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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로버트 할리의 대해서 자세히알고싶어요+_+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71,880 작성일2003.09.29
로버트할리의 대해서 자세히알고싶습니다,



국적은 무엇이고,
언제 귀화를 햇고 현재는 무엇을하고 전나라에선 무슨 일을했는지,
발표할수 있게 잘 정리가 되어있었으면좋겠습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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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
영웅
한국사, 사회, 도덕, 세계사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로버트할리 신문 기사 내용
로버트할리가 한국에 처음 온 것은 1979년. 부산항에 도착했을 때
그는 고등학교 를 갓 졸업한 17살의 미소년이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크라멘토시 조금 위쪽에 유바시티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그는 그 곳에서 태어났다.
9남매의 장남이었지만 아버지가 치과의사인 덕분에 집안은 넉넉했다.
몰몬교 신자인 그에게 `한국으로 가라'는 지시가 떨 어졌다.
"처음엔 억수로 오기 싫었어에.어려서 부모님이 가끔 중국요리를 시켜주곤 했는데
억수로 맛이 없었거든에.그때부터 중국뿐 아니라 동양을 싫어하게 됐 심더"
한국은 그가 겪은 최초의 동양권 국가였다.
선교 활동을 했던 18개월 동안 에도 특별한 감흥은 없었다.
사단은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 생겼다.
"부산의 자갈치시장도 눈앞에 어른거리고 신발벗고 들어가야 했던 부산집 도 생각나는 거라에.
친구들도 무지 보고 싶고에" 묘한 일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 미국의 집, 미국의 친구들이 그리웠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미국에 있으니까 한국의 집,
한국의 친구들이 너무나 그리웠다.
미국 대학에 합격해 1년을 다녔지만 `한국병'은 나아지지 않았다.
연세대 정외과에서 교환학생으로 1년을 공부했다.
돌아가 웨스트버지니아주립대 법학박사 학위를 따고 국제변호사
자격증까지 딴 뒤 주저없이 한국으로 다시 왔다.
이 때가 87년초 이다.

그는 한국의 문화가 좋았다.영문판으로 된 `삼국유사'를 읽고 난 뒤에는
한국의 역사에도 깊이 빠져 들었다.
"왕비인" 부산여자를 만나 결혼했고 아 이도 셋이나 낳았다.
한국에서 맛본 또하나의 기쁨.바로 "장모님 사랑"이다.
이 때부터 한국인 친구들이 슬슬 묻기 시작했다.
"왜 귀화하지 않느냐"고. 그때마다 그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난해 5월 독일인 이한우씨가 귀화했을 때는 "씰데없는 짓 했다"며 냉소했었다.
"귀화하 면 한국사람들이 우리-이한우씨를 포함해 자신-를 한국인으로 생각하겠습니까.
귀화한다 해도 한국인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새 다시 돌아온 표준말. 그런데 어느날 문득 자신은 한국을
결코 떠나 지 않으리라는 생각이,어찌 보면 당연한 생각이 새삼 퍼뜩 들었다고 한다.
한 국사람들이 받아주든 받아주지 않든, 어차피 그가 살 땅은 한국이었다.

미국 국적을 포기하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국적을 포 기함으로써 발생할 상황들이 마음을 흩뜨렸다.
한국인이 미국 방문비자 얻기 란 쉽지 않다.더욱이 `생긴 것도 미국인이고
부모도 미국에 있는' 그는 더욱 불리하다.

그는 변호사였다.미 대사관이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을 들어 비자 발급을
거부했을 때 뾰족한 대응논리가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의 부모가 귀화를 만류했던 까닭도 바로 이때문이었다.
귀화하고 얼마 안돼 마침 내 그는 미대사관에 방문비자를 신청하러 가게 됐다.
당시의 심경을 그는 모 일간지에 이렇게 썼다.
[면접하러 가기 전날부터 떨리기 시작했다.
변호사로 일하면서 미국 비자를 얻지 못한 분들을 도와준 사건이 많이 있었다.
`이젠 나도 이런 분들처럼 미 국비자가 안나오면 어짜노? 부모님을 보러 가야 되는데…'
.걱정을 억수로 많 이 했다.…비자는 문제없이 나왔다]

요즘 그는 주말부부 신세다.
부산의 모 한국 로펌에 근무하다가 지난해 10월 지금의 `인터뱅크'사 부사장으로 스카우트됐다.
`인터뱅크'는 미국에 본 사를 둔 투자이민자문회사. 서울 마포에 한국연락사무소가 있다.
IMF한파로 투자 이민이 급감해 마음이 썩 편치 않다.

설이 다가오면서 방송 스케줄이 다시 바빠졌다.
전속 매니저도 있다.
방송 덕분에 돈도 많이 벌었겠다고 하자 그는 "어데에,방송 출연료 억수로
짜데에 "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나마 모 회사의 이동통신 CF로 받은 1천만원 이 `방송으로 번' 가장 큰 목돈이라고.
별명은 `걸리버'.`걸면 걸리니까 걸리버지에'라는 코믹 CF멘트가 히트하면서 붙은 별명이다.
법률회사에 다닐 때의 일이다.
출근하자마자 사장이 부르더니 "도대체 변호사 체면에 어떻게
그런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할 수 있느냐" 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전날의 TV에서 `억수로 웃기는 그'를 본 것이다.
그는 한치도 지지 않고 같이 소리질렀다.
"변호사는 웃기면 왜 안되는 데에" 예나 지금이나 그로서는
한국사람들의 `체면의식'을 이해할 수 없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미국대통령은 영화배우 출신인 레이건전대통령이다.
클린턴대 통령도 가끔 코미디 프로그램에 나와 억수로 웃기지 않는가.
한국사람들이 자신을 변호사가 아닌 코미디언으로 생각해도 상관없다.
정말 견디기 힘든 것은 "니가 한국에 왔으니까 유명해졌지 미국이었으면
어디 (지 금처럼)출세했겠느냐"던 모 코미디언의 말처럼 한국사람들의 속내가 읽혀질 때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은 많다.
하지만 그 외국인들이 다 방송에 나오고 다 유명해진 것은 아니지 않는가.

방송에 나오기 훨씬 이전부터 그는 부산의 스타였다.
`경상도 사투리 쓰는 외국인 시숍'으로 컴퓨터통신 공간에서 먼저 유명해지기 시작해
95년 여름 부산의 지역방송을 `석권'했다.
그리고 지방방송 6개월만에 `중앙방송'에 진 출했다.
그는 `영도 하씨' 시조다.
처음 발을 디뎌 지금까지 살고 있는 부산 영도에 서 따왔다.
할리라는 미국인 성과 발음이 비슷한 데다 최초의 영도하씨라는 뜻에서 이름은 일(一)이라고 지었다.
영도 하씨 시조가 정색을 하고 말한다.
"제발 외국인으로 보지 마이소" [시간으로 본 로버트 할리]

◆변호사 할리 세번째 외국인학교 설립
"한국 생활 14년여 동안 얻은 것을 외국인 자녀들에게 돌려 주고 싶어요. "

전라북도가 지난 27일 외국인학교 설립자로 선정한 국제변호사 로버트 할리(43.한국명 하일).
그는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의 옛 도지사 공관을 개조해
오는 9월 유치원과 초.중등 과정을 포함하는 전북외국인학교를 개교할 예정이다.
1989년 미국인 친구와 함께 부산외국어고를 설립하고 99년 광주외국인학교를
개교한 데 이어 이번이 세번째다.

그는 "한국 학생들은 암기력은 뛰어나지만 창의력은 다소 떨어지는 것 같다" 며
"앞으로 학생들의 창의력을 높이는 데 힘을 쏟겠다" 고 다짐했다.
79년 선교사로 한국에 온 그는 87년 명현숙(38)씨와 결혼했으며 97년 귀화했다.

◆로버트할리 약력
*1962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유바시티 출생 6남3녀중 장남
*79년 유바시티고등학교 졸업 몰몬교 선교사로 한국 파견,18개월간 활동
*81년 브리엄영유니버시티 입학
*82년 연세대 정외과 1년 유학
*84년 브리엄영유니버시티 졸업(정치외교학.한국어 복수전공)
*87년 웨스트버지니아주립대 로스쿨 졸업 국제변호사 자격증 취득 한국 재방문
*87년∼97년 9월 부산에서 변호사 활동
*95년 방송활동 시작
*97년 8월 귀화 10월 미국 투자이민자문회사 `인터뱅크'
전직 에세이 `할리는 가정부 하니는 왕비라에' 출간
*명현숙(明賢淑 35)씨와의 사이에 재성(9 로비) 재욱(6 캐빈) 재익(3 브래 드) 3남
*현 인터뱅크 부사장
*기타 두세가지 것들:.차종-크레도스 . 별명-걸리버(`걸면 걸리니까 걸리버 지에' CF대사 히트로) .
건강관리-매일 헬스

참고자료
뉴스피플 1998년 01월23일 기사
http://www.ldskorea.net

2003.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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