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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풍천임씨 任
92en**** 조회수 18,901 작성일2008.01.08

저는 풍천임씨 사람입니다. 우리 풍천임씨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1. 풍천임의 유래

 - 임온부터의 유래말고, 그 전부터의 유래 (정말로, 그가 중국 황제 헌원의 맏아들이었나요?)

 - 본좌가 맡길임을 분석해본결과 사람인(人) 과 북방, 아홉째 천간 임(壬) 나뉘어 졌는데, 도대채 아홉째 천간 임이 무엇이고, 무엇을 뜻하는지를... 그리고 맡길임의 한자가 앞에서 도 말했듯이 북쪽의 사람이라고 해석되는데, 그러면, 임씨가 북방(몽골, 한국)에서 온것인가요? *본좌가 한국사에 관심이 많은데,, 나의 조상의 기원이 북방인이라는 것을 찾고 싶어요.

 - 임씨들의 행적(쉬운 한국말로 부탁. * 미국에 살아서, 어려운 한국말은 이해 못함.)

 

2. 제가 몇대손인가요?

 - 도대체 몇대손, 무슨 파 가 무슨소리인지?

 - 본인 이름은 성은 임任 족보이름은 순淳이고 그냥 이름(족보이름이 아닌 나의 생활이름)은 에녹(Enoch)입니다. 제가 몇대손이고, 저의 직계조상중에는 누가 있는지 알켜주세요.

 

3. 任 (첫번째로 몰어보는 것과 비슷한 질문, 첫질문의 답을 더욱더 자세하게 답해주세요.)

 - 저가 저의 주위에 있는 맡길임사람들을 보니깐, 남방계(중국 한족)의 특색보다는 북방계(몽골, 한국)의 특색이 강하던데.. 예를 들어, 상꺼풀이 없이 작고 날카롭게 찢어진 눈(고구려전통적인 눈모양), 큰 키와 등치(북방인들에게서 나오는 특색), 넓지 않은 이마(북방계), 고구마형얼굴(고구려형 얼굴), 높은 콧날(북방계의 증거, 하지만 본좌의 코는 높지는 않음), 같은 북방계의 특색을 가졌읍니다. 남방계의 특색은 궂이 뽑으라면, 짙은 눈썹과 두툼한 입술입니다. 이것이 맡길임씨가 북방인의 후예라는 증거 아닙니까? 듣기로는 임씨의 중국인설이 사실이 아니라는데.. 그러면 임온시조님이 사실은 북쪽사람인데, 중국에 귀하한 분입니까? 많은 북방인들이 중국으로 귀하해서 성씨를 하사받았다고 들었는데... 그러면, 임온은 '북쪽사람'이라는 뜻에서 맡길임任을 하사받은것입니까?

 - 중국의 소홍부 자계현이 무엇이고, 또 중국의 어느 시대때 있었던 것입니까? 자세히, 어떤 종류의 지명 혹은 벼슬입니까?

- 혹시 풍천임씨들중 임순(혹은 임에녹)의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들어보지 않으셧다면, 기억하여 주십쇼, 저의 이름을...

 

 

저는 저의 성씨를 사랑합니다. 듣기로는 아시아의 성씨들중 가장 오래된 성씨중 하나라는 데요. 저는 저가 풍천임씨들을 보고 느꼈던것은 풍천임이 북방민족의 후예이고, 임온은 북방계에서 귀하한 분이일수있다고도 가정합니다. 뭐, 그렇지않다면 어쩔수 없지만, 저는 고구려나 고조선을 좋아하는 학생입니다. 저가 ,꼭, 그 나라에 살던 사람의 후예는 아니더라도, 몽골의 거란이나, 흉노, 선비족들과 같은 북방계와 연관있는 사람들의 후손이었으면 합니다. 하지만 저가 진짜 100%중국 한족의 후예라 하더라도, 저는 저의 성씨를 끝까지 사랑할것입니다.

내공 팍팍 거니깐, 자세하고, 쉬운 한국말로 답변 부탁들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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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안녕하세요 ^^

미국에 살고 계시고, 또 저도 어려운 한자는 잘 모르니 ^^;;

쉽게 설명드릴게요.

 

 

헌원의 맏아들이었다는 설

- 헌원은 중국 최초의 황제라고 알려져있는데요, 사마천의 '사기'에서 보면 헌원은 치우천왕과 싸워서 이겼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신화 속에 존재하는 제왕이라서... 확답 드리기 애매합니다.

우리나라에는 '단군신화' 가 있는 것 처럼, 중국에는 치우천왕신화, 삼황오제전설 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 추운 지방의 북쪽 壬 사람 人 이라는 뜻이 가장 잘 맞을 듯 합니다. 북방 계열의 대표적인 민족이 몽골족이지요.

임온 부원군은 고려 충렬왕의 왕비인 원나라(몽골)의 제국대장공주가 우리나라로 올 때, 함께 왔던 왕실 사람으로 추정됩니다. '풍천' 임 이라는 성도 그 때 하사받은 거 같구요.. (고려는 그 당시 원의 부마국이었기 때문에 원나라 공주와 결혼해야 했습니다. )

부원군이라는 칭호는 조선 시대에, 왕의 장인이나 공신에게 하사하는 작호인데, 이 때도 비슷한 뜻으로 쓰였을 것입니다.

 

행적

- 유명한 사람이 누가 있었나, 하는 질문을 하신 거 같은데...

임온의 자손들은 대부분 고위 관직에 있었다고 합니다.

참판, 판서, 관찰사, 도승지 등 ....  (한국사에 관심 많으시니까 대충 어느 정도 아시리라 생각해요 ^^)

그리고 임광재 라는 분은 조선 예종의 사위, 임숭재 라는 분은 성종의 사위였다고 하네요.

역사책에 나오는 유명한 인물은 조선시대의 승려, 사명당입니다. 정말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지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정스님(법명)은 의병을 일으켜서 나라를 구하는 데 앞장서셨지요.

또한, 정유재란이 끝난 후에 왕명으로 일본에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강화를 맺고,

전쟁 때 끌려갔던 포로  3,500 여 명을 데리고 돌아오십니다. (왜란은 도자기전쟁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엄청난 숫자의 도자기 기술자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다고 합니다ㅠㅠ)

 

구한 말 의병장 (을사.병오 의병/ 정미의병)이었던 임성기 님

황소그림으로 유명한 이중섭 화백의 스승 임용련 선생님 (요즘 중 1 국어 교과서에 나온다고 함. ;;)

그리고... 중앙대학교를 설립한 임영신 선생님께서도 풍천 임씨 라고 합니다.

 

 

 

2.

족보에는 항렬 이라는 게 있지요.

쉽게 생각하세요. '대를 잇는다' 라는 말 아시죠?

질문자님께서 몇 번째 대를 잇고 계신지, 그걸 몇 대손.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무슨 파는 .... 일단 임온부원군이 우리의 시조이고... 그가 낳은 자식들이 있잖아요..

거기서 파가 갈린다는 겁니다. 다른 성씨와 혼인을 하니까, 핏줄이 조금 달라진다는 의미에서 파를 나눈 것 같습니다.

충숙왕 때 삼사판사 임자송(子松)과 민부전서 임자순(子順)의 두 갈래로 크게 나뉜다고 하는데, 이건 너무 어려워서 패스-_-

 

 - 항렬표에 따르면 질문자님께서는 28대손 입니다.

혹시 아버님 성함에 재 자를 쓰시고, 조부 존함에 호 자를 쓰시지 않나요?

그리고 질문자님이 2세를 낳으셔서 돌림자를 쓰신다면, 빈 자 돌림을 쓰는 게 항렬상 맞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저희 미술선생님이 풍천 임씨 29대손이셨는데 빈 자 돌림 쓰시더라구요 . 제가 선생님보다 항렬이 위라고 저한테 장난으로 ... 가끔 경어를 쓰시던 기억이;;; ㅋㅋㅋㅋㅋ)

 

 

3. 任

- 위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임온은 우리나라로 귀화한 몽골족이고, 任 이라는 성은 북쪽(몽골)에서 왔다는 뜻으로 지어진 것 같습니다.  제국대장공주(쿠두루칼리미쉬)는 쿠빌라이 칸(칭기스 칸의 손자) 의 딸 입니다.  그런 권력자와 함께 했던 임온 부원군이 중국으로 귀화한 몽골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몽골에서는 그들 고유의 성을 쓰다가 고려에 와서 우리나라 식으로 성씨와 이름을 바꾼 것 같습니다. 

任이라는 성씨를 계속 써왔고, 고려에 와서 우리나라 식으로 한자 독음을 한 이름을 썼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쿠두루칼리미쉬=忽都魯揭迷述矢(홀도로계리미실) 이런 것 처럼요..

 

국제변호사이자 방송인인 로버트 할리씨도 우리 나라로 귀화 하시면서 하 일 씨로 개명하셨지요. 처음 한국에 와서 산 곳이 부산 영도라서 '영도 하씨' 라고 본인이 스스로 본관을 지었다고 합니다. 하일 씨가 영도 하씨의 시조가 되는 것이지요.

 

 

 

 

 

-생김새-

솔직히 저는, 질문자님께서 말씀하신 북방인의 특징으로 꼽은 얼굴 생김새의 전형입니다.

쌍꺼풀 없이 옆으로 긴 눈, 좁은 이마, 높은 코. 또한, 저희 가족들, 기골이 장대합니다;;;; (하지만 저는 키가 작고, 저희 언니와 아빠는 키가 크지만 쌍꺼풀 있는 큰 눈에 넓은 이마-_-;)

외모는 자라온 지역이나 환경에 따라 달라집니다. 쌍둥이도 성인이 되면 많이 닮았을 뿐이지, 어렸을 때 처럼 똑같다거나, 그런 게 없어지는 것 처럼요. 그러나 본판(?)은 좀 남아있겠지요.

 

 

 - 중국의 소홍부 자계현? (지명입니다. 阿Q正傳을 쓴 루쉰도 절강성 소흥부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당나라 때, 절동, 절서라고 있었던 것을 원나라 때 절강행성으로 바꾸어 불렀습니다.

현재, 중국 절강성 자계시 장기진 임가계촌이란곳에 임씨 집성촌이 있다고 합니다.

미국식으로 주소 어떻게 쓰는지 정확히는 모르는데,

 

임가계촌

장기진

자계시 절강성

중국

 

굳이 표현하자면 이정도?

 

 

............

 

누가 조상이든 뭐가 중요합니까

 

우리 조상이 훌륭한 사람이라면, 누 되지 않도록 본인도 열심히 살아서, 훌륭한 사람이 되면 되는 거고,

혹, 과거에 죄를 지은 사람이 조상이라도, 그 죄는 후손이 물려받지 말고, 오히려 더 노력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이름을 떨치면 되는거죠 ^^

 

 

 

 

2008.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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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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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질문에 답변을 드립니다.

 

1. 풍천임의 유래

 - 임온부터의 유래말고, 그 전부터의 유래 (정말로, 그가 중국 황제 헌원의 맏아들이었나요?)

 - 본좌가 맡길임을 분석해본결과 사람인(人) 과 북방, 아홉째 천간 임(壬) 나뉘어 졌는데, 도대채 아홉째 천간 임이 무엇이고, 무엇을 뜻하는지를... 그리고 맡길임의 한자가 앞에서 도 말했듯이 북쪽의 사람이라고 해석되는데, 그러면, 임씨가 북방(몽골, 한국)에서 온것인가요? *본좌가 한국사에 관심이 많은데,, 나의 조상의 기원이 북방인이라는 것을 찾고 싶어요.

 - 임씨들의 행적(쉬운 한국말로 부탁. * 미국에 살아서, 어려운 한국말은 이해 못함.)

<BASE target=_son>

 
풍천 임씨 (豊川任氏)   
 
 1> 시조 :  임 온[任 溫]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풍천(豊川)은 황해도에 있었던 옛 지명으로, 고구려 때 구을 또는  굴천현이라 불리웠던 것을 고려초에  풍주로 고쳤으며  조선 태종이 풍천으로 고쳤습니다.  
그후 은율현과 합하여 풍율군으로 개칭하였다가  1895년(고종 32) 송화군으로 합하였고,
     별칭으로 서하(西河)라고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풍천임씨(豊川任氏)의 시조는 본래 중국 소흥부 자계현 사람으로 고려 때 은자광록대부에 오른 님의 말씀대로 임온(任溫)입니다.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온(溫)은 제국대장공주를 배종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풍천에 사적(賜籍)된 것으로 전하는데 이로 인해 후손들은 풍천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습니다. 
     
 온(溫)의 6세손 인 [주]가 고려 충렬왕때 경상도 안찰사를 거쳐 조봉대부에 올라 감문위 대 장군을 역임하였는데,  풍천 임씨는  그의 아들 대에 와서 백파(伯派 : 자송)와  중파(仲派 : 자순)로 크게 나뉘며  두 파에서 고루 인물을 배출하여 가문을 중흥시켰습니다.  
     자송(子松)은 조적의 난때 공을세워 정난공신에 올라서 서하부원군에 봉해졌고,  
     자순(子順)은 통헌대부로서 민부전서를 지내고 개성부사를 역임하였습니다.
     자송의 6세손인 원준(元濬)은 당대의 명관으로 경사(經史)에 밝고 시와 문장이 뛰어나 명성을 얻었으며, 좌리공신에 책록되고 서하군에 봉해진 후 좌찬성에 일으렀습니다.
     그의 아들 사홍(士洪)은  한어에 정통하고 해서에 뛰어났으며, 두아들 광재(光載)와 숭재(崇載)가      각각 조선의 예종과 성종의 부마가 되었다.  또한  열(說)은 자송의 8세손으로  대사간, 대사헌에 이어 한성부판윤과  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습니다.
     자순(子順)의 7세손인 유겸(由謙)은 중종때 대사헌과  한성부 판윤을 거쳐 형조,공조판서를 지냈는데  이들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어 풍천임씨의 2대 산맥을 이루고 있습니다.
     유겸의  아둘 추(樞), 권(權), 병(柄) 삼형제가 모두 뛰어났습니다.
     맏아들 추는 대사간,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호조참판에 이르렀고,
     권(權)은 관찰사 및 예조판서가 되고  지춘추관사를 역임한 뒤 촤참찬에  이르렀습니다
     막내인 병(柄)도 홍문관 박사 및 이조좌랑을 지냈으며 글씨에 탁월한 재질을 보였습니다
     추의 아들로 형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된  호신(虎臣)과, 형조 참의에 이른 보신(輔臣), 현감 주(柱)의 아들로 강원도 관찰사와 전주부윤을 지낸 내신( 臣),      몽신(夢臣)의 아들로  임진왜란때 공을세운 탁(鐸)과 현(鉉) 등이 풍천임씨 가문을 빛냈습니다.
     
     또한 풍천임씨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승려로서 국가가 위기에 봉착하자 분연히 일어나 왜병에 대항하여  전공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인데, 그는 자순의 6세손으로
     본명은 응규(應奎), 법명은 유정(惟政)이며  형조판서를 지낸 수성(守成)의 둘째 아들입니다.
 
     이외에도 재사(才士)로 이름난 [광]은 감찰 익신(翊臣)의 아들이며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 형조 참판, 관찰사를 거쳐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고, 목동가(牧童歌)를 지은 유후(有後)도  예조 참판, 관찰사,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근세의 명필로 형조참판, 도승지를 지낸 수적(守迪),
     대사간, 대사성을 지내고 고금의 시가(詩歌)에 통달하였고 글씨에도 능하였던 그의 아들 정(挺), 그리고  조선조 성리학의 6대가 중  한사람으로 꼽히는 성주(聖周)와, 이(理)와 기(氣)의 이원론(二元論)을 배격하고 기를 일원적(一元的) 관념으로 통일하여 주기설(主氣說)을 확립한  정주(靖周)는 형제 학자로서 당대에는 물론 후세에 까지 이름을 떨쳐 명문인 풍천임씨를 더욱 유명하게 하였습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풍천임씨(豊川任氏)는 남한에 총 24,682 가구,      103,10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3> 집성촌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운산리
충남 보령군 미산면 근전리, 봉성리
     강원도 철원군 갈말면 내대리, 상사리
충북 옥천군 동이면 세산리
     강원도 평강군 남면 정연리
경북 경주시 남산동
     강원도 철원군 동송면 대위리
 

 

2. 제가 몇대손인가요?

 - 도대체 몇대손, 무슨 파 가 무슨소리인지?

 - 본인 이름은 성은 임任 족보이름은 순淳이고 그냥 이름(족보이름이 아닌 나의 생활이름)은 에녹(Enoch)입니다. 제가 몇대손이고, 저의 직계조상중에는 누가 있는지 알켜주세요.

답변 :

항렬표]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준(準)


호(鎬)


재(宰)


공(公)
순(淳)

빈(彬)
식(植)
동(東)
혁(赫)
희(熙)
열(烈)
중(中)
균(均)
세(世)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종(鍾)
선(善)
진(鎭)
원(源)
수(洙)
한(漢)
계(桂)
상(相)
구(九)
병(炳)
헌(憲)
환(煥)
효(孝)
범(範)
규(圭)
현(鉉)
진(鎭)
옥(鈺)
연(淵)
우(雨)

39세
40세
 
 
 
 
 
근(根)
열(烈)
 
 
 
 
 

3항은 적지 않겠습니다.(1항과 동일)

 

끝으로 상세히 알고 싶으시면 부친이 사시든 동네를 방문하셔서 어른들에게 말씀을 듣고 찾아 보시면 정확히 나옵니다.

 

끝으로 님의 건강과 가족의 건강 그리고 오복이 가득하시기를 두 손 모아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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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mfh****
평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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豊川 의 연혁및정착
大陸的 氣風을 지닌 우리豊川任門은 오랜옛날 격변기 中國황제(軒皇 : 太古天皇氏-諸候--將相--賢哲~)의 世孫(軒皇系 任氏)로서 駕洛國시대 任强首傳과 신라시대 경주불국사의 경상先生案등에서 한반도흔적이 미미하게 발현됐으나 역사 문헌의 세세한 기록을 알수없은터에 그나마 고려시대의 기록이 전하므로 그내용인즉 癸酉 단기 4206年 三月 기호 근서(基鎬 謹序)-癸酉譜序 에 의하면 [諱]; 溫(字)할아버지 께서 중원 절강성 사오싱부(紹興府) 자계현(慈溪縣)에서 勝國인 高麗 원종(元宗)三五九七 ~ 三六ㅇ七 때에 벼슬이 贈左僕射(증좌복야)이시고 東國에 오신흔적이 氏族文獻으로 보아 이때 비로서 安着된것 같습니다.
그이후 始祖任의 증손(曾孫) 諱;도(徒:檢校大將軍)公에 이르러서는 三男을 두셨는데,
첫째는- 豊海君 諱; 천유(天裕)公인데 풍천(豊川))으로 본관(本貫)을 삼았으며,
豊川;元宗 都護府인豊州[현재;黃海道 豊川(松禾郡=西河)]
둘째는- 谷城君 諱; 천록(天祿)公인데 곡성(谷城)으로써 본관(本貫)을 삼았으며,
셋째는-平章事 諱; 천을(天乙)公인데 장흥(長興)으로써 본관을 삼아 이 시대에 分貫이되었다는,
記祿이 있어나 長興任에 대해서는 審度있는硏究을 할필요가 있다生覺합니다.
여기서는 편의상 풍천을 本貫을 삼으신 諱;天裕公[豊海君]내력을 편집코져합니다.
[豊川박달산 豊海君의墓-陶谷墓山 事蹟碑文: 『顯父考 任徒-顯모비安氏,孝子奉直郞이라는 3줄 15자의 글이 새겨진碑文;-徒(四世孫=검교대장군)公께 每年시제을올린記錄:』 ]
그후 六世孫 澍公 (墓:풍천전석산하- 매년 음9월 13일에 향사) 께서1275년 고려충렬왕1년 按察使와 御使大夫 로서 元의 齊國大長公主를 陪從하셨으며, 다음 世系를 이으신 七世孫 [諱] 子자松자公께서는 충숙왕때 趙敵의亂을 진압하신 업적으로 靖難功臣에 오르시여 侍中判三司事및 西河府院君에 奉해졌으며, 중파(典書공파)를 창시한 동생 [諱]子자順자公께서는 通憲大夫와 民部典書지내시고, 전서공파는 다시 珦公(정승공파)또 瑨公(사윤공파로 世系가 나뉘면서 수많은 벼슬을 한 청렴한 名門世族으로 자리매김 하였습니다.
朝鮮祖에 입향해서는 초기에는 고려의 忠臣들과 生死苦樂을 같이하여 많은 人才들이 희생됐으며,세종조 이후 12世孫 [諱];元자濬자公께서 식년시 文科에 장원급제 이후 文,武科에 고루등용되시어 정승,판서,관찰사,암행어사,청백리등 훌륭한 젊은人才(忠烈公1,문과급제170, 상신2,호당6,청백리2,공신1장신3)들이 배출되어 성종때에는 實錄을 편찬하는등 文學에심혈을 기울였으며, 왕실의 대신으로 明나라을 3차례나 訪問하시여 朝鮮國을 널리 알리는데 貢獻하시였다.
그러나 연산군이 사저연회때 벽에걸린 熙(字)載(字) 물암公(장사랑공致和의 父)할아버지의 병풍詩 한 귀절 (병풍-堯舜을 본받 으면 저절로 泰平한 것인데, 진시황은 무슨 일로 百性을 괴롭혔는가? 災殃이 집안에서 일어날 줄을 모르고, 공연히 오랑캐를 막으려고 萬里長城을 쌓았구나) ...
이 暴君을 誹謗한것이발각되어 어려운 고초을 겪어으며, 中宗 反政때는 黨派와 權力의 中心이 이완되는 過程을 겪어면서 四方으로 흩어지게되었다,
그이후 朝鮮王室의 迫害에도 개이치않고 壬辰亂때는 倭兵을 무찌르는 義兵長은 물론 승려의몸으로 僧兵을 일르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사명당 聖雄-應자奎자(12世孫 . 정승공현손)忠烈公께서는 이나라에 길이길이 빛날것이다 ,
이때왕(선조)은 사명당 할아버님을 忠烈公으로 奉하고 경남밀양표충사[국보75호와『포로송환3500명문서』등 200여점유품]의 표충비각[땀비], 표충각[영정], 해인사홍제암影堂, 경북팔공산동화사[大將眞影유품],직지사의표충각[성보문화재],묘향산의주충사및보현사, 강원고성건봉사,등 전국사찰에 公의 거룩한뜻을 모시게하였다 ,특이한 것은
요즘에 이르러서도 世上이 어지러울때는 公의비문에 식은 땀이흐르고 있는데 무슨까닭일까!,왜란후 풍천임문 先祖任들께서는 朝廷의 黨爭의 弊害를 개탄하고 경기포천군 창수-운산, 충남保寧郡 珠山면(金岩,주야,황율里),嵋山면(늑전,鳳城里),웅천,전북(김제 성덕면 대목리),충북沃川郡(동이-세산),강원 평강군(남면-정연), 강원철원(갈말-내대,상사),강원철원(동송-대위),경남의령,경북경주-남산동 등 방방곡곡 깊은 산속에 산수를 벗하며,草野에서 學文에진력하여 9代(문정공;說자~守자幹자)가 연달아 文科에 급제하여 世人의 부러움을 받았으나,벼슬보다는 後學들을 訓育하는데 心血을 더 기울렸으며,그중 叔자 英자公께서는 文章과 經書에 밝았고 ,貞簡公;虎자臣자 와 輔자臣자公 께서는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理와氣을 배격하고 主氣說을 확립한 靖자周자公께서는 人性과天理을 硏究하는 性理學의 名學子이며 , 喜자 發자 公께서는 孝行이 특출했으며
,남원부사이신 任 鉉(字)公께선 임란때 춘천에서 왜병 400여명을 죽이는 전공을 세웠으며, 1597년 정유재란땐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과 함께 남원성(城)을 수비하시였는데 명나라 장수 양원은 도중에 도망하고 홀로 계속 분전하시다가 전사하시였다,이얼마나 거룩하신가! 조정에는 간신배들이 외침중에도 붕당정치와 당파싸움으로 소일하다가 나라가 망할판인데,
우리 풍천인 선조님께서는 작은것을 버리고 큰것을 취하셨습니다, 또한 任 潚(字)公꼐선 1647년 진해현감시절 宮家로부터 진해백성을 구제하시고 진해송덕비로 유명하며,任 義(字)伯(字)公께선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1654년(효종 5년) 부사(동래府使)의 백성을 안위을 위한 거룩한 뜻을기린 善政碑(동래구 온천동 산12-3 금강공원)가 있습니다 그외에도 모두 기록치못하나 文자 鎬자 公께서는 약간20세 나이로 久韓末 義兵에 참가하여 왜적토벌에 貢을 세우고 왜군주둔소를 습격하다 체포되어 대구에서 순국했으며,晉州牧使 英자準자할아버지의 曾孫인 海자淳자(28世孫:필자의先親) 또한 6.25동란때 강원고성지구 戰鬪에서 장렬하게 戰死하시여 父母님과 온家族에게 가슴에 恨 을 심어놓고 약간20대의 꿈많은 젊은 포부를 접어야했다, 나라가 어려울때는 國亂으로부터 나라를 求하고, 平和시에는 敎育과 학문에 專念하는 學子의 名家門 으로 中央大學校와 淑明女大 를 설립하여 후학에게 남겼다. 豊川任門 後孫들이여! 위대한 先祖님들의 거룩한 뜻을 이어받아 몸가짐을 바르게 하여 名世族의 家門을 길이 保全하도록하자.

豊川任氏世譜序
吾任之於東國에 其來也遠而乃至源 分爲派하고

宗分爲支하니 派分支別이

析居四方者可謂其麗不億이라 其間冠兎之赫赫과

道德節義之炳炳으로磊落相望하야

逮至于今에 蕃然昌大者난 此其源遠而流長하고

根深而枝達者非耶아嗚呼라一自丁巳大同修譜以後로

到此百六十餘裸之久風塵南北에 未暇修譜之意라可不懼哉라

若愈久以無徵側宗族之誼를於何可購이리요~中略

派名 해설
⊙부원군파, 백파 -諱; 子(字)松(字)公 (西河府院君,侍中 判三司)-現在 서울파를 비롯200여 분파가 있으며 많은學士와
律士를 배출중~
⊙전서공파, 중파 - 지명으로 부르지 않고 중파와 전서공파를 함께 사용함.
●政丞公派유래-『子順公』- 珦공의 후손을 정승공파라고 하며,
일명 藍浦派라고도 합니다. 남포는 옛날 藍浦縣에 정승공께서 고려말 정착하셨기 때문에 붙인 이름 이며
지금도 남포라는 이름이 남아 보령시 남포면이 있습니다.
(옛 남포현이 지금은 藍浦面, 熊川邑, 珠山面, 嵋山面, 聖州面에 해당된다)
●정승공파(남포파)분파- 14세손에 이르러 3개파 外城派, 內城派, 富堂派로 나뉘는데.외성과 내성은 웅천읍의 城洞里중 외성과 내성이고 부당은 웅천읍 水芙里의 부근당이라는 마을의 옛이름입니다.
☞☜ -15세손에서 2개파 篁栗派와 夫餘派로 나뉘며,. 황율은 주산면 篁栗里이고,
부여는 충남 부여군 즉 백제의 고도이지요.
-17세손에서 마지막으로 2개파로 나뉘는데 艮峙派,와 勒田派이고.
간치는 주산면 金岩里의 중심 되는 마을이고 늑전은 미산면 勒田里입니다.
●사윤공파- 子順公- 瑨공의 후손을 사윤공파라고 하며,아산지역에(조선조) 정착하신 동기가 되어 牙山派라고 정한 것 같습니다, 牙山의 現지명은 충남 아산시며, 온양온천이 있는 곳이지요.

※ -9世孫에서 나뉜 孝崑공의 후손
⊙사명당=諱; 응(字)규(字)公내력;정숭공 珦의 현손으로
曾祖父 任孝(字)昆(字)公께서 文科에 급제하시여 掌樂院正의 관직을 얻어 밀양에 부임하신 것이 밀양에 世界을 이룬
동기가 되었으며, 또한충렬공 應奎公께서 출생하신 터전이 형성된것임.
현재 형 應기 의 후손들이 울산에 많이 세거하고있음

☞☜1959년에 발간한 이 豊川任氏世輔에 의하면 15세손에서 일제히 派를 분류 명기하였는데
分派수가 부원군파,전서공파,를 비롯하여 194개파로 되어있으며
특히 학생공파만 73개파이고 이 밖에도 중복되는 파명이 상당수 차지하여 이 파명으로는 구분하기가 난이함.
<▣分派;정착地名과 관직에 따라 派名이분류됨▣>

2008.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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