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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으어어어어어어어어어 숙제어어엉엉 사회인데에에에에에에에에에ㅔㅔㅔㅔㅔㅔㅔ살려줘요ㅛㅛㅛㅛㅛㅛㅛㅛ
비공개 조회수 17,337 작성일2016.09.22
대구를 설명해야하는데 대구상징하는거나 
문화제에대해서 알려주세요ㅛㅛㅛㅛㅛㅛㅛ허허허허ㅓㅎ헣허허허헣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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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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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상징

 

심벌 - 지정일자 : 1996. 10. 10

 

 

 

삼각형과 타원을 기본도형으로 해서 대구를 에워싸고 있는 「팔공산과 낙동강」의 이미지를 형상화 한 것으로 미래지향적 진취성과 세계지향적 개방성을 추구하는 활기에 가득찬 도시적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로고타입 - 지정일자 : 1996. 10. 10

 

 

 

대구광역시 로고타입은 한글ㆍ한문ㆍ영문 로고타입이 있으며 상징마크와 이상적으로 조화될 수 있도록 디자인된 요소입니다.

 

캐릭터 - 지정일자 : 2000. 3. 3

 

 

 

대구광역시의 캐릭터는 한국의 전통적인 비천상 문양의 미적감각을 21세기 세계적 섬유패션도시로 발전하고자 하는 대구시의 이미지와 조화되게 형상화한 것으로서 섬유패션도시를 상징하는 [패션이]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브랜드슬로건 "Colorful Daegu"  - 지정일자 : 2004. 12. 31

 

 

 

색채가 “다양한, 다채로움”을 의미하여 젊고, 밝고, 멋지고, 화려하고, 활기찬 도시 이미지를 제공하여 다양한 모습의 발전적인 대구를 표현

 

시조 - 독수리 (지정일자 : 1983. 7. 1)

 

 

 

대구를 대표하는 새는 활달하고 진취적인 기상과 개척자적 시민정신을 나타내는 독수리입니다.

 

시목 - 전나무 (지정일자 : 1972. 7. 18)

 

 

 

많은 나무들 가운데 전나무는 대구 시민의 강직성과 영원성, 그리고 곧게 뻗어가는 기상을 대표하는 나무입니다.

 

시화 - 목련 (지정일자 : 1972. 7. 18)

 

 

 

대구를 나타내는 꽃은 목련입니다. 목련은 순박하고 순결하며 희생정신의 시민기질을 보여줍니다.

 

대구의 문화재

 

1.대구 동화사 마애여래좌상

 

종 목  보물  제24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학동 산124-1 
시 대 통일신라

 

동화사 입구 오른쪽의 암벽을 다듬어서 조각한 불상이다. 지상에서 높이 위치한 이 불상은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 개성있는 모습이다.

 

얼굴은 부피감을 느낄 수 있는 비교적 풍만한 모습인데, 세부표현은 평면적이며, 짧은 목에는 3개의 주름이 있고, 어깨는 반듯하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에 대어 손끝이 아래를 가리키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배꼽 앞에 놓았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규칙적으로 얇게 빚은 평행의 옷주름선이 나타나있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끝이 날카로운 배(舟) 모양이다. 주변 가장자리는 타오르는 불꽃무늬를 그대로 이용하였고,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2줄의 선으로 표현하였다. 대좌는 구름 위에 떠 있는데, 구름무늬의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어서 이 불상에 활기찬 생동감을 주고 있다.

 

원만한 얼굴, 장식성이 강한 대좌와 광배의 표현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2.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종    목  보물  제24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학동 산124 동화사  
시     대 통일신라 

민애왕(재위 838∼839)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만든 동화사 비로암 3층석탑(보물 제247호)과 동시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1.29m의 불상이다.

둥근 얼굴은 풍만하고 눈·코·입이 작아지고 있으며, 미소가 사라지고 단아한 모습이다. 어깨는 뚜렷하게 좁아졌으며, 가슴은 평평하고, 하체의 처리도 역시 둔화되었다. 이러한 위축되고 둔화된 표현은 9세기 중엽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불상양식이다. 손모양은 비로자나불이 일반적으로 취하고 있는 모습으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싼 형태이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규칙적으로 얇은 평행의 옷주름선이 있고, 아랫도리에 있는 U자형 무늬가 특이하다.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배(舟) 모양으로, 가장자리를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으로 표현하였다. 광배의 꼭대기 부분에는 삼존불, 양쪽에는 8구의 작은 부처가 배치되어 있다.

대좌와 광배를 갖추고 있으며 손상이 거의 없는 9세기에 유행하던 비로자나불상의 대표적인 예이다.



3.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24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학동 산124 동화사  
시     대 통일신라

 

동화사 서쪽 언덕에 자리잡은 비로암의 대적광전 앞뜰에 세워져 있는 3층석탑으로,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의 각 층에는 네 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겼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기 한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뜬 조각을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수가 층마다 4단이며, 처마는 곱게 뻗어 나가다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머리장식받침)과 복발(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차례로 올려져 있다.

각 기단 위에 괴임을 여러 개 둔다거나, 지붕돌 네 귀퉁이의 들린 정도가 크지 않은 점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는 단정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1966년 부처님의 사리를 담는 기구 일부를 도둑 맞았으나, 없어지지 않은 사리돌그릇에 통일신라 경문왕 3년(863)에 민애왕의 명복을 빌고자 이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4.대구 동화사 금당암 동ㆍ서 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248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대구 동구 팔공산로201길 41 동화사 (도학동 산124) 
시 대 통일신라


동화사 금당암의 극락전 앞에 동·서로 서 있는 2기의 석탑으로, 두 탑 모두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먼저 동쪽의 탑은 2단의 기단 대부분이 나중에 보수된 것이라서 돌을 다룬 수법과 끝맺음 처리 부분에서 조화를 잃어버리고 있다. 위층 기단의 각 면에는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겼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따로 새겨 쌓아 올렸으며, 각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단씩 새겨져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머리장식받침), 복발(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앙화(솟은 연꽃모양의 장식),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차례로 올려져 있다.


서탑은 위층 기단의 두 면에 가운데에만 기둥 모양을 새기고, 반대쪽 면의 기둥 사잇돌을 밀어넣어 그 돌로 모서리기둥을 삼았다. 탑신부의 각 층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한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 뜬 조각을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단씩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돌만 남아 있고, 그 위로 머리장식부의 무게중심을 지탱하던 쇠꼬챙이가 솟아 있다. 1957년에 탑을 해체하여 복원하였는데, 그 속에서 조그만 탑 99개와 부처님의 사리를 담아두는 장치가 나왔다.


이 두 탑은 부분적으로 없어진 머리장식을 빼고는 조각의 양식이나 끝맺음 수법이 서로 비슷하고, 균형 또한 잘 이루어져 경쾌한 느낌을 준다. 기단과 탑신, 그리고 머리장식부의 세부적인 양식에서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5.대구 동화사 당간지주


종 목 보물  제25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대구 동구 팔공산로201길 41 동화사 (도학동 산124) 
시 대 통일신라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의 입구에는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두 기둥이 66㎝의 간격으로 마주보고 서 있다. 기둥이 마주보는 부분과 앞뒷면은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었을 뿐 아무 장식이 없고, 바깥면에는 모서리를 깎고 중심에는 세로로 능선을 조각하였다. 기둥의 꼭대기는 반원으로 둥글게 처리하였고, 기둥의 앞면 중간부분 1m정도를 살짝 들어가게 새겼다. 이러한 수법은 통일신라시대에 자주 보이는 장식 수법이다. 기둥의 위와 아래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이 뚫려 있는데, 위는 네모난 모양이고 아래는 둥근 모양이다.


당간을 받치던 석재가 없어지고 전체의 형태가 경쾌한 맛은 없지만 견실하고 장중한 느낌을 준다. 이 지주가 만들어진 시기는 당간지주에서 둔중함이 엿보이고, 동화사의 창건시기가 신라 흥덕왕 7년(832)인 것임을 참작하면 신라 후기로 추정된다.
 

 

6.대구 산격동 사자 주악장식 승탑


종 목 보물  제258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대구 북구 산격3동 1370번지 경북대학교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아 각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 위에 탑신을 올리고 지붕돌을 얹은 형태이다.


네모진 바닥돌 위에 올려진 기단은 아래·가운데·윗받침돌로 나뉘어지는데, 아래받침돌 옆면에는 사자를 새겨 놓았고, 윗면에는 구름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다. 낮은 가운데받침돌은 모서리를 죽이고 각 면마다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새겼다. 윗받침돌은 가운데 띠를 돌리고 아래·윗면에 소박하면서도 큼직한 연꽃을 조각하였다.


사리를 모셔놓은 탑신(塔身)은 낮은 편이며,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을 새기고 앞·뒷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 모양을, 나머지 면에는 사천왕상과 보살상을 조각하였다.


넓은 지붕돌은 밑면에 향로와 비천상(飛天像)을 아름답게 새겼으며, 처마부분은 목조건축의 지붕양식을 따라 2중의 서까래를 촘촘히 본뜬 조각이 있다. 윗면에는 연꽃이 둘러져 있으며 그 위의 4면에는 불교의 낙원에 산다는 새인 가릉빈가를 조각한 노반(머리장식받침)이 올려져 있다.


이 승탑은 지붕돌 일부가 깨지고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위아래의 비례가 잘 맞아 아름다운 작품이다. 각 부분의 조각이 웅장하고 뛰어나며, 고려시대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대구의 일본인 사택에 있던 것을 경북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긴 것으로, 원래 승탑이 세워진 터와 이 승탑의 주인공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7.달성 도동서원 중정당ㆍ사당ㆍ담장


종 목  보물  제35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 
시 대 조선시대


서원이란 훌륭한 사람들에게 제사지내고 유학을 공부하던 조선시대 지방의 사립교육기관을 말한다. 도동서원은 문경공 김굉필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 선조 원년(1568) 처음 세워 쌍계서원이라 불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져 선조 37년(1604) 지금 있는 자리에 사당을 다시 지었고 선조 40년(1607)에 임금님이 직접 도동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8년(1871)의 서원철폐령의 대상에서 제외된 47개 서원가운데 하나이다.

 

행사와 교육의 중심 건물인 강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는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있다. 좌우 끝 칸은 온돌방으로 꾸몄고 그 앞면엔 각각 작은 툇마루를 두었다.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양쪽 툇마루와 통하도록 해 놓았다.

 

제사지내는 공간의 중심 건물인 사당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김굉필 선생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지붕과 공포를 쌓은 양식은 강당과 마찬가지로 맞배지붕이다. 앞면 3칸에는 각각 2짝씩 널문을 달았다. 강당을 둘러싼 담장은 기와를 이용해 쌓은 맞담으로 구성하여 매우 아름답다.

 

간결하고 검소하게 지은 전통 깊은 조선 중기 서원 건축물로 잘 보존해야 할 문화재이다. 

  

 

8.딜성 용연사 금강계단


종 목  보물  제539호 
지 정 일 1971.07.07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 865 용연사 
시 대 조선시대


계단은 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수여하는 식장으로, 이 곳에서 승려의 득도식을 비롯한 여러 의식이 행하여 진다. 용연사 내의 한적한 곳에 자리잡은 이 계단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임진왜란(1592) 때 난을 피해 묘향산으로 옮겼던 통도사의 부처사리를 사명대사의 제자 청진이 다시 통도사로 옮길 때 용연사의 승려들이 그 일부를 모셔와 이곳에 봉안하였다 한다.

 

돌난간이 둘러진 구역 안에 마련된 계단은 널찍한 2단의 기단 위로 종모양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은 네 모서리마다 4천왕상을 1구씩 세워두고, 위층 기단은 4면에 8부신상을 돋을새김하였는데, 뛰어난 조각솜씨는 아니지만 섬세하고 균형감이 있어 단조로운 구조에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조선시대에 유행한 양식을 보이고 있는 탑신은 별다른 꾸밈을 하지 않은 채 꼭대기에 큼직한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조각해 두었다.

 

절 안에 세워져 있는 석가여래비에는, 석가의 사리를 모시고 이 계단을 쌓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을 통해 조선 광해군 5년(1613)에 계단이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구조가 섬세하고 조각기법이 예리하며, 특히 17세기 초에 만들어진 작품으로서 당시의 석조건축과 조각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9.달성 태고정

 

종 목  보물  제554호 
지 정 일 1971.12.06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 638 
시 대 조선시대

 

이 건물은 조선 성종 10년(1479) 박팽년의 손자인 박일산이 세운 별당건축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서 일부만 남았던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일명 ‘일시루’라고도 한다. 현재 대청에는 임진왜란 후 치찰사로 온 윤두수의 한시를 새긴 현판과, 정유재란 후 명군 선무관이 남긴 액자 들이 있다.

 

네모난 모양의 단 위에 서 있으며 앞면 4칸 ·옆면 2칸 크기로, 동쪽 2칸은 대청마루이고, 서쪽 2칸은 방으로 꾸몄다. 대청 앞면은 개방되어 있는데 옆면과 뒷면에는 문을 달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청 앞 기둥 사이에는 2층으로 된 난간을 설치하였다. 서쪽에는 온돌방과 부엌을 마련해 놓았는데 단순한 아궁이가 아닌 부엌을 한쪽 구석에 둔 것은 흔치않은 것이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 가구나 세부가공이 정교한 편이다.

 

 

10.대구 도학동 승탑

 

종 목  보물  제601호 
지 정 일 1975.08.04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학동 36 
시 대 고려시대

 

승탑은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동화사 안에 세워져 있는 이 승탑은 원래 동학동의 학부락에 쓰러져 있던 것을 이 곳으로 옮긴 것으로, 바닥돌 위에 올려진 기단과 탑신이 모두 8각을 이루고 있다.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기단은 아래받침돌과 가운데받침돌이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윗받침돌은 별개의 돌로 되어 있으며, 큼직한 연꽃무늬를 소박한 솜씨로 둘러 놓았다. 탑신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고, 널찍하게 마련된 지붕돌은 윗면의 느린 곡선이 처마끝까지 펼쳐지고 있다. 꼭대기에는 아름다운 장식을 한 2단의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다.

 

각 부분의 양식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11.딜성 현풍 석빙고

 

종 목  보물  제673호 
지 정 일 1980.09.16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현풍면 상리 632 
시 대 조선시대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이다.

 

남북으로 길게 축조되어 있으며, 출입구가 개울을 등진 능선쪽에 마련된 남향구조이다. 돌의 재질은 모두 화강암으로 외부에서 보면 고분처럼 보인다. 입구는 길쭉한 돌을 다듬어 사각의 문틀을 만든 후 외부공기를 막기 위해 돌로 뒷벽을 채웠다. 외부는 돌을 쌓고 점토로 다져서 흙을 쌓아 올렸다. 잘 다듬어진 돌로 벽과 천장을 쌓았는데 천장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4개 틀어올리고 그 사이사이에 길고 큰 돌을 얹어 아치형을 이루게 하였다. 천장에는 통풍을 위한 환기구가 두 군데 설치되었고 빗물에 대비한 뚜껑이 있다. 바닥은 평평한 돌을 깔고 중앙에 배수구를 두었다.

 

당시에는 얼음창고가 마을마다 설치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규모가 작은 현풍고을에 이러한 석빙고가 만들어진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1982년 석빙고 주위의 보수작업 때 축조년대를 알려주는 건성비가 발견됨으로써 조선 영조 6년(1730)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12.대구 북지장사 지장전


종 목 보물  제805호 
지 정 일 1984.11.30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장길 243 (도학동 620) 
시 대 조선시대


북지장사는 신라 소지왕 7년(485) 극달화상이 세웠다고 전하는 절이다.


이 건물은 사역 동쪽에 있는 대웅전이 과거 어느 시기에 불에 타버려 근래까지 대웅전으로 사용하고 있었으나 2011년까지 해체보수 결과 조선 영조 37년(1761년) 지장전으로 상량하였다는 기록이 발견되어 지장전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앞면 1칸·옆면 2칸 규모이지만 앞면 1칸 사이에 사각형의 사이기둥을 세워 3칸 형식을 띠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며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세부 처리는 조선 중기 수법을 따르고 있으며, 공포 위에 설치한 용머리 조각 등은 조선 후기 수법을 따르고 있다. 건물에 비해 지붕이 크게 구성되어 있으며, 지붕 각 모서리 끝(추녀)에 얇은 기둥(활주)을 받쳤다. 지붕의 가구형식은 특이하게 정자에서 쓰는 건축 기법을 사용하였다.


불전 건축기법으로는 보기 드문 형태를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건물이다.

 

 

13.대구 달성

 

종 목 사적 제6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대구 중구 달성동 294-1

시 대 삼국시대

 

평지의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쌓은 삼국시대의 성곽이다. 높이는 일정치 않으나 4m정도이며, 둘레는 약 1,300m이다.

 

성벽의 아랫부분에서 초기철기시대의 조개더미와 각종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지방의 중심세력이 성장하여 초기적 국가 형태를 이루면서 쌓은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경주의 월성처럼 평지에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쌓은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달성은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 초기 성곽의 전형으로 평가되고 있다.

 

성벽은 주로 흙으로 쌓았고, 성벽 윗부분에는 큰 돌덩어리들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어 후대에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성안에는 조선시대 전기까지 군대의 창고가 있었고, 우물과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성의 서남쪽으로 연결된 구릉지대에는 돌방무덤(석실분)이 많이 흩어져 있고, 무덤에서 금동관을 비롯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대구 달성은 우리나라 성곽 발달사에 있어 가장 이른 시기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14.대구 불로동 고분군

종    목  사적  제262호  
지 정 일  1978.06.23  
소 재 지  대구 동구  불노동 335  
시     대 삼국시대 

대구시 불로동과 입석동 구릉 서남면에 있는 수십기의 크고 작은 무덤들이다.

무덤의 지름은 15∼20m, 높이 4∼7m 정도가 보통이며, 내부구조는 냇돌 또는 깬돌로 4벽을 쌓고, 판판하고 넓적한 돌로 뚜껑을 덮은 직사각형의 돌방이 있으며, 그 위에 자갈을 얹고 흙을 덮었다. 껴묻거리(부장품)로 금제 혹은 금동제 장신구와 철제무기 무늬를 새긴 토기 등 많은 출토물이 있다.

이 무덤들은 대개 4∼5세기경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되며, 이 지역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토착 지배세력의 집단무덤으로 추측한다.

불로동 무덤들은 위치가 구릉이라는 점, 무덤 내부가 돌무지 무덤과 비슷하게 깬돌로 지은 점, 그리고 돌방이 지나치게 가늘고 긴 점에서 낙동강 중류 지역 계통임을 알게 해 준다. 그러나 유물의 형태나 질이 신라와 유사하여 이 지역 세력의 복잡한 문화양상을 보여주기도 하다.
  

 

15.대구 계산동 성당

 

종 목 사적 제290호

지 정 일 1981.09.25

소 재 지 대구 중구 계산동2가 71

시 대 대한제국시대

 

 1886년 로베트(Robert.A.P) 신부가 경상도 지역에 천주교를 전파하다가 1897년에 현재의 계산동 성당 자리에 있던 초가집를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1899년에 한식 목조 십자형의 성당을 지었으나, 다음 해에 화재로 불 타 1902년에 현재의 성당을 짓게 되었다.

 

설계는 로베트 신부가 하고 중국인이 공사를 맡았다고 한다. 당시 대구에서는 처음 세워진 서양식 건물로, 입구에 두 개의 종각에 우뚝 솟아 ‘뾰족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성당건축은 고딕양식이 가미된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화강석 기단 위에 붉은 벽돌을 쌓고 검은 벽돌로 고딕적인 장식을 하였다.

 

대구 지방에서 유일한 1900년대 성당 건축물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6.대구 진천동 입석

 

종 목 사적 제411호

지 정 일 1998.12.23

소 재 지 대구 달서구 진천동 470-38외

시 대 청동시대

 

입석은 큰 돌을 세워 놓은 것으로 선돌이라고도 하며, 고인돌이 있는 지역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진천동에서 선돌을 세운 주위로 석축을 네모난 형태로 둘러 쌓아 놓았고, 선돌 앞에서 제사의식을 지낸 것으로 짐작된다. 선돌 주위에는 고인돌이 여러 기 남아있다. 주변지역은 주택이 많이 들어서 있으나, 유적 보존을 위해 선돌 지역을 발굴조사하여 정비하였다.

 

고인돌과 선돌의 관계 및 서로의 기능적 성격을 통해 고대 문화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17.구 대구의학전문학교 본관

 

종 목  사적  제442호 
지 정 일 2003.01.28
소 재 지 대구 중구  동인동 2가 101 
시 대 일제강점기

 

대구의학전문학교 본관(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본관)건물은 일제 강점기 때 대구지역 의료인 양성을 위해 지어진 건물로 1933년 공립 대구의학전문학교로 개교되었다.

 

이 건물은 구 도립대구병원(사적 제443호, 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병원 본관)건물과 마주보며 배치되어 있다. 3층의 붉은 벽돌(조적조) 건물로 남향하며, 정면 중앙부에는 4층으로 된 사각탑(Turret)을 두고 옥상에는 옥탑을 설치하였다. 평면은 ‘산(山)’자 모양으로 중복도식이며, 현관 포치(Porch)를 중심으로 좌우대칭형이다.

 

건물의 외관 구성에 나타난 특징은 정면 중앙부 돌출 유리벽의 곡면처리 및 창 사잇벽과 옥상 파라팻부의 수평돌림띠는 정면성을, 옥상부의 사각탑과 창 사이의 수직벽은 수직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전체적으로 안정감과 웅장함을 느끼게 한다.

 

한국 근대 의학교육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건물로,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전체와 세부 구성이 치밀하고, 건축사적으로도 매우 수준 높은 건물로서 근대건축으로서의 건축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교육사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18.구 도립대구병원

 

종 목  사적  제443호 
지 정 일 2003.01.28
소 재 지 대구 중구  삼덕동 2가 50 
시 대 일제강점기

 

구 도립대구병원(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병원 본관)은 일제 강점기 때 1928년 도립 대구의원으로 지은 2층의 붉은 벽돌(조적조) 건물이다.

 

이 건물은 구 대구의학전문학교 본관(사적 제442호, 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본관)건물과 마주보며 배치되어 있다. 건물은 북향하여 동서로 길게 배치되었으며 지붕은 모임지붕 형태로 기와를 이었다. 평면은 ‘ㄱ’자 모양으로 중복도(中複道)의 양측에 각 실(室)을 남향과 북향으로 배치하였으며, 정면 우측의 익사에는 편복도를 설치하고 동향으로 실을 배치하였다.

 

건물 구성은 정면 중앙부의 현관 포치(Porch)를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고 창인방과 처마부를 화강석 수평돌림띠(Cornice)로 장식하여 르네상스적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건물의 외관구성에 나타난 특징은 네모반듯한 지붕을 이은 사각탑(Turret), 수직으로 긴 반원 아치(Arch)창, 페디먼트(Pediment), 지붕면의 도머(Domer)창, 난간벽의 치형 장식수법, 화강석 다듬돌로 구성한 수평돌림띠(Cornice) 등의 형태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채용하여 정면성과 대칭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 근대 병원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 우측 익사가 철거되고, 정면 좌측에 증축된 부분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역사적·건축사적으로 높은 가치가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19.달성 도동서원


종 목  사적  제488호  
지 정 일 2007.10.10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번지 
시 대 조선시대


도동서원은 1605년(선조38) 지방 유림에서 한훤당 김굉필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서원으로 조선중기 전학후묘의 전형적 배치형식과 강당과 사당의 공포양식 및 담장 구성수법 등에서 건축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강당·사당과 이에 딸린 담장은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원 전면에 위치한 신도비, 은행나무 등을 포함한 서원 전역을 국가지정문화재(사적)으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하고있다. 

 

20.달성 삼가헌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104호 
지 정 일 1979.12.31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 800 
시 대 조선시대


충정공 박팽년(1417∼1456)의 자손들이 정착하여 온 박씨마을 묘골과 낮은 산 하나를 경계로 하여 자리잡은 조선시대의 주택이다. 넓은 터에 대문간채·사랑채·안채·별당·연못이 배치되어 있다. 충정공의 11대손인 삼가헌 박성수가 영조 45년(1769)에 사랑채를 짓고 자신의 호를 현판으로 걸어 '삼가헌'이라 이름지었다. 그 이듬해에는 삼가헌 서쪽편에 별당을 세우고 주변과 연못에 각각 국화와 연꽃을 심은 뒤 '하엽정'이라 불렀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건물이 사랑채이며, 안채는 사랑채를 거쳐야 출입을 할 수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대략 트인 'ㅁ'자형의 구조를 하고 있으며 안채로 드나드는 중문채와 곳간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사랑채는 'ㄱ'자형 평면으로 넓은 대청과 골방이 딸린 온돌방 2칸·마루방·청지기방을 두었다. 안채는 'ㄷ'자형으로 부엌·안방·대청·건넌방·개방된 툇마루 등으로 꾸몄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서쪽으로 장독대·곳간채·안변소가 자리잡고 있다.


원래 서당으로 쓰던 별당은 고종 11년(1874)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이 별당은 안채의 서쪽 넓은 터에 따로 자리잡고 있는 'ㄱ'자형 건물로 온돌방 3칸과 마루방 1칸으로 구성되었다. 왼편 끝방의 앞에는 1칸의 누마루를 꾸미고 그 옆 마루와 다른 방들 앞에는 툇마루를 놓았다.


전체적으로 볼때, 조선 중기에 건축된 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남긴 대표적인 주택이다.
 

 

21.달성 조길방 가옥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200호 
지 정 일 1984.12.24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가창면 정대1리 350 
시 대 조선시대

 

깊은 산골 경사가 급한 산간마을에 자리한 초가로, 현 소유자의 9대조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지은 집이라고 한다. 사랑채는 60여년전에 확장하였고, 아래채는 30여년 전 무너진 것을 다시 지은 것이다. 산 전체가 서향으로 경사져 있고 그 안에 마을이 숨듯이 자리하여 집들은 자연히 모두 서향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15호 가량의 집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6호만 남아있고, 이 집이 이 마을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높은 축대 위에 지은 안채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사랑채, 왼쪽에는 아래채가 부속건물처럼 낮게 마주보고 배치되어 있다. 안채의 앞면 벽에는 크기가 매우 작은 여닫이 문 1짝이 있는데, 출입보다는 채광과 통풍을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초가로는 보기 드물게 오래된 건축으로, 특히 안채 창호문의 규모와 성격은 주택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22.대구 둔산동 경주최씨 종택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261호 
지 정 일 2009.06.19
소 재 지 대구 동구  둔산동 386번지 일원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인조 때의 학자 대암 최동집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지은 집이다.


대구 지방에 있는 조선시대 주택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살림채와 재실·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숙종 20년(1694)에 지은 안채와 광무 9년(1905)에 다시 지은 사랑채가 살림채를 구성한다. 사랑채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동천서원을 없앨 때 철거한 자재의 일부를 사용하여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살림채의 오른편에 있는 보본당은 영조 18년(1742)에 지은 사당으로, 제사지내는 재실로 사용하고 있다. 그 뒤편에 있는 2동의 사당은 최동집과 조선 정조 때의 학자인 최흥원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재실·가묘·별묘 등이 조화를 이룬 큰 규모의 주택으로 조선시대 양반 주택과 그 생활 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23.선화당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

지 정 일 1982.03.04

소 재 지 대구 중구 포정동 21 경상감영공원

시 대 조선시대

 

 선화당은 경상도 관찰사가 공적인 일을 하던 건물로 원래 안동에 있던 것을 조선 선조 34년(1601)에 김신원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그 뒤 현종 11년(1670), 영조 6년(1730), 순조 6년(1806) 3차례에 걸친 화재로 타버렸다.

 

지금의 건물은 순조 7년에 윤광안이 다시 지은 것이다. 그 후 경상북도 도청으로 사용되다가 1969년 도청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 1970년 중앙공원을 만들면서 현 모습으로 고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관청건물은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귀중한 자료이며, 경상감영의 상징이 되는 건물이라는 데 가치가 있다.

 

24.징청각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

지 정 일 1982.03.04

소 재 지 대구 중구 포정동 21 경상감영공원

시 대 조선시대

 

경상도 관찰사가 살림채로 쓰던 건물이다. 조선 선조 34년(1601)에 선화당, 응향당 등 여러 건물과 함께 지었으며 그 뒤 여러 차례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경상도 관찰사가 살림채로 쓰던 건물이다. 조선 선조 34년(1601)에 선화당, 응향당 등 여러 건물과 함께 지었으며 그 뒤 여러 차례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8칸·옆면 4칸으로 넓이가 무려 227㎡나 되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징청각은 선화당과 함께 대구시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관아건물로 중요한 문화재이다.

 

25.영영축성비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 
지 정 일 1982.03.04
소 재 지 대구 수성구  만촌동 산83-5 영남제일관 앞 
시 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대구토성을 돌로 다시 쌓은 후 이를 기념하고자 세운 비이다.

 

비는 직사각형으로, 바닥돌 위에 비몸을 세운 간단한 모습이다. 비문에 의하면 성의 둘레는 2,145보이며, 네 개의 문을 만들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군량, 전포 등을 갖춘 창고를 두었다. 석성의 공사기간은 6개월이며, 동원된 인원은 78,534명에 달한다. 성이 완성된 뒤에는 여러 장사들을 모아 활쏘기대회를 열어 상을 주었다 한다.

 

경상도 관찰사였던 민응수가 나라에 건의하여 영조 13년(1737) 대구 남문 밖에 세워두었으며, 민응수가 비문을 짓고, 백상휘가 글씨를 썼다. 광무 10년(1906)에 성은 헐리게 되었고, 비는 1932년 향교로 옮겨 보존되다가 198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26.대구부수성비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호 
지 정 일 1982.03.04
소 재 지 대구 수성구  만촌동 산83-5 영남제일관 앞 
시 대 조선시대 

 
조선 고종 때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해 온 김세호가 대구부성을 수리한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대구부성은 영조 때 경상관찰사 민응수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는데 그 후 성이 훼손되어도 제대로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던 것을 김세호가 수리한 것이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문에는 공사에 관한 내용과, 유공자에게 상을 내린 일이 적혀 있다.

 

고종 6년(1869)에 세운 비로, 관찰사 김세호가 직접 비문을 짓고, 당시 공사 책임관이었던 최석로가 글씨를 썼다. 광무 10년(1906) 대구부성이 헐리면서 갈 곳을 잃었다가 1932년 대구향교 경내로 옮겨 놓았고, 1980년 영남 제1관문을 고쳐 세우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27.북지장사 삼층석탑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호 
지 정 일 1982.03.04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학동 620 북지장사 
시 대 신라

 

북지장사의 대웅전 동쪽에 나란히 서 있는 두 탑이다. 북지장사는 고려 명종 22년(1192)에 보조국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그 이후의 역사는 전하고 있지 않다.

 

탑은 2층 기단에 3층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두 탑의 규모와 형식이 거의 같다.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윗면에 약한 경사가 흐르고, 밑면의 받침이 4단이며,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다.

 

땅속에 묻혀 있거나 주변에 흩어졌던 것을, 1981년 새로이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28.봉무정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 
지 정 일 1984.07.25
소 재 지 대구 동구  봉무동 939 
시 대 조선시대


조선 고종 12년(1875)에 봉촌 최상룡이 행정사무를 볼 수 있도록 마을사람들과 의논하여 지은 것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달성군 공산면 4개 마을(강동·독좌·위남·단산)에서 쓰던 초가 사무소가 있었다. 이 4개 마을을 합쳐 봉무동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자 초가를 헐고 이 건물을 지었다.


강당을 중심으로 동쪽에 덕교재, 서쪽에 예용재가 있다. 강당은 농민들의 계몽과 마을 규약 등을 가르치고, 선비들이 모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덕교재와 예용재는 마을사람들이 모여 의논하던 곳이다.


화강석의 둥근 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운 5칸 규모의 집으로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옆면에 내림지붕을 달았다.


봉무정은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대표하는 건물이며, 이 시대 공공건물의 예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29.성재서당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9호 
지 정 일 1984.07.25
소 재 지 대구 동구  미대동 169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인조(재위 1623∼1649) 때 선비 채명보(1574∼1644)가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그 뒤 후손들이 선생의 덕행을 널리 기리고자 새로 짓고 ‘성재서당’이라 이름을 고쳤다.

 

채명보의 휘는 선견, 자는 명보, 호는 양전헌이며 본관은 인천이다. 광해군 9년(1617)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서궁유폐사건이 일어나자 선비들과 함께 상소를 올려 잘못된 점을 지적하였다.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 때에는 향병을 모집하기도 하였으며, 인조 4년에 희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받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와 성재정을 짓고 선비들과 학문을 논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30.부인사 석등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6호 
지 정 일 1988.05.30
소 재 지 대구 동구  신무동 356 
시 대 통일신라


부인사 대웅전 앞에 놓여 있는 8각 석등으로, 네모난 바닥돌 위에 3단의 받침을 두어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과 지붕돌을 올린 일반적인 모습이다.


받침부분은 가운데기둥을 사이에 두고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무늬를 대칭적으로 새겨 놓았다. 화사석은 다른 절터에 있던 것을 가져다 복원한 것으로 4면에 창을 두었다. 지붕돌은 처마가 길고 얇으며, 여덟 귀퉁이가 하늘을 향해 들려있다. 꼭대기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둥근 받침만 남아 있을 뿐 그 위의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진 상태이다.


비록 받침의 가운데기둥에 약간의 금이 갔지만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으며, 조각도 섬세하고 부드럽다. 각 부재가 서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뛰어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31.부인사 서탑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7호 
지 정 일 1988.05.30
소 재 지 대구 동구  신무동 356 
시 대 통일신라


부인사에 서 있는 3층 석탑이다. 부인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한 사찰로 추정되며, 절이 한창 번성할 때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승려들만의 승시장이 섰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이 탑은 금당터 주변에 쌍탑으로 건립된 2기의 석탑 중 서쪽에 있는 탑으로, 1966년에 복원되었다.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는데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없어지고 그 받침돌만 남아있다. 기단은 각 면마다 기둥모양을 새기고 윗면에 2단의 괴임을 새겨 윗돌을 받치게 하였다. 탑신의 각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겼고, 지붕돌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가 흐르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치켜올라갔다.


통일신라 후기 즈음에 세운 탑으로 추측된다.
 

 

32.도곡재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2호 
지 정 일 1974.12.10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 692 
시 대 조선시대

 
도곡재는 학생들의 공부를 위해 사용되던 집이다.


처음에는 조선 정조 2년(1778)에 대사성인 서정공 박문현이 살림집으로 세운 건물이나, 정조 24년(1800) 경에 도곡 박종우의 공부방으로 사용되면서 그의 호를 따서 도곡재라는 이름을 붙였다.


앞면 4칸·옆면 1칸 규모이며, 후대에 퇴칸을 달고 대청을 넓혀 누처럼 꾸몄다.


도곡재는 태백산지역 살림집의 일반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소박한 건물이다.
 

 

33.하목정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6호 
지 정 일 1984.05.21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하빈면 하산리 1043-1 
시 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낙포 이종문이 조선 선조 37년(1604)에 세운 정자이다. ‘하목정’이라는 정자의 이름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곳에서 잠깐 머물렀던 인조(재위 1623∼1649)가 훗날 낙포의 첫째 아들인 이지영에게 직접 써준 것이다. 또한 일반 백성들의 주택에는 서까래 위에 덧서까래인 부연을 달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지만, 인조가 명령하여 이 집에는 부연을 달았다고 한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사랑채로 이용되었던 이 집은 전체적으로 T자형 구조로 되어있어서 처마곡선도 부채 모양의 곡선으로 처리되었다. 내부에는 김명석·남용익 등 많은 유명인들이 쓴 시가 액자가 걸려있다.
 

 

34.신숭겸장군 유적

 

종 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호 
지 정 일 1982.03.04
소 재 지 대구 동구  지묘동 526 
시 대 조선시대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을 기리는 유적이다.

 

신숭겸(?∼927)은 평산 신씨의 시조로서, 918년 배현경, 홍유, 복지겸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의 건국에 이바지한 인물이다. 고려 태조 10년(927) 대구 공산에서 후백제 견훤의 군대와 싸우다가 태조가 적군에게 포위되어 위급해지자, 태조의 옷을 입고 변장하여 맞서다가 전사하였다.

 

태조는 그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그의 시신을 거두어 광해주(지금의 춘천)에 묻고 순절단, 지묘사, 미리사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

 

조선 선조 40년(1607)에 경상도관찰사 유영순이 지묘사의 자리에 표충사를 지어 신숭겸을 모셨으며, 후에 이 서원에 사액을 내려 관리하였다. 고종 8년(1871)에 서원철폐령으로 표충사가 없어지자, 후손들이 표충재를 새로 지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35.봉무토성

 

종 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4호 
지 정 일 1988.05.30
소 재 지 대구 동구  봉무동 산26,27 
시 대 삼국시대


토성이 있는 곳의 서남쪽은 금호강에 접한 높은 절벽이며, 동북쪽의 일부만 제외하고는 전면에 가파른 경사가 형성되어 있다.


토성의 둘레는 약 350m 정도인데, 성벽의 높이와 너비가 소규모여서 군사적인 목적보다는 도피용 산성으로 판단된다. 토성의 남동쪽으로 약1㎞ 떨어진 낮은 구릉에는 봉무동 무덤들과 불로동 무덤들이 있고, 금호강을 사이에 두고 검단동 토성과도 연결되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이곳에는 팔공산과 금호강을 배경으로 하는 대규모의 집단이 형성되어 있었고, 이들 세력이 봉무토성을 축조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성내에서 발견된 토기 조각들로 볼 때 3∼4세기경인 삼국시대의 토성으로 보인다.
 

 

36.용암산성

 

종 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5호 
지 정 일 1988.05.30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동 산35,36 
시 대 삼국시대


용암산성은 해발 380m의 산꼭대기에 가파른 경사를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 안심과 하양으로 이어지는 통로상에 있어, 지형상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성벽의 둘레는 약 1㎞이며, 성의 서쪽과 남쪽의 산기슭에서 능선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지에는, 인공적으로 절벽을 만들어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절벽 앞에는 문터로 보이는 입구가 있으며, 성 안의 동북쪽에는 우물터가 있다. 성 안에서 신라 토기조각들이 발견되는 점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성으로 추측된다. 임진왜란 때 대구지방의 의병들이 이 성에 모여 활동했다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그 후대까지 계속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37.팔거산성

 

종    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6호 
지 정 일  1988.05.30 
소 재 지  대구 북구  노곡동 산1 
시     대 삼국시대

 

대구광역시 북쪽 팔공산의 지맥 끝자락에 위치한 산성으로, 성안에 평지와 계곡을 품고 산꼭대기를 둘러 쌓았다. 산의 생김새가 함지를 엎어놓은 것과 비슷하여, 이 산을 함지산 또는 방티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해발 300m가 넘는 가파른 경사를 이용하여 흙과 잡석을 섞어 쌓았다. 산성의 서쪽 기슭 아래에 4∼5세기경에 만들어진 무덤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팔거산성 역시 이 무덤을 쌓은 세력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38.대덕산성


종 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7호

지 정 일 1988.05.30
소 재 지 대구 남구  대명동 산224, 226, 227 
시 대 통일신라


대덕산성은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 있는 대덕산 정상에서 북쪽의 안지랭이 계곡을 감싸며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앞산산성 ’이라고도 부른다. 포곡식 산성은 성곽이 하나 또는 여러 개의 계곡을 감싸고 축성된 것으로, 장기간 전투에 사용하기 위해 쌓은 성을 말한다.

 

옛 기록에 의하면 성불산의 옛 성이 수성현에 있었으나, 지금은 산의 능선과 비탈부근에 깬 돌로 성을 쌓은 흔적만이 남아 있다. 성의 둘레는 3,051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범위는 약 3㎞에 달한다.

 

자연 암벽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산성으로 성 안에서 발견된 옛 그릇조각과 기와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에서 고려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39.사월동 지석묘군


종 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9호  
지 정 일 1992.09.08
소 재 지 대구 수성구  사월동 469 
시 대 청동시대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지상에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대구시 수성구 사월동에 있는 이 고인돌은 바둑판식으로 4기가 무리지어 있다. 덮개돌의 길이는 1.7∼2.37m, 너비는 1.1∼1.6m이며 받침돌 높이는 0.7m∼1.27m 정도이다.


무리지어 있는 고인돌을 마을에서는 ‘칠성바위’라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에는 모두 7기의 고인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0.예연서원


종 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1호 
지 정 일 1995.05.12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유가면 가태리 538번지일대 
시 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곽재우(1552∼1617)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조직하여 경상도 일대에서 활약하여 큰 공을 세운 인물로 붉은 옷을 입은 장군이라는 뜻의 ‘홍의장군’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광해군 10년(1618)에 ‘충현사’로 처음 세웠고 현종 15년(1674)에 규모를 확장하여 서원의 모습을 갖추었다. 숙종 3년(1677) 나라에서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예연’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폐쇄되었고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소실된 것을 1977년과 1984년에 걸쳐 복원하였다. 현재는 곽재우의 재종숙으로 정유재란 때 공을 세운 곽준의 위패를 추가로 모시고 있다.


경내 건물로는 사당과 강당 등 주요 건물과 제물을 준비하여 두던 고사, 숙소로 사용되던 동·서재 등이 있다. 사당은 곽재우와 곽준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건물이다. 강당은 유림의 회합장소와 교육 장소로 사용하던 건물로 중앙에는 마루를 구성하고 양 옆으로 온돌방을 배치한 구조이다.


해마다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낸다. 경내에는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비석이 있어 흥미롭다.
 

 

41.초곡산성


종 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7호 
지 정 일 2008.04.10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유가면 초곡리 산1번지 외 
시 대 삼국시대


초곡산성은 비슬산 유가사 서쪽 해발 700미터 산 정상에 위치하여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길게 타원형으로 자리 잡은 성으로, 성의 둘레는 1,700미터이며 산성 내에 분포한 고분군으로 보아 삼국시대 축성된 산성으로 여겨진다.


성곽의 형태는 꼭대기가 평탄하며 절벽인 자연지형을 이용한 퇴뫼식 산성으로 성내부에는 성문, 망루 등의 흔적뿐만 아니라 기와, 우물, 고분군 등이 확인되어 달성군 현풍면, 유가면 일대의 중요한 유적으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
 

 

42.신당동 석장승

 

종 목 대구광역시 민속자료 제2호

지 정 일 1986.12.05

소 재 지 대구 달서구 신당동 676

시 대 조선시대

 

마을 입구에 서 있는 돌장승이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보통 몸체에 그 역할을 나타내는 글을 새겨 그것에 따라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장승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으며, 마을사람들에 의해 ‘장승비’라 불리우고 있다.

 

장승은 네모난 돌기둥을 다듬어 한 면에 얼굴을 새겨 두었다. 기둥 정상에는 모자 모양을 새기고, 얼굴에는 눈썹·눈 ·코·입을 새겨 놓았는데, 입은 약간 웃는 듯한 모습이며, 코는 약간 떨어져 나갔다. 손에는 여의주봉을 들고 있어 일반적인 장승과는 다른 모습이다. 기둥 정상의 모자 조각으로 보아 문관의 형상으로 보이나, 얼굴 각 부분의 표현이 소박하고 자비스러운 이미지를 풍기고 있어 미륵형 장승으로 보이기도 한다.

 

장승은 가슴에 새기는 기록과 생김새,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여러 의미를 갖는데 이 장승의 경우, 코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여의주봉을 들고 있는 외형상의 특징으로 보아 장승의 눈이나 코를 달여 먹으면 임신이 된다는 속설에 따라 아이 낳기를 원하는 여자들이 복을 빌던 대상이 되었거나, 잡귀나 질병으로부터 마을 전체를 보호하는 수호신으로서의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더불어 장승이 마을 입구에 자리하고 있고, 이 마을의 터가 예전에는 절의 입구였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마을의 보호와 함께 사찰 경내의 경건함을 지키는 수호역할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작품으로, 돌장승이 많이 존재하지 않는 대구 지역에서 복합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장승신앙의 한 형태로 남아 있다.

 

43.남평문씨 본리 세거지

 

종 목  대구광역시  민속자료  제3호 
지 정 일 1995.05.12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401-2 
시 대 조선시대


문익점의 18대손 문경호가 터를 닦아 남평 문씨 일족이 모여 살던 곳이다. 원래 절이 있던 명당터를 구획하여 집터와 도로를 반듯하게 정리하고 집을 지었다. 지금은 조선 후기의 전통가옥 9채와 정자 2채가 남아 있으며, 도로에 접한 부분에는 나지막한 담을 쌓았다.


이곳의 대표적인 건물로는 수봉정사와 광지당·인수문고를 들 수 있다. 수봉정사는 세거지의 입구에 있는 정자로 정원을 매우 아름답게 꾸민 곳이다. 주로 손님을 맞고 일족의 모임을 열 때 사용하던 큰 규모의 건물이다. 광지당은 문중의 자제들이 학문과 교양을 쌓던 수양장소이다. 또 인수문고는 문중의 서고로, 규장각 도서를 포함한 책 1만여 권을 소장하고 있다. 처음에는 작은 규모였으나 후에 크게 늘려지었고, 도서열람을 위한 건물도 따로 지어놓았다.


주변경관이 아름답고 도로망도 편리하게 정리되어 있는 옛 마을이다.
 

 

44.귀암서원 숭현사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호
지 정 일  1982.03.04 
소 재 지  대구 북구  산격동 산79-1 
시     대 조선시대

 

구계 서침의 덕을 기리기 위해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서원이다.

 

서침은 고려말∼조선초의 변혁기에 향촌에 은거하며 학문 연구에 노력하였다.

 

귀암서원은 현종 6년(1665) 세웠고,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그 후 1924년 유림이 다시 지었다. 신명여고 운동장 오른쪽 언덕 아래에 북동쪽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경앙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유허비각이 있고 맞은편에 강당이 있다.

 

숭현사는 강당 바로 뒤에 3m쯤 떨어져 있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귀암서원 숭현사는 대구 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원 안에 있을 뿐 아니라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45.법장사 삼층석탑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호

지 정 일 1982.03.04
소 재 지 대구 남구  봉덕동 산148 
시 대 통일신라


법장사에 있는 3층 석탑으로, 기단부는 파괴되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고 3층을 이루는 탑신만이 차례대로 쌓여 있다.

 

탑신의 1층 몸돌은 면마다 양쪽에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위층의 몸돌에 비해 지나치게 높아 보인다. 일부가 손상되어 있는 지붕돌은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대체로 통일신라 석탑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는 듯 하나, 탑신의 1층 몸돌이 폭에 비해 지나치게 높아 불안정한 비례를 보이고, 지붕돌받침이 4단으로 줄어있는 등 전형 양식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탑이 있는 이곳은 원래 고산사가 자리잡고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사찰은 모두 불에 타고 탑만이 무너진 채 방치되어 오다가 1961년 법장사를 새로이 지을 때 탑도 함께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46.칠곡향교 대성전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6호 
지 정 일  1982.03.04 
소 재 지  대구 북구  읍내동 600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국립교육기관이다.

 

칠곡향교는 언제 처음 지었는지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조선 태조 원년(1392)에 세운 것으로 전한다. 대성전은 17세기 초에 세운 것으로 1907년에 크게 보수하였다.

 

현재는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무, 교육 공간인 명륜당이 남아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공자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과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47.독암서당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2호 
지 정 일 1984.07.25
소 재 지 대구 동구  봉무동 223-3 
시 대 조선시대

 

이 지역에 사는 경주 최씨 문중에서 세운 서당으로 조선 고종 2년(1865)에 세웠다. 원래는 현재의 위치가 아니었으나 1973년 도로공사로 인해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서당의 이름을 독암이라 한 것은 서당 서쪽에 고려 태조 왕건이 공산싸움에서 견훤에게 패하자 혼자 피신해 앉아 있었다는 독좌암이 있어 거기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건물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문중에서 세웠으나 문중 자손들은 물론 인근 지역의 자제들까지 교육하여 이곳에서 유능한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48.첨백당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3호 
지 정 일 1984.07.25
소 재 지 대구 동구  평광동 970 
시 대 조선시대


우효중의 효행과 우명식의 충성심을 기리며, 광리에 거주하는 단양 우씨들의 교육을 위해 세운 건물이다.


첨백당이라는 이름은 우명식 선생의 묘소가 있는 ‘백밭골을 우러러보는 집’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고종 33년(1896)에 지었고 1924년 새롭게 고친 적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고, 집 가운데는 대청마루가 있는데 양쪽 툇마루보다 높게 놓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툇마루에는 난간을 아담하게 둘러 놓았다.
 

 

49.야수정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4호 
지 정 일 1984.07.25
소 재 지 대구 수성구  상동 139-1 
시 대 대한제국시대


1900년경 진씨 가문의 제사를 지내려고 지은 집(재실)으로 한·일 절충식 건물이다.


지을 당시에는 앞면 5칸·옆면 1칸 반의 규모였으나, 나중에 뒤쪽 부분 전체를 반칸씩 늘려 겹집처럼 되어 있다. 마루는 장마루를 깔고 마루 밑에 붉은 벽돌을 쌓았으며 유리창문을 사용했다. 천장도 일본식에 가까운 우물반자로 꾸며 놓았다.


20세기 초 건축 양식의 새로운 경향을 보이는 건물로, 전통 양식이 일본 건축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여 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50.고산서당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5호 
지 정 일 1984.07.25
소 재 지 대구 수성구  성동 산22 
시 대 조선시대


퇴계 이황(1501∼1570)과 우복 정경세(1563∼1633)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당이다. 처음 지은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서 이황 선생과 정경세 선생이 강의하였던 곳이라하여 1500년대로 추정하고 있다. 숙종 16년(1690)에는 서당 뒤편에 사당을 지어 서원이라 하였다. 고종 5년(1868)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고종 16년(1879)에 서원 옛터에 강당만을 다시 지어 고산서당이라 하였다. 그 뒤 1964년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현재 사당 자리에는 이황·정경세 선생의 강학유허비가 서 있다.

 

대구의 자랑거리

 

1.팔공산

 

위 치  대구, 영천시 신녕면, 경산시, 군위군 부계면, 칠곡군 가산면

 

높이 1,193m이다. 대구광역시 중심부에서 북동쪽으로 약 20㎞ 떨어진 지점에 솟은 대구의 진산이다. 남쪽으로 내달리던 태백산맥이 낙동강금호강과 만나는 곳에 솟아 행정구역상으로는 대구광역시 동구에 속하지만, 영천시경산시칠곡군군위군 등 4개 시군이 맞닿는 경계를 이룬다.

 

팔공산을 유명하게 만드는 것은 영험의 상징으로 불리는 갓바위가 있기 때문이다. 갓바위는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 골짜기에 있으며 머리에 갓을 쓰고 있는 형상의 좌불상이다.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갓바위를 찾아와 소망을 기원한다. 갓바위 석불은 해발 850m에 위치하며높이는 약 6m이며 머리의 갓 지금은 1.8m이다. 신라 선덕왕 때 의현대사가 어머니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2.대구수목원

 

위 치   대구광역시 달서구 대곡동 284

 

7만여평의 쓰레기 매립장을 생태공원으로 조성하여 1,000여종의 초본류와 목본류를 심어놓은 국내 최대의 도시형 수목원이다. 야생초 화원 및 암석원, 수생식물원, 방향식물원, 약용식물원, 염료식물원 등 14개의 테마식물원이 조성돼 있으며 휴게시설로는 야외교실과 잔디광장이 있으며 다양한 식물의 세계를 감상할 수 있다.

 

3.대구 도동 측백나무숲

 

위 치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 산180

 

높이 100m, 길이 60m의 바위산으로 형성된 절벽에 수천 그루의 측백이 자생하고 있는 군락지이다. 측백나무는 사철이 상록수이며 이곳 도동지역은 그 남한지로 큰 의의를 갖는다. 1962년 12월3일 천연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4.대구약령시

 

위 치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 51-1

 

한약방, 한의원, 약업사, 인삼사, 제탕원, 제한소 등 350여 업소가 밀집해 있는 곳으로서 동양의학의 진수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저렴한 가격으로 침, 뜸 등의 치료를 받을 수 있으며 한방재료를 저렴하게 구입할 수도 있다.(보약 한재는 진맥료 포함 10~30만원 정도)

 

*약령시 전시관

약전골목에 있으며 1층은 한약재 도매시장, 2층은 약령시전시관, 3층은 전통문화공간르로 구성되어 있다. 한약재 도매시장은 매월1일부터 5일 사이에 한번씩 전국의 한약재가 모이며, 2층 전시시설에는 진귀한 한약재료나 진맥, 탕재 등을 재현한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5.동화사

 

위 치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35

 

신라시대에 창건된 팔공산의 대표적인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들의 활동근거지 였으며 호국불교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통일의 염원을 담은 동양최대의 석조약사여래대불이 봉안되어 있다.

 

6.대구향교

 

위 치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735-4

 

조선 태조7년(1398년) 유학을 배우는 지방교육기관으로 찬건되었다.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과 학문을 강의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교실로 사용하는 “명륜당”, 자매도시인 청도시가 기증한 공자상이 있다. 매주 일요일에는 전통결혼식장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7.도동서원

 

위 치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

 

낙동강변에 위치한 서원으로, 조선5현의 수장인 한훤당 김굉필(1454~1504년)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낙동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수월루와 강당, 수령 400년된 은행나무 외에도 서원을 둘러싼 토담(보물 제 350호)은 우리나라 제래토담의 본보기로서 보기 드문 걸작이다.

 

8.녹동서원

 

위 치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585

 

임진왜란(1592~1598년)당시, 조선을 침공한 일본 장수로 조선에 귀화한 뒤 정유.병자.이괄의 난 등에 큰 전공을 세운 모하당 김충선 선생을 기리는 서원으로, 17989년 지방 유림들에 의해 창건되었다. 특히 일본 관공객들이 많이 방문해 한일간 친선우호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9.인흥마을

 

위 치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 1리

 

고려 말 중국에서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의 18세손 문경호가 옛 인흥사 절터에 터를 닦은 이곳에는 조선 조 말기의 전통 한옥과 옛 정자가 있다. 대구시 민속자료 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광거당과 수봉정사, 인수문고가 있는데, 문중서고인 인수문고에는 국내외의 희귀고서 2만 여권이 소장되어 있다.

 

 

10.옻골마을

 

위 치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대구공항 동쪽 1km 지점에 위치하며 경주최씨 집성촌으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양반가옥의 양시과 생활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종택인 백불고택은 대구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시대(1616년) 학자인 최동집이 세운 모실과 보본당과 사당 등 각종 건물은 4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11.육신사

 

위 치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640

 

조선 세조 때 사육신으로 일컬어지는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등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

 

1981년 완공한 건물로 이삼문, 삼충각, 숭절당 등이 있으며, 사육신으 행적을 기록한 육각기념비와 박팽년의 유일한 손자인 박인산이 창건한 태조정(보물 제554호)이 있다

 

 

12.달성공원

 

위 치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 294-1

 

“달성” 은 사적 제 62호이며, 우리나라 성곽 역사상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토성(서기 261년)으로 대구를 상징하는 공원이다. 경삼감영의 누각인 관풍루와 향토역사관, 시민을 위한 각종 편의시설과 동물원을 갖추고 있다.

 

 

13.불로동고분군

 

위 치  대구광역시 동구 불노동 335

 

불로동 일대에 조성된 211기의 고분군은 AD5~6세기경 이 지역의 토착세력의 집단묘지로 추정되며 1978년 6월 우리나라 고분군으로 가장 먼저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262호로 지정되었다.

 

 

14.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위 치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2가 42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대표적 민족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공원이며 향토 시인들의 시비, 대형 영상시설물 등이 분수와 정자, 석조물 등 깔끔한 조형물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도심 공원이다. 매주 토,일요일 오후3시 전통적인 타종의식을 재현한 달구벌대종 타종식은 또 하나의 볼거리를 제공한다.

 

15.국립대구박물관

 

위 치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70

 

1994년 개관한 국립대구박물관은 3개의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영남지역의 유물 1,300여 점이 전시되고 있다. 특히 민속실에는 영남지역의 가옥, 생활양식, 신앙 등이 모형으로 만들어져 전시되고 있다.

 

16.경상감영공원

 

위 치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21

 

경상감영공원은 400년 전 대구로 옮겨온 경상감영이 처음 자리잡았던 곳으로 그 터를 영구히 보존하자는 취지에서 새롭게 단장하였다. 경상감사가 집무를 보던 선화당(대구 유형문화재 제1호)과 처소인 징청각(대구 유형문화재 제2호), 관찰사의 치적이 담긴 선정비 27기가 있다.

201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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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대구광역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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