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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제암리3.1운동 순국 유적지
비공개 조회수 4,172 작성일2007.04.10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지 좀 가르쳐 주세여

수~목요일 까지 숙제예요

부탁드림니다

(사진도 부탁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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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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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es****
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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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지는 수원에서 남서쪽으로 약 20km지점에 위치한 조용한 농촌마을로
서 일명 두렁바위라고도 불려지는 이곳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시 이곳 주민들이 발안장터
에서 격렬한 만세운동을 벌이자 만세운동에 대한 주모인사 명단을 입수한 일본 헌병 30여명
이 4월15일 오후 2시경 제암교회에 주민을 모이게 한 뒤 모든 문을 폐쇄하여 감금시키고 교
회에 불을 지른 후 교회를 향하여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23명을 학살하고 30여채의 가옥을
불태워버린 선조의 한과 넋이 서린 곳이다.
제암리 학살사건이 있은 지 63년이 지나서야 마을에서 4km떨어진 도이리 공동묘지에 평토장
으로 안장되었던 유해를 발굴하여 제암교회 뒷동산 양지바른 곳에 유택을 마련하였으며 후세
에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와 전시관, 교육관 조형물 등을 설치하여 나라 사랑 정신을
일깨우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관람시간 : ( 3월~10월 ) 09:30 ~18:00 / ( 11월~2월 ) 09:30 ~17:00
정기 휴관일 : 1월 1일 , 설날 , 추석날, 매주 월요일

교통안내 : * 동서울터미널 > 발안에서 하차(조암행 20분간격, 70분소요) > 제암리
* 사당역/양재역 > 발안 > 제암리
* 안산 > 발안간 30번국도 > 수원-발안간 43번국도의 교차부근에서
남양호로 가는 302번지방도로(약1.5Km)
* 서해안고속도로 > 발안 > 톨게이트에서 좌회전 > 제암리(첫마을임)
* 오산 > 제암리(발안행, 15분소요)
* 수원역 > 제암리(조암행, 15분간격)

숙 박 : 유적지 주변에는 없으며, 0.5-1.5 km 쯤에 있는 발안, 조암쪽 여관을
이용할 수 있음.

주변관광지 : 남양호, 입파도, 화성온천

 

2007.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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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인 채택 답변입니다.

  • 출처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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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수

화성시에 있으며,3-1 운동때 일본에 대항하여 만세운동을 일으켰던 유적지이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07.04.18.

  • 출처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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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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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답변

제암리 학살사건에 대해서 궁금하신가 본데요.


먼저 이 내용은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출처한 내용입니다.

<1919년 4월 15일 오후 2시경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일본 육군 중위가 이끄는 일단의 일본군경이 앞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제암리에 도착해서 그리스도교도 약 30명을 제암리교회에 모이게 하였다. 주민들이 교회당에 모이자 아리타는 출입문과 창문을 모두 잠그게 하고 집중사격을 명령하였다. 그때 한 부인이 어린 아기를 창 밖으로 내어놓으면서 아기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으나, 일본군경은 그 아이마저 찔러죽였다.

이같은 학살을 저지른 일제는 증거인멸을 위해 교회당에 불을 질렀으며, 아직 죽지 않은 주민들이 아우성을 치며 밖으로 나오려고 하였으나 모두 불에 타 죽었다. 이때 교회당 안에서 죽은 사람이 22명, 뜰에서 죽은 사람이 6명이었다.

일제는 이것으로도 부족해서 인근의 교회건물과 민가 등 31호에 불을 질러 또다시 살상자를 내었다. 이와 같은 일제의 만행은 선교사들의 분노를 사게 하여 스코필드는 현장으로 달려가 그 생생한 모습을 사진에 담아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서 미국에 보내어 여론화하였다. 1982년 제암리학살현장의 유적은 사적 제299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이 내용은 전주 중산 초등학교에서 출처한 내용입니다.

<제암리교회 교인들의 학살. 경기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 1919년 4월 15일 일본 경찰들은 당시 교인 약 30명을 교회에 집합시킨 뒤 밖에서 문을 잠그고 집중사격과 방화로 모두 학살하였다.

1919년의 3·1운동은 개신교가 한국민족주의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계기가 됐다. 개신교는 천도교-불교와 함께 3·1운동에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으며, 전국 각지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독립만세시위중 상당부분이 개신교 신자들에 의해 주도됐다. 그만큼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의한 피해도 많았는데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경기도 화성군의 제암리교회이다.일제경찰은1919년 4월 15일 오후 제암리교회에 신자들을 모이게 한후 문을 폐쇄하고 교회에 불을 지르면서 무차별 총격을 가했으며, 이 때문에 23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3월 31일과 4월 5일 발안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제암리교회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이었다. 1905년8월 제암리 이장이었던 안종후의 주도로 설립된 제암리교회는 동족부락이라는 특성 때문에 유난히 강한 단결력을 지녔는데 3·1운동 때도 이같은 성격은 그대로 나타났다. 일제 경찰은 이어 제암리의 가옥 30여채를 불태우고 5백m 떨어져 있는 고주리에서 천도교 신자 6명을 살해하고 시체를 불태워버렸다. 이같은 만행으로 이날 제암리 일대에서는 사람과 가옥, 가축, 의류,곡식 등이 타는 냄새와 연기가 10여㎞ 밖까지 퍼져나갔다고 전한다.

제암리교회 학살사건이 일어난 후 신자나 일반인들은 일제의 감시 때문에 사건현장에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결국 희생자들의 시신은 사건을 전해들은 캐나다 의료선교사 스코필드박사가 이틀뒤 불탄 교
회에서 유골을 수습하여 인근 공동묘지 입구에 묻을때까지 방치됐다.>


이미지는 지금 제 컴퓨터에 문제가 있는 관계로 못구했습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제암리 학살사건'이라 치시면 거기에 관련된 이미지, 내용 등을 더 자세하게 아실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럼 즐인하세요^^

2008.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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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j5****
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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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운동을한곳

2007.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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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평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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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화성시에 일어났으며 운동때 일본이 대향하며 만세 운동을 일으켯던 공입니다.도움 많이 도었으면 좋겠슴니바

2007.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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