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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외국에서인기 있을것같은 대구문화재아시는분
비공개 조회수 2,458 작성일2017.10.19
외국에서인기있을것같은 대구의 문화재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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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 Spreewald
절대신
2019 스포츠, 레저 분야 지식인 남성 건설/건축업 #재난지도사 #건축기술자 #조류애조가 새, 조류 3위, 날씨 2위, 재난재해 1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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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을 계획해서 모두 보여 줄 수는 없지만 아래 문화재를 선택하셔서 정리하면 좋은 자료로 활용될거ㅏ 생각합니다. 특히 굵은 글씨로 쓰인 문화재에 관심을...


1.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종    목  보물  제24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학동 산124 동화사  
시     대 통일신라 

민애왕(재위 838∼839)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만든 동화사 비로암 3층석탑(보물 제247호)과 동시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1.29m의 불상이다.

둥근 얼굴은 풍만하고 눈·코·입이 작아지고 있으며, 미소가 사라지고 단아한 모습이다. 어깨는 뚜렷하게 좁아졌으며, 가슴은 평평하고, 하체의 처리도 역시 둔화되었다. 이러한 위축되고 둔화된 표현은 9세기 중엽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불상양식이다. 손모양은 비로자나불이 일반적으로 취하고 있는 모습으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싼 형태이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규칙적으로 얇은 평행의 옷주름선이 있고, 아랫도리에 있는 U자형 무늬가 특이하다.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배(舟) 모양으로, 가장자리를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으로 표현하였다. 광배의 꼭대기 부분에는 삼존불, 양쪽에는 8구의 작은 부처가 배치되어 있다.

대좌와 광배를 갖추고 있으며 손상이 거의 없는 9세기에 유행하던 비로자나불상의 대표적인 예이다.



2.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24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학동 산124 동화사  
시     대 통일신라

 

동화사 서쪽 언덕에 자리잡은 비로암의 대적광전 앞뜰에 세워져 있는 3층석탑으로,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의 각 층에는 네 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겼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기 한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뜬 조각을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수가 층마다 4단이며, 처마는 곱게 뻗어 나가다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머리장식받침)과 복발(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차례로 올려져 있다.

각 기단 위에 괴임을 여러 개 둔다거나, 지붕돌 네 귀퉁이의 들린 정도가 크지 않은 점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는 단정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1966년 부처님의 사리를 담는 기구 일부를 도둑 맞았으나, 없어지지 않은 사리돌그릇에 통일신라 경문왕 3년(863)에 민애왕의 명복을 빌고자 이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3.도동서원 강당 서당 부 장원


종 목  보물  제35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 
시 대 조선시대


서원이란 훌륭한 사람들에게 제사지내고 유학을 공부하던 조선시대 지방의 사립교육기관을 말한다. 도동서원은 문경공 김굉필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 선조 원년(1568) 처음 세워 쌍계서원이라 불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져 선조 37년(1604) 지금 있는 자리에 사당을 다시 지었고 선조 40년(1607)에 임금님이 직접 도동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8년(1871)의 서원철폐령의 대상에서 제외된 47개 서원가운데 하나이다.

 

행사와 교육의 중심 건물인 강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는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있다. 좌우 끝 칸은 온돌방으로 꾸몄고 그 앞면엔 각각 작은 툇마루를 두었다.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양쪽 툇마루와 통하도록 해 놓았다.

 

제사지내는 공간의 중심 건물인 사당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김굉필 선생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지붕과 공포를 쌓은 양식은 강당과 마찬가지로 맞배지붕이다. 앞면 3칸에는 각각 2짝씩 널문을 달았다. 강당을 둘러싼 담장은 기와를 이용해 쌓은 맞담으로 구성하여 매우 아름답다.

 

간결하고 검소하게 지은 전통 깊은 조선 중기 서원 건축물로 잘 보존해야 할 문화재이다. 


4.정도사지 오층석탑


종 목  보물  제35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대구 수성구  황금로 200(70번지) 국립대구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원래 경상북도 칠곡군 정도사터에 있었던 5층 석탑으로, 1934년에 경복궁으로 이전하였다가 1994년에 국립대구박물관으로 다시 옮겨 세워 놓았다.

 

기단은 2단으로, 아래층 기단에는 각 면에 안상을 3구씩 조각하였는데 무늬의 바닥선이 꽃모양처럼 솟아오르고 있다. 위층 기단에는 각 면 중앙에 기둥 모양을 새겼고 각 기단의 맨윗돌은 약간의 경사를 이루었으며, 윗돌 윗면에 1단의 괴임을 두었는데 특별한 예에 속한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들이 각각 한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의 정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모양이 새겨져 있고, 2층 이상은 그 크기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지붕돌은 너비가 좁고 두꺼우며 네 귀퉁이가 위로 들려 있어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4단으로 줄었고 추녀 밑으로 낙수홈이 새겨져있다. 5층 지붕돌은 없어지고 몸돌 위에 머리장식받침인 노반만 남아있다.

 

2층 이상의 몸돌은 체감율이 적고 지붕돌이 좁아 두꺼운 느낌을 주지만, 석탑 표면에 손상이 없고 안상의 조각 또한 깨끗하고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다.

 

위층 기단에 탑 이름이 새겨져 있고, 끝에 ‘태평십일년’의 연호 및 연대가 있다. 또 옮길 당시에 탑내에서 녹유사리병·동합 2개 등의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특히 함께 발견된 기록문서에는 탑의 인연·시납, 공사의 사실 등을 기재하였고, 글 문투에 이두식이 많이 사용되고 있어 탑 자체의 연구와 아울러 이두 연구에도 좋은 자료이다. ‘태평십일년’은 고려 현종 22년(1031)에 해당된다.

  

 

5.용연사 석조계단


종 목  보물  제539호 
지 정 일 1971.07.07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 865 용연사 
시 대 조선시대


계단은 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수여하는 식장으로, 이 곳에서 승려의 득도식을 비롯한 여러 의식이 행하여 진다. 용연사 내의 한적한 곳에 자리잡은 이 계단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임진왜란(1592) 때 난을 피해 묘향산으로 옮겼던 통도사의 부처사리를 사명대사의 제자 청진이 다시 통도사로 옮길 때 용연사의 승려들이 그 일부를 모셔와 이곳에 봉안하였다 한다.

 

돌난간이 둘러진 구역 안에 마련된 계단은 널찍한 2단의 기단 위로 종모양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은 네 모서리마다 4천왕상을 1구씩 세워두고, 위층 기단은 4면에 8부신상을 돋을새김하였는데, 뛰어난 조각솜씨는 아니지만 섬세하고 균형감이 있어 단조로운 구조에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조선시대에 유행한 양식을 보이고 있는 탑신은 별다른 꾸밈을 하지 않은 채 꼭대기에 큼직한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조각해 두었다.

 

절 안에 세워져 있는 석가여래비에는, 석가의 사리를 모시고 이 계단을 쌓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을 통해 조선 광해군 5년(1613)에 계단이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구조가 섬세하고 조각기법이 예리하며, 특히 17세기 초에 만들어진 작품으로서 당시의 석조건축과 조각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6.달성 태고정

 

종 목  보물  제554호 
지 정 일 1971.12.06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 638 
시 대 조선시대

 

이 건물은 조선 성종 10년(1479) 박팽년의 손자인 박일산이 세운 별당건축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서 일부만 남았던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일명 ‘일시루’라고도 한다. 현재 대청에는 임진왜란 후 치찰사로 온 윤두수의 한시를 새긴 현판과, 정유재란 후 명군 선무관이 남긴 액자 들이 있다.

 

네모난 모양의 단 위에 서 있으며 앞면 4칸 ·옆면 2칸 크기로, 동쪽 2칸은 대청마루이고, 서쪽 2칸은 방으로 꾸몄다. 대청 앞면은 개방되어 있는데 옆면과 뒷면에는 문을 달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청 앞 기둥 사이에는 2층으로 된 난간을 설치하였다. 서쪽에는 온돌방과 부엌을 마련해 놓았는데 단순한 아궁이가 아닌 부엌을 한쪽 구석에 둔 것은 흔치않은 것이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 가구나 세부가공이 정교한 편이다.

 

 

7.도학동 승탑

 

종 목  보물  제601호 
지 정 일 1975.08.04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학동 36 
시 대 고려시대

 

승탑은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동화사 안에 세워져 있는 이 승탑은 원래 동학동의 학부락에 쓰러져 있던 것을 이 곳으로 옮긴 것으로, 바닥돌 위에 올려진 기단과 탑신이 모두 8각을 이루고 있다.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기단은 아래받침돌과 가운데받침돌이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윗받침돌은 별개의 돌로 되어 있으며, 큼직한 연꽃무늬를 소박한 솜씨로 둘러 놓았다. 탑신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고, 널찍하게 마련된 지붕돌은 윗면의 느린 곡선이 처마끝까지 펼쳐지고 있다. 꼭대기에는 아름다운 장식을 한 2단의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다.

 

각 부분의 양식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8.현풍 석빙고

 

종 목  보물  제673호 
지 정 일 1980.09.16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현풍면 상리 632 
시 대 조선시대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이다.

 

남북으로 길게 축조되어 있으며, 출입구가 개울을 등진 능선쪽에 마련된 남향구조이다. 돌의 재질은 모두 화강암으로 외부에서 보면 고분처럼 보인다. 입구는 길쭉한 돌을 다듬어 사각의 문틀을 만든 후 외부공기를 막기 위해 돌로 뒷벽을 채웠다. 외부는 돌을 쌓고 점토로 다져서 흙을 쌓아 올렸다. 잘 다듬어진 돌로 벽과 천장을 쌓았는데 천장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4개 틀어올리고 그 사이사이에 길고 큰 돌을 얹어 아치형을 이루게 하였다. 천장에는 통풍을 위한 환기구가 두 군데 설치되었고 빗물에 대비한 뚜껑이 있다. 바닥은 평평한 돌을 깔고 중앙에 배수구를 두었다.

 

당시에는 얼음창고가 마을마다 설치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규모가 작은 현풍고을에 이러한 석빙고가 만들어진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1982년 석빙고 주위의 보수작업 때 축조년대를 알려주는 건성비가 발견됨으로써 조선 영조 6년(1730)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9.대구 달성

 

종 목 사적 제6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대구 중구 달성동 294-1

시 대 삼국시대

 

평지의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쌓은 삼국시대의 성곽이다. 높이는 일정치 않으나 4m정도이며, 둘레는 약 1,300m이다.

 

성벽의 아랫부분에서 초기철기시대의 조개더미와 각종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지방의 중심세력이 성장하여 초기적 국가 형태를 이루면서 쌓은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경주의 월성처럼 평지에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쌓은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달성은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 초기 성곽의 전형으로 평가되고 있다.

 

성벽은 주로 흙으로 쌓았고, 성벽 윗부분에는 큰 돌덩어리들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어 후대에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성안에는 조선시대 전기까지 군대의 창고가 있었고, 우물과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성의 서남쪽으로 연결된 구릉지대에는 돌방무덤(석실분)이 많이 흩어져 있고, 무덤에서 금동관을 비롯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대구 달성은 우리나라 성곽 발달사에 있어 가장 이른 시기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10.불로동 고분군

종    목  사적  제262호  
지 정 일  1978.06.23  
소 재 지  대구 동구  불노동 335  
시     대 삼국시대 

대구시 불로동과 입석동 구릉 서남면에 있는 수십기의 크고 작은 무덤들이다.

무덤의 지름은 15∼20m, 높이 4∼7m 정도가 보통이며, 내부구조는 냇돌 또는 깬돌로 4벽을 쌓고, 판판하고 넓적한 돌로 뚜껑을 덮은 직사각형의 돌방이 있으며, 그 위에 자갈을 얹고 흙을 덮었다. 껴묻거리(부장품)로 금제 혹은 금동제 장신구와 철제무기 무늬를 새긴 토기 등 많은 출토물이 있다.

이 무덤들은 대개 4∼5세기경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되며, 이 지역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토착 지배세력의 집단무덤으로 추측한다.

불로동 무덤들은 위치가 구릉이라는 점, 무덤 내부가 돌무지 무덤과 비슷하게 깬돌로 지은 점, 그리고 돌방이 지나치게 가늘고 긴 점에서 낙동강 중류 지역 계통임을 알게 해 준다. 그러나 유물의 형태나 질이 신라와 유사하여 이 지역 세력의 복잡한 문화양상을 보여주기도 하다.
  

 

11.계산동 성당

 

종 목 사적 제290호

지 정 일 1981.09.25

소 재 지 대구 중구 계산동2가 71

시 대 대한제국시대

 

 1886년 로베트(Robert.A.P) 신부가 경상도 지역에 천주교를 전파하다가 1897년에 현재의 계산동 성당 자리에 있던 초가집를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1899년에 한식 목조 십자형의 성당을 지었으나, 다음 해에 화재로 불 타 1902년에 현재의 성당을 짓게 되었다.

 

설계는 로베트 신부가 하고 중국인이 공사를 맡았다고 한다. 당시 대구에서는 처음 세워진 서양식 건물로, 입구에 두 개의 종각에 우뚝 솟아 ‘뾰족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성당건축은 고딕양식이 가미된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화강석 기단 위에 붉은 벽돌을 쌓고 검은 벽돌로 고딕적인 장식을 하였다.

 

대구 지방에서 유일한 1900년대 성당 건축물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2.달성 삼가헌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104호 
지 정 일 1979.12.31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 800 
시 대 조선시대


충정공 박팽년(1417∼1456)의 자손들이 정착하여 온 박씨마을 묘골과 낮은 산 하나를 경계로 하여 자리잡은 조선시대의 주택이다. 넓은 터에 대문간채·사랑채·안채·별당·연못이 배치되어 있다. 충정공의 11대손인 삼가헌 박성수가 영조 45년(1769)에 사랑채를 짓고 자신의 호를 현판으로 걸어 '삼가헌'이라 이름지었다. 그 이듬해에는 삼가헌 서쪽편에 별당을 세우고 주변과 연못에 각각 국화와 연꽃을 심은 뒤 '하엽정'이라 불렀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건물이 사랑채이며, 안채는 사랑채를 거쳐야 출입을 할 수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대략 트인 'ㅁ'자형의 구조를 하고 있으며 안채로 드나드는 중문채와 곳간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사랑채는 'ㄱ'자형 평면으로 넓은 대청과 골방이 딸린 온돌방 2칸·마루방·청지기방을 두었다. 안채는 'ㄷ'자형으로 부엌·안방·대청·건넌방·개방된 툇마루 등으로 꾸몄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서쪽으로 장독대·곳간채·안변소가 자리잡고 있다.


원래 서당으로 쓰던 별당은 고종 11년(1874)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이 별당은 안채의 서쪽 넓은 터에 따로 자리잡고 있는 'ㄱ'자형 건물로 온돌방 3칸과 마루방 1칸으로 구성되었다. 왼편 끝방의 앞에는 1칸의 누마루를 꾸미고 그 옆 마루와 다른 방들 앞에는 툇마루를 놓았다.


전체적으로 볼때, 조선 중기에 건축된 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남긴 대표적인 주택이다.
 

 

13.달성 조길방 가옥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200호 
지 정 일 1984.12.24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가창면 정대1리 350 
시 대 조선시대

 

깊은 산골 경사가 급한 산간마을에 자리한 초가로, 현 소유자의 9대조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지은 집이라고 한다. 사랑채는 60여년전에 확장하였고, 아래채는 30여년 전 무너진 것을 다시 지은 것이다. 산 전체가 서향으로 경사져 있고 그 안에 마을이 숨듯이 자리하여 집들은 자연히 모두 서향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15호 가량의 집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6호만 남아있고, 이 집이 이 마을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높은 축대 위에 지은 안채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사랑채, 왼쪽에는 아래채가 부속건물처럼 낮게 마주보고 배치되어 있다. 안채의 앞면 벽에는 크기가 매우 작은 여닫이 문 1짝이 있는데, 출입보다는 채광과 통풍을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초가로는 보기 드물게 오래된 건축으로, 특히 안채 창호문의 규모와 성격은 주택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14.둔산동 경주최씨 종택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261호 
지 정 일 2009.06.19
소 재 지 대구 동구  둔산동 386번지 일원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인조 때의 학자 대암 최동집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지은 집이다.


대구 지방에 있는 조선시대 주택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살림채와 재실·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숙종 20년(1694)에 지은 안채와 광무 9년(1905)에 다시 지은 사랑채가 살림채를 구성한다. 사랑채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동천서원을 없앨 때 철거한 자재의 일부를 사용하여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살림채의 오른편에 있는 보본당은 영조 18년(1742)에 지은 사당으로, 제사지내는 재실로 사용하고 있다. 그 뒤편에 있는 2동의 사당은 최동집과 조선 정조 때의 학자인 최흥원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재실·가묘·별묘 등이 조화를 이룬 큰 규모의 주택으로 조선시대 양반 주택과 그 생활 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5.선화당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

지 정 일 1982.03.04

소 재 지 대구 중구 포정동 21 경상감영공원

시 대 조선시대

 

 선화당은 경상도 관찰사가 공적인 일을 하던 건물로 원래 안동에 있던 것을 조선 선조 34년(1601)에 김신원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그 뒤 현종 11년(1670), 영조 6년(1730), 순조 6년(1806) 3차례에 걸친 화재로 타버렸다.

 

지금의 건물은 순조 7년에 윤광안이 다시 지은 것이다. 그 후 경상북도 도청으로 사용되다가 1969년 도청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 1970년 중앙공원을 만들면서 현 모습으로 고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관청건물은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귀중한 자료이며, 경상감영의 상징이 되는 건물이라는 데 가치가 있다.

 

16.징청각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

지 정 일 1982.03.04

소 재 지 대구 중구 포정동 21 경상감영공원

시 대 조선시대

 

경상도 관찰사가 살림채로 쓰던 건물이다. 조선 선조 34년(1601)에 선화당, 응향당 등 여러 건물과 함께 지었으며 그 뒤 여러 차례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경상도 관찰사가 살림채로 쓰던 건물이다. 조선 선조 34년(1601)에 선화당, 응향당 등 여러 건물과 함께 지었으며 그 뒤 여러 차례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8칸·옆면 4칸으로 넓이가 무려 227㎡나 되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징청각은 선화당과 함께 대구시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관아건물로 중요한 문화재이다.

 

17.영영축성비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 
지 정 일 1982.03.04
소 재 지 대구 수성구  만촌동 산83-5 영남제일관 앞 
시 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대구토성을 돌로 다시 쌓은 후 이를 기념하고자 세운 비이다.

 

비는 직사각형으로, 바닥돌 위에 비몸을 세운 간단한 모습이다. 비문에 의하면 성의 둘레는 2,145보이며, 네 개의 문을 만들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군량, 전포 등을 갖춘 창고를 두었다. 석성의 공사기간은 6개월이며, 동원된 인원은 78,534명에 달한다. 성이 완성된 뒤에는 여러 장사들을 모아 활쏘기대회를 열어 상을 주었다 한다.

 

경상도 관찰사였던 민응수가 나라에 건의하여 영조 13년(1737) 대구 남문 밖에 세워두었으며, 민응수가 비문을 짓고, 백상휘가 글씨를 썼다. 광무 10년(1906)에 성은 헐리게 되었고, 비는 1932년 향교로 옮겨 보존되다가 198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2017.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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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신
2022 여행 분야 지식인 체험관광지, 유적지 2위, 펜션 2위, 숙박시설 3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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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향교대성전 (大邱鄕校大成殿)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

분류: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교육기관/ 향교

소재지: 대구 중구 명륜로 112 (남산동)

시대: 조선시대



 

향교는 지방에 설립한 국립교육기관으로서,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기능과 학생을 교육하는 강학 기능을 동시에 담당하였다.
대구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선조 32년(1599)에 달성공원 근처에 다시 세웠다가 선조 38년(1605) 교동으로 옮겼고,1932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재·서재·문묘·삼문 등이 있다.

대구향교로 들어서면 교육 공간인 명륜당과 학생들이 숙식하는 동재·서재가 있으며,내삼문을 열고 뒤채로 들어서면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나타난다. 대성전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성현 18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건물로,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지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을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 
대구향교 대성전은 대구 시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향교의 중심 건물로,전체적으로 엄숙하고도 단아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건물이다.




구암서원숭현사 (龜岩書院崇賢祠)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호 ]

분류: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교육기관/ 서원

소재지: 대구 북구 연암공원로17길 20 (산격동)

시대: 조선시대



구계 서침의 덕을 기리기 위해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서원이다.
서침은 고려말∼조선초의 변혁기에 향촌에 은거하며 학문 연구에 노력하였다.
구암서원은 현종 6년(1665) 세웠고,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그 후 1924년 유림이 다시 지었다. 신명여고 운동장 오른쪽 언덕 아래에 북동쪽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경앙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유허비각이 있고 맞은편에 강당이 있다.
숭현사는 강당 바로 뒤에 3m쯤 떨어져 있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구암서원 숭현사는 대구 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원 안에 있을 뿐 아니라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관풍루 (觀風樓)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호]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관아

소재지: 대구 중구 달성동 294 달성공원

시대: 조선시대




옛날 경상감영의 정문으로, 조선 선조 34년(1601)에 세웠다.
관풍루의 원래 이름은 ‘폐문루(閉門樓)’로 새벽 5시에 문을 열고 밤 10시에 문을 닫는 풍악을 울렸다고 한다. 이름을 바꾼 것은 감사가 이 건물 위에서 세속을 살핀다고 하여 붙인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이다. 건물 4면에는 난간을 설치했으며, 뒤편으로는 계단을 만들어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대구 파계사 건칠 관음보살좌상 및 복장유물 

(大邱把溪寺乾漆觀音菩薩坐像및腹藏遺物)


보물  제992호

분류: 유물 / 불교조각/ 건칠조/ 보살상

소재지: 대구 동구 파계로 741, 파계사 (중대동)

시대: 조선시대




신라 애장왕 5년(804)에 심지왕사가 세운 파계사에 유리상자를 씌워 단독으로 모시고 있다. 불상 안에서 발견된 기록에 의하면 세종 29년(1447)에 다시 만들었다고 적혀 있어 연대가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전체 높이는 108.1㎝이며 머리에는 꽃모양을 정교하게 붙인 3중의 높은 관이 묵중하게 씌여져 있다. 오른손은 어깨쪽으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있으며, 왼손은 약간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댈 듯이 하여 손바닥을 위로 하고 있다. 옷깃이 양쪽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 오른발 끝을 덮은 점이라든가, 가슴과 양팔, 무릎 등 전신을 감싼 화려한 장식, 무릎 밑에 보이는 물결무늬 등에서 앞시대의 영향이 나타난다.
근엄한 표정, 두터운 옷, 손모양, 가슴위로 올라온 치마를 주름잡아 끈으로 고정시킨 것 등은 장육사 건칠보살좌상(보물 제993호)과 비슷하며, 고려 후기 불상의 전통적인 특징을 지닌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大邱 桐華寺 毘盧庵 石造毘盧遮那佛坐像)


보물  제244호

분류: 유물 / 불교조각/ 석조/ 불상

소재지: 대구 동구 팔공산로201길 41, 동화사 (도학동)

시대: 통일신라




민애왕(재위 838∼839)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만든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보물 제247호)과 동시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1.29m의 불상이다.
둥근 얼굴은 풍만하고 눈·코·입이 작아지고 있으며, 미소가 사라지고 단아한 모습이다. 8세기 불상에 비해 어깨는 뚜렷하게 좁아졌으며, 가슴은 평평하고, 하체의 처리도 역시 둔화되었다. 이러한 위축되고 둔화된 표현은 9세기 중엽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불상양식이다. 손모양은 비로자나불이 일반적으로 취하고 있는 모습으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싼 형태이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규칙적으로 얇은 평행의 옷주름선이 있고, 아랫도리에 있는 U자형 무늬가 특이하다.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배(舟) 모양으로, 가장자리를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으로 표현하였다. 광배의 꼭대기 부분에는 삼존불, 양쪽에는 8구의 작은 부처가 배치되어 있다.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갖추고 있으며 손상이 거의 없는 9세기에 유행하던 비로자나불상의 대표적인 예이다.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 (龜尾 善山邑 金銅菩薩立像)


국보  제183호

분류: 유물 / 불교조각/ 금속조/ 보살상

소재지: 대구 수성구 청호로 321, 국립 대구박물관 (황금동,국립대구박물관)

시대: 신라




경상북도 선산군 고아면에서 공사를 하던 중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국보 제182호),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국보 제184호)과 함께 출토되었다. 이 지역에서 삼국시대의 기와조각과 토기조각들이 많이 출토되어서 원래 절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살상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대좌(臺座) 위에 오른쪽 무릎을 약간 구부린 채 자연스럽고 유연한 자세로 서 있다. 머리에는 꽃장식의 관(冠)을 썼는데, 관의 정면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다. 눈·코·입의 표현이 분명한 얼굴은 둥근 편으로 전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다.
신체는 비교적 날씬한 편으로 균형이 잘 맞으며, 옷은 몸에 얇게 밀착되어 있다. 옷자락은 오른팔에 한 번 걸쳐 무릎 앞에서 둥글게 드리워지고, 다시 왼팔 위로 걸쳐 그 끝이 대좌 위로 내려뜨려졌다. 목에는 목걸이가 걸려 있으며, 어깨에서 시작한 구슬 장식은 길게 늘어져 X자를 그렸다. 불상의 뒷면에도 옷주름과 X자형의 구슬 장식이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위로 들어 연꽃 봉오리를 가볍게 들고 있으며, 왼손은 내려서 물건을 잡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물건은 없어진 상태이다. 대좌는 7각형이며, 아래로 향한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현재 꽃장식 관의 왼쪽 윗부분과 양 손 아래로 내려뜨린 옷자락 및 왼손 손가락 일부가 파손된 상태이며, 광배(光背) 또한 없어졌다. 얼굴과 오른손에 녹이 슬어있으나 도금 상태는 비교적 좋은 편이다. 전체적인 균형과 조각수법이 뛰어난 이 보살상은 삼국시대 후기 금동보살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며 7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2017.10.19.

  •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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