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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이하응의 생애, 업적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비공개 조회수 9,963 작성일2006.06.21

A4용지 두장분량으로..

 

이하응의 생애(태어난 때, 업적, 죽은 때)와

 

잘했다고 생각하는 업적 두가지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업적 두가지..메일로좀 보내주세요!!

 

꼭 두장 아니어도 됩니다..업적은 종류가 많은쪽으로 해주세요. 생각하는건 제가 고치게요. 맨날 내공 100씩 걸다보니 거지가됐네요..그래도 정성껏 부탁드립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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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조선
생몰년1820-1898(순조20-?)
본관전주(全州)
 자시백(時伯)
석파(石坡)
시호헌의(獻懿)
활동분야왕족, 정치가
다른 이름

흥선대원군/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

 

1. 가계


1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7세 때에는 아버지를 여읜 뒤 사고무친(四顧無親)의 낙박 왕손으로 불우한 청년기를 보내었다.
21세가 된 1841년(헌종 7) 흥선정(興宣正)이 되었고, 1843년에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다.
1846년 수릉천장도감(綬陵遷葬都監)의 대존관(代尊官)이 된 뒤 종친부의 유사당상(有司堂上),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의 한직을 지내면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하에서 불우한 처지에 있었다.
철종 때에는 안동김씨가 세도권을 잡고 왕실과 종친에 갖가지 통제와 위협을 가했으므로, 호신책으로 천하장안(千河張安)이라 불리는 시정의 무뢰한인 천희연(千喜然)·하정일(河靖一)·장순규(張淳奎)·안필주(安弼周)와 어울려 파락호(破落戶)의 생활을 하였다.
또, 안동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도 서슴지 않으니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하였다.

2. 고종 즉위와 수렴청정


그는 시정인과 어울려 지낸 이러한 호신생활을 통하여 서민생활을 체험하였으며, 국민의 여망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에도 난세의 뛰어난 정략가로 장차 국정을 요리할 식견을 소지하고 있었던 그는 왕궁내의 최고 어른으로 익종비(翼宗妃)였던 조대비(趙大妃)와 연줄을 맺고 있었다.
안동김씨 가문에 원한을 품고 있던 조대비의 친조카 승후군(承侯君) 조성하(趙成夏)와 친교를 맺고, 그 자신이 조대비와의 인척관계를 내세워 조대비에게 접근하여 장차 후계자 없이 돌아갈 철종의 왕위계승자로 그의 둘째아들 명복(命福:고종의 兒名)을 지명하기로 묵계를 맺어두었다.
1863년 12월초 철종이 사망하자 조대비는 이하응의 아들 명복을 익성군(翼成君)으로 봉하고, 익종대왕의 대통을 계승하게 하자는 원로대신 정원용(鄭元容)의 발의를 채납하여, 12세인 고종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자신이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 흥선군은 흥선대원군으로 봉하여졌으며 대비로부터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국정을 요람하게 되었다.

3. 개혁정치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를 분쇄하고 쇠락한 왕권을 다시 공고히 하며, 밖으로는 침략적 접근을 꾀하는 외세에 대적할 실력을 키워 조선을 중흥할 과감한 혁신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당쟁을 뒷받침하는 조직이 없는 지방 양반토호들의 발호를 두둔하는 기관으로 화한 서원(書院)을 대폭 정리하였다.
또한, 토색과 주구에 힘쓰는 탐관오리를 처벌하고, 무토궁방세(無土宮房稅)의 폐지, 양반·토호의 면세전결의 철저한 조사와 징세, 무명잡세(無名雜稅)의 폐지, 진상제도(進上制度)의 폐지, 은광산의 개발허용 등 경제·재정개혁을 단행하였다.
또한, 군포제(軍布制)를 호포제(戶布制)라는 균일세(均一稅)로 개혁하여 강제로 양반도 세부담을 지도록 하였다. 사회의 악습개량에 힘쓰고 복식을 간소화하였으며 사치를 금하였다. 그리고 《대전회통》·《육전조례 六典條例》·《양전편고 兩銓便攷》 등 법전을 편찬하여 법질서를 확립하는 데에도 공헌하였다.
또한, 의정부를 부활하였으며 비변사(備邊司)를 폐하고 삼군부(三軍府)를 두어 정무(政務)와 군무(軍務)를 분리하여 군국기무(軍國機務)를 맡게 하고 국방을 강화하였다.
한편, 왕권을 드러내고자 경복궁 중건의 대역사를 착수하였다. 이를 위하여 원납전(願納錢)을 징수하고 문세(門稅)를 거두었으며, 소유자에 관계없이 전국에서 거목(巨木)·거석(巨石)을 징발하고 역역(力役)을 부담시켜 국민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민심수습을 위한 대출척(大黜陟), 당쟁의 본거지 정리, 국가재정의 질서확립, 경제개혁과 행정개혁 등으로 세도정치의 폐해를 광정(匡正)함에 큰 공을 세웠다.
 
5. 재집권

1873년 11월 대원군이 전용하던 창덕궁의 전용문을 사전양해 없이 왕명으로 폐쇄하니 그는 하야(下野)하지 않을 수 없었고, 양주 곧은골〔直谷〕로 은거하였다. 타의에 의해서 정계에서 축출된 대원군의 정권에 대한 집념과 명성황후에 대한 감정은 격렬하였으며, 그뒤 기회 있을 때마다 정계로의 복귀를 꾀하여 물의를 빚었다.
1881년 《조선책략 朝鮮策略》의 반포를 계기로 민씨척족정부의 개화시책을 비난하는 전국유림의 척사상소운동(斥邪上疏運動)이 격렬히 전개되자, 그의 서장자(庶長子) 재선(載先)을 옹립하여 민씨척족정권을 타도하고 그의 재집정을 실현하려는 대원군계인 안기영(安驥永)의 국왕폐립음모(國王廢立陰謀)에도 간여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때에는 봉량미(捧糧米)문제로 도봉소사건(都捧所事件)을 일으킨 난병(亂兵)이 운현궁(雲峴宮)으로 몰려와 정국에 개입을 요청하자 그는 입궐하여 왕명으로 사태수습을 위임받고 출분(出奔)한 명성황후의 사망을 공포하고 재집권하였다.

6. 명성황후와의 갈등과 은거


그러나 청국군의 개입으로 사태가 역전되면서 대원군은 청국으로 연행되어 바오딩(保定)에서 3년간 유수생활(幽囚生活)을 겪어야 하였다.
1885년 2월에 조선통상사무전권위원으로 부임하는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같이 귀국한 뒤에도 정권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않고 민씨척족정권타도의 기회를 노렸다.
민씨정부가 조러조약을 체결한 뒤 러시아와 가까워지게 되자 1886년 불평을 품은 위안스카이와 결탁하여 1887년 큰 아들 재황(載晃)을 옹립하고 재집권하려고 시도하다 실패하였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벌어지자 동학세력과도 기맥을 통하기도 하였다.
청일전쟁을 앞두고 일본이 조선에서의 정치적 세력을 부식하고자 내정개혁을 강요하며 온건개화세력과 손잡고 갑오경장을 일으켰을 때, 그를 궁중으로 영입하여 국왕으로부터 군국기무를 총괄하도록 위임받게 하였다.
그러나 그가 일본이 바라는 것과 달리 자신의 정치소신을 피력하자 그를 은퇴하게 하고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을 중심으로 경장사업(更張事業)을 추진하였다.
1895년에 정부는 그의 행동을 제약하는 대원군존봉의절(大院君尊奉儀節)을 제정하여 대소 신민과의 접촉을 제한하고 외국사신들과도 정부의 관헌입회하에만 만나도록 조치하였다.

7. 평가


유폐생활을 강요당하던 그가 다시금 궁중에 나타나 오랜 정적인 명성황후의 최후를 보게 되는 것은 을미사변 때의 일이다. 삼국간섭으로 궁지에 몰리는 일본을 본 뒤 친러노선을 취하게 되는 민씨와 친러정객의 득세에 조선에서의 일본의 영향권을 무력으로 돌이키고자 무도하게도 정치낭인들과 일본병을 동원하여 궁중을 습격할 때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는 입궐의 명색을 꾸미기 위하여 은거중이던 그를 받들고 경복궁에 쳐들어가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친일내각을 세우며 대원군의 위세를 빌려 만행을 은폐하고자 하였다.
러시아의 기민한 반격으로 아관파천(俄館播遷)에 의하여 국왕이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고 친러정부가 정권을 다시 잡게 되자 대원군은 양주 곧은골로 돌아와 다시 은거하게 되었다.
죽은 뒤 부대부인 민씨와 더불어 공덕리에 안장되었다. 남달리 정권에 집착하여 명성황후와 대립하게 된 생애 후반에는 정치노선이 변화무상하였으나 고종초 10년간의 집정은 강직한 성격과 과감한 개혁정치로 내치에 실적을 올렸고, 서구침략세력의 침략적 접근에서 민족을 수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제정세와 세계사 대세에 어두운 나머지, 근대사의 추세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여 근대국가로의 전환을 실현하지 못하였다.
1907년 대원왕(大院王)에 추봉되었으며, 시호는 헌의(獻懿)이다. 서화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난초를 잘 그렸다.

2006.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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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 1820 - 1898 ) 생애와 업적

 


흥선 대원군은 조선 말기의 정치가로서, 이름은 이하응이다.

어렸을 때 부모를 모두 여의고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 철종이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나자, 왕족인 자신의 아들(고종)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대원군의 자리에 올라 실질적인 권력을 잡았다. 그 후 부정부패를 일삼던 안동 김씨 세력을 몰아내고,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였다. 그의 개혁 정책은 한 때 성공을 거두었으나 경복궁재건 등의 무리한 재정 지출로 백성들의 신임을 잃었다. 또한 쇄국 정책을 고집하여 두 차례의 양요를 치르고, 9명의 프랑스 신부와 8천여 명의 신도를 처형하는 등 천주교를 박해하다가 명성 황후 시해 사건으로 정계에서 물러났다.

 


대원군의 개혁 정책

 


1863년 흔히들 강화 도령으로 부르는 조선 25대 임금 철종은 뒤를 이을 왕자도 없이 35세에 숨졌다. 세자가 없으니 왕실의 종친 가운데서 다음 임금 감을 물색하다가 겨우 12세인 이하응의 둘째 아들이 26대 고종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이로써 60여년 간 권력을 쥐고 흔들던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력은 무너지고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시대가 온 것이다.

왕실의 종친이기는 했지만 드센 안동 김씨의 세력 밑에서 거짓으로 미친 거렁뱅이처럼 위장하여 목숨을 이어 오던 그였다. '상가집 개'라는 치욕적인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때를 기다리던 그였다. 가난과 멸시 속에서 안으로 칼을 갈면서 지내왔기 때문에 누구보다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던 그였다. 대원군이란 원래 다른 집 자손들이 들어와서 왕이 될 때 그 임금의 아버지에게 주는 벼슬이다. 흥선 대원군은 나이 어린 고종을 대신해서 나라를 과감하게 개혁해가기 시작했다. 먼저 세도를 부려 온 안동 김씨 일파를 대부분 몰아내고, 파벌과 신분의 귀천을 떠나 능력에 따라 인재를 가려 썼다. 그리고 왕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정부 기구를 대폭 개선했다. 또한, 나라의 법질서를 바로잡고, 양반들에겐 세금을 내도록 하고, 백성들의 세금은 크게 줄였다. 사원도 전국에서 뛰어난 인재를 양성하던 도산서원과 소수서원 등 47개만 두고 6백여개를 철폐시켰다. 이에 지방 유생 (공자의 학문인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반발을 샀다.

" 공자가 다시 살아나서 나를 꾸짖는다 해도 이 정책은 밀고 나가겠다. "

대원군은 또 길게 늘어뜨리고 다니던 도포자락도 짧게 자르도록 했다.

" 긴 도포 자락에 뇌물을 숨겨 가지고 다닐 수 없게 해야 한다. 그리고 공연히 거들먹거리면서 물고 다니

는 긴 담뱃대를 짧게 하고, 큰 갓도 적당히 줄이도록 하라. "

이른바 의식 개혁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경복궁 복원 운동과 천주교 신도를 비롯해 외국 신부 9명을 죽인 병인박해, 그리고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며느리 명성황후와의 갈등을 거치다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 뒤 그는 좋아하던 난초 그림만 그리면서 세월을 보내다가 1898년에 숨을 거두었다.

<흥선대원군의 연대표>

 

1820년: 12월 21일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에서 영조의 5대손으로 태어남

1831년: 민씨집안의 딸과 결혼함

1843년: "군"의 칭호를 받아 "흥선군"이 됨 방탕 생활을함

1863년: 철종이 뒤를 이을 왕자없이 병에들어 죽자 흥선군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름(고종) 대원군이 되어 섭정을 시작함 공평하게 인재등급, 양반들에게도 세금을

징수함

1865년: 경복궁을 중건함 공사비용을 보충하기 위해 "원납전"을 발행

1866년: 민치록의 딸을 고종의 비로 맞아들임 프랑스신부를 처형한것을 구실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하자 프랑스 군을 무찌름(병인양요) 쇄국정책을 강화함

1867년: 경복궁에 불이남 다시 "원납전"을 발행

 

1868년: 경복궁을 완성함

1871년: 미국군함이 강화도에 침입하자 미국군들을 무찌름(신미양요) 전국에 척화비를

세움

1873년: 11월 고종이 직접정치를 하겠다고해 정치에 물러남

1882년: "임오군란"으로 다시 정권을 잡음 민비의 모함으로 청나라에감

1885년: 조선으로 돌아옴

1895년: 민비가 일본인에 피살되어 고종의 요청으로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얼마후

스스로 물러남

1898년: 2월 운현궁에서 세상을 떠남

2006.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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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0년 12월 21일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에서 영조의 5대손으로 태어남.


1843년 24세
군의 칭호를 받아 흥선군이 되었다, 이때부터 안동 김 씨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얼굴에 나타난 술기운에 빠져 행실이 추저분한 생활을 함.


1863년 44세
철종이 뒤를 이을 왕자가 없이 병이 들자 조 대비에게 접근하여
둘째 아들 명복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약속받았다. 철종이 세상을 떠나자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이 되어 임금이 직접 통치할 수 없는 때에 임금을 대신하여 정치를 시작하였다. 공평하게 인재를 등용하고 양반들에게도 세금, 수수료 따위를 거두어들이게 하여 나라 살림이 좋아지고 부패의 보온 설비를 갖추고 인공적으로 흙의 온도를 높여서 식물을 촉성 재배하는 묘상이었던 서원을 정리하였다.


1865년 46세
왕조의 위엄을 살리기 위하여 경복궁을 손질하여 고쳐 세웠다. 공사 비용을 보충하기 위하여
스스로 원하여 바친 돈을 발행하였다.


1866년 47세
프랑스 신부를 처형한 것을 구실 삼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하여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그리고 천주교도를 더욱 어떤 행위나 사회적 활동을 권력이나 무력 따위로 억눌러 꼼짝 못하게 하고 쇄국 정책을 강화하였다.


1867년 48세
경복궁에서 불이나자 경복궁 복구 작업을 시행함. 공사비용이 많이 들자 다시
조선 고종 때 발행한, 한 푼이 엽전 백 푼과 맞먹던 돈을 발행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높아졌다.


1868년 49세
경복궁을 완성하였다.


1871년 52세
신미양요가 일어나고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다.


1873년 54세
명성황후가 최익현을 시켜 대원군의 잘못을 알리는 상소문을 고종에게 올리도록
하게함. 11월,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겠다고 발표하자 정치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885년 67세
청나라에 끌려갔던 흥선대원군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1895년 77세
을미사변으로 일본인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이 흥선 대원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얼마 후 스스로 물러났다.


1898년 79세
2월, 운현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2008.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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