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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풍속과 전통놀이에 대해서...
gmld**** 조회수 10,537 작성일2010.02.07

학교 숙젠데 풍속과 전통놀이에 대해서

조사를 하라고 해서... 좀 짫고 정확한 답

부탁드리겠습니다.

욕설이나 내공냠냠 같은 답을하시면

신고하겠습니다.

부탁드릴께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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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날리기 




 

연을 하늘에 띄워 날리는 놀이. 연은 흔히 대나무로 살을 만들고 그 살 위에 종이를 붙여 장방형 또는 가오리 모양으로 형태를 만들고 실로 연결하여 하늘 높이 띄운다. 띄우는 기술이 익숙해지면 연줄 끊어먹기, 멀리 날리기 등의 방법으로 논다. 연날리기는 썰매타기, 팽이치기와 함께 겨울철을 대표하는 민속놀이이다.
연날리기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즐겨했고, 전통적으로는 초겨울에 시작해서 이듬해 묵은 추위가 가시기 전에 끝났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연을 날리는 시기는 정월 초하루(설날)부터 대보름까지였으며, 그 이후 연을 끊어서 날려보낸 다음 더 이상 날리지 않았다고 한다. 대보름이 지났는데도 연을 날리는 사람을 보면 ‘고리백정’이라고 놀렸다고 하는데, 이는 연만 날리다가는 그 해 농사 준비가 늦어질까 염려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의 연은 형태나 구조가 다른 나라 연과 비교해 볼 때 과학적 원리를 적극 활용한 점이 돋보인다. 그리고 추위에 웅크리는 소극적인 자세보다 바람과 맞서는 적극성으로 추위를 몰아내던 조상들의 지혜가 듬뿍 담긴 놀이이다.

 

기산풍속도첩-연날리기


연은 서양에서는 BC 400년경 플라톤의 친구인 ‘알투스’가 처음 만들었다고 하고, 동양에서는 BC 200년경 중국의 ‘한신(韓信)’이라는 장군이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권41 김유신전(金庾信傳)에 따르면, 647년 신라 진덕여왕을 반대하는 일부 대신이 반란을 일으켜 김유신(金庾信)이 토벌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때 성안에 별똥이 떨어져 군사들이 두려워하고 사기가 떨어졌다. 이에 김유신이 꾀를 내어 불을 붙인 허수아비를 연에 달아 하늘로 띄웠다. 그리고 군사들에게 “어제 저녁에 떨어진 별이 하늘로 다시 올라갔으니 진덕여왕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소문을 내어 싸움에서 이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삼국시대 이전부터 연을 날리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시대의 기록인 《고려사(高麗史)》권33 충선왕즉위전(忠宣王卽位傳)에 보면 1283년 왕궁 노비가 아이들이 노는 연을 빼앗아 왕자에게 갖다 바친 일이 있었고,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정월 상원조(上元條)>에 보면 최영(崔瑩) 장군이 탐라(제주도)에 반란이 일어나 이를 징벌할 때 연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어 조선시대에는 보다 성황을 이루었는데 《명종실록(明宗實錄)》에 의하면, 1566년에 국왕이 나라의 정세가 어지러우니 연날리기를 일시 중지시키라는 명령을 내린 일이 있었고, 16세기 말 임진왜란 때 평양에서 계월향이 김응서 장군에게 연을 띄워 적전을 알려줘, 평양 성을 되찾았다는 일화가 있었다. 또 같은 시기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아군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해 연을 날렸다는 기록도 있다.

 

 

연을 날리기 위해서는 우선 연을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연을 만드는 방법부터 날리기, 겨루기 등을 차례로 소개한다.

1) 재료

종이는 보통 창호지를 사용하고 살(달)은 대나무가 가장 좋다. 대나무는 물기가 완전히 빠진 잘 마른 것을 이용하는데, 왕대 또는 참대 중에 구부러졌다가 탄력 있게 펴지는 것을 이용한다. 대나무가 없으면 싸리·수숫대·갈대 같은 것을 이용하기도 하는데, 모두 껍질을 좁게 째서 길게 다듬어 쓴다. 연줄은 가볍고 질긴 명주실이 가장 좋으나, 값이 너무 비싸 일반적으로 무명실·베실 등을 이용한다. 실을 감는 얼레는 나무로 만드는데, 연줄을 풀었다 조였다 하는 도구로 매우 중요하다. 얼레는 나무가 없으면 수숫대 같은 것으로도 만든다.

2) 만들기(방패연)



(1) 종이 ― 연의 크기는 종이의 크기인데 지방의 자연적인 조건에 따라 다르다. 바람이 센 바닷가와 평야지대에서는 연을 크게 만들고, 바람이 잔잔한 산간과 내륙지방에는 창호지 반장 정도의 크기로 만든다. 보통 방패연의 표준형은 가로:세로의 비가 2:3 정도의 장방형으로 한다.
(2) 살 ― 종이가 준비되면 살을 붙이는데 살의 부분 명칭과 역할, 붙이는 순서는 아래와 같다. 연살을 붙일 때는 연 가운데 부분이 평면에서 약 10도 가량 불룩하게 나와야 하고, 연의 굽은 각도에 따라 잘 뜨고 못 뜨게 되므로 손으로 만져서 알맞은 각이 만들어지게 조정해야 한다.
① 머릿살 ― 머릿살은 연이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올라갈 때 정면으로 맞는 바람을 사방으로 분산시킨다  

 

연날리기는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고 이용하는 방법을 깨닫게 하는 놀이이다. 어디에서 바람이 부는가· 어느 정도 세게 부는가· 지금 연을 날리는 것이 좋을까· 바람이 약해지기를 기다릴까· 등을 생각하며 촉각을 세우고 있는 그 순간, 자연과 인간이 하나된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늘 높이 오른 연을 멀리 또는 가깝게 올렸다 내렸다 마음대로 조종하면서, 그 동안 만드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은 하나의 즐거움으로 승화된다. 연날리기는 만드는 과정에서 손의 조작능력이 향상되며 어떤 형태로, 어떤 그림을 넣을까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창의력이 길러진다. 특히 무엇보다도 바람에 대해 몸으로 깨닫게 된다는 점에서 교육적 효과가 뛰어난 놀이이다. 또한 추운 겨울, 방안에서 웅크리고 있기보다 밖으로 나가 추위를 이기는 동안 체력, 지구력 등이 길러지게 된다.

 

 

 

거북놀이


 

마을 젊은이들이 모여 수숫대(잎)로 거북모양을 만들고, 그 속에 두 명(앞에 1명, 뒤에 1명)이 들어가서 거북이 흉내를 내며 집집마다 돌며 액운을 없애는 놀이이다. 우리 조상들은 거북을 학과 더불어 십장생의 하나로 매우 영적인 존재로 여겼다. 따라서 거북모양의 분장을 하고 풍작과 복을 비는 수단으로 한가위나 정월 대보름에 경기도·충청도 등 한강 이남지방을 중심으로 널리 행해졌다

추위를 이기는 동안 체력, 지구력 등이 길러지게 된다.

 

거북놀이의 유래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설고총서》라는 문헌에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15세의 공주가 병이 들었는데, 영추대사가 15세 소년들로 하여금 수숫 잎으로 거북의 탈을 만들어 쓰게 하고 유희하며 집 안팎을 깨끗이 쓸게 하였더니, 공주의 병이 나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거북놀이의 기원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또한 거북놀이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대사 가운데 “거북이 압록강을 건너 백두산을 넘어 이천까지 오느라고 배가 고파서 쓰러졌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를 근거로 중국에서 전해진 것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
또 충남 천원(천안)지방에서는 고려 8대 현종(玄宗) 때, 나라에 가뭄과 흉년이 계속되어 곳곳에 도둑들의 행패가 심해지자, 현종이 직접 민정을 살피기 위해 각 고을을 순회하였다. 그러던 중 직산현에서 하루를 기거하는데 꿈속에서 신라의 문무왕(文武王)이 나타나, 8월 한가위에 거북을 보낼테니 거북과 더불어 뛰어놀고 민습을 수습하라고 현몽했다. 현종은 이튿날 지형을 두루 살펴보고 입장면 구덕리(龜德里;현재 입장면 신덕리 1구)가 거북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어, 이 마을 사람들과 거북놀이를 하였더니 이듬해 볍씨가 수수알처럼 풍성하게 여물어 대풍을 이루었다. 이때부터 이 마을에서 매년 추석을 맞이하여 거북놀이를 하였다고 하여 이곳이 거북놀이의 발생지이며, 이 거북놀이는 안과태평(安過太平)을 바라는 의미에서 발생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래담은 모두 근거가 빈약하고 관련 문헌의 정확한 고증이 없는 점이 한계이다. 그러나 농사를 짓는데 필수적인 비(용왕의 사신으로 거북)를 상징하는 거북을 통해, 수확에 대해 감사와 다음 해 풍년을 기원하는 바람에 의해 만들어진 놀이라고 여겨진다.
최근 자료로 1941년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이 지은 《조선의 향토오락》에는 거북놀이에 관한 조사 보고가 여러 곳에서 나온다. 기본 방식은 “짚으로 만든 거북모양을 뒤집어 쓴 사람과 거북을 끄는 사람이 있어서 이들이 각 집 문전을 방문한다. 방문한 집에 들어가서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놀이를 한다. 그러다가 거북이 주저앉아 움직이지 않으면 집주인이 그 까닭을 묻는다. 배가 고픈데 떡을 먹고 싶다고

 

거북은 수숫대(잎), (띄어쓰기)옥수숫대(잎),왕골,덩굴,볏짚,대나무 가지 등을 이용하여 만든다. 거북이 다녀간 집은 재앙이 달아나고 복이 온다고 하여 다투어 거북을 맞이하는데, 그 형식이 각 지역마다 비슷하나 몇 지역을 요약하여 소개한다.

1) 경기도 광주지방 거북놀이

거북이 자기 집 문 앞에 엎드려 움직이지 않자, 이것을 본 집주인이 거북몰이에게 그 까닭을 묻는다. 그러면 거북몰이가 배가 고파서 그렇다고 대답하고, 집주인이 음식을 많이 차려놓는다. 이 거북놀이는 밤늦게까지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논다. 때로는 음식 대접 외에 쌀·보리 등 곡물을 약간 내놓기도 하는데, 이때 거둬들인 곡물은 모아 두었다가 마을을 위한 공공사업에 사용한다.

2) 경기도 여주지방 거북놀이

여주군 전역에서 행해졌던 놀이로 추석날에 청소년들이 수숫잎을 따서 마치 지네 발과 같이 길게 엮는다. 이것을 몇 개 이어서 멍석처럼 만들고,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가서 까불거리며 걸어간다. 그러면 마치 거북이 걸어가는 것 같다. 그러다가 동네 부잣집 마당에 가서 거북의 임자가 뒤에 서서 “거북아 거북아, 만세! 거북아, 잘도 먹고 잘도 놀아라.”하고 외치며 풍물을 치면, 여기에 맞추어 거북춤을 추며 논다. 그러다가 거북이 쓰러지면, 거북이 배가 고파 쓰러졌으니 먹을 것을 갖고 오라고 소리친다. 이것을 신호로 그 집에서 미리 준비했던 술·떡·과일을 내온다. 그러면 그곳에서 배부르게 먹고 즐기다가 또 다른 집으로 간다. 이렇게 하여 온 동네가 술 풍년, 떡 풍년, 노래 풍년이 든 듯하다.

3) 충북 음성지방의 거북놀이


 

경기도 광주·이천과 충청도 청주·음성·충주·예산·서산과 전라남도 해남에서는 어린이들이 이 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어른과 청년들도 했지만 아이들이 명절을 맞이하여 거북놀이를 함으로써, 명절을 즐겁게 보낼 뿐 아니라 동네의 구성원으로서의 자기 자리를 찾아나가는 것이다. 특히 준비과정부터 진행과정이 모두 집단적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소속감과 공동체 의식을 기르는데 효과적이다.

경기도 이천지방에서 행해지는 거북놀이의 인원 및 복색은 아래와 같다.

순번
이름
인원
복색
1
농기
1
무명 바지저고리, 감발, 짚신, 고깔, 이 색띠
2
영기
2
등걸잠방이, 짚신, 고깔, 이 색띠
3
용기
1~3
등걸잠방이, 짚신, 고깔, 삼 색띠, 짚으로 만든 %s


 

 





 

 

널뛰기







긴 널빤지의 중간을 괴어 놓고, 양쪽 끝에 한 사람씩 올라서서 번갈아 구르며 공중으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 놀이. 음력 정초(正初)를 비롯하여 5월 단오, 8월 한가위 등 큰 명절에 많이 했으며, 주로 여성들이 즐겨 놀던 놀이이다. 도구가 간단하고 좁은 공간에서도 쉽게 할 수 있어, 전국에서 즐겨하던 놀이이다. 가까운 일본 오끼나와현[沖繩縣] 류큐[琉球]에 전승되는 판무(板舞)도 이 놀이와 유사하다.

기산풍속도첩-널뛰기





널뛰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문헌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시원(始原)에 대한 전설은 오랜 옛날부터 전해온다.
속설에 의하면 감옥에 갇힌 남편을 보기 위해 여성들이 담 밖에서 널뛰기를 하여 감옥 안을 넘겨다보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집안에 하루 종일 갇혀 있다시피 하는 여성들이 담 밖의 세상을 보기 위해 널뛰기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은 놀이의 형태에 따라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파악되고, 더 근원적으로 들어가면 널뛰기는 ‘디딜방아’의 원리와 같음을 알 수 있다. 이 디딜방아는 고구려 이전부터 있었던 것인데, 널뛰기가 디딜방아의 발전된 형태라면 널뛰기의 유래는 삼국시대 이전으로 추론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문헌에 나오는 기록을 살펴보면,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京都雜誌)》<세시 원일조>에 “항간에서 부녀자들이 흰 널조각을 짚단 위에 가로로 걸쳐놓고 양쪽 끝에 갈라서서 굴러 뛰는데, 그 높이가 몇 자씩 올라간다. 그때 패물 울리는 소리가 쟁쟁하고, 지쳐서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낙을 삼으니, 이를 초판희(超板戱)라고 한다. 생각건대 주황의 《유구국기략》에 그곳 ‘부녀들이 널빤지 위에서 춤을 추는데, 이를 판무(板舞)라고 한다.‘고 했는데 이것과 비슷하다. 조선 초에 유구(琉球)가 입조(入朝)할 때 어떤 이가 그것을 사모해서 본받은 것인지·”라고 기록하고 있다.

 

널뛰기를 하려면 널빤지와 널 받침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뛰는 방법은 단순히 뛰는 방법에서부터 다양한 기교를 부리는 방법까지 다양한데, 놀이도구와 뛰는 방법에 대해 나누어 살펴보자.

1) 놀이도구


① 널빤지 ― 널빤지는 탄력성이 있고 견고한 나무로 하되, 일반적으로 중간이 두껍고 양끝이 좀 얇은 것이 좋다. 보통 길이는 5~6m, 너비 35~40cm, 두께 5cm 정도가 적당하다.
② 널 받침 ― 널 받침이란 널빤지 가운데를 괴어 놓는 것을 말하는데, 보통 ‘고이개’라고도 한다. 보통 짚 묶음 또는 흙을 담은 가마니 같은 것으로 하며, 높이는 30cm 정도로 하는 것이 적당하다. 받침이 낮으면 널이 닿은 양쪽 땅이 파이기도 한다.

2) 널뛰기 방법과 동작

① 널뛰기 방법 ― 널빤지 양쪽에 한 사람씩 올라서서 처음에는 천천히 뛰기 시작한다. 널빤지 가운데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올라앉아 널빤지를 널 받침 위에 고정시키는 작용을 하도록 한다. 만약 두 사람의 몸무게가 차이 나면 가벼운 쪽으로 널빤지를 길게 하는데, 이때 ‘밥을 더 많이 갖는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두 사람이 마주서서 번갈아 뛰면,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 탄력에 의해 몸은 점점 공중으로 높이 치솟게 된다. 이 놀이는 힘이 들어 오래 뛸 수 없기 때문에 번갈아 쉬었다가 뛴다.
② 널뛰기의 동작 ― 다양한 동작이 있는데 뛰어올랐을 때 두 다리를 곧추펴고 뛰는 것을 ‘곧추뛰기’라고 하고, 두 다리를 앞뒤로 벌려 뛰는 것을 ‘가위발뛰기’라고 한다.



 

이 놀이는 우선 체력향상에 도움이 된다. 특히 역동적이기 때문에 전신운동이 되고 또한 신체의 각 기능의 보강운동으로도 적당하다. 그리고 순환기 내부 기능이 향상되며 박자에 맞춰 뛰어야 하기 때문에 리듬감이 형성된다.

김용옥은《태권도 철학의 구성원리》라는 책에서 널뛰기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는데, 널뛰기를 해본 사람은 이 원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널을 처음 뛰다가 힘이 들어 그만두게 된다. 이는 자유낙하의 중력원리에 의해 그냥 정지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널을 뛰는 양자가 단순한 중력(무게)을 가진 무게로만 존재할 때는 그 물체가 떨어져 진행방향의 전위가 일어나는 과정에서 너무도 에너지 손실이 크기 때문에 한두 번에 그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널을 뛴다’는 현상은 두 물체의 상하작용으로서는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물체와 물체의 상하작용이 아니라, 생명과 생명의 공방원리인 것이다. 떨어지는 사람은 널을 밟는 순간 단순히 자유낙하의 이상을 밟아야 하고, 올라가는 사람은 단순히 그 상대방의 낙하의 힘을 받아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중력의 힘을 이용하되 그 떨어지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나의 생명 에너지의 약동에 의하여 튀어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나의 튀어 올라감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것이며 상대방의 떨어짐(밟음)은 그 자발성에 대한 보조작용으로밖에는 기능할 수 없다. 그러나 상대방의 떨어짐(밟음)과 나의 올라감(튐)이 상승작용을 일으킬 때 물리적 함수 이상의 힘을 내어 솟구친다. 그리고 그러한 나의 몸의 에너지 보충은 매우 작은 것으로도 큰 힘을 낼 수가 있게 된다. 달인이 되면 별 힘을 안들이고도 높이 솟구치게 된다. 그것은 역시 몸의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유연성·적합성)이며, 그것은 기(氣)의 타이밍의 예술인 것이다. 그리고 높이 치솟아 떨어지는 여인, 그 붉은 치맛자락에 감추어 있는 몸의 모습은 궁둥이가 좀 나오면서 몸 중심이 약간 밑으로 빠진 전형적인 기본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런 자세가 바로 위의 설명을 집약하는 형체이다.

 

 

쥐불놀이






 

정월 첫 쥐날[上子日] 저녁에 쥐를 쫓기 위하여 논둑이나 밭둑에 불을 놓는 놀이. ‘논두렁 태우기’ 또는 ‘쥐불놓기’라고도 한다. 이 놀이가 발전하여 깡통에 불을 담아 돌리며 불을 여기저기 옮겨 붙였는데, 산불을 염려하여 금지한 후로 지금은 거의 사라진 놀이가 되었다. 이 놀이는 각 지방마다 액을 막고 복을 비는 제액초복(堤厄招福)과 풍년을 기원하는 바람이 표출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쥐불의 크고 작음에 따라 그해의 풍흉 또는 그 마을의 길흉을 점치기도 하는데, 불의 기세가 크면 좋다고 하여 각 마을이 서로 다투어가며 불 기세를 크게 한다. 황해도지방에서는 마을 소년들이 두 패로 나뉘어 둑을 경계로 하여 한편에서 불을 놓으면 한편에서는 불을 꺼나가는 놀이를 하였다. 지는 편 마을로 이긴 편 마을의 쥐가 모두 쫓겨가기 때문에, 이긴 편 마을에서는 농작물에 해를 입지 않아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충남 금산의 경우 논둑이나 밭둑을 태우면 한 해의 액을 쫓아낸다고 믿고 있으며, 청양지방에서는 쥐불놀이를 하면 여자의 경우 밥을 할 때 치맛자락을 태우지 않고, 남자는 담뱃불로 옷을 태우지 않으며, 1년 동안 무병하고 손과 발의 무좀이 없어진다고 믿고 있다. 그밖에 여자들이 아주까리 대에다 머리카락을 매달아 불을 붙여 들고 집 주위를 “쥐 짖자.”하고 외치며 돌아다닌다. 이것은 쥐는 눈이 밝기 때문에 항상 밤에만 활동하므로 그 밝은 눈을 불로 지져 쥐의 눈을 멀게 해서 활동하지 못하게 하자는 일종의 주문인 셈이다.

쥐불놀이

새해 들어 첫 쥐날인 상자일(上子日)에 쥐와 관련된 풍속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정월조(正月條)〉에 소개되고 있는데, 콩을 볶으면서 “쥐 주둥이 지진다. 쥐 주둥이 지진다.”고 주문을 외웠다고 하며, 충청도 풍속에 떼를 지어 횃불을 사르는데 이를 ‘훈서화(燻鼠火)’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불깡통놀이는 쥐불놀이와 함께 행해졌던 놀이인데 노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 유래는 6·25전쟁 이후에 생겨났다고 한다. 즉 전쟁 중에 공수된 군수물자 가운데 각종 통조림이 있었는데, 그 깡통을 놀이도구로 이용하면서 자연스럽게 쥐불놀이와 결합되었다고 한다.
풍년을 기원하고 나쁜 액을 몰아내고자 하는 바람이 마침 쥐날에 쥐가 무서워하는 불과 만나 만들어낸 이 놀이는, 농경사회가 점차 약화되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정월 대보름 저녁 이벤트행사의 일환으로 행해지면서 명맥만 유지되고 있다.



 

별다른 놀이방법은 없고 보통 몽땅 빗자루나 나무를 묶어 만든 다발에 불을 붙여 들고 마을 근처의 논밭 두렁에 불을 지르며 노는 것이다. 불을 지르며 이웃 마을 사람들과 마주치게 되면 다툼이 벌어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횃불싸움으로까지 번지기도 한다. 지방에 따라서는 2자 정도의 쑥으로 만든 불쏘시개를 가지고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불을 놓기도 하고, 근래에는 불깡통을 돌리기도 한다.
불깡통을 만들려면 먼저 빈깡통 표면에 대못으로 수십 개의 구멍을 뚫는다. 구멍을 뚫는 이유는 공기를 잘 통하게 해서 깡통 안에 있는 관솔이나 나뭇가지가 잘 타도록 하기 위함이다. 깡통에 구멍을 뚫고 나면 1m 정도 되는 철사 줄을 깡통의 양쪽에 연결하여 손잡이를 만든다. 이렇게 해서 불깡통이 만들어지면 깡통 안에 나무를 넣고 불을 지핀다. 그리고 한 손으로 줄을 잡고 힘차게 돌리면 깡통에 넣은 연료가 타면서 마치 불덩이가 춤을 추듯 아름다운 불꽃을 연출한다.
아이들은 불깡통을 돌리며 누구의 불이 더 잘 타오르나 경쟁을 하기도 한다. 홰나 짚단 대신에 불깡통을 이용하여 쥐불을 놓으면 쉽고 간편하기 때문에 근래에는 불깡통 돌리기가 더 많이 행해졌다. 그래서 불깡통 돌리기가 쥐불놀이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깡통 돌리기가 어느 정도 진행되다가 자정이 가까워지면 불깡통에 넣은 나무가 모두 타올라 밑에는 불씨만 남게 된다. 이때 떼를 지어 낮은 동산 위로 올라가 하늘 높이 불깡통을 던지면, 깡통에 남아 있던 수백 개의 불꽃이 떨어지면서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는다.
연을 날려보냄으로써 액운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같이, 불깡통을 마지막에 던져버리는 것도 액을 보내고 복을 맞이하기 위함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혼자서 즐길 수 있는 놀이가 있고 여럿이 어울려야 제 맛이 나는 놀이가 있다. 쥐불놀이는 여럿이 어울려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불을 놓고 불깡통을 돌리는 가운데 신명이 난다. 공동체 의식은 말로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면서 얻게 되는 것이다. 이 놀이를 통해서 놀이의 신명과 더불어 집단 구성원으로서의 소속감과 공동체 의식이 길러진다.

쥐불놀이는 단순한 대보름 놀이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건강한 삶의 지혜가 녹아 있는 미풍양속이라 할 수 있다. 즉 마른풀을 태워서 풀잎에 붙어 있던 해충의 알과 잡균·유충 따위를 태워 없애고, 언 땅에 온기를 주어 새 풀이 잘 돋아나게 하려는 과학적인 사고가 담겨 있다. 따라서 곡물의 병충해를 그만큼 줄일 수 있으니 농사에도 좋을 뿐 아니라 잡균을 태워 죽이니 위생·방역의 측면에서도 일거양득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줄다리기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대동놀이로 두 패로 나뉘어 큰 줄을 당기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한반도 중남부 지역인 진주·창녕·안동·경주·영산 등지에서 광범위하게 행해졌다. 지역에 따라서는 팔매싸움, 홰싸움, 석전, 용마놀이 등 여타의 대동놀이와 함께 축제형식으로 펼쳐졌는데 놀이하는 시기는 정월대보름 무렵에 하는 형태와 특별한 경우 임시로 행하는 형태가 있다.
일반적으로 양편으로 나뉘어 패싸움을 벌이기 때문에 줄당기기를 편싸움이라고도 부른다.


기산풍속도첩-줄당기기





줄당기기는 쌀 농사를 주로 하던 일본과 중국을 포함한 동남아 일대와 에스키모·영국 등에서도 했는데 놀이방법이 간단하고 광범위한 분포로 보아 어로와 농경과 관련이 있다. 즉 한 해의 길흉과 풍년·풍어 등을 기원하는 뜻에서 시작한 행사였다. 농경사회에서의 풍년을 기약하는 놀이, 그 해의 운수를 이기고 지는 겨루기의 결과로 점치는 주술적인 의미에서 행해졌다고 보여진다.
겨루기 곧 편싸움을 통해서 이긴 편의 기운을 빌어 풍년과 다산을 비는 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의 표현 이였다.
즉 풍년을 기원하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인 줄당기기는 제의이자 놀이였다. 두 패로 나뉜 놀이 패들을 남녀를 상징했다. 남자를 씨로 여자를 밭으로 생각했던 옛 사람들은 여성적인 것을 풍요의 근원이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대지의 물과 달과 나무는 기울면 차고 죽었다 다시 부활하는 재생의 상징이었고 여성 또한 마찬가지로 창조와 생명의 모태로 여겨진 것이다. 따라서 줄다리기에서 보여지는 몇 가지 행위는 성적인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보통 아랫마을과 윗마을로 나누거나 서부, 동부,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어진 편을 사람들은 암마을, 숫마을로 불러왔다.
줄당기기의 줄도 아랫마을이나 서편의 줄을 ‘암줄’이라 한다면 윗마을이나 동편에서 마련한 줄은 ‘수줄’이 된다. 줄 머리의 고리도 수줄은 작고 암줄은 크다. 수줄과 암줄의 교접은 성행위의 상징이고 그로써 자연스런 교접에 의해 풍요와 다산이 확실해진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이 줄다리기를 지속하게 했으며 여러 문헌에도 줄당기기 풍속이 소개되고 있다

 

특별한 규칙은 없고 두 패로 나뉘어 서로 힘을 합해 잡아당기는 것이 놀이 방법의 전부이다. 그러나 단순한 줄이 아닌 대규모 줄이고 그 안에 주술적인 의미, 축제의 의미 등을 담고 있기에 줄을 준비하는 과정과 줄의 재료, 줄의 형태, 놀이 양상, 줄 처리 방식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가) 줄의 형태
줄은 쌍줄과 외줄 두 형태가 있다. 외줄은 거의 호남지역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쌍줄은 외줄을 당기지 않는 호남 일부 지역과 그 밖의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외줄은 하나의 줄이므로 별도의 성 구분이 없으나 쌍줄은 암줄과 수줄로 구분된다.
외줄은 줄을 당기기 위해 별도의 줄을 마련하지 않고 통째로 ‘몸줄’을 잡아당기는 것이 일반적이나 쌍줄은 종줄을 달아서 사람들이 이 종줄을 잡아당기는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이것을 ‘지네줄’이라 부른다.

나) 줄의 제작
줄의 형태가 암줄과 수줄로 구분된 영산 줄당기기의 예를 들어 줄의 제작과정을 보면 아래와 같다.

①줄의 재료-줄은 일반적으로 짚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나 동해안 연안 지역에서는 칡을 이용했고 이후 어업에 사용하는 마닐라 삼과 나일론으로 만든 로프를 이용하여 만들기도 했다. 또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칡·삼베·늑다리 등도 이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짚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기에 짚을 기준으로 하면, 마을의 집집에서 거둬들인 짚(약 300~500동)과 통나무(지름 30cm, 길이2~4m 정도)를 준비한다.

②줄 만드는 과정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혼자서는 되지 않는 것이 있다. 줄당기기의 경우 아무리 이기고 싶어도 전체가 움직이기에 혼자 힘으로는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개개인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다. 개개인이 모여 전체가 되고 그 전체가 모여 비로소 하나가 되는데, 이것이 바로 대동이요 개인과 전체가 통일되어 나타나는 힘이다.
개별화·고립화되는 오늘날의 세태에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슬기를 일깨우는 이런 대동놀이는 개인과 전체와의 관계를 깨닫게 하는데 효과적이다. 따라서 협동심과 공동체 의식을 기를 수 있고 전신에 힘을 쏟아부어야 하기에 근력과 지구력을 기르는데 효과적이다.

영산 줄당기기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 전승되는 민속놀이인 영산 줄당기기는 삼일절을 기념하기 위해 행해지는데 매년 3·1민속문화제 기간인 2월 28일부터 3월 3일까지 나흘 동안 벌어진다. 이때는 창녕군뿐만 아니라 부산과 경상도 전역에서 구경꾼들이 몰려와 인구 8천 명의 영산면 전체가 잔치 분위기가 되는데, 박제화되지 않고 아직도 제구실을 하는 줄당기기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줄당기기는 각 지역에 따른 다양하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가장 큰 공통점은 줄을 당긴다는 행위이고 또한 줄을 당기는 행위와 함께 다양한 놀이가 함께 벌어져 축제형식을 띤다는 것이다. 또한 마을 사람 모두가 참여하는 대동놀이이며 액을 물리치고 복을 빈다거나 풍년을 기원하는 주술적·종교적 성격을 띤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그밖에 농경과 용[水神]과 관련되어 있는 점도 어느 지역에나 나타나는 공통점이라 하겠다.

 

 

 

 투호

일정한 거리에 서서 투호통에 화살을 던져, 누가 많은 수를 넣는가를 겨루는 놀이. 이 놀이는 1000원권 지폐에 실릴 정도로 대표적인 민속놀이이다. 과거에는 양반들의 놀이였으나 오늘날에는 누구나 하는 놀이가 되었다.
주로 명절에 고궁이나 민속촌 등지에서 쉽게 할 수 있고, 교과서에 실려 체육시간에 함으로써 이제 보편적인 놀이가 되었다. 과거에는 특별하게 제작된 투호통을 이용하였으나, 요즘은 항아리나 플라스틱 통을 이용하기도 한다.


원래 중국 당(唐)나라 때 성행하던 놀이로 《북사(北史)》〈백제전(百濟傳)〉과 《신당서(新唐書)》〈고구려전(高句麗傳)〉에, 백제 사람들과 고구려 사람들이 이 놀이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서 일찍부터 행해진 놀이로 보인다.
사마광(司馬光)의 《투호격범(投壺格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투호병은 입지름이 3치[寸]이고 귀[耳]의 입지름은 1치이며 높이는 1자이다. 병 속에는 팥을 채운다. 병은 던지는 이의 앉을 자리에서 2살(화살 2개) 반쯤 되는 거리에 놓고, 살은 1개를 사용하며 살의 길이는 2자 4치이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궁중에서 성행하였고, 양반들의 놀이였다. 따라서 놀이할 때 예(禮)를 갖추었는데, 일반 백성들은 놀이도구를 마련하는 일이며 절차가 복잡하여 하지 못했다. 오늘날에는 우리 놀이가 새롭게 조명되면서 고궁에서나 명절의 행사로 누구나 쉽게 해 볼 수 있는 놀이가 되었다.



 

① 투호통과 화살을 준비한다. 투호통이 없으면 항아리나 쓰레기통·분유통 등을 사용할 수도 있고, 또한 화살이 없으면 나무젓가락·바둑알 등도 화살 대신 사용할 수 있다.


② 던지는 자리와 통의 간격은 보통 1.5m 정도 거리를 두는데, 어린아이들은 조금 가깝게 한다.

③ 한 사람씩 12개의 화살을 던지는데, 1개가 들어가면 10점씩 계산하여 120점 만점으로 한다. 화살의 숫자는 놀이하는 사람들의 합의에 의해 조정 가능하다.
④ 가장 많은 점수를 얻은 사람이 이긴다.


던지는 지점을 잘 포착해야 하기 때문에 판단력과 집중력이 길러지고, 마구 던지는 것이 아니라 인내심을 가지고 차분히 한 개씩 던지는 가운데 인내력과 끈기가 길러지게 된다.

 

 

 

고싸움






 

광주광역시 광산구 칠석동, 속칭 옻돌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민속놀이이다. 해마다 음력 정월 10일경부터 2월 초하루에 걸쳐 줄다리기의 앞 순서로 행해지던 놀이이다. 그러나 요즘은 독립적인 놀이로 행해지고 있다. 고싸움의 ‘고’는 옷고름이나 노끈의 한 가닥을 길게 늘여서 둥그런 모양을 맺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2개의 고가 서로 맞붙어 싸움을 벌인다고 ‘고싸움’이라고 한다.


이 놀이는 문헌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유래를 알 수 없다. 다만 옻돌마을에 다음과 같은 속설이 전하고 있다.
풍수설에 따르면 옻돌마을은 와우상(臥牛相), 즉 황소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형상이라 그 터가 무척 세다고 한다. 이같이 거센 기운을 누르기 위하여 소의 입에 해당하는 곳에 구유를 상징하는 연못을 파놓고, 또 황소가 일어서면 마을에 피해를 끼친다고 하여 소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소의 고삐를 할머니당(堂)인 은행나무에 묶어놓고 꼬리는 7개의 돌로 눌러 놓았다는 것이다.
또한 마을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터가 거세기 때문에 개가 자라지 않아 개 대신 거위를 기르고 있다고 한다.
고싸움은 이같이 거센 터를 누르기 위해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속설은 전남 일대의 큰 마을마다 널리 퍼져 있는 이야기이다. 옛날의 고싸움은 남평지방에서 성행했고 장흥·강진지방에서도 줄다리기의 앞놀이로서 고싸움이 행해졌던 것을 미루어볼 때, 그리 믿을 만한 이야기는 못 된다.
왜냐하면 이 놀이는 본래 쌍줄다리기의 앞놀이로서 상당히 보편적으로 행해지던 놀이라는 점에서, 그 유래가 줄다리기의 유래와 일치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1) 고 만들기


고머리는 지름 3∼4cm 정도의 통대나무 20~30개를 휘어 타원형으로 만들어, 어른의 팔뚝만큼 굵은 동아줄로 감는다. 몸체는 줄끝을 다른 줄에 대고 두 줄을 묶고 그 속에 굵은 통나무를 넣어 만든다. 그리고 고와 고가 부딪쳐도 망가지지 않게 Y자 모양의 받침대를 만든다. 그런 후 몸체에 8∼10개의 통나무를 가로로 묶어 멜 수 있게 한다.

2) 놀이방법

고싸움으로 잘 알려진 옻돌마을의 놀이방법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① 고싸움은 동부와 서부의 두 패로 나누어 한다. 동부는 상촌이라 부르고 서부는 하촌이라고 하는데, 이는 마을 가운데로 난 골목길이 경계선이 된다. 고싸움을 할 때는 상촌인 동부는 남성을 상징하고, 하촌인 서부는 여성을 상징한다. 그래서 서부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하지만, 일단 싸움이 붙으면 이런 속신(俗信)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떻게든지 이겨야만 한다는 승부욕으로 가득 차 있다.
② 각 편은 ‘줄패장’을 두는데, 이는 줄을 갖고 싸우는 패거리의 우두머리란 뜻으로 줄패장의 지휘에 따라 싸움을 전개한다. 줄패장은 고의 제일 앞에 타서 싸움을 지휘하고, 그 뒤에 3~4명의 힘세고 날쌘 장년들이 탄다. 한편 고를 메고 싸우는 놀이꾼을 ‘멜꾼’(고 멘 사람)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중심 놀이꾼이기 때문에 힘이 세고 누구보다도 투지와 승부욕이 강한 장년들이 맡는다.
③ 고싸움은 음력 초열흘 경부터 시작되는데, 먼저 10여 세 가량의 아이들이 길이 5~6미터 정도의 자그만 ‘고삿고’(골목고)를 만들어 어깨에 메고 상대방의 마을 앞을 돌며 〈승전가(勝戰歌)〉를 불러 약을 올린다



 

마을 단위의 대동놀이이기 때문에 마을 구성원으로서의 소속감과 책임감을 배우게 된다. 아울러 마을에 대한 애향심도 길러지게 되고, 이후에 마을에서의 모든 일에 책임감을 갖고 참여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고싸움의 정항을 설명해주는 말로 “옻놈 징치 듯 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고싸움이 격렬해짐에 따라 풍물패들도 마구 두들기는데, 그러다 보면 채가 땅에 떨어지게 되고 이때 채 대신 돌을 주워들고 징을 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이 지방에서는 이성을 잃고 오기로 마구 덤벼드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흔히 쓰인다고 한다.
그밖에 “고싸움에 이기면 논 세마지기 산 것보다 낫다.”라는 말도 있는데, 고싸움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승부욕이 잘 나타난 말이다.
또한 싸움을 거는 노래가 있는데, 이 노래를 듣고 상대편도 지지 않으려고 더욱 크게 노래했다고 한다.
“이겼네 이겼네 동부(서부)가 이겼네 / 졌네 졌네 서부(동부)가 졌네 / 이기려고 올라왔던 서부(동부) 청년들 / 어찌하여 지고 가는가 / 내년 요때나 만나나 보세.”

 

 

차전놀이


 

음력 정월 보름에 행해지는 민속놀이의 하나. 차전(車戰) 놀이는 외바퀴수레(춘천지방)나 동채(안동지방)에 사람을 태우고 수레를 밀어내거나 동채를 땅에 끌어내리거나 부수는 것을 겨루는 놀이이다. 춘천과 가평에서는 ‘수레싸움’, 안동에서는 ‘동채싸움’이라고 하였다.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 24호로 지정된 안동 차전놀이가 대표적이다.

 


차전의 기원을 객관적으로 알려주는 자료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다른 대동놀이들과 마찬가지로 몇 가지 기원전설이 전승되고 있는데, 이 기원전설과 연관된 기록자료들이 전해지고 있을 따름이다.
기원전설은 다양하지만 모두 견훤(甄萱)과 왕건(王建)·삼태사(三太師)와 연관된 이야기이다. 이는 당시 기록과 일정 부분 일치하여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권12 <신라본기(新羅本紀)>에 “고려 태조(太祖) 왕건은 930년 고창군(안동군) 병산에서 후백제왕 견훤과 싸워 크게 이겼다. 이때 고을 사람 권행(權幸)·김선평(金宣平)·장길(張吉)(고려 건국 후 삼태사로 봉해짐) 등은 여러 개의 수레를 만들어 타고 싸워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병산전투가 끝난 후 이 지방 주민들은 용감한 세 사람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새해를 맞으면서 동채싸움을 즐기기 시작한 데서, 차전놀이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차전놀이가 단지 위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에서 비롯되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고,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다양성의 첫 번째는 전설의 내용대로 병산전투의 승전 기념잔치에서 처음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다. 두 번째는 원래 지게를 포함하여 수레·가마 등의 나무기구를 이용하는 놀이가 전승되던 중, 병산전투의 승전 기념잔치에서 행해짐으로써 보다 강한 전승력을 갖고 세시행사로 정착되었을 가능성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병산전투와 무관하게 오래 전부터 행해지다가 누군가에 의해 병산전투와 관련된 전설이 덧붙여지게 되었다는 가능성이다.
어느 것이 사실일 것인지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무리하게 기록된 자료에 꿰어 맞추기보다 정월 대보름이라는 새해맞이 축제의 공간에서 마을사람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대동놀이로서 오랜 세월 지속되어 왔고, 기록 및 전설자료들은 ‘강강술래’나 ‘월월이청청’과 같이 전승력을 확보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진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정월상원조(正月上元條)>에는 안동이 아닌 춘천에서 행해지던 차전이 기록되어 있다. “춘천지방에서는 차전을 하는 풍습이 있다. 외바퀴수레를 만들어 마을별로 편을 짜서 서로 앞으로 밀고 나가면서 싸우는 것으로, 차전에서 패하여 쫓겨가는 편에는 그 해에 흉년이 든다고 한다. 가평 풍습도 이와 같다.”
그밖의 기록으로는 안동지방의 풍속을 기록한 《화산지》에 “차전은 석전(石戰)과 같은데 동차가 서로 부딪쳐 싸워 먼저 부서지는 편이 지게 된다.”라고 16~17세기 행해지던 안동에서의 차전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임만휘(林萬彙)가 지은《만문유고》에는 차전에 관한 시가 전해져 18~19세기의 차전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벼락치듯 빠른 놀림 이길 틈을 엿보며 / 엎치락뒤치락 좋은 날 좋은 시비/
나갈 때나 물러설 때 하해의 파도인 듯 / 솟구쳐 오를 때는 새매가 나르는 듯 /
한바탕 버마재비 짓에 바람 끝이 뒤따르고 / 겹겹의 사람 숲엔 달빛이 비추이네 /
서북편이 이겼는가 개선소리 놀랍구나 / 골골의 장정들이 춤을 추며 돌아가네.“

이러한 차전이 고려시대 이래로 줄곧 행해지다가 일제강점기에 중·일전쟁으로 중단되었고, 지금은 다행히 문화재로 지정되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정월 대보름에 주로 하는 이 놀이는, 놀이방법과 놀이도구가 지역에 따라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1) 춘천의 외바퀴 수레싸움

① 춘천에서는 수레싸움을 했다. 물론 마을 대항의 집단 대동놀이였는데, 먼저 두 마을의 원로들이 만나 놀이할 날짜와 시간, 장소를 정한 다음 놀이가 시작되었다. 놀이에는 마을의 청장년들이 모두 참가하였고, 마을사람이 모두 나와 응원도 하고 거들기도 하였다.
② 각 마을에서는 외바퀴수레를 만들어, 그것을 서로 앞으로 밀고 나가면서 상대편의 수레를 밀어낸다. 힘이 모자라 수레가 밀리는 편이 지게 되고, 이긴 쪽에서는 상대편 수레를 부숴버림으로써 승부가 나게 된다. 지게 되면 그해에 흉년이 든다고 믿었다. 치열한 접전이 벌어져 부상자가 속출하기도 했다.
③ 그밖에 춘천에서는 ‘초헌(舌軒) 태우기’ 놀이도 하였다. 음력 정월 보름이 되면 청년들이 초헌(조선시대 종2품 이상 관리들이 타고 다닌 외바퀴수레)을 만들어 동네를 지나가는 사람을 한참 끌고 다니다가, 그 사람의 절을 받은 다음에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것은 차전을 할 때에 적을 포로로 잡아 항복을 받던 것이 놀이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2) 안동의 동채싸움

① 추수가 끝나고 동·서부 유지들이 만나 새해 차전을 할 것을 결정하면, 각 마을에선 준비위원을 구성한다. 먼저 차전에 사용할 나무를 구하기 위해 사람을 뽑고 그 사람은 산에 가서 적당한 나무에 표시를 해두고 온다. 음력 정월 초순에 다시 목수와 인부가 함께 가서 표시한 나무를 베어오는데, 베기 전에 반드시 산신께 고사를 지내고 벤다.
② 베어온 나무로 동채를 만드는데, 원로의 지휘를 받아 목수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긴 나무의 윗머리를 엇갈리게 하여 여러 겹 밧줄로 든든하게 비끄러매서 만든다. 그 다음 비끄러맨 부분 밑의 중간에 1미터 정도 너비의 판자를 건너대고 그 위에 볏짚으로 짠 멍석 깔개를 깔았다. 이것은 편싸움을 지휘할 대장이 올라설 자리가 된다. 동채의 크기는 상황에 따라 크기가 조금씩 다른데 대체로 그림과 같다.
③ 놀이는 보통 오후 1시경에 시작하는데, 정한 시간이 되면 가장 혈기왕성한 청장년들이 동채를 메고 미리 정해놓은 넓은 들판으로 나아간다. 이때 싸움 장소 주위에는 동부·서부 양부의 수만 군중이 운집하여 인산인해를 이룬다.
④ 대열의 앞장에는 힘이 센 젊은이들이 팔짱을 끼고 대형을 지어 전진하였는데, 이들을 ‘머리꾼’이라고 한다. 머리꾼은 적진을 뚫고 들어가면서 자기편의 동채와 대장을 상대편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내는 역할을 한다. 동채를 멘 사람들을 ‘수레꾼’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앞채꾼’과 ‘뒤채꾼’이 있었다. 수레꾼들은 앞뒤에서 동채를 메고 대장의 지휘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거나 물러서기를 되풀이한다. 대장은 동채 위에 올라서서 왼손에는 동채머리에 맨 끈을 쥐고 오른손으로 지휘를 하면서 상대편을 공격하였다. 지휘할 때 구령을 하지 않고 오른손으로 신호를 보낸다. 보통 ‘앞으로’ 하면 전진이고, ‘뒤로‘ 하면 후진이며, 뒤에서 ’좌우로 흔들면‘ 회전하라는 신호가 된다.
⑤ 머리꾼과 수레꾼들은 상대편을 정면 또는 측면으로 밀거나 뒤로 물러서기를 하는데, 이들 옆에 ‘놀이꾼’도 가담한다. 이들은 형세를 보아 머리꾼이나 동채꾼으로 가담한다. 이때 동채 앞머리에 선 머리꾼들은 상대편 진지를 뚫고 들어가 상대편의 지휘자를 끌어내리든가 상대편의 동채를 눕히는 돌격대의 역할을 한다.
⑥ 이 놀이에는 엄격한 규칙이 있다. 대장은 손으로 대오(隊伍)를 지휘할 뿐 상대편의 동채머리를 붙잡지 못한다. 머리꾼들은 팔짱을 끼고 상대편을 밀고 나갈 수 있으나, 상대편 머리꾼이나 동채꾼에게 손질·발질을 못한다. 그러므로 머리꾼들은 절대로 팔짱을 풀면 안 된다. 그러나 실제 놀이상황이 되면 이와 같은 규제는 지켜지지 않고, 격투가 벌어져 부상자가 속출하기도 하는데, 일제는 이를 빌미로 놀이를 탄압하기도 하였다.
⑦ 동채가 땅에 닿거나 동채를 빼앗겼을 때는 지게 되는데, 옛날에는 상대편 동채를 부숴야 이기도록 했다고도 한다. 싸움에서 이기면 그해 풍년이 든다고 여겨 모두 최선을 다했고, 응원하는 사람도 서로 “동부 이겨라” “서부 이겨라”를 목청을 외쳤다. 이때 시집은 서부이고 친정은 동부인 부인의 경우, 동부를 응원하는 관습이 있어 차전의 승부 때문에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고 한다. 이긴 편은 머릿수건과 신발을 하늘 높이 던지면서 환호를 했고, 하루 종일 노래와 춤을 즐기며 놀았다고 한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상대를 공격하고 방어하는 대동놀이는 진취적인 기상뿐 아니라 공동체에서 자신의 역할을 가장 잘 일깨워준다. 힘든 줄도 모르고 소리 지르고 힘을 쓰는 가운데 신명이 고조되고 저절로 운명 공동체의 성원으로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 놀이는 농경사회에서는 마을 단위의 공동체 정신을 일깨웠다면, 오늘날에는 학교 또는 학급 단위의 공동체 정신을 일깨우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차전에 얽힌 전설에 대하여 1967년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無形文化財調査報告書)》에서 임동권(任東權)은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옛날 후백제의 왕 견훤은 지렁이였다. 지렁이가 사람이 되어서 안동에 왔다. 안동 사람들은 이 지렁이를 몰아내기 위해서 소금 배를 풀어 낙동강 물을 짜게 만들고, 안동 읍민이 모두 나와 팔짱을 끼고 어깨로 지렁이를 밀어 강물에 떨어뜨렸다. 그랬더니 지렁이는 짠물에 들어가 죽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후로 안동 사람들은 지렁이를 떠밀 때처럼 떼지어 차전놀이를 하였으니, 놀이를 할 때는 손을 쓰지 않고 팔짱을 낀 채 어깨로 서로 밀어낸다고 한다.”

 

 

다리밟기

준비물 - 없음

필요인원 - 제한없음

방법 - 정월 보름 저녁에 다리를 밟는 민속놀이. 이날 다리를 밟으면 1년 동안 다리[脚]에 병이 없고, 열두 다리를 밟으면 열두 달의 나쁜 기운을 몰아낼 수 있다는 주술적인 의미가 있다. 한자로는 ‘답교(踏橋)놀이’라고 하고, 강릉지방에서는 ‘다리빼앗기’라고도 한다.
 


정월 보름 저녁에 다리를 밟는 민속놀이. 이날 다리를 밟으면 1년 동안 다리[脚]에 병이 없고, 열두 다리를 밟으면 열두 달의 나쁜 기운을 몰아낼 수 있다는 주술적인 의미가 있다. 한자로는 ‘답교(踏橋)놀이’라고 하고, 강릉지방에서는 ‘다리빼앗기’라고도 한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정월 상원조(上元條)>에는 서울 풍속으로 다리밟기를 묘사하고 있다. “정월 보름에 사람들은 다리를 찾아가서 밤을 새워가며 산책을 하는데, 행렬이 끊어질 줄 모른다. 이것을 답교(踏橋), 즉 다리밟기라고 한다. 혹자가 말하기를 교(橋)를 우리말로 하면 다리로서, 다리를 밟음으로 다리[脚]에 병이 일 년 동안 안 걸린다는 속담의 풍속이 있다. 다리를 밟을 때는 광통교와 작은 광통교 및 수표교에서 많이 성행한다.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룬 군중들은 북을 치고 퉁소를 불며 법석이다.“
이수광(李磎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정월 보름에 달이 뜨면 그해의 풍년이 들 것인가를 점치며, 또 그날 밤 다리밟기를 한다. 이 놀이는 고려 때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평상시에 대단히 성행하였다. 남녀가 모여 들어차서 밤새도록 그치지 않으므로, 심지어는 법관이 그것을 금지하고 체포하기까지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이 풍속이 없어졌다.”라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사라졌던 풍속이 다시 되살아났다. 《정종실록(正宗實錄)》(1761년)에 “정월 보름 때 13일부터 사흘 동안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하고 숭례문과 홍인문을 잠그지 않고 시민이 성 밖으로 나가 다리밟기하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한 기록이 있고, “근년에 이르러서도 서울에는 서울 안에 있는 다리는 모조리 돌아다니며 밟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김매순(金邁淳)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는 “정월 보름날 저녁에 열두 다리를 건너면 열두 달 동안의 액(厄)을 막는 것이라 하여, 재상과 귀인으로부터 촌의 서민에 이르기까지 늙고 병든 사람 외에는 나오지 않는 이가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밖에 최상수의 《한국세시풍속(韓國歲時風俗)》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들어와 일부 양반들은 서민들과 어울리는 것이 싫다 하여 하루 앞서 14일 밤에 행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양반다리밟기’라 하였다.”고 특색 있는 다리밟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상의 기록으로 보아 다리밟기는 고려 때부터 시작된 놀이로, 남녀노소·귀천을 가리지 않고 1년 동안의 액막이를 한다는 주술적 속신(俗信)에 의해 행해졌다. 또한 밟는 다리[橋]와 사람 다리[脚]가 같이 발음되면서 다리의 병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행해졌다고 보인다.

지방마다 조금씩 특색이 있다. 몇몇 곳의 풍습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① 함경북도 회령지방에서는 음력 정월 보름이면 다리밟기를 하는데, 자기의 나이만큼 왔다 갔다 하기를 되풀이하였다. 그렇게 한 뒤에는 저고리의 동정을 떼어 그 끝에 돈을 맨 다음 남이 보지 않는 사이에 그것을 다리 한 구석에 두고 갔다고 한다.

② 이와 비슷한 풍속이 전라북도 부안지방에도 있었는데, 이 지방에서는 오직 아이들만 다리밟기를 하였다. 다리를 오가는 횟수도 역시 그 아이의 나이만큼 하였고, 동정에 돈을 매는 대신에 짚으로 만든 자루 속에 명태나 돈을 넣어서 다리 끝에 버렸다고 한다.

③ 함경남도 함흥지방에서는 만세교(萬歲橋)라는 긴 다리가 있었는데, 밤뿐만 아니라 낮에도 다리밟기를 하였다. 아이들은 낮에 하는 다리밟기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밤에는 만세교에 다리밟는 사람들로 빼곡이 차고, 노래를 부르거나 시를 읊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④ 특이한 다리밟기로 강릉에서는 다리 위에서 청년들이 격전을 벌였다. 즉 다리를 사이에 두고 이웃 마을과 대치하였는데, 이때 힘이 센 사람을 앞에 세우고 서로 상대방을 밀고 잡아당겨 다리를 빼앗는다. 이 과정에서 상대편을 다리 아래로 떨어뜨리기도 하였다. 이를 ‘다리빼앗기’라고 하는데, 위험하기 때문에 중지되어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⑤ 그밖에 충남 청양지방에서는 징검다리의 돌인 ‘노둣돌’을 밟는 놀이를 한다. 주로 부녀자들이 정월 14일에 노둣돌로 만들어진 징검다리를 여러 번 밟으며 오갔다. 이 놀이를 하면 무좀이 없어진다는 속설이 있어 서로 밟으러 갔다고 한다.
⑥ 다리를 건너는 방법도 지방마다 조금씩 달랐는데, 서울에서는 다리를 모조리 건너기도 하고, 열두 다리를 건너기도 했다. 다리 셋을 건너는 지방도 있고 어떤 지방에서는 제일 큰 다리나 제일 오래 된 다리를 자기의 나이 수대로 왕복하는 곳도 있다. 이밖에 다리를 건너는 동안 횃불을 들고 다니다가 꺼지지 않으면 행운이 온다고 믿는 지방도 있었다.






강강술래

준비물 - 없음

필요인원 - 제한없음

방법 -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와 도서지방에 전래되어 오는 부녀자들의 민속놀이. 주로 추석날 밤에 부녀자들이 손과 손을 잡고 〈강강술래〉라는 후렴이 있는 노래를 부르면서 원무(元舞)를 추는 놀이이다. 강강술래는 노래와 춤, 놀이가 잘 어우러진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여성놀이이다. 원무인 강강술래와 함께 ‘청어엮기’ ‘문지기놀이’ ‘고사리끊기’ 등의 놀이가 함께 행해진다. 강강술래는 주로 추석날 밤에 행해졌지만, 지방에 따라서는 정월 대보름 밤을 비롯하여 봄·여름·가을 어느 때든지 달 밝은 밤에 수시로 즐겨 왔다. 지금도 해남·진도지방에서 그 맥이 이어지고 있으며, 일찍부터 중요무형문화재 8호로 지정되어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다.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와 도서지방에 전래되어 오는 부녀자들의 민속놀이. 주로 추석날 밤에 부녀자들이 손과 손을 잡고 〈강강술래〉라는 후렴이 있는 노래를 부르면서 원무(元舞)를 추는 놀이이다. 강강술래는 노래와 춤, 놀이가 잘 어우러진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여성놀이이다. 원무인 강강술래와 함께 ‘청어엮기’ ‘문지기놀이’ ‘고사리끊기’ 등의 놀이가 함께 행해진다. 강강술래는 주로 추석날 밤에 행해졌지만, 지방에 따라서는 정월 대보름 밤을 비롯하여 봄·여름·가을 어느 때든지 달 밝은 밤에 수시로 즐겨 왔다. 지금도 해남·진도지방에서 그 맥이 이어지고 있으며, 일찍부터 중요무형문화재 8호로 지정되어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다.

 

강강술래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많다. 그러나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임진왜란(壬辰倭亂)과의 연관설이고, 다른 하나는 고대의 제사의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다.
전자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침략해 오는 왜적에게 우리 군사가 많은 것처럼 꾸미기 위해서, 부녀자들을 동원하여 남장시키고 손과 손을 마주잡고 둥그렇게 원을 만들며 춤추게 했더니, 이를 본 왜군들이 질겁하여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 설은 학자들에 의해 점차 부정되고 있지만 현재까지 교과서에는 이렇게 소개되고 있다.
후자의 경우는 고구려의 동맹(東盟), 부여의 영고(迎鼓), 예(濊)의 무천(舞天) 등에서 행해지는 제사의식에서 비롯되었거나, 만월제의(滿月祭儀)에서 나온 놀이라는 것과, 마한(馬韓) 때부터 내려오는 달맞이와 수확의례의 농경적인 집단가무 등 다양한 설이 있다.
강강술래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문헌은, 조선 말기 정만조(鄭萬朝)가 쓴《은파유필》이 있다. “높고 낮은 소리를 서로 주고받으며 느릿느릿 돌고 돈다. 한동안 섰다가 이리저리 돌아가네. 젊은 여인들의 마음에는 사내 오길 기다리네. 강강술래를 하니 때맞추어 역시 사내들이 찾아오네. 이날 밤 집집마다 여자들이 두루 모여서 달을 밟으며 노래하는데, 한 여성이 선창을 하면 여러 여성들이 느릿느릿 소리를 받기를 강강술래라 한다.”
강강술래의 어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먼저 한자 기원설로, ‘强羌水越來(강강수월래)’ 즉 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온다는 뜻으로 풀이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왜적을 경계하라는 뜻의 적개심을 높이려는 구호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억지로 한자를 꿰어 맞췄다는 견해가 많다. 다른 설은 우리말 기원설로, 강강술래의 ‘강’은 원(圓)을 뜻하고, ‘술래’는 수레[輪]를 의미하는 말로, 둥글고 둥글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국한문 혼합기원설로, ‘강강’은 우리말 원(둥근), ‘술래’는 순유(巡遊)·순라(巡羅)에서 나왔다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전라도 남해안지방의 사투리 ‘강강’은 둥근 원을 만들고 돈다는 뜻이며, ‘술래’는 도적을 잡는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그 기원과 어원에 대하여 뚜렷이 밝혀진 바가 없고, 다만 추측될 따름이다. 다만 강강술래가 먼 옛날부터 집단의 대동적인 축제에서 시작된 것으로, 주로 분포지역이 해안지방인 점에서 주로 남자들은 오랫동안 고기를 잡으러 나가고, 여성들이 마을에 남아 있으면서 달 밝은 밤이면 풍농(豊農)과 만선(滿船)을 기원하는 공동굿 형식으로 발달되어 왔다고 할 수 있겠다.

 

걷기와 뛰기가 주를 이루지만, 중간 중간에 여흥놀이로 멍석말기와 풀기,문지기놀이,남생이놀이,기와밟기,고사리끊기 등이 있다.

1) 가장 중심이 되는 원무(圓舞)는 주로 오른쪽으로(시계 반대방향) 돈다.
2) 손잡기와 걷기: 오른손은 손등이 위로, 왼손은 손바닥이 위로 가게 옆 사람을 잡는다. 걷기에서의 발은 뒤꿈치부터 노래에 맞추어 딛는다.


<걷기에서 부르는 노래>

달떠온다 달떠온다 / 강강술래 동해동창 달떠온다 / 강강술래
저 - 달이 뉘달인가 / 강강술래 강호방네 달이라고 / 강강술래
강호방은 어디가고 / 강강술래 저달뜬줄 모르는가 / 강강술래
* 강호방은 강씨 성을 가진 호방(戶房;치안을 담당하는 지방벼슬)임.

3) 뛰기 : 걷기보다 빠르게 겅중겅중 노래에 맞추어 뛴다. 다리를 많이 벌리지 않고 무릎을 올리면서 흥겹게 뛴다.

<뛰기에서 부르는 노래>
뛰어보세 뛰어보세 / 강강술래 윽신윽신 뛰어나 보세 / 강강술래
얕은 마당 깊어지고 / 강강술래 깊은 마당 얕아나지게 / 강강술래

3) 멍석 말기와 풀기 : 노래에 맞추어 아래 그림과 같은 방향으로 멍석을 말았다 푼다. 돌아나올 때도 처음 말기 시작한 사람이 방향을 달리하면 안되고, 계속 같은 방향으로 말았다가 앞사람을 따라 풀어져 나와야 한다.

<멍석 말기와 풀기에서 부르는 노래>

몰자몰자 덕석몰자 // 비 온다 덕석몰자
풀자풀자 덕석풀자 // 볕 난다 덕석풀자

4) 문지기놀이 : 멍석말기와 풀기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문을 만들어 나가는 문지기놀이가 이어진다. 맨 앞사람과 다음 사람이 문을 만들면, 이어져 나오는 사람이 차례로 문을 만들어 나간다.

<문지기놀이에서 부르는 노래>
문지기 문지기 문 열어 주소 / 열쇠 없어 못 열겠네
어 떤 대문에 들어갈까 ― / 동대문으로 들어가
문지기 문지기 문 열어 주소 / 열쇠 없어 못 열겠네
어 떤 대문에 들어갈까 ― / 남대문으로 들어가
문지기 문지기 문 열어 주소 / 열쇠 없어 못 열겠네
어 떤 대문에 들어갈까 ― / 서대문으로 들어가
문지기 문지기 문 열어 주소 / 덜커덩떵 열렸네

5) 청어엮기 : 노래에 맞추어 청어를 엮는다. 청어 엮는 방법은 아래와 같은데, 보통 여섯 명 내지 일곱 명이 한 모둠이 되어 청어를 엮는다.


6) 청어풀기 : 청어를 다 엮은 다음 마찬가지로 노래에 맞추어 청어를 푼다.


<청어엮기와 청어풀기 노래>

청청 청어 엮자 위도 군산 청어 엮자
청청 청어 풀자 위도 군산 청어 풀자

7) 고사리끊기 : 노래에 맞추어 고사리를 끊는다. 끊는 방법은 아래와 같다.


8) 기와밟기 : 앞사람의 허리에 허리를 잡고 고개를 숙인 채 길게 늘어선다. 그러면 한 사람이 그 위에 올라가 등을 밟고 올라서고 옆에서 두 명이 양손을 잡아 떨어지지 않도록 보조한다. 이때 노래의 박자에 맞춰 천천히 걷는다.

<기와밟기 노래>

어딧골 기완가 전라도 기왈세 // 몇 닷 냥 쳤는가 스물닷 냥 쳤네

9) 남생이놀이 : 남생이놀이는 모두 원이 된 상태에서 자리에 앉는다. 앞소리가 나와서 놀 사람들을 부르면 흥겹게 원 안으로 나온다. 이때 점잖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남생이처럼 뒤뚱뒤뚱 까불까불 나오고, 나머지는 뒷소리로 “촐레촐레가 잘 논다”라고 노래한다.

 





 

 

제기차기







제기를 차면서 재주를 부리거나 누가 여러 번 찼는가를 겨루는 남자아이들의 놀이. 제기는 구멍 뚫린 엽전을 한지나 비단으로 싸서 그 끝을 갈래갈래 찢어서 술을 만든 놀잇감이다. 요즘은 엽전 대신 엽전 모양의 구멍뚫린 쇠붙이를 이용하고, 한지나 비단 대신 비닐을 이용한다. 주로 음력 정초(正初)를 전후한 겨울철에 전국적으로 널리 행해진 놀이이다.
제기차기는 지방에 따라 다르게 불리기도 하는데, 평안도에서는 ‘테기차기’ ‘체기차기’, 전라도에서는 ‘재기차기’, 제주도에서는 ‘쪽기차기’ 등으로 불린다. 그러나 가장 흔히 쓰이는 말은 ‘제기차기’이다.

기산풍속도첩-제기차기

이 놀이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일설에 의하면 고대 중국에서 무술을 연마하기 위하여 고안된 ‘축국(蹴鞠)’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그 시기는 중국의 전설적인 왕 황제(黃帝, B.C 2700년경) 때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런 견해는 초기의 연구자들에 의해 정설로 받아들여져, 우리 나라와 관련된 옛 문헌에서 축국을 찾아 제기차기와의 연관을 입증하였다.
《구당서(舊唐書)》<고구려조(高句麗條)>에 ‘인능축국(人能蹴鞠)’하는 고구려 사람을 소개하고 있고, 《삼국유사(三國遺事)》 <김춘추편(金春秋編>에 김춘추와 김유신(金庾信)이 축국을 하다가 김유신의 옷끈이 끊어졌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 《수서(隋書)》<동이전(東夷傳)> 백제조(百濟條)에 백제에서도 축국을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축국은 제기차기와 전혀 다른 오늘날의 축구와 같은 스포츠적인 구희(球戱)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삼국유사》에 나오는 내용을 살펴보면, “축국은 가죽주머니에 헝겊을 채워 넣고 양편에 대나무를 세워, 그 꼭대기에 그물을 얹어놓고 가죽주머니를 차서 위로 많이 올리는 편이 이기는 놀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왕운정(汪雲程)의 《축국도보(蹴鞠圖譜)》에 의한 축국도와 정조(正祖) 때 한교(韓嶠)가 편술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권4 <격구조(擊球條)>에 축국을 설명하기를 “옛날은 털을 묶어서 만들었고 오늘날은 가죽 태(胎)로써 만드는데, 그 속에 바람을 넣어 이를 찬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축국은 제기차기의 원형이 아니라 오늘날의 축구에 가까운 구기로 보여진다


 

1) 제기 만들기


제기는 시대에 따라 만드는 방법이 달라져 왔다. 근래에 가장 많이 이용한 방법은, 구멍이 뚫린 옛날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쇠붙이에다 한지나 비단 따위로 싸서 7~8cm 정도의 술이 달리게 만든다. 또 종이 대신에 색실이나 털실로 술을 만들기도 한다. 오늘날은 비닐로 된 제기를 많이 사용한다.
① 창호지제기 ― 질기고 얇은 창호지를 접어서 엽전을 싸고, 종이의 양끝을 엽전 구멍에 꿴다. 그 다음 종이를 잘게 찢어, 각 오리를 손으로 비벼서 술처럼 만든다.
② 천제기 ― 손바닥만한 천으로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크기의 쇳조각을 싸고, 중심에 닭털을 여러 개 꽂아 술을 만든다. 닭털이 빠지지 않게 실로 잘 동여맨다. 제기에 새 깃이나 색실오리·창호지 등으로 술을 만드는 것은, 발로 차올린 제기가 똑바로 떨어져서 발에 잘 닿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③ 비닐제기 ― 적당한 크기의 비닐을 펴서 가운데에 동전을 넣고 둘둘 만다. 그리고 동전이 빠지지 않도록 머리 부분을 실이나 고무줄로 동여매고, 가위로 잘라 술을 만든다.

2) 놀이방법

① 제기 차는 다양한 방법




 

제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창의성이 길러지게 된다. 그리고 이 놀이를 하려면 정신을 한 곳에 모아야 제대로 찰 수 있기 때문에 주의 집중력이 길러지며, 전신운동으로 적합하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셔틀콕차기’라고 해서 제기차기와 흡사한 놀이가 있다. 셔틀콕은 다만 제기의 술이 날짐승의 깃털인 점만 다르다.

 

 

비석치기(비사치기)


 

손바닥만한 납작한 돌을 땅바닥에 세우고, 다른 돌을 던져 쓰러뜨리며 노는 놀이. 돌을 이용한 놀이 가운데 놀이방법이나 기술이 가장 발달된 놀이로, ‘비석까기‘ ’비석차기’ ‘비사치기’라고도 한다. 우리 나라 전역에서 행해졌고, 지금도 곳곳에서 놀이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비석치기에 대한 옛 문헌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비석치기’라는 놀이의 이름에서 그 기원을 추론하고 있다. 대표적인 주장은 비석치기의 비석이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碑石)이란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돌이 날아다닌다는 비석(飛石)이란 주장이다.
전자의 주장은 예전에 권력층이나 부유층이 자기들의 조상 또는 자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송덕비(頌德碑)라는 것을 세웠는데, 이 송덕비는 서민의 눈에 곱게 보일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비석에 대고 욕설을 하거나 발길질로 비석을 차면서 평소 쌓인 울분을 폭발시켰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시작된 비석치기가 점차 놀이화되어 어린이 놀이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하여, 비석치기의 시원(始原)을 봉건제가 시작되는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로 잡고 있다.
후자의 주장은 돌을 가지고 던져서 맞히는 놀이라는 점에서 투석(投石)놀이나 석전(石戰)놀이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다. 원시시대에 인류는 맹수로부터 자기 보호의 수단으로 투석법(投石法)을 터득하게 되었고, 이는 부족간의 전쟁에도 활용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런 투석전이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행해졌는데, 그 유습(遺習)이 세시풍속화되고 변형되어 비석치기란 어린이놀이가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 유래를 원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서로 다른 주장이 있는데, 현재 후자보다 전자가 널리 알려지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전자의 주장은 비석치기의 다양한 명칭을 살펴보면 인위적인 추론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비석치기는 ‘돌맞히기’ ‘바사치기’ ‘비사잭기’ ‘돌치기’라는 순수한 우리말이 있는 것을 보면, 비석치기의 비석은 송덕비의 비석이 아니라 돌을 가지고 던져 맞히는 놀이란 뜻에서 날아다니는 돌[飛石]이 더 적합하다고 여겨진다.

 

이 놀이는 전국적으로 하던 놀이이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놀이방법이 조금씩 다르고, 단계에 따라 부르는 이름도 다르다. 그러나 세워진 비석을 던져 맞히는 부분은 공통적이다. 아래 소개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널리 행해지는 방법이다.

1) 놀이방법


① 4~5m 거리를 두고 길게 두 줄을 긋는다.
② 각자 손바닥만한 돌을 준비한 다음 두 편으로 나눈다. 각 편 대장은 가위바위보를 해서 누가 먼저 공격할 것인지를 정한다.
③ 진 편은 건너편 선 위에 비석을 세워놓고, 이긴 편은 차례로 비석을 맞혀 쓰러뜨린다.
④ 맞히면 계속 던질 자격이 주어지고, 맞히지 못하면 그 사람은 죽게 된다. 예를 들어 3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첫 번째 사람이 한 개를 맞힌 다음, 두 번째 사람이 맞히지 못했고, 세 번째 사람이 또 맞히지 못했을 경우, 처음 맞힌 사람이 나머지 2개를 차례로 던져 맞혀야 한다. 이때 계속 2개를 맞히면 세워진 비석 3개를 모두 맞혔기 때문에 다음 단계로 올라가고, 맞히지 못했던 두 사람도 다시 살아나게 된다.
⑤ 가는 도중에 망을 땅에 떨어뜨리거나, 망을 던져서 비석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죽는다.
⑥ 만약 비석이 쓰러졌는데 비석끼리 닿아 있으면, 이는 쓰러뜨린 것으로 보지 않고 ‘반비(반비석)’라고 해서 수직으로 세워놓는다. 던진 사람도 죽은 것이 아니라 다시 던질 기회를 갖게 된다. 예를 들어 ‘신문팔이’ 단계에서 하다가 반비가 되었다면, 수직으로 세워놓은 비석을 신문팔이를 해서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처음처럼 출발선에서 직접 던져 쓰러뜨려야 한다. 수직으로 서 있기 때문에 잘 쓰러지지 않아 애를 먹는다. 반비는 그 판에서만 유효하다. 즉 신문팔이에서 반비가 나와 맞히지 못했다면, 다음 번 자기 차례가 되었을 때는 반비는 하지 않는다.
⑦ 세워진 돌이 한 개라도 남아 있는데, 더 이상 던질 자격이 있는 사람이 없으면, 공격과 수비가 바뀐다.
⑧ 공격편이 다음 번 자기 차례가 되었을 때는 그 단계부터 시작한다. 즉 ‘토끼뜀’ 단계에서 모두 죽었다면 다음 번 차례에서는 처음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토끼뜀부터 하게 된다.
⑨ 마지막 단계인 ‘장님’(봉사)까지 먼저 통과하면 이긴다.

2) 비석치기의 여러 단계

각 단계를 통과하면 차례로 다음 단계를 한다. 놀이하는 사람들끼리 정해서 단계를 조정할 수 있다. 다음은 일반적인 단계이다.

① 던지기
(ㄱ) 선 채로 그냥 던지기
(ㄴ) 한 발 뛰어 던지기(한발걸이)와 두발 뛰어 던지기(두발걸이)
(ㄷ) 세 발 뛰어 던지기(세발걸이)

② 세 발 뛰어 차기(재기) ― 망을 던져놓고 세 발을 뛴 다음 네 발째 차서 비석을 쓰러뜨린다.
③ 발등(도둑발) ― 망을 발등 위에 올려놓고 비석 가까이 가서 망으로 쓰러뜨린다. 오른발로 먼저 하고 다음은 왼발로 한다.
④ 발목(토끼뜀) ― 망을 발목 사이에 끼우고 깡충깡충 뛰어, 비석 가까이 가서 망을 비석 위에 떨어뜨려 쓰러뜨린다.
⑤ 무릎(오줌싸개) ― 망을 무릎 사이에 끼우고 어기적어기적 걸어, 비석 가까이 가서 망을 비석 위에 떨어뜨려 쓰러뜨린다.
⑥ 가랑이(똥꼬, 딸 낳고 아들 낳기) ― 망이 보이지 않도록 가랑이 사이에 끼우고 비석 가까이 걸어가서 뒤돌아선 다음, 망을 비석 위에 떨어뜨려 쓰러뜨린다.
⑦ 배(배사장) ― 망을 배 위에 올려놓고 비석 가까이 가서 망을 떨어뜨려 쓰러뜨린다.
⑧ 신문팔이 ― 망을 겨드랑이에 끼우고 가서 망을 떨어뜨려 쓰러뜨린다.
⑨ 어깨(훈장) ― 어깨 위에 망을 올려놓고 가서 망을 떨어뜨려 쓰러뜨린다. 오른 어깨, 왼 어깨의 순서로 한다.
⑩ 목 ― 어깨와 목 사이에 망을 끼워놓고 가서 망을 떨어뜨려 쓰러뜨린다.
⑪ 머리(떡장수) ― 머리 위에 망을 올려놓고 가서 망을 떨어뜨려 쓰러뜨린다.
⑫ 장님(봉사) ― 망을 던져놓고 눈을 감은 상태에서 걸어가, 망을 찾아 눈을 감은 채로 던져 쓰러뜨린다.

 

이 놀이를 함으로써 거리 감각과 집중력, 그리고 정확성을 기를 수 있다. 그리고 신체의 각 부위를 활용함으로써 전신운동을 하면서도 동시에 조심스러움을 키울 수 있는 놀이이다.

 

이 놀이의 각 단계에 붙여진 이름을 살펴보면 놀이상황과 동작이 일치됨을 볼 수 있다.
도둑처럼 살금살금 가야 한다고 해서 ‘도둑발’, 발 사이에 돌을 넣고 토끼처럼 뛴다고 해서 ‘토끼뜀’, 오줌을 싸면 걷는 폼이 어기적어기적하게 되는데 이와 같다고 해서 ‘오줌싸개’, 사타구니에서 아기가 나온다고 ‘딸 낳고 아들 낳기’, 배를 쭉 내밀고 가야 한다고 해서 ‘배사장’, 어깨에 견장을 단 것 같다고 해서 ‘훈장’(계급장), 신문을 겨드랑이에 끼고 돌리는 모습을 본뜬 ‘신문팔이’ 등 그 이름만 들어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알 수 있다. 각각의 이름마다 조상들의 지혜와 비유가 듬뿍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생이놀이 : 남생이놀이는 모두 원이 된 상태에서 자리에 앉는다. 앞소리가 나와서 놀 사람들을 부르면 흥겹게 원 안으로 나온다.

 

 

씨름

준비물 - 샅바

필요인원 - 두사람이상.제한없음

방법 - 두 사람이 샅바나 띠를 넓적다리에 걸어 서로 잡고, 일정한 규칙 아래 기량을 겨루어 먼저 땅에 넘어뜨리면 이기는 한국 고유의 운동. 단오를 비롯하여 여러 명절날은 물론, 농한기나 사람이 모이는 장터 등지에서 전국적으로 행해진 대표적인 민속놀이이다

 


 

 

두 사람이 샅바나 띠를 넓적다리에 걸어 서로 잡고, 일정한 규칙 아래 기량을 겨루어 먼저 땅에 넘어뜨리면 이기는 한국 고유의 운동. 단오를 비롯하여 여러 명절날은 물론, 농한기나 사람이 모이는 장터 등지에서 전국적으로 행해진 대표적인 민속놀이이다. 또한 씨름은 원시시대부터 오늘날까지 행해지고 있는 대표적인 힘겨루기 놀이로서, 어른들의 씨름이 있는가 하면 아이들끼리 하는 ‘애기씨름’도 있다.
씨름은 한자로는 각희(角戱)·각저(角·)·각력(角力)·상박(相撲)이라고 부른다. ‘씨름’이라는 말의 어원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일부에서 ‘누구씨(성씨)와 힘을 가름한다’는 말에서 ‘씨’자와 ‘름’자를 따서 씨름이라고 했다는 견해가 있으나, 타당한 학설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씨름의 이름에 대한 타당한 학설은 순수한 우리말의 용례에서 찾을 수 있다. 영남지방의 말에 서로 버티고 힘을 겨루는 것을 ‘씨룬다’라고 하며, 서로 버티고 힘을 주고 겨루어보라는 말에 ‘씨루어 봐라‘라는 말이 있다. 또 오랫동안 버티고 있다는 말을 ’되게 씨룬다‘ 또는 ’되게 씨루네‘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씨름이라는 말은 동사 ‘씨룬다’에서 씨룸→씨름으로 명사화된 것이라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가산풍속도첩 - 씨름

 

두 사람이 힘을 겨루는 투기 운동이 시작된 것은 인류의 탄생과 때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무기가 발명되기 이전의 인간은 맹수(猛獸)나 기타 종족에게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오로지 자기의 힘과 체력으로 싸워서 이겨야만 했다. 그러므로 씨름은 원시시대에는 자기보호를 위한 생활의 수단으로 행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 점차 오늘날과 같은 놀이로 발전한다. 따라서 씨름은 그 기원을 원시시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전세계적으로 다양한 씨름이 존재한다.
우리 나라의 씨름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만주(滿洲) 퉁화성[通化省] 지안현[輯安縣] 퉁거우[通溝]의 환도성(丸都城)에서 발견된 각저총(角抵塚)에 씨름하는 벽화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때 이미 씨름이 널리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또 고려시대에는 《고려사(高麗史)》권36에 “충혜왕(忠惠王) 원년(1339년)에 왕이 나랏일을 총신들에게 맡기고 매일 궁중에서 잡무에 종사하는 소동들과 씨름을 하여 위와 아래가 없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도 씨름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씨름은 널리 보급된다. 《세종실록(世宗實錄)》권31에 두 사신이 목멱산(木覓山;지금의 남산)에 올라 역사들에게 씨름을 시키라고 하였고, 세종(世宗) 13년(1431)에 왕이 경회루에 앉아 씨름을 하게 한 뒤 차등으로 상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명종실록(明宗實錄)》권26과 《현종실록(顯宗實錄)》권7 등에 씨름에 관한 내용이 나오며,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5월 단오조>에 금산지방(지금의 김천) 풍속으로 단옷날에 수천 명이 씨름을 구경했다는 기록 등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는 씨름이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보급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임란(壬亂)과 호란(胡亂)을 겪은 후 무예수련의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국가에서 장려하는 무예의 일과로 공식화되었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보면 현종(顯宗) 때 무예청(武藝廳)에서 각저를 무과시험 종목에 포함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씨름이 공식화되자 전국 각지에서 씨름이 되살아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양상이 달라지고 시대의 변천에 따라 군인의 무예로서보다 민속놀이로 발전해 왔다고 하겠다.
특히 우리 나라의 전통씨름 방식을 보면 개인의 힘과 재능을 겨루는데 그치지 않고, 마을단위의 대동놀이적 성격도 갖고 있다. 즉 마을 단위의 대동놀이에서 벌어지는 씨름판은 씨름하는 사람들만의 겨루기가 아니라, 마을을 대표해서 개인의 명예와 마을의 명예를 함께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이기면 마을 전체가 이기는 것이고 지면 모두가 애통해했다.
근대에 와서 1912년 최초로 씨름대회가 서울 단성사극장에서 열렸고, 1915년에는 서울 광무대극장 주관으로 이틀 동안 씨름대회가 열렸다. 그 후로 연례행사로 극장에서 씨름대회가 열렸으나, 어떤 조직적인 씨름대회라기보다 다분히 흥행성을 띤 대회였다. 그러다가 조선씨름협회가 생기고, 1927년 전국적인 씨름대회가 열리는 등 조직적인 모습을 띠다가 일제의 압력으로 1942년부터 열리지 못하였다. 해방이 되고 1947년 제7회 씨름대회가 개최된 이후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1972년 씨름이 텔레비전에 중계되면서 본격적인 스포츠로 변화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날에는 씨름의 대전방식이 맞붙기(토너먼트), 돌려붙기(리그) 등 오늘날 통용되는 방식과 구별되는 ‘지워내기’란 형식이 있었다. 지워내기는 이긴 사람이 계속해서 상대편 선수와 싸워 나가는 대전방식이다. 즉 아이에서부터 어른으로, 하수에서 고수까지 순차적으로 경기가 이어지기 때문에 연령과 체급, 그리고 실력차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동적으로 조절된다. 이런 지워내기 형식 때문에 씨름을 대동놀이로 파악되기도 한다.
또한 줄을 허리에 매는 ‘줄씨름’이 있고, 줄을 허리에 매고 다리에 매는 씨름이 있다. 오늘날 씨름은 후자에 속한다.
허리에 매고 다리에 매는 씨름에는 왼씨름과 오른씨름으로 구분한다. 지역적으로 보면 왼씨름은 주로 함경·황해·평안·강원·충청도에서 했고, 오른씨름은 경기·전라도 등지에서 행해졌다고 한다. 이런 지역 특색이 1972년 씨름협회에 의해 ‘왼씨름’으로 통일되면서, 오늘날에는 왼씨름이 일반화되었다. 다음은 왼씨름을 기준으로 놀이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샅바 고리 매는 법





씨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샅바이다. 샅바 고리를 먼저 맨 다음 다리에 걸어 샅바를 매게 되는데, 아래 그림과 같다.

① 긴 띠를 자기의 오른쪽 다리 대퇴부 상단둘레보다 5cm쯤 더 여유를 두고 한바퀴 돌린 후, 긴 띠를 위로 올려놓는다.
② 완성 후 짧은 띠가 8~10cm 정도 되도록 겹쳐서 접는다.
③ 긴 띠를 밑에서 둥글게 만든 후, 안쪽 방향으로 잡아 뽑는다.
④ 긴 띠를 위에서 아래로 둥글게 만든 후 끼워 넣고, 고리가 될 바깥쪽 방향으로 잡아당기면 그림과 같은 샅바 고리가 만들어진다.

2) 샅바 매는 법






① 샅바 고리를 오른쪽 대퇴부 상단에 끼운다.
② 긴 띠를 등 뒤로 돌려 복부를 지나게 하여, 다리 샅바 고리에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끼운다.
③ 긴 띠를 안쪽 샅바 고리와 긴 띠의 교차점 밑 부분을 경유하여 둥글게 한 후 위로 뽑아 올린다.
④ 뽑아 올린 긴 띠를 둥글게 된 부위에 위에서 아래로 끼워 넣고, 당겨 샅바 길이가 17cm 이내로 풀어지지 않게 한다.
⑤ 묶고 남은 띠는 복부쪽 샅바에 적당히 끼워 넣는다.

3) 샅바 잡는 요령

① 서로 마주보고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고 앉는다.
② 자기의 오른쪽 어깨와 상대 오른쪽 어깨를 밀착시키고, 자기 오른손으로 상대의 왼쪽 허리샅바를 재봉선을 넘지 않게 잡는다.
③ 자기 왼손으로 상대 오른쪽 다리샅바를 안쪽으로 끼워 밖으로 잡는다.

4) 준비자세

① 샅바를 잡고 일어서서 자기가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좋은 자세로 다리를 적당히 벌린다.
② 무릎은 적당히 곧게 펴고, 서로 오른쪽 다리를 뒤로 물리지 못하게 하고 왼쪽 다리를 세워 서서히 일어난다.
③ 서로 완전히 일어섰을 경우, 어깨는 서로 맞대고 등은 수평이 되게 한다.

5) 여러 가지 기술

씨름의 기술은 크게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손(팔)기술 ― 앞무릎치기, 앞무릎치기 되치기(잡채기), 비켜 앞무릎치기, 연속 앞무릎치기, 뒷무릎치기, 뒷무릎치기 되치기(밧다리), 오금당기기, 옆무릎치기, 손목잡아 짚기, 앞무릎짚어 오금당기기, 발목당기기, 오금당겨 안다리치기 외
② 발(다리)기술 ― 밧다리치기, 밧다리후리기, 안다리걸기, 안다리되치기(빗장걸이), 안다리걸어 돌리기, 호미걸이, 덧걸이, 밧다리배지기 외
③ 들(허리)기술 ― 들배지기, 엉덩배지기, 돌림배지기, 이중배지기, 들어 주저앉히기, 들어잡채기, 들어 앞무릎치기, 밀어치기
④ 혼성(종합)기술 ― 잡채기, 차돌리기, 등쳐밧다리, 등쳐돌리기, 정면뒤집기, 팔걸어 뒤집기, 목말아 뒤집기 외

이중에 많이 사용하는 몇 가지만 자세히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 앞무릎치기 ― 상대방의 중심이 앞으로 쏠리거나 자기에게 의지하는 자세로 서 있을 때 실시한다.





* 뒷무릎치기 ― 상대의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보다 앞쪽으로 나와 있을 때 실시한다.





* 오금당기기 ― 상대의 오른쪽 다리가 자기의 앞으로 많이 나왔을 때 주로 공격하는 기술이다.





* 안다리걸기 ― 상대의 왼쪽 다리가 자기의 오른쪽 다리 가까이 있거나, 자세가 낮은 사람이 자세가 높은 상대에게 주로 사용하는 공격기술이다.





* 밧다리걸기 ― 상대의 오른쪽 다리가 자기의 오른쪽 다리나 몸통 가까이 있을 때 주로 사용하고 다리가 길고 키가 큰 사람이 주로 사용하는 공격기술이다.





* 호미걸이 ― 상대의 다리가 자기 앞쪽으로 많이 나와 있을 때나 상대의 중심이 상대의 뒤로 치우쳐 있을 때 사용한다.





* 들배지기 ― 상대방을 들어서 넘기는 기술로. 들기 기술의 기본동작이다. 키가 크고 덩치가 큰 사람이 키가 작고 덩치가 작은 사람에게 주로 사용한다.





* 엉덩배지기 ― 상대를 들지 않고 넘기는 방법으로 주로 들 수가 없을 때 사용하는 기술이다.





* 돌림배지기 ― 상대를 들지 않고 넘기는 배지기 기술이다.

윷놀이


 

윷을 던져 엎어지고 젖혀지는 결과를 가지고 말판에 말을 쓰면서 겨루는 놀이. 사람이 많을 때는 두 편 또는 세 편으로 편을 나누어서 논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놀이로, 특히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날까지 행해졌는데, 정초에 그해 농사의 풍흉(豊凶)을 점치기도 하였다. 요즘에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널리 행해진다. 한자로는 척사(擲柶)·사희(柶戱)라고 하기도 한다

 

윷놀이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농사의 풍흉을 점치고, 개인적으로는 한해의 길흉을 점치는 점술도구로 시작되어, 삼국시대·고려시대·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점차 놀이로 변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윷놀이가 소개되거나 언급된 문헌자료는 무척 많다. 가장 오래된 것은 중국의 《북사(北史)》와 《태평어람(太平御覽)》이다. 이 문헌들은 백제에는 ‘저포(樗蒲)’ ‘악삭(握·)’ 등의 잡희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소개하는 저포는 오늘날의 윷놀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 나라 윷이 아니라, 중국 사람들이 놀던 윷으로 우리 나라의 윷과 비슷한 것이다. 이 자료들을 근거로 할 때, 윷의 기원은 삼국시대 이전으로 추정된다.
일부에서는 윷놀이가 부여(夫餘)의 관직명인 저가(·加)·구가(狗加)·우가(牛加)·마가(馬加)의 이름을 본떠서 만든 놀이로, 부여 때부터 전해오는 놀이라고 한다. 즉 저가는 돼지로서 윷의 도에 해당하고, 구가는 개로서 윷의 개, 우가는 소로서 윷, 마가는 말로서 모라고 하는데, 대체로 짐승의 크기와 속도를 고려해서 순서를 정한 것 같다.
8세기경의 일본의 옛 노래책인 《만엽집(萬葉集)》을 보면, 일본의 윷놀이는 우리 나라에서 그 방법을 배워 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윷놀이는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고려 말 이색(李穡)의《목은집(牧隱集)》에 윷놀이에 관한 시와 놀이장면, 윷말판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오늘날과 같은 29밭으로 된 윷말판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김문표(金文豹)는《중경지》에서 ‘사도설(柶圖說)’을 펴서, 말판 바깥의 둥근 모양은 하늘을, 안의 모난 것은 땅을 본뜬 것이니 하늘이 땅의 바깥까지 감싸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했다. 나아가 말판을 이루는 점들은 별자리를 뜻하는 것으로, 새벽의 북극성을 중심으로 뭇별들이 둘러싸고 있음을 형상화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윷말의 움직임을 해에 비유하고 말판의 네 점과 중점을 오행에 견주어 설명하고 있다.
이런 내용은 이규경(李圭景)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사희변증설(柶戱辨證說)‘로 이어져, 윷놀이는 그해 농사를 점치던 농점(農占)에서 시작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권5 <사희조>에서 윷놀이가 고려의 유속(遺俗)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밖에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제석조>에 윷가락을 던져서 새해의 길흉을 점치는 풍속에 대해 소개하고 있고, 유득공(柳得恭)의《경도잡지(京都雜志)》<원일조>에는 윷가락을 던져 나온 64괘에 따른 풀이까지 실려 있다.
미국인 스튜어트 컬린이 1895년에 쓴 《한국의 놀이》에 “현재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놀이는 윷놀이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말기까지 그 전통이 이어졌다고 여겨진다.

 

1) 놀이용구

① 윷 ― 윷의 모양은 지방에 따라 각기 특색이 있으나 크기에 따라 장작윷과 밤윷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ㄱ) 장작윷(장윷·가락윷)






가락으로 되어 있다고 가락윷, 장작개비처럼 되어 있다고 장작윷이라고 한다. 윷은 박달나무·통싸리나무·밤나무·복숭아나무 등으로 만드는데, 보통 밤나무로 가장 많이 만든다. 밤나무는 잘 쪼개지고 속은 희고 겉은 검기 때문에, 어두운 등잔불 밑에서도 잘 구분할 수 있어서 많이 이용되었다.
길이는 15~20cm, 지름 3~5cm 정도의 둥근 나무 2개를 길이로 반쪽을 내어 네 가락을 만든다. 그런 다음 칼이나 낫 등으로 잘 다듬고 기름이나 색깔을 칠하여 모양을 낸다. 다듬을 때 배를 약간 불룩하게 하기 위하여 배의 계선(界線)을 둥글게 깎아낸다. 그래야 윷을 던졌을 때 잘 구르며, 굴러서 엎어질 듯 하다가 젖혀지고 젖혀질 듯 하다가도 엎어지는 변화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로 남자들이 많이 가지고 노는 밤나무윷은 크고 무겁게 만들고, 여자들이 가지고 노는 박달나무윷은 작고 예쁘게 만든다. 장작윷은 서울을 비롯한 중부지방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ㄴ) 밤윷(좀윷)






엄지손가락 정도 굵기의 나무로 2~3cm 정도 되게 만든 것인데, 밤알만 하다고 하여 밤윷이라고 불렀다. 이 밤윷은 조그만 밥공기 등의 그릇에 담아 내젓다가 바닥에 내던져서 노는 것으로, 남부지방에서 많이 하고 있다.
그밖에 재료에 따라 콩윷·팥윷 등이 있는데, 곡물을 이용한 이런 윷은 북부지방에서 많이 한다.

② 윷판과 깔판
말판은 모두 29밭으로 되어 있는데, 크게 나뭇가지처럼 생긴 ‘가지말판’과 ‘방말판’ 두 가지가 있다. 깔판은 푹신하여 윷가락이 구르지 않는 멍석이나 짚방석 같을 것을 사용했다.







2) 윷 던지기







윷가락은 네 개를 나란히 세우거나, 두 가락씩 우물정자형(井)으로 짜서 오른손의 엄지손가락과 손바닥 사이에 쥐고 던진다. 보통 윷가락이 사람들의 앉은키보다 얼마간 높이 올라가게 던져야 하는데, 멋을 부리는 사람들은 윷가락 네 개가 한꺼번에 떨어지지 않고 차례로 떨어지게 던지기도 한다. 윷가락이 둘러앉은 사람들의 범위를 벗어나 떨어지거나 짚방석 밖으로 튀어나갈 때는 ‘낙판(落板)’이라 하여 무효로 하기도 한다.

3) 끗수

윷가락이 엎어지고 젖혀지는데 따른 끗수는 아래와 같다.

도 개 걸 윷 모







윷가락의 상태인 도·개·걸·윷·모에 따라 말을 움직일 수 있는 끗수가 다르다.

4) 놀이방법






두 사람 이상 여러 사람이 편을 나누어 놀 수 있으므로, 사람 수에 제한은 없지만 보통 4~6명 정도가 어울려 논다. 한 편에 보통 4개의 말(넉동)을 갖고 시작하고, 윷을 던져 나오는 끗수만큼 말을 옮겨 어느 한 편에서 먼저 말 넉동(네 동)이 나면 이기게 된다.
세부적인 규칙은 아래와 같다.
① 순서 정하기(쟁두) ― 먼저 어느 편이 먼저 놀기 시작할 것인가를 정하는데, 먼저 윷가락으로 정한다. 즉 각 편의 대표격인 사람 두 명이 나와, 네 가락 중 두 가락씩 나누어 가지고 던져서 숫자가 높은 편이 먼저 시작한다.
② 말 쓰기 ― 윷가락을 던져서 나온 끗수에 따라 말을 옮기는 것을 말한다. 처음에는 말을 달아야 하고, 어떤 경우에는 상대방 말을 잡아야 하며, 어떤 경우에는 업기도 한다. 아무리 윷이나 모가 많이 나와도 말을 잘 쓰지 못하면 지게 되므로, 전체 판의 흐름에서 유리하게 말판을 써야 한다.
③ 업고 가기(굽기·볶기) ― 윷가락을 던져서 만약 처음 말이 도자리에 있는데 다음 차례에 또 도가 나오면, 업어서 함께 이동할 수도 있다. 또 뒤따라가다가 앞서가던 자기편 말과 같은 자리에 서게 되면 업고 갈 수 있다. 두 개가 업고 가면 두동사니(두동무니), 세 개가 업고 가면 세동사니, 네 개가 업고 가면 넉동사니라고 한다. 업는 경우가 불리하면 업지 않아도 된다.
④ 잡기 ― 예를 들어 상대편 말이 도자리에 있는데, 윷을 던져서 자기편이 도가 나오면 상대편 말을 잡을 수 있다. 또 자기편 말이 뒤따라가다가 앞서가던 상대편 말과 같은 자리에 서게 되면 상대편의 말을 잡게 된다.
⑤ 한 번 더 하기 ― 윷이나 모가 나오면 한 번 더 놀 수 있고, 상대편 말을 잡았을 때도 한 번 더 놀 수 있다.
⑥ 동나기 ― 처음에 달았던 말이 말판을 돌아서 밖으로 나오는 것을 동나기라고 말하는데, 먼저 넉동(네 동)이 나는 편이 이긴다. 동이 빨리 나기 위해서는 길을 잘 선택해야 하는데, 지름길로 질러가는 방법과 세 개의 먼 길이 있다. 가장 가까운 길은 12번째에 날 수 있고, 다음은 16번째, 다음은 17번째이고, 가장 먼길은 21번을 가야 하기 때문에(팔방돌이한다고 한다), 가까운 길로 말을 몰아가야 한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아 윷놀이가 재미있는 것이다.


 

규칙을 지키며 여럿이 하는 집단놀이이기 때문에 지적·정서적 발달에 도움이 되며, 사회성 발달에 필요한 인간관계의 기술을 배울 수 있다. 특히 말의 끗수에 따라 말을 몇 칸 움직일 것인가를 계산하는 과정에서 수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할 수 있고, 놀이 규칙을 지키면서 놀이하는 과정에서 규칙을 지켜야 하는 준법정신을 기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윷을 던지고 “모냐, 윷이냐”하고 소리치는 가운데, 일상에서 생긴 모든 스트레스를 털어내고 새로운 일에 활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뱃놀이


 

선유()·주유()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선비들은 배를 강에 띄우고 연안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면서 흥이 나면 시를 짓거나 소리를 했다. 그리고 고기를 낚아 회를 치고 찌개를 끓여 술을 마시는 등 풍류를 즐겼다.

특히 조선조에는 외국의 사신들을 맞이해 한강에 배를 띄우고 시회()를 열어 환영연을 베푸는 일이 많았다, 1450년(세종 32)에도 중국 당나라 사신들에게 뱃놀이로 환영연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 기록 가운데 이때의 뱃놀이 광경이 자세하게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배 모습에 대해 "배는 세 척을 연결하였고 가운데에 작은 지붕을 만들어 덮었다"고 했다.

일반인들은 특히 삼복 중에 뱃놀이를 하였는데, 낚시로 망둥이 따위의 고기를 낚아 매운탕을 끓이거나 어죽을 쑤어먹으면서 하루를 즐겼다. 예로부터 서울의 뱃놀이로는 광나루·노량·용산·마포·양화진을 꼽았다. 뱃놀이는 배를 한 곳에 띄우고도 하지만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벌이면 주위의 경치가 바뀌어 더욱 흥겨워진다. 그리고 이와 같은 놀이에는 기생들도 함께 타고 풍악을 울리면서 한껏 흥을 돋우었다

 

 

 

팽이치기


 

얼음판이나 땅 위에서 팽이채를 이용해서 팽이를 쳐 돌리며 노는 아이들의 놀이. 썰매타기와 함께 겨울철을 대표하는 놀이이다. 얼음이 어는 겨울이 오면 너나없이 팽이를 들고 밖으로 나와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미있게 놀았는데, 오래 전부터 전국적으로 행해지던 놀이이다.
지방에 따라 다양한 이름이 있는데 평안도에서는 ‘세리’, 함경도에서는 ‘봉애’ ‘방애’, 경상도에서는 ‘뺑이’ ‘핑딩’, 전라도에서는 ‘뺑돌이’, 제주도에서는 ‘도래기’라고 하였고, 일부 지방에서는 ‘패이’ ‘빼리’ ‘포애’ ‘뺑생이’ ‘뱅오리’라고도 하였다.

 


팽이치는 모습

팽이라는 말은 18~19세기에 생긴 말이며, 그 이전에는 ‘핑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씌어진 《한청문감(漢淸文鑑)》권9 <기예부>에 팽이를 “핑이”, 팽이 돌리는 것을 “핑이 돌리다”로 기록되어 있고, 숙종 16년에 씌어진 《역어유해(譯語類解)》에도 “핑이 돌리다”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17세기 말까지는 ’핑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핑이‘란 물체가 ’빙빙 돈다‘, ’핑핑 돈다‘에서 온 말로, 팽이가 도는 모양의 의태어 내지 의성어에 명사형 접미사 ’이‘가 붙어서 된 이름이다.
한편 팽이는 일본에 전파되어 ‘고미도구리’ ‘구’ ‘고려(高麗)’ ‘독락’ 등이라고 불리는데, 일반적으로 ‘고려’라고 불린다. 이는 팽이가 고려, 즉 우리 나라에서 전래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훈독할 때는 모두가 ‘고마’로 읽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팽이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그러나 720년에 씌어진 일본의 《일본서기(日本書紀)》에 팽이가 고려로부터 전해왔다는 기록이 보이므로, 최소한 신라 때에는 존재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팽이는 주위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나무와 끈을 주재료로 사용한다. 이런 재료들은 자연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세계 여러 나라의 경우에도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간편한 재료가 사용된 놀이는 일찍부터 행해졌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팽이치기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행해진 것으로 판단된다.



1) 놀이도구의 제작

① 팽이
팽이는 흔히 나무를 깎아서 만드는데, 그 가운데서도 박달나무·대추나무, 소나무 광솔(관솔) 등 무게 있고 굳은 나무로 만든 것을 좋은 것으로 여겼다. 왜냐하면 무겁고 단단할수록 돌아가는 팽이의 끝부분이 빨리 무디지 않아 오래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팽이가 쓰러지지 않고 오랫동안 돌며, 또 돌 때도 ‘윙 윙’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팽이는 깎는 방법도 다양한데, 그 종류는 아래와 같다.

(ㄱ) 말팽이 ― 말팽이는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보는 가장 흔한 팽이이다. 말팽이는 윗부분은 원기둥 모양이고 아랫부분은 밑으로 내려갈수록 원추형으로 뾰족하게 깎은 것으로, 거꾸로 세워 놓은 모양이 쌀의 부피를 재는 도구인 말[斗]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ㄴ) 장구팽이 ― 장구팽이는 팽이의 윗부분과 아랫부분 모두를 똑같이 원추형으로 뾰족하게 깎아서 아무 쪽으로나 돌릴 수 있도록 만든 팽이이다. 이 팽이는 좌우를 모두 칠 수 있는 장구와 같은 원리로 구별 없이 돌릴 수 있게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장구팽이’란 이름이 붙었고, 보통 말팽이보다 키가 큰 것이 특징이다. 이 팽이는 전라도지방에서 ‘활팽이’ 또는 ‘활뺑돌이’라고도 한다.
(ㄷ) 줄팽이 ― 줄팽이는 말팽이와 형태가 비슷하나 팽이의 허리가 길고 그 가운데에 오목하게 줄을 판 것이 다르다. 허리 가운데에 줄을 팠다고 줄팽이라고 한다.
이런 팽이에는 밑에 콩알만한 쇠볼을 박으면 더욱 잘 돌고, 마모가 안 되기 때문에 오래 가지고 놀 수 있다. 이런 쇠볼은 6·25 전쟁이 끝난 후에 등장한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채를 쓰지 않고 돌리는 팽이로 ‘바가지팽이’ ‘상수리팽이’ ‘뺑오리팽이’ 같은 것들이 있다.



운동량이 줄어드는 겨울철에 이 놀이를 하면 전신을 사용하게 되기 때문에 신체의 균형적인 발달을 꾀하는데 도움이 된다. 또한 팽이의 균형을 잡기 위해 부지런히 팽이채를 치는 사이에 대근육 활동과 눈과 손, 눈과 팔의 협응력을 길러주게 된다. 그리고 팽이를 만들거나 돌리는 과정에서 여럿이 함께 하면서 사회성 및 언어발달에 도움을 준다.

 

 

 

더욱 더 특별한 놀이를 원하신다면 조금 노력해 주셔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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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이대상

강건너기       
개뼉다귀       
고백신       
고을모둠       
구슬치기       

달팽이       
닭싸움       
도둑잡기       
도롱태굴리기       
돈치기       

돼지씨름       
딱지치기       
ㄹ자놀이       
말타기       
못치기       

바람개비       
썰매타기       
여러가지씨름       
왕대포       
자치기       

제기차기       
죽마놀이       
죽방울받기       
진놀이       
쫄기접시       

팽이치기       
공기       
닭살이       
손뼉치기       
실뜨기       

줄뛰어넘기       
가마타기       
기차놀이       
긴줄넘기       
까막잡기       

꼬리잡기       
다리헤기       
두꺼비집       
땅따먹기       
말놀이       

망줍기       
망차기       
반지놀이       
보놀이       
비석치기       

산가지       
수건돌리기       
수박따기       
술래잡기       
숨바꼭질       

칠교       
콩쥐팥쥐와 태극기       
통차기       
풀각시놀이       
풀묻기       

풀싸움과 꽃싸움       
호드기불기       
화가투       
고싸움       
기세배       
농주       
바둑       
불꽃놀이       

석전       
쇠머리대기       
씨름       
유객주       
장기       

장치기       
줄당기기       
차전놀이       
투호       
활쏘기       

횃불싸움       
강강술래       
그네뛰기       
널뛰기       
놋다리밟기       

월월이청청       
거북놀이       
골패       
꼭두각시놀이       
다리밟기       

달맞이       
사자놀이       
쌍륙       
탈놀이       
화전놀이       

 




★ 세시놀이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1. 1
설날

1. 15
대보름

3. 5
청명

5. 5
단오

  

8. 15
추석

  

  

  

널뛰기

윷놀이

거북놀이

고싸움

놋다리밟기

다리밟기

달맞이

바람개비

쇠머리대기

연날리기

줄당기기

쥐불놀이

차전놀이

횃불싸움

화전놀이

그네뛰기

봉숭아물

석전

씨름

 

가마싸움

강강술래

월월이청청



 


 


 



 

전통음식

콩국수
 

 
 
 
출전
시의전서(是議全書)
원문
콩국은 콩을 담가 불려 살짝 데쳐 가는 체에 밭쳐 소금을 타서 간을 맞추어 밀국수를 말고 웃기는 깨국과 같이 하여 얹으라
<깨국>
깨국하는 법은 깨를 볶아 물 섞어 가라앉혀 체에 밭쳐 소금 타 간 맞추어 밀국수 말고 우에 채소와 채친 것 얹기는 밀국수법과 같으니라
재료
콩 1½컵
소금 1작은술
국수 300g
오이 20g
호박 20g
달걀 1개
석이 1장
고추 1개
만드는법
1. 콩을 씻어 건져서 5~6시간 물에 담갔다가 건져 살짝 삶아서 맷돌에 곱게 간다.
2. 맷돌에 간 콩국을 체에 밭쳐 찌꺼기는 버린다.
3. 오이와 호박은 가늘게 채쳐서 기름에 볶아 놓는다.
4. 석이버섯도 손질하여 가늘게 채쳐서 기름에 볶아 놓는다.
5. 달걀은 황백으로 갈라 지단을 부쳐 가늘게 채친다.
6. 고추는 배를 갈라 씨를 발라내고 가늘게 썰어 놓는다.
7. 국수를 끓는 물에 삶아 내어 찬물에 헹구어 놓는다.
8. 준비된 콩국에 소금을 넣어 간을 맞춘 다음 삶아낸 국수를 말고 오이와 호박 석이버섯 달걀지단 고추를 고명으로 얹어 낸다.






 

 

   떡국
 

 
 
 
출전
시의전서(是議全書)
원문
흰떡 깨끗이 잘 하여 얇게 썰어 고기장국에 팔팔 끓을 적 떡점을 잠깐 넣어 얼른 떠서 생치국 맛나게 끓이고 고기 볶고 즙을 타 다시 떡점을 말고 위에 약산적 자옥이 하여 얹고 후추 가루 뿌려 쓰되 맛난 장국 따끈 따끈하게 끓여 곁에 놓고 연하여 부어가며 먹으라 젓국에 꾸미 넣어 끓이면 병인 소복하기 제일이라
재료
흰떡 500g
생치국 : 생치(꿩고기) 100g 다진 파 2작은술 다진 마늘 1작은술 간장 1큰술 참기름 1작은술 후춧가루 ½작은술 물 8컵
약산적 : 우둔살 200g 다진 파 1작은술 다진 마늘 ½작은술 간장 1작은술 참기름 1작은술 깨소금 ¼작은술 후춧가루 ¼작은술
만드는법
1. 꿩고기를 덩어리째 넣고 푹 끓인다.
2. 꿩고기가 푹 익었으면 꺼내어 식혔다가 손으로 잘게 찢어 놓는다.
3. 가래떡은 어슷하게 썬다.
4. 약산적용 고기는 5mm 두께로 저며 간장과 갖은 양념을 하여 주물러 꼬챙이에 꿰거나 또는 그냥 반반하게 도마위에 놓아서 잔칼질을 하고 사면을 반듯이 하여 깨소금 뿌리고 석쇠에 구워 2x2cm 정도로 자른다.
5. ①번의 육수에 잘게 찢은 꿩고기를 넣고 다진 파 다진 마늘 간장 참기름 후춧가루로 양념하여 장국을 끓인다.
6. 장국이 팔팔 끓을 때 어슷하게 썰은 흰떡을 넣고 한소끔 끓여서 떠낸다.
7.약산적은 흰떡 위에 얹고 후춧가루를 뿌린다.
8. 먹을 때는 장국을 따로 떠놓고 계속 흰떡에 부어가며 먹는다.

비고
『시의전서』에서는 젓국을 꾸미 넣어 끓이면 환자의 회복에 좋다고 하였다.






 

 

 

 

   굴만두
 

 
 
 
출전
수문사설
원문
굴을 소금물에 씻어 부셔서 불어 있는 굴 껍질을 제거하고 끊는 물에 약간 익혀낸다. 다시 맑은 기름에 볶아 익힌 다음 체로 받쳐 국물을 제거하고 이것을 소로 넣고 만두를 만들어서 끊는 물에 급히 삶아 내어 초장에 파 마늘 등 양념을 섞어서 먹는다.
재료
굴 200g
만두껍질 : 밀가루 2컵 소금 ½작은술 물 7큰술
초간장 : 간장 2큰술 식초 2작은술 다진 파 ½작은술 다진 마늘 ¼작은술
만드는법
1. 밀가루와 소금을 섞어 체에 친 다음 물을 넣고 반죽한다.
2. 두께 2-3mm 지름 3cm 정도로 둥글게 밀어 만두피를 준비한다.
3. 굴은 껍질을 깨끗이 제거하여 소금물에 씻어 끓는 물에 살짝 데쳐낸다.
4. 데쳐진 굴을 기름에 볶아 완전히 익힌 다음 체에 밭쳐 물기를 제거한다.
5. 준비한 만두피에 굴을 넣고 만두를 빚는다.
6. 끓는 물에 만두를 넣고 삶는다. 만두가 익어서 떠오르면 건져내어 파 마늘로 양념한 초장에 찍어 먹는다.
비고
『수문사설』에서는 이 음식을 소개하면서 비린내가 나고 연하지도 않고 그다지 맛이 좋지 않다고 평하였는데 굴의 풍미를 잘 살릴 수 있는 양념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삼합미음(三合米飮)
 

 
 
 
 
 
출전
규합총서(閨閤叢書)
원문
북해삼을 담갔다가 돌에 문질러 정하게 튀하여 검은 빛 없게 하고 동해 홍합을 담갔다가 털 없이 하고 정히 씻어 큰 탕관에 안친다. 거기다가 쇠고기 기름기 없는 큰 덩이를 같이 넣어 좋은 물을 부어 숯불에 곤다. 다 무르녹거든 찹쌀 한되를 넣어 미음을 밭여 삼년 묵은 검은 장을 조금 타 먹으면 노인과 어린이의 원기를 크게 보하고 병든 사람에게 유익하다.
재료
찹쌀 ½컵
불린해삼 100g
홍합 50g
쇠고기(양지머리) 100g
물 16컵
간장 1작은술
만드는법
1. 불린 해삼의 검은 껍질은 칼로 벗겨낸다.
2. 홍합은 소금물에 깨끗이 씻은 후 털을 제거한다.
3. 솥에 해삼 홍합 핏물 제거한 양지머리를 넣은 다음 물을 붓고 약한 불에서 40분간 푹 끓인다.
4. ③에 불린 찹쌀을 넣고 약한 불에서 끓인다.
5. ④가 끓기 시작하면 나무주걱으로 저어가며 밥알이 푹 퍼지도록 끓인다.
6. 밥알이 다 퍼졌으면 체에 받쳐 놓아 내려온 미음을 그릇에 담고 조선간장과 함께 낸다.
비고
미음은 곡물을 낟알 그대로 끓여서 푹 무르고 퍼지게 하여 고운체에 밭쳐서 건더기가 없도록 만든 것이다






 

 

 

 

 비빔밥(골동반)
 

 
 
 
출전
시의전서(是議全書)
원문
밥을 정히 짓고 고기 재여 볶아 넣고 간랍 부쳐 썰어 넣고 각색 나무새 볶아 넣고 좋은 다시마 튀각 튀여 부숴 넣고 고추가루 깨소금 기름많이 넣고 비비어 그릇에 담아 위는 잡탕거리처럼 계란부쳐 골패쪽 만치 썰어 얹고 완자는 고기 곱게 다져 잘 재여 구슬만치 비비어 밀가루약간 무쳐 계란 씌워 부쳐 얹나니라.
재료
쌀 360g
각색나물 : 고사리120g 도라지120g 무우120g
간납용 우둔살150g
볶음용 우둔살 120g
다시마 5x5cm 4장
달걀 1개
완자용 고기 : 우둔살 120g 달걀1개 밀가루 1작은술
갖은 양념 : 다진 파 4작은술 다진 마늘 4작은술 간장 4작은술 참기름 4작은술 식용유 1큰술 고춧가루 1작은술 후추가루 ½작은술
만드는법
1. 쌀은 깨끗이 씻어 밥을 고슬고슬하게 짓는다.
2. 볶음용 고기 곱게 채 썰어 간장 파 마늘 참기름을 넣어 재웠다가 볶는다.
3. 간납용 고기를 다지고 간장과 갖은 양념하여 재웠다가 약 5mm 두께로 넓적하게 반데기 짖고 잔 칼집을 가로 세로로 내어 깨소금 뿌려서 석쇠에 구워 사방 3cm 크기로 썰어둔다.
4. 도라지는 껍질을 까고 가늘게 찢어서 소금 넣고 박박 문질러 찬물에 헹구어 쓴맛을 제거한 후 파 마늘과 소금으로 간맞추어 번철에 기름을 두른 후 볶아둔다.
5. 데쳐 낸 고사리를 파 마늘 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하여 번철에서 기름을 두른 후 볶는다.
6. 무우를 껍질을 벗기고 채를 쳐서 소금과 약간의 물을 넣어 익힌 후 파 마늘과 참기름을 넣고 무친다.
7. 다시마는 마른행주로 잘 닦고 기름에 튀겨서 부수어둔다.
8. 달걀은 노른자와 흰자를 갈라 각각 얇게 부쳐 골패쪽 모양으로 썬다.
9. 완자는 소고기를 곱게 다져 소금 참기름 파와 마늘 다진 것을 넣고 재워 둔 후 구슬 만하게 빚고 밀가루를 약간 묻혀 계란을 씌워 부친다.
10. 밥을 사발에 반쯤 담고 볶은 고기와 간납 각 나물 얹고 튀각 넣고 고춧가루와 깨소금과 기름을 넉넉히 넣고 위의 달걀과 고기완자를 얹어서 낸다.
비고
『시의전서』에서는 골동반(汨童飯)이라 하였는데 오늘날의 골(骨)자와 다르게 쓰고 있다. 골동반에는 장국을 함께 내어 비빔밥에 약간씩 넣으면서 비벼 먹으면 좋다고 하였으며 고추장대신 고춧가루와 후춧가루를 쓰는 것이 오늘날과는 다른 조리법이었다






 

 

 

 

개암죽
 

 
 
 
출전
규합총서(閨閤叢書)
원문
개암을 까 가리어 물에 담갔다가 맷돌에 정히 갈아서 수비한 무리를 먼저 쑤다가 화합하여 쑤어 내면 그 맛이 매우 아름다울 뿐더러 크게 보익하다.
재료
쌀 1컵
개암 ½컵
물 6~7컵
만드는법
1. 쌀은 깨끗이 씻어 물에 2~3시간 불려둔다.
2. 불린 쌀을 멧돌에 물과 함께 갈아 체에 내려서 앙금을 가라앉힌다. 가라앉은 앙금은 무리라 한다.
3. 개암은 겉껍질을 벗겨 물에 담갔다가 꺼내 속껍질을 까서 맷돌에 간다.
4. 솥에 물과 무리를 넣고 먼저 죽을 쑤다가 개암가루을 넣어 준다.
비고
무리 만드는 법을 『산림경제』에서는 “예전에는 깨끗이 찧은 쌀을 물에 담갔다가 가루를 만들어 배룡(焙龍:화로에 씌워놓고 옷 같은 것을 말리는 기구)에 말린다. 이것을 다시 빻아 깁체로 서 너 번 내려 쓴다. 오래두면 상하므로 5~6일마다 새로 만드는 것이 좋으며 혹 쌀을 물에 담가 맷돌에 갈아 볕에 말려 쓰면 더욱 좋다”고 기록하고 있다.
개암죽은 『시의전서』 『규합총서』 『임원십육지』 등 1800년대의 조리서에는 자주 기록되었던 죽이다




 

 

 

굴김치
 

 
 
 
출전
시의전서(是議全書)
원문
초가을에 좋은 배추 정히 씻어 반듯반듯 잘라 소금에 살짝 절여 실고추 미나리 파 마늘 다 채쳐 넣어 굴적 가려 한데 버무리고 굴 쑥갓 항갓(산갓) 배추 합하여 익히면 좋으니라 외도 혹 섞나니라
재료
배추 1통
소금 4큰술
실고추 약간
미나리 50g
파 80g
마늘 20g
굴 600g
오이 1개
쑥갓 50g
산갓 50g
만드는법
1. 굴은 굴껍질을 제거하고 잘 씻어 체에 밭쳐 물기를 뺀다.
2. 배추를 깨끗이 씻어 가로 3cm 세로 4cm의 크기로 잘라 소금을 뿌려 절인다.
3. 파 마늘 미나리 실고추는 가늘게 채를 썰어 굴젓을 넣고 버무린다.
4. 배추가 절여 졌으면 맹물에 한번 헹구어 체에 밭쳐 물기를 뺀다.
5. 배추에 준비한 3번의 재료를 넣고 잘 버무린 다음 굴 쑥갓 산갓을 섞어준다. 오이를 함께 섞어 넣을 수도 있다.
6. 항아리에 김치를 담고 꼭꼭 눌러 담은 다음 한번 끓여서 식힌 소금물을 붓는다.






 

 

   동치미
 

 
 
 
출전
시의전서(是議全書)
원문
잘고 모양 좋은 무를 깨끗이 껍질 벗겨 맞추어 절여 하루 재거든 깨끗이 씻어 독에 묻고 어린 외 한데 절여 넣고 배와 유자 왼채 껍질벗겨 썰지 말고 총백(파) 한치 길이씩 베어 위를 네 쪽으로 내고 생강 얇게 저민 것과 고추 많이 썰은 것 위에 많이 넣고 좋은 물에 함담(짜고 싱거운 정도)을 맞추어 가는 체에 받아 가득히 붓고 두껍게 봉하여 익은 후 먹되 배 유자는 먹을 적에 썰고 국에 백청과 석류 잣을 흩어 쓴다.
재료
무 100개
오이 20개
배 5개
유자 1개
파 1단
생강 2통
고추 10개
꿀 약간
석류 1개
잣 4컵
만드는법
1. 잘고 연한 무를 골라 대가리와 꼬리를 따고 잔털을 다 뜯어 깨끗이 씻는다.
2. 무의 껍질을 벗기고 소금에 절여 하룻밤 재워 둔다.
3. 오이도 소금에 절여 둔다.
4. 배와 유자는 깨끗이 씻어 둔다.
5. 파는 3cm 길이로 썰어 길게 4등분 하고 생강을 얇게 저민다.
6. 고추는 씨를 빼고 4등분 한다.
7. 땅에 묻은 독에 무와 오이를 넣고 배와 유자도 통으로 넣는다.
8. 준비한 파와 생강 고추도 같이 넣는다.
9. 소금을 타서 간을 맞춘 소금물을 고은 체에 밭여 독 속에 무가 잠길 정도로 넣는다.
10. 이때 깨끗이 씻은 돌로 위를 눌러 놓으면 무가 위로 떠오르지 않아서 좋다.
11. 먹을 때 무 배 유자를 꺼내 썰도록 한다. 국물에 꿀을 약간 타고 잣이나 석류를 띄운다






 

 

 

돼지순대
 

 
 
 
출전
시의전서(是議全書)
원문
창자를 뒤집어 정히 빨아 숙주 ; 미나리 ; 무를 데쳐 배추김치와 같이 다져서 두부를 섞어 생강과 마늘을 많이 다져 넣고 돼지 피와 한데 주물러 창자에 넣어 부리를 동여매고 삶아 식혀서 설어 썬다.
재료
돼지소창 200g
찹쌀 2컵
우거지(삶아서) 200g
숙주 300g
배추 200g
돼지(선지)2컵
된장 3큰술
간장 1큰술
소금 2큰술
다진 파 4큰술
다진 마늘 2큰술
다진 생강 2작은술
후추가루 1작은술
참기름 2작은술
생강 1톨
만드는법
1. 돼지의 소창은 소금으로 주물러 깨끗이 씻어 하룻밤 물에 담가 놓는다.
2. 찹쌀은 물에 충분히 불려서 찜통에 넣고 찐다.
3. 배추와 우거지는 충분히 삶고 숙주는 끓는 물에 데쳐내어 적당한 크기로 썰고 물기 없이 꼭 짠다.
4. 찹쌀밥은 식힌 후에 선지와 섞고 3의 배추 우거지 숙주나물 된장 간장 소금 파 마늘 생강 후춧가루 참기름 조미료와 고루 섞는다.
5. 돼지소창은 물기를 닦고 한쪽 끝에 굵은 깔때기를 대고 4에서 준비된 소를 넣고 끝을 실로 묶는다.
6. 돼지고기 삶는 물에 된장 1큰술과 생강 1톨 저민 것을 넣어 끓인다. 30분쯤 지나면 순대의 곳곳에 침을 주고 불을 줄여서 1시간 정도 삶은 후 둥글게 설어 접시에 담는다.
7. 소금 후춧가루 고춧가루의 조미료를 합한 양념소금을 만들어 같이 담아낸다.






 

 

마늘장아찌
 

 
 
 
출전
시의전서(是議全書)
원문
마늘쪽 다 굳기 전에 캐서 씻어 물기 걷은 후 통으로 초에 담갔다가 건져 진장에 넣어 빛 검고 다 삭은 후 썰어 쓰라. 마늘을 쪽을 떼어 껍질 벗기고 진장에 넣어 쓰기도 하고 초에 담그지 아니 하여도 관계치 아니 하나니라
재료
마늘 1kg
식초 100g
간장 3컵
만드는법
1. 마늘은 다 굳기 전의 어린 것을 골라서 줄기는 제거하고 깨끗이 씻어 채반에 널어 물기를 말린다.
2. 물기가 가시면 단지에 마늘과 식초를 넣고 마늘이 잠길 정도의 물을 부어 둔다.
3. 15일 정도 지난 뒤 마늘의 색이 빨갛게 되면 꺼내어 다른 단지에 넣고 간장을 붓는데 마늘이 잠길 정도로 부어 1개월간 숙석시킨다.






 

 

 

산적
 

 
 
 
출전
주찬(酒饌)
원문
염통과 콩팥을 썰어 소금을 약간 뿌려서 피를 뺀 다음 물로 씻고 여러 가지 양념을 섞어 묻혀서 소금 기름 간장을 섞은 것에 재웠다가 즙을 발라 굽는다. 염통에는 즙을 바르지 않는다. 날꿩도 소금 기름 간장 섞은 것에 재웠다가 굽는다.
재료
염통 200g
콩팥 200g
소금 2작은술
밀가루 1큰술
깨소금 2큰술
다진 생강 1/2작은술
다진 파 1작은술
후춧가루 1/2작은술
초피가루 1작은술
참기름 3큰술
간장 1큰술
만드는법
1. 콩팥은 얇은 막을 벗기고 염통은 줄기를 벗겨서 5cm 길이로 자른다.
2. 여기에 소금을 뿌려 피를 빼고 물로 깨끗이 씻는다.
3. 밀가루 깨소금 다진 생강 다진 파 후춧가루 초피가루를 한데 섞는다.
4. ③번에 콩팥과 염통을 굴려 가루를 묻힌다.
5. 참기름과 간장을 섞어 기름장을 만든다.
6. 기름장에 가루를 묻힌 콩팥과 염통을 넣어 재운다.
7. 꼬챙이에 콩팥과 염통을 차례로 꿰어 석쇠에 올려 굽는다.






 

 

 

두부전골
 

 
 
 
출전
시의전서(是議全書)
원문
두부 얇게 저며 계란 씌워 잠깐 부치고 도라지 고사리 미나리 파 다 각각 찧어 부치고 계란 황백 각각 부치고 표고 느타리 석이 황백 계란 부친 것과 파 채쳐서 계란 두부 각색나물 부친 것을 잡탕 건지처럼 썰고 다시마 삶아 썰어 남비 담그되 정육 다져 잘 재여 남비 밑에 좀 넣고 각색 나물과 두부 부친 것을 줄로 돌아가며 색 맞추어 한계 담고 채친 고명을 자욱이 홀벌 뿌리고 고기 채친 것을 약간 한 켜 놓아 시루떡 안치듯 하여 담은 위에 각색 고명 실고추 섞어 뿌리고 실백자 흩어 물 좀 부어 함담 맞추어 끓여 쓰라.
재료
두부 300g
간장 2큰술
쇠고기 150g
참기름 1큰술
깨소금 1/2작은술
달걀 2개
다진 파 1작은술
다진 마늘 1/2작은술
표고 5장
후춧가루 1/4작은술
석이 채 썬것 조금
실고추 조금
달걀지단 1/2개분
밀가루 1/4컵
만드는법
1. 두부를 0.5cm두께로 썰고 쇠고기는 곱게 다져 양념한다.
2. 두부 2장 사이에 양념한 쇠고기를 조금씩 끼워 넣고 밀가루와 달걀을 입혀 기름에 지진다.
3. 잠시 식힌 후에 길이 4~5cm 너비 2cm정도로 썬다.
4. 양파를 썰어서 냄비 밑에 깔고 두부 부친 것을 나란히 담은 다음 장국에 간을 맞추어 충분하게 붓고 끓인다.
5. 거의 다 끓었을 때 표고 석이 달걀 지단 실고추를 고명으로 얹어서 다시 한번 끓인 후 낸다.






 

 

 

명란젓
 

 
 
 
출전
시의전서(是議全書)
원문
조기 같고 초치고 고추 넣어 쓰나니라
재료
명란 300g
소금 5큰술
깨소금 20g
흰파 20g
마늘 3쪽
고춧가루 3큰술
생강 1쪽
만드는법
1. 명란을 씻어 소쿠리에 담아 물기를 전부 빼고 소금을 뿌려 잘 절인다.
2. 명란이 절여졌으면 건져 보자기에 싸서 돌로 지긋이 눌러 둔다.
3. 마늘 흰 파를 다져서 고춧가루와 섞어 명란 안팎에 묻히고 항아리에 차곡차곡 담으면서 소금을 조금씩 더 뿌려 꼭 봉한다.
4. 먹을 때 식초를 조금 치고 고추를 넣어 먹는다.
비고
원문에는 초치고 고추 넣어 쓴다고 하여 명란을 반찬으로 먹는 법만 설명되어 있어서 보통의 명란젓 만드는 방법으로 재현해 보았다.






 

 

 

장조림
 

 
 
 
출전
시의전서(是議全書)
원문
정육을 크게 덩이지여 진장 바짝 조리면 오래여도 변미 안되고 쪽쪽 찢어 쓰면 좋으니라.
정육을 다져 전골처럼 재여 회리 밤만치 뭉치되 속에 후추 한 개 실백자 한 개씩 넣어 뭉쳐 적쇠에 종이 깔고 다 얹은 후 불에 놓아 구어 좋은 진장에 졸이되 백청 많이 타 단맛 있게 조리나니라.
재료
소고기 600g
간장 3큰술
후추 1/2작은술
잣 1작은술
꿀 2큰술
만드는법
1. 쇠고기를 잘게 다져 갖은 양념을 하여 재워 큰밤 만큼 뭉쳐서 속에
호도 잣 각각 한 개씩을 넣고 석쇠에 종이를 깔고 고기를 얹어 불에 놓고 굽는다.
2. 이것을 간장에 조리는데 꿀을 많이 타서 단맛 나게 조린다.



 

 

 

전통행사

★ 세시놀이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1. 1
설날

1. 15
대보름

3. 5
청명

5. 5
단오

  

8. 15
추석

  

  

  

널뛰기

윷놀이

거북놀이

고싸움

놋다리밟기

다리밟기

달맞이

바람개비

쇠머리대기

연날리기

줄당기기

쥐불놀이

차전놀이

횃불싸움

화전놀이

그네뛰기

봉숭아물

석전

씨름

 

가마싸움

강강술래

월월이청청





 

 

전통작품

처용무

 

 

 









처용무는 신라 헌강왕 때의 처용설화에서부터 비롯된다. 다섯 사람이 처용 가면을 쓰고 추어진다. 처용무는 신라 말엽에 시작된 이래 궁중 나례와 궁중 연례 때 추어졌다. 고려의 충혜왕 신우조 등에 처용희를 즐겼다는 기록이 보이며,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처용무가 원래 한 사람이 흑포사모(黑布紗帽)하고 추었다고 전한다. 조선 세종 때부터 처용무는 다섯 사람이 함께 추는 오방 처용무로 바뀌었다. 오방처용무는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방위를 상징하는 다섯 처용이 등장하여 함께 춤을 추는 것이다. 동쪽은 청색, 남쪽은 홍색, 서쪽은 백색, 북쪽은 흑색, 중앙은 황색의 처용이 등장하여 함께 춤을 춘다. 춤은 호방한 남성적 성격을 드러내는 춤으로 다섯 처용 각각이 자신이 상징하는 방위를 지키고, 또 빈틈을 노려 침입할지도 모르는 잡귀를 감시하는 구성으로 마주보거나 등을 대는 동작이 주를 이룬다.

 

  하회탈

-국보 제121호(1964년 지정)-
  하회탈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마을에서 전승되어온 제의용 탈이자 예술용 탈이기도 하다. 고려 중후기로 소급될 정도로 그 역사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무탈로 제작되어 그 조형미가 출중하기에 1964년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하회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본래 하회탈은 양반, 선비, 중, 백정, 초랭이, 할미, 이매, 부네, 각시, 총각, 떡다리, 별채탈 등 12개와 동물형상의 주지2개(암주지 숫주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총각’, ‘떡다리’, ‘별채’ 탈은 분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하회탈의 재질은 토종오리나무이며, 제작시기는 대략 고려 후기로 추정되고 있다.

  하회탈은 사실적 조형과 해학적 조형이 조화를 이루어 각 신분의 특성을 표현하였으며, 해당 인물의 성격에 따른 이미지까지도 드러내고 있다. 얼굴의 형상은 좌우가 비대칭적으로 조형되어 움직임에 따라 다양한 표정이 표현되도록 하였다. 특히 양반, 선비, 중, 백정탈은 턱을 분리시켜 인체의 턱 구조와 같은 기능을 갖게 한 점이 독창적이다. 탈을 쓴 광대가 고개를 뒤로 젖히면 자연스럽게 입이 크게 벌어지며 웃는 모습이 되고, 광대가 고개를 숙이면 윗입술과 아래턱 입술이 자연스레 붙게 되어 화난 표정이 연출되기도 한다. 마을주민들 사이에서, “탈이 신령스러워 탈 쓴 광대가 웃으면 탈도 따라 웃고, 광대가 화를 내면 탈도 따라 화를 낸다”는 향언이 전승되고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하회탈의 역사적 가치와 아름다운 조형미가 바탕이 되어 한국의 대표 이미지로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을 상징하는 각종 이미지로 활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관광상품으로도 개발되어 외국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상태이다.

 
국보 하회탈은 한국문화의 대표적 상징물이자 한국인의 얼굴이다.
  국보 하회탈은 국보로서 가치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얼굴을 상징하고 있어서 사실상 한국인의 캐릭터 가치를 담고 있다. 하회탈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탈이자, 현재도 탈춤에서 연극용 탈로 쓰이고 있다. 오늘날에도 전통을 상징하는 포스터, 관광기념품, 각종 디자인 등에 널리 활용되고 있어, 살아 생동하는 국보의 위상을 지니며, 한국민족문화의 상징 구실을 하고 있는 국보 중의 국보이다. 한국의 국기가 태극기이고, 한국의 맛이 김치로 표현되듯이, 또한 아리랑이 한국의 소리이듯이 하회탈은 한국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국보로 지정된 각시탈>

<왜곡된 관광상품으로서 각시탈>

 
    

국보 하회탈은 변증법적 조형미로 미학적 독창성을 확보하고 있다.

  국보 하회탈은 조형미에 있어서 세계적인 찬사를 받고 있다. 천년 가까운 역사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부조화의 조화, 불통일의 통일, 색조에 의한 캐릭터 표현 등 변증법적 조형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국보 하회탈의 원형을 회복하고 예술적 아름다움을 되살려야 할 것이다. 국가적 상징물인 국보 하회탈의 원형을 복원하고 그 조형적 이치와 예술적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현재 하회탈 관련 이미지들은 관광상품, 포스터, 디자인, 광고 등 여러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지만, 그 원천소스가 대부분 조악한 모조품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국보 하회탈의 문화재 가치를 훼손하고 예술적 조형성을 왜곡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국보로 지정된 하회탈의 본디 모습을 되찾고, 하회탈이 가지고 있는 조형미를 분명히 밝히는 동시에, 이를 현대사회에서 가치 있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자수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가장 근본적인 요소가 바로 의식주이다. 원시시대의 인간들은 의식주의 해결이 가장 직접적이고 기본적인 삶의 요건이었다. 그러나 문명의 발달로 인한 경제적인 풍요로움은 의식주의 해결이라는 당면과제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미(美)라는 의식을 찾게 되고, 자연히 의생활에서도 실용적인 면보다는 장식적인 면에 치우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수는 복식에 있어서 미를 표현하는 방법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자수는 중국에서는 수문(繡文), 일본에서는 누이도리, Embroider(英), Broderie(프랑스)라는 어원을 가지고 전 시대를 걸쳐 풍속, 기후, 사회적 여건, 종교등의 영향으로 다양하게 발전되어 왔다. 자수는 직물과 섬유를 소재로 그 섬유와 직물이 갖는 성능을 가지고 회화적인 구성요소로써 유기적인 구성을 형성하여 다양성 있는 미의 표현을 구사한 것이다. 또한 옷감에다가는 실을 끼운 바늘로 수를 놓는 것으로 문양, 문장, 문자, 경치, 동물 및 식물 등을 소재로 수놓는 것이다.

 

 

 

  인간이 의생활을 시작하며 직물을 짜서 입게 되면서 미의식에 따른 장식본능을 표현하게 되었다.
  이것이 직물 직기의 발생기원이 되어 여러 문양이 생겨나게 되었다. 또 문양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민족의 특성과 정신생활 속에서 우리의 풍토와 기질에 맞게 한 시대 한 인간의 정신적 감정을 표현하며 발전되어 왔다.
  문양은 그 시대의 사람들의 문화와 생활, 정신까지 포괄해서 그 시대의 복식에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예를 들면 조선시대의 상류계급에서 주로 사용하던 직물은 견을 비롯한 여러 종류가 있는데 문양은 종류에 따라 달랐다. 또 문양을 신분의 차등을 두어 사용하게 해서 신분표시의 역할에도 사용되어졌다.
  한국자수의 전통문양을 크게 분류하여 보면 동물문(動物文), 식물문(植物文), 자연문(自然文), 물상문(物象文), 기하문(幾何文), 문자문(文字文), 인물문(人物文)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동물문에는 용문, 호랑이문, 학문, 봉황문, 호접문, 박쥐문, 거북문, 호랑이문, 원앙문이 있다. 동물문에서는 호랑이문과 학문이 많이 보여지는데 조선시대에는 무관과 문관의 흉배에 쓰여져 계급을 표시해주는 문양으로도 사용되었다. 호접문은 생활용품에 많이 보여 지며, 용문양은 우리에게 문양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용은 왕권의 상징이자 불교의 수호신이며, 민간 신앙의 대상으로 지금도 동양인의 마음깊이 자리하고 있다. 전통자수에서 가장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것으로는 원앙문이다. 원앙문은 부부애를 상징한다.
가장 많이 사용되어진 문양으로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꽃이나 다복을 상징하는 열매 등을 수놓아 인간의 원망사상(願望思想)을 나타내었다.
식물문에는 모란문, 연꽃문, 매화문. 국화문, 석류문, 소나무문 등이 있다.
모란문은 부귀, 연화문은 불교의 대자대비의 상징이면서 창조와 번영, 매화문은 사군자 중의 하나이며 절개를 지키는 길상의 의미로 장수, 용기, 고결을 상징한다. 국화문은 맑은 아치와 높은 절개, 석류문은 다남다복, 소나무는 절의와 지조 그리고 장수를 의미한다.
구름, 해, 물결, 산수들을 수놓은 것으로서 주제로 표현되기도 하나 대개가 다른 주제를 받쳐주는 부주제로 표현되었다.
그중에서도 영원을 상징하며 인간에게 한없는 신비로움을 준 구름문(雲文)을 가장 많이 사용하였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ㆍ일본ㆍ동남아 등지에서는 사대부 등 상류층에서 생활 속에 기쁜 일과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요소들을 상징물로 하여, 복식을 비롯하여 침구ㆍ각종 생활용품ㆍ장식물ㆍ의기ㆍ건축물이나 집안 곳곳에 장식하고 새겨놓았다. 보문(寶紋)은 이러한 상징도상 중의 하나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칠보문(七寶紋) 또는 팔보문(八寶紋)이라 불렀다. 자수용품에서는 주로 수저집이나 흉배 등에서 다른 길상문양과 어우러져 표현되었다.
아(亞)자형, 나선형돌림문, 타원형고리문, 톱니문, 태극문등 생활속에서 얻어진 문양들이 다양한 형태로 변화, 응용되어 사용되었고 자수에서는 주로 물건의 테두리를 두르거나 위아래의 경계를 나누는데 자주 쓰였다.
좋은 뜻을 가진 한자 무늬를 말한다. 부국강녕(富國康寧)이 대표적인 글자문으로써 장수, 기쁨, 복, 영화, 강녕, 다남 등을 뜻하는 한자를 수놓아 인간의 염원을 담았으며, 한글자씩 수놓기도 하고 합성어로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종묘제례악

인물문양은 주로 신선도, 미인도, 단오도 나타난 인물들을 수놓은 것으로 신선도의 신선은 실존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상상을 통해서 전해져서 일정한 모습으로 전수되어졌다. 대표적인 인물문양으로는 ‘구운몽도’, ‘백동자도’, ‘호렵도’ 등이 있다.


제례와 제례악
의례는 사회체제의 유지와 통합, 완성을 향상시키는 기능이 있다. 유교사회의 의례는 길례 가례 · 빈례 · 군례 · 흉례의 오례로 대표된다. 오례는 『주례』로부터 비롯하는 것으로, 『주례』에는 오례로 만민의 거짓[僞]을 방지하여 중용[中]의 미덕을 가르치고, 육악(六樂)으로 만민의 감정[情]을 방지하여 화(和)를 가르치고자 한다고 하였다. 즉 개인이나 사회의 '중화(中和)'를 이루는 것이 그 목적임을 밝히고 있다. 오례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길례 즉 제례이다.

순자(荀子)는 "제례란 죽은 사람에 대한 사모의 정을 나타내는 것이며, 정성과 경애의 극치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절 가운데서도 문식[세련]이 가장 많은 것이다. 제사는 슬퍼하고 공경하며 죽은 사람을 산 사람처럼 섬기고, 없는 사람을 있는 사람처럼 섬기는 것이다. 형영(形影)이 없는 것을 이처럼 섬기는 것이 문화를 이룸이다."라고 하였다.

유교의 제례는 대상에 따라 하늘의 신〔天神〕에 올리는 제(祭) · 땅의 신〔地示〕에 올리는 사(祀) · 사람의 신〔人鬼〕에 올리는 향(享)의 세 종류가 있고, 제사의 중요성과 규모에 따라 대사 (大祀: 가장 규모가 큰 제사) · 중사 (中祀 : 제2등급의 제사) · 소사 (小祀 : 가장 작은 규모의 제사)로 구분한다.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조선시대 대사에는 사직(社稷 : 국토와 곡식) · 종묘(正殿 永寧殿)가 이에 해당하고, 중사에는 풍운뇌우 (風雲雷雨:) · 악해독 (嶽海瀆 : 큰산 강 바다), 선농 (先農 : 농사짓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친 신농씨), 선잠 (先蠶: 양잠하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친 신), 우사 (雩祀: 한발에 대비하여 지내는 제사), 문선왕 (文宣王 : 공자의 존호), 역대시조의 제사, 소사에는 영성 (靈星: 제왕의 畿內와 封疆을 맡은 귀신), 노인성 (老人星: 별이름), 마조 (馬祖: 말의 수호신인 天駟星), 명산대천 (名山大川 : 유명한 산과 큰 내), 사한 (司寒: 겨울의 모든 일을 맡아 보는 신), 선목 (先牧: 처음으로 인간에게 養馬를 가르친 신. 養馬神), 마사 (馬社 : 최초로 승마법을 창시한 사람), 마보 (馬步: 말에게 災害를 끼친다는 신), 마제 (軍神인 蚩尤에게 지내는 제사), 영제 (오랜 장마로 인한 수해 등이 심한 경우 날이 개기를 기원하면서 베푸는 제사), 포제 (蟲이나 송충 등으로 인한 재해가 발생했을 때, 이를 물리치기 위하여 그 신에게 올리는 제사), 칠사 (七祀 : 군주가 신하와 백성을 위하여 인간생활의 여러 가지 일들을 사찰하고 처벌하는 일곱 가지 신을 위한 제사), 둑제 (纛祭: 大駕나 軍中의 앞에 세우는 纛旗에 드리는 제사), 여제 (제사를 받지 못하는 무주고혼이나 역질을 퍼뜨리는 여귀에게 지내는 제사)가 이에 속한다. 제사의 대상과 그 분류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조선시대 제례악을 연주한 제례는 하늘의 신[天神]은 풍운뇌우(風雲雷雨) · 산천성황(山川城隍), 땅의 신[地祇]은 사직(社稷), 사람의 신[人鬼]은 조상신을 비롯해서 선농(先農) · 선잠(先蠶) · 우사(雩祀) · 문선왕(文宣王)이 이에 해당한다. 이 중 현재까지 연주하는 음악은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이다.

제례 대상에 따른 음악의 형식과 내용

제례에 사용하는 음악은 천신 · 지기 · 인귀의 대상에 따라 연주절차 · 춤의 종류 · 악조 · 악기 편성 · 연주장소 · 연주 횟수가 정해져 있다. 이러한 내용은 『주례』에 기록되어 있고, 이것을 작악(作樂)의 기준으로 삼았다.

천신에는 황종을 연주하고 대려를 노래하며, 운문의 춤을 춘다. 악조는 협조위궁 황종위각 태주위치 고선위우를 사용하며, 타악기[북]는 뇌고와 뇌도를 사용하고, 관악기는 고죽의 관을 사용하며, 현악기는 운화의 금슬을 사용한다. 이러한 구성으로 원구에서 여섯 번[六變] 연주하면 천신이 모두 내려오게 되니 예의에 맞게 된다.

지기에는 태주를 연주하고 응종을 노래하며, 함지의 춤을 춘다. 악조는 함종위궁 태주위각 고선위치 남려위우를 사용하며, 타악기(북)는 영고와 영도를 사용하고, 관악기는 손죽의 관을, 현악기는 공상의 금슬을 사용한다. 이러한 구성으로 방구에서 여덟 번[八變] 연주하면 지기들이 모두 나오게 되니 예의에 맞게 된다.

인귀에는 무역을 연주하고 협종을 노래하며, 악조는 황종위궁 대려위각 태주위치 응종위우를 사용하며, 타악기[북]는 노고와 노도를 사용하고 관악기는 음죽의 관을 사용하며, 현악기는 용문의 금슬을 사용한다. 구덕의 노래와 구소의 춤을 종묘에서 아홉 번 연주하면 인귀의 예에 맞게 된다.



2010.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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