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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왜 최동원은?
solo**** 조회수 11,495 작성일2005.12.16

한국역사상 최고투수라는 선동렬,최동원..

 

뭐 누가 뛰어나다는 다들 말들이 많고.. 일리가 있는말들이고..논란의 여지가 있으니 묻지않겠습니다만,.,

 

그냥..일반적인 기록외에..(공식기록..방어율같은건 팀전력이라던지..혹사했다던지..너무 말이 많으니..)

 

골든글러브라든지..이런것이 왜 최동원이 이렇게 적은것인가요?

 

선동렬은 말할것도 없고..그외 그보다 낮게평가되는 선수들과 비교해도..1번..너무 초라하지 않습니까?

 

또 선수은퇴이후..선동렬은..삼성에서 초특급대우 받으면서 벌써 감독감투를 썻는데..

 

왜 최동원은 해설,코치, 가끔 TV쇼프로출연..으로 빙빙도는 걸까요?

 

 

 

 

*선동렬이...더뛰어나서 그렇다..최동원이 x밥이라 그렇다..식의 답변은 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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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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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자료는 최동원에 대해서 일반적인 설명외에 다른 각도에서 보는 것이니까 참고하세요.

 

최고의 투수 최동원- 또다른 관점 - sprayed by didofido (후추 객원 칼럼니스트)

그는 선동열만큼 위대하지는 않다. 꾸준함에 관해서라면 김용수, 아니 정민철에게도 뒤진다. 전성기 때 삼진의 대명사로 알려졌으며, 실제 KBO의 시즌 최다탈삼진 기록(223)을 가지고 있지만, 삼진을 잡아내는 능력은 구대성이나 이대진이 한 수 위이다. 하지만 전 롯데 자이언츠 투수 최동원이 84년에서 86년까지 보여주었던 퍼포먼스를 확실하게 능가할 수 있는 투수는 없다.

지금까지 한국 프로야구에서 세 시즌 연속으로 100이닝 이상을 던지며 리그 평균보다 좋은 방어율을 기록했던 투수는 모두 마흔 세 명이다. 다섯 시즌으로 범위를 넓힌다면 최동원을 포함하여 단 열세명 밖에 없다. 그리고 5년 연속 200이닝을 던진 투수는 오직 최동원 한명 뿐이다. 빠른 공을 마음먹은 곳에 던질 수 있는 능력은 아무나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 능력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투수는 더욱 드물다. 전성기의 최동원을 다른 당대의 뛰어난 선발 투수들과 비교해보자.

[ERA - 방어율, ERA_lg - 리그 평균 방어율, ERA* - 수정 방어율, MOB - (안타+사사구)/이닝*9, 즉 9이닝 당 평균 출루 허용수, SO/9 - 9이닝 당 탈삼진, BB/9 - 9이닝 당 4구, K/BB - 탈삼진/4구] 최동원(84-86, 롯데 자이언츠) : 84년 다승, 탈삼진 부문 1위. 골든 글러브. MVP.

김시진(85-87, 삼성 라이온즈) : 85, 87년 다승 부문 1위 및 골든 글러브 수상.

선동렬(89-91, 해태 타이거즈) : 3년 연속 트리플 크라운(다승, 방어율, 탈삼진) 및 골든 글러브. 89, 90년 MVP.

정민철(92-94, 빙그레 이글스) : 94년 탈삼진 부문 1위,

조계현(93-95, 해태 타이거즈) : 94년 다승 부문 1위. 95년 방어율 부문 1위.

이상훈(94-96, 엘지 트윈스) : 94, 95년 다승 부문 1위, 95년 골든 글러브

이대진(95-97, 해태 타이거즈) : 95년 탈삼진 부문 1위. 97년 골든 글러브.

정민태(97-99, 현대 유니콘스) : 99년 다승 부문 1위. 98, 99년 골든 글러브.

야구 통계의 권위자인 빌 제임스(Bill James)는 투수의 기록을 얼마나 많이 던졌는가 (How much he pitched, 이닝수, 상대 타자수 등), 타자들을 상대로 어떤 피칭을 했는가 (What he gave up, 피안타, 사사구, 삼진 등), 그리고 그 결과(승, 패, 방어율 등)로 구분한다. 좋은 선발 투수는 오랫동안 마운드를 지킬 수 있어야 하며, 타자들을 상대로 더 적은 안타와 사사구를 허용해야 한다. 이런 투수라면 많은 승리와 훌륭한 방어율을 기록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승수와 승률은 동료 타자들의 능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그 자체만으로는 좋은 기준이 되지는 못한다. 방어율은 투수의 가치를 나타내는 가장 좋은 척도 중의 하나이지만 서로 다른 시즌, 가령 24명의 투수가 3.00 미만의 방어율을 기록했던 86년의 방어율 3.12와 리그 평균 방어율이 5점대에 육박했던 작년의 3.12의 의미가 같을 수는 없다. 따라서 서로 다른 시즌의 기록 비교를 위해서는 일종의 조절장치가 필요하다. 위에서 사용한 수정 ERA는 개인 방어율 기록을 “평균 방어율이 3.72(82년에서 98년까지의 KBO 평균)인 리그”라는 조건으로 수정한 것이다. 가령 작년 송진우의 방어율 4.00은 수정 방어율로는 2.99가 되며, 86년 청룡 김태원이 기록한 준수한 2.86은 그저그런 3.45로 수정된다.

최동원은 84-86년 동안 66승을 올렸으며, 이는 다른 어떤 투수들보다 많은 수치이다. 이 3년 동안의 방어율은 1.97로 두 번째로 좋다. 물론 최동원은 타자들의 능력이 오늘날보다 떨어지는 시대에서 전성기를 보냈다. 82년에서 99년까지 86년의 최동원의 수정 방어율 1.87보다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투수는 위대한 선동렬을 제외한다면 모두 다섯 명이다. 이들 중 가장 많은 투구를 한 선수는 138.2이닝을 던진 99년의 임창용이다.(방어율 2.14, 수정방어율 1.60) 86년 최동원은 대략 그 두 배 가까운 이닝 동안 투구했다. 최동원의 MOB, 즉 출루허용률은 3년 동안 한 자운 수를 유지했다. 완투 경기에서 피안타 일곱 개와 볼넷 두 개만을 허용한다는 뜻이다. 선동렬과 96년에는 구원투수으로 등판했던 이상훈을 제외한다면 가장 좋은 기록이다. 컨트롤의 기준이 되는 BB/9는 3년 간 1.90으로 오히려 선동렬을 근소하게 앞선다. 다른 에이스 투수들보다 50 포인트 정도 뛰어나며, 볼넷을 남발하면서도 낮은 방어율을 유지하는 희귀한 유형의 투수였던 동갑내기 김시진보다는 세 배 정도 뛰어났다.

어떤 기준에 의해서든 효과적인 투구에 관한 한, 단연 1인자는 선동렬일 것이다. 이 분야의 거의 모든 기록은 선동렬이 가지고 있다. 선동렬은 거의 볼넷을 주지 않았으며, 타자들은 그로부터 안타를 얻기를 어려워했다. 그리고 네 개 이상의 홈런을 허용한 시즌은 오랜 선수생활 동안 단 두 번 밖에 없다. 그러나 투수의 또 하나의 덕목인 “얼마나 많이 던졌는가?”에서 최동원을 앞서는 투수는 없다. 83년 장명부의 우스꽝스러운 427이닝 기록을 제외한다면. 물론 80년 대 중반과 오늘날의 기록을 같이 취급하는 것은 곤란하다. 최동원이 보낸 최고의 시즌이었던 84년에 6개 구단이 마운드에 한 번이라도 올린 투수들은 모두 59명이었다. 평균 열 명이 못 되는 선수들로 시즌을 치른 셈이다. 반면 94년에 1군 무대에서 던진 투수들은 8개 구단 141명이다. 85년 장명부는 5.30이라는 처참한 방어율을 기록하면서도 246이닝을 던졌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시즌 도중에 이름이 “야생마”로 바뀐 이 팀에는 실질적으로 투수가 일곱 명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다른 이유로는 그에게 지불한 연봉을 아까워했던 탓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동시대의 투수들과 비교해서도 최동원의 소위 말하는 “연투 능력”은 두드러진다. 최동원이 전성기의 3년 동안 혼자서 책임진 경기는 모두 45회이다. 위의 투수들 중 두 번째로 많은 완투를 기록한 투수는 정민철로 그 회수는 29회이다.

최동원은 776.2이닝 동안 마운드를 지켰다. 두 번째로 많이 던진 김시진보다도 117.2이닝이 더 많다. 오늘날의 5인 로테이션 시스템에서 선발 투수는 한 달에 6번 정도 마운드에 오른다. 그리고 선발 등판 평균 7이닝을 던지는 투수라면 완투능력을 가진 에이스로 대접받는다. 최동원의 한 시즌은 다른 뛰어난 투수들보다 한 달 정도 더 길었던 셈이다. 그 3년 이후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평범한 성적에 그쳤던 87년 이후 최동원은 두 해 연속으로 시즌 전반기를 뛰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 시즌이 되었던 90년, 최동원은 더 이상 최동원이 아니었다. 프로야구 선수로서 최동원은 누구보다도 화려한 세 시즌을 보냈고, 그 후 사라졌다. 그의 마지막은 화려하지도 않았고 영예롭지도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룬 업적인 통산 100승은 이미 열 한 명의 선수가 넘어선 이정표이다. 7-80년 대의 야구 만화에는 반항아 이미지를 가진 주인공의 라이벌 격으로 만능 야구천재가 한 명은 등장했다. 그 캐릭터들에게 야구 선수에게는 낯선 물건인 안경을 즐겨 씌웠던 작가들은 아마도 독자들에게 “금테안경의 거물투수” 최동원을 연상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그가 뛰던 시절 고교 야구는 서울 한 곳에서만 100만 명의 관중을 동원했으며, 대학 야구도 그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스포츠는 영웅을 원하며 인기는 전설을 낳는다.(그가 프로에 데뷔하던 무렵 한 소년잡지에서는 “알루미늄 방망이로 최동원 형의 공을 치면 그저 우그러질 뿐이지만 프로에서 쓰는 나무 방망이는 수도 없이 부러져 나갈 것”이라는 농담같은 이야기를 진지하게 쓰기도 했다.) 프로야구 선수 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쳤다고는 보기 어려운 최동원이 최고 투수를 가리는 논쟁에서 여전히 빠지지 않는 이유 중에는 아마도 전성기 시절 보여주었던 능력과, 80년 실업야구 코리언 시리즈와 84년 한국 시리즈에서 만들어낸 전설 외에 영웅을 잃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부질없는 질문을 하나 해 보자. 그가 88, 89년 시즌을 제대로 보냈더라면 과연 어떤 모습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할 수 있었을까? 최동원은 프로야구 사상 가장 심하게 혹사당한 투수 중의 한 명이다. 일례로 84년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 강병철은 후반기 50경기에서 무려 31번이나 그를 마운드에 올렸다. 그러나 선수생활 말년의 몰락이 단지 혹사 때문이라고 결론짓기는 어렵다.

58년생인 최동원은 만 25세에 프로야구에 입문해서 5년 연속 200 이닝을 던졌다. 그 이전인 23, 4세 시절 실업 무대에서도 그는 여전히 혹사당하는 투수였다. 81년 아마추어 롯데 자이언츠는 한 달의 휴식 기간을 사이에 두고 열린 실업야구 전기 리그에서 13승 2패로 우승을 차지했다. 이 때 루키 최동원의 성적은 13승 1패였다. 거의 매 경기 등판한 셈이다.(3, 4일에 한 번 꼴로 경기가 열린 실업 야구에서 에이스를 이렇게 등판시키는 일은 당시에는 상식에 속했다.) 고교, 대학 시절을 논외에 두더라도 만 23세부터 엄청난 수의 투구를 했던 투수가 29세까지 부상없이 200이닝을 소화했다는 것은 흔치않은 일이다. 흔치는 않지만 사례가 없지는 않다. 메이저 리그에서도 80년 대의 선발투수들은 지금보다 더 많은 이닝을 던졌다. 1979년에서 1988년까지 10년 동안 60완투 이상을 기록한 선수는 모두 18명이었다. 18명의 투수 중 만 35세가 넘어서도 주전 자리를 지켰던 투수는 열 두 명이다.(이 중 세 명은 너클볼러이다.) 반면 1989년에서 1998년 사이에 60완투 투수는 4명으로 줄어들었다. 투수들의 어깨를 보호하는 것은 어린 선수들에게는 특히 중요한 일이지만,

오늘날 메이저 리그에서 선발 투수들의 투구수와 투구이닝이 감소하는 경향은 불펜 투수들의 비중 증가라는 전술적인 변화와 선수들의 신분 및 연봉 상승, 그에 상응하는 구단의 값비싼 스타 플레이어 보호 노력이라는 요인이 겹쳐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혹사가 최동원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던 것은 사실이다. 87년부터 최동원은 갑자기 많은 안타를 맞기 시작했다. 85년 225이닝에서 170개이던 피안타가 87년에는 224이닝 218개로 늘어난 것이다. 후반기에만 출장했던 88년에도 83.1이닝 동안 77개의 안타를 허용했다. 빠른공과 커브를 주무기로 하는 투수가 빠른 공의 위력이 줄어들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선발 투수가 이닝 수와 비슷하거나 조금 적은 안타를 허용한다면 평균 이상은 넘는 투수라는 뜻이다. 그러나 더 이상 언터처블로 불리지는 않는다. 최동원은 강속구 투수였지만 동시에 뛰어난 컨트롤러였으며, 빠른 공 외에 훌륭한 커브를 가지고 있었다. 전성기만큼 빠른 공은 던지지 못하더라도 다른 유형의 투수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은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메이저 리그에서 통산 240승을 거둔 프랭크 타나나(Frank Tanana)는 강속구를 잃어버린 후 기교파 투수로 변신해서 마흔 한 살까지 던졌다. 그 경우 최동원은 88년 이후 5년은 더 뛰면서 통산 승수를 150승 정도로 늘렸을 것이다. 알다시피 현재 이 부문 최고 기록은 선동렬의 146승이다. 물론 이는 부질없는 상상이며, 어쩌면 최동원 스스로 거부한 길인지도 모른다.

200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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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분이 설명을 너무 잘해주셨네요.^^

다른 쪽으로 이야기를 해보죠...

최동원선수가 롯데에 입단한 83년도.

이때 그의 나이가 우리나이로 26세입니다.(58년생으로 알고있습니다.)

원년(82년)부터 프로에서 뛸 수도 있었으나

아시다시피 82년도 세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당시 대표팀맴버들에 대해 프로입단을 대회이후로 미루게 됩니다.

그리고 선동렬이 해태에 입단할때 최동원은 이미 28-9세로

프로생활을 그다지 오래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롯데가 최동원이 있는동안 우승한건 84년 한번 뿐이었습니다.

반면 선동렬의 해태는 계속 승승장구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한가지 사실이, 지금은 활성화 되었지만

당시만해도 금기시되었던 선수협회문제입니다.

선수협회를 만들려고 선수들이 나설때 맨 앞에 서서

이끌었던 인물이 바로 최동원입니다.

해서 팀에서 미움을 받게되고 결국 삼성으로 트레이드됩니다.

아마도 한국 프로야구사상 최초의 빅딜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최동원, 김용철이 롯데에서 삼성으로, 김시진, 장효조가

반대로 삼성에서 롯데로 트레이드됩니다.

아마 이문제 때문에 팀에서 뿐만아니라 KBO에게도

밉상이었을겁니다.

반면 선동렬은 선수협쪽엔 신경을 안쓰고 좋은 성적을 내면서

결국 일본으로 진출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이유들로인해

당대 최고의 투수임에도 그다지 좋은 대접을 못받은게 아닌가 싶습니다.

200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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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복사한거샌

최동원선수가 롯데에 입단한 83년도.

이때 그의 나이가 우리나이로 26세입니다.(58년생으로 알고있습니다.)

원년(82년)부터 프로에서 뛸 수도 있었으나

아시다시피 82년도 세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당시 대표팀맴버들에 대해 프로입단을 대회이후로 미루게 됩니다.

그리고 선동렬이 해태에 입단할때 최동원은 이미 28-9세로

프로생활을 그다지 오래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롯데가 최동원이 있는동안 우승한건 84년 한번 뿐이었습니다.

반면 선동렬의 해태는 계속 승승장구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한가지 사실이, 지금은 활성화 되었지만

당시만해도 금기시되었던 선수협회문제입니다.

선수협회를 만들려고 선수들이 나설때 맨 앞에 서서

이끌었던 인물이 바로 최동원입니다.

해서 팀에서 미움을 받게되고 결국 삼성으로 트레이드됩니다.

아마도 한국 프로야구사상 최초의 빅딜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최동원, 김용철이 롯데에서 삼성으로, 김시진, 장효조가

반대로 삼성에서 롯데로 트레이드됩니다.

아마 이문제 때문에 팀에서 뿐만아니라 KBO에게도

밉상이었을겁니다.

반면 선동렬은 선수협쪽엔 신경을 안쓰고 좋은 성적을 내면서

결국 일본으로 진출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이유들로인해

당대 최고의 투수임에도 그다지 좋은 대접을 못받은게 아닌가 싶습니다.

2008.05.03.

  • 출처

    최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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