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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임실군의 문화재
qkrq**** 조회수 3,257 작성일2009.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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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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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용암리 석등

 

종 목  보물  제26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전북 임실군  신평면 용암리 189 
시 대 통일신라


우리나라에서 손꼽힐 정도로 큰 석등으로 가운데받침돌을 제외한 각 부분 모두 신라시대 석등의 기본형태인 8각을 이루고 있다. 석등의 전체 높이는 5.18m이다.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리고 있다.

 

아래받침돌에는 옆면에 안상을 새기고, 윗면에는 커다란 꽃장식을 두었으며 그 위에는 구름을 조각하였다. 가운데기둥은 장고 모양이며, 연꽃을 새긴 마디가 있다. 윗받침돌에도 연꽃이 새겨져 있으며, 그 위에 있는 화사석(火舍石)에는 각 면마다 창을 내었다. 지붕돌의 경사는 급한 편이며, 여덟 곳의 귀퉁이 마다 큼직한 꽃장식이 달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머리장식받침)과 복발(엎어놓은 그릇 모양의 장식)이 놓여 있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여덟 면에 모두 창을 낸 예를 실상사석등(보물 제35호)이나 개선사지석등(보물 제111호)에서도 볼 수 있어 호남지방 석등의 특색을 보여 주고 있다.


 

2.용암리사지 석조비로자나불상 


종 목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2호

지 정 일 1977.12.31
소 재 지 전북 임실군  신평면 용암리 730-6 
시 대 통일신라


좌대란 불상을 세우는 받침을 이른다. 이 2기의 좌대는 1900년경 중기사터로부터 약 30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어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좌대 중 하나는 아래·가운데·윗받침이 모두 8각을 이룬다. 아래받침의 각 면에는 무늬를 두었는데, 자세한 모습을 알 수 없을 만큼 희미하다. 가운데받침에는 안상을 얕게 새긴 후 그 안에 합장한 좌상을 조각하였다.

 

다른 하나도 전체적으로 8각의 형태이나 각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8각의 가운데받침은 4면에만 사각형으로 창의 형태를 움푹하게 표현하였고, 반원형의 윗받침에는 솟은 연꽃무늬를 새겼다.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2기 모두 규모나 무늬로 보아 윗받침이 서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현재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불을 그 위에 모시고 있다. 

 

3.오수리 석불

 

종 목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6호

지 정 일 1979.12.27
소 재 지 전북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550-1 
시 대 고려시대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에 있는 석불로, 하체 부분이 땅에 묻혀 있다. 광배와 불상이 하나의 돌로 되어 있어 옆에서 보면 한쪽 면은 완만한 타원을 이루고, 불상이 조각된 면은 약간 볼록하다.

 

민머리 위에는 작은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솟아 있고, 얼굴은 역삼각형이다. 귀는 길게 표현되었으며 목에는 3줄의 삼도가 있다.

 

신체는 어깨에서 몸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아지는데, 어깨 폭은 1.4m이고 땅에 접한 부분은 1m이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가슴 밑에서 역삼각형을 이루고, 그 아래 소매자락은 마치 손을 넣고 있는 것처럼 볼록하게 표현되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뾰족한 타원형이며,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4.학정리 석불

 

종 목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7호

지 정 일 1979.12.27
소 재 지 전북 임실군  삼계면 학정리 285 
시 대 고려시대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 학정리의 밭 가운데에 서 있는 불상으로, 하반신이 땅속에 묻혀 있다. 땅위로 드러난 부분의 높이는 1.55m, 너비는 0.85m이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게 표현되어 있다. 풍만한 얼굴에 눈은 양 끝이 치켜 올라가 있고, 입은 작은 편이다. 양 어깨를 두른 옷은 가슴에서 완만한 U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옷주름은 선이 희미해서 형식화된 듯하다. 가슴 아래가 땅속에 묻혀 하체의 형태를 확인할 수 없다.

 

왼손이 배 중앙을 지나 오른손 관절부분에 이르고 있는데, 약그릇 같은 것을 들고 있는 듯한 모습이어서 약사여래불로 추정하고 있다. 

 

5.만취정 

 

종 목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06호

지 정 일 1983.08.24
소 재 지 전북 임실군  삼계면 산수리 234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선조 5년(1572)에 만취정 김위 선생이 지은 건물로 세운 후 여러 차례 고쳤으며, 헌종 3년(1837)에 마지막으로 수리하였다.

 

김위 선생은 장흥부사 등 9번의 수령을 지냈으며, 팔도암행어사를 지내면서 잘못된 일을 바로 잡았다. 또한 시문에도 능해서 이율곡과도 가까웠다.

 

만취정은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가운데 2칸에는 방을 만들고 앞쪽·뒤쪽 그리고 오른쪽에 마루를 만들었다. 정자 안에는 이율곡과 기대승 등이 지은 시가 보관되어 있다.

 


 

6.신흥사 대웅전 

 

종 목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2호

지 정 일 1985.08.16
소 재 지 전북 임실군  관촌면 상월리 360 
시 대 백제


신흥사는 사자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성왕 7년(529)에 지었다는 설과 신라 말기에 진감국사가 지었다는 설이 있으나 자세히 알 수는 없다. 여러 차례 수리가 있었으며 전성기에는 300여 명의 승려가 머물렀던 큰 절이었다.

신흥사 대웅전은 절의 중심에 있으며 석가모니를 모시는 법당이다.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집이다. 기단은 자연석 기단이며, 기둥은 가운데만 굵은 배흘림 기둥으로 모서리 기둥은 다른 기둥에 비해 매우 크다. 기둥의 높이가 평면 규모에 비해 낮아서 상대적으로 지붕이 커 보인다. 가운데 칸은 4짝 미닫이로 빗살문이며, 양쪽 칸은 3짝 미닫이 빗살문으로 되어있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양식이다. 가운데 칸은 2개의 공포가 있고, 양쪽 칸은 1개의 공포로 이루어져 있다.

 

대웅전은 여러 차례의 수리를 하였고, 조각수법은 화려하지 않지만 백제 때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 문화재적인 가치가 크다.

 

7.운서정 

 

종 목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5호

지 정 일 1990.06.30
소 재 지 전북 임실군  관촌면 덕천리 산52-3 
시 대 일제강점기


당대의 부호인 승지 김양근의 아들인 김승희가 부친의 덕을 추모하기 위해서 6년 간에 걸쳐 세운 정각으로 1928년 당시 쌀 3백석을 들여 세웠다고 한다.

 

정각과 동·서재 그리고 가정문으로 이루어져 있어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조선조 본래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거대한 목재와 돌기단 등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케 하고 있다.

 

관촌면 오원천가의 사선대 위에 위치한 운서정은 사선대의 울창한 수목에 둘러싸여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일제시대 우국지사들이 모여 한을 달래던 곳으로도 유명하여 관광지 사선대의 빼놓을 수 없는 명소가 되어있다.


 

8.김복규.김기종 효자정려비 및 정판


종 목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44호

지 정 일 1993.08.31
소 재 지 전북 임실군  임실읍 정월리 561 
시 대 조선시대


정려비란 충신·효자·열녀 등의 언행과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그들이 살던 마을 입구에 세우는 비이다. 효충서원 내의 정려각안에 서 있는 이 2기의 비는 조선 철종 때 사람인 김복규, 김기종 부자의 효행을 기리고 있다.

 

김복규는 효심이 지극한 이로, 16세에 부친상을 당하였으나, 묘지를 정하지 못한 채 밤낮으로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꿈에 나타난 도사가 일러준 대로 약을 구해 아버지께 다려드리니 다시 깨어나 천수를 누리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효행을 듣고 나라에서는 증 공조참판동지의금부사의 벼슬을 내려주었다. 그의 아들 기종 역시 아버지에 대한 효가 지극하여 부모상을 당하자 3년간을 묘 옆에 초막을 짓고 살며 애통해 하였다. 그 때의 울음소리가 마치 호랑이의 울음소리 같았다 하여 마을 이름을 ‘호동(虎洞)’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비는 낮은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모습으로, 2기 모두 형식이다. 앞면에는 각각 비의 제목을 세로로 새겼는데, 추사 김정희가 쓴 글씨이다.

 

조선 철종 6년(1885)에 세운 것으로, 이조참판 서유훈이 왕의 명을 받들어 건립하였다.


 

9.이도리 미륵불상 

 

종 목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45호

지 정 일 1993.08.31
소 재 지 전북 임실군  임실읍 이도리 210-2 
시 대 백제


운수사는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읍 이도리 수정마을에 있는 절로 창건 연대와 세운 목적은 전하지 않지만 백제시대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에는 높이 2.54m, 어깨 폭 0.81m의 석불이 있는데, 풍수지리설에 의해 산세의 재난을 막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전에는 주위에 숲이 울창하였으나 지금은 석불만이 쓸쓸하게 남아 있다.

 

비교적 표현이 잘 되어 있지만 목 아래 부분부터는 조각이 희미하다. 몸에는 흰색이 칠해져 있고 머리와 눈썹, 수염은 검은색이다. 입술은 악귀가 싫어하는 붉은 칠을 하고 있어 토속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10.상이암 부도


종 목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0호

지 정 일 1995.06.20
소 재 지 전북 임실군  성수면 성수리 산85 
시 대 조선시대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상이암 내에 서 있는 이 부도는 모시고 있는 사리의 주인공이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부도는 바닥돌 위로 전체의 무게를 받치기 위한 기단을 두고, 그 위로 위아래를 자른 계란모양의 탑몸돌을 올린 후 지붕돌을 얹은 모습인데, 탑몸돌을 제외한 각 부분이 4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위로, 둥근모양의 돌과 버섯모양의 돌이 차례로 올려져 길쭉한 머리장식을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각 부분을 이루는 조각이나, 만든 솜씨가 섬세하면서도 뛰어나다. 이 암자에는 이 부도 외에 2기의 부도가 더 전하고 있는데, 이들은 1986년에 문화재자료 제124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11.수운정 


종 목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1호

지 정 일 1995.06.20
소 재 지 전북 임실군  신덕면 금정리 251-1 
시 대 조선시대


경주 김씨 15대손 수운 김낙현이 자연을 벗삼아 풍류를 즐기기 위해 조선 철종 13년(1862)에 지은 건물이다.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로 지붕은 옆모습이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당시 나그네들이 이곳의 경치 좋은 풍경을 읊은 글귀를 써 현관에 걸었다고 하며 지금은 마을 사람들의 대화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12.이석용 생가 


종 목  전라북도 기념물  제91호

지 정 일 1997.07.18
소 재 지 전북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 676 
시 대 조선시대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이며 의병장이었던 이석용 선생의 생가이다.

 

이석용은 고종 15년(1878) 이 집에서 태어나 1903년까지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에는 임실군 성수면 태평리로 옮겨 의병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1870년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는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다. 자연석 주춧돌 위에 둥근기둥을 세웠으며 마루는 건축 당시에는 없던 것을 후대에 덧대어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13.성미산성

 

종 목  전라북도 기념물  제100호

지 정 일 1999.04.23
소 재 지 전북 임실군  관촌면 덕천리 산24번지 일원 
시 대 삼국시대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 해발 430.5m의 성미산 정상의 산세를 이용하여 산꼭대기를 빙둘러 쌓은 산성으로, 둘레는 517.5m이다.

 

성 내부의 건물터 근처에 삼국시대의 토기조각과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는데, 이들 토기 중에 삿무늬토기가 발견되어 백제 때 쌓은 성곽으로 보인다.

 

이 성곽은 신라와 백제가 대립하던 6∼7세기에 방어적 측면이 강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전주-남원간 국도와 섬진강변에 입지를 두고 있어 지정학적 측면에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대부분 붕괴되고 성 내부의 훼손이 심하지만 일부 상태가 양호한 성벽도 더러 남아있어 보존이 필요하다.


 

14.의견비 


종 목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호

지 정 일 1972.12.02
소 재 지 전북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322 
시 대  근대


오수시장 옆의 원동산 공원에 있는 의견비와 동상으로, 주인을 구하고 목숨을 바친 개의 충성과 의리를 기리고 있다. “오수”라는 지방이름은 “은혜갚은 개”라는 뜻으로, 이곳 전설과 관련이 있다.

 

옛날 통일신라시대 때 지사면 영천리에 김개인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개를 매우 사랑하여 어딜 가든지 데리고 다녔다. 어느날 그는 술에 취해 집에 가는 도중 그만 길에서 잠이 들었다. 얼마 후 그 곳에 산불이 나서 그 불길이 주인 근처까지 오게 되자 급해진 개가 주인을 깨우려 했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개는 할 수 없이 냇가에 들어가 온몸에 물을 묻혀 주인이 자는 주변을 적시기 시작했다. 이런 일을 수백 번 반복하여 겨우 불길은 잡았으나 지친 개는 그만 쓰러져 죽고 말았다. 나중에 잠에서 깨어난 주인은 모든 상황을 짐작하고 개의 충성심에 감탄하여 무덤을 만들어 묻어주고 자신의 지팡이를 꽂아 두었다. 그것이 나무로 살아나 자라나 이 나무를 “오수”라 이름 붙이고, 마을 이름도 오수라 불렀다.

 

후에 동네 사람들이 개의 충성을 대대로 알리기 위해 의견비를 세웠다고 하나 전하지 않고, 현재의 것은 1955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믿음과 의리가 사라져 가는 오늘날에 깊은 감동을 주는 귀중한 민속자료이다.


 

15.이웅재 고가 


종 목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2호

지 정 일 1977.12.31
소 재 지 전북 임실군  오수면 둔덕리 456-1 
시 대  조선시대


현 소유자의 16대 선조 춘성정이 지은 집이라고 전하며, 여러번의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에서 남으로 비탈진 대지에 동남향으로 건물이 있다.

 

안채는 동서 양쪽에 날개를 달았으며, 큰 방의 오른쪽에 머릿방 대신 도장방이 있고, 그 남쪽에 머릿방을 두었다. 안채 앞쪽에는 안행랑채가 안채를 감싸고 있으며, 안행랑채는 방아실·안변소·안광·책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행랑채의 동쪽에는 一자형으로 각 2칸씩의 방과 마루를 지닌 사랑채가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종 1년(1864)에 지었다고 하며, 중앙부 한 곳에만 출입문이 있다.

 

대문재는 중앙에 솟을대문을 두었으며 ‘유명조선효자증통정대부사 조참의이부위지려’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이것은 고종 7년(1870)에 내려진 것으로 문간채도 이 무렵에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대문 남쪽에는 바깥 변소가 있으며 전면 좌우에는 석상이 있다.


 

16.사곡리 남근석 


종 목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31호

지 정 일 1998.01.09
소 재 지 전북 임실군  덕치면 사곡리 
시 대 미상


자경마을 앞 도로변에 서 있는 남근석이다.

 

남근석은 남성 성기 모양을 한 자연암석이나 인위적으로 조각한 것으로, 민족 고유신앙인 성기숭배사상에서 다산과 풍년을 기원하고 질병이나 악으로부터 보호해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높이 200㎝, 둘레 113㎝의 원추형 사각꼴으로, 이곳의 민심이 흉흉하고 돌림병이 심하여 그 원인을 알아보니, 마을의 형상이 여성의 성기 모양을 하고 있는 탓이라 하여 땅의 기운을 누르고자 아 남근석을 세웠다는 얘기가 전한다.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가 없고, 현재의 남근석은 경지정리를 하다 부러진 것을 다시 붙여 놓은 것이다. 

 

17.영천서원 

 

종 목  문화재자료  제20호

지 정 일 1984.04.01
소 재 지 전북 임실군  지사면 영천리 203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종(재위 1506∼1544) 때 기묘사화로 희생된 안처순을 중심으로 정환·정황·이대병 등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안처순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지방학교를 발전시키고자 노력한 사람이다.

 

영천서원은 광해군 11년(1619)에 세웠으며, 숙종 12년(1686)에 나라에서 현판을 내려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5년(1868)에 철거되었다가 광복 후에 후손들이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공부하는 장소인 강당 역시 맞배지붕으로 꾸몄으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되어 있다.

 

이 서원은 근처에 있는 30여개 서원 중에서 유일한 사액서원으로 권위가 높아 뛰어난 학자들이 멀리서까지 몰려왔다고 한다.


 

18.주암서원 

 

종 목  문화재자료  제21호

지 정 일 1984.04.01
소 재 지 전북 임실군  지사면 방계리 713-1 
시 대  조선시대


연촌 최덕지·암계 최연손·율계 장급·사촌 장경세 등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조선 인조 8년(1630)에 세웠으며, 광무 원년(1897)에 철폐되었다가 그 후 1907년에 다시 세웠다.

 

제사지내는 장소인 사당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공부하는 강당 역시 팔작지붕으로 앞면 4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이다.

 

이 서원에서는 해마다 음력 3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19.신안서원

 

종 목  문화재자료  제22호

지 정 일 1984.04.01
소 재 지 전북 임실군  임실읍 신안리 447 
시 대 조선시대


주희와 신재 한호겸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한호겸은 성리학자로서 항상 주희의 영정을 모셔왔는데, 그가 죽은 뒤 조선 선조 21년(1588)에 제자들이 그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신안사라는 사당을 짓고 주희와 그의 위패를 함께 모셨다. 그 뒤 정유재란으로 불탄 것을 현종 10년(1669)에 다시 세웠고, 순조 19년(1819)에는 나라의 지원을 받는 사액서원이 되어 이름도 신안서원로 바뀌었다. 고종 5년(186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58년에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원 안에 있는 건물로는 사당, 강당, 동재, 신문, 고사, 창고, 대문 등이 있다.사당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강당은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의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현재 이곳에는 주희를 중심으로 이서·송경원·한호겸·한필성·강백진·한명유·송시열·김수근 등을 모시고 해마다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20.해월암 

 

종 목  문화재자료  제24호

지 정 일 1984.04.01
소 재 지 전북 임실군  오수면 대명리 715 
시 대 고려시대


해월암은 고려 공민왕 원년(1352)에 해경대사와 월산대사가 세운 절이다. 절 이름은 이 두 스님의 이름에서 따와 ‘해월암’이라 하였다. 조선 명종 11년(1556)에 남원부사가 고쳐 세웠고 영조 23년(1747)에는 거사 양정봉이 고쳐 지었으며, 철종 9년(1858)과 1915년에 다시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인법당인 본전을 비롯하여 산식각, 요사채 등이 있다. 본전은 ㄱ자형으로 한쪽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고, 다른 한쪽은 앞면이 사다리꼴인 우진각지붕으로 꾸몄다. 산신각은 앞면 1칸·옆면 1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21.죽림암 

 

종 목  문화재자료  제25호

지 정 일 1984.04.01
소 재 지 전북 임실군  임실읍 성가리 525 
시 대  조선시대


용모산 밑에 있는 죽림암은 9세기말 통일신라 진감국사가 신흥사를 세운 후에 수행과 더불어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지었다. 당시 암자 주위에 대나무가 있어 명칭이 ‘죽림암’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 뒤 조선 연산군 10년(1504)에 지엄선사가 고쳐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며, 현종 5년(1664)에 전남의 어느 민가를 해체하여 복원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2.임실향교 대성전

 

종 목  문화재자료  제26호

지 정 일 1984.04.01
소 재 지 전북 임실군  임실읍 이도리 812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임실향교의 원래 자리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태종 13년(1413) 지금 있는 자리에 옮겨 지은 후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로는 대성전을 비롯하여 명륜당과 동재·서재가 있으며,출입구로 내삼문·외삼문·홍살문 등이 있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앞면 3칸·옆면 4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23.노동환 가옥

 

종 목  문화재자료  제118호

지 정 일 1986.09.08
소 재 지 전북 임실군  삼계면 후천리 465 
시 대  조선시대


집 주인의 8대조 노엽이 효종 1년(1650)경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는 집으로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서쪽으로부터 앞쪽에 부엌이 있고 뒤쪽으로 방이 둘 있다. 다음으로 안방과 대청이 있고 건넌방 뒤쪽에 도장이 있다. 도장은 각종 물품을 보관하는 곳으로 통풍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마루를 설치했다.

 

행랑채는 원래 모습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지금은 외양간과 헛간 따위로 쓰이고 있는데 초가를 기와로 바꾼 것이다.

 

사랑채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에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문간채가 함게 붙어 있다. 대문 좌우에 문간방이 있었으나 지금은 하나만 남아 있으며 사랑에는 ‘정양사’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대지가 경사진 탓에 사랑 마루가 높아서 시원한 분위기를 만든다.

 

전설에 따르면 건물의 터와 집을 바라보고 있는 산이 서로 맞지 않아 부자나 인재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여 산머리에 강정이란 정자를 세웠다고 한다.


 

24.상이암 부도 


종 목  문화재자료  제124호

지 정 일 1986.09.08
소 재 지 전북 임실군  성수면 성수리 산1-1 
시 대 조선시대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상이암의 뒷마당에 자리하고 있는 이 2기의 부도는 각각 ‘해월당’, ‘두곡당’이라는 호를 가진 두 승려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해월당 부도는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3단의 받침 위로, 항아리 모양을 한 탑신의 몸돌을 두고, 지붕돌을 얹었다. 받침돌에는 세련되지 못한 연꽃무늬가 있고,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가 위로 살짝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밑부분이 깨진 꽃봉오리 모양의 돌이 놓여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두곡당부도는 8각의 받침돌 위로 종모양의 탑신을 올리고, 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을 얹은 구조로, 탑신에는 위아래에 넝쿨무늬를 두어 장식하였다.

 

두 부도를 세운 시기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25.광제정

 

종 목  문화재자료  제130호

지 정 일 1990.06.30
소 재 지 전북 임실군  삼계면 선심리 252-1 
시 대 조선시대


광제정은 언제 지었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광제정 양돈(1461∼1512)의 호로 미루어 그가 생존시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양돈은 성종 9년(1498)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무오사화로 봉현리에 낙향하였다. 그의 문장과 덕행은 뛰어나 당시 모범이 되었고, 남효온의 추천으로 조정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이를 거부하고 조용히 세상을 살았다.

 

원래 정자는 삼계면 후천리 광제 마을에 있었으나, 고종 9년(1872)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지었다.

 

광제정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정자 한 가운데에 온돌방이 하나 있는 점이 특징이다. 계단식 축대 위에 정자가 있으며, 한 가운데에 계단식 통로가 있다. 정자 안쪽에는 ‘매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하서 김인후의 글과 기정진의 ‘광제정중건기’ 등이 걸려 있다.

 

광제정은 후손들이 관리해 오고 있으며, 선생의 별세 후 주민들이 아계사(阿溪詞)를 짓고 해마다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26.양요정

 

종 목  문화재자료  제137호

지 정 일 1997.07.18
소 재 지 전북 임실군  운암면 입석리 490-3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종(재위 1506∼1544) 때부터 선조(재위 1567∼1608) 때까지 살았던 성균진사 양요당 최응숙이 지은 정자이다.

 

정자 이름은 맹자의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智者樂水)’라는 말에서 따 왔다고 한다.

 

사회를 피해 낙향하여 지은 것으로 약 450년 전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건물을 지은 기록에 따르면 지금 있는 자리보다 훨씬 아래쪽에 세웠으나, 1965년 옥정호 공사로 인하여 지금 있는 자리에 옮겨 지었다고 한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한 가운데에 1칸 규모의 방이 있고, 그 주위에 툇마루를 놓았다. 정자 전체에는 여러 가지 색으로 무늬를 놓아 그리거나 칠한 단청과 벽화가 있다.


 

27.오괴정


종 목  문화재자료  제167호

지 정 일 2000.11.17
소 재 지 전북 임실군  삼계면 삼은리 산49 
시 대 조선시대


오괴정은 조선 명종 즉위년(1545)에 오양손(吳梁孫)이 처음 짓고 1922년 후손들이 고친 것이다.

 

해주오씨로는 처음으로 삼은리에 들어 온 오양손은, 김굉필(1454∼1504)의 문인으로 참봉을 지냈다.

 

그는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 때 조광조 등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는 모습을 보고, 경기도 수원과 남원 목기촌으로 은거하였다가, 중종 16년(1521)에 삼은리로 들어왔다. 이후 그는 이곳에 오괴정을 짓고 시와 술을 벗삼으며, 후학을 지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오괴'란 정자 주변에 다섯 그루의 괴목을 심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2009.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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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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