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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히틀러에 대해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1,592 작성일2012.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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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1.30 나치당 당수로서 독일 총리에 임명되다


1932년 히틀러는 대통령 결선 투표에서 36.8%의 득표율로 낙선했다. 아쉬운 패배였지만, 이듬해인 1933년 1월 30일 제 1당인 나치당의 당수로서 총리에 임명됐다. 이날을 가리켜 비극의 탄생이라고 해도 될까? 히틀러의 나치 독일 시대가 비로소 도래한 것이다.

 

 

쿠데타 실패 10년 만에 권력을 쟁취, 히틀러의 나치 독일 시대 시작 

대통령 선거에서 히틀러를 누른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이미 86세의 고령이었다. 그는 젊고 강력한 독일의 지도자에게 총리라는 실질적인 권력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는 1923년 뮌헨에서 권력 쟁취를 위해 쿠데타를 획책하다가 투옥된 적이 있는데, 10년 만에 다른 방식으로 권력을 얻은 것이다. 총리가 된지 수년 만에 독일 국민은 히틀러에게 열광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분명한 목표를 정해두고 총리가 되었는데, 무너진 경제를 되살리고 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잃어버린 조국 땅을 되찾고, 유럽을 포함한 러시아까지 무력으로 합병하는 것 등이었다. 거기에다 어려서부터 체질화된 광적인 반유대주의는 유대인 말살정책으로 현실화되었다.

 

히틀러는 글라이히샬퉁(Gleichschaltung), 즉 획일화 정책을 통하여 독일 국민을 광장에 모았다. 1차 세계대전 이후 패닉 상태를 헤매던 독일 경제는 호전되고 있었다. 600만 명의 실업자들은 거리를 헤매다가 대부분 군대와 직장으로 돌아갔다. 국가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아우토반이 건설되었고, 비틀 자동차가 생산되었다. 독일은 1차 세계대전 패전 결과 자국을 옥죄던 베르사유 조약을 능멸하면서 군비를 증강해나갔다. 그러나 이웃국가들은 항의하는 흉내만 냈다.


독일 총리로 권력을 잡을 당시의 히틀러(1933년)

 

히틀러는 독일 뿐 아니라 전 세계 불행의 원인을 유대인에서 찾았다. 유대인은 마르크스주의자와 볼셰비즘을 전개했으며, 교활한 자본주의 힘까지 더해 지구상의 민족들을 정복하고 파멸시키려고 한다고 철썩 같이 믿었다. 이 믿음이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총리에 취임한 날부터 질풍노도처럼 몰아쳐 2차 세계대전과 아우슈비츠까지 내달린 결과 오늘날까지도 히틀러는 상처로 남아 있다. 인생의 결정적인 한 시기에 우리의 운명은 급반전한다. 독일은 히틀러의 총리 취임으로 무시무시한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다. 히틀러는 젊은 시절부터 독일의 작곡가 바그너에게 열광했다. 바그너의 오페라 서곡을 나치당의 당원이었던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 연주로 들으면서 히틀러의 평전을 읽는 금요일 저녁은 매우 어두웠다.

 

 

불 같은 아버지와 애지중지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 낙제생 

“모든 점에서 히틀러의 길은 모범적인 경우다. 어떻게 민주주의 제도들을 서서히 무력화시키고 항복하도록 강요할 수 있는지, 어떻게 국내에서나 국제무대에서 적들을 차례로 속여서 이길 수 있는지, 아무리 저항해도 소용이 없는 테러 체제를 선전과 폭력을 통해서 어떻게 건설하는지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어떤 폭력적인 지배자의 생애도 권력의 지점들을 거쳐서 마침내 진짜 파괴욕 속에서 퇴화하는 과정을 그처럼 완벽하게 보여주지는 못한다. 이런 과정은 히틀러의 상승과 몰락을 교과서적인 모범으로 만들고 있다.”

 

냉정하고 엄격했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1839~1903년)


요하임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의 한 대목이다.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 국경지대의 소도시 브라우나우에서 태어났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세관 고위공무원인 아버지와 그의 세 번째 부인인 클라라 히틀러가 어머니이다. 현모양처의 전형인 어머니는 몇 명의 자녀를 유아기에 잃은 뒤 얻은 히틀러를 애지중지 키웠다. 불 같은 성격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낙제생인 아들을 엄하고 무섭게 다루었고, 어머니는 그러한 아버지로부터 귀한 아들을 보호했다. 어린 시절 히틀러는 ‘목적’ 없는 아이였지만, 바그너의 세계를 꿈꾸었다.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관람하고 그의 영혼에 강력한 천둥번개가 쳤다. 이러한 장면은 니체를 떠올리게 한다. 니체 역시 젊은 시절 바그너에 열광했다. 하지만 훗날 바그너의 음악은 단순한 음악과 예술이 아니며 무대 효과를 통해 사람들을 최면상태에 빠뜨리고 세뇌한다는 비판적인 예언을 했다.

 

그의 예언이 가장 비극적으로 드러난 경우가 히틀러이다. 히틀러는 바그너의 음악을 통해 막연하게나마 정치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실업학교를 겨우 졸업한 히틀러는 화가가 되고 싶은 보헤미안으로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시도 쓰고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신은 그에게 화가의 운명을 주지 않았다. 여러 차례 미술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지고, 생계를 위해 그림엽서에 그림을 그려주었다. 순수화가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굴욕적인 삶을 살고 있던 몽환적인 청년인 히틀러에게 결정적인 인생의 전환점은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과 1차 세계 대전이었다.

 

 

"어머니를 땅에 묻은 이후 한 번도 운 적이 없다" 

“(어머니의 죽음 소식을 듣고) 침상에 몸을 던지고 뜨겁게 달아오른 머리를 이불과 베개에 묻었다. 어머니를 땅에 묻은 그날 이후로 나는 한 번도 운 적이 없다. 이런 일을 일으킨 원흉에 대한 증오가 자라났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서 나의 운명을 점점 분명히 자각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자각은 유대인이 독일에 치명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에서 바그너의 장엄한 악극처럼 독일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몽환적으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전쟁에서의 패배로 국토의 일부를 내놓고, 막대한 전쟁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은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히틀러는 이러한 현실을 직시했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화가로서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은 것과 비슷했다. 그는 한 시절, 자신은 순수 화가이며, 아카데미 화가, 혹은 문필가라고 자칭하고 다녔다. 그는 이루고자 하는 세상과 이룬 세상을 구분하지 못했다. 히틀러의 꿈이 화가나 예술가로 지속되었다면 에드거 앨런 포 같은 비극적인 개인의 운명에서 그쳤을 것이다. 그는 탁월한 대중 선동의 연설가이면서 냉철한 정치인이었다. 그 재능은 게르만 신화를 바탕으로 바그너가 추구한 ‘이루고자 한 세상’에 접목되었다. 그러자 한 개인이 인류를 얼마나 황당한 지경까지 몰고 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가 되었다.

 

 

"유대인이 언론 자본을 장악하고 세계를 정복하려 한다"는 음모론 

당시 유럽에서 떠돌고 있던 반유대주의는 오스트리아 빈의 정치선동가 카를 뤼거(Karl Lueger)에 의해 잘 드러난다. 그는 ‘대중에 대한 영향력이 유대인의 손에 있고 언론계의 상당 부분도 그들이 장악하고 있으며 자본, 특히 거대자본의 대부분이 유대인의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나라에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테러를 행하고 있다’고 연설했다. 히틀러는 뤼거의 대중선동에 공감했다. 그리고 소시민들이 전후 빈곤과 사회주의에 대해 불안해 하는 원인을 유대인들에게서 찾았다. 그는 병적인 상상력으로 유대인들이 세계를 정복하려 한다는 음모론에 집착하고 이 세상에서 유대인을 인종 청소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탁월한 대중연설가로서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다양한 얼굴 표정(1944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히틀러는 독일에 대한 열망으로 독일 군에 입대했으며, 무공을 올려 1급 철십자장을 받고 제대했다. 그는 탁월한 대중연설가로 변신하면서, 조금씩 자신의 추종자를 만들어나갔다. 연설은 대부분 유대인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유대인과 그들을 돕는 자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연설은 전후 비참한 독일의 속죄양을 찾고 있던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뮌헨의 주요한 투사이자 선동가가 되어 작은 규모의 정치집단인 독일노동자당에 입당한다. 히틀러는 독일노동자당의 당기를 디자인했으며, 당명도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NSDAP, 일명 나치스)로 바꾸었다. 이 시절부터 히틀러는 술도 담배도 여자도 멀리하고 연설을 통해 자신의 분노와 꿈을 해소하고 실현시키고자 했다. 히틀러의 나치당은 광적인 반 유대주의자이면서 정치 깡패인 율리우스 슈트라이허(Julius Streicher)의 노동협회와 통합하면서 2만 명이 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독일을 광란의 도가니로 

1923년 11월 9일 히틀러는 쿠데타를 꾀했다. 무력으로 정부를 전복하고자 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고 방법을 바꾸었다. 일 년의 감금생활 동안 깊은 사색과 독서를 통해 자기가 걸어야 할 길을 잘 닦아놓았다. 그것은 대중 선동을 통한 집단 애국주의의 발현이었다. 그는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바탕으로 치욕적인 베르사유 조약을 넘어서 국토 확장과 경제 번영을 독일 국민에게 약속한다.

 

히틀러의 최측근인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우리가 권력을 쥐게 되면 결코 그것을 놓지 않을 것이며… 사람들은 시체가 된 후에만 우리를 그 자리에서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한 이 글은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결과를 미리 써놓은 듯 하다. 정권을 장악한 히틀러는 각종 긴급조치와 법률개정을 통해 독일을 광란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그를 견제하는 세력들은 총살당하거나 비참하게 일선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방문했을 당시 베니토 무솔리니와 함께(1934년)

 

1923년 히틀러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던 루덴도르프 장군은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이 광적인 사내는 우리나라를 나락에 빠트리고 국민들에게 무한한 비극을 몰고 올 것’ 이라는 편지를 썼다. 하지만, 가속도가 붙은 눈 덩어리처럼 점점 크게 굴러 떨어지는 히틀러를 견제할 세력은 존재할 수 없었다. 유대인에 대한 정책도 날이 갈수록 가혹해지다가 1935년 9월 5일에 통과된 ‘뉘른베르크 법’에 의해 독일 내 유대인들을 독일인들과 격리시켰다. 즉 유대인들에게 정치적 사안에 대한 모든 투표권을 박탈하고, 관직에서 배제시켰으며 심지어 유대인과 아리아인의 결혼과 성관계마저 금지시켰다. 독일에 있던 많은 유대인들은 떠나기 시작했다.

 

 

"독가스로 유대인 1만 5천명 정도만 죽일 수 있다면···"

1937년 가을부터 히틀러는 자신의 정치적 공세를 군사적 공세로 바꾸었다.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를 향한 총구는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독일에서도 학생과 지식인 정치인들이 광적인 독재자 히틀러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독일의 양심을 보여주었던 백장미단의 활동, 쾨르델르가 주동이 되었던 1944년의 히틀러 정권 전복 기도와 군 내부에서 일어난 히틀러 암살 기도 등이다. 전쟁 영웅이었던 롬멜 장군은 히틀러 암살 실패 사건으로 히틀러로부터 자살을 강요 받아 죽었으나 히틀러는 오히려 최대한 호화로운 국장을 치름으로써 왼손으로 오른손에 묻은 피를 닦는 정치적인 역량을 보여주었다.

 

독일 베를린 올림픽 개막식장에서의 히틀러(1936년)


이어서 히틀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참극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그는 자서전 [나의 투쟁]에 이렇게 쓴다. ‘독가스로 그 타락한 히브리 민족을 1만 2천명 내지 1만 5천명 정도만 죽일 수 있다면, 전선에서 수백만 명이 희생된다고 해도 헛된 일은 아니다.’ 아우슈비츠는 유대인들의 무덤이었지만, 그것은 너무나 참혹하였기에 결국 히틀러의 거대한 무덤이었다.

 

그가 전쟁을 도발하면서 세웠던 목표는 거의 다 실패로 돌아갔다. 폐허가 된 독일. 세계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대신 전 영토와 경제적 기반, 국력, 독립, 도덕성마저도 잃어버렸다. 단 하나만이 성공적이었다. 대서양에서 볼가 강 사이의 유대인들을 거의 완전하게 말살한 일이었다. 그는 자살하는 순간까지도 독일 패전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렸다. 후손들에게 인종법을 ‘철저하게’ 준수하라고 당부했다. 1945년 4월 30일 나치와 히틀러는 죽었다. 하지만 죽은 자의 영혼은 산 자의 몸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이 날은 독일인과 전 세계인이 ‘타 문화에 대한 소통’을 거부한 댓가로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얻게 됐는지 다시금 깨닫게 된 날이다.

 

2012.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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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신
히틀러는 본래 독일 사람이 아닙니다. 나중에 독일 국적을 취득하게 된 것이죠...
히틀러의 유년시절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히틀러의 청년시절 당시의 독일은 쇼비니즘에 가까운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화가지망생으로서 여기 저기 작품을 출전해보기도 했으나 다 퇴짜를 맞았고요.. 그리고 일자리를 구하려해도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독일에서는 유대인이 막대한 자본으로 언론,금융을 장악하고 있었고, 정치에도 영향을 미쳤죠. 타 민족이 자민족에게 해를 끼친다는 생각이 독일국민에게 심어졌고, 히틀러도 이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그러던중에 1914년 사라예보사건으로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히틀러도 입대하여 참전합니다. 종전이후 
히틀러는 뮌헨으로 와서 한 이름없는 정당에서 입당하게됩니다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 입니다.
히틀러는 당시 독일전후상황을 교묘하게 활용했습니다. 이른바 중상모략론입니다.. 
독일이 군대에 의한 전투로  진 것이 아니라 내부세력 즉 유대인세력과 공산주의자들 때문에 독일이 내분되어 1차세계대전에 패배했다고 내세웁니다. 그리고 독일민족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영토를 확장하여 생활권을 확보해야한다고 주장하죠.    

 당시 전후상황에서, 경제는 인류역사상 초유의 인플레이션으로 경제는 소위 개박살난 상태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독일의 뮌헨만해도 정당이 50여개가 가까이 되었죠. 정치적 경제적으로 총체적 난국이었습니다.
전쟁책임을 공산주의자와 유대인에게 돌리고, 독일인에게 단결을 요구하고, 
독일의 찬란한 미래를 주장하는 등 일종의 선동을 했지요. 그래서 뮌헨에서 엄청나게 성장을 합니다. 
물론 히틀러는 그 당에서 당수가되고요.

그리고는 정권전복을 기도하다가 실패하여 복역을 하지요. 그리고는 다시 화려하게 복귀를 합니다. 여기에서는 극우세력이 히틀러를 지지함으로서 자금을 지원받게 되죠. (이미 그 전부터 극우세력이 히틀러를 중심으로 결집하고 있었답니다.
그 결과 제국의회 의석수에서  2석밖에 차지하지 못하던 나치당이  1928년 제국의회 의석 12석을 차지합니다. 게다가 1929년!!! 세계경제대공황으로 그나마 나아지던 독일경제(당시는 바이마르공화국이죠)는 완전 개박살이 남으로서 히틀러는 이를 이용해 독일국민에게 경제적 풍요를 약속해서 독일국민을 선동합니다. 1930년 나치당은 제국의회 100여석을 차지함으로서 독일 제 1 야당이 되고 
히틀러는 독일 최대 야당당수가 되죠.

1932년 히틀러는 독일시민권을 취득하게됨에 따라 제국의회내에서 요직을 차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집니다. 피선거권을 가지게된다는 거죠.. 그런 후에 히틀러는 힌덴부르크대통령에게 수상직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힌덴부르크는 일개 졸병이 수상을 요구하는 것은 매우 무례한 일 이라고 생각해서 들은 체도 안하죠.( 힌덴부르크 장군을 알아보시려면 탄넨부르크전투를 알아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이에 히틀러는 빡쳐서 나치당 소속 제국의회의원들에게 안건마다 퇴장하도록 명령합니다. 당시 독일헌법따르면, 제국의회 안건에서 의결 정족수 미만시... 의회권력이 사멸됩니다. 만약 나치당 의원들이 모두 나가버리면, 재선거를 해야하는 거죠.. 그렇게 해서 1932년만해도 4번이나 재선거를 하지요. 독일국민들은 히틀러에게 선동되어서(넓은 독일 영토,경제적인 풍요, 베르사유조약폐기등) 그를 계속해서 지지하고요.

히틀러는 그렇게 힌덴부르크대통령에게 정치적 압박을 행사합니다. 1932년 7월에는 의회의석 230석을 
차지하여 제국의회 최대 정당이 됩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프란츠 폰 파펜이라는 사람과 연대하여 보수세력을 결집시키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그를 독일수상에 임명하죠. 때가 1933년입니다. 
같은 해 2월 말에는 히틀러는 나치당의 내부기밀문건유출로 정치적 위기를 맞자 , 제국의회를 불질러 버립니다. 그리고 이것이 공산주의자가 한 행동이라고 덮어씌우죠. 그리고는 잽싸게 수권법을 의회에 안건으로 제출합니다... 

수권법에서 그 엄청난 독재권력이 나오죠... 언론의 자유 없습니다. 표현의 자유 물론 없고요. 사생활 보호권리 그딴거 없습니다. 법률입법권은 독일 대통령에서 독일 수상으로 넘어가고요.법률제정도 의회가 아니라 정부가 가지고요  정부는 질서유지권을 통해서 모든 상황에서 개입할 권한을 가집니다.. 물론 정부수반은 독일 수상이죠.. 이런 무시무시한 법안을 제국의회에서 통과시켜버립니다.
(히틀러도 법치주의를 했답니다. 수권법안대로 했거든요. 실질적인 법치주의는 절대 아니지만)

1934년 히틀러는 명실상부한 독일의 독재자가 됩니다... 1934년 힌덴부르크대통령이 죽고, 수권법에 따라서 독일최고수반은 대통령에서 수상으로 넘어갑니다. 이렇게 완전 히틀러의 독일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1938년 독일내에 유대인 박해를 정책적으로 시행하고.. 1939년 전쟁이 터지게됩니다..2차세계대전이죠 1944년에는 유대인 홀로코스트가 자행되고, 1945년 4월 베를린 총통관저 지하벙커에서 독물고 권총으로 자살합니다.

2012.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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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신

나치 독일 시대의 사회에 대한 재조명 - 극렬 반나치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히틀러의 나치 독일에는 긍정적인 면은 전혀 없었나?

 

 

라이너 자이틀만, 독일의 히틀러 연구가로 역사학자이다
 

"히틀러는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노동자에게 더 좋은 집을 지어주고 산업을 현대화하고 복지 제도를 세우고 과거의 반동적 특권을 없애는데 특히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었다. 비록 잔인한 방법을 썼을지언정 한마디로 더 좋고 더 앞서고 계급에 좌우되지 않는 독일 사회를 만들려고 애쓴 사람이었다. 히틀러라는 인물이 아무리 유대인을 악마로 몰아세우고 세계를 휘어잡기 위해 승산이 희박한 무모한 싸움에 뛰어들었을지라도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던 정치인이었다." - 라이너 자이틀만, 히틀러의 사회, 경제, 내부 정책과 관련된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히틀러 연구가로 독일의 역사학자이자 저널리스트, 경영 컨설턴트이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나치 독일의 외무장관

 

'히틀러가 평화협정을 제안한 당시에 독일과 영국 간에 합의가 이루어졌다면, 히틀러는 그의 생애 나머지를 사회 복지 국가의 평화로운 건설에 헌신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 나치 독일의 외무장관이었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뉘른베르크 재판중에 적었던 메모의 내용 중

 

 

무너진 총리 관저에서의 히틀러(마지막 사진), 원하지 않던 세계대전에 서방에 의해서 휘말려 들어간 히틀러

 

"독일을 재건하려는 야심찬 계획이 전쟁 때문에 벽에 부딪쳤다. 나는 전쟁을 하려고 총리에 오른 것이 아니다.." - 여러차례 평화 제안을 거부한 영국에 대한 최종 공격을 결정하기 직전 바이로이트에서 어린시절에 가장 절친했던 친구 아우구스트 쿠비체크와 만나 그에게 히틀러가 말했던 말

 

 

로더미어, 영국의 언론재벌로 <Daily Mail> 신문 소유주

 

"나는 영국의 모든 젊은이들에게 독일의 나치정권이 지금까지 이룩한 성과를 주의깊게 연구할 것을 권한다." - 영국의 언론재벌로 <Daily Mail> 신문 소유주인 로더미어가 자신의 신문인 <Daily Mail> 런던지 1933년 7월 10일자로 쓴 내용

 

 

 

'한 남자가 이 기적을 일으켰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흡인력, 오직 하나의 목표를 향해 초지일관하는 자세, 강철같은 의지, 그리고 담대한 마음을 지닌 그는 타고난 국민의 지도자이다. 그는 단지 직함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국민의 지도자이다. 그는 독일을 둘러싸고 있는 잠재적인 적들로부터 국가의 안보를 확립했다. 그는 또한 항상 독일국민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굶주림의 공포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켰다. 실로 굶주림은 지난 전쟁의 마지막 해와 평화의 첫 번째 해 독일국민의 심신에 각인된 고통이었다. 그 어두웠던 시절 70만명 이상의 독일인들이 굶어죽었다. 이러한 비극이 남긴 영향은 당시에 태어났던 사람들의 체형에서도 알아 볼 수 있다. 히틀러는 그와 같은 절망과 빈곤, 그리고 오욕으로부터 그의 조국을 구해냈고 오늘날의 독일국민은 그에게 그 누구도 도전하지 않는 권한을 부여했다. 독일국민들 사이에서, 특히 독일의 청소년들 사이에서 그가 누리는 인기는 실로 엄청난 것이다. 나이든 세대는 그를 신뢰하고 젊은 세대는 그를 숭배한다. 이는 단지 인기있는 정치인에 대한 호감의 표시가 아니다. 그것은 굴욕과 절망으로부터 조국을 구해낸 민족적인 영웅에 대한 숭배이다. 어떤 형태로든 히틀러 총통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비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독일에 있을 때 나는 나치당의 고위인사들에 대해 자유로운 비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히틀러 그 자신에 대한 불만이나 비판은 단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그는 군주국가의 국왕처럼 비판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사실 그는 국왕 이상이다. 그는 모든 억압자들로부터 조국을 구해낸 독일의 조지 워싱턴이다. 히틀러가 독일인의 가슴과 영혼 속에 어떻게 군림하는지를 실제로 보고 느끼지 못한 사람들은 아마도 이러한 나의 기술이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모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이 뛰어난 민족은 단지 히틀러가 요구하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일하고 더욱 많이 희생할 것이며, 필요하다면 더욱 굳은 결의로 싸울 것이다. 이러한 핵심적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독일이 지닌 현재의 잠재력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할 것이다.' - 영국의 대중 조간신문인 <Daily Express>에 실린 1936년 11월 17일자 사설의 내용 중

 

 

볼프 슈나이더('독일어의 교황'으로 불리는 현대 독일을 대표하는 언론인으로 함부르크의 <디 벨트> 전 편집국장이자 독일의 대표적인 문화사가이며, '함부르크 언론인 학교'에서 교장을 지냈고 독일 언어학회가 수여하는 '언어문화 미디어상'을 수상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저술한 <만들어진 승리자들> 

 

'1974년 7월 15일자 <타임>지에서 북아메리카와 서유럽의 역사가, 철학자, 저널리스트, 장성 스물네 명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들'에 속하는 인물들을 뽑은 결과는 다음과 같다.

 

네 표를 얻은 인물 : 링컨, 간디, 히틀러

세 표를 얻은 인물 : 알렉산드로스 대왕, 예수, 무함마드, 워싱턴, 레닌, 프랭클린 루스벨트

두 표를 얻은 인물 : 부처, 공자,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제퍼슨, 시어도어 루스벨트, 처칠, 조지 C. 마셜, 마오쩌둥, 존 F. 케네디

 

나폴레옹은 한 표만 받았다. ··· 히틀러를 선택한 심사 위원은 미국 밴더빌트 대학의 총장인 알렉산더 허드, 미국의 심리 분석가 줄스 매서만, 영국의 군역사가 코렐리 바넷, 그리고 <마르크스도 예수도 아니었다>의 저자인 프랑스 작가 장 프랑수아 르벨이었다.' - <만들어진 승리자들>, 볼프 슈나이더('독일어의 교황'으로 불리는 현대 독일을 대표하는 언론인으로 함부르크의 <디 벨트> 전 편집국장이자 독일의 대표적인 문화사가이며, '함부르크 언론인 학교'에서 교장을 지냈고 독일 언어학회가 수여하는 '언어문화 미디어상'을 수상한 베스트셀러 작가), p123

 

 

http://cafe.naver.com/nazzis/25149 - '독일이 세계 3위의 방산수출국? 탐지불능 잠수함, 초정밀탱크 등 탄탄한 기술력이 비결, 세계경제가 어려운 가운데 무기수출로 경제유지,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기술과 전통은 오늘날까지 명맥 이어'

 

 

 

 

나치 독일 시대의 사회와 정책 대한 재조명 - 극렬 반나치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나치 독일에는 긍정적인 면은 전혀 없었나?

 

 

 

"국가사회주의는 민주주의 혁명이 성취하지 못한 몇 가지 요구들을 실현시켰다." - 아르투어 로젠베르크, 나치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던 저명한 공산주의 성향의 역사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50년대까지만 해도 독일에서 여론조사를 하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히틀러가 꼽혔다." -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히틀러가 집권한 후 급격한 회복이 시작되었다. 디플레이션, 균형재정운영 등으로 4년째 방치되던 경제가 나치 출연이후 결정적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 양동휴,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경제학박사 학위 취득, 시카고 대학교, 런던 대정경대학(LSE) 베를린 자유대학, 캔사스 대학교 등에서 연구교수를 지낸 현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봉급 보장, '기쁨을 통한 힘', 안정적인 정국 운영······. 국가사회주의는 독일인들이 일과 안정된 삶에 전념할 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충분한 먹을거리와 '기쁨을 통한 힘' 같은 복지 서비스도 제공해 주었다." - 1949년 독일 여론 조사 기관의 <국가사회주의의 긍정적인 측면>

 

"독일인 대부분은 1930년대를 테러, 살인, 억압보다는 질서, 평온함, 고용 안정, 번영의 시기로 기억했다. 이 때문에 1951년 독일연방공화국 국민에게 물었을 때 거의 절반가량은 1933년부터 1939년을 독일의 황금기라고 답했다."- 매튜 휴즈,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군사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영국 브루넬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다

 

"나치 시대 과학이 모두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나치는 훌륭한 과학도 이루어냈다. 여러 측면에서 독일은 나치 시대에 '금세기 최고의 전염병학'을 제공했다. 나치는 인명 살상에서만 무자비할만큼 효율적인 방식을 사용했던 것이 아니라 인명을 구하는 데에도 그러했다. 바로 이 점이 무서운 것이다" - 로버트 프락터, 하버드 대학에서 저명한 진화 생물학자인 Stephen J. Gould로부터 과학사를 수학한 미국 펜실베니아 주립대학, 스탠포드 대학의 과학사가, 베를린의 과학사 막스플랑크 연구소의 객원 연구원으로 나치 시대 과학의 역할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그는 과학계에서 여성의 평등을 위해 투쟁했고, 제3세계 기아 퇴치에 무력한 과학계를 고발했고, 과학의 군사화, 미국의 인종주의와 우생학 운동에 대해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나치가 거둔 경제 분야의 성과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1930년대를 살았던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경제 기적이 발생했다고 느꼈다. 민족 공동체라는 개념은 화려한 웅변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완전 고용과 높은 임금, 안정된 물가, 빈곤의 감소, 값싼 국민 라디오, 돈이 적게 드는 휴가를 의미했다. 사람들은 1935~1939년 독일에 강제수용소보다 휴양지가 더 많았다는 사실은 쉽게 잊어 버린다. 노동자는 더 좋은 훈련을 받았고, 농민은 소득 상승을 맛보았다. 외국인들도 당시 벌어지는 상황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33년보다 1938년에 독일 국민의 살림살이가 더 나았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니얼 퍼거슨, 근대 제국주의에 관한 정통 학설에 도전한 수정주의 역사가이자 하버드 대학교 역사학 교수로 옥스퍼드 대학교 정치사 및 금융사 교수, 뉴욕 주립 대학 경영대학원 금융사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는 하버드 대학교 역사학 교수이자 비즈니스 스쿨 교수로 재직 중이다.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와 영국 정치 평론지 <프로스펙트>의 '이 시대 최고 지성 100인'으로 선정되었다

 

 

오픈카를 타고 군중들의 행렬을 악수하며 지나가는 히틀러의 모습

 

"유대인이나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나치의 눈 밖에 나지만 않고 조용하게만 지낸다면 히틀러가 지배하는 독일에서의 삶은 견딜 만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사실 나치 통치도 긍정적인 면이 있었다."- 매튜 휴즈(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군사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영국 브루넬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다)와 크리스 만(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전쟁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런던 서리대학과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유럽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이 저술한 <히틀러가 바꾼 세계>, p283

 

이 글은 나치 독일 시대나 히틀러를 변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감정에 사로잡힌 극렬 반나치주의자들 때문에 쓰게 되었다. 왜 그들 때문에 이런 주제의 글을 쓰게 되었느냐? 다들 알다시피 필자는 어떤 역사적인 인물이나 사건도 장, 단점이 있다고 본다. 즉, 공과 과는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역사를 서술하며,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세계에서 잔혹한 독재자와 국가로 통하는 소련의 스탈린이나 나치 독일의 히틀러나 북한의 김정일, 김일성 등의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고 판단하며, 이들의 숨겨진 업적을 재조명하고 밝혀내는 일을 주로 한다. 그 반대로, 공만 집중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국가나 인물에 대해서 역시 반대로 숨겨진 과오를 재조명하고 밝혀내는 일을 한다.

 

즉,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극렬 반나치주의자들의 주장인 '나치 독일 시대나 히틀러에게서 아무런 장점이나 업적도 찾아볼 수 없다.'는 이분법적이자 흑백논리인 주장을 논파하기 위하여 쓰게 되었다. 그들은 무조건 결과론적인 접근방법을 통해서 히틀러와 나치가 결과적으로 독일을 폐허로 만들었고, 엄청난 사상자를 만들었으니 악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며 악마로 몰아간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원인과 과정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이러한 논리로 나치 독일 시대나 히틀러에게도 장점이나 업적이 있다고 말하면 무조건 '네오 나치', '히틀러 찬양자'로 몰아가면서 마녀사냥을 하기 일쑤다. 이렇게 공정한 역사적 접근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는 이들이 공정한 역사적 접근을 하려는 자들조차도 '네오 나치'로 매도하는 인터넷 역사학계의 상황을 개선시키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그들이 진정으로 나치와 히틀러를 증오한다면 오히려 옛날의 독일처럼 히틀러나 나치와 관련된 전시회나 히틀러의 자서전인 <나의 투쟁>이라는 책을 무조건 금기시를 하며 금서로 지정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의 독일처럼 나치와 히틀러와 관련된 전시회나 히틀러의 자서전인 <나의 투쟁>을 적극적으로 개최하고 유포하여 각인시켜야 할 것이다. 즉, 그들도 히틀러와 나치가 행했던 업적이나 공을 재조명하여 밝혀내서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비난할 것은 비난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치가 행했던 공이나 업적을 알리는 것은 나치나 히틀러를 변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처럼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던 자들이 만든 나치라는 제국과 히틀러를 악마라는 신적인 존재로 격상시켜서 바라보는 것은 도리어 그들이 원하지 않는 나치와 히틀러를 세상에 나타나게 하는 역효과를 낳는다. 

 

 


차량 퍼레이드를 하는 히틀러를 환호하는 독일 국민들

 

"아우토반 도로망과 같은 야심 찬 건설 프로그램과 재무장 프로그램을 추진함에 따라, 나치가 싫어하던 유대인이나 다른 소수민족을 제외한 독일 사람들의 취업률은 치솟았으며 생활비는 계속 낮게 묶여 있엇다. 또한 정부는 기쁨의 힘(Kraft durch Freude)이라는 국민여가 프로젝트를 통해서 국민들에게 유쾌한 레크리에이션과 문화 활동뿐 아니라 저렴한 휴가와 여행까지 제공했다. 전체적으로 조국 독일의 자신감과 국가적 자존심은 높아져만 갔다. 시절은 여전히 어려웠지만 전반적으로 협조적인 분위기가 감돌았고 히틀러의 인기는 점점 더 높아졌다. 엄격한 통제나 언론 검열이 이루어지고 개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점점 축소되었지만 이를 비난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 오드리 설킬드(저널리스트이자 방송작가로 등산과 탐험에 대해서 영국에서 가장 광범위한 자료를 가진 인물)이 저술한 <레니 리펜슈탈 - 금지된 열정> p27 

 

극렬 반나치주의자들은 나치나 히틀러에게 장점이나 업적이라고는 전혀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 100% 있고 없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2007년 10월쯤에 독일 Stern magazine에서는 "도로망과 실업률 제로정책, 낮은 범죄율, 민족주의 등을 내세운 나치즘에 긍정적인가"라는 설문에 대해 독일인 응답자 중 25%가 "그렇다"라고 답했다.

 

 

나치즘에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소신있는 발언을 한 에바 헤르만, 독일 공영 ARD 방송의 간판 뉴스쇼인 `타게스샤우'를 지난 18년간 진행해온 여성 사회자였지만 이 발언을 통해 바로 해임되었다

 

이 설문조사는 독일 토크쇼 사회자 에바 헤르만이 출간한 자신의 책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악행은 과도하게 비판받았다. 나치즘에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히틀러와 나치즘 하에서 독일국민들은 보다 강하게 결속됐다."라고 밝혀서 논란이 되자 행했던 조사였다.

 

그는 이 부분에 논란이 일자 "내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가족, 아이들, 모성의 중요성이었다. 이러한 개념은 제3제국(히틀러 치하의 독일)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존재했던 것들이었으나 3제국의 탄생으로 더 강화됐다. 그러나 나치즘이 무너진 후 이러한 가치들도 함께 무너졌다"라고 해명한 바 있다.

 

설문조사 결과 나치즘에 대해 긍정적이라는 응답은 60세 이상의 독일인들에게서 37%로 가장 높게 나타났고 전후 세대인 45세부터 59세까지의 독일인들은 15%만이 긍정적이라고 응답해 가장 낮은 응답률을 보였다.

 

 

"당시는 정말 아름다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소녀연맹은 정말 멋진 조직이었어요. 동료애와 공동체 생활,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일들은 어린 소녀들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린 소녀들은 기숙사에서 저녁에 함께 무언가를 만들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추었습니다. 그리고 여름이 오면 자전거를 타고 하이킹을 하거나 수영장에서 수영을 했습니다.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저희는 정말 항상 열광했습니다. ······ 한마디로 말해서 진정으로 아름다운 시절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마약도 없었습니다. 섹스는 말할 것도 없고 술도 하지 않았어요. 저희 사이에서 그런 것들은 금기였습니다. 부활절과 오순절이 오면 저희는 배낭을 메고 이틀이나 사흘 동안 여행을 했습니다. 잠은 유스호스텔에서 잤어요. 그곳에는 청년들도 있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남자와 여자들은 따로 떨어져 지냈습니다. 요즘의 젊은이들은 저희와는 다르죠. 요즘의 세태는 마치 소돔과 고모라 같다고 할 수 있을겁니다." - 1912년생의 독일소녀연맹 일원이었던 페데른 여사의 회고

 

 

"희미하게나마 희망이 보였다. ··· 다들 지쳐 있었기 때문에 실업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렇게 느꼈다. 내 경우만 보더라도 그때는 정말로 좋은 시절이었다. 지금처럼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질서와 기강이 잡혀 있었다." - 나치 시대 당시 십대였던 에르나 크란츠의 회고

 

 

이렇듯, 나치와 히틀러에게도 장점과 업적이 있다는 것은 독일인들도 공감하고 있는 바이다.

 

 

또한 2011년 12월 16일자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 온라인판에 따르면 청년문화연구소가 빈의 16~19세 4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1.2%가 "히틀러는 사람들에게 좋은 일도 많이 했다"고 답했다. 또 "유대인들이 세계 경제에 지나치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답한 이들도 18.2%를 차지했다. 이렇게 히틀러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에서조차도 히틀러의 긍정적인 면을, 그것도 중장년층이 아닌 청소년들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사우샘프턴대학교에서 현대독일사를 강의하고 있고 <제3제국의 다임러-벤츠>, <나치즘: 강의>, <나치즘, 전쟁과 학살> 등을 펴낸 역사학자 닐 그레고어가 저술한 <HOW TO READ 히틀러>

 

'광범위하게 보면 1930년대에 독일에서 시작된 주택 건설, 공장에서의 건강 및 위생 시스템, 회사 스포츠와 사회 활동 등도 포드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생각했던 합리화한 사회의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 닐 그레고어(사우샘프턴대학교에서 현대독일사를 강의하고 있고 <제3제국의 다임러-벤츠>, <나치즘: 강의>, <나치즘, 전쟁과 학살> 등을 펴낸 역사학자)가 저술한 <HOW TO READ 히틀러>, p125

 

그렇다면 나치 독일과 히틀러가 이룬 어떤 업적에는 어떤 것이 있고 어떤 점을 배울 필요가 있을까? 우선 나치 독일은 독일인이라면 어느 정도의 삶의 수준이 꼭 보장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사고는 게르만 공동체론에 입각했다. 시민들 사이의 공동체 유대감을 강화시키기 위해 정부는 작업장 문화와 유흥문화를 장려했다. 앞에서도 이미 언급한 바가 있듯이 이를테면 축제, 휴가 여행, 극장문화가 적극 장려되었다. 이 모든 것은 정부의 '기쁨을 통한 힘'(Kraft durch Freude, KdF)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또한, 충성심과 동지애를 강화시키기 위해 국민노동서비스와 히틀러 유겐트와 같은 조직의 가입을 의무화시켰다. 이와 더불어, 몇 개의 건설 프로젝트가 추진되었다. '기쁨을 통한 힘'(Kraft durch Freude, KdF)은 한편 모든 국민이 자가용을 소유해야 한다는 일념하에 나중에 Volkswagen으로 개명되는 KdF-Wagen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또 다른 국가적 프로젝트로 아우토반을 빼놓을 수 없다. 아우토반은 정부지출을 통해 대량고용을 촉진시키는 일종의 케인지언 경제정책이었고, 결과적으로 이탈리아에 이어 두번째로 고속도로 시스템을 완성시켰다.

 

 

  

 

세계 최초 국가주도의 대대적인 금연운동 캠페인의 일환이었던 금연 포스터

 

또한 나치 독일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치밀하게 짜여진 국가적 정책수단으로는 최초라고 할 수 있는 대대적인 금연운동을 벌였다. 히틀러의 어머니인 클라라는 유방암으로 죽었다. 그는 자신의 베스트셀러 '나의 투쟁'으로부터 번 수익으로 자신이 직접 Jena 대학에 의뢰한 암 연구에 10만 마르크를 기부했다. 히틀러는 흡연과 암 사이에 분명 어떠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가 의뢰한 연구는 그것을 확실히 입증해주었다. 금연연구는 정부로부터 강력한 지원을 받았으며, 독일 과학자들은 세계최초로 담배가 폐암을 유발시킬 수 있다는 실증적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연구 결과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흡연자들은 암에 걸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이미 1939년에 나치 당원이며 의사인 Franz H. Müller는 박사 논문에서 흡연과 폐암의 관계에 대해 증명했으며, 2년 후 독일 연구자들은 폐암의 주원인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 연구는 1941년에 Jena의 Friedrich-Schiller 대학에 설치된 '담배의 폐해에 대한 과학연구소'에서 실시되었다. 그러한 종류의 연구소로는 세계 최초였다. 대대적인 캠페인을 통해 담배는 '민족의 적(Volksfeind)'으로 선언되었으며 흡연이 돈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비판되었다.

 

 

나치 독일이 창간한 금연을 지지하는 잡지 '깨끗한 공기'(Reine Luft)의 모습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증거를 가지고 히틀러는 공공장소에서 흡연을 금지하는 법을 또한 세계 최초로 만들었다. 그것은 세계 최초의 공식적인 금연 캠페인이었다. 나치 독일 정부는 의사들에게 환자들에게 금연을 적극 권유하도록 요구했다. 뿐만아니라 공군에서는 흡연이 금지되었으며, 국방군의 담배 배급 제한과 군인들을 위한 의학 강연 개최, 담배세 증세도 실행에 옮겼다. 또한 제복을 입은 경찰은 흡연이 금지되었고, 노면 전차와 버스, 시가 전차 내에서의 흡연 금지령을 비롯해 레스토랑과 카페는 여자에게 담배 파는 것이 금지되었다. 또 임신부에게 담배 쿠폰은 거부되었고, 18세 이하가 공개적으로 흡연하는 것은 불법이었으며, 담배제품을 위한 광고는 엄격히 규제되었다. 전쟁중, 독일 병사들에게 담배는 보급되었다. 히틀러는 병사들이 흡연하는 것을 단념시키는 방법으로 제공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면 군대에서 담배 소비를 중단하겠다고 약속했다.

 

 

Fritz Lickint, 나치 독일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연구를 통해 '간접흡연'이라는 단어를 창시한 나치 시대 당시의 유명한 내과 의사로 나치 독일의 담배 반대 운동을 펼쳤던 인물

 

또한 '간접흡연'이라는 말은 '담배와 유기체'의 저자 Fritz Lickint에 의해 만들어진 말이다. 그는 그 책에서 나치의 금연동맹과 궤를 같이 했다. 의학분야를 비롯한 과학분야의 개혁과 현대화를 위한 히틀러의 강력한 지원은 의료관련 직업인들, 그리고 과학자들, 의사들 및 생물학자들이 나치당원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 국민들은 운동을 하고, 야채를 많이 섭취하고, 술 대신에 미네랄 워터를 마시며, 금연을 하도록 권장되었다. 또한 초기 단계에 유방암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성들이 유방 자가진단을 하도록 권장하는 세계 최초의 계획이 히틀러의 적극적인 격려와 승인을 얻어 드레스덴에 있는 독일 위생박물관에서 시행되었다. 그러는 한편 여성은 유방암 정기검진을 요구받았다. 여자의 월경주기 불순은 암의 징후였다. 여성들은 초기단계에 암을 발견할 수 있도록 월경주기가 불순하지를 살펴보도록 권장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많은 공공교육이 이루어졌다. 그때까지 그러한 건강 캠페인을 후원한 국가는 전 세계에서 독일 말고는 없었다. 독일은 이러한 공공 건강교육을 실시한 첫번째 나라였다. 비교해 본다면, 미국에서는 이와 비슷한 계획이 30년 후에야 시작되었다.

 

 

히틀러의 건강 캠페인은 국민들로 하여금 술과 니코틴을 피하는 반면, 신선하고 건강한 음식물을 먹고 마시도록 권장했다

 

"히틀러는 이미 전쟁 전부터 인간을 위험한 마약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고 호소했다. 히틀러는 알코올이 "민족의 적"이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 슈테판 마르크스, 미국의 철학 박사이자 사회과학자로서 나치즘과 집단 기억의 문제를 전공하고 있으며, 7년 동안 '역사와 기억'이라는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나치 추종자들의 심리적 동기를 연구했다

 

나치 독일은 공공보건 캠페인의 일환으로 수도시설을 전폭적으로 개선하고, 납과 방사선, 수은, 카드뮴을 소비재에서 모두 제거시켰다. 대중매체와 학교를 통하여 독일국민들은 인공 식용색소와 음식과 음료에 포함된 방부제의 사용을 피하도록 권고되었다. 약품을 사용하는 대신에 유기체 또는 천연 재료를 사용한 비료와 화장품 사용이 권장되었다. 60년이 지난 후에도, 대부분의 서구 국가들은 아직도 이 계획의 높은 수준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흡연범주
폐암 
기타 다른 암
매우 심함
16.6
8.8
심함
5.8
5.6
중간
7.8
7.0
적정
1.6
1.4
비흡연자
1
1


나치 과학자 Franz H. Müller는 위와 같이 흡연과 폐암과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세계 최초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나치 독일 시대에서 활약하여 '잊혀진 전염병학 실험의 아버지'로 불린다

 

2차대전 말기에 연합군이 독일을 침공했을 때, 궁핍한 국민들 사이에 무서운 기아와 빈곤을 목격한 연합군은 독일 국민들로 하여금 다시 흡연을 하게 하기 위해 즉각 9만 3천 톤의 담배를 수입했다. 독일에서 흡연의 위험성에 대한 연구는 전쟁발발 직후 멈췄다. 아직까지도 나치의 의학으로부터 무시무시한 교훈들만이 강조되고 있다. 이 때문에 2차대전 이후 독일의 전염병학이 발전하기 어려웠고, 당시 흡연 연구의 성과들이 계승되지 못했다. 20세기 말 전후 독일의 금연운동은 나치 독일의 금연운동 수준의 영향력을 갖지 못했다. 레스토랑과 같은 공공장소는 흡연자들로 넘쳐난다. 한편 미국과 영국 과학자들에 의해 흡연의 폐해에 대한 연구는 1950년대에 들어서야 진행되었고, 흡연의 위험성에 대한 포괄적 합의는 1960년대에 이르러서 이루어졌다. 위의 표를 이해하기 위해 간단히 설명을 하자면, 매우 심한 흡연자는 비흡연자보다 폐암에 걸릴 가능성이 16.6배 더 높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사슴에게 먹이를 주는 히틀러의 모습

 

나치 독일은 1935년 제국환경보존법을 제정하였다. 이는 나치의 '다우어발트(Dauerwald-영원한 숲)' 이념을 반영한 것으로 삼림관리와 보호를 크게 장려하고 강화시켰다. 그리고 공해를 감소시키기 위한 일련의 노력이 있었다. 또한 나치 독일은 비록 특정 인종집단에게 매우 비호의적이었으나 동물들에게는 특별히 우호적이었다. 나치는 동물보호를 위해 여러 정책을 고안했다. 예컨대 1933년 11월 24일 동물보호법이 최초로 통과되었다. 1934년에는 독일의 베를린에서 동물보호 관련 국제회의를 주최했다. 또한 독일동물심리학회가 1936년에 처음 설립되었으며, 1938년에는 '동물보호'가 독일 공립학교와 대학교의 과목으로 처음 도입되었다. 사실 나치당의 수뇌들, 히틀러와 괴링은 동물애호가들이었다. 많은 나치당원들이 동물과 환경애호가들이었으며 환경과 동물보존은 정권에게 중요한 이슈였다. 또 다른 예로 홀로코스트의 원흉 하인리히 히믈러는 동물사냥을 금지시키고자 노력하였다. 현재 독일의 동물보호법은 나치독일의 기본법안을 개정한 것이며, 많은 서구 국가들은 뒤에 자국의 동물보호법들을 그들보다 여러 해 앞서 만든 나치 독일의 법을 본 따서 만들었다.

 

 

 

1936년에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前 영국 수상이 독일을 방문했을 때 히틀러와 만났을 때의 사진

 

"나는 막 독일방문을 마치고 돌아왔다. 나는 그 유명한 독일의 지도자를 만났으며 또한 그가 이끌어낸 대변화를 목격했다. 이를 위해 그가 사용한 방법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 물론 그의 방법은 당연히 의회민주주의 국가의 그것은 아니다 - 독일국민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서로에 대한 국민들의 태도, 그리고 그들 모두의 사회적, 경제적 전망에 있어 그는 실로 경이로운 변화를 이룩해냈다는데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서 4년만에 그들의 운동이 새로운 독일을 만들어냈다는 그의 주장은 허언(虛言)이 아니었다. 내가 보고 돌아온 독일은 망가지고 실의에 빠진채 미래에 대한 불안과 절망감에 잠겨있었던 세계대전 후 10년 동안의 독일이 아니었다. 오늘의 독일은 희망과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으며, 국경밖에 있는 그 어떤 세력의 간섭도 받지 않고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겠다는 결의로 충만해 있다. 오늘 독일에는 전쟁이 끝난 이후 처음으로 국민들 사이에 안정감이 찾아들었다. 사람들은 전보다 쾌활해졌고 독일 전역을 통해 이러한 명랑한 기운은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오늘의 독일은 이전보다 행복해진 독일이다. 나는 모든 곳에서 이러한 모습을 목격했으며 방문 중에 만났던 독일을 잘 아는 영국인들 또한 이러한 변화에 대해 감탄을 표시했다. 한 남자가 이 기적을 일으켰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흡인력, 오직 하나의 목표를 향해 초지일관하는 자세, 강철같은 의지, 그리고 담대한 마음을 지닌 그는 타고난 국민의 지도자이다. 그는 단지 직함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국민의 지도자이다. 그는 독일을 둘러싸고 있는 잠재적인 적들로부터 국가의 안보를 확립했다. 그는 또한 항상 독일국민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굶주림의 공포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켰다. 실로 굶주림은 지난 전쟁의 마지막 해와 평화의 첫 번째 해 독일국민의 심신에 각인된 고통이었다. 그 어두웠던 시절 70만명 이상의 독일인들이 굶어죽었다. 이러한 비극이 남긴 영향은 당시에 태어났던 사람들의 체형에서도 알아 볼 수 있다. 히틀러는 그와 같은 절망과 빈곤, 그리고 오욕으로부터 그의 조국을 구해냈고 오늘날의 독일국민은 그에게 그 누구도 도전하지 않는 권한을 부여했다. 독일국민들 사이에서, 특히 독일의 청소년들 사이에서 그가 누리는 인기는 실로 엄청난 것이다. 나이든 세대는 그를 신뢰하고 젊은 세대는 그를 숭배한다. 이는 단지 인기있는 정치인에 대한 호감의 표시가 아니다. 그것은 굴욕과 절망으로부터 조국을 구해낸 민족적인 영웅에 대한 숭배이다. 히틀러가 독일인의 가슴과 영혼 속에 어떻게 군림하는지를 실제로 보고 느끼지 못한 사람들은 아마도 이러한 나의 기술이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모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이 뛰어난 민족은 단지 히틀러가 요구하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일하고 더욱 많이 희생할 것이며, 필요하다면 더욱 굳은 결의로 싸울 것이다. 이러한 핵심적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독일이 지닌 현재의 잠재력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할 것이다." - <The Daily Express>에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前 영국 수상이 'The greatest living German'이라는 제목으로 쓴 1936년 11월 17일자 기사

 

 

미국의 철학 박사이자 사회과학자로서 나치즘과 집단 기억의 문제를 전공하고 있으며, 7년 동안 '역사와 기억'이라는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나치 추종자들의 심리적 동기를 연구한 슈테판 마르크스가 저술한 <나치즘, 열광과 도취의 심리학>

 

'나치는 '마약 중독'을 "국민적 폐퇴주의"와 "유대인의 불순 행위"의 상징일 뿐 아니라 "전체 국민의 이익을 위해 근절되어야 할 열등함"으로 간주했다. 유전병을 가진 후손들의 출생을 방지하기 위해 나치가 제정한 법률에 따라 이미 1933년부터 알코올 중독과 마약 중독 진단을 받은 사람들에게 강제로 불임 시술을 시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치 시대에 알코올 중독과 마약 중독은 나치의 도덕적 기준에서 "무가치한 삶"이라는 위험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며 동시에 근절되어야 될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나치 정권하에서 대략 5만 명 정도의 알코올 중독자들과 마약 중독자들이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미국의 철학 박사이자 사회과학자로서 나치즘과 집단 기억의 문제를 전공하고 있으며, 7년 동안 '역사와 기억'이라는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나치 추종자들의 심리적 동기를 연구한 슈테판 마르크스가 저술한 <나치즘, 열광과 도취의 심리학>, p252

 

'(현대) 독일에서는 알코올 중독자 수가 430만 명 정도에 이르며, 500만 명 정도가 중독의 위험성이 있을 정도로 알코올을 소비하고 있다. 정부의 마약 감찰반의 추정에 따르면 알코올 때문에 사망하는 사람의 수는 매년 4만 명이나 되며, 약 1,500명 정도가 불법적인 마약 사용으로 사망하고, 11만 명 정도가 니코틴 중독으로 사망한다. 국민 보건비, 알코올 때문에 발생하는 사고와 범죄 등 중독이 야기하는 사회적 비용은 150억에서 400억 유로에 달한다. 그 외에도 수치로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한 정신적 고통이 있다.' - 미국의 철학 박사이자 사회과학자로서 나치즘과 집단 기억의 문제를 전공하고 있으며, 7년 동안 '역사와 기억'이라는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나치 추종자들의 심리적 동기를 연구한 슈테판 마르크스가 저술한 <나치즘, 열광과 도취의 심리학>, p289

 

 

근대 제국주의에 관한 정통 학설에 도전한 수정주의 역사가이자 하버드 대학교 역사학 교수인 니얼 퍼거슨이 20세기에 일어난 전쟁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평가한 <증오의 세기>, 함부르크 및 베를린에서 2년간 연구, 케임브리지 대학교 크라이스트 칼리지 연구 교수를 지냈으며, 피터하우스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 지저스 칼리지에서 근대사를 강의하였다. 옥스퍼드 대학교 정치사 및 금융사 교수, 뉴욕 주립 대학 경영대학원 금융사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는 하버드 대학교 역사학 교수이자 비즈니스 스쿨 교수로 재직 중이다.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와 영국 정치 평론지 <프로스펙트>의 '이 시대 최고 지성 100인'으로 선정되었다. 그는 저널리즘에서도 다양하고 폭넓은 활동을 하고 있다

 

'제3제국의 대공황 대책을 살펴보면, 혁신적인 민주 국가들과 몇 가지 표면적인 점에서 닮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나치 정부는 미국처럼 최고 10만 명 이상 고용하는 고속도로 건설 같은 야심찬 프로그램에 착수했다. 또한 나치식 뉴딜 정책에는 공공부문 고용을 크게 늘리는 방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실제로 히틀러에 의해 제국은행 총재로 임명되었다가 나중에 경제장관이 된 샤프트가 도입한 새로운 통화관리 제도를 운영하는 데만 1만 8,000명 정도가 고용되었다. 미국처럼 완전고용으로 돌아가는데 결정적인 추진력을 제공한 것은 재무장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즉시 재무장에 들어간 반면, 루스벨트 정부는 훨씬 나중에 재무장을 추진했다. 나치가 거둔 경제 분야의 성과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독일의 성과는 훌륭했고 인상적이었다. 사실 1929~1932년에 독일 경제만큼 심하게 추락한 사례는 없었지만, 그토록 빨리 경기회복을 달성한 나라도 없었다. 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했을 때 독일의 실업자 수는 600만 명을 넘어선 상태였다. 1935년 6월, 실업자 수는 200만 명 이하로 떨어졌고, 1937년 4월에는 100만 명, 9월에는 50만 명 이하로 떨어졌다. 1939년 8월, 실업자로 등록된 독일 국민은 3만 4,000명에 불과했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발생했을까? 분명 히틀러 전임자들이 세웠던, 신용 거래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여 일자리를 창출하려던 계획이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 이런 결과는 나치 정부가 무역과 자본 흐름, 물가를 이전 정부들보다 더 적극 통제하고, 부정하게 자금을 빌리며, 노조 자주성을 무너뜨림으로써, 1920년대 독일 경제를 괴롭혀 온 고질적인 '임금 압박' 요인을 없앤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전체주의 정권의 경우 필요한 통제를 가할 수 있기 때문에 재정 팽창으로 완전 고용을 달성할 수 있을 거라는 케인스의 생각이 옳았던 것이다. ······ 1930년대를 살았던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경제 기적이 발생했다고 느꼈다. 민족 공동체라는 개념은 화려한 웅변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완전 고용과 높은 임금, 안정된 물가, 빈곤의 감소, 값싼 국민 라디오, 돈이 적게 드는 휴가를 의미했다. 사람들은 1935~1939년 독일에 강제수용소보다 휴양지가 더 많았다는 사실은 쉽게 잊어 버린다. 노동자는 더 좋은 훈련을 받았고, 농민은 소득 상승을 맛보았다. 외국인들도 당시 벌어지는 상황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스탠더드 오일이나 제너럴 모터스, IBM 같은 미국 기업들은 앞다퉈 독일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1938년 당시 독일 국민은 미국 국민만큼 부유하지는 않았다.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독일보다 두 배 정도 높았다. 하지만 1933년보다 1938년에 독일 국민의 살림살이가 더 나았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 근대 제국주의에 관한 정통 학설에 도전한 수정주의 역사가이자 하버드 대학교 역사학 교수인 니얼 퍼거슨이 저술한 <증오의 세기>, p358~361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경제학박사 학위 취득, 시카고 대학교, 런던 대정경대학(LSE) 베를린 자유대학, 캔사스 대학교 등에서 연구교수를 지낸 현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양동휴가 저술한 <대공황 시대>

 

'나치는 디플레이션 정책 비판하고 완전고용 공언

나치는 실업감소를 위해 노조를 파괴하고 임금교섭업무를 정부가 직접 담당하며, 병역의무와 강제노동제도를 도입하고, 여성고용 감소를 부추겨 노동수요를 증대시키는 등의 방법을 썼다. 43.8%(1932)까지 올랐던 제조업 실업률이 12%(1936), 7%(1937), 3%(1938)로 줄었다. 디플레이션, 균형재정운영 등으로 4년째 방치되던 경제가 나치 출연이후 결정적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나치의 외환통제와 막대한 정부지출

나치는 외환통제를 실시하면서 이 보호막 안에서 팽창정책으로 돌아섰다. 은행국유화는 실행하지 않았으나, 민간은행은 경기회복과정에서 배제되었다. 나치의 경기팽창은 국민에게 직접 경제적 이익을 준다는 소비자 중심의 정책이었다. 막대한 정부지출이 초기에는 일자리 창출, 주택, 도로건설, 자동차 부문에 쏟아 부어지면서 경기팽창의 주요원천이 되었다. 계획을 실행할 자금은 정부가 비금융 기업에 재정증권 또는 세금증서(Steuergutscheine)를 직접 매각하거나 정부채로 정규자본시장을 독점하는 방식으로 조달했다. 강제저축 동원과 또 일종의 분식회계 방식을 사용했다. 또한 우대금리를 적용해 기업에 대부하고 감세와 보조금 지급으로 민간투자를 촉진했으며 내부자금 조달을 권장했다. 투자도 인허가 제도, 원료 직접배분 등의 방식으로 행정적으로 관리했다.

 

나치의 군비지출증강은 회복이 본궤도에 오른 이후

나치가 군비지출증강을 시작한 것은 회복이 본궤도에 오른 이후다.(1935~1936) 군수생산의 비중이 커지면서 통제가 더 강화되었다. 나치는 루즈벨트와 반대로 저임금정책을 썼다. 이것이 고용정책과 결합되면서 실업률이 1938년에 3%까지 떨어졌다. 경기팽창을 위한 자극이 가장 강력했던 나라가 독일이다. 이를 케인즈모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단지 기존의 전통적 재정운영과 자유방임시장으로 인한 혼란에서 벗어나고자 계획화와 관리를 택한 것이다. 나치 독일은 사유재산을 폐지하지는 않았으나 관리자들에게 당근과 채찍을 주어 생산을 통제했다. 나치당 강령들은 잘 따져 보면 미국의 뉴딜이 그랬듯이 서로 간에 모순된 내용들로 가득했다. 그런데도 히틀러가 집권한 후 급격한 회복이 시작되었다. 통계상의 신뢰문제가 제기되기는 하나, 여하튼 실업문제도 해결되었다. 이것 역시 정책변화를 모든 사람이 인식하기 시작한 기대변화 덕분이었다. 정책내용보다는 정책변화 자체가 경기부양의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경제학박사 학위 취득, 시카고 대학교, 런던 대정경대학(LSE) 베를린 자유대학, 캔사스 대학교 등에서 연구교수를 지낸 현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양동휴가 저술한 <대공황 시대>, p31~34

 

 

역사, 법률학, 독일학 등을 프라이부르크대학, 프랑크푸르트대학, 베를린대학 등지에서 공부하였고 신문사와 방송사에서 활동하였으며, NDR텔레비전 주간, 잡지 '파노라마'지 대표, 1973년부터 1993년까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발행인을 지낸 세계적인 히틀러 전문가 요아힘 페스트가 저술한 <히틀러 평전 II>

 

'이런 종교적인 외침과 통합의 호소, 의식적인 행사의 마법은 효과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소속감과 집단 동료의식이라는 잃어버린 감정을 되찾아주었다.' - 역사, 법률학, 독일학 등을 프라이부르크대학, 프랑크푸르트대학, 베를린대학 등지에서 공부하였고 신문사와 방송사에서 활동하였으며, NDR텔레비전 주간, 잡지 '파노라마'지 대표, 1973년부터 1993년까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발행인을 지낸 세계적인 히틀러 전문가 요아힘 페스트가 저술한 <히틀러 평전 II>, p769

 

'사회적 동원

국가사회주의는 새로운 사회적 활동공간을 다양하게 만들어서 이러한 소속감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하였다. 인간은 어딘가에 소속되고자 한다는 생각은 청년기의 사회적인 소외감에서 히틀러가 일찌감치 터득한 기본적인 인식들 중의 하나였다. 이제 전국을 무성한 덩굴처럼 뒤덮은 당의 수많은 편성들, 정치적으로 조직된 직업 연합들, 부서들, 직위들, 연합체들에서 강제의 요소만을 보려한다면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연령층, 기능층의 개인들을 여가 시간이나 오락까지도 사로잡아서 잠자는 것만 개인적인 일로 남겨두는 방법은 사회적인 참여에 대한 광범위한 욕구에 부응한 것이었다. 히틀러가 추종자들에게 언제나 희생을 요구한다고 정기적으로 강조하였지만 그것은 과장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사람들은 편입의 욕구를 가지며, 기능 욕구라는 것이 있고, 광범위한 의식층에는 자유의 지적인 꿈보다 자기희생의 기회가 더 중요하다는 잃어버린 진실을 재발견하였다. 초기에 일깨워진 이 모든 불확실한 원동력을 목적 지향적인 사회적 에너지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은 히틀러의 가장 소중한 공적에 속한다. 그가 제시한 자기 도전의 음조는, 실업, 비참, 굶주림 등에 쇠약해진 민족을 열광시켰고, 거의 몽상적인 헌신의지를 일깨웠다. 아무도 그처럼 믿음직하게 외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초석 놓기와 첫삽 뜨기를 계속해서 일종의 동원의식을 만들어내고, 일터로 가자는 연설을 수없이 해서 노동의식을 일깨웠다. 그것은 정부의 군사용어를 전 노동계층에 확산시키고 컨베이어 벨트에서 혹은 향토에서의 동원을 승리로 이끌어갔다.' - 역사, 법률학, 독일학 등을 프라이부르크대학, 프랑크푸르트대학, 베를린대학 등지에서 공부하였고 신문사와 방송사에서 활동하였으며, NDR텔레비전 주간, 잡지 '파노라마'지 대표, 1973년부터 1993년까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발행인을 지낸 세계적인 히틀러 전문가 요아힘 페스트가 저술한 <히틀러 평전 II>, p778~779

 

'경제위기의 극복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대량실업사태를 극복한 것도 이념과 무관한 히틀러의 실용주의 덕분이었다. 그는 정권의 운명도 자신의 개인적인 체면도 곤궁에 시달리는 주민의 처지를 개선시키는 일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 히틀러는 슐라이허 정권이 결정한, 일자리를 만들기 위한 '긴급계획' 같은 옛날 계획들을 다시 받아들였다. 이제 화려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또 다른 계획들도 바이마르의 서류더미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바이마르 시절의 일 추진을 방해하는 민주 절차, 결정을 꺼리는 태도 혹은 체념들이 그 실행을 방해했다. 예를 들면 정권의 인기와 결합되어 있던 고속도로 건설은 오래 전부터 말이 있어왔지만 시작도 되지 못했다. 중앙은행 총재인 한스 루터(H. Luther)는 통화긴축 정책에 단단히 매달려서 일자리 창출을 위한 대규모 투자를 거부하였다. 히틀러는 그를 해임시키고 또다시 수많은 동지들이 '자본주의자'니 '고위직 프로메이슨'이니 하면서 못마땅하게 여기는 히얄마르 샤흐트를 그 자리에 임명하였다. 그는 이른바 메포(Mefo) 어음의 힘을 빌어서 인플레이션 효과를 일으키지 않고 공공사업의 재정과 뒷날에는 군비확장 계획의 재정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전임자들보다 주저 없이, 또한 더욱 과감하게 히틀러는 수많은 너그러운 조치들을 통해서 생산활동을 증가시켰다. 이미 5월 1일 연설에서 그는 '전도이치 민족'에게 호소하는 어조로 설명하였다. "모든 개인 ······ 모든 기업가, 모든 주택 소유자, 모든 사업가" 등이 지속적인 공동체적 긴장으로 노동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국가는 국가대로, 히틀러가 좋아하는 말인 '거대한' 계획을 통해서 할 일을 할 것이다. "우리는 저항들을 물리치고 위대한 과업을 시작할 것입니다."라고 그는 확언하였다. 신도시 건설계획과 도로건설 같은 국가 발주 사업, 공공투자와 민간투자의 유인, 대출, 세금 감면, 보조금 지급 등은 경기 활성화를 촉진시켰다. 그리고 물론 그 사이로 언제나 말, 구호, 말들이 끼여들었다. 말들은 그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고 "큰 거짓말쟁이는 위대한 마법사이기도 하다."는 히틀러의 아이러니컬한 공식에 놀라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히틀러가 이 몇 주 동안 발전시킨 충동자극 심리는 처음에 우선 자발적인 노동봉사의 확대를 포함하였다. 그것은 젊은 실업자들을 받아들이는 그릇 노릇을 했을 뿐 아니라 정권의 건설 낙관주의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늪지대와 제방 안쪽 지역을 개간하여 농토로 만들기, 조림, 고속도로 건설, 강물 줄기 조정 등에서 업적의지와 미래의지가 눈에 보이게 되었다. 또한 1935년 이후로 의무화된 조직은 계급 한계의 극복과 입대 전 교육에 도움을 주었다. 이 모든 발안들과 요소들에 함께 작용하였다. 1934년이 경과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3백만의 실업자들이 있었으나 그래도 기술자 부족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2년 뒤에는 완전고용이 이루어졌다.

 

노동자들

이러한 경제활성화는 사회정치 영역에서 효과적으로 투입된 상당한 정도의 활동성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정부는 반동적으로 보일지 모른다는 걱정에서, 예를 들면 파업금지령이나 통합 노동조합인 '도이치 노동전선'의 설립 같은 엄격한 질서의지를 관철시키는 과정에서 노동자에게 친절한 화해적 태도를 과시하였다. 그렇게 해서 노동자를 위한 광범위한 행사들이 생겨났다. 휴가 여행, 스포츠 축제, 미술전시회, 포크 댄스, 교육과정 등을 통해서 사람들을 조직하였다. 이러한 행사들은 '즐거움을 통한 힘'이나 '노동의 아름다움' 같은 표어들 못지않게 사람들을 통제하고 진정시키는 기능을 하였다. ······ 아르투어 로젠베르크(A. Rosenberg) 같은 공산주의 역사가도 "국가사회주의는 민주주의 혁명이 성취하지 못한 몇 가지 요구들을 실현시켰다"고 고백하고 있다. ······ 새 정권은 한 사회계층이 나머지 모든 계층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출세의 기회가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강조하였고 실제로 상당한 정도로 계급에 대해 중립적이었다.' - 역사, 법률학, 독일학 등을 프라이부르크대학, 프랑크푸르트대학, 베를린대학 등지에서 공부하였고 신문사와 방송사에서 활동하였으며, NDR텔레비전 주간, 잡지 '파노라마'지 대표, 1973년부터 1993년까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발행인을 지낸 세계적인 히틀러 전문가 요아힘 페스트가 저술한 <히틀러 평전 II>, p785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군사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영국 브루넬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는 매튜 휴즈와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전쟁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런던 서리대학과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유럽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크리스 만이 저술한 <히틀러가 바꾼 세계>

 

'1930년대 경제 회복으로 실업률이 떨어진 가운데 임금 안정화와 국가위신 회복, '기쁨을 통한 힘' 같은 복지 정책 등을 접하면서 독일 노동자들은 새로운 정권에 호감을 갖게 된다. 많은 독일인은 1930년대를 황금기로 보았다.'-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군사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영국 브루넬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는 매튜 휴즈와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전쟁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런던 서리대학과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유럽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크리스 만이 저술한 <히틀러가 바꾼 세계>, p65

 

'독일노동전선은 조합원 수가 2,000만 명이 넘었고 대규모 예산과 풍부한 자산을 보유하기도 했다. 사회 프로그램 '기쁨을 통한 힘'과 더불어 독일노동전선은 노동자에게 재정지원, 체계적인 교육, 안정적인 임금 등 사회안정만 관련 서비스를 포괄적으로 제공했다. 1938년 독일인 약 18만 명이 유람선 여행을 갔고 약 1,000만 명은 다른 '기쁨을 통한 힘' 활동에 참가했다. 이동, 식사, 숙박, 여행, 가이드가 포함된 통상적인 일주일짜리 '기쁨을 통한 힘' 프로그램 비용이 모젤 지역은 43마르크, 오버바이에른 지역은 39마르크였다. 독일 노동자는 총 155마르크로 이탈리아에서 2주간 휴가를 보낼 수 있었다. 이같이 저렴한 휴양 프로그램은 나치 경제 정책을 선젛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나치는 경제 정책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동의 미'라는 부서도 신설해 노동자의 휴가 여행, 축제, 공장 기념행사, 포크 댄스, 정치 교육 계획을 수립하고 '기쁨을 통한 힘'과 긴밀하게 연계해서 운영했다.'-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군사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영국 브루넬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는 매튜 휴즈와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전쟁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런던 서리대학과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유럽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크리스 만이 저술한 <히틀러가 바꾼 세계>, p85

 

'독일인 대부분은 1930년대를 테러, 살인, 억압보다는 질서, 평온함, 고용안정, 번영의 시기로 기억했다. 이 때문에 1951년 독일연방공화국 국민에게 물었을 때 거의 절반가량은 1933년부터 1939년을 독일의 황금기라고 답했다. 1949년 독일 여론기관은 조사결과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봉급 보장, '기쁨을 통한 힘', 안정적인 정국 운영······. 국가사회주의는 독일인들이 일과 안정된 삶에 전념할 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충분한 먹을거리와 '기쁨을 통한 힘' 같은 복지 서비스도 제공해 주었다." 평범한 독일인 대부분은 나치 정권이 격동의 1920년대 이후 국가를 안정화했다고 보았다. 크루프사의 정비공이던 에른스트 브롬베르크는 1920년대의 혼란 상황을 나치가 정권을 잡은 뒤의 안정 시기와 비교했다. 그는 일자리가 없어 1927년과 1932년 사이 다섯 차례나 회사에서 해고된 경험이 있었다. 국가사회주의 시절의 가장 큰 특징은 고용 안정이었다. "노동전선 활동과 더불어 3교대 근무를 했기 때문에 정치에 참여할 시간이 없었다. 사람들은 정치활동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어물쩍 넘어갔다. 일하는 만큼 수당을 받았기 때문에 집회에 나가 연설할 시간이 없었다. 필요하면 아침 일찍 일어나야 했다. 휴식시간은 최대한 줄였다. 그 시간에 일을 하면 돈을 더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노동전선과 관련된 업무 외에는 나치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어쨌든 나는 일주일 내내 교회 모임 일에 매여 있었다." 브롬베르크에게 이 시절은 더 많은 돈을 벌 기회가 있는 경제 호황기였다. 그가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하기를 좋아한 점을 보면 독일인 다수가 나치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관심 분야를 찾으려고 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활동을 통해 브롬베르크는 정부의 통제에 거리를 둘 수 있었다. 그에게 1933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초기까지는 말 그대로 평온한 시기였다. 이러한 평화로운 시절의 핵심은 장기간 지속된 경제적 번영이었다. 이 시기 많은 독일인의 일상생활에서 특징적인 것은 경제 발전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처음으로 휴식을 적절히 취할 수 있도록 한 나치당의 '기쁨을 통한 힘'이라는 휴가 프로그램이었다. 독일인들은 대규모 휴가 인원을 편성해서 발트 해안이나 해외로 여행을 갔다. 이러한 '패키지 휴가'는 독일인들에게 전례가 없는 레저 활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단기 휴가 대신 1두 또는 2주 동안 휴가를 보낼 수도 있었다. '기쁨을 통한 힘'은 원래 이탈리아 파시스트 조직에서 운영하던 조직을 모방한 것으로, 노동자의 사기를 진작시켜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기쁨을 통한 힘' 휴가자들은 고급 크루즈 여행을 하거나 알프스, 베네치아, 나폴리, 리스본으로 기차 여행을 갔다. 노르웨이도 즐겨 찾는 관광지 중 하나였다. 노동자들은 이러한 여행 기회를 즐겼는데, 여행자가 늘면서 지방 호텔 소유자나 국영철도체계인 제국철도가 큰 수익을 거두었다. '기쁨을 통한 힘' 프로그램은 극장공연, 콘서트, 전시회, 스포츠 행사, 하이킹, 포크 댄스, 성인 교육과정도 지원했다. 나치 정부는 대중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이런 사업에 돈을 아낌없이 썼다. 정부 예산을 1933년에서 1934년에는 2,400만 마르크, 1935년 1,700만 마르크, 1936년 1,500만 마르크를 투입했다. 이 과정에서 프로그램 자체가 국가적 사업이 되었다. 나치는 권력을 잡은 만큼 2년 내에 특수 제작한 최고급 편의시설을 갖춘 원양 유람선 두 척을 보유할 만큼 큰 휴가 조직을 만들었다. 심지어 '국민 자동차' 폴크스바겐도 본래 '기쁨을 통한 힘 자동차'로 이름 붙이고 생산에 대규모 정부 보조금을 투입했다. 자동차는 부르주아 신분의 상징이었지만, 미국 포드 자동차의 모델 티와 마찬가지로 폴크스바겐이 출시되면서 평범한 독일 가정도 할부로 자동차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자동차 생산이 중단되고 군용 무기 생산체계로 전환되어 일반 독일인들은 결국 자동차를 소유하지 못하게 된다. 나치 지도부는 '기쁨을 통한 힘'을 국가사회주의가 국민에게 준 혜택의 실질적인 증거로 보았다. '기쁨을 통한 힘' 운영 책임자 로베르트 라이는 조직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노동자들은 우리가 자신들의 지위 향상에 크게 신경 쓴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우리가 새로운 독일의 대표로 세상에 내보내는 것이 이른바 '지식계급'이 아닌 '독일 노동자'라고 생각한다." 로베르트 라이는 '기쁨을 통한 힘'이 나치 독일에서 계급 갈등을 해결할 가공할 만한 잠재력이 있다고 보고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노동자들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았을지도 모르는 열등감의 마지막 자취를 잊게 될 것이다." 독일인 대다수는 정권에 저항하는 행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함부르크 은행가의 아들 만프레트 프라이헤어 폰 슈뢰더는 나치를 안정 세력으로 보고 히틀러가 총리에 오른 1933년에 나치당에 가입했다. 폰 슈뢰더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모든 것이 질서정연했고 깔끔했다. 새로 시작한다는 국가적인 해방감이 있었다."'-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군사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영국 브루넬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는 매튜 휴즈와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전쟁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런던 서리대학과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유럽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크리스 만이 저술한 <히틀러가 바꾼 세계>, p141~145

 

 

 

이상입니다.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

 
http://cafe.naver.com/nazzis/24777

2012.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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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wpgu****
시민
본인 입력 포함 정보

히틀러는 엄청난 독재인의 로써 독일의 제2차세계대전때 엄청난 결과를 몰고온 사람이다....................

그리고 히틀러는 시민들의 민심을 사기위해 거짓말을 하였고, 독재정권의로 유태인(유대인)들을 아주 심하게 탄압을 하였다.

2012.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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