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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고려시대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714 작성일2009.03.13
미역바위(곽암)와 관련있는 고려시대 인물은 누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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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krl****
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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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황

⊙ 문화재 지정 : 시지정문화재자료 제38호 (2001. 12. 20 지정)
⊙ 소 재 지 : 강동동 판지마을 해수면하
⊙ 부 대 시 설 : 문화재안내판 1


▣ 연 혁

어물동 마애여래좌상에서 해안도로로 나와 정자쪽으로 가다 보면 우가·제전·복성마을을 지나게 되고 조금 더 가면 판지마을이라는 표지가 나온다. 이 표지가 있는 곳으로 우회전하여 들어가보면 바닷가에 오래된 비석 하나와 새로 세워진 크고 웅장한 비석이 나타나는데 이곳 앞 바다에 박윤웅 미역바위가 있다.

박윤웅은 울산의 성립과 관련지어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삼한시대 울산에는 우시산국이라는 소국이 있었고, 신라에 병합된 이후 현 울산시는 모화군과 그 영현인 하곡현·율포현이, 동안군과 그 영현인 우풍현이 있었다.

‘울산박씨 세보’에는 신라 효공황 5년(901)에 신학성에 박윤웅이 터를 잡았다고 되어 있고,‘고려사’‘세가 태조 13년(930) 9월조’에는 “개지변에서 최환을 보내 항복하다”는 기사가 있다. 개지변이나 신학성은 모두 울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태조 23년(940)에는 나누어 있었던 울산지역을 합쳐 흥려부라하고, 박윤웅을 식읍 7백호, 정5품의 흥려백에 봉하여 강동면과 농소면 지방을 채지로 하고 12구의 미역바위의 채암권도 주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박윤웅이라는 호족이 항복한 것이 고려를 향할 정도로 큰 비중이었을까? 이러한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시는 상황을 살필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에서 경순왕 4년(930)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정원 재암성(청송면 진보면) 장군 선필이 고려에 항복, 견훤과 고창군(안동군) 병산(군복 10리)에서 싸워 고려 이김, 송생(청송군 청송면) 등 30여 군이 서로 연대하여 항복, 9월 나라 동해안의 주군부락이 고려에 항복"

여기서 9월의 항복기사에 박윤웅이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정황을 보면 후백제는 동진하여 신라의 곳곳을 유린하고 고려와 싸워서도 유리한 전황을 이루고 있었다.

즉, 928년 강주(진주) 장군 유문이 견훤에게 항복하고, 10월에 견훤이 무곡성(군위군 악계면)을 공격했으며, 929년에는 견훤을 공격하다가 고려장군 홍술이 도리어 전사당하고 견훤이 가사현(문경군 가은면)을 공격하는 등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930년에 들어 고려가 서서히 전쟁의 주도권을 잡고 남진하던 중 항복해 온 재암성 선필의 주선으로 왕건이 경주를 방문하였다. 이로 인해 신라세력들의 고려에 대한 신뢰도는 더욱 높아지게 되고 신라의 수도 바로 밑의 현 울산지역 호족인 박윤웅의 항복은 고려를 절대적으로 유리한 전황으로 이끌었을 것이고, 신라는 위 아래로 고려의 세력권 하에 놓이게 되어 항복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러한 후삼국 전황 속에서 승리한 고려는 박윤웅의 전공을 생각하며 940년 역분전을 행할 때 그의 지배권을 인정해 주었고, 초기 지방 호족들의 득세로 불안정한 왕권속에서 호족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그의 사후에도 많은 조치를 베풀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가 한시적인 것은 그 후 흥례부가 일시적으로 공화현으로 격화된 모습에서도 알 수 있다.

박윤웅이 채암권을 획득했던 미역바위는 조선시대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에 의해 국가로 환수되기도 했지만, 그후 3년간 미역이 흉작이자 다시 그 중 한구를 울산 박씨 문중에게 주었고 이는 일제시대까지 이어졌다. 해방 후 마을 사람들이 박씨문중에 세를 바치지 않자 정부에 탄원하여 다시 박씨 문중에게로 소유권이 돌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확인하자 1966년에 비석을 세웠는데 이 비석 정면으로 4백여 척 해안에 마을 사람들이 양반돌이라 부르는 미역바위가 있다.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1966년 이전에는 이곳에서 생산된 것을 전량 박씨문중에 바쳤으나, 그후 대치로 1년 50폭 생산중에서 40%로, 20폭 정도만을 바친다고 한다.

박윤웅(朴允雄)

고려 태조 때에 으뜸가는 공훈을 세워 흥려백(興儷伯)으로 봉해진 인물로서 울산 박씨의 시조이다. 나말여초 당시 울산지역의 토호로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지방의 호족세력을 정비할 때 협조하였다. 이로 인해 그가 살던 울산군이 흥려부(興儷俯)로 승격되었고, 농소(農所)와 유포(柳浦)지역을 채지(采地 : 신하가 왕으로 부터 받는 토지)로 받고 곽암(藿巖 : 미역바위)을 하사 받아 이들로부터 수세하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시호는 장무(莊武) 이다.

 

님이찾는것은 박윤웅아닌가요?ㅎ

2009.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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