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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각 도읍지의 유물 유적 조사
oliv**** 조회수 4,662 작성일2004.11.04
고구려,백제,신라,가야,조선 으로

도읍지의 유물 유적 조사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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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

 

 고구려

고구려

1.국내성:고구려 초기 도읍지 현재 중국 지린 성(길림성) 지안 현 퉁거우입니다.

유물 유적 : 장군총,무용총,광개토대왕릉비가 있습니다.

 

장군총 : 3세기 초부터 427년까지 고구려가 도읍한 지안현 퉁거우평야[通溝平野]에는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와 고구려 최대형 무덤인 태왕릉(太王陵)·사신총(四神塚) 등 석릉과 토분(土墳) 1만 기(基)가 있으나 외형이 거의 완존(完存)한 석릉은 이것뿐이다.

 

 

무용총

중국 둥베이[東北]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의 고분벽화(古墳壁畵

 

광개토대왕릉비

비신(碑身)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한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2.평양성:국내성이후 고구려 도읍지

유물 유적 : 을밀대,대동문,최승대가 있습니다.

 

을밀대: 북한 사적 제7호. 사허정(四虛亭)이라고도 한다. 6세기 중엽 고구려시대에 평양성의 내성장대로 처음 건립되었다.

 

대동문 : 북한 국보급 문화재 제1호이다. 높이 19m, 축대높이 6.5m, 길이 26.3m, 폭 14.25m이다. 문루는 앞면 3칸, 옆면 3칸이며, 석축 위에 2층으로 된 누각을 갖춘 성문이다. 6세기 중엽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 내성의 동문으로 최초 건립되었다. 고려 초 947년과 조선 초 1392년에 복원되었으며 1635년(조선 인조13년)에 재건되었다

 

 백제

 1.위례성 : 위례성은 백제의 첫 도읍지였다.

 

 

몽촌토성

 

 

                                                                                         몽촌토성에서 발굴된 항아리

 

몽촌토성은 오래 전부터 백제 초기 토성으로 전하여 왔다.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진흙으로 쌓은 성벽을 만들어 1M 정도 파서

살림집이 아닌 군사의 필요한 것으로 썼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은 올림픽 공원 속에 있다.

 

 

풍납토성

서울 송파구 풍납동에 있는 백제 초기의 토성터.

소재지 : 서울 송파구 풍납동

시대 : 백제 초기

지정 : 사적 제11호

규모 : 동벽 1,500m, 남벽 200m, 북벽 300m

1925년 대홍수 때 삼국시대의 청동제 초두가 2개 발견되었고, 토기 조각들도 많이 발견되었다.

 

돌무지 무덤

 

돌무지시설을 한 점에서 남방식 고인돌과 공통되므로, 원래 고인돌인

무덤이 후대에 상석이 없어져

돌무지 무덤으로 된 가능성도 있다.

 

 

 

2.웅진 :

웅진의 문화재 :

 

계유명삼존천불비상

국보 제108호

문화재지정일 : 1962년 12월 20일

소재지 :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기타 : 통일신라시대

 

금제관식(왕)

국보 제154호

문화재지정일 : 1974년 7월 9일

소재지 :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기타 : 백제시대

 

금제관식(왕비)

국보 제155호

문화재지정일 : 1974년 7월 9일

소재지 :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기타 : 백제시대

 

금제심엽형이식(왕)

국보 제156호

문화재지정일 : 1974년 7월 9일

소재지 :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기타 : 백제시대

 

금제수식부이식(왕비)

국보 제157호

문화재지정일 : 1974년 7월 9일

소재지 :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기타 : 백제시대

 

금제경식(왕비)

국보 제158호

문화재지정일 : 1974년 7월 9일

소재지 :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기타 : 백제시대

 

 

3.사비 :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扶餘定林寺址五層石塔) - 국보 9호

흔히 백제오층석탑이라고도 한다. 화강석으로 되었으며, 높이는 8.33m이다.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 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다.
지정일 - 1962.12.20
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379
시대 - 백제시대 후기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 - 국보 11호

분류 - 석탑
지정일 - 1962.12.20
소재지 -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
시대 - 백제시대 후기

 

 

서산마애삼존불상(瑞山磨崖三尊佛像) - 국보 84호

분류 - 마애불(부동산)
지정일 - 1962.12.20
소재지 -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2-1
시대 - 백제시대 후기

 


 

부여능산리출토백제금동대향로 -- 국보 287호 충남 부여군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百濟昌王銘石造舍利龕) -- 국보 288호 충남 부여군

 

부여석조(扶餘石槽) -- 보물 194호 충남 부여군

 

부여성흥산성(扶餘聖興山城) -- 사적 4호 충남 부여군

 

부여능산리고분군(扶餘陵山里古墳群) -- 사적 14호 충남 부여군

 

수도 같은 것은요,, 3번 옮겼다, 4번 옮겼다, 5번 옮겼다,, 이런 이야기 들이 많거든요.

 

옛날 이야기 들이라서 확실치가 않네요..

 

그러니 전 전부다 적어드리죠,

 

 3번 옮겼다는 것은 초등학교 교과서 6학년 1학기에 나옵니다.

 

위례성→웅진(오늘날의 공주)→사비(오늘날의 부여)

 

 

도읍지를 4번 옮김,,

 

위례성 →한성 →웅진성(오늘날의 공주) →사비성(오늘날의 부여)

위례성에서 한성으로 천도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은 낙랑과 말갈의 침입이 잦고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이 북쪽으로 치우쳐 이들의 침입을 많이 받는 것을 염려하여 도읍을 한강 이남인 한성으로 정합니다.

즉 위례성에서 한성으로 천도한 이유는 낙랑과 말갈의 침입 때문입니다.

한성에서 웅진성으로 천도

서기 475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3만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했습니다.

당시 백제의 왕이었던 개로왕은 고구려의 첩자 도림의 말을 듣고 무리한 토목공사를 벌여 민심을 잃었습니다.

 

그러자 이를 간파한 고구려에서 백제를 공격하였고 결국 개로왕은 한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아차산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한성이 함락되기 전 개로왕은 태자 문주를 불러 나라의 사직을 보존하라고 합니다.

 

즉 웅진으로 천도한 이유는 고구려의 침입으로 수도 한성을 빼앗기자 사직을 보존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아울러 웅진은 산세가 험해 지키기가 쉽고 공격하기가 어려우므로 고구려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천도한 것입니다.

웅진성에서 사비성으로 천도

웅진성으로 천도한 후 백제의 왕권은 크게 약화됩니다.

특히 22대 문주왕과 24대 동성왕 때 이들 왕은 신하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요

하지만 동성왕 뒤를 이어 즉위한 무령왕은 내치에 힘써 왕권을 강화시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백제 성왕은 왕권을 강화시킵니다.

성왕은 왕권이 강화되자 사비성으로 천도를 단행합니다.

웅진성이 산세에 있어 방어하기는 쉬우나 물자의 교통이 없어 물자가 부족했지요

하지만 사비성은 평야지대가 펼쳐있을 뿐만 아니라 물자의 교통이 원할합니다.

즉 성왕이 사비성으로 천도한 이유는 왕권의 강화와 더불어 물자가 풍부한 곳으로 천도하여 백제의 경제력을 살찌우겠다는 것을 이유로 천도한 것입니다.

 

 5번 수도를 옮김,,

 

처음에 비류와 온조 및 고구려 유민들은 현재의 산둥반도인 대방군의 영토에 나라를 세워 이름을 십제라 하며, 도읍을 지어 하남위례성이라 하였습니다.

 

 그 후 십제는 온조의 어머니 소서노의 명으로 현재의 한강이북에 온조가 세운 위례성이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하남위례성에 남은 나머지 백성들이 대방군의 압박으로 현재의 인천으로 옮겨왔습니다.

 

하지만 온조는 그들(비류와 소서노파)을 맞아주지 않고 자신이 왕이 되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소서노는 노인의 몸으로 나머지 다섯신하들과 함께 비류의 왕위를 복원하기 위해 온조와 전쟁을 치뤄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노파가 남자로 둔갑하였고, 다섯마리의 호랑이가 도성안에 들어왔다. 그 해에 왕의 어머니가 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 민심을 걱정한 온조는 현재의 한강이남에 도읍을 다시 세우고 한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고이왕 때부터 대륙에 진출한 백제는 근초고왕때부터 중국 동해 해안가를 모조리 장악하고 고구려 못지않은 대 제국으로 성장한다.

 

(그런데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사한 평양성은 현재의 평양이 아니라 요동반도에 있는 평양이다. 대동강 유역의 평양은 장수왕에 의해 하평양으로 개발된다.)


하지만 그 후 광개토 대제때 백제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되며, 대륙쪽의 땅을 대부분 잃고, 개로왕때에는 장수왕에 의해 한성이 불타버린다.

 

 결국 그 당시의 태자 문주는 한성이 백제의 수도로 복원하기는 어려우며, 웅진(공주)로 수도를 옳기게 된다.

 

또한 백제는 잠시 혼란상태에 들어간다.

그러나 동성왕때에는 다시 백제가 부흥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백제는 더 큰 발전을 위해 성왕때에 사비(부여)로 수도를 옳기게 된다.

 

하지만 그 시기에는 백제가 대륙영토를 모조리 잃고, 신라에게 배신당한 암울한 시기였다.

 

결국 성왕이 전사한 후 백제는 잠시 혼란기에 들어간다.

결국 무왕과 의자왕때 잠시의 중흥을 보이기는 했으나 결국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다.

 

 신라

신라도읍지:유물 유적지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유산이 산재해 있는 종합역사지구로서..

유적의 성격에 따라 모두 5개 지구로 나누어져 있는데..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년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신라 왕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능원지구, 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52개의 지정문화재가 세계유산지역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주임해전지(사적 제18호)

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는 신라 원지(국유 연못)를 대표하는 유적.

 

 

경주 첨성대(국보 제31호)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높이는 9.17m.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경주포석정지(사적 제1호)

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젊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기상을 배우던 곳.

 

 

신라태종무열왕릉비(국보25호)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의 능 앞에 세워진 석비

 

 

김유신묘(사적21호)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장군 김유신의 무덤.

 

 

문무대왕릉(사적158호)

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무덤.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으로,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

 

 

불국사 다보탑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0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10.4m, 기단 폭 4.4m이다. 불국사 대웅전 앞 서쪽의 석가탑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는 탑으로, 전형적인 쌍탑가람의 배치이다

 

 

불국사 3층석탑

국보 21호: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동서로 세워진 두 탑 중 서쪽에 있는 탑이다.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석가">釋부처이름 가, ㉠부처이름 ㉡막다">迦如來常住設法塔)'이며 흔히 줄여서 '석가탑'이라고도 한다.

 

 고려

고려

개경 유적 유물

만월대 : 개성시 송악산(松嶽山) 남쪽 기슭에 있는 고려의 왕궁지(王宮址)

만월대

 

선죽교

고려 태조가 919년 송도(松都:개성시)의 시가지를 정비할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선죽교는 1392년(태조 1) 정몽주(鄭夢周)가 이방원(李芳遠 : 조선 태종)에 의해 피살된 장소로 유명하다

 

 조선

조선 도읍지 유적 유물

경복궁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궐(正闕).

 

 

숭례문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重層)의 우진각지붕 다포(多包)집이다. 서울 도성의 남쪽 정문이며 원래의 이름은 숭례문(崇禮門)이다.

 

 

종묘

조선시대 역대의 왕과 왕비 및 추존(追尊)된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신 왕가의 사당.

 

 가야

... 수정중입니다.

 발해 (더블로 드립니다.)

발해의 도읍지는 상경입니다.

756년(문왕 20)∼926년(애왕 26)까지 발해의 서울은 상경이었으며, 지금의 위치는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현  동경성  일대이다.

 

발해의 시조는 대조영이며 고구려 장수였다. 대조영의 출생과 성장과정에 관한 더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발해는 고구려 옛 지역에서 그 유민이 중심이 되어 세운 국가임이 분명하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 발해의 유민은 발해인과 여진인(女眞人)으로 각각 분리되었는데, 이 사실은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상호융합을 이루지 못하였음을 반영한다. 이와 같은 발해의 취약한 결집력은 발해가 거란에게 쉽게 멸망된 이유 중 하나이다.

 

 

주요 문화재 : 보상화무늬

상고시대에 유행한 식물 모양의 장식무늬.

 

 

 

상경용천부 궁궐터

756년(문왕 20)∼926년(애왕 26)까지 발해의 서울이었으며, 지금의 위치는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현 동경성일대이다

 

 

발해의 석등

발해, 높이 6.3m,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
상경 제1절터에서 나온 석등이다. 이 석등은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6m의 거대한 석등

 

 

돌사자상

발해의 돌사자상은 길림성 돈화현의 정혜 공주 묘에서 출토된 유물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당의 돌사자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어 발해 왕실 문화가 당 문화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으나 내용면에서 이 돌사자상은 당당하면서 힘있는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고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검은남색자기단지
크기 : 높이 19.5cm
출토지 :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상경용천부터
검은남색자기단지는 발해시기의 중국 상경용천부터에서 출토되었다.외성 1절터에서 나온 것으로 흰자기보시기와 함게 발해 도자공예 연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곱새기와
출토지 :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상경용천부터
곱새기와는 8세기 중엽의 발해시기 중국 상경용천부터에서 출토되었다.


괴면
출토지 :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상경용천부터
괴면은 8세기 중엽의 발해시기 중국 상경용천부터 1절터에서 출토되었다.


구름모양자배기
크기 : 너비 86cm
출토지 :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상경용천부터
구름모양자배기는 발해시기의 중국 상경용천부터에서 출토되었다.자배기의 테가 특이하게 생기고 매우 크다. 테는 구름무늬와 인동무늬를 도안화하여 대칭으로 조화 있게 돌린 것이며, 그 모습은 안악 3호 무덤을 비롯한 고구려 무덤벽화의 구름무늬를 방불케 한다.


구슬
출토지 : 중국 길림성 돈화시 육정산무덤떼
구슬은 발해시기의 중국 육정산무덤떼에서 출토되었다.


금귀걸이
크기 : 큰 고리 바깥직경 2cm
출토지 : 함경북도 화대군 정문리 창덕3호무덤
금귀걸이는 함경북도 화대군 정문리 창덕 3호 무덤에서 발굴된 발해시기의 유물이다.태환식 금귀걸이다.


금동부처
크기 : 높이 약 9cm
출토지 :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상경용천부터
금동부처는 발해시기의 중국 상경용천부터에서 출토되었다.발해의 부처는 여러 가지 자료로 크기와 형태에서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거기에는 금동부처, 청동부처, 쇠부처, 돌부처, 흙부처 등이 있다. 발해의 부처들은 대체로 얼굴 표정이 부드럽고, 몸체 각부분의 균형이 잡혔으며, 고운 옷을 입은 점이 거의 공통하다. 발해 부처의 모습은 황해북도 곡산이나 평양시 평천구역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나온 고구려 부처와 서로 통한다.


돌부처
출토지 : 중국 길림성 훈춘시 팔련성터
돌부처는 발해시기의 중국 팔련성터에서 출토되었다.발해의 부처는 여러 가지 자료로 크기와 형태에서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거산성
소재지 : 함경남도 북청군 평리
거산성은 함경남도 북청군 평리에 위치한 발해의 산성이다. 거산성은 평리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약 1km 떨어진 거산(해방 120m)의 산마루에 자리잡고 있다.

2004.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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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1.국내성:고구려 초기 도읍지 현재 중국 지린 성(길림성) 지안 현 퉁거우입니다.

유물 유적 : 장군총,무용총,광개토대왕릉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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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총 : 3세기 초부터 427년까지 고구려가 도읍한 지안현 퉁거우평야[通溝平野]에는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와 고구려 최대형 무덤인 태왕릉(太王陵)·사신총(四神塚) 등 석릉과 토분(土墳) 1만 기(基)가 있으나 외형이 거의 완존(完存)한 석릉은 이것뿐이다.

무용총

중국 둥베이[東北]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의 고분벽화(古墳壁畵

 

광개토대왕릉비

비신(碑身)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한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2.평양성:국내성이후 고구려 도읍지

유물 유적 : 을밀대,대동문,최승대가 있습니다.

을밀대: 북한 사적 제7호. 사허정(四虛亭)이라고도 한다. 6세기 중엽 고구려시대에 평양성의 내성장대로 처음 건립되었다.

대동문 : 북한 국보급 문화재 제1호이다. 높이 19m, 축대높이 6.5m, 길이 26.3m, 폭 14.25m이다. 문루는 앞면 3칸, 옆면 3칸이며, 석축 위에 2층으로 된 누각을 갖춘 성문이다. 6세기 중엽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 내성의 동문으로 최초 건립되었다. 고려 초 947년과 조선 초 1392년에 복원되었으며 1635년(조선 인조13년)에 재건되었다

 백제

 1.위례성 : 위례성은 백제의 첫 도읍지였다.

몽촌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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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촌토성에서 발굴된 항아리

몽촌토성은 오래 전부터 백제 초기 토성으로 전하여 왔다.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진흙으로 쌓은 성벽을 만들어 1M 정도 파서

살림집이 아닌 군사의 필요한 것으로 썼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은 올림픽 공원 속에 있다.

풍납토성

서울 송파구 풍납동에 있는 백제 초기의 토성터.

소재지 : 서울 송파구 풍납동

시대 : 백제 초기

지정 : 사적 제11호

규모 : 동벽 1,500m, 남벽 200m, 북벽 300m

1925년 대홍수 때 삼국시대의 청동제 초두가 2개 발견되었고, 토기 조각들도 많이 발견되었다.

돌무지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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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무지시설을 한 점에서 남방식 고인돌과 공통되므로, 원래 고인돌인

무덤이 후대에 상석이 없어져

돌무지 무덤으로 된 가능성도 있다.

2.웅진 :

웅진의 문화재 :

계유명삼존천불비상

국보 제108호

문화재지정일 : 1962년 12월 20일

소재지 :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기타 : 통일신라시대

금제관식(왕)

국보 제154호

문화재지정일 : 1974년 7월 9일

소재지 :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기타 : 백제시대

금제관식(왕비)

국보 제155호

문화재지정일 : 1974년 7월 9일

소재지 :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기타 : 백제시대

금제심엽형이식(왕)

국보 제156호

문화재지정일 : 1974년 7월 9일

소재지 :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기타 : 백제시대

금제수식부이식(왕비)

국보 제157호

문화재지정일 : 1974년 7월 9일

소재지 :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기타 : 백제시대

금제경식(왕비)

국보 제158호

문화재지정일 : 1974년 7월 9일

소재지 :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기타 : 백제시대

3.사비 :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扶餘定林寺址五層石塔) - 국보 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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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백제오층석탑이라고도 한다. 화강석으로 되었으며, 높이는 8.33m이다.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 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다.
지정일 - 1962.12.20
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379
시대 - 백제시대 후기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 - 국보 11호

분류 - 석탑
지정일 - 1962.12.20
소재지 -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
시대 - 백제시대 후기

서산마애삼존불상(瑞山磨崖三尊佛像) - 국보 84호

분류 - 마애불(부동산)
지정일 - 1962.12.20
소재지 -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2-1
시대 - 백제시대 후기


 

부여능산리출토백제금동대향로 -- 국보 287호 충남 부여군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百濟昌王銘石造舍利龕) -- 국보 288호 충남 부여군

부여석조(扶餘石槽) -- 보물 194호 충남 부여군

부여성흥산성(扶餘聖興山城) -- 사적 4호 충남 부여군

부여능산리고분군(扶餘陵山里古墳群) -- 사적 14호 충남 부여군

수도 같은 것은요,, 3번 옮겼다, 4번 옮겼다, 5번 옮겼다,, 이런 이야기 들이 많거든요.

옛날 이야기 들이라서 확실치가 않네요..

그러니 전 전부다 적어드리죠,

 3번 옮겼다는 것은 초등학교 교과서 6학년 1학기에 나옵니다.

위례성→웅진(오늘날의 공주)→사비(오늘날의 부여)

도읍지를 4번 옮김,,

위례성 →한성 →웅진성(오늘날의 공주) →사비성(오늘날의 부여)

위례성에서 한성으로 천도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은 낙랑과 말갈의 침입이 잦고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이 북쪽으로 치우쳐 이들의 침입을 많이 받는 것을 염려하여 도읍을 한강 이남인 한성으로 정합니다.

즉 위례성에서 한성으로 천도한 이유는 낙랑과 말갈의 침입 때문입니다.

한성에서 웅진성으로 천도

서기 475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3만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했습니다.

당시 백제의 왕이었던 개로왕은 고구려의 첩자 도림의 말을 듣고 무리한 토목공사를 벌여 민심을 잃었습니다.

그러자 이를 간파한 고구려에서 백제를 공격하였고 결국 개로왕은 한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아차산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한성이 함락되기 전 개로왕은 태자 문주를 불러 나라의 사직을 보존하라고 합니다.

즉 웅진으로 천도한 이유는 고구려의 침입으로 수도 한성을 빼앗기자 사직을 보존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아울러 웅진은 산세가 험해 지키기가 쉽고 공격하기가 어려우므로 고구려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천도한 것입니다.

웅진성에서 사비성으로 천도

웅진성으로 천도한 후 백제의 왕권은 크게 약화됩니다.

특히 22대 문주왕과 24대 동성왕 때 이들 왕은 신하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요

하지만 동성왕 뒤를 이어 즉위한 무령왕은 내치에 힘써 왕권을 강화시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백제 성왕은 왕권을 강화시킵니다.

성왕은 왕권이 강화되자 사비성으로 천도를 단행합니다.

웅진성이 산세에 있어 방어하기는 쉬우나 물자의 교통이 없어 물자가 부족했지요

하지만 사비성은 평야지대가 펼쳐있을 뿐만 아니라 물자의 교통이 원할합니다.

즉 성왕이 사비성으로 천도한 이유는 왕권의 강화와 더불어 물자가 풍부한 곳으로 천도하여 백제의 경제력을 살찌우겠다는 것을 이유로 천도한 것입니다.

 5번 수도를 옮김,,

처음에 비류와 온조 및 고구려 유민들은 현재의 산둥반도인 대방군의 영토에 나라를 세워 이름을 십제라 하며, 도읍을 지어 하남위례성이라 하였습니다.

 그 후 십제는 온조의 어머니 소서노의 명으로 현재의 한강이북에 온조가 세운 위례성이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하남위례성에 남은 나머지 백성들이 대방군의 압박으로 현재의 인천으로 옮겨왔습니다.

하지만 온조는 그들(비류와 소서노파)을 맞아주지 않고 자신이 왕이 되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소서노는 노인의 몸으로 나머지 다섯신하들과 함께 비류의 왕위를 복원하기 위해 온조와 전쟁을 치뤄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노파가 남자로 둔갑하였고, 다섯마리의 호랑이가 도성안에 들어왔다. 그 해에 왕의 어머니가 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 민심을 걱정한 온조는 현재의 한강이남에 도읍을 다시 세우고 한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고이왕 때부터 대륙에 진출한 백제는 근초고왕때부터 중국 동해 해안가를 모조리 장악하고 고구려 못지않은 대 제국으로 성장한다.

(그런데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사한 평양성은 현재의 평양이 아니라 요동반도에 있는 평양이다. 대동강 유역의 평양은 장수왕에 의해 하평양으로 개발된다.)


하지만 그 후 광개토 대제때 백제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되며, 대륙쪽의 땅을 대부분 잃고, 개로왕때에는 장수왕에 의해 한성이 불타버린다.

 결국 그 당시의 태자 문주는 한성이 백제의 수도로 복원하기는 어려우며, 웅진(공주)로 수도를 옳기게 된다.

또한 백제는 잠시 혼란상태에 들어간다.

그러나 동성왕때에는 다시 백제가 부흥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백제는 더 큰 발전을 위해 성왕때에 사비(부여)로 수도를 옳기게 된다.

하지만 그 시기에는 백제가 대륙영토를 모조리 잃고, 신라에게 배신당한 암울한 시기였다.

결국 성왕이 전사한 후 백제는 잠시 혼란기에 들어간다.

결국 무왕과 의자왕때 잠시의 중흥을 보이기는 했으나 결국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다.

 신라

신라도읍지:유물 유적지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유산이 산재해 있는 종합역사지구로서..

유적의 성격에 따라 모두 5개 지구로 나누어져 있는데..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년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신라 왕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능원지구, 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52개의 지정문화재가 세계유산지역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주임해전지(사적 제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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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는 신라 원지(국유 연못)를 대표하는 유적.

경주 첨성대(국보 제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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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높이는 9.17m.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경주포석정지(사적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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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젊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기상을 배우던 곳.

신라태종무열왕릉비(국보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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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의 능 앞에 세워진 석비

김유신묘(사적21호)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장군 김유신의 무덤.

문무대왕릉(사적1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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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무덤.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으로,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

불국사 다보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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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0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10.4m, 기단 폭 4.4m이다. 불국사 대웅전 앞 서쪽의 석가탑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는 탑으로, 전형적인 쌍탑가람의 배치이다

불국사 3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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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21호: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동서로 세워진 두 탑 중 서쪽에 있는 탑이다.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석가">釋부처이름 가, ㉠부처이름 ㉡막다">迦如來常住設法塔)'이며 흔히 줄여서 '석가탑'이라고도 한다.

 고려

고려

개경 유적 유물

만월대 : 개성시 송악산(松嶽山) 남쪽 기슭에 있는 고려의 왕궁지(王宮址)

만월대

선죽교

고려 태조가 919년 송도(松都:개성시)의 시가지를 정비할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선죽교는 1392년(태조 1) 정몽주(鄭夢周)가 이방원(李芳遠 : 조선 태종)에 의해 피살된 장소로 유명하다

 조선

조선 도읍지 유적 유물

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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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궐(正闕).

 

 

숭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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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重層)의 우진각지붕 다포(多包)집이다. 서울 도성의 남쪽 정문이며 원래의 이름은 숭례문(崇禮門)이다.

종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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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대의 왕과 왕비 및 추존(追尊)된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신 왕가의 사당.

 가야

... 수정중입니다.

 발해 (더블로 드립니다.)

발해의 도읍지는 상경입니다.

756년(문왕 20)∼926년(애왕 26)까지 발해의 서울은 상경이었으며, 지금의 위치는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현  동경성  일대이다.

발해의 시조는 대조영이며 고구려 장수였다. 대조영의 출생과 성장과정에 관한 더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발해는 고구려 옛 지역에서 그 유민이 중심이 되어 세운 국가임이 분명하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 발해의 유민은 발해인과 여진인(女眞人)으로 각각 분리되었는데, 이 사실은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상호융합을 이루지 못하였음을 반영한다. 이와 같은 발해의 취약한 결집력은 발해가 거란에게 쉽게 멸망된 이유 중 하나이다.

주요 문화재 : 보상화무늬

상고시대에 유행한 식물 모양의 장식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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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경용천부 궁궐터

756년(문왕 20)∼926년(애왕 26)까지 발해의 서울이었으며, 지금의 위치는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현 동경성일대이다

발해의 석등

발해, 높이 6.3m,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
상경 제1절터에서 나온 석등이다. 이 석등은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6m의 거대한 석등

 

 

돌사자상

발해의 돌사자상은 길림성 돈화현의 정혜 공주 묘에서 출토된 유물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당의 돌사자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어 발해 왕실 문화가 당 문화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으나 내용면에서 이 돌사자상은 당당하면서 힘있는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고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검은남색자기단지
크기 : 높이 19.5cm
출토지 :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상경용천부터
검은남색자기단지는 발해시기의 중국 상경용천부터에서 출토되었다.외성 1절터에서 나온 것으로 흰자기보시기와 함게 발해 도자공예 연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곱새기와
출토지 :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상경용천부터
곱새기와는 8세기 중엽의 발해시기 중국 상경용천부터에서 출토되었다.


괴면
출토지 :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상경용천부터
괴면은 8세기 중엽의 발해시기 중국 상경용천부터 1절터에서 출토되었다.


구름모양자배기
크기 : 너비 86cm
출토지 :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상경용천부터
구름모양자배기는 발해시기의 중국 상경용천부터에서 출토되었다.자배기의 테가 특이하게 생기고 매우 크다. 테는 구름무늬와 인동무늬를 도안화하여 대칭으로 조화 있게 돌린 것이며, 그 모습은 안악 3호 무덤을 비롯한 고구려 무덤벽화의 구름무늬를 방불케 한다.


구슬
출토지 : 중국 길림성 돈화시 육정산무덤떼
구슬은 발해시기의 중국 육정산무덤떼에서 출토되었다.


금귀걸이
크기 : 큰 고리 바깥직경 2cm
출토지 : 함경북도 화대군 정문리 창덕3호무덤
금귀걸이는 함경북도 화대군 정문리 창덕 3호 무덤에서 발굴된 발해시기의 유물이다.태환식 금귀걸이다.


금동부처
크기 : 높이 약 9cm
출토지 :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상경용천부터
금동부처는 발해시기의 중국 상경용천부터에서 출토되었다.발해의 부처는 여러 가지 자료로 크기와 형태에서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거기에는 금동부처, 청동부처, 쇠부처, 돌부처, 흙부처 등이 있다. 발해의 부처들은 대체로 얼굴 표정이 부드럽고, 몸체 각부분의 균형이 잡혔으며, 고운 옷을 입은 점이 거의 공통하다. 발해 부처의 모습은 황해북도 곡산이나 평양시 평천구역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나온 고구려 부처와 서로 통한다.


돌부처
출토지 : 중국 길림성 훈춘시 팔련성터
돌부처는 발해시기의 중국 팔련성터에서 출토되었다.발해의 부처는 여러 가지 자료로 크기와 형태에서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거산성
소재지 : 함경남도 북청군 평리
거산성은 함경남도 북청군 평리에 위치한 발해의 산성이다. 거산성은 평리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약 1km 떨어진 거산(해방 120m)의 산마루에 자리잡고 있다

2007.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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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백제,신라,가야,조선 으로

도읍지의 유물 유적 조사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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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각 도읍지의 유물 유적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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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

 

 고구려

고구려

1.국내성:고구려 초기 도읍지 현재 중국 지린 성(길림성) 지안 현 퉁거우입니다.

유물 유적 : 장군총,무용총,광개토대왕릉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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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총 : 3세기 초부터 427년까지 고구려가 도읍한 지안현 퉁거우평야[通溝平野]에는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와 고구려 최대형 무덤인 태왕릉(太王陵)·사신총(四神塚) 등 석릉과 토분(土墳) 1만 기(基)가 있으나 외형이 거의 완존(完存)한 석릉은 이것뿐이다.

 

 

무용총

중국 둥베이[東北]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의 고분벽화(古墳壁畵

 

광개토대왕릉비

비신(碑身)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한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2.평양성:국내성이후 고구려 도읍지

유물 유적 : 을밀대,대동문,최승대가 있습니다.

 

을밀대: 북한 사적 제7호. 사허정(四虛亭)이라고도 한다. 6세기 중엽 고구려시대에 평양성의 내성장대로 처음 건립되었다.

 

대동문 : 북한 국보급 문화재 제1호이다. 높이 19m, 축대높이 6.5m, 길이 26.3m, 폭 14.25m이다. 문루는 앞면 3칸, 옆면 3칸이며, 석축 위에 2층으로 된 누각을 갖춘 성문이다. 6세기 중엽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 내성의 동문으로 최초 건립되었다. 고려 초 947년과 조선 초 1392년에 복원되었으며 1635년(조선 인조13년)에 재건되었다

 

 백제

 1.위례성 : 위례성은 백제의 첫 도읍지였다.

 

 

몽촌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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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촌토성에서 발굴된 항아리

 

몽촌토성은 오래 전부터 백제 초기 토성으로 전하여 왔다.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진흙으로 쌓은 성벽을 만들어 1M 정도 파서

살림집이 아닌 군사의 필요한 것으로 썼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은 올림픽 공원 속에 있다.

 

 

풍납토성

서울 송파구 풍납동에 있는 백제 초기의 토성터.

소재지 : 서울 송파구 풍납동

시대 : 백제 초기

지정 : 사적 제11호

규모 : 동벽 1,500m, 남벽 200m, 북벽 300m

1925년 대홍수 때 삼국시대의 청동제 초두가 2개 발견되었고, 토기 조각들도 많이 발견되었다.

 

돌무지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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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무지시설을 한 점에서 남방식 고인돌과 공통되므로, 원래 고인돌인

무덤이 후대에 상석이 없어져

돌무지 무덤으로 된 가능성도 있다.

 

 

 

2.웅진 :

웅진의 문화재 :

 

계유명삼존천불비상

국보 제108호

문화재지정일 : 1962년 12월 20일

소재지 :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기타 : 통일신라시대

 

금제관식(왕)

국보 제154호

문화재지정일 : 1974년 7월 9일

소재지 :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기타 : 백제시대

 

금제관식(왕비)

국보 제155호

문화재지정일 : 1974년 7월 9일

소재지 :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기타 : 백제시대

 

금제심엽형이식(왕)

국보 제156호

문화재지정일 : 1974년 7월 9일

소재지 :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기타 : 백제시대

 

금제수식부이식(왕비)

국보 제157호

문화재지정일 : 1974년 7월 9일

소재지 :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기타 : 백제시대

 

금제경식(왕비)

국보 제158호

문화재지정일 : 1974년 7월 9일

소재지 :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기타 : 백제시대

 

 

3.사비 :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扶餘定林寺址五層石塔) - 국보 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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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백제오층석탑이라고도 한다. 화강석으로 되었으며, 높이는 8.33m이다.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 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다.
지정일 - 1962.12.20
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379
시대 - 백제시대 후기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 - 국보 11호

분류 - 석탑
지정일 - 1962.12.20
소재지 -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
시대 - 백제시대 후기

 

 

서산마애삼존불상(瑞山磨崖三尊佛像) - 국보 84호

분류 - 마애불(부동산)
지정일 - 1962.12.20
소재지 -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2-1
시대 - 백제시대 후기

 


 

부여능산리출토백제금동대향로 -- 국보 287호 충남 부여군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百濟昌王銘石造舍利龕) -- 국보 288호 충남 부여군

 

부여석조(扶餘石槽) -- 보물 194호 충남 부여군

 

부여성흥산성(扶餘聖興山城) -- 사적 4호 충남 부여군

 

부여능산리고분군(扶餘陵山里古墳群) -- 사적 14호 충남 부여군

 

수도 같은 것은요,, 3번 옮겼다, 4번 옮겼다, 5번 옮겼다,, 이런 이야기 들이 많거든요.

 

옛날 이야기 들이라서 확실치가 않네요..

 

그러니 전 전부다 적어드리죠,

 

 3번 옮겼다는 것은 초등학교 교과서 6학년 1학기에 나옵니다.

 

위례성→웅진(오늘날의 공주)→사비(오늘날의 부여)

 

 

도읍지를 4번 옮김,,

 

위례성 →한성 →웅진성(오늘날의 공주) →사비성(오늘날의 부여)

위례성에서 한성으로 천도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은 낙랑과 말갈의 침입이 잦고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이 북쪽으로 치우쳐 이들의 침입을 많이 받는 것을 염려하여 도읍을 한강 이남인 한성으로 정합니다.

즉 위례성에서 한성으로 천도한 이유는 낙랑과 말갈의 침입 때문입니다.

한성에서 웅진성으로 천도

서기 475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3만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했습니다.

당시 백제의 왕이었던 개로왕은 고구려의 첩자 도림의 말을 듣고 무리한 토목공사를 벌여 민심을 잃었습니다.

 

그러자 이를 간파한 고구려에서 백제를 공격하였고 결국 개로왕은 한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아차산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한성이 함락되기 전 개로왕은 태자 문주를 불러 나라의 사직을 보존하라고 합니다.

 

즉 웅진으로 천도한 이유는 고구려의 침입으로 수도 한성을 빼앗기자 사직을 보존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아울러 웅진은 산세가 험해 지키기가 쉽고 공격하기가 어려우므로 고구려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천도한 것입니다.

웅진성에서 사비성으로 천도

웅진성으로 천도한 후 백제의 왕권은 크게 약화됩니다.

특히 22대 문주왕과 24대 동성왕 때 이들 왕은 신하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요

하지만 동성왕 뒤를 이어 즉위한 무령왕은 내치에 힘써 왕권을 강화시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백제 성왕은 왕권을 강화시킵니다.

성왕은 왕권이 강화되자 사비성으로 천도를 단행합니다.

웅진성이 산세에 있어 방어하기는 쉬우나 물자의 교통이 없어 물자가 부족했지요

하지만 사비성은 평야지대가 펼쳐있을 뿐만 아니라 물자의 교통이 원할합니다.

즉 성왕이 사비성으로 천도한 이유는 왕권의 강화와 더불어 물자가 풍부한 곳으로 천도하여 백제의 경제력을 살찌우겠다는 것을 이유로 천도한 것입니다.

 

 5번 수도를 옮김,,

 

처음에 비류와 온조 및 고구려 유민들은 현재의 산둥반도인 대방군의 영토에 나라를 세워 이름을 십제라 하며, 도읍을 지어 하남위례성이라 하였습니다.

 

 그 후 십제는 온조의 어머니 소서노의 명으로 현재의 한강이북에 온조가 세운 위례성이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하남위례성에 남은 나머지 백성들이 대방군의 압박으로 현재의 인천으로 옮겨왔습니다.

 

하지만 온조는 그들(비류와 소서노파)을 맞아주지 않고 자신이 왕이 되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소서노는 노인의 몸으로 나머지 다섯신하들과 함께 비류의 왕위를 복원하기 위해 온조와 전쟁을 치뤄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노파가 남자로 둔갑하였고, 다섯마리의 호랑이가 도성안에 들어왔다. 그 해에 왕의 어머니가 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 민심을 걱정한 온조는 현재의 한강이남에 도읍을 다시 세우고 한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고이왕 때부터 대륙에 진출한 백제는 근초고왕때부터 중국 동해 해안가를 모조리 장악하고 고구려 못지않은 대 제국으로 성장한다.

 

(그런데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사한 평양성은 현재의 평양이 아니라 요동반도에 있는 평양이다. 대동강 유역의 평양은 장수왕에 의해 하평양으로 개발된다.)


하지만 그 후 광개토 대제때 백제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되며, 대륙쪽의 땅을 대부분 잃고, 개로왕때에는 장수왕에 의해 한성이 불타버린다.

 

 결국 그 당시의 태자 문주는 한성이 백제의 수도로 복원하기는 어려우며, 웅진(공주)로 수도를 옳기게 된다.

 

또한 백제는 잠시 혼란상태에 들어간다.

그러나 동성왕때에는 다시 백제가 부흥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백제는 더 큰 발전을 위해 성왕때에 사비(부여)로 수도를 옳기게 된다.

 

하지만 그 시기에는 백제가 대륙영토를 모조리 잃고, 신라에게 배신당한 암울한 시기였다.

 

결국 성왕이 전사한 후 백제는 잠시 혼란기에 들어간다.

결국 무왕과 의자왕때 잠시의 중흥을 보이기는 했으나 결국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다.

 

 신라

신라도읍지:유물 유적지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유산이 산재해 있는 종합역사지구로서..

유적의 성격에 따라 모두 5개 지구로 나누어져 있는데..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년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신라 왕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능원지구, 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52개의 지정문화재가 세계유산지역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주임해전지(사적 제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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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는 신라 원지(국유 연못)를 대표하는 유적.

 

 

경주 첨성대(국보 제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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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높이는 9.17m.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경주포석정지(사적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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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젊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기상을 배우던 곳.

 

 

신라태종무열왕릉비(국보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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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의 능 앞에 세워진 석비

 

 

김유신묘(사적21호)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장군 김유신의 무덤.

 

 

문무대왕릉(사적1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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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무덤.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으로,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

 

 

불국사 다보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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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0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10.4m, 기단 폭 4.4m이다. 불국사 대웅전 앞 서쪽의 석가탑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는 탑으로, 전형적인 쌍탑가람의 배치이다

 

 

불국사 3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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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21호: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동서로 세워진 두 탑 중 서쪽에 있는 탑이다.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이며 흔히 줄여서 '석가탑'이라고도 한다.

 

 고려

고려

개경 유적 유물

만월대 : 개성시 송악산(松嶽山) 남쪽 기슭에 있는 고려의 왕궁지(王宮址)

만월대

 

선죽교

고려 태조가 919년 송도(松都:개성시)의 시가지를 정비할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선죽교는 1392년(태조 1) 정몽주(鄭夢周)가 이방원(李芳遠 : 조선 태종)에 의해 피살된 장소로 유명하다

 

 조선

조선 도읍지 유적 유물

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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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궐(正闕).

 

 

숭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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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重層)의 우진각지붕 다포(多包)집이다. 서울 도성의 남쪽 정문이며 원래의 이름은 숭례문(崇禮門)이다.

 

 

종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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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대의 왕과 왕비 및 추존(追尊)된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신 왕가의 사당.

 

 가야

... 수정중입니다.

 발해 (더블로 드립니다.)

발해의 도읍지는 상경입니다.

756년(문왕 20)∼926년(애왕 26)까지 발해의 서울은 상경이었으며, 지금의 위치는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현  동경성  일대이다.

 

발해의 시조는 대조영이며 고구려 장수였다. 대조영의 출생과 성장과정에 관한 더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발해는 고구려 옛 지역에서 그 유민이 중심이 되어 세운 국가임이 분명하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 발해의 유민은 발해인과 여진인(女眞人)으로 각각 분리되었는데, 이 사실은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상호융합을 이루지 못하였음을 반영한다. 이와 같은 발해의 취약한 결집력은 발해가 거란에게 쉽게 멸망된 이유 중 하나이다.

 

 

주요 문화재 : 보상화무늬

상고시대에 유행한 식물 모양의 장식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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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경용천부 궁궐터

756년(문왕 20)∼926년(애왕 26)까지 발해의 서울이었으며, 지금의 위치는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현 동경성일대이다

 

 

발해의 석등

발해, 높이 6.3m,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
상경 제1절터에서 나온 석등이다. 이 석등은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6m의 거대한 석등

 

 

돌사자상

발해의 돌사자상은 길림성 돈화현의 정혜 공주 묘에서 출토된 유물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당의 돌사자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어 발해 왕실 문화가 당 문화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으나 내용면에서 이 돌사자상은 당당하면서 힘있는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고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검은남색자기단지
크기 : 높이 19.5cm
출토지 :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상경용천부터
검은남색자기단지는 발해시기의 중국 상경용천부터에서 출토되었다.외성 1절터에서 나온 것으로 흰자기보시기와 함게 발해 도자공예 연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곱새기와
출토지 :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상경용천부터
곱새기와는 8세기 중엽의 발해시기 중국 상경용천부터에서 출토되었다.


괴면
출토지 :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상경용천부터
괴면은 8세기 중엽의 발해시기 중국 상경용천부터 1절터에서 출토되었다.


구름모양자배기
크기 : 너비 86cm
출토지 :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상경용천부터
구름모양자배기는 발해시기의 중국 상경용천부터에서 출토되었다.자배기의 테가 특이하게 생기고 매우 크다. 테는 구름무늬와 인동무늬를 도안화하여 대칭으로 조화 있게 돌린 것이며, 그 모습은 안악 3호 무덤을 비롯한 고구려 무덤벽화의 구름무늬를 방불케 한다.


구슬
출토지 : 중국 길림성 돈화시 육정산무덤떼
구슬은 발해시기의 중국 육정산무덤떼에서 출토되었다.


금귀걸이
크기 : 큰 고리 바깥직경 2cm
출토지 : 함경북도 화대군 정문리 창덕3호무덤
금귀걸이는 함경북도 화대군 정문리 창덕 3호 무덤에서 발굴된 발해시기의 유물이다.태환식 금귀걸이다.


금동부처
크기 : 높이 약 9cm
출토지 :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상경용천부터
금동부처는 발해시기의 중국 상경용천부터에서 출토되었다.발해의 부처는 여러 가지 자료로 크기와 형태에서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거기에는 금동부처, 청동부처, 쇠부처, 돌부처, 흙부처 등이 있다. 발해의 부처들은 대체로 얼굴 표정이 부드럽고, 몸체 각부분의 균형이 잡혔으며, 고운 옷을 입은 점이 거의 공통하다. 발해 부처의 모습은 황해북도 곡산이나 평양시 평천구역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나온 고구려 부처와 서로 통한다.


돌부처
출토지 : 중국 길림성 훈춘시 팔련성터
돌부처는 발해시기의 중국 팔련성터에서 출토되었다.발해의 부처는 여러 가지 자료로 크기와 형태에서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거산성
소재지 : 함경남도 북청군 평리
거산성은 함경남도 북청군 평리에 위치한 발해의 산성이다. 거산성은 평리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약 1km 떨어진 거산(해방 120m)의 산마루에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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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각 도읍지의 유물 유적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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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연관이미지

 

고구려

1.국내성:고구려 초기 도읍지 현재 중국 지린 성(길림성) 지안 현 퉁거우입니다.

유물 유적 : 장군총,무용총,광개토대왕릉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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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총 : 3세기 초부터 427년까지 고구려가 도읍한 지안현 퉁거우평야[通溝平野]에는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와 고구려 최대형 무덤인 태왕릉(太王陵)·사신총(四神塚) 등 석릉과 토분(土墳) 1만 기(基)가 있으나 외형이 거의 완존(完存)한 석릉은 이것뿐이다.

무용총

중국 둥베이[東北]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의 고분벽화(古墳壁畵

 

광개토대왕릉비

비신(碑身)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한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2.평양성:국내성이후 고구려 도읍지

유물 유적 : 을밀대,대동문,최승대가 있습니다.

을밀대: 북한 사적 제7호. 사허정(四虛亭)이라고도 한다. 6세기 중엽 고구려시대에 평양성의 내성장대로 처음 건립되었다.

대동문 : 북한 국보급 문화재 제1호이다. 높이 19m, 축대높이 6.5m, 길이 26.3m, 폭 14.25m이다. 문루는 앞면 3칸, 옆면 3칸이며, 석축 위에 2층으로 된 누각을 갖춘 성문이다. 6세기 중엽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 내성의 동문으로 최초 건립되었다. 고려 초 947년과 조선 초 1392년에 복원되었으며 1635년(조선 인조13년)에 재건되었다

 백제

 1.위례성 : 위례성은 백제의 첫 도읍지였다.

몽촌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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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촌토성에서 발굴된 항아리

몽촌토성은 오래 전부터 백제 초기 토성으로 전하여 왔다.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진흙으로 쌓은 성벽을 만들어 1M 정도 파서

살림집이 아닌 군사의 필요한 것으로 썼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은 올림픽 공원 속에 있다.

풍납토성

서울 송파구 풍납동에 있는 백제 초기의 토성터.

소재지 : 서울 송파구 풍납동

시대 : 백제 초기

지정 : 사적 제11호

규모 : 동벽 1,500m, 남벽 200m, 북벽 300m

1925년 대홍수 때 삼국시대의 청동제 초두가 2개 발견되었고, 토기 조각들도 많이 발견되었다.

돌무지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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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무지시설을 한 점에서 남방식 고인돌과 공통되므로, 원래 고인돌인

무덤이 후대에 상석이 없어져

돌무지 무덤으로 된 가능성도 있다.

2.웅진 :

웅진의 문화재 :

계유명삼존천불비상

국보 제108호

문화재지정일 : 1962년 12월 20일

소재지 :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기타 : 통일신라시대

금제관식(왕)

국보 제154호

문화재지정일 : 1974년 7월 9일

소재지 :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기타 : 백제시대

금제관식(왕비)

국보 제155호

문화재지정일 : 1974년 7월 9일

소재지 :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기타 : 백제시대

금제심엽형이식(왕)

국보 제156호

문화재지정일 : 1974년 7월 9일

소재지 :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기타 : 백제시대

금제수식부이식(왕비)

국보 제157호

문화재지정일 : 1974년 7월 9일

소재지 :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기타 : 백제시대

금제경식(왕비)

국보 제158호

문화재지정일 : 1974년 7월 9일

소재지 :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기타 : 백제시대

3.사비 :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扶餘定林寺址五層石塔) - 국보 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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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백제오층석탑이라고도 한다. 화강석으로 되었으며, 높이는 8.33m이다.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 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다.
지정일 - 1962.12.20
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379
시대 - 백제시대 후기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 - 국보 11호

분류 - 석탑
지정일 - 1962.12.20
소재지 -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
시대 - 백제시대 후기

서산마애삼존불상(瑞山磨崖三尊佛像) - 국보 84호

분류 - 마애불(부동산)
지정일 - 1962.12.20
소재지 -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2-1
시대 - 백제시대 후기


 

부여능산리출토백제금동대향로 -- 국보 287호 충남 부여군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百濟昌王銘石造舍利龕) -- 국보 288호 충남 부여군

부여석조(扶餘石槽) -- 보물 194호 충남 부여군

부여성흥산성(扶餘聖興山城) -- 사적 4호 충남 부여군

부여능산리고분군(扶餘陵山里古墳群) -- 사적 14호 충남 부여군

수도 같은 것은요,, 3번 옮겼다, 4번 옮겼다, 5번 옮겼다,, 이런 이야기 들이 많거든요.

옛날 이야기 들이라서 확실치가 않네요..

그러니 전 전부다 적어드리죠,

 3번 옮겼다는 것은 초등학교 교과서 6학년 1학기에 나옵니다.

위례성→웅진(오늘날의 공주)→사비(오늘날의 부여)

도읍지를 4번 옮김,,

위례성 →한성 →웅진성(오늘날의 공주) →사비성(오늘날의 부여)

위례성에서 한성으로 천도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은 낙랑과 말갈의 침입이 잦고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이 북쪽으로 치우쳐 이들의 침입을 많이 받는 것을 염려하여 도읍을 한강 이남인 한성으로 정합니다.

즉 위례성에서 한성으로 천도한 이유는 낙랑과 말갈의 침입 때문입니다.

한성에서 웅진성으로 천도

서기 475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3만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했습니다.

당시 백제의 왕이었던 개로왕은 고구려의 첩자 도림의 말을 듣고 무리한 토목공사를 벌여 민심을 잃었습니다.

그러자 이를 간파한 고구려에서 백제를 공격하였고 결국 개로왕은 한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아차산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한성이 함락되기 전 개로왕은 태자 문주를 불러 나라의 사직을 보존하라고 합니다.

즉 웅진으로 천도한 이유는 고구려의 침입으로 수도 한성을 빼앗기자 사직을 보존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아울러 웅진은 산세가 험해 지키기가 쉽고 공격하기가 어려우므로 고구려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천도한 것입니다.

웅진성에서 사비성으로 천도

웅진성으로 천도한 후 백제의 왕권은 크게 약화됩니다.

특히 22대 문주왕과 24대 동성왕 때 이들 왕은 신하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요

하지만 동성왕 뒤를 이어 즉위한 무령왕은 내치에 힘써 왕권을 강화시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백제 성왕은 왕권을 강화시킵니다.

성왕은 왕권이 강화되자 사비성으로 천도를 단행합니다.

웅진성이 산세에 있어 방어하기는 쉬우나 물자의 교통이 없어 물자가 부족했지요

하지만 사비성은 평야지대가 펼쳐있을 뿐만 아니라 물자의 교통이 원할합니다.

즉 성왕이 사비성으로 천도한 이유는 왕권의 강화와 더불어 물자가 풍부한 곳으로 천도하여 백제의 경제력을 살찌우겠다는 것을 이유로 천도한 것입니다.

 5번 수도를 옮김,,

처음에 비류와 온조 및 고구려 유민들은 현재의 산둥반도인 대방군의 영토에 나라를 세워 이름을 십제라 하며, 도읍을 지어 하남위례성이라 하였습니다.

 그 후 십제는 온조의 어머니 소서노의 명으로 현재의 한강이북에 온조가 세운 위례성이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하남위례성에 남은 나머지 백성들이 대방군의 압박으로 현재의 인천으로 옮겨왔습니다.

하지만 온조는 그들(비류와 소서노파)을 맞아주지 않고 자신이 왕이 되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소서노는 노인의 몸으로 나머지 다섯신하들과 함께 비류의 왕위를 복원하기 위해 온조와 전쟁을 치뤄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노파가 남자로 둔갑하였고, 다섯마리의 호랑이가 도성안에 들어왔다. 그 해에 왕의 어머니가 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 민심을 걱정한 온조는 현재의 한강이남에 도읍을 다시 세우고 한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고이왕 때부터 대륙에 진출한 백제는 근초고왕때부터 중국 동해 해안가를 모조리 장악하고 고구려 못지않은 대 제국으로 성장한다.

(그런데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사한 평양성은 현재의 평양이 아니라 요동반도에 있는 평양이다. 대동강 유역의 평양은 장수왕에 의해 하평양으로 개발된다.)


하지만 그 후 광개토 대제때 백제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되며, 대륙쪽의 땅을 대부분 잃고, 개로왕때에는 장수왕에 의해 한성이 불타버린다.

 결국 그 당시의 태자 문주는 한성이 백제의 수도로 복원하기는 어려우며, 웅진(공주)로 수도를 옳기게 된다.

또한 백제는 잠시 혼란상태에 들어간다.

그러나 동성왕때에는 다시 백제가 부흥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백제는 더 큰 발전을 위해 성왕때에 사비(부여)로 수도를 옳기게 된다.

하지만 그 시기에는 백제가 대륙영토를 모조리 잃고, 신라에게 배신당한 암울한 시기였다.

결국 성왕이 전사한 후 백제는 잠시 혼란기에 들어간다.

결국 무왕과 의자왕때 잠시의 중흥을 보이기는 했으나 결국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다.

 신라

신라도읍지:유물 유적지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유산이 산재해 있는 종합역사지구로서..

유적의 성격에 따라 모두 5개 지구로 나누어져 있는데..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년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신라 왕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능원지구, 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52개의 지정문화재가 세계유산지역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주임해전지(사적 제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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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는 신라 원지(국유 연못)를 대표하는 유적.

경주 첨성대(국보 제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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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높이는 9.17m.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경주포석정지(사적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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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젊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기상을 배우던 곳.

신라태종무열왕릉비(국보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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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의 능 앞에 세워진 석비

김유신묘(사적21호)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장군 김유신의 무덤.

문무대왕릉(사적1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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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무덤.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으로,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

불국사 다보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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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0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10.4m, 기단 폭 4.4m이다. 불국사 대웅전 앞 서쪽의 석가탑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는 탑으로, 전형적인 쌍탑가람의 배치이다

불국사 3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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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21호: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동서로 세워진 두 탑 중 서쪽에 있는 탑이다.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이며 흔히 줄여서 '석가탑'이라고도 한다.

 고려

고려

개경 유적 유물

만월대 : 개성시 송악산(松嶽山) 남쪽 기슭에 있는 고려의 왕궁지(王宮址)

만월대

선죽교

고려 태조가 919년 송도(松都:개성시)의 시가지를 정비할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선죽교는 1392년(태조 1) 정몽주(鄭夢周)가 이방원(李芳遠 : 조선 태종)에 의해 피살된 장소로 유명하다

 조선

조선 도읍지 유적 유물

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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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궐(正闕).

 

 

숭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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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重層)의 우진각지붕 다포(多包)집이다. 서울 도성의 남쪽 정문이며 원래의 이름은 숭례문(崇禮門)이다.

종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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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대의 왕과 왕비 및 추존(追尊)된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신 왕가의 사당.

 가야

... 수정중입니다.

 발해 (더블로 드립니다.)

발해의 도읍지는 상경입니다.

756년(문왕 20)∼926년(애왕 26)까지 발해의 서울은 상경이었으며, 지금의 위치는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현  동경성  일대이다.

발해의 시조는 대조영이며 고구려 장수였다. 대조영의 출생과 성장과정에 관한 더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발해는 고구려 옛 지역에서 그 유민이 중심이 되어 세운 국가임이 분명하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 발해의 유민은 발해인과 여진인(女眞人)으로 각각 분리되었는데, 이 사실은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상호융합을 이루지 못하였음을 반영한다. 이와 같은 발해의 취약한 결집력은 발해가 거란에게 쉽게 멸망된 이유 중 하나이다.

주요 문화재 : 보상화무늬

상고시대에 유행한 식물 모양의 장식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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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경용천부 궁궐터

756년(문왕 20)∼926년(애왕 26)까지 발해의 서울이었으며, 지금의 위치는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현 동경성일대이다

발해의 석등

발해, 높이 6.3m,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
상경 제1절터에서 나온 석등이다. 이 석등은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6m의 거대한 석등

 

 

돌사자상

발해의 돌사자상은 길림성 돈화현의 정혜 공주 묘에서 출토된 유물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당의 돌사자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어 발해 왕실 문화가 당 문화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으나 내용면에서 이 돌사자상은 당당하면서 힘있는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고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검은남색자기단지
크기 : 높이 19.5cm
출토지 :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상경용천부터
검은남색자기단지는 발해시기의 중국 상경용천부터에서 출토되었다.외성 1절터에서 나온 것으로 흰자기보시기와 함게 발해 도자공예 연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곱새기와
출토지 :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상경용천부터
곱새기와는 8세기 중엽의 발해시기 중국 상경용천부터에서 출토되었다.


괴면
출토지 :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상경용천부터
괴면은 8세기 중엽의 발해시기 중국 상경용천부터 1절터에서 출토되었다.


구름모양자배기
크기 : 너비 86cm
출토지 :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상경용천부터
구름모양자배기는 발해시기의 중국 상경용천부터에서 출토되었다.자배기의 테가 특이하게 생기고 매우 크다. 테는 구름무늬와 인동무늬를 도안화하여 대칭으로 조화 있게 돌린 것이며, 그 모습은 안악 3호 무덤을 비롯한 고구려 무덤벽화의 구름무늬를 방불케 한다.


구슬
출토지 : 중국 길림성 돈화시 육정산무덤떼
구슬은 발해시기의 중국 육정산무덤떼에서 출토되었다.


금귀걸이
크기 : 큰 고리 바깥직경 2cm
출토지 : 함경북도 화대군 정문리 창덕3호무덤
금귀걸이는 함경북도 화대군 정문리 창덕 3호 무덤에서 발굴된 발해시기의 유물이다.태환식 금귀걸이다.


금동부처
크기 : 높이 약 9cm
출토지 :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상경용천부터
금동부처는 발해시기의 중국 상경용천부터에서 출토되었다.발해의 부처는 여러 가지 자료로 크기와 형태에서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거기에는 금동부처, 청동부처, 쇠부처, 돌부처, 흙부처 등이 있다. 발해의 부처들은 대체로 얼굴 표정이 부드럽고, 몸체 각부분의 균형이 잡혔으며, 고운 옷을 입은 점이 거의 공통하다. 발해 부처의 모습은 황해북도 곡산이나 평양시 평천구역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나온 고구려 부처와 서로 통한다.


돌부처
출토지 : 중국 길림성 훈춘시 팔련성터
돌부처는 발해시기의 중국 팔련성터에서 출토되었다.발해의 부처는 여러 가지 자료로 크기와 형태에서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거산성
소재지 : 함경남도 북청군 평리
거산성은 함경남도 북청군 평리에 위치한 발해의 산성이다. 거산성은 평리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약 1km 떨어진 거산(해방 120m)의 산마루에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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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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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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