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의 본질

김민문정 | 한국여성민우회 대표

안 좋은 일은 늘 겹쳐서 온다고 했던가. 정말 그 해는 나에게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지금은 너무 오래전 일들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마음이 지옥이었다는 느낌은 그대로 남아있다. 아이를 출산하자마자 신혼집이 경매에 넘어간다는 안내장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음주운전에 보험도 들어있지 않은 차였다. 부상이 심했고 수술이 잘못되어 꽤 긴 시간 병원생활을 했다. 한 돌도 안된 아이를 들쳐 업고 버스로 병원을 오가며 아이와 남편을 돌봐야 했고 무보험차라 책임보험밖에 보상이 되지 않아 병원비까지 감당해야 했다. 몸으로 일하던 사람인데 퇴원할 때 의사는 ‘노동 상실률이 높아 앞으로는 힘든 일은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NGO 발언대]낙태죄의 본질

당장 집은 경매로 넘어가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고 남편은 일을 할 수 없으며, 전세 빚에 병원비 때문에 생긴 빚까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말 너무너무 막막했다. 한 돌이 겨우 지난 어린아이를 회복 중인 남편에게 맡기고 내가 직접 생계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임신까지. 너무나 절망적이었다.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몬 우리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고 미웠다. 우리 부부에겐 정말 선택지가 없었다. 그나마 셋이라도 살아남느냐, 아니면 넷이 같이 죽느냐. 당시에는 병원에서 인공임신중절수술을 어려움 없이 해주던 시기였기에 ‘그나마 셋이라도 살아남겠다’는 결정을 우리는 다행히 완수할 수 있었고 또 다른 위험을 없애고 셋의 안정적인 미래 설계를 위해 정관수술을 받았다.

만일 당시에 병원에서 불법이라고 수술을 해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우리는 다른 선택을 했을까? 아니다. 넷의 미래가 너무나 뻔히 보였다. 하나의 불행이라도 줄여야 했고 셋은 살아남아야 했다. 더 많은 비용과 위험을 감수했어야 하더라도 결국 똑같은 결정을 했을 것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1990년대 기혼 여성 2명 중 1명은 임신중단을 결정했고 중단한 여성 10명 중 7명은 ‘원하지 않는 자녀’이기 때문이었다. 자녀 수가 많을수록 낙태 횟수는 증가했고 딸만 있는 경우가 아들만 있는 경우보다 3~4배 높았다.

낙태는 본질적으로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선택 간 권리 경합의 문제가 아니다. 아이를 낳을 계획이 없음에도 임신과 낙태를 반복하게 되는 맥락이 문제의 핵심이다. 왜 여성은 임신을 피할 수 없고 자신의 몸과 마음이 망가지는 불가피한 선택을 강요받는가가 핵심이다. 우리 사회의 성적 이중규범은 남성에게 자유로운 섹스를 허용하고 피임의 책임은 부과하지 않는다. 임신 후의 남편이나 연인의 ‘나 몰라라’ 태도나 상대의 참혹한 낙태 경험에 대한 무감각이 그 증거다. 거기에 국가는 여성에게만 부과하는 ‘낙태죄’라는 이름으로 남성에게는 책임에 대한 면죄부를 주고 여성을 응징할 권력을 부여한다. 낙태죄의 본질은 여성에게 성적 행동이나 자기 몸과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주지 않겠다는 남성 중심 국가권력에 의한 여성 시민권의 박탈이며 평등권 침해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는 헌법 제10조는 낙태죄가 존재하는 한 여성에게는 허구다. 낙태죄는 폐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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