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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파시즘이 대공황 어떻게 이겨냈나요?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364 작성일2012.12.02
 나치즘은 우리민족이 짱이다 인것같은데... 이걸로 어떻게 대공황을 해결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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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기
물신
세계사 10위, 역사학 40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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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자이틀만, 독일의 히틀러 연구가로 역사학자이다
 

"히틀러는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노동자에게 더 좋은 집을 지어주고 산업을 현대화하고 복지 제도를 세우고 과거의 반동적 특권을 없애는데 특히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었다. 비록 잔인한 방법을 썼을지언정 한마디로 더 좋고 더 앞서고 계급에 좌우되지 않는 독일 사회를 만들려고 애쓴 사람이었다. 히틀러라는 인물이 아무리 유대인을 악마로 몰아세우고 세계를 휘어잡기 위해 승산이 희박한 무모한 싸움에 뛰어들었을지라도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던 정치인이었다." - 라이너 자이틀만, 히틀러의 사회, 경제, 내부 정책과 관련된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히틀러 연구가로 독일의 역사학자이자 저널리스트, 경영 컨설턴트이다

  

 

 

'한 남자가 이 기적을 일으켰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흡인력, 오직 하나의 목표를 향해 초지일관하는 자세, 강철같은 의지, 그리고 담대한 마음을 지닌 그는 타고난 국민의 지도자이다. 그는 단지 직함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국민의 지도자이다. 그는 독일을 둘러싸고 있는 잠재적인 적들로부터 국가의 안보를 확립했다. 그는 또한 항상 독일국민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굶주림의 공포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켰다. 실로 굶주림은 지난 전쟁의 마지막 해와 평화의 첫 번째 해 독일국민의 심신에 각인된 고통이었다. 그 어두웠던 시절 70만명 이상의 독일인들이 굶어죽었다. 이러한 비극이 남긴 영향은 당시에 태어났던 사람들의 체형에서도 알아 볼 수 있다. 히틀러는 그와 같은 절망과 빈곤, 그리고 오욕으로부터 그의 조국을 구해냈고 오늘날의 독일국민은 그에게 그 누구도 도전하지 않는 권한을 부여했다. 독일국민들 사이에서, 특히 독일의 청소년들 사이에서 그가 누리는 인기는 실로 엄청난 것이다. 나이든 세대는 그를 신뢰하고 젊은 세대는 그를 숭배한다. 이는 단지 인기있는 정치인에 대한 호감의 표시가 아니다. 그것은 굴욕과 절망으로부터 조국을 구해낸 민족적인 영웅에 대한 숭배이다. 어떤 형태로든 히틀러 총통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비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독일에 있을 때 나는 나치당의 고위인사들에 대해 자유로운 비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히틀러 그 자신에 대한 불만이나 비판은 단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그는 군주국가의 국왕처럼 비판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사실 그는 국왕 이상이다. 그는 모든 억압자들로부터 조국을 구해낸 독일의 조지 워싱턴이다. 히틀러가 독일인의 가슴과 영혼 속에 어떻게 군림하는지를 실제로 보고 느끼지 못한 사람들은 아마도 이러한 나의 기술이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모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이 뛰어난 민족은 단지 히틀러가 요구하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일하고 더욱 많이 희생할 것이며, 필요하다면 더욱 굳은 결의로 싸울 것이다. 이러한 핵심적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독일이 지닌 현재의 잠재력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할 것이다.' - 영국의 대중 조간신문인 <Daily Express>에 실린 1936년 11월 17일자 사설의 내용 중

 

 

볼프 슈나이더('독일어의 교황'으로 불리는 현대 독일을 대표하는 언론인으로 함부르크의 <디 벨트> 전 편집국장이자 독일의 대표적인 문화사가이며, '함부르크 언론인 학교'에서 교장을 지냈고 독일 언어학회가 수여하는 '언어문화 미디어상'을 수상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저술한 <만들어진 승리자들> 

 

'1974년 7월 15일자 <타임>지에서 북아메리카와 서유럽의 역사가, 철학자, 저널리스트, 장성 스물네 명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들'에 속하는 인물들을 뽑은 결과는 다음과 같다.

 

네 표를 얻은 인물 : 링컨, 간디, 히틀러

세 표를 얻은 인물 : 알렉산드로스 대왕, 예수, 무함마드, 워싱턴, 레닌, 프랭클린 루스벨트

두 표를 얻은 인물 : 부처, 공자,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제퍼슨, 시어도어 루스벨트, 처칠, 조지 C. 마셜, 마오쩌둥, 존 F. 케네디

 

나폴레옹은 한 표만 받았다. ··· 히틀러를 선택한 심사 위원은 미국 밴더빌트 대학의 총장인 알렉산더 허드, 미국의 심리 분석가 줄스 매서만, 영국의 군역사가 코렐리 바넷, 그리고 <마르크스도 예수도 아니었다>의 저자인 프랑스 작가 장 프랑수아 르벨이었다.' - <만들어진 승리자들>, 볼프 슈나이더('독일어의 교황'으로 불리는 현대 독일을 대표하는 언론인으로 함부르크의 <디 벨트> 전 편집국장이자 독일의 대표적인 문화사가이며, '함부르크 언론인 학교'에서 교장을 지냈고 독일 언어학회가 수여하는 '언어문화 미디어상'을 수상한 베스트셀러 작가), p123

 

 

http://view.asiae.co.kr/news/view.htm?idxno=2011112917452637989&mod=201111302110 - '독일이 세계 3위의 방산수출국? 탐지불능 잠수함, 초정밀탱크 등 탄탄한 기술력이 비결, 세계경제가 어려운 가운데 무기수출로 경제유지,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기술과 전통은 오늘날까지 명맥 이어'

 

 

 

나치 독일 시대의 사회와 정책 대한 재조명 - 극렬 반나치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나치 독일에는 긍정적인 면은 전혀 없었나?

 

 

 

"국가사회주의는 민주주의 혁명이 성취하지 못한 몇 가지 요구들을 실현시켰다." - 아르투어 로젠베르크, 나치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던 저명한 공산주의 성향의 역사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50년대까지만 해도 독일에서 여론조사를 하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히틀러가 꼽혔다." -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히틀러가 집권한 후 급격한 회복이 시작되었다. 디플레이션, 균형재정운영 등으로 4년째 방치되던 경제가 나치 출연이후 결정적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 양동휴,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경제학박사 학위 취득, 시카고 대학교, 런던 대정경대학(LSE) 베를린 자유대학, 캔사스 대학교 등에서 연구교수를 지낸 현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봉급 보장, '기쁨을 통한 힘', 안정적인 정국 운영······. 국가사회주의는 독일인들이 일과 안정된 삶에 전념할 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충분한 먹을거리와 '기쁨을 통한 힘' 같은 복지 서비스도 제공해 주었다." - 1949년 독일 여론 조사 기관의 <국가사회주의의 긍정적인 측면>

 

"독일인 대부분은 1930년대를 테러, 살인, 억압보다는 질서, 평온함, 고용 안정, 번영의 시기로 기억했다. 이 때문에 1951년 독일연방공화국 국민에게 물었을 때 거의 절반가량은 1933년부터 1939년을 독일의 황금기라고 답했다."- 매튜 휴즈,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군사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영국 브루넬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다

 

"나치 시대 과학이 모두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나치는 훌륭한 과학도 이루어냈다. 여러 측면에서 독일은 나치 시대에 '금세기 최고의 전염병학'을 제공했다. 나치는 인명 살상에서만 무자비할만큼 효율적인 방식을 사용했던 것이 아니라 인명을 구하는 데에도 그러했다. 바로 이 점이 무서운 것이다" - 로버트 프락터, 하버드 대학에서 저명한 진화 생물학자인 Stephen J. Gould로부터 과학사를 수학한 미국 펜실베니아 주립대학, 스탠포드 대학의 과학사가, 베를린의 과학사 막스플랑크 연구소의 객원 연구원으로 나치 시대 과학의 역할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그는 과학계에서 여성의 평등을 위해 투쟁했고, 제3세계 기아 퇴치에 무력한 과학계를 고발했고, 과학의 군사화, 미국의 인종주의와 우생학 운동에 대해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나치가 거둔 경제 분야의 성과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1930년대를 살았던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경제 기적이 발생했다고 느꼈다. 민족 공동체라는 개념은 화려한 웅변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완전 고용과 높은 임금, 안정된 물가, 빈곤의 감소, 값싼 국민 라디오, 돈이 적게 드는 휴가를 의미했다. 사람들은 1935~1939년 독일에 강제수용소보다 휴양지가 더 많았다는 사실은 쉽게 잊어 버린다. 노동자는 더 좋은 훈련을 받았고, 농민은 소득 상승을 맛보았다. 외국인들도 당시 벌어지는 상황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33년보다 1938년에 독일 국민의 살림살이가 더 나았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니얼 퍼거슨, 근대 제국주의에 관한 정통 학설에 도전한 수정주의 역사가이자 하버드 대학교 역사학 교수로 옥스퍼드 대학교 정치사 및 금융사 교수, 뉴욕 주립 대학 경영대학원 금융사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는 하버드 대학교 역사학 교수이자 비즈니스 스쿨 교수로 재직 중이다.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와 영국 정치 평론지 <프로스펙트>의 '이 시대 최고 지성 100인'으로 선정되었다

 

 

오픈카를 타고 군중들의 행렬을 악수하며 지나가는 히틀러의 모습

 

"유대인이나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나치의 눈 밖에 나지만 않고 조용하게만 지낸다면 히틀러가 지배하는 독일에서의 삶은 견딜 만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사실 나치 통치도 긍정적인 면이 있었다."- 매튜 휴즈(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군사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영국 브루넬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다)와 크리스 만(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전쟁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런던 서리대학과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유럽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이 저술한 <히틀러가 바꾼 세계>, p283

 

 


차량 퍼레이드를 하는 히틀러를 환호하는 독일 국민들

 

"아우토반 도로망과 같은 야심 찬 건설 프로그램과 재무장 프로그램을 추진함에 따라, 나치가 싫어하던 유대인이나 다른 소수민족을 제외한 독일 사람들의 취업률은 치솟았으며 생활비는 계속 낮게 묶여 있엇다. 또한 정부는 기쁨의 힘(Kraft durch Freude)이라는 국민여가 프로젝트를 통해서 국민들에게 유쾌한 레크리에이션과 문화 활동뿐 아니라 저렴한 휴가와 여행까지 제공했다. 전체적으로 조국 독일의 자신감과 국가적 자존심은 높아져만 갔다. 시절은 여전히 어려웠지만 전반적으로 협조적인 분위기가 감돌았고 히틀러의 인기는 점점 더 높아졌다. 엄격한 통제나 언론 검열이 이루어지고 개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점점 축소되었지만 이를 비난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 오드리 설킬드(저널리스트이자 방송작가로 등산과 탐험에 대해서 영국에서 가장 광범위한 자료를 가진 인물)이 저술한 <레니 리펜슈탈 - 금지된 열정> p27 

 

극렬 반나치주의자들은 나치나 히틀러에게 장점이나 업적이라고는 전혀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 100% 있고 없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2007년 10월쯤에 독일 Stern magazine에서는 "도로망과 실업률 제로정책, 낮은 범죄율, 민족주의 등을 내세운 나치즘에 긍정적인가"라는 설문에 대해 독일인 응답자 중 25%가 "그렇다"라고 답했다.

 

 

나치즘에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소신있는 발언을 한 에바 헤르만, 독일 공영 ARD 방송의 간판 뉴스쇼인 `타게스샤우'를 지난 18년간 진행해온 여성 사회자였지만 이 발언을 통해 바로 해임되었다

 

이 설문조사는 독일 토크쇼 사회자 에바 헤르만이 출간한 자신의 책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악행은 과도하게 비판받았다. 나치즘에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히틀러와 나치즘 하에서 독일국민들은 보다 강하게 결속됐다."라고 밝혀서 논란이 되자 행했던 조사였다.

 

그는 이 부분에 논란이 일자 "내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가족, 아이들, 모성의 중요성이었다. 이러한 개념은 제3제국(히틀러 치하의 독일)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존재했던 것들이었으나 3제국의 탄생으로 더 강화됐다. 그러나 나치즘이 무너진 후 이러한 가치들도 함께 무너졌다"라고 해명한 바 있다.

 

설문조사 결과 나치즘에 대해 긍정적이라는 응답은 60세 이상의 독일인들에게서 37%로 가장 높게 나타났고 전후 세대인 45세부터 59세까지의 독일인들은 15%만이 긍정적이라고 응답해 가장 낮은 응답률을 보였다.

 

 

"당시는 정말 아름다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소녀연맹은 정말 멋진 조직이었어요. 동료애와 공동체 생활,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일들은 어린 소녀들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린 소녀들은 기숙사에서 저녁에 함께 무언가를 만들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추었습니다. 그리고 여름이 오면 자전거를 타고 하이킹을 하거나 수영장에서 수영을 했습니다.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저희는 정말 항상 열광했습니다. ······ 한마디로 말해서 진정으로 아름다운 시절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마약도 없었습니다. 섹스는 말할 것도 없고 술도 하지 않았어요. 저희 사이에서 그런 것들은 금기였습니다. 부활절과 오순절이 오면 저희는 배낭을 메고 이틀이나 사흘 동안 여행을 했습니다. 잠은 유스호스텔에서 잤어요. 그곳에는 청년들도 있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남자와 여자들은 따로 떨어져 지냈습니다. 요즘의 젊은이들은 저희와는 다르죠. 요즘의 세태는 마치 소돔과 고모라 같다고 할 수 있을겁니다." - 1912년생의 독일소녀연맹 일원이었던 페데른 여사의 회고

 

 

"희미하게나마 희망이 보였다. ··· 다들 지쳐 있었기 때문에 실업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렇게 느꼈다. 내 경우만 보더라도 그때는 정말로 좋은 시절이었다. 지금처럼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질서와 기강이 잡혀 있었다." - 나치 시대 당시 십대였던 에르나 크란츠의 회고

 

 

이렇듯, 나치와 히틀러에게도 장점과 업적이 있다는 것은 독일인들도 공감하고 있는 바이다.

 

 

또한 2011년 12월 16일자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 온라인판에 따르면 청년문화연구소가 빈의 16~19세 4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1.2%가 "히틀러는 사람들에게 좋은 일도 많이 했다"고 답했다. 또 "유대인들이 세계 경제에 지나치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답한 이들도 18.2%를 차지했다. 이렇게 히틀러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에서조차도 히틀러의 긍정적인 면을, 그것도 중장년층이 아닌 청소년들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사우샘프턴대학교에서 현대독일사를 강의하고 있고 <제3제국의 다임러-벤츠>, <나치즘: 강의>, <나치즘, 전쟁과 학살> 등을 펴낸 역사학자 닐 그레고어가 저술한 <HOW TO READ 히틀러>

 

'광범위하게 보면 1930년대에 독일에서 시작된 주택 건설, 공장에서의 건강 및 위생 시스템, 회사 스포츠와 사회 활동 등도 포드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생각했던 합리화한 사회의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 닐 그레고어(사우샘프턴대학교에서 현대독일사를 강의하고 있고 <제3제국의 다임러-벤츠>, <나치즘: 강의>, <나치즘, 전쟁과 학살> 등을 펴낸 역사학자)가 저술한 <HOW TO READ 히틀러>, p125

 

그렇다면 나치 독일과 히틀러가 이룬 어떤 업적에는 어떤 것이 있고 어떤 점을 배울 필요가 있을까? 우선 나치 독일은 독일인이라면 어느 정도의 삶의 수준이 꼭 보장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사고는 게르만 공동체론에 입각했다. 시민들 사이의 공동체 유대감을 강화시키기 위해 정부는 작업장 문화와 유흥문화를 장려했다. 앞에서도 이미 언급한 바가 있듯이 이를테면 축제, 휴가 여행, 극장문화가 적극 장려되었다. 이 모든 것은 정부의 '기쁨을 통한 힘'(Kraft durch Freude, KdF)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또한, 충성심과 동지애를 강화시키기 위해 국민노동서비스와 히틀러 유겐트와 같은 조직의 가입을 의무화시켰다. 이와 더불어, 몇 개의 건설 프로젝트가 추진되었다. '기쁨을 통한 힘'(Kraft durch Freude, KdF)은 한편 모든 국민이 자가용을 소유해야 한다는 일념하에 나중에 Volkswagen으로 개명되는 KdF-Wagen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또 다른 국가적 프로젝트로 아우토반을 빼놓을 수 없다. 아우토반은 정부지출을 통해 대량고용을 촉진시키는 일종의 케인지언 경제정책이었고, 결과적으로 이탈리아에 이어 두번째로 고속도로 시스템을 완성시켰다.

 

 

 

1936년에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前 영국 수상이 독일을 방문했을 때 히틀러와 만났을 때의 사진

 

"나는 막 독일방문을 마치고 돌아왔다. 나는 그 유명한 독일의 지도자를 만났으며 또한 그가 이끌어낸 대변화를 목격했다. 이를 위해 그가 사용한 방법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 물론 그의 방법은 당연히 의회민주주의 국가의 그것은 아니다 - 독일국민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서로에 대한 국민들의 태도, 그리고 그들 모두의 사회적, 경제적 전망에 있어 그는 실로 경이로운 변화를 이룩해냈다는데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서 4년만에 그들의 운동이 새로운 독일을 만들어냈다는 그의 주장은 허언(虛言)이 아니었다. 내가 보고 돌아온 독일은 망가지고 실의에 빠진채 미래에 대한 불안과 절망감에 잠겨있었던 세계대전 후 10년 동안의 독일이 아니었다. 오늘의 독일은 희망과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으며, 국경밖에 있는 그 어떤 세력의 간섭도 받지 않고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겠다는 결의로 충만해 있다. 오늘 독일에는 전쟁이 끝난 이후 처음으로 국민들 사이에 안정감이 찾아들었다. 사람들은 전보다 쾌활해졌고 독일 전역을 통해 이러한 명랑한 기운은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오늘의 독일은 이전보다 행복해진 독일이다. 나는 모든 곳에서 이러한 모습을 목격했으며 방문 중에 만났던 독일을 잘 아는 영국인들 또한 이러한 변화에 대해 감탄을 표시했다. 한 남자가 이 기적을 일으켰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흡인력, 오직 하나의 목표를 향해 초지일관하는 자세, 강철같은 의지, 그리고 담대한 마음을 지닌 그는 타고난 국민의 지도자이다. 그는 단지 직함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국민의 지도자이다. 그는 독일을 둘러싸고 있는 잠재적인 적들로부터 국가의 안보를 확립했다. 그는 또한 항상 독일국민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굶주림의 공포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켰다. 실로 굶주림은 지난 전쟁의 마지막 해와 평화의 첫 번째 해 독일국민의 심신에 각인된 고통이었다. 그 어두웠던 시절 70만명 이상의 독일인들이 굶어죽었다. 이러한 비극이 남긴 영향은 당시에 태어났던 사람들의 체형에서도 알아 볼 수 있다. 히틀러는 그와 같은 절망과 빈곤, 그리고 오욕으로부터 그의 조국을 구해냈고 오늘날의 독일국민은 그에게 그 누구도 도전하지 않는 권한을 부여했다. 독일국민들 사이에서, 특히 독일의 청소년들 사이에서 그가 누리는 인기는 실로 엄청난 것이다. 나이든 세대는 그를 신뢰하고 젊은 세대는 그를 숭배한다. 이는 단지 인기있는 정치인에 대한 호감의 표시가 아니다. 그것은 굴욕과 절망으로부터 조국을 구해낸 민족적인 영웅에 대한 숭배이다. 히틀러가 독일인의 가슴과 영혼 속에 어떻게 군림하는지를 실제로 보고 느끼지 못한 사람들은 아마도 이러한 나의 기술이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모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이 뛰어난 민족은 단지 히틀러가 요구하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일하고 더욱 많이 희생할 것이며, 필요하다면 더욱 굳은 결의로 싸울 것이다. 이러한 핵심적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독일이 지닌 현재의 잠재력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할 것이다." - <The Daily Express>에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前 영국 수상이 'The greatest living German'이라는 제목으로 쓴 1936년 11월 17일자 기사

 

 

근대 제국주의에 관한 정통 학설에 도전한 수정주의 역사가이자 하버드 대학교 역사학 교수인 니얼 퍼거슨이 20세기에 일어난 전쟁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평가한 <증오의 세기>, 함부르크 및 베를린에서 2년간 연구, 케임브리지 대학교 크라이스트 칼리지 연구 교수를 지냈으며, 피터하우스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 지저스 칼리지에서 근대사를 강의하였다. 옥스퍼드 대학교 정치사 및 금융사 교수, 뉴욕 주립 대학 경영대학원 금융사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는 하버드 대학교 역사학 교수이자 비즈니스 스쿨 교수로 재직 중이다.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와 영국 정치 평론지 <프로스펙트>의 '이 시대 최고 지성 100인'으로 선정되었다. 그는 저널리즘에서도 다양하고 폭넓은 활동을 하고 있다

 

'제3제국의 대공황 대책을 살펴보면, 혁신적인 민주 국가들과 몇 가지 표면적인 점에서 닮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나치 정부는 미국처럼 최고 10만 명 이상 고용하는 고속도로 건설 같은 야심찬 프로그램에 착수했다. 또한 나치식 뉴딜 정책에는 공공부문 고용을 크게 늘리는 방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실제로 히틀러에 의해 제국은행 총재로 임명되었다가 나중에 경제장관이 된 샤프트가 도입한 새로운 통화관리 제도를 운영하는 데만 1만 8,000명 정도가 고용되었다. 미국처럼 완전고용으로 돌아가는데 결정적인 추진력을 제공한 것은 재무장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즉시 재무장에 들어간 반면, 루스벨트 정부는 훨씬 나중에 재무장을 추진했다. 나치가 거둔 경제 분야의 성과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독일의 성과는 훌륭했고 인상적이었다. 사실 1929~1932년에 독일 경제만큼 심하게 추락한 사례는 없었지만, 그토록 빨리 경기회복을 달성한 나라도 없었다. 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했을 때 독일의 실업자 수는 600만 명을 넘어선 상태였다. 1935년 6월, 실업자 수는 200만 명 이하로 떨어졌고, 1937년 4월에는 100만 명, 9월에는 50만 명 이하로 떨어졌다. 1939년 8월, 실업자로 등록된 독일 국민은 3만 4,000명에 불과했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발생했을까? 분명 히틀러 전임자들이 세웠던, 신용 거래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여 일자리를 창출하려던 계획이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 이런 결과는 나치 정부가 무역과 자본 흐름, 물가를 이전 정부들보다 더 적극 통제하고, 부정하게 자금을 빌리며, 노조 자주성을 무너뜨림으로써, 1920년대 독일 경제를 괴롭혀 온 고질적인 '임금 압박' 요인을 없앤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전체주의 정권의 경우 필요한 통제를 가할 수 있기 때문에 재정 팽창으로 완전 고용을 달성할 수 있을 거라는 케인스의 생각이 옳았던 것이다. ······ 1930년대를 살았던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경제 기적이 발생했다고 느꼈다. 민족 공동체라는 개념은 화려한 웅변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완전 고용과 높은 임금, 안정된 물가, 빈곤의 감소, 값싼 국민 라디오, 돈이 적게 드는 휴가를 의미했다. 사람들은 1935~1939년 독일에 강제수용소보다 휴양지가 더 많았다는 사실은 쉽게 잊어 버린다. 노동자는 더 좋은 훈련을 받았고, 농민은 소득 상승을 맛보았다. 외국인들도 당시 벌어지는 상황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스탠더드 오일이나 제너럴 모터스, IBM 같은 미국 기업들은 앞다퉈 독일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1938년 당시 독일 국민은 미국 국민만큼 부유하지는 않았다.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독일보다 두 배 정도 높았다. 하지만 1933년보다 1938년에 독일 국민의 살림살이가 더 나았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 근대 제국주의에 관한 정통 학설에 도전한 수정주의 역사가이자 하버드 대학교 역사학 교수인 니얼 퍼거슨이 저술한 <증오의 세기>, p358~361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경제학박사 학위 취득, 시카고 대학교, 런던 대정경대학(LSE) 베를린 자유대학, 캔사스 대학교 등에서 연구교수를 지낸 현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양동휴가 저술한 <대공황 시대>

 

'나치는 디플레이션 정책 비판하고 완전고용 공언

나치는 실업감소를 위해 노조를 파괴하고 임금교섭업무를 정부가 직접 담당하며, 병역의무와 강제노동제도를 도입하고, 여성고용 감소를 부추겨 노동수요를 증대시키는 등의 방법을 썼다. 43.8%(1932)까지 올랐던 제조업 실업률이 12%(1936), 7%(1937), 3%(1938)로 줄었다. 디플레이션, 균형재정운영 등으로 4년째 방치되던 경제가 나치 출연이후 결정적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나치의 외환통제와 막대한 정부지출

나치는 외환통제를 실시하면서 이 보호막 안에서 팽창정책으로 돌아섰다. 은행국유화는 실행하지 않았으나, 민간은행은 경기회복과정에서 배제되었다. 나치의 경기팽창은 국민에게 직접 경제적 이익을 준다는 소비자 중심의 정책이었다. 막대한 정부지출이 초기에는 일자리 창출, 주택, 도로건설, 자동차 부문에 쏟아 부어지면서 경기팽창의 주요원천이 되었다. 계획을 실행할 자금은 정부가 비금융 기업에 재정증권 또는 세금증서(Steuergutscheine)를 직접 매각하거나 정부채로 정규자본시장을 독점하는 방식으로 조달했다. 강제저축 동원과 또 일종의 분식회계 방식을 사용했다. 또한 우대금리를 적용해 기업에 대부하고 감세와 보조금 지급으로 민간투자를 촉진했으며 내부자금 조달을 권장했다. 투자도 인허가 제도, 원료 직접배분 등의 방식으로 행정적으로 관리했다.

 

나치의 군비지출증강은 회복이 본궤도에 오른 이후

나치가 군비지출증강을 시작한 것은 회복이 본궤도에 오른 이후다.(1935~1936) 군수생산의 비중이 커지면서 통제가 더 강화되었다. 나치는 루즈벨트와 반대로 저임금정책을 썼다. 이것이 고용정책과 결합되면서 실업률이 1938년에 3%까지 떨어졌다. 경기팽창을 위한 자극이 가장 강력했던 나라가 독일이다. 이를 케인즈모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단지 기존의 전통적 재정운영과 자유방임시장으로 인한 혼란에서 벗어나고자 계획화와 관리를 택한 것이다. 나치 독일은 사유재산을 폐지하지는 않았으나 관리자들에게 당근과 채찍을 주어 생산을 통제했다. 나치당 강령들은 잘 따져 보면 미국의 뉴딜이 그랬듯이 서로 간에 모순된 내용들로 가득했다. 그런데도 히틀러가 집권한 후 급격한 회복이 시작되었다. 통계상의 신뢰문제가 제기되기는 하나, 여하튼 실업문제도 해결되었다. 이것 역시 정책변화를 모든 사람이 인식하기 시작한 기대변화 덕분이었다. 정책내용보다는 정책변화 자체가 경기부양의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경제학박사 학위 취득, 시카고 대학교, 런던 대정경대학(LSE) 베를린 자유대학, 캔사스 대학교 등에서 연구교수를 지낸 현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양동휴가 저술한 <대공황 시대>, p31~34

 

 

역사, 법률학, 독일학 등을 프라이부르크대학, 프랑크푸르트대학, 베를린대학 등지에서 공부하였고 신문사와 방송사에서 활동하였으며, NDR텔레비전 주간, 잡지 '파노라마'지 대표, 1973년부터 1993년까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발행인을 지낸 세계적인 히틀러 전문가 요아힘 페스트가 저술한 <히틀러 평전 II>

 

'이런 종교적인 외침과 통합의 호소, 의식적인 행사의 마법은 효과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소속감과 집단 동료의식이라는 잃어버린 감정을 되찾아주었다.' - 역사, 법률학, 독일학 등을 프라이부르크대학, 프랑크푸르트대학, 베를린대학 등지에서 공부하였고 신문사와 방송사에서 활동하였으며, NDR텔레비전 주간, 잡지 '파노라마'지 대표, 1973년부터 1993년까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발행인을 지낸 세계적인 히틀러 전문가 요아힘 페스트가 저술한 <히틀러 평전 II>, p769

 

'사회적 동원

국가사회주의는 새로운 사회적 활동공간을 다양하게 만들어서 이러한 소속감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하였다. 인간은 어딘가에 소속되고자 한다는 생각은 청년기의 사회적인 소외감에서 히틀러가 일찌감치 터득한 기본적인 인식들 중의 하나였다. 이제 전국을 무성한 덩굴처럼 뒤덮은 당의 수많은 편성들, 정치적으로 조직된 직업 연합들, 부서들, 직위들, 연합체들에서 강제의 요소만을 보려한다면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연령층, 기능층의 개인들을 여가 시간이나 오락까지도 사로잡아서 잠자는 것만 개인적인 일로 남겨두는 방법은 사회적인 참여에 대한 광범위한 욕구에 부응한 것이었다. 히틀러가 추종자들에게 언제나 희생을 요구한다고 정기적으로 강조하였지만 그것은 과장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사람들은 편입의 욕구를 가지며, 기능 욕구라는 것이 있고, 광범위한 의식층에는 자유의 지적인 꿈보다 자기희생의 기회가 더 중요하다는 잃어버린 진실을 재발견하였다. 초기에 일깨워진 이 모든 불확실한 원동력을 목적 지향적인 사회적 에너지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은 히틀러의 가장 소중한 공적에 속한다. 그가 제시한 자기 도전의 음조는, 실업, 비참, 굶주림 등에 쇠약해진 민족을 열광시켰고, 거의 몽상적인 헌신의지를 일깨웠다. 아무도 그처럼 믿음직하게 외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초석 놓기와 첫삽 뜨기를 계속해서 일종의 동원의식을 만들어내고, 일터로 가자는 연설을 수없이 해서 노동의식을 일깨웠다. 그것은 정부의 군사용어를 전 노동계층에 확산시키고 컨베이어 벨트에서 혹은 향토에서의 동원을 승리로 이끌어갔다.' - 역사, 법률학, 독일학 등을 프라이부르크대학, 프랑크푸르트대학, 베를린대학 등지에서 공부하였고 신문사와 방송사에서 활동하였으며, NDR텔레비전 주간, 잡지 '파노라마'지 대표, 1973년부터 1993년까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발행인을 지낸 세계적인 히틀러 전문가 요아힘 페스트가 저술한 <히틀러 평전 II>, p778~779

 

'경제위기의 극복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대량실업사태를 극복한 것도 이념과 무관한 히틀러의 실용주의 덕분이었다. 그는 정권의 운명도 자신의 개인적인 체면도 곤궁에 시달리는 주민의 처지를 개선시키는 일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 히틀러는 슐라이허 정권이 결정한, 일자리를 만들기 위한 '긴급계획' 같은 옛날 계획들을 다시 받아들였다. 이제 화려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또 다른 계획들도 바이마르의 서류더미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바이마르 시절의 일 추진을 방해하는 민주 절차, 결정을 꺼리는 태도 혹은 체념들이 그 실행을 방해했다. 예를 들면 정권의 인기와 결합되어 있던 고속도로 건설은 오래 전부터 말이 있어왔지만 시작도 되지 못했다. 중앙은행 총재인 한스 루터(H. Luther)는 통화긴축 정책에 단단히 매달려서 일자리 창출을 위한 대규모 투자를 거부하였다. 히틀러는 그를 해임시키고 또다시 수많은 동지들이 '자본주의자'니 '고위직 프로메이슨'이니 하면서 못마땅하게 여기는 히얄마르 샤흐트를 그 자리에 임명하였다. 그는 이른바 메포(Mefo) 어음의 힘을 빌어서 인플레이션 효과를 일으키지 않고 공공사업의 재정과 뒷날에는 군비확장 계획의 재정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전임자들보다 주저 없이, 또한 더욱 과감하게 히틀러는 수많은 너그러운 조치들을 통해서 생산활동을 증가시켰다. 이미 5월 1일 연설에서 그는 '전도이치 민족'에게 호소하는 어조로 설명하였다. "모든 개인 ······ 모든 기업가, 모든 주택 소유자, 모든 사업가" 등이 지속적인 공동체적 긴장으로 노동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국가는 국가대로, 히틀러가 좋아하는 말인 '거대한' 계획을 통해서 할 일을 할 것이다. "우리는 저항들을 물리치고 위대한 과업을 시작할 것입니다."라고 그는 확언하였다. 신도시 건설계획과 도로건설 같은 국가 발주 사업, 공공투자와 민간투자의 유인, 대출, 세금 감면, 보조금 지급 등은 경기 활성화를 촉진시켰다. 그리고 물론 그 사이로 언제나 말, 구호, 말들이 끼여들었다. 말들은 그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고 "큰 거짓말쟁이는 위대한 마법사이기도 하다."는 히틀러의 아이러니컬한 공식에 놀라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히틀러가 이 몇 주 동안 발전시킨 충동자극 심리는 처음에 우선 자발적인 노동봉사의 확대를 포함하였다. 그것은 젊은 실업자들을 받아들이는 그릇 노릇을 했을 뿐 아니라 정권의 건설 낙관주의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늪지대와 제방 안쪽 지역을 개간하여 농토로 만들기, 조림, 고속도로 건설, 강물 줄기 조정 등에서 업적의지와 미래의지가 눈에 보이게 되었다. 또한 1935년 이후로 의무화된 조직은 계급 한계의 극복과 입대 전 교육에 도움을 주었다. 이 모든 발안들과 요소들에 함께 작용하였다. 1934년이 경과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3백만의 실업자들이 있었으나 그래도 기술자 부족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2년 뒤에는 완전고용이 이루어졌다.

 

노동자들

이러한 경제활성화는 사회정치 영역에서 효과적으로 투입된 상당한 정도의 활동성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정부는 반동적으로 보일지 모른다는 걱정에서, 예를 들면 파업금지령이나 통합 노동조합인 '도이치 노동전선'의 설립 같은 엄격한 질서의지를 관철시키는 과정에서 노동자에게 친절한 화해적 태도를 과시하였다. 그렇게 해서 노동자를 위한 광범위한 행사들이 생겨났다. 휴가 여행, 스포츠 축제, 미술전시회, 포크 댄스, 교육과정 등을 통해서 사람들을 조직하였다. 이러한 행사들은 '즐거움을 통한 힘'이나 '노동의 아름다움' 같은 표어들 못지않게 사람들을 통제하고 진정시키는 기능을 하였다. ······ 아르투어 로젠베르크(A. Rosenberg) 같은 공산주의 역사가도 "국가사회주의는 민주주의 혁명이 성취하지 못한 몇 가지 요구들을 실현시켰다"고 고백하고 있다. ······ 새 정권은 한 사회계층이 나머지 모든 계층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출세의 기회가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강조하였고 실제로 상당한 정도로 계급에 대해 중립적이었다.' - 역사, 법률학, 독일학 등을 프라이부르크대학, 프랑크푸르트대학, 베를린대학 등지에서 공부하였고 신문사와 방송사에서 활동하였으며, NDR텔레비전 주간, 잡지 '파노라마'지 대표, 1973년부터 1993년까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발행인을 지낸 세계적인 히틀러 전문가 요아힘 페스트가 저술한 <히틀러 평전 II>, p785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군사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영국 브루넬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는 매튜 휴즈와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전쟁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런던 서리대학과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유럽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크리스 만이 저술한 <히틀러가 바꾼 세계>

 

'1930년대 경제 회복으로 실업률이 떨어진 가운데 임금 안정화와 국가위신 회복, '기쁨을 통한 힘' 같은 복지 정책 등을 접하면서 독일 노동자들은 새로운 정권에 호감을 갖게 된다. 많은 독일인은 1930년대를 황금기로 보았다.'-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군사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영국 브루넬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는 매튜 휴즈와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전쟁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런던 서리대학과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유럽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크리스 만이 저술한 <히틀러가 바꾼 세계>, p65

 

'독일노동전선은 조합원 수가 2,000만 명이 넘었고 대규모 예산과 풍부한 자산을 보유하기도 했다. 사회 프로그램 '기쁨을 통한 힘'과 더불어 독일노동전선은 노동자에게 재정지원, 체계적인 교육, 안정적인 임금 등 사회안정만 관련 서비스를 포괄적으로 제공했다. 1938년 독일인 약 18만 명이 유람선 여행을 갔고 약 1,000만 명은 다른 '기쁨을 통한 힘' 활동에 참가했다. 이동, 식사, 숙박, 여행, 가이드가 포함된 통상적인 일주일짜리 '기쁨을 통한 힘' 프로그램 비용이 모젤 지역은 43마르크, 오버바이에른 지역은 39마르크였다. 독일 노동자는 총 155마르크로 이탈리아에서 2주간 휴가를 보낼 수 있었다. 이같이 저렴한 휴양 프로그램은 나치 경제 정책을 선젛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나치는 경제 정책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동의 미'라는 부서도 신설해 노동자의 휴가 여행, 축제, 공장 기념행사, 포크 댄스, 정치 교육 계획을 수립하고 '기쁨을 통한 힘'과 긴밀하게 연계해서 운영했다.'-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군사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영국 브루넬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는 매튜 휴즈와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전쟁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런던 서리대학과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유럽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크리스 만이 저술한 <히틀러가 바꾼 세계>, p85

 

'독일인 대부분은 1930년대를 테러, 살인, 억압보다는 질서, 평온함, 고용안정, 번영의 시기로 기억했다. 이 때문에 1951년 독일연방공화국 국민에게 물었을 때 거의 절반가량은 1933년부터 1939년을 독일의 황금기라고 답했다. 1949년 독일 여론기관은 조사결과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봉급 보장, '기쁨을 통한 힘', 안정적인 정국 운영······. 국가사회주의는 독일인들이 일과 안정된 삶에 전념할 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충분한 먹을거리와 '기쁨을 통한 힘' 같은 복지 서비스도 제공해 주었다." 평범한 독일인 대부분은 나치 정권이 격동의 1920년대 이후 국가를 안정화했다고 보았다. 크루프사의 정비공이던 에른스트 브롬베르크는 1920년대의 혼란 상황을 나치가 정권을 잡은 뒤의 안정 시기와 비교했다. 그는 일자리가 없어 1927년과 1932년 사이 다섯 차례나 회사에서 해고된 경험이 있었다. 국가사회주의 시절의 가장 큰 특징은 고용 안정이었다. "노동전선 활동과 더불어 3교대 근무를 했기 때문에 정치에 참여할 시간이 없었다. 사람들은 정치활동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어물쩍 넘어갔다. 일하는 만큼 수당을 받았기 때문에 집회에 나가 연설할 시간이 없었다. 필요하면 아침 일찍 일어나야 했다. 휴식시간은 최대한 줄였다. 그 시간에 일을 하면 돈을 더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노동전선과 관련된 업무 외에는 나치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어쨌든 나는 일주일 내내 교회 모임 일에 매여 있었다." 브롬베르크에게 이 시절은 더 많은 돈을 벌 기회가 있는 경제 호황기였다. 그가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하기를 좋아한 점을 보면 독일인 다수가 나치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관심 분야를 찾으려고 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활동을 통해 브롬베르크는 정부의 통제에 거리를 둘 수 있었다. 그에게 1933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초기까지는 말 그대로 평온한 시기였다. 이러한 평화로운 시절의 핵심은 장기간 지속된 경제적 번영이었다. 이 시기 많은 독일인의 일상생활에서 특징적인 것은 경제 발전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처음으로 휴식을 적절히 취할 수 있도록 한 나치당의 '기쁨을 통한 힘'이라는 휴가 프로그램이었다. 독일인들은 대규모 휴가 인원을 편성해서 발트 해안이나 해외로 여행을 갔다. 이러한 '패키지 휴가'는 독일인들에게 전례가 없는 레저 활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단기 휴가 대신 1두 또는 2주 동안 휴가를 보낼 수도 있었다. '기쁨을 통한 힘'은 원래 이탈리아 파시스트 조직에서 운영하던 조직을 모방한 것으로, 노동자의 사기를 진작시켜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기쁨을 통한 힘' 휴가자들은 고급 크루즈 여행을 하거나 알프스, 베네치아, 나폴리, 리스본으로 기차 여행을 갔다. 노르웨이도 즐겨 찾는 관광지 중 하나였다. 노동자들은 이러한 여행 기회를 즐겼는데, 여행자가 늘면서 지방 호텔 소유자나 국영철도체계인 제국철도가 큰 수익을 거두었다. '기쁨을 통한 힘' 프로그램은 극장공연, 콘서트, 전시회, 스포츠 행사, 하이킹, 포크 댄스, 성인 교육과정도 지원했다. 나치 정부는 대중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이런 사업에 돈을 아낌없이 썼다. 정부 예산을 1933년에서 1934년에는 2,400만 마르크, 1935년 1,700만 마르크, 1936년 1,500만 마르크를 투입했다. 이 과정에서 프로그램 자체가 국가적 사업이 되었다. 나치는 권력을 잡은 만큼 2년 내에 특수 제작한 최고급 편의시설을 갖춘 원양 유람선 두 척을 보유할 만큼 큰 휴가 조직을 만들었다. 심지어 '국민 자동차' 폴크스바겐도 본래 '기쁨을 통한 힘 자동차'로 이름 붙이고 생산에 대규모 정부 보조금을 투입했다. 자동차는 부르주아 신분의 상징이었지만, 미국 포드 자동차의 모델 티와 마찬가지로 폴크스바겐이 출시되면서 평범한 독일 가정도 할부로 자동차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자동차 생산이 중단되고 군용 무기 생산체계로 전환되어 일반 독일인들은 결국 자동차를 소유하지 못하게 된다. 나치 지도부는 '기쁨을 통한 힘'을 국가사회주의가 국민에게 준 혜택의 실질적인 증거로 보았다. '기쁨을 통한 힘' 운영 책임자 로베르트 라이는 조직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노동자들은 우리가 자신들의 지위 향상에 크게 신경 쓴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우리가 새로운 독일의 대표로 세상에 내보내는 것이 이른바 '지식계급'이 아닌 '독일 노동자'라고 생각한다." 로베르트 라이는 '기쁨을 통한 힘'이 나치 독일에서 계급 갈등을 해결할 가공할 만한 잠재력이 있다고 보고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노동자들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았을지도 모르는 열등감의 마지막 자취를 잊게 될 것이다." 독일인 대다수는 정권에 저항하는 행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함부르크 은행가의 아들 만프레트 프라이헤어 폰 슈뢰더는 나치를 안정 세력으로 보고 히틀러가 총리에 오른 1933년에 나치당에 가입했다. 폰 슈뢰더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모든 것이 질서정연했고 깔끔했다. 새로 시작한다는 국가적인 해방감이 있었다."'-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군사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영국 브루넬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는 매튜 휴즈와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전쟁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런던 서리대학과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유럽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크리스 만이 저술한 <히틀러가 바꾼 세계>, p141~145

 

 

 

이상입니다.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

2012.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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