 한동안 약해져있었습니다. 연개소문이 집권했을 당시에는 중원진출을 시도했고 실제로 일부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보면 그런 기록이 나옵니다.
하지만 수~당과의 전쟁으로 이미 국력을 많이 소진한 고구려는 결국 당을 당해내지 못합니다. 청이 몽골과의 전쟁으로 쇠퇴중인 명을 이긴 것과는 좀 차이가 있죠. 송나라의 경우에는 나라 자체가 전쟁을 지양하는 편이여서 군대가 약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은 아무래도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로 가거나 아니면 당의 분산통치방식때문에 흩어지기도 했고 말갈인도 고구려인의 일부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도움이 됐나요?

2018.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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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신

1. 일단 고구려는 기마민족이라기 보다 다민족연합국가로 보는게 맞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를 민족주의로 나누긴 힘든 시기입니다

민족주의가 일반민중까지 내려가는건 어디까지나 유럽에서도 근대이후이며 동양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고구려가 팽창주의를 펼친건 광개토대왕때부터입니다 그전엔 강력한 한나라에게 나라가 거의 멸망할뻔했고

그뒤에도 계속 중국과 대결했습니다 장수왕은 확장을 북부가 아니라 한반도로 내려오게 되는거죠

그리고 그 뒤에 중국엔 강력한 통일국가들이 들어서게 되는거죠


더구나 기마민족들이 팽창하는 시기를 보면 중원국가들이 나약한 국가 혹은 비실되는 상황이엇습니다

또한 그 기마민족들이 완충세력역할을 하기도 했고요


고구려는 애초에 그 지역과 자신들의 지역을 확실히 나누었던듯 싶습니다

즉 저기는 저들의 땅 여기는 우리의 땅이라고 말이죠


고구려의 팽창주의도 어디까지나 안전과 경제를 위해서지 정복을 위해서가 아니라는게 학자들의 평가입니다

정복과 전쟁은 전혀 다른 문제니까요


4 고구려 유민이 사라졌을까요 상당숫자는 당나라로 끌려가 노예생활을 하기도 하고 일부는 중국에 뿌리를

내리고 살게 됩니다 흑치상지같은 사람도 있죠

그리고 고구려시기에도 말갈은 피지배층이라고 단정지을순 없을 듯 합니다 생활양식이 다르니

그저 고구려와 정치적 유대를 가지고 서로 같이 산것일뿐인 거로 보는게 맞을듯 합니다

계속 당의 지배를 받으며 살거나 발해의 세력에 흡수되어 살거나 아니면 일부는 신라로 들어가

살수도 있고요


역사란 단 몇줄로 모든걸 판단하거나 추측해야 합니다 그게 쉬운것도 아니고 당시와 현대의 인식차로

복잡해지기도 하죠

2018.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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