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에 친일하여 출세가도를 달리고 부를 축적했던 법조인은 해방 후에도 여전히 잘나갔다. 대부분이 법관 고위직을 역임했다. 개중에는 하늘이 벌한 것인지, 사고사를 당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매우 잘 먹고, 매우 잘 살았으며 심지어 정권이 바뀌어도 아니, 오히려 부패한 정권, 정통성 없는 정권일수록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최고위직에 오른다.
그리고 법조인끼리 혼맥을 형성하여 사돈지간에, 부자지간에, 형제 지간에 나란히 친일인명사전에 오르기도 한다. 끼리끼리 만난다는 뜻을 제대로 알려준다.
법조인들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고, 판사나 검사로 임용된다. 판검사 시절, 이들은 항일투쟁에 앞장선 이들의 재판에 관여한다. 판검사가 하는 일은 국가에게 독점된 폭력을 합법적으로 행사하는 일이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때로는 생명권도 박탈할 수 있다.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부여된 사명은 오로지 법과 원칙에 따라 정의를 세우라는 요구다. 그 때문에 이들에게 국가와 국민은 어마어마한 권한을 주고, 때론 부귀영화도 보장해준다. 그러나 그 나라 국민이, 빼앗긴 나라의 주권을 다시 되찾기 위해 목숨 걸고 투쟁하는 때, 누구보다 앞장서서 동포와 동족을 탄압하고, 때론 법을 흉기로 휘둘러 사지로 몰아넣은 이 법조인들은 과연 해방된 조국, 대한민국의 국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일제강점기 배를 곯아가며 오로지 조국의 해방만을 위해 투쟁하던 독립군들이 있었는가 하면, 침략국 일본에는 수 십 억원에 달하는 국방헌금을 내놓았던 자들이 친일 법조인들이었다. 그랬던 이들이 해방된 조국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대한민국 주인행세를 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짖고, 독립 투쟁에 앞장선 이들을 또 다시 모략하고 사지로 몰아 넣는다.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 법조인들은 알량한 법률적 지식을 기반으로, 모두 헌법제정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거나, 그대로 판‧검사를 비롯한 국가 3부 요직에 발탁되어 새로운 대한민국 체제를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에 유리한 형태로 재구성한다.
대한민국이 변질되어 온 중요한 이유다. 그렇기에 이제라도 제대로 알아야 하고, 그에 맞는 역사적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 해방 후에 고위직을 지냈던 친일 법조인 위주로 꾸려 본다.
1. 기회주의자의 얍삽함을 온몸으로 실천하다
- 신태악(신태악 辛泰嶽 : 1902.03.04-1980)
신태악은 제9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낸 법조인이자 정치인이다. 아호는 일성(一星)이다. 기회주의자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1902년 함경북도 부령 출생으로, 1931년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였다. 일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고 1932년 일본 오사카대학에서 변호사를 개업한다. 1935년에는 조선발명협회 이사를 지내고, 1936년 조선변호사회 부회장을 지냈다.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 이사가 된다.
그가 30세 나이로 변호사 개업을 하던 당시, 일본제국주의 정책이 본격적으로 뻗어나갈 때였다. 1931년 중국 만주에 대한 침략을 개시하고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15년 전쟁이 개시된 시기다. 동시에 조선민족으로서는 새로운 시련을 맞이하게 된 시점이다.
신태악은 조선일보사 간부나 변호사회 간부로서 사회적인 명망을 얻게 되면서 적극적인 친일행각을 벌인다. 때문에 ‘친일 부역행위를 통해 출세만을 추구하면서 반민족적 과오를 범한 기회주의자의 전형(한상범)’이라는 평가가 따른다.
그는 일제 지배 하에서 중의원이 되고자 온갖 수단을 동원해 추태를 벌이는데, 1942년 4월 중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하게 된다. 일제치하에서 일본제국 의회의 귀족원이나 중의원 의원이 된 조선인은 귀족원 의원으로 윤덕영과 중의원으로 박춘금이 유명하다.
신태악은 서울 무교동과 일본 오사카에 각각 사무소를 두고 주로 오사카에서 약 2년 간 중의원 의원 출마준비를 하면서 일본인 변호사의 비호를 받아 주로 조선인들을 매수하여 당선을 꾀한다. 매수한 표가 500표에 이르렀다고도 하고 거의 당선권에 있었으나, 경쟁자인 이선홍의 밀고로 들통이 나 자신의 선거운동원이었던 홍순병 변호사와 함께 8개월의 징역형을 받는다.
이 뿐만 아니라 그는 정견 발표 때마다 일제 침략의 명분이고 구실이었던 ‘대동아공영권건설’을 적극 홍보한다. 말인즉슨 “조선 사람이 많이 당선돼야, 조선 사람도 ‘대동아공영권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부역이 아니라 출세에 눈이 먼 자발적 친일이다.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것도 모자라 이에 협력하는 각종 단체에서 임원으로 활동한다.
1941년 8월 20일경 삼천리 잡지 사장 김동환이 주동하고 각계의 유지라고 하는 인사 198명이 동원돼 8월 25일 임전대책회의라는 전쟁 협력 단체가 발기되었다. 8월 28일 경성호텔에서 개최된 제1차 총회에서 회명을 ‘임전대책협의회’로 고치고 임전대책 홍보, 선전, 연설과 임전에 소요되는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채권을 대대적으로 발매해, 협조운동의 전개를 결의한다.
이 단체의 상무위원 11명 중 하나인 신택악은 1941년 부민관 강당에서 열린 ‘임전대책연설회’에서 ‘도쿄‧오사카는 이렇다’라는 연제로 일본의 총력전 임전태세의 만전을 선전하였다. 당시 연사들의 연설 취지는 이러했다.
“일본제국이 대동아의 맹주로서 서양 백인 제국주의를 아시아에서 몰아내고, 새로운 낙토인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는 일이 바야흐로 무르익어 간다. 그러므로 우리 조선인이 이에 몸과 마음을 바쳐 협조‧참여하는 기회를 잃지 말자. 특히, 천황폐하의 성은과 성덕을 입을 귀한 기회를 잃지 말자.”
매국매족의 부역선동이었다. 연설 행각 이외에도, 실질적인 전쟁자금을 마련하는 채권매각 가두홍보운동에도 적극 참여한 것은 물론이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악은 참 열정적이고, 부지런하다. 여기서 신태악은 본정대에 가담하여 일본 노자키 상점 앞에서 채권을 팔았다.
그 후 임전대책협의회는 윤치호 계열의 홍아보국단과 결합하여 1941년 10월 22일 친일부역세력을 총망라하는 범단일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으로 재정비되는데, 신태악은 여기서도 이사의 직책을 맡아 활동한다.
그 밖에도 신태악은 1945년 6월에 박춘금이 주도하여 만든 정당형식의 친일단체 ‘대의당’에서도 위원직을 맡아, 해방을 목전에 둔 시기까지 친일 대열에서 맹활약한다.
해방 후 신태악은 1946년 변호사 개업을 하고, 같은 해 ‘구국문화사’를 설립한다. 참으로 발 빠른 변신이다. 기회주의자의 기본자세라고 할 수 있다. 해방 후 미군정의 친일관료 기용과 ‘반공주의’정책으로의 선회로 인해 친일세력은 다시 ‘반공주의’의 기수로 화려하게 ‘재기’한다.
신태악은 1952년 이승만의 비호 하에 자유당 창립준비위원이 되고 1953년에는 자유당 감찰위원장으로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는 정치인으로 거듭난다. 이 뿐만 아니라 1958년 신태악은 재야 법조인으로서는 최고 명예직인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이 된다.
이승만 정권 몰락 후에도 신태악은 원로 중견 정치인으로 남아 활동을 이어간다. 1963년 민정당 전당대회의장, 1966년 신민당 운영위원장, 1971년에는 국민당 정무위원이 되었다.
신태악의 행적을 보면 친일세력이 독재세력으로, 독재세력이 유신세력으로, 유신세력이 신군부 세력으로, 신군부세력이 IMF 외환위기 유발세력으로 어떻게 거듭나는지를 알 수 있다. 그의 명이 조금만 더 길었어도, 그 처음과 끝의 완벽한 궤적을 그릴 수 있었다.
신태악은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의 명단과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2008년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도 올랐다. 뿐만 아니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의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2. 제 2대 대법원장과 제 7대 법무부장관까지 잡순
-조용순(趙容淳 : 1898.02.19-1975.08.28)
직원들의 영접을 받으며 대법원으로 처음 등청하는 조용순 제2대 대법원장
제2대 대법원장을 역임했으며, 대한민국의 제7대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본관은 임천이며, 대전 출신이다. 호는 춘산(春山)이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서 사법부분에 선정되었다.
1922년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3월부터 경성지방법원 개성지청 서기과 서기 겸 통역생으로 근무하면서 1925년 판검사 특별 임용고시에 합격해 판사 활동을 하였다.
1928년 쇼와(昭和)텐노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32년 10월 평양지방법원 판사를, 1936년 8월부터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 판사로 재직하다 1940년 8월 퇴직했다. 1937년 훈6등 서보장을 받았고, 1940년 9월 종5위에 서위되었다. 1941년 5월 황해도 해주에서 변호사를 개업했다. 1943년 5월부터 해방될 때까지 황해도 해주부 부회의원을 지냈다.
해방 후, 1945년 11월 대전지방법원 재판장(법원장)에 임명되었다. 1948년 8월부터 11월까지, 1952년 2월부터 1953년 11월까지 두 차례 대구고등법원장을 지냈다. 1953년 11월부터 1954년 6월까지 대법원 대법관으로 재직하면서 1954년 4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54년 6월부터 1955년 9월까지 법무부 장관을, 이어서 1958년 10월까지 초대 사정위원장을, 1958년 6월부터 1960년 5월까지 대법원장을 지냈다. (뭐 잘했다고) 1970년 8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1975년 8월 27일 사망했다.
친일부역자들이 관운 하나는 타고났음을 알 수 있다.
3. 친일=대법원장 코스의 산증인
-조진만(趙鎭滿: 1903.10.20.-1979.02.12.)
대한민국 제3‧4대 대법원장을 지냈다. 본관은 배천이다.
1923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다. 1926년 4월 경성지방법원 및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사법관시보에 임명되었으며, 사법관시보로 근무 중이던 같은 해 8월부터 11월까지 경성지방법원 검사대리로 판검사 사무를 수습했다.
1927년 해주지방법원판사(고등관 7등)에 임명된다. 1928년 2월 종7위에 서위되었고, 같은 해 11월 쇼와텐노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을 받는다. 1929년 평양지방법원판사를 1930년 3월 엔 평양복심법원판사로 옮긴다. 평양복심원 판사로 근무 중이던 1930년 3월 고려혁명당 만주총부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된 황금술의 재판에 판사로 참여한다. 1930년 3월 고등관 6등으로 승급되었으며, 같은 해 6월 정7위로 승서되었다. 1932년 12월 고등관 5등으로 승급되었으며, 1933년 2월 종6위로 승서되었다.
1933년 대구복심법원판사로 발령받았다. 1936년 3월 고등관 4등으로 승급되었고, 같은 해 5월 정6위로 승서되었다. 1938년 2월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1939년 3월부터 대구복심법원 판사로 대구지방법원 판사를 겸직했다. 같은 해 8월 조선인 최초로 부장판사로 승진해 대구지방법원 부장판사에 임명되었다. 일제시기 조선인으로서 부장판사까지 올랐던 사람은 조진만을 포함해 평양지방법원 부장판사를 지낸 김준평(金準枰 ) 등 2명뿐이다. 1939년 9월 고등관 3등으로 승급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종5위로 승서되었고, 1942년 2월 훈5등 서보장을 받았다. 1943년 변호사로 개업한다.
그러고도 해방 후 1951년 제5대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1952년 변호사를 개업한다. 1960년 서울제일변호사회 초대회장이 되고, 1961년 법무부장관고문을 지낸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후 다시 제3대 대한민국 대법원 원장에 임명되어 1968년까지 재직하였다. 1964년 12월에는 탄핵심판위원회 심판위장을 지냈다. 박정희 독재 정권에서 사법부 수장으로서 어떻게 부역하면서 민주투사들을 잡아넣는데 일조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대법원장 퇴직 후 다시 변호사 개업을 하고, 1971년 한국합동법률사무소 대표를 지냈다. 1979년 2월 12일에 사망하였다.
1963년에는 1등 근무공로훈장을 받고, 1968년에는 정조근정훈장을 받는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에서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사법 부문에도 선정되었다.
이쯤 되면 친일 이력이 없으면 대한민국 대법관이나 대법원장이 될 수 없는 불문율이라도 존재했던 듯하다.
4. 이완용의 사돈 혹은 독립운동가를 잡아가둔 역대 최장수 대법원장
-민복기((閔復基: 1913.12.12-2007.07.13)
대한민국 제5‧6대 대법원장을 지냈다. 본관은 여흥이다. 민비의 그 민씨와 같은 본관 맞다(역시나 나라 팔아먹는 넘들은 핏줄 따위는 가볍게 무시한다!). 민복기의 아버지 민병석은 이완용과 사돈지간이다.
그는 일제 식민통치 시기에도 6년 동안 판사로 있으면서 항일독립운동과 관련된 각종 재판에 참여하여 독립운동가들을 잡아가뒀고, 해방 후에는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법조인으로 거칠 수 있는 요직을 모두 거쳤다. 최고의 관운을 타고 났다 할 수 있다.
민복기는 1936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고, 1937년 3월 31일 경성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1940년 경성지방법원 판사에 취임하였다. 이후 경성복심법원 판사를 역임한다.
미 군정청에서는 사법부 법률기초국장 겸 법률심의국장을 역임하였고, 이승만 정권인 1955년부터는 1956년까지는 검찰총장을, 박정희 독재정권인 1963년부터 1966년까지 법무부장관을 역임했다. 1968년 제2대 대법원장에 취임하고, 열심히 독재에 부역한 결과 1973년 제6대 대법원장에 연임하여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 김병로 대법원장보다 재임기간이 10개월이나 더 많은 10년 2개월간 대법원장을 역임한다. 역대 최장수 대법원장이다.
1975년 대법원장 재임시 이른바 인혁당 사건의 상고를 기각해 8명의 사형, 8명의 무기징역, 그 외 피고인들에게 15~20년의 징역형 등을 확정한다.
1980년 신군부정권의 국정자문회의 위원에 위촉되고, 1981년 4월 23일 전두환에 의해 국정자문회의 위원에 선출된다. 1987년 11월 4일 노태우 정권에서도 국무총리 김정렬의 초청을 받아 총리공관에서 열린 만찬에 초대된다.
최고의 관운을 타고나 천수를 누린 민복기의 궤적을 따라가 보면 친일파가 어떻게 이승만 독재 부역자로 거듭나는지, 또 이승만 독재 부역자가 5‧16 쿠데타 부역자와 신군부 쿠데타 부역자로 이어지는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2005년 서울대학교 교내 단체가 발표한 ‘서울대학교 출신 친일인물 1차 12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되었다. 그의 부인 이 씨는 친일사학계의 ‘거두’ 이병도(李丙燾: 1896-1989)의 조카딸이다.
부친 민병석(閔丙奭: 1858-1940)의 친일 부역 행각도 목불인견이었다. 1910년 8월 궁내부 대신으로 ‘합병조약’ 체결에 관한 어전회의에 참석하여 가결에 찬성함으로써 스스로 매국노가 되었다. 이후 일제 총독부 중추원 고문만 5회 연임했고, 중추원 부의장까지 지낸 친일부역자들 중의 ‘거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다. 일제의 자작 작위까지 받았다. 자작 작위는 장남이자 민복기의 형 민홍기(閔弘基: 1883-1951)가 세습했다.
제1대 대법원장을 제외하고는 민복기까지 모두 일등 친일매국노였으니, 우리 대법원은 시작부터 잘못되었으며, 지금의 양승태 사태의 기원이 어딨는지, 왜 그랬는지를 알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되겠다.
5. 창씨개명 강연회는 기본, 조선인 청년을 전쟁터로 내몬
-김광근(金光根 : 1903-1947)
일제 때 고등문관시험에 합격(1903년)하고 판사를 지낸다. 1903년 6월 22일 서울 태생이다. 대구지방법원 판사 등을 역임한 김형근(金亨根)의 형이다. 1928년 3월 시즈오카고등학교 졸업 후인 같은 해 4월 동양물산주식회사에 입사해 근무하다 1929년 3월 퇴사하고 그해 4월 교토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 1932년 3월 졸업한다.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31년 11월 일본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다.
1932년 11월 사법관시보에 임명되어 경성지방법원 및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사무를 수습하면서 법조계에 입문한다. 1933년 4월부터 7월까지 경성지방법원에서 검사대리로 근무하면서 판검사사무를 수습하고 1934년 7월 고등관7등의 예비판사에 임명되어 전주지방법원에 근무한다. 1936년 9월 고등관 6등으로 승서되고, 10월에 정7위에 서위된다.
전주지방법원 판사대리 및 판사로 재직 시 항일독립운동과 관련한 각종 재판에 참여했다. 1934년 9월에는 전라북도 정읍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해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된 김한섭과 김용상 등 8명에 대한 재판, 10월에는 남원일대에서 적색농민조합을 조직해 활동하는 한편, 고용계를 조직해 동맹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된 김창한‧양홍주 등의 재판, 12월에는 전주‧군산‧이리 등지에서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김성남‧정백‧장일환 등 13명에 대한 재판에 판사로 참여했다.
1935년 10월에는 전라북도 및 전라남도 일대에서 조선공산당재건전남동맹‧전북적색교육자협의회‧독서회 등을 조직해 조선공산당재건운동 등을 전개하다 체포된 이기택‧조광호‧선동기‧정영한 등 38명에 대한 재판, 1937년 1월에는 민족혁명당에 가입한 후 난징 등지에서 일본관헌 등에 대한 정보수집활동, 일본 및 만주국 주요 인사들에 대한 암살, 중요 건물의 파괴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된 오형모의 재판 등에 판사로 참여했다.
1937년 7월 퇴직한 후, 만주로 건너가 같은 해 8월 천임관 5등의 사무관에 임명되어 만주국 사법부 민사사 제2과 사무관으로 근무했다. 1938년 3월 천임관 5등의 심판관에 임명되어 만주국 옌지지방법원 심판관 겸 옌지구법원 심판관으로 근무했으며, 1939년 3월 천임관 2등으로 승서되었다. 만주국 옌지지방법원 심판관 겸 옌지구법원 심판관으로 근무 중이던 1939년 6월 사법부 위임문관고시위원회 임시위원을 겸임했다.
1939년 9월 통화지방법원 심판관으로 전임되어 통화지방법원 차장으로 근무했으며, 이때 통화구법원 심판관 겸 펑톈고등법원 통화분정심판관 겸 시안지방법원 심판관 등을 겸임했다. 1940년 3월부터는 통화지방법원 차장으로서 통화지방법원 심판관 겸 통화구법원 심판관 겸 펑텐고등법원 통화분정 심판관으로 근무했다.
통화지방법원 차장으로 근무 중이던 1940년 3월 27일 지안현의 캉핑국민우급학교에서 열린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한 창씨개명강연회에 참석해 강연했다.
1941년 3월 심판관직을 사직하고 귀국, 1941년 8월 경성에서 변호사를 개업했으며, 1942년 2월에는 매일신보사 법률고문은 지냈다. 1943년 11월 일본에서 유학 중인 조선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지원병 지원을 독려하기 위해 최남선 등과 함께 선배격려대의 일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도쿄 소재 각 대학을 순회하며 간담회를 개최하고 지원병 지원을 독려했다.
1944년 2월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조직한 보도특별정신대의 대원으로 충청남도 지역에 파견되어 미영격멸 및 조선인의 총궐기 등을 내용으로 강연했다.
해방 후, 1945년 10월 11일 미군정에 의해 경성공소원 판사에 임명되었다가 당일 임명이 취소되었다. 이후, 서울에서 변호사를 개업했으며, 신한녹화주식회사 사장을 지냈다. 1947년 12월 30일 사망했다.
6. 일제 치하의 판사가 검사장과 내무부 장관, 그리고 언론사 사장까지
김형근(金亨根 : 1915-1993)
김광근의 동생이다. 1940년 3월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39년 11월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1940년 4월부터 1942년 3월까지 경성지방법원 및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사법관시보로 재직했다. 1941년 4월부터 8월까지는 경성지방법원 검사대리를 겸했다. 1942년 3월부터 경성지방법원 예비판사를 지내다 1942년 6월 판사에 임명되어 계속해서 경성지방법원에서 근무했다. 1943년 3월부터 해방 때까지 대구지방법원 판사로 재직했다. 대구지방법원 판사로 재직 중이던 1944년 6월에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하여 민족의식 고취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된 조형길‧김병욱 등의 재판과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일진회를 조직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시국토론을 통해 대동아전쟁에서 일본의 필연적 패망과 조선의 독립 등을 논의한 혐의로 체포된 전면천‧강덕재 등의 재판에, 7월에는 대동아전쟁에서 전황이 불리한 일본이 곧 패전할 것이라는 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체포된 장봉숙 등의 재판에 판사로 참여했다.
해방 후 1945년 8월부터 12월까지 대구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있다가 퇴직하여 1946년 3월 서울에서 변호사를 개업했다. 1949년 11월부터 대검찰청 검사를 지내다가 1950년 3월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으로 옮겼다.
1950년 대통령 비서관을 지내가다 그 해 12월부터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을 지냈다. 1954년 2월 내무부 차관에 임명되었고, 1955년 4월 내무부장관으로 승진해 5월까지 재직했다.
1956년 6월 한국미곡창조주식회사 사장을 맡았다. 같은 해 8월부터 1958년 6월까지 서울신문사 사장으로 재임하면서 1957년 6월 한국일간신문발행인협회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1958년 서울에서 변호사 업무를 재개했다. 이런 자가 언론사 사장까지 했으니, 한국 언론이 친일부역자에 대한 비판 기능을 애초에 제대로 하지 못했던 이유 또한 충분히 알 수 있다.
1973년 헌법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김광근, 김형근 형제가 나란히 친일인명사전에 기재된다.
■ 참고자료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6년도 조사보고서 Ⅱ -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이유서
-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2009
-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분야별 주요 인물의 친일이력서 친일파 99인-2, 돌베개, 1993
- 무크‧친일문제연구 편집위원, 무크‧친일문제연구[창간호] 일제잔재 19가지, 도서출판 가람기획, 1995
- 무크‧친일문제연구 편집위원, 무크‧친일문제연구2 - 친일변절자 33인, 도서출판 가람기획, 1995
- 김이조, 사건으로 본 법조 100년, 한일합동법률사무소, 2005
- 대한변호사협회, 한국변호사사, 1979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http://db.history.go.kr/item/le
-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https://www.minjok.or.kr/archives/78448
- 신학림, “친일부역‧독재비호 사법부 수장들, ‘또 하나의 가족’”, 뉴스타파, https://newstapa.org/43851 외 다수의 언론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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