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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요즘 개신교에 경고등이 켜지고 있다?
psk8**** 조회수 5,463 작성일2008.07.2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5&sid2=226&oid=081&aid=0001963945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12048&section=sc1

 

요즘 개신교에 경고등이 켜지고 있다. 요는 세도를 부릴려 한다는 점이다.

SBS에 찾아가서 방송 보이콧을 하지않나? 일제때 제국주의 열강과 침략을

옹호한일 없다 하질않나? 하지만 지금 하는짓으로 볼 때 틀린말이 아니다.

 

뉴라이트등으로 교과서를 일제에 유리하게 하고있지 않은가? 멕시코대통령

살리나스처럼 국부를 미국에 유리하게 하거나 쇠고기 선물하고 있지 않은가?

언론을 옥죄이려는것도 촛불이 북한지령이라는것도 모두 개신교장로들이다.

 

이들은 무늬만 크리스챤인 계집종 하갈의 자녀요 육체를 따라 난자들이다.

복음을 통제도구로 바꾼자들이다. 복음을 이념숭배 도구로 변질시킨자이다.

입이 열개있어도 복음을 체제유지수단으로 처형도구로 만든단게 말되는가?

 

왜 방송을 통제하려하며 표현자유를 막으려하며 ‘입’들을 단속하려 하는가?

그것은 거짓을 낳기위한 포석 아니겠는가? 사탄을 하나님되게 하려는건가?

니들이 허물이 없고 찔리는게 없다면 선악나무 생명이다 시도를 그만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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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한국 역사) [親日派]

 

친일행위의 성격에 따라 크게 지주·자본가, 지식인, 경찰·관료·군인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들 중에는 자진해서 친일을 한 자도 있고, 피동적으로 친일을 한 사람도 있었다. 친일 지주·자본가들은 국방비, 비행기 및 금품헌납, 총독열전각(總督列傳閣) 건축 등 친일활동을 하는 한편 도·부·읍·면 의원이 되어 일제가 조선을 쉽게 지배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 임전보국단·총력연맹·시국대책조사위원회 등의 친일단체에 가입하여 친일을 선동함으로써 일제의 수탈에 동조했다. 이들은 친일행동을 자발적으로 수행하기보다는 그들의 계급적 이익과 식민체제 속에서 수동적으로 자행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민족사회의 지성을 대표하는 지식인들 중에 친일행위를 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조선문예회·조선문인협회·조선임전보국단·국민총력조선연맹 등의 친일단체에 가입하여 이들 단체가 주최하는 각종 행사에 참가하여 지원병·학병 지원을 선동하고 강연·방송·좌담회·담화발표 등을 하여 내선일체·황도정신 고취, 총력체제의 생활화나 내핍을 강조했으며, 한편으로는 시·소설·수필·논문 등의 친일작품을 썼다. 또한 유명 미술가들 중에 일제의 전시체제에 맞추어 전쟁동원 분위기를 조성하는 그림을 그리는 친일미술파가 등장했다. 이러한 지식인의 친일행위는 국민의식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친다는 데서 지주, 자본가나 경찰, 관료·군인의 친일행위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달랐다.

 

한편 일제식민체제의 상징적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친일계층인 경찰·관료·군인이 있었다. 일제에 의해 식민통치의 말단집행요원인 경찰로 충원된 조선인들은 식민정책, 즉 민족말살정책과 민중수탈정책을 직접 집행했다. 즉 일제의 손발이 되어 조선인에 대한 인적·물적 수탈을 할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사상범 등의 검거·색출·투옥·고문을 자행했는데, 이는 일제가 직접적인 악행을 조선경찰의 손에 의해 저지르게 함으로써 민족분열을 도모하려는 정책에 말려든 결과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때 친일을 한 관료층으로는 고등문관 출신의 고급관료와 면장·면서기 등 말단관료로 나눌 수 있다. 고등문관 출신의 관료는 주로 군수·변호사·검사 등을 하면서 식민체제에 기생하는 존재로서, 고등경찰과 함께 친일파의 대표적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말단 면장·면서기 및 동회직원들은 경찰과 협조하여 식민통치의 인적·물적 수탈정책을 직접 수행했다. 또한 일본군인이 된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 중에는 민족의식이 있거나 독립운동과 연계를 맺으며 활동한 사람도 있었다.

 

8·15해방 후 중간파나 좌파는 자주민주국가 건설을 위해 친일파의 척결 또는 배제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런 반면 우파는 주권을 찾고 정부가 안정된 후에 처단하자는 시기상조론, 세금을 낸 모든 국민이 친일을 한 것과 같으며 대다수 친일파도 생계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했을 뿐이라는 식민지환경론, 국가건설에 친일인재의 전문기술과 능력이 필요하다는 친일인재유용론, 전범자는 전승국인 연합국만이 규정하고 처벌할 수 있다는 법적·논리적 불가론, 친일파 처단은 민족을 분열시키고 사회적 혼란을 가져온다는 민족분열론 등을 주장하며 친일파의 척결에 반대했다. 친일파 척결에 대한 여론이 높아지면서 1947년 7월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은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을 제정·통과했으나 이 법안은 미군정의 강력한 반대로 포고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1948년 8월 제헌국회에서 다시 거론되어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10월 국회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구성하여 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이승만과 경찰에 의해 계속 방해당했고, 결국 1949년 5월 국회 프락치 사건, 6월 현직 경찰간부의 구속에 대항하여 경찰의 반민특위습격사건 등을 겪으면서 와해되었다. 9월에는 '반민족행위처벌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됨으로써 친일파 척결작업은 일단 막을 내렸다. 반민특위가 실제로 활동한 것은 1949년 1월부터 공소시효기간 마감인 8월까지로, 총취급건수는 682건, 검찰부의 기소건수는 221건, 재판부의 판결건수는 40건이었다. 그중 징역 이상의 형을 받은 사람은 14명에 불과하며, 이들도 1950년 봄까지 재심청구 등으로 감형되거나 형집행이 정지되어 모두 석방되었다. 친일파들은 해방 후에도 거의 척결되지 못하고 대부분 새로 들어선 대한민국 정부에서 주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즉 자본가·지주들은 친일파 척결, 토지개혁 등을 주장하는 사회변혁 세력과의 투쟁에서 이기고 자신들의 이익과 생존을 지켰다. 친일지식인들도 해방 후 한민당을 결성하여 보수 우익세력으로서 좌익세력과 투쟁하여 사회변혁 세력을 제압하고 정치·사회·문화 모든 방면에서 실권을 차지했으며, 친일미술인들은 비중있는 유명미술인으로 존재했다. 또한 식민지체제에서 가장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경찰·관료는 해방 후에도 처형되지 않고 오히려 미군정기에 다시 경찰로 충원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이승만 정부에 의해 다시 받아들여짐으로써 지배적·실권적 지위를 차지했다. 1960년 5월 7일자의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전국 경찰 총경의 70%, 경감의 40%가 일본경찰 출신이었다고 한다. 또한 제1공화국의 친일협력자를 보면 각료의 31.3%, 대법원의 68.4%였다고 한다. 일제시대의 군인도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에서 군부 내의 지배적·실권적 위치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친일파는 척결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권력과 금권력을 배경으로 점점 확고한 위치를 굳혀갔다. 이러한 사실은 식민지에서 해방된 민족국가의 명분이 제대로 설 수 없게 하며, 민족정기 확립에 해악을 끼쳤다. 또한 이들은 국가의 핵심적 세력으로 존재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을 주도해감에 따라 우리나라의 참된 민주발전과 경제발전을 저해하며 파행적인 정치·경제·사회 발전을 주도해갔다.

 


9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예배당(오른쪽)과 명동서숙(왼쪽)이 보존되고 있다.  봉화=김용두 기자

 

 99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척곡교회는 경북 봉화군 법전면 산골마을 척곡리에 위치해 있다. 현재는 인구가 줄어 10여 명의 성도가 이 교회를 지키고 있지만 경북 북부지방 초대교회들 중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했었다. 선교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을 성도들을 중심으로 세워져 의미가 깊은 척곡교회는 교회 부지안에 교육기관까지 설립, 조국 독립을 위해 후진 양성에도 힘썼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척곡교회가 세워진 때는 1907년. 대한제국 탁지부 관리를 지낸 김종숙 목사에 의해 교회가 세워졌다.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김 목사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야소교(예수교의 음역어)를 믿어야 조국을 개명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됐다. 그러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듬해 가족들을 데리고 처가가 있던 봉화군으로 낙향해 전도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낙향 초기 김 목사는 30리 떨어진 상운면 문촌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이내 척곡교회 성도들과 함께 기도실을 세웠고 이것을 교회로 발전시켰다. 이어 ‘명동서숙’이라는 교육기관을 세워 민족 교육에도 힘썼다. 독립운동에도 앞장 섰던 김 목사는 1926년 교단 목사 그리고 성도들과 함께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보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적발 돼 모진 고초를 당했다. 광복 직전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민족의 구원과 독립을 위해 애썼던 척곡교회는 이제 김 목사의 손자인 김영성 장로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김 장로는 교직생활 은퇴 후 척곡교회를 지키기 위해 아내 안난희 권사와 재작년부터 이 곳에서 생활하며 교회의 역사성을 외부에 알리는데 힘쓰고 있다. 또 82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100년사 발간 및 김종숙 목사 기념관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김 장로의 노력으로 최근 척곡교회는 등록문화재 제257호로 지정됐다.

 

 척곡교회는 당시 기역(ㄱ)자 내지 일(一)자로 지어진 초대교회들과는 달리 9칸 규모의 정사각형 기와집 예배당으로 지어져 역사적 가치가 높고 문서고에 보존되어 있는 초기 교적부를 통해 당시 경북 지역 기독교적 상황을 살펴볼 수 있어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존·관리가 필요하다고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011-9935-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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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현실적 차선" 구국의 몸부림-기독교와 항일 무력투쟁




독립운동에 가담한 애국지사를 십자가형에 처하는 일본 제국주의자들.



구한말 항일의병장 구연영(1865~1907). 무인 집안 출신으로 30세가 되던 1895년 경기도 이 천에서 봉기했다.

한말의 의병운동은 1895년 일본에 의한 민비시해 사건과 단발령으로 인한 을미의병, 을사 보호조약 '체결' 이듬해에 일어난 병오의병(1906) 그리고 헤이그밀사 사건에 이은 고종의 강 제퇴위와 한국군 해산에 반발한 1907년의 정미의병으로 나뉜다. 구연영은 을미의병이었다.

거병 초기에는 몇몇 국지적 전투에서 승리, 서울으葡螡 턱 아래인 남한산성까지 진격했으 나 결국 일제의 화력에 밀려 경상도 땅까지 쫓기다가 의병을 자진해산, 봉기 6개월만에 고 향으로 돌아갔다.

무력을 통한 항일은 더 이상 실효를 거둘 수 없다고 판단, 무력항쟁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구국운동을 추진해야겠다는 생각이었을까. 아무튼 그는 6개월간의 칩거를 거쳐 1897년 서울 남대문 상동교회의 스크랜턴 선교사를 찾기에 이른다.

아들과 함께 의연한 최후




구연영 전도사

일교동기는 기독교를 민족운동의 방편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다분히 현실적인 것. 그러나 열살 아래인 상동교회 민족운동가 전덕기 속장과의 만남은 거사 실패라는 뼈아픈 경험을 한 그에게 새로운 운동가로 거듭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전도인으로서의 3년과 엡윗청년회 활동을 통해 그는 종내 의병운동이 내세운 척사위정의葡 논리에 근거한 봉건주의적 존왕의식에서 나온 민족의식이 아니라 당시 기독교가 가르친 주 권재민의 민주적 민족의식을 갖추게 된 것이다.

1899년 세례를 받고 이천 광주 지역의 첫 교호인 덕뜰교회 설립을 시작으로 구연영은 전도 와 교회개척에 매진했다. 슬하에 정서 성서 완서 종서 등 아들 넷을 두었는데, 맏이 정서도 이때 권사가 되어 부자가 함께 이천 일대 24개 교회를 돌보았다.

구연영은 1905년 정식 전도사가 되었다. 이천읍 19개 교회 1천3백여 교인에게 설교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민족운동의 성공에는 민중의 호응 지지가 필수적임을 깨닫고 있던 그는 교 인들에게 민족의 현실을 주지시키는 한편 계몽을 통한 민족의식고양에 전력함으로써 새차원 의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특히 1904년 일제의 꼭두각시로 설립된 관변단체 일진회의 정체를 폭로하기에 주저함이 없 었다. 아들 정서와 함께 교회청년들을 중심으로 구국회도 조직했다.

병오 정미의병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잦은 일진회 규탄 강연으로 일본 측은 '경성 동편 10여 군에 구연영만 없으면 기독교도 없어질 것이요 배일자도 근절될 것이다'(독립혈사)고까 지 했다. 결국 서사로 데리고 있던 자의 밀고로 아들 정서와 함께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그의 전도집회에 참석했다가 큰 감동을 받은 한 일본인이 찾아와 피신을 권유했으나 "하나 님 앞에서 떳떳이 살다 떳떳하게 죽는 것이 하나도 두렵지 않다"며 피하지 않았다고 한다.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다가 1907년 7월16일(음력) 현재의 이천 미곡시장 동편 미루나무 에 묶인 채 아들과 함께 총살당했다. 그의 나이 44세, 아들이 25세 되던 해였다.

'의병장 출신 순국전도사' 구연영의 일생은 점차 기승을 부리던 당시 일본 세력에 맞선 한 국교회의 한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의병거사와 패퇴, 입교, 민족주의 복음사업, 그리 고 의연한 최후에 이르기까지 모두 시대적 한계와 신앙 안에서 열리는 미래의 가능성을 시 사하고 있다.

그가 '귀신들린 한 여인'을 기도로 고친 이야기와 노루목교회에서 일할 때 부정을 저지르던 지방관리와 맞서 싸워 이긴 이야기는 그의 삶에서 역설적으로 하나가 되고 있으며 동시에 이것은 당시 교회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네 교회사에는 구연영의 경우와는 달리 독실한 기독교인이면서도 항일 무력투쟁에 앞장선 인물 또한 적지 않다.

기독교인들의 항일운동이 급진적인 무력항쟁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을사조약 이후부터다. 그러나 교회조직에 매이지 않은 개별적 인물들의 테러활동이었다. 상동교회 전덕기와 정순 만 등은 평안도 장사들을 모아 수차례에 걸쳐 을사오적 암살을 기도했고, 평양교인 최재학 이시영은 격문을 뿌리고 무력시위를 감행했다.

우덕순 이토오 암살 가담




재판받는 안중근 (오른쪽 끝)과 우덕순 (오른쪽 두번째)

정미 7조약이 조인되자 정재홍은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하려다 실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 기도 했다. 또 1908년 장인환은 일본의 조선침략 앞잡이 노릇을 하던 미국인 스티븐스를 샌 프란시스코에서 암살, 우리 민족이 살아있음을 세계 만방에 알렸다.

을사조약 후 북간도로 망명, 의병을 조직해 천주교인 안중근과 함께 함경도 일대에서 활약 한 우덕순(일명 우연준)은 1909년 이토 암살을 계획했다.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수 너를 만났도다…앉을 때나 섰을 때나 앙천하고 기도하길 살피소 서 살피소서 주예수여 살피소서 동반도의 대제국을 내 원대로 구하소서…"

우덕순은 이런 거사가를 남기고 이토의 첫 기착역인 채가구역으로 향했다. 열차가 예정대 로 채가구역에 멈췄더라면 하얼빈역에 대기하고 있던 안중근은 할 일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 다.

안중근의 쾌거 소식을 들은 이재명은 매국노 이완용 송병준 일진회장 이용구 등을 제거하 기로 결심하고 대부분 서북지방 기독교인인 김정익 이동수 등 동지를 모았다.

1909년 겨울 이완용이 명동성당에서 열리는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 한 이재명은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있다가 인력거를 타고오는 원흉을 습격했다. 현장에서 체 포된 그는 이듬해 9월 찬미가 207장 '예수가 나를 거느리심'(현재 444장)을 담담히 부른 후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가 아직 옥중에 있던 8월22일 부상에서 완쾌 된 이완용은 한일합방을 이루고야 말았다.

역사의 기록은 그렇다. 그러나 이들의 무력항쟁은 합방이후 북간도 등에 해외 독립운동 기 지가 개척되는 단초가 되었고 3·1운동 이후까지 국내외 숱한 민족운동가에게로 그 맥을 이 어내렸다.

1919년 9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강우규장로는 신임총독 사이토에게, 1921년 김익상 은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졌다.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김상옥은 일경과 격전 끝에 자결했다.

기독교인의 무력항쟁은 '폭력행사'가 기독교 교리와 윤리에 비춰볼 때 얼마나 정당화될 수 있나 하는 문제를 남긴다. 나치스의 폭정에 항거, "미친 사람에게 버스 운전을 맡길 수 없 다"며 히틀러 암살을 기도한 본 회퍼 목사의 신앙고백이 있지만 일제의 조선 식민지화와 시 대적으로 병존해 성립 발전해온 한국기독교에도 불의에 항거하는 폭력행사가 '형식적 차선' 일 경우도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제국주의 침락에 대한 대응 이데올로기로도 작용한 한국교회는 오늘날까지 정치성과 종교 성 양면을 공유하고 있다. 항일 무장투쟁에 가담했던 교인들은 대부분 정치·사회적 추이에 민감했던 서울과 서북계 및 해외망명 신지식인 계층이 큰 흐름을 이뤘다.

교계 일각에선 테러 비난도

을사조약부터 합방까지의 5년 여간에 선교사와 조직교회로 대표되는 당시의 제도교회는 민 족운동에 소극적인 일면이 있었다.

망국의 울분을 달래는 구국기도회 등은 종종 열렸으나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한국교회 를 보호 유지한다는 차원에서 선교사들은 일본과의 마찰을 피하려 했고 정교분리를 내세움 에 따라 무력항쟁은 오히려 비난대상이었다. 그러나 신앙을 통해 민족과 조국을 재발견한 열사들은 악의 세력과 싸우는 '십자가 군병'이라는 구국적 신앙으로 무장한 사람들이었다.

교육 언론과 함께 구한말 민족의식 형성에 크게 기여한 성경의 출애굽사건과 십자가 부활사 건은 이들에게 '복음'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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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병천 유관순 기념 '매봉교회'
"주여 이 소녀에 용기와 힘을…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 ‘유관순 기념교회’로 더 잘 알려진 매봉교회. 현재 보이는 건물은 1998년 새로 지은 것으로, 원래의 건물은 일제에 의해 불에 탔다.
천안에서 버스로 1시간여 소요되며, 2∼3시간 마다 한대씩 운행하는 버스를 이용해 경기도 병천면 용두리에 내렸다. 마을에서는 ‘유관순 기념교회’로도 불리는 매봉교회.

감리교 소속으로,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은은한 빛깔의 갈색 벽돌로 제법 멋스럽게 지어진 단아한 모습의 건물이다. 건물 정면 벽에는 3·1운동을 상징하는 철제조형물이 부착돼 있고, 교회 바로 옆에는 유관순이 태어난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단촐한 ‘ㄱ’자 한옥 초가집이다. 원래의 가옥은 거사 당시 일제에 의해 유품 한 점없이 전소됐으며, 지금 볼 수 있는 집은 1991년 정부에 의해 새롭게 복원된 것이다. 유관순의 생가는 사적 제203호로 지정돼 있다.

1919년 음력 3월 1일, 17세 소녀였던 유관순은 병천(아우내)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다 일본 헌병에 끌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아우내장터는 이곳 생가로 부터 걸어서 30,40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유관순은 당시 서울에 유학해 이화학당에 다니고 있던 학생이었다. 그러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우들과 결사대를 조직해 만세운동에 앞장 섰고, 곧 이어 떨어진 휴교령으로 이곳 고향으로 내려왔다. 독립만세운동으로 서울에서는 큰 소요가 일었건만, 아직 아우내 사람들은 그 소식조차 전해듣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천안 인근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 산발적으로 벌어진 작은 규모였던 듯 하다. 이에 유관순은 이곳에서의 대규모 거사를 결심하고, 동네사람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며 서울에서의 만세 소식을 전한 뒤, 이들을 설득했다. 뜻을 같이 하겠다는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났다. 비록 나이 어린 소녀였지만, 그의 말을 들은 어른들은 마침내 감동되어 동리 유지들은 물론, 지방 향교의 유림들 까지 찬동하게 됐다.

낮에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전하고 밤이면 몰래 태극기를 만들었다. 준비는 빠르게 진행돼 갔다. 이윽고, 서울에서 대한독립만세 목소리가 처음 울려 퍼진지 정확히 한달 후인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장터에서도 같은 함성이 우렁차게 터졌다. 이날 만세시위에 참여한 사람은 모두 3,000여명에 달했으며, 그 중 49명이 일본 군경의 총칼에 죽었다. 부상을 당한 사람은 부지기수였다. 유관순의 부모도 이날 아우내장터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관순이 이토록 큰 일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기독교신앙과 교회의 역할이 컸다. 정신적인 면에서는 물론, 실제 행동에서도 그러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유관순이 모태신앙을 가진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이 낯설게 들리는 듯 하다. 유관순의 부모는 가난하긴 했지만 일찌기 기독교를 받아들여 개화한 사람들이었다. 그의 주변 친지들 역시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유관순의 작은아버지 유중무는 매봉교회 전도사로 사역했으며, 일설에 의하면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이 매봉교회를 설립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매봉교회가 세워진 것은 1899년 스웨러 선교사에 의해서 였다는 설이 더 설득력 있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매봉교회를 누가 세웠느냐가 아니다. 이러한 설이 있을 만큼 독실한 기독교 집안 가풍 속에서 유관순이 성장했다는 것이며, 어려서 부터 신앙생활을 했다는 점이다. 그가 이화학당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공주에서 선교사업을 하던 사애리시 선교사(史愛利施·Alice J. Hammond, 샤프 부인)의 추천 덕에 가능했다. 이화학당 재학시절에는 가까운 정동교회에 다녔다. 이화학당 역시도 미션스쿨이다. 아버지는 늘 자녀들을 붙들고 ‘열심히 공부해 민족의 일꾼이 되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또 정동교회의 손정도 목사와 이화학당의 박인덕 선생은 그녀들에게 ‘조선의 막달라 마리아’가 되라고 가르쳤다. 사실 아우내에 내려 온 유관순은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직전 매봉산에 올라 3일동안 밤낮으로 기도했다고 한다.

매봉산은 그의 생가가 있는 용두리 뒷산이다. 유관순이 기도할 때마다 함께 데리고 갔던 조카 유제한은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사흘동안 기도만 했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뭔가 계시를 받은 듯 미친 듯이 기도를 마친 유관순의 얼굴은 온통 환하게 빛이 났고 말에 힘이 있었으며, 담대한 모습이었습니다.”

이처럼 조국 독립에 대한 유관순의 의지에 강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것이 기독교 신앙이었다면, 그가 서울에서 아우내로 내려와 실제로 만세운동을 벌일수 있었던 데에는 주변 교회와 목사, 그리고 교회 신도들의 목숨을 내건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아우내에 내려온 유관순은 가장 먼저 천안읍 교회의 안창호 목사를 찾아 만세운동에 관한 일을 논의했다. 안 목사는 천안지역 만세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사람이다. 매봉교회에서는 전 교인이 만세운동에 참여하기로 뜻을 모았다. 유관순을 어려서부터 지켜봐 왔던 매봉교회 신도들이었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유관순은 거사 전날인 3월 31일 매봉산에 다시 올라 봉화를 밝혔다. 이를 시작으로 천안, 안성, 진천 청주 등 원근 24개 산봉오리에서 봉화가 붉을 밝혔다. 그렇게 타오르던 봉화가 서서히 꺼질 때 즈음, 4월 1일의 해가 빛을 발하며 서서히 떠올랐다.

유관순은 거사 직전 기도를 올렸다. “오오 하나님이시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 왜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유관순기념 비문)

그렇게 역사의 한 장이 새로 쓰여졌고, 유관순은 처절한 최후를 맞이했다. 유관순이 살던 작은 초가집도, 매봉교회도, 용두리마을도 모두 불에 탔다. 그리고 일제탄압을 견디다 못한 매봉교회는 1922년 급기야 교회 문을 닫기에 이르렀다.

현재의 매봉교회는 1966년 임지웅 목사가 천막을 치고 다시 목회를 시작한 것을 계기로, 같은 해 유관순의 모교인 이화여고에서 모금운동을 벌여 지은 것을, 98년 다시 각계의 도움을 얻어 새로 건축한 것이다. 지금은 박윤억 목사가 사역하고 있다. 매년 3·1절이면 기념예배를 드리고, 10월에는 유관순 추모예배를 올린다. 교회 안에는 조촐한 숙박시설도 준비돼 있어, 전국의 각 교회 학생부에서 수련회를 오기도 한다.

아이들이 방문하면 박 목사는 이들을 데리고 매봉산에 오른다. 매봉산 자락 곳곳에 흩어진 유적들을 하나 둘 찾아다니며 설명해 주다 보면 어느새 산 정상이다. 여기서 다 같이 묵념을 하고 만세삼창을 크게 외친다. 간혹 일본인 관람객도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박 목사는 몇해전 있었던 일을 들려준다. 일본청년 20여명이 이곳을 찾았다. 박 목사는 이들에게 3·1운동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며, 교회 지하의 전시실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일행중 한 청년이 기절을 한 것이었다. 박 목사는 깜짝 놀랐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러더군요. 저는 일본청년들도 대부분 다 아는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하고 일제강점기에 우리가 겪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구태여 이들을 자극할 필요까지는 없어 정말 심했던 일은 이야기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제 이야기에 충격을 받고 기절을 했던 것입니다. 그 청년은 어릴 적부터 과거에 일본이 한국에 좋은 일을 많이 했다는 것만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소름이 오싹 끼치더군요. 앞으로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다시 나라를 빼앗길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 목사와 함께 그 일본 청년이 쓰러졌다던 지하 전시실을 찾았다. 유관순이 연설을 했던 단상, 서대문 형무소에서의 기록, 그리고 독립만세운동 전반에 걸친 사료들을 볼 수 있었다.

함께 둘러보면서 박 목사는 혼잣말하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3·1운동 당시 조선 땅 2,000만 인구 중 기독교인의 비율은 불과 1.5% 정도였습니다. 20만명이 조금 넘는 정도였죠. 하지만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민족대표 33인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만큼 나라와 민족을 이끈 많은 분들이 기독교인이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인구의 25%정도 입니다. 그럼에도, 기독교인들이 그때만큼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커녕, 오히려 좋지않은 일로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이병돈 원로목사에게 듣는다] 한국교회의 현재와 나아갈 방향
이병돈 은평성결교회 원로목사가 45년 목회를 정리한 회고록 ‘하나님이 맡긴 하나님의 사역’(들소리)을 펴냈다.

이 원로목사는 이 책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신앙인의 경건성,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순종,규칙적인 기도생활 등의 개인 신앙생활을 강조했다.

또 목회자와 제직,원로목사와 담임목사의 관계 정립 방안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는 1960년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해 동도교회 은산교회 수원교회 은평교회 등에서 목회했으며 1998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과 서울신학대학교 재단이사장,2004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공동회장 등을 역임했다.

지난 4월 은퇴한 후 부흥사경회와 해외사경회,목회 세미나 등을 인도하고 있다.

이 원로목사를 만나 한국 교회의 현재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들어보았다.

그는 한국 교회가 사회에 희망을 줄 수 있는 방안을 새로운 시각으로 찾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각 교단과 교회가 함께 통일시대를 대비,북한 교회 재건 방안과 재정 분담 원칙 등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광복 후 한국 교회의 활동과 영향에 대해 정리한다면. △구한말 이후 격변의 시기에 한국 교회는 사회의 등불이며 희망이었습니다.

1910년대 국민의 1%에 불과했던 20만명의 기독교인들이 전국 각지에서 3·1운동을 주도하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또 신교육을 실시하고 사회의 그늘진 곳을 돌봐왔다는 사실은 국민 누구나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조금 오래 된 자료이긴 하지만 한 기관의 1989년 통계를 보면 기독교 사회사업 기관이 889개에 달합니다.

가톨릭 227개,불교 105개에 비하면 월등하게 많습니다.

지금은 더 늘어났을 겁니다.

-1990년대 이후 교회 성장이 눈에 띄게 줄고 있는데 그 원인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크게는 영성과 경건성 상실,기독교 연합사업의 약화,무분별한 선교경쟁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선교 120년,짧게는 50∼60년만에 1200만명의 교세를 가진 종교로 성장했습니다.

그 배경에는 앞서 말한 사회 여론을 주도하고 음지를 돌보는 일에 앞장선 것은 물론 성도 개개인의 경건한 생활과 비신자들의 영성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성장 중심으로 정책을 펴다보니 경건성을 잃게 됐고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활동도 축소됐다고 봅니다.

급격하게 변하는 사회 문화에 적응하지 못한 점도 큽니다.

교파나 교회가 개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교파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사회 사역에 대해 분업?협업체계를 마련해야 합니다.

교파 중심의 선교도 재고해야 합니다.

한 지역에 교파별로 세운 신학교가 10개인 곳도 있습니다.

재정과 인적 자원의 낭비일 뿐 아니라 선교지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줍니다.

사회에 희망을 주는 교회로 거듭나야 합니다.

-사회에 희망을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제부터라도 교역자를 중심으로 내면적 회개운동을 시작해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의 신뢰를 회복할 수도,새로운 부흥을 기대할 수도 없을 겁니다.

요즘 부흥회를 인도하면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는 물론 다른 사람의 죄까지도 회개하는 기도를 하자고 제안합니다.

나와 가족만을 위한 기도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성숙한 기독인의 기도입니다.

교회의 성결성도 제고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성화의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낮추고 되돌아보면서 성숙할 수 있도록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개인의 경건성 회복 운동도 병행해야 합니다.

-북한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한국 교회는 오래 전부터 북한 교회 재건운동을 준비해왔습니다.

그러나 말만 무성할 뿐 구체적으로 준비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요즘 남북관계를 살펴볼 때 통일이 멀지 않은 듯 느껴집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느 때 북한의 문을 여실지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가 제대로 준비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북한의 문을 여전히 닫아놓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교회는 교회대로,교단은 교단대로 북한 선교와 교회 재건을 위한 기금을 조성해야 합니다.

인적 자원도 준비해야 합니다.

교파들이 머리를 맞대고 구체적인 선교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45년 목회를 돌아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어떤 것인지요. △담임했던 교회마다 기억하고 싶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수원교회에서 38일 동안 금식기도했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아 38일만에 금식기도를 중단하긴 했지만 그 기간에 영적 체험을 했고 성령 충만함을 느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인간적인 목회 계획들을 모두 내려놓았습니다.

매일 밤 울면서 내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을 회개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마지막으로 목회 생활 중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국내 18개 교회,해외 31개 교회를 개척했지만 늘 마음속으로 사회복지적 목회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실천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사회복지 요원 양성 사업과 함께 시각장애인을 위한 시설을 마련하고 싶었는데 못했습니다.

제가 한쪽 눈이 안 보이기 때문에 시각장애인에 대해 애틋한 마음이 많았기 때문이죠. 각자의 분량이 다르겠지만 이제부터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그 일에 헌신하고 싶습니다.

전재우 기자 jwjeon@kmib.co.kr (국민일보)

 

 

이하영 민족계몽운동에 앞장선 민족운동가


1.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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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삼 김활란, 한국교회 빛낸 100인?

선정위원도 명단에 올려 '자화자찬'…역사의식 부재 논란

 

한국기독교성령100주년대회(총재 피종진)가 '한국기독교성령100년사 선정위원회'(명예선정위원장 민경배)를 통해 발표한 '성령의 사람100인' 명단에 양주삼, 김활란, 최태용, 윤하영, 백낙준, 고황경, 채필근, 이명직 등 대표적인 친일인사가 대거 포함된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예상된다.

 

한국기독교성령100년사 선정위원회는 9월 초 목회자, 부흥사, 신학자, 순교자, 교육, 선교사, 기도운동, 독립운동, 사회운동, 교회연합 분야의 100인을 선정해 발표했다. 선정 작업에는 민경배, 김의환, 김삼환 목사 등이 참여했다.

 

주최측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성령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기독교 선구자를 엄선했다고 밝혔으나 100인 중 상당수는 친일행각으로 지탄을 받아온 인물이다.

 

신사참배 이단이라 하는 자가 이단이다?

 

교육 분야에 선정된 김활란은 1939년 이화여전 교장에 취임한 '여성박사 1호'로 일부 교육계의 존경을 받아왔으나, 최근 적극적인 친일 행각이 드러나 논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김활란은 3·1운동 당시에는 전도대를 만들어 기독교전파와 민족운동에 매진했으나 이후 변절, '조선부인문제연구회'를 결성했고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애국금채회'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애국금채회는 전쟁 물자를 모으기 위해 결성된 친일여성 단체다.

 

연세대학교 초대총장을 역임한 백낙준은 일제의 횡포가 극에 달하자 친일파로 변신, 각종 언론에 태평양전쟁을 찬양하는 글을 기고했다. 그의 글 '영원히 광망 뻗도록'은 대표적 친일 논설로 알려져 있다. 백낙준은 당시 대표적 친일신문인 <기독교신문>의 편집위원을 지내며 친일좌담회에 참석하는 등 꾸준한 친일활동을 펼쳤다.

 

서울여대 학장을 지낸 고황경은 김활란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애국금채회' 간사를 지냈으며, 일제 활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개최한 순회강연의 강사를 맡아 전국을 순회하기도 했다. 그는 1942년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으로 활약했으며, 1943년에는 <매일신보>에 '징병 감사와 우리의 각오, 건군 정신에 투철'이라는 친일논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양주삼은 신사참배를 찬성한 것은 물론 1938년 국내 기독교를 대표해 일본의 이세신궁 가시하라신궁 등에 참배한 인물이다. 그는 일본의 태평양전쟁 찬양과 학도병 모집에 적극 나섰던 전력을 갖고 있으며 친일좌담회에 참석해 태평양전쟁의 당위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복음교회 감독을 지낸 최태용은 "조선을 일본에 넘긴 것은 신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을 섬기듯이 일본국가를 섬겨야 한다"는 말로 유명하다. 채필근은 신사참배를 두고 "국민 정신 총동원이 필요한 이때 종교인들도 국가에 충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이단이라고 말하는 자야말로 도리어 이단이다"는 망언을 남겼다.

 

윤하영은 장로교 28차 총회에서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 예수교 장로회 연맹'을 조직하고 이사장으로 부임했다. 위 단체는 '종교보국' 미명 하에 일제에 적극 협력했던 단체다. 성결교 총회장을 지낸 이명직은 교단 해체에 앞장섰다가 이후에도 일제에 적극 협조한 사람이다.

 

선정자가 자기 이름 명단에 올려

 

100인 명단에는 이외에도 선정을 주관한 사람들이 이름이 올라 있어, 공정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사업을 주관한 피종진 목사는 부흥사 분야에 선정됐다. 최근 '70대 이하 친일 논의 금지론'으로 물의를 일으킨 바 있는 민경배 목사는 명예선정위원장을 맡았는데, 민 목사의 이름 역시 신학자 분야에 올라 있다. 선정작업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김삼환 목사는 목회자 명단에 올라 있으며, 조용기, 신현균 목사도 눈에 띈다.

 

한편, 명단이 나오자 <국민일보> <기독교신문> <크리스천투데이> 등은 이를 크게 보도했다. 앞으로 '한국기독교성령100년사 선정위원회'는 선정인물의 역사를 정리해 12권 분량의 책을 펴낼 계획이다.

 

다음은 성령의 사람 100인 명단이다.

 

목회자 : 최병헌 이기풍 손정도 전덕기 신석구 양주삼 윤하영 최태용 한상동 한경직 허홍 박성산 강신명 조용기 김삼환

부흥사 : 최봉석 김익두 이기선 이성봉 이용도 박재봉 정남수 박용묵 임영재 신현균 피종진

신학자 : 남궁혁 채필근 이명직 김응조 박형룡 송창근 김재준 박윤선 홍현설 김정준 윤성범 이상근 민경배

순교자 : 한경희 김영국 김영진 주기철 손양원 노형래

교육 : 이승훈 백낙준 김활란 임영신 김교신 고황경 신태식 유상근 김옥길

선교사 : 하디, 언더우드, 아펜젤러, 앨런, 마펫, 클라크, 맬컴 팬윅, 스크랜턴, 헐버트, 제임스 게일, 원일한, 체스넛, 워너 마일스, 윌리엄 노블, 에비손, 길보른, 아처 토레이

기도운동 : 길선주 박귀임 최자실 김우영

독립운동 : 서상륜 이상재 윤치호 서재필 김약연 이동휘 김구 안창호 현순 김규식 조만식 신흥우 유관순

사회운동 : 김마리아 유일한 최용신 장기려 최태섭 김용기 이태영 헤리 홀트

교회연합 : 김필수 김관석 유호준 지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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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친일반민족행위자 708명 명단(2002.2.28 한겨레신문 등)

 

 

 

◇ 사회.문화.예술계 (집중심의 대상 16인)

 

 

▲고황경(일제 국방비지원단체인 '애국금채회'간사, 일제전쟁지원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김활란('애국금채회' 간사,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모윤숙(친일단체인 '조선문인협회' 간사, '국민의용대총사령부' 간사)

▲박인덕(일제 전쟁지원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 실천위원,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송금선(국민총력조선연맹 연성부 연성위원, 임전대책협의회 의원)

▲황신덕(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김은호(일제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내용의 '금채봉납도' 헌납, '반도총후미술전'의 일본화부 심사위원)

▲심형구('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 친일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 서양화부 이사)

▲현제명(친일단체인 '조선음악협회' 이사, 전시선전단체인 '경성후생실내악단' 이사장)

▲홍난파(친일단체인 '조선음악가협회' 상무이사, 친일가요 '정의의 개가' 작곡)

▲이능화('조선총독부 학무국편집과' 편수관,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

▲정만조(경학원 부제학.대제학, 조선총독부 중추원 촉탁)

▲김성수(일제 전쟁지원 조직인 `국민정신 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이사, '임전대책협의회의' 위원)

▲방응모(친일잡지 '조광' 창간, '국민정신총동원연맹' 발기인, 고사포 구입.기증, 조선항공공업사에 자본출자)

▲장덕수(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국민정신선양 각도 강연' 연사, 후생부 후생위원, '징병의 감격을 말함' 등 찬일 논설 다수)

▲권상노(친일강연 '선각자로서' ,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국민정신선양 각도 강연' 연사)

 

 

광복회에서 발표한 친일파 명단

 

 

◇을사오적

 

 

▲권중현(농상공부대신) ▲박재순(외부대신) ▲이근택(군부대신) ▲이완용(학부대신) ▲이지용(내부대신)

 

 

◇ 정미칠적

 

 

▲고영희(탁지부대신) ▲송병준 ▲이병무(시종무과장) ▲이완용(내각총리대신) ▲이재곤 ▲임선준 ▲조중응(농상공부대신)

 

 

◇일진회

 

 

▲김명준 ▲서상윤 ▲송병준 ▲양재익 ▲염중모 ▲윤갑병 ▲윤길병 ▲윤시병 ▲이용구

 

 

◇ 한일합방조약 체결 매국 행위자

 

 

▲이완용(내각총리대신) ▲고영희(도지부대신) ▲민병석(궁내부대신) ▲박재순 (내부대신) ▲윤덕영(시종원경) ▲이병무(친위부장관) ▲조민희(승녕부총관) ▲조중응(농상공부대신)

 

 

◇1910년 합병당시 수작자

 

▲고영희(자작) ▲권중현(자작) ▲김병익(남작) ▲김사준(남작) ▲김사철(남작) ▲김성근(자작) ▲김영철(남작) ▲김종한(남작)▲김춘희(남작) ▲김학진(남작) ▲남정철(남작) ▲민병석(자작) ▲민상호(남작) ▲민영규(자작) ▲민영기(남작) ▲민영소(자작) ▲민영린(백작) ▲민영휘(자작) ▲민종묵(남작) ▲민형식(남작) ▲박기양 (남작) ▲박영효(후작) ▲박용대(남작) ▲박재빈(남작) ▲박재순(자작) ▲성기운(남작) ▲송병준(자작) ▲윤덕영(자작) ▲윤웅렬(남작) ▲윤택영(후작) ▲이건하(남작) ▲이근명(자작) ▲이근상(남작) ▲이근택(자작) ▲이근호(남작) ▲이기용(자작) ▲이병무(자작) ▲이봉의(남작) ▲李完用(백작) ▲李完鎔(자작) ▲이용원(남작) ▲이용태(남작) ▲이윤용(남작) ▲이재학(후작) ▲이재곤(자작) ▲이재극(남작) ▲이재완(후작) ▲이정노(남작) ▲이종건(남작) ▲이주영(남작) ▲이지용(백작) ▲이하영(자작) ▲이해승(후작) ▲이해창(후작) ▲임선준(자작) ▲장석주(남작) ▲정낙용(남작) ▲정한조(남작) ▲조동윤(남작) ▲조동희(남작) ▲조민희(자작) ▲조중응(자작) ▲조휘연(남작) ▲최석민(남작) ▲한창수(남작)

 

 

◇합방이후 수작자

 

 

▲고휘경(백작) ▲민건식(남작) ▲민충식(자작) ▲박경원(남작) ▲성주경(남작) ▲송병준(백작) ▲송종헌(백작) ▲이달용(후작) ▲이완용(후작) ▲이인용(남작) ▲이항구(남작) ▲임선재(자작) ▲장인원(남작) ▲정영두(자작) ▲조중수(자작) ▲최정원(남작) ▲한상억(남작)

 

 

◇일본 귀족원 의원

 

 

▲김명준 ▲박상준 ▲박중양 ▲송종헌 ▲윤치호 ▲이기용 ▲한상용

 

 

◇ 일본제국의회 의원

 

 

▲박춘금(중의원) ▲이진호(귀족원)

 

 

 

◇ 애국자 살상자

 

 

▲김극일 ▲김대형 ▲김덕기 ▲김성범 ▲김영호 ▲김우영 ▲김태석(강우규의사 체포한 고등경찰) ▲노기주 ▲노덕술 ▲도 헌(형사) ▲문용호 ▲박종옥 ▲서영출 ▲양병일 ▲이성근(평북 고등과장) ▲이성엽(형사) ▲이원보(경기도 형사과장) ▲정성식(북부산경찰서 고등계주임) ▲최 연 ▲최석현(애국지사 장진홍 체포) ▲하판낙 ▲허 지

 

 

◇ 작위를 받은 자

 

 

▲고흥겸(백작) ▲권태환(자작) ▲김석기(남작) ▲김세현(남작) ▲김영수(남작) ▲김호규(자작) ▲남장희(남작) ▲민영옥(남작) ▲민철훈(남작) ▲민형식(자작) ▲민홍기(자작) ▲박부양(자작) ▲박승원(남작) ▲이규환(남작) ▲이기원(남작) ▲이능세(남작) ▲이덕용(후작) ▲이범팔(남작) ▲이병길(후작) ▲이병옥(남작) ▲이영주(백작) ▲이원호(남작) ▲이장훈(남작) ▲이종승(자작) ▲이창훈(자작) ▲이충세(자작) ▲이해국(자작) ▲임낙호(자작) ▲정두화(남작) ▲조대호(자작) ▲조원흥 (자작) ▲조중헌(남작) ▲한상기(남작)

 

 

◇1910년 창설당시 중추원

 

 

▲고영희(고문) ▲권중현(고문) ▲박재순(고문) ▲송병준(고문) ▲이근상(고문) ▲이근택(고문) ▲이완용(고문) ▲이재곤(고문) ▲이지용(고문) ▲이하영(고문) ▲임선준(고문) ▲조중응(고문) ▲조희연(고문)

▲권봉수(찬의) ▲김만수(찬의) ▲김사묵(찬의) ▲김영한(찬의) ▲남규희(찬의) ▲민상호(찬의) ▲박경양(찬의) ▲박승봉(찬의) ▲염중모(찬의) ▲유맹(찬의) ▲유정수(찬의) ▲이건춘(찬의) ▲이재정(찬의) ▲이준상(찬의) ▲정인흥(찬의) ▲조영희(찬의) ▲한창수(찬의) ▲홍승목(찬의)▲홍종억(찬의)

▲고원식(부찬의) ▲구희서(부찬의) ▲권태환(부찬의) ▲김교성(부찬의) ▲김명규(부찬의) ▲김명수(부찬의) ▲김준용(부찬의) ▲김한규(부찬의) ▲나수연(부찬의) ▲민건식(부찬의) ▲박재환(부찬의) ▲박희양(부찬의) ▲서상훈(부찬의) ▲송지헌(부찬의) ▲송헌빈(부찬의) ▲신우선(부찬의) ▲신태유(부찬의) ▲어윤적(부찬의) ▲엄태영(부찬의) ▲오재풍(부찬의) ▲윤치오(부찬의) ▲이도익(부찬의) ▲이봉노(부찬의) ▲이원용(부찬의) ▲정동식(부찬의) ▲정진홍(부찬의) ▲조병건(부찬의) ▲조제환(부찬의) ▲최상돈(부찬의) ▲한동이(부찬의) ▲허 진(부찬의) ▲홍우철(부찬의) ▲홍운표(부찬의)

 

 

 

◇ 도지사

 

 

▲강필성(황해) ▲고안언(평안북.평안남.경기) ▲고원훈(전북) ▲김관현(충남.함경남) ▲김대우(전북.경북) ▲김동훈(충북) ▲김병태(황해.전북) ▲김서규(전남.전북.경북) ▲김시권(함경북.전북.강원) ▲김윤정(충북) ▲남궁영(충북) ▲박상준(강원.함경북.황해) ▲박영철(강원.함경북) ▲박재홍(충북.충남) ▲박중양(충남.황해.충북) ▲석진형(충남.전남) ▲손영목(전북.강원) ▲송문헌(황해.충남) ▲신석린(강원.충남) ▲신응희(함경남.황해) ▲엄창섭(전남.경북) ▲원응상(강원.전남) ▲유만겸(충북) ▲유성준(강원.충남) ▲유진순(충남) ▲유혁노(평안북.충북) ▲유홍순(강원) ▲윤갑병(강원) ▲윤태빈(강원.충북) ▲이규완(강원.함경남) ▲이기방(충남)▲이두황(전북) ▲이범익(강원.충남) ▲이성근(충남) ▲이원보(전북) ▲이진호(평안남.경북.전북) ▲이창근(충북.경북) ▲장헌식(충북.전남) ▲정교원(황해.충남.충북)▲정연기(전북) ▲조희문(황해) ▲한규복(충북.황해) ▲홍승균(충북.전북)

 

 

◇ 조선총독부 국장

 

 

▲김시명(전주.전매)

▲노윤적(관립한성고등여교장겸 학부편집)

▲엄창섭(학무)

▲유 맹(내무토목)

▲이진호(조선총독부학무)

▲한동석(전주 전매)

 

 

◇도(道) 참여관

 

 

▲강필성(전남.함경남) ▲계광순(강원) ▲고원훈(전남.경북.평안남.경기.평안북)▲구두경(경북) ▲구자경(경북) ▲권중식(평안남) ▲김관현(함경북.전남) ▲김대우(전남.경남) ▲김덕기(평안북.경남) ▲김동훈(경기) ▲김병태(평안남) ▲김상연(강원)▲김서규(함경북.평안남) ▲김시권(경북) ▲김시명(황해) ▲김영배(황해) ▲김영상(전북.함경남.황해.평안남) ▲김영진(함경북.함경남.경남.경북.전북) ▲김영한(황해)▲김완목(충북) ▲김우영(충남) ▲김윤정(전북.경기) ▲김창영(전남) ▲김창한(황해)▲김태석(함경남.경남) ▲김한목(충북) ▲김화준(충북) ▲남궁영(충남.경남) ▲유시환(함경북) ▲박상준(평안남) ▲박승봉(함경남.평안남) ▲박영철(함경북.전북) ▲박용구(경기.전남.전북) ▲박재홍(평안남) ▲박철희(충북.전남) ▲백흥기(황해) ▲상 호(충북.경남.함경남) ▲서기순(충남) ▲서상면(충북) ▲석명선(강원) ▲석진형(전남) ▲손영목(강원.경남) ▲송문헌(강원.함경남) ▲송문화(평안북) ▲송찬도(함경북)▲신석린(경남.경북) ▲심환진(경남.황해) ▲안종철(충북) ▲양재하(충북) ▲노윤적(경기) ▲엄창섭(경남.함경남) ▲원은상(충북) ▲원응상(전남) ▲유기호(강원.황해.경북.평안남) ▲유만겸(평안북.경북.평안남.충남) ▲유성준(충북.경기) ▲유승흠(함경남) ▲유시환(함경북) ▲유진명(황해) ▲유진순(평안북.평안남.강원) ▲유진순(평안북.평안남.강원) ▲유혁노(경기) ▲윤갑병(평안북.경북) ▲윤상희(전북) ▲윤태빈(경기) ▲이계한(강원.경기) ▲이기방(황해.함경북) ▲이범래(함경북.평안남) ▲이범익(경남) ▲이성근(함경북) ▲이원보(평안북.전남) ▲이봉영(함경북) ▲이종국(평안남) ▲이종국(함경남.평안남) ▲이종은(전북) ▲이창근(경북.경기) ▲이택규(충남.충북) ▲이학규(강원) ▲이해용(함경북.경북) ▲임문석(충남) ▲임헌평(경기) ▲장기창(평안북) ▲장석원(황해.함경남) ▲장윤식(황해.충북) ▲장헌근(함경북) ▲장헌식(평안남) ▲정교원(전북.전남) ▲정난교(충남) ▲정연기(전북) ▲정용신(경북)▲조경하(충남) ▲조병교(함경남) ▲조종춘(강원) ▲주영환(충남.경남.평안남) ▲최익하(평안북) ▲최정덕(경북.경남) ▲최지환(평안북.충남) ▲최창홍(충북) ▲한규복(충남.경북) ▲한동석(황해) ▲현 헌(강원) ▲홍승균(경북) ▲홍영선(전남.함경남)▲홍종국(강원)

 

 

◇1911년∼1915년 중추원

 

▲이완용(부의장)

▲권중현 ▲이근상 ▲이근택 ▲이재곤 ▲이하영 ▲임선준 ▲장석주 ▲조중응 ▲조희연 ▲한창수(이상 고문)

▲강경희 ▲남규희 ▲박경양 ▲박승봉 ▲박제빈▲박중양 ▲윤치오 ▲이건춘 ▲이겸제 ▲이재정 ▲조영희 ▲홍승목(이상 찬의)

▲권태환 ▲김필희 ▲민건식 ▲박제환 ▲성하국 ▲송헌빈 ▲신태유 ▲어윤적 ▲오제영 ▲유흥세 ▲이항식 ▲이만규 ▲이봉노 ▲이항식 ▲정동식 ▲정병조 ▲조병건 ▲조원성 ▲조재영 ▲최상돈 ▲허 진 ▲홍운표 ▲홍재하(이상 부찬의)

 

 

◇1916년∼1920년 중추원

 

▲민상호 ▲조민희(이상 고문) ▲강경희 ▲박중양 ▲조희문(이상 찬의)

▲김낙헌 ▲김한목 ▲민원식 ▲서회보(이상 부찬의)

 

 

◇1921년∼1925년 중추원

 

▲이완용(부의장)

▲민영기 ▲박영효 ▲송병준 ▲이하영(이상 고문)

▲김현수(부찬의)

▲김영한 ▲김한목 ▲남규희 ▲민상호 ▲민영찬 ▲민형식 ▲박승봉 ▲박이양 ▲박제빈 ▲서상훈 ▲신응희 ▲어윤적 ▲엄준원 ▲염중모 ▲유 맹 ▲유성준 ▲유정수 ▲유혁노 ▲이건춘 ▲이겸제 ▲정진홍 ▲조민희 ▲조영희 ▲조희문 ▲강병옥 ▲고원훈 ▲권태환 ▲김갑순 ▲김교성 ▲김기태 ▲김명규 ▲김명준 ▲김연상 ▲김영무 ▲김정태 ▲김준용 ▲김필희 ▲김현수 ▲노창안 ▲나수연 ▲민건식 ▲민영은 ▲박기순 ▲박봉주 ▲박이양 ▲박제환 ▲박종열 ▲박희양 ▲방인혁 ▲서병조 ▲선우순▲송종헌 ▲송지헌 ▲신석우 ▲신태유 ▲오재풍 ▲유기호 ▲유빈겸 ▲유흥세 ▲윤치소 ▲이근우 ▲이도익 ▲이동우 ▲이만규 ▲이병학 ▲이택현 ▲이항식 ▲장 도 ▲장인원 ▲전석영 ▲정동식 ▲정병조 ▲정순현 ▲정재학 ▲조병건 ▲천장욱 ▲최석하 ▲피성호 ▲한상황 ▲한영원 ▲허명훈 ▲현 은 ▲구연수 ▲김춘희 ▲현기봉(이상 참의)

 

 

◇1926년∼1930년 중추원

 

 

 

▲박영효 ▲이완용(이상 부의장)

▲고희경 ▲권중현 ▲민병석 ▲윤덕영 ▲이윤용(이상 고문)

▲김영진 ▲민상호 ▲민영찬 ▲박기양 ▲박상준 ▲박승봉 ▲박의병 ▲박중양 ▲백인기 ▲상 호 ▲서상훈 ▲신석린 ▲신응희 ▲어윤적 ▲엄준원 ▲염중모 ▲유 맹 ▲유성준 ▲유정수 ▲조진태 ▲조희문 ▲한상룡 ▲한진창 ▲권태환 ▲김갑순 ▲김명규 ▲김명준 ▲강병옥 ▲김상설 ▲김상섭 ▲김창한 ▲노창안 ▲박경석 ▲박기동 ▲박종렬 ▲박흥규 ▲선우순 ▲송지헌 ▲송종헌 ▲신창휴 ▲심준택 ▲심환진 ▲안병길 ▲양재홍 ▲오재풍 ▲오태환 ▲원덕상 ▲유익환 ▲유흥세 ▲이강원 ▲이기승 ▲이동우 ▲이병열 ▲이택규 ▲이항식 ▲이흥재 ▲이희덕 ▲장대익 ▲장상철 ▲장응상 ▲장직상 ▲정난교 ▲정순현 ▲정태균 ▲정호봉 ▲최석하 ▲한영원 ▲한창동 ▲홍성연 ▲김윤정 ▲김한목 ▲김희작 ▲남규희 ▲민병석 ▲박기순 ▲원응상 ▲윤갑병 ▲윤정현 ▲장헌식 ▲정건유(이상 참의)

 

 

 

◇1931년∼1935년 중추원

 

 

▲민병석 ▲윤덕영 ▲이윤용(이상 고문) ▲김관현 ▲김명준 ▲김서규 ▲김윤정 ▲남궁영 ▲민상호 ▲박영철 ▲박용구 ▲어 담 ▲엄준원 ▲염중모 ▲유정수 ▲유진순 ▲이진호 ▲장헌식 ▲조성근 ▲최 린 ▲한규복 ▲한진창 ▲고일청 ▲김도현 ▲김두찬 ▲김병규 ▲김사연 ▲김상설 ▲김상형 ▲김영택 ▲김정호 ▲김종흡 ▲김한규 ▲김한승 ▲박기석 ▲박종렬 ▲박철희 ▲박희옥 ▲석명선 ▲선우순 ▲송지호 ▲신희연 ▲오태환 ▲유승흠 ▲유태설 ▲이경식 ▲이교식 ▲이근우 ▲이기승 ▲이동우 ▲이명구 ▲이방협 ▲이병렬 ▲이선호 ▲이충건 ▲이택규 ▲이희덕 ▲장대익 ▲정관조 ▲정난교 ▲정대현 ▲정석모 ▲최양호 ▲최윤주 ▲최인국 ▲최창조 ▲한영원 ▲현 헌 ▲현준호 ▲강필성 ▲김병원 ▲김성규 ▲김제하 ▲박상준 ▲어윤적 ▲유성준 ▲진희규 ▲홍종철(이상 참의)

 

 

◇1936년∼1940년 중추원

 

 

▲민병덕 ▲민병석 ▲윤덕영(이상 부의장) ▲고원훈 ▲김관현 ▲김명준 ▲김영진 ▲남궁영 ▲박두영 ▲박상준 ▲박영철 ▲박용구 ▲박중양 ▲서상훈 ▲신석린 ▲어 담 ▲엄준원 ▲유정수 ▲유혁노 ▲윤갑병 ▲이겸제 ▲이범익 ▲이진호 ▲장헌근 ▲정교원 ▲조경하 ▲조성근 ▲조희문 ▲ 주영환 ▲한규복 ▲한상룡 ▲홍종국 ▲강 심 ▲강동희 ▲김경진 ▲김기수 ▲김기홍 ▲김상회 ▲김신석 ▲김정석 ▲김진수 ▲김창수 ▲김한목 ▲남백우 ▲노영환 ▲문종구 ▲민병덕 ▲박보양 ▲박봉진 ▲박철희 ▲박희옥 ▲방의석 ▲방태영 ▲서병조 ▲서병주 ▲석명선 ▲성원경 ▲손재하 ▲손조봉 ▲안종철 ▲오세호 ▲원덕상 ▲유태설 ▲이경식 ▲이근수 ▲이기찬 ▲이승우 ▲이은우 ▲이종섭 ▲이진호 ▲이희적 ▲인창환 ▲장석원 ▲장직상 ▲장헌근 ▲정난교 ▲정석용 ▲정대현 ▲정해붕 ▲조병상 ▲주영환 ▲지희열 ▲최 윤 ▲최남선 ▲최준집 ▲최지환 ▲하준석 ▲현 헌 ▲현준호 ▲홍치업 ▲홍종국 ▲유만겸(이상 참의)

 

 

◇1941년∼1945년 중추원

 

 

▲박중양 ▲이진호(이상 부의장) ▲김윤정 ▲박중양 ▲윤치호 ▲이범익 ▲이진호 ▲한상용(이상 고문) ▲고원훈 ▲김관현 ▲김명준 ▲김사연 ▲김연수 ▲김영배 ▲김영진 ▲김우영 ▲김윤정 ▲김태석 ▲김화준 ▲박두영 ▲박상준 ▲서상훈 ▲신석린 ▲안종철 ▲원덕상 ▲유만겸 ▲유진순 ▲이겸제 ▲이경식 ▲이계한 ▲이병길 ▲이원보 ▲장직상 ▲장헌식 ▲정교원 ▲정난교 ▲정연기 ▲진학문 ▲최 린 ▲한규복 ▲강이황 ▲권중식 ▲김경진 ▲김동준 ▲김병욱 ▲김부원 ▲김사연 ▲김신석 ▲김원근 ▲김재환 ▲김태준 ▲김화준 ▲노준영 ▲민재기 ▲박지근 ▲박창하 ▲박필병 ▲방의석 ▲서병조 ▲손창식 ▲송문화 ▲신현구 ▲양재창 ▲원병희 ▲위정학 ▲이경식 ▲이기찬 ▲이승우 ▲이신용 ▲이영찬 ▲이익화 ▲이종덕 ▲임창수 ▲장용관 ▲장윤식 ▲장준영 ▲장직상 ▲전덕용 ▲조병상 ▲조상옥 ▲차남진 ▲최 윤 ▲최승렬 ▲최정묵 ▲최준집 ▲한익교 ▲ 한정석 ▲ 현준호 ▲황종국 ▲김하섭 ▲문명기 ▲이승구(이상 참의) ▲엄창섭(서기장관)

 

 

 

 

 

◇조선총독부 사무관

 

 

▲강원수 강필성 계광순 고안언 구연수 구자경 권중식 길원봉 김대우 김덕기 김동훈 김병욱 김병태 김성환 김시권 김시명 김영년 김영배 김영상 김우영 김진태 김창영 김태동 김태석 김화준 김희덕 남궁영 노영빈 박규원 박용구 박재홍 손영목 송문헌 송문화 송찬도 양재하 엄창섭 유만겸 유시환 유홍순 윤상희 윤종화 윤태빈 이계한 이기방 이동진 이범승 이범익 이병석 이성근 이원보 이종국 이창근 이해용 이현전 임문석 임승수 임헌평 장기창 장수길 장윤식 장헌식 전지용 정교원 정규봉 정민조 정연기 정용신 조경하 조종춘 주영환 진염종 차윤홍 최경진 최병원 최익하 최창홍 최하영 한동석 한종건 현석호 홍승균 홍영선 홍종국 홍헌표

 

 

◇조선총독부 판사.검사

 

 

▲김락헌(조선총독부 판사) ▲민병성(京城復審법원검사) ▲이선종(조선총독부平壤覆審법원검사) ▲홍승근(조선총독부大邱覆審법원검사)

 

 

◇밀 정

 

 

▲강락원 김동한 김인승 박두영 박석봉 배정자 선우갑 선우순 오현주 이종영 이준성 장문재 장우형 정병칠 최정규

 

 

◇친일단체

 

 

▲김명준 김한규 민영기 민영휘 박제빈 박춘금 선우갑 선우순 송병준 신석린 염중모 윤갑병 윤시병 윤치호 이동우 이병열 이완용 이용구 이윤용 조중응 조진태 한상용

 

 

◇조선총독부 군인

 

 

▲김석원 김창용 박두영 어 담 이병무 정 훈 조동윤

 

 

◇경 시

 

 

▲강경희 강보형 강진풍 계광순 구연수 구자경 권오용 권중익 권태형 길홍경 김계현 김극일 김대원 김덕기 김동선 김명환 김상순 김상욱 김소직 김승련 김영배 김영수 김영찬 김우종 김윤복 김은제 김인영 김종원 김준권 김창영 김창림 김태석 나구하 노기주 노덕술 노인국 마현희 문진상 박근수 박인종 박장환 박재수 박정노 박준호 박희정 변영화 서기순 서상용 소진은 손석도 안경선 안형식 엄주면 연태윤 오석유 오세윤 윤병희 윤종화 이계한 이성근 이원보 이재붕 이종국 이종식 이창우 이헌규 임호영 임흥재 장강선 장기창 장우근 장우식 장헌근 전봉덕 전영찬 전창림 정기창 정충원 조성구 조연광 조종춘 조종훈 조창현 주익상 채규병 최 연 최 탁 최경진 최기남 최석현 최지환 최창홍 최태현 표한용 한동석 한석명 한정석 한종건 허 섭 현기언 황신태 황태근

 

 

◇군수산업 관련자

 

 

▲고원훈(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설립 중심인물) ▲고한숭(송도항공기주식회사 사장 개성경방부단장) ▲김계수(비행기 헌납,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대표) ▲문명기(비행기헌납) ▲박두영(금강항공공업주식회사 고문) ▲박흥식(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 설립) ▲방의석(애국기 2대 헌납) ▲배영춘(비행기 1대 헌납) ▲백낙승(비행기 1대 헌납) ▲신용옥 (비행기 헌납) ▲이영개(금강항공공업주식회사 대표) ▲최주성(비행기 1대 헌납)

 

 

◇조선총독부 판사

 

 

▲김준평 노상구 문택규 백윤화 양원용 오승근 오완수 원종억 윤성보 이명섭 이상기 이우익 이충영 장기상 조진만 한상범

 

 

◇고등형사

 

 

▲김병태 김석기 김영기 배만수 심량체 오세윤 이대우 이종하 장인환 홍사묵

 

 

◇기 타

 

 

▲고일청 김기진 김길창 김동환 김문집 김연수 김용제 김태흡 김희선 박석윤 박영희 박춘금 박흥식 박희도 방의석 배정자 서 춘 서범석 서병조 서정주 손영목 신용옥 신태악 신흥우 양주삼 원덕상 유진순 윤치호 이각종 이광수 이산연 이석규 이성근 이성환 이승우 이영근 이영찬 이인직 이종욱 이종린 이진호 이회광 이희적 임창수 임흥순 장석원 장우식 장인원 장직상 장헌근 장헌식 전부일 전필순 정교원 정국은 정인과 정인익 정춘수 조병상 주요한 진학문 차남진 차재정 최 린 최남선 최승렬 최재서 최정묵 최준집 한상룡 허영호 현영섭 현준호 홍승균

2008.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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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등이 아니요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떨어지고 등불이 꺼진 캄캄한 밤이지요^^

보라 내가 땅에 기근을 보내리니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이라!

칠흑처럼 어두운 밤에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하셨으니

등불 밝히는 기름을 채워주는 곳을 찾으세요^^

2008.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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