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정읍시 덕천면의 문화재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292 작성일2019.02.07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의 남아있는 문화재는 무엇무엇이예요? 

정읍시 관내 문화재정보 잘아시는 분께서 살펴보고 답변해주시기 바랍니다.


프로필 사진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1 개 답변
1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lt****
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의 문화재)


1.정읍 황토현 전적


종 목  사적 제295호

지 정 일  1981.12.10

소 재 지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하학리 산35)

시 대  조선시대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이 관군을 크게 물리친 격전지이다.

동학농민군은 1893년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대항하여 일어나, 다음 해인 1894년 1월 고부관아를 습격하였다. 농민군은 10여 일 만에 해산하였으나, 정부에서 사태 해결을 위해 파견된 관리가 잘못을 농민군에게 돌려 탄압하자, 이에 농민군은 전봉준의 지휘 아래 보국안민, 제폭구민을 내세우고 다시 일어나게 된다. 고부관아를 점령한 농민군은 주변의 곡창지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백산으로 진출하였고, 이 소식을 접한 전주감사는 관군을 보내 이를 막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관군과 농민군은 정읍의 황토현에서 대치하게 되었는데, 밤을 이용한 기습공격으로 농민군은 관군을 크게 물리치게 되었다.

황토현전투의 승리로 인해 기세가 높아진 농민군은 정읍, 흥덕, 고창, 무장을 비롯한 주변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나아가 전주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죄없이 갇힌 죄수들을 석방하고 무기도 탈취했으며, 무장으로 진격하여 교도 40여 명을 구출하였다. 이곳에서 전봉준은 동학운동의 의의를 나타내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황토현 싸움에서의 승리는 동학농민운동을 크게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하여 동학농민운동의 막이 내려지지만, 이 운동에서 보여준 개혁정신과 민족자주정신은 민족독립운동의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2.사발통문과 일괄문서


종 목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33호

지 정 일  2015.12.28

소 재 지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 하학리 산35)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시 대  조선시대


사발통문은 1893년 11월 전봉준을 비롯한 최경선, 송대화 등 20명 서명자들의 한자 및 한글 이름이 사발을 엎어서 그린 원을 중심으로 둘러가며 기록된 문서로, 고부성의 격파와 조병갑의 처단, 군기창과 화약고의 점령, 군수에게 아첨하여 인민을 괴롭히는 탐관오리의 격징, 전주영 함락과 경사에의 직행할 것을 결의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사발통문은 서명자 중 한사람인 송대화의 아들인 송후섭이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궤짝을 정리하던 중 발견하여 간직해 오다 1968년 12월 4일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사발통문과 함께 발견되어 전해오는 ‘송두호 교장 임명장’, ‘송대화 대접주 임명장’, ‘이왈수 별교장 임명장’, (정유삼월)교장 임명장 등 4건의 문서도 사발통문과 관련있는 문서로 보인다.

사발통문은 동학농민혁명의 초기단계에서 당사자들이 남긴 유일한 자료로 1894년 1월의 고부봉기 이전인 1893년 11월 이미 거사계획을 치밀하고 구체적으로 세웠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3.흥선대원군 효유문


종 목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34호

지 정 일  2015.12.28

소 재 지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 하학리 산35)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시 대  조선시대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를 준비할 때인 1894년 8~9월 사이에 흥선대원군이 각 지역에 보낸 문서로 농민군과 대원군의 밀접한 관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이 보낸 밀사와 밀지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대원군은 겉으로는 효유문을 내려 농민군 해산을 권고하였으나 실제로는 전봉준과 김개남 등 농민군과 유생들에게 봉기하여 일본을 몰아내자고 하였다.

즉, 흥선대원군은 동학농민군들에게 밀지를 내린 것을 감추기 위해 겉으로는 농민군들이 해산할 것을 권하는 효유문을 내렸던 것이다.

효유문의 내용은 수록, 소모사실, 속음청사 등 동학농민혁명 당시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사료에서 소개되고 있으나 국내에서 확인된 흥선대원군 효유문의 실물은 이 자료가 유일하다.



4.양호전기


종 목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35호

지 정 일  2015.12.28

소 재 지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 하학리 산35)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시 대  조선시대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 당시 동학농민군이 무장에서 기포하여 전주성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하자 정부에서는 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였는데, 이때 홍계훈이 각처 사이에 서로 주고받은 전보를 날짜순으로 수록한 것으로 1894년 4월 3일에서 5월 28일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양호전기는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 진압과 관련하여 서울을 출발하여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당시 전황과 정부의 대책에 관련되는 사항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당시 전보를 주고받은 곳이 집권층 내부의 핵심적 위치에 있던 인물이 많았으므로 전주성 공방전과 5월 8일 전주화약이 성립되기까지 집권층의 입장을 잘 반영하고 있다.

현재 양호전기는 2점이 전해지고 있는데 1점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나머지 1점은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5.우덕리산성


종 목  전라북도 기념물 제51호

지 정 일  1981.04.01

소 재 지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우덕리 산6

시 대  백제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우덕리 시루봉 위에 쌓은 산성으로, 남북방향의 작은 봉우리를 길쭉한 타원형으로 두른 테뫼식 산성이다.

이 성의 둘레는 약 415m인데, 북문터와 서문터로 생각되는 단절된 부분이 있어 2개의 문이 있었던 듯하다. 성내에서는 매우 오래된 그릇조각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 산성은 나무로 울타리를 두른 형태를 하고 있어서 백제 때부터 있어 온 성터로 추정되고 있다.



6.동죽서원


종 목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77호

지 정 일  1984.04.01

소 재 지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학전길 32-57 (상학리 산13-1)

시 대  조선시대


정암 조광조를 중심으로 덕촌 최희정을 기리고 있는 서원으로 1960년 지방 유림이 지었다.

조광조(1482∼1519)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성리학자이다.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 사림파의 중심이 되었으며 급진적인 개혁을 실행하였다. 이를 반대하는 훈구세력의 모함으로 유배되어 기묘사화(1519) 때 희생되었다.

최희정은 조광조의 가르침을 받았고 조선 중종 11년(1516)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 때 함경도에 여진족이 침입하자 조광조가 추천하여 적을 크게 물리쳤다. 중종은 그 공로로 현재 서원이 있는 땅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7.도계서원


종 목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79호

지 정 일  1984.04.01

소 재 지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도계1길 34-13 (도계리 464)

시 대  조선시대


이희맹·김제민·최안·김지수를 비롯하여 김제안·김흔·김섬·김습 등을 기리고 있는 서원이다.

이희맹은 조선 전기 문신이며 김종직의 제자로 성균관 재학시절부터 문장과 인품으로 인정을 받았다. 성종 23년(1492)에 장원 급제하여 등용되었으며 이후 여러 벼슬자리를 거쳤다.

김제민(1527∼1599)은 이항의 제자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모아 왜군과 싸워 공을 세웠다.

이 서원은 현종 14년(1673)에 이희맹, 김제민과 더불어 조선 중기 의병장 최안과 조선 중기 문신 김지수를 모시기 위해 세웠다. 그 뒤 숙종 23년(1697)에 김제안을, 헌종 6년(1840)에 김흔을 더하여 모셨다. 고종 5년(186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62년에 고쳐 지었는데, 이 때 김섬과 김습의 위패도 함께 모셨다.

현재 경내에는 위패를 모신 사우, 강당인 서당, 동재와 서재, 신문, 고사, 대문 등이 있다. 사우에서는 해마다 9월에 제사를 지낸다.



8.정읍 상학마을 옛 담장


종 목  등록문화재 제366호

등 록 일  2007.11.30

소 재 지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상학2길 26 (상학리 633) 외

시 대  조선시대


마을 형성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담장은 두승산 동북쪽 기슭에 상학마을 대지를 조성하면서 나온 크고 작은 돌들을 사용하여 쌓았다고 한다. 흙을 채우지 않고 돌만 사용하여 줄맞춤 없이 쌓은 돌담은 가옥과 어우러져 예스러움을 더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 스스로의 힘으로 세대를 이어가며 만들고 또 덧붙여서 주민들의 미적 감각에서 비롯된 토속미를 담고 있다.


2019.02.07.

  • 채택

    질문자⋅지식인이 채택한 답변입니다.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