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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희귀 성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생긴성인지알고 싶어요 유래같은것이요^^
동글이 조회수 21,897 작성일2005.07.25

저번주 스타골든벨에서 우리나라의  이름..성에대해 나왔는데요

뇌..계등 이런 희귀 성들은 어떻게 유래된거며 점점 줄고있는이유라든지...

도저희 지을수 없는 이름들도 많은데 자작인지....등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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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성씨는 286개(귀화인 제외), 본관은 4,179개이다.

이중 김(金)·이(李)·박(朴)·최(崔)·정(鄭)·강(姜)·조(趙)·윤(尹)·장(張)·임(林)씨의 10대 성씨가 전체 인구의 64.1%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김씨는 전체 인구의 21.6%에 달해 한국인 5명 가운데 1명이 김씨 성을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비해 인구가 수천명에 불과한 희귀 성씨도 상당수다. 인구 1,000명 미만인 성씨는 112개로 전체 성씨의 39.2%를 차지했다. 인구 100명 미만의 ‘초희귀성’도 42개인 것으로 조사됐다. 강전(岡田)·개(介)·군(君)·누(樓)·망절(網切)·비(丕)·삼(森)·십(십)·어금(魚金)·저(邸)·즙(즙) 등이다.

전체 인원이 10명으로 파악된 망절씨는 경남 양산의 ‘버섯박사’로 유명한 망절일랑씨(62)를 시조로 한다. 지난 1942년 경남 진해에서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망절씨는 68년 부계를 따라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가 70년 우리나라로 귀화했다.

4명이 있다는 즙씨도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시조 즙간부씨(63)가 모친의 고향인 함경도 성진을 본관으로 호적에 등록한 것이다.

희귀 성씨의 유래를 보면 중국에서 귀화한 예가 많다. 안음(安陰)을 본관으로 하는 서문(西門)씨의 시조 서문기는 원의 관리로 고려 공민왕의 비가 된 원의 노국대장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와서 귀화했다. 순천(順天) 도(陶)씨의 시조 도구원 또한 충선왕비였던 원의 계국대장공주를 따라왔다가 귀화했다.

밀양(密陽) 당(唐)씨의 시조 당성은 원 말기에 병란을 피해 고려에 귀화한 뒤 태조 이성계의 창업을 도운 공으로 밀양을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94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집계된 진양(晋陽) 화(化)씨는 시조 화명신이 명나라가 망한 것을 개탄해 경주에 정착하면서 비롯했다. 본래 화(花)씨였으나 조선 성종이 화(化)씨 성을 하사했다고 한다.

옛 왕족의 성씨도 있다. 개성(開城) 내(乃)씨는 조선 개국 초 고려 왕족인 왕씨가 화를 면하기 위해 내씨로 성을 바꾸고 왕씨의 본관인 개성을 본관으로 했다고 전한다. 일설에는 임진강 나루터에서 검문을 하던 군졸이 성씨가 뭐냐고 묻자 “네?”라고 반문한 것이 내씨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밀양(密陽) 대(大)씨의 시조 대중상은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아버지다. 발해가 망하자 후손인 대탁이 자손들을 거느리고 고려에 망명, 지금의 경남 밀양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백제 유민들과 관련한 희귀 성씨도 있다. 목천(木川) 돈(頓)씨는 본래 백제 유민으로 고려에 누차 반기를 들어 태조 왕건의 미움을 사 돼지를 뜻하는 ‘돈(豚)’씨 성이 됐다가 뒤에 복성됐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던 당시 목천 지방의 백제 유민들이 자주 소란을 피워 그 지방 주민들에게 돈(豚)·상(像·코끼리)·우(牛·소)·장(獐·노루) 등 짐승 이름을 성으로 삼게 했다. 이들 성은 후에 돈(頓)·상(尙)·우(于)·장(張)씨로 한자를 바꿨다고 한다.

▲100명 미만 성씨 현황 (괄호안은 인구수)

비(丕·90) 영(榮·86) 개(介·86) 후(候·83) 십(십·82) 뇌(雷·80) 난(欒·80) 춘(椿·77) 수(洙·75) 준(俊·72) 초(肖·70) 운(芸·68) 내(奈·63) 묘(苗·61) 담(譚·57) 장곡(長谷·52) 어금(魚金·51) 강전(岡田·51) 삼(森·49) 저(邸·48) 군(君·46) 초(初·45) 영(影·41) 교(橋·41) 순(順·38) 단(端·34) 후(后·31) 누(樓·24) 돈(敦·21) 소봉(小峰·18) 뇌(賴·12) 망절(網切·10) 원(苑·5) 즙(즙·4) 증(增·3) 증(曾·3) 삼(杉·2) 소(肖·1) 예(乂·1) 빙(氷·1) 우(宇·1) 경(京·1)

※2000년 인구주택 총조사, 통계청
※일부 희귀 성씨의 경우 인구집계가 사실과 다른 경우도 확인되고 있음

2005.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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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2000.11.1일자의 인구 총조사 자료를 2003.1.28 통계청이 집계 발표한 자료이다. 우리나라의 성씨는 286성이고 한국인으로의 귀화 성씨는 442성이다. 전체 가구수는 14,326,224가구에 총인구는 45,985,289명으로 나타났다.

파주염씨는 순위 62번째로 19,807가구에 63,951명이며, 15년간 9,418명이 증가 되었다. 본관은 4,179본으로 집계되었으나, 이는 세거지를 본관으로 표기하여 대폭 증가되었으며, 여기 기록된 본관 중 한자로 된 본관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정통적인 본관으로 구분된다.

인구 순위에 따른 286 성씨의 순서

金 李 朴 崔 鄭 姜 趙 尹 張 林 吳 韓 申 徐 權 黃 安
宋 柳 洪 全 高 文 孫 梁 裵 曺 白 許 南 沈 劉 盧 河
田 丁 郭 成 車 兪 具 禹 朱 任 羅 辛 閔 陳 池 嚴 元
蔡 康 千 楊 孔 玄 方 卞 咸 魯 廉 呂 秋 邊 都 石 愼
蘇 宣 周 薛 房 馬 程 吉 魏 延 表 明 奇 琴 王 潘 玉
陸 秦 印 孟 諸 卓 牟 南 宮 余 蔣 魚 庾 鞠 殷 片 龍
彊 丘 芮 奉 漢 慶 邵 史 昔 夫 皇 甫 賈 卜 天 睦 太
智 邢 皮 桂 錢 甘 陰 杜 晋 董 章 溫 松 景 諸 葛 司
空 扈 夏 賓 鮮 于 燕 菜 于 范 樑 葛 左 路 班 彭 承
公 簡 尙 箕 國 施 西 門 韋 陶 柴 異 胡 采 强 眞 彬
邦 段 西 甄 袁 龐 昌 唐 荀 麻 化 邱 毛 伊 襄 鐘 昇
星 獨 孤 邕 氷 莊 鄒 扁  阿 道 平 大 馮 弓 剛 連 堅
占 興 葉 菊 乃 齊 汝 浪 鳳 海 判 楚 弼 斤 舍 梅 東
方 鎬 頭 米 姚 雍 夜 墨 慈 萬 雲 凡 桓 曲 彈 宗 倉
謝 永 包 葉 水 艾 單 傅 淳 舜 頓 丕 介 榮 候 欒 雷
椿 洙 俊 肖 芸 奈 苗 譚 長 谷 岡 田 魚 金 森 邸 君
初 橋 影 順 端 后 樓 敦 小 峰 賴 網 切 苑 增 曾 杉
京 氷 肖 乂 宇

1985년의 인구조사(이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성씨는 275성이고, 본관은 3349본이다. 100만 명 이상의 본관 성씨는 김해 김씨, 밀양 박씨, 전주 이씨 등 5개에 불과하다. 10만 명 이상의 본관 성씨는 모두 78개로서 여양 진(陳)씨가 10만232명이다. 3만7872명의 삭녕 최(崔)씨가 150위인데, 인구 천 명에 한 명꼴 정도이니 그 다음부터를 희귀 성씨로 분류해도 좋을 것이다. 희귀 성씨는 대개 귀화 성씨가 많지만 여기에는 기자(箕子)를 시조로 모시는 여러 성씨들처럼 후대에 자의적으로 연결한 경우도 적지 않다.

희귀 성씨에는 역사 사건들과 관련있는 성씨들이 있는데 천녕 견씨(川寧 堅氏)가 그런 예다. 왕건이 후백제 견훤의 아들 신검을 토벌할 때 고려 대상(大相)이었던 견권(堅權)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아자개를 시조로 모시는 견씨와 견훤을 시조로 모시는 견씨 등 6개 본관에 1985명이 있다.

희성 중에는 옛 왕족의 성씨도 있다. 개성 내씨(開城 乃氏)는 원래 개성 왕씨였는데, 조선 개국 후 탄압을 피해 도망가던 중 임진강 나루터에서 검문을 하던 군졸이 성씨가 뭐냐고 묻자 당황해서 ‘네?’라고 반문한 것이 내씨로 기록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283명으로 조사되었다. 밀양 대씨(密陽 大氏)는 발해의 국성(國姓)에서 유래했다. 시조 대중상(大仲象)은 사료에 걸걸중상(乞乞仲象)으로 나오는데 그 아들이 대조영(大祚榮)이다. 발해가 망한 후 그 후손이 경남 밀양에 정착했는데 밀양과 대산(김해)의 두 본관에 499명이 있다.

역사적 사건과 관련 있는 귀화 성씨들도 적지 않다. 개성 노씨(開城 路氏)의 시조 노은경(路誾儆)은 원나라 한림 학자로서 고려 공민왕 때 노국대장 공주를 따라와 개성에 정착했는데, 1307명이 조사되었다. 강음 단씨(江陰 段氏)의 시조 단희상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구원병으로 왔다가 귀화해 강음에 정착했는데, 조사에 따르면 720명이다.

●밀양 대씨는 발해서 유래
중국 이외의 다른 지역에 근거한 성씨들도 있다. 사성(賜姓) 김해 김씨가 그런 예인데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 (加藤淸正)의 부장이었던 김충선(金忠善)은 일본 이름이 사야가(沙也可)였다. 귀화 후 선조로부터 김충선이란 이름을 하사받고 진주 목사(晋州 牧使) 장춘점(張春點)의 딸을 아내로 맞아 들였다. 사성 김해 김씨는 우록 김씨(友鹿 金氏)로 불린 적도 있는데, 조사에서는 김해 12만 5277명, 우록 130명이었다.

연안 인씨(延安 印氏)의 시조 인후(印侯)는 ‘후라타이’란 이름의 몽골인이었는데, 아들 인승단(印承旦)이 충목왕 때 연안부원군에 봉해진 것이 본관이 되었다. 조사에 따르면 120명이 있다. 화산 이씨(花山 李氏)는 안남 (安南:베트남)계 왕족인데, 안남국이 트란왕조에 점령되면서 국왕 이천조(李天祚)의 둘째 왕자 이용상(李龍祥)이 고려 고종 13년(1226)에 황해도 옹진군 화산으로 이주하자 고종이 화산군에 봉했다. 조사에 따르면 1131명이 있다.

●차씨와 유씨는 원래 한 집안
차씨의 시조는 신라 애장왕 때 충신이었다. 애장왕의 숙부가 왕과 왕자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자, 좌승상의 벼슬을 버리고 전왕의 원수를 갚으려 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몸을 숨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왕의 체포령을 피해 황해도 구월산에 들어가 성을 유씨(柳氏)로 바꾸고 이름도 색으로만 했다. 차씨와 유씨는 윗대에 이처럼 한 집안이었다.

●승씨(昇氏)는 중국의 황족
명승이란 사람은 고려 공민왕때 중국의 황족(皇族)이었으며, 그의 어머니와 더불어 망명해 왔다. 그는 망국 황족으로서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기 부끄럽다 하여 명자(明字)떼고 승자(昇字)를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우리나라 신부 예복(원삼,족도리)을 보급한 사람으로 전한다.

승씨의 시조는 명승(明昇) 이라는 사람인데, 그는 시조의 유언에 따라 벼슬길에는 일체 나가지 않았다. 승씨에 의하면 명씨와 승씨는 같은 조상이므로 지금까지 혼인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천방지축마골피’는 잘못된 통설

그런데 희귀 성씨에는 잘못된 통설도 적지 않다. 흔히 ‘천방지축마골피’를 천계(賤系)의 대표인 것처럼 말하지만
근거가 없다.

먼저 ‘축씨’와 ‘골씨’는 1985년 조사 때의 275개 성씨 중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천씨는 ‘하늘 천(天)’자와 ‘일천 천(千)’자를 쓰는 두 경우가 있다. 천(天)씨는 조사에 따르면 밀양 등 5개 본관에 1351명이 있는데, 조선 정조 때 천명익이 진사시에 합격한 것으로 봐서 천계는 아니다.
영양 천씨(潁陽 千氏)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구원군으로 온 귀화 성씨로서 중시조 천만리가 자헌대부와 화산군에 책봉 받았으니 이 또한 천계가 아니다.

방씨도 대표격인 온양 방씨(溫陽 方氏)의 경우 중간 시조로 알려진 방운이 고려 성종 때 온수(온양)군(君)에 봉해지자 온양을 본관으로 삼은 것이다.
남양 방씨(南陽 房氏)는 고려 때 벽상공신 삼중대광보국을 역임한 방계홍을 1세 조상으로 하고 있으며, 개성 방씨(開城 龐氏)도 고려 때 원나라 노국대장 공주를 따라 온 원나라 벼슬아치 방두현을 시조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천계는 아니다.
지씨의 대표격인 충주 지씨(忠州 池氏)는 지용수(池龍壽)가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일등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조선 시대 때는 문과 급제자 10명을 배출했다는 점에서 역시 천계가 아니다.
호사가들이 악의적으로 만든 것이 통설이 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힌 사례에 불과하다.

두 글자 이상을 쓰는 복성(複姓) 중에는 남궁(南宮)·독고(獨孤)·사공(司空)·선우(鮮于)·제갈(諸葛)·황보(皇甫)씨 등 비교적 많이 알려진 성씨 외에 강전(岡田)·장곡(長谷)·서문(西門)씨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성씨 들이 있다.
이 중 서문씨를 예로 들면 안음 서문(安陰 西門)씨는 1985년 조사 때 2328명이 조사되었는데, 공민왕 때 노국대장 공주를 따라 들어온 서문기가 안음군에 봉해지면서 본관이 되었다.

발음이 희귀한 성씨로는 궉씨가 있다. 요즘 인라인 스케이팅 궉채이 선수 때문에 유명하다. 조선시대 학자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순창에 궉씨가 있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으며 중국의 성이라고도 한다’는 기록이 있고, 실학자 이덕무의 앙엽기(葉記)에는 ‘선산에 궉씨촌이 있는데 선비가 많다’는 기록이 있다. 조사에 따르면 선산, 순창, 청주의 세 본관과 243명이 있다.

인구가 100명 이하인 극희귀 성씨들도 적지 않다. 사(謝)씨는 진주와 한산의 두 본관이 있는데, 1960년에 19명이 있었으나 1985년에는 4가구에 30명으로 늘었다. 삼가 삼(三嘉 森)씨는 1930년 국세조사 때는 나타나지 않은 성씨인데 1985년에는 85명이 확인되었다.
연풍, 전주, 한양의 세 본관에 66명이 있는 애(艾)씨는 1930년 국세조사 때도 있던 성씨이다. 조사 때 80명이 확인된 파평 옹씨(坡平 雍氏)는 원래 순창 옹(邕)씨였는데 1908년 민적 기재 때 옹(雍)씨로 잘못 기재되었다고 전한다.

탄(彈)씨는 조사에 따르면 진주, 해주의 두 본관에 94명이 있는데, 증보문헌비고 등에는 나타나지 않다가 1930 년도 국세조사 때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구한 말 무관학교 교관 중에 탄원기(彈元基)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전부터 실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희천 편(扁)씨는 조사에 따르면 68명이 있는데, 1930년 국세조사 때 처음 나타난 성씨로 충북 옥천에 1가구가 살고 있었다.

그 외에 51명의 연안 단(單)씨와 36명의 한산 단(端)씨 등이 있다. 조사 때 정확히 100명이었던 교동 뇌씨(喬桐 雷氏)는 강화도 교동이 연산군을 비롯해 여러 선비들의 귀양지였다는 점에서 귀양 갔던 선비의 후예로 추측된다.


●영도 하씨, 로버트 할리 귀화로 생겨

최근에 생긴 희귀 귀화 성씨에는 영도 하씨(影島 河氏)가 있다. 미국 태생의 국제변호사이자 사업가인 로버트 할리가 1997년 귀화하면서 성명을 하일로 정했는데, 한국인 부인에게서 낳은 3명의 자녀가 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생소한 성씨들이 적지 않다. 우리 사회는 ‘우리’와 다른 ‘소수’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전체주의적 사고의 잔존 때문에 어떤 희귀 성씨들은 사회 생활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가문에 자부심을 갖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지만 다수인 가문이 소수인 가문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거나 소수를 이상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전근대적 의식의 표출일 뿐이며 다양성을 중시하는 21세기에 역행하는 처사에 불과할 것이다.


●시조가 된 귀화인들

한국인으로 귀화하면서 새로 만들어진 외국인의 성(姓)이 토착 한국인 성(285개)보다 1.5배 많은 442개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필리핀계 귀화 성이 가장 많아 골라낙콘치타, 귈랑로즈 등 145개였다. 그 다음이 일본계로 고전(古田) 길강(吉岡) 길성(吉省) 등 139개다. 중국계는 노(蘆) 무(武) 악(岳) 등 83개였다.
이 밖에 베트남계(누그엔티수안 등), 태국계(남캉캉마 등), 방글라데시계(루비악달 등)도 각각 10∼30개 호적에 올라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국인이 한국으로 귀화해 특이한 성을 가지게 된 계기는 96.2%가 결혼이었으며 이 가운데 여자가 87.3%를 차지했다.
 

200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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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노비제도"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지요.

 

그런 노비들은 본래 족보나 이름이 따로 없었습니다.

 

누가 부모인지도 모르고 살다가 이름없이 사라져 갔지요.

 

그러다가 노비제도가 철폐되면서

 

급작스럽게 그들만을 위한 족보가 만들어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해당 노비들을 거느리던 양반들이 성을 지어 주거나

 

고을 사또들이 성을 지어 주면서

 

살던 고장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은 알고 있으나, 근원을 모르는 무리들이

 

따라 정착을 하면서 정착되는 곳을 성씨로 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천민들이 많았던 시절이 있는데

 

이런 천민들에게도 성씨가 허락되지 않다가

 

개화되면서 성씨가 허락되기 시작했는데

 

외국처럼 자신이 하던 일이 곧 그들의 성씨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외에는

 

외국에서 건너온 성씨들이 우리나라에 근원을 두고 퍼져나가기 시작했는데

 

그런 성씨들도 적지 않습니다.

 

특히 2자리 성씨들은 전부 외국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성씨유래가 있는데

 

설화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다 열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2005.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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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w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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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후기 귀족들은 부패해져가고 왕의 권위가 약해졌을 때 중하위 장수들이 반란을 일으켜 후삼국이 생겼습니다. 견휜도 신라 장수였지만 신라 귀족과 왕의 부패를 보다 못하여서 반란을 일으켜 후백제를 세웠고 궁예가 세운 후고구려도 궁예가 반란 세력으로 들어가 그 반란세력에 머물다 자신의 세력으로 흡수하고 나라를 세운 것 입니다. 신라 왕족과 귀족은 매일 사치를 일삼았고 백성들의 미움을 독차지 한 탓에 통일신라는 세 개의 나라로 갈라진것이죠

2008.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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