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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신미양요
powe**** 조회수 3,079 작성일2008.06.10

병인양요

 

어느 나라와: 프랑스

 

언제: 1866년(고종3년)

 

사건이유 : 1866년초에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을 내리고 프랑스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 수천명을 학살하였다. 이를 병인박해 또는 병인사옥이라 한다.이 박해때 프랑스 선교사는 12명중 9명이 잡혀 처형되었으며, 3명은 화를 면하였는데 그중 리델(Ridel)은 중국으로 탈출하여 주중 프랑스 함대 사령관 로즈(Roze)에게 박해 소식을 전하면서 보복 원정을 촉구했다.

 

애쓴 장군
순무영을 설치, 대장에 이경하, 중군에 이용희, 천총에 양헌수를 임명하고, 출정하게 하였다.
양헌수는 화력면에서 절대 열세인 조선군이 프랑스를 제압하는 데는 기병작전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어융방략으로써 강화도를 수복할 작전 계획을 수립하였다.
정족산성에서의 접전 결과 프랑스군은 전사자 6명을 포함하여 60, 70명의 사상자를 내었으나 조선군의 피해는 전사자 1명, 부상자 4명뿐이었다.

정족산성승첩의 두가지 의미
첫째, 화력면에서 열세인 조선군이 연전 연패를 하다가, 양헌수의 뛰어난 전략에 의하여 근대식 병기로 정비된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는 것이다.
둘째로, 정족산성 패전을 계기로 로즈함대는 원정을 포기하고 강화도를 철수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싸움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구 제국주의 침략세력을 격퇴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할 수 있다.


프랑스군은 강화도 철수시 고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 등 문화재를 약탈해갔다. 로즈의 조선원정은 11월 21일 제2차 원정이 끝날 때까지 무려 2개월여에 걸친 장기원정이었다. 원정을 끝내고 돌아간 로즈는 선교사 학살에 대한 응징적 보복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사 벨로네를 비롯한 북경의 모든 외교관들은 그의 원정을 실패로 간주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외교적 견지에서 보면, 수교관계가 없는 조선으로 가서 조선개항을 위해 입약협상조차 벌이지 못한 채 돌아왔다는 것,
둘째 군사적 견지에서 보면, 정족산성에서의 패전 직후 곧 함대를 철수하였다는 것,
셋째 종교적 견지에서 보면, 조선원정의 지상목표가 선교사 학살에 대한 응징보복인데, 보복은 커녕 오히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정부는 공식적으로 이 원정을 성공이라고 간주하였다.
가령,1867년 3월에 미국정부가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사건, 프랑스는 병인사옥으로 피해를 보았으니 대조선 미불공동원정을 제의하였을 때, 프랑스정부는 이미 조선원정을 통해 응징보복을 하였기 때문에 새삼스러이 공동원정은 할 필요가 없다고 거절하였던 것이다.


신미양요

 

어느 나라: 미국 아시아함대

 

언제: 1871년(고종8년)

 

사건이유: 1866년 8월 평양 대동강에서의 제너럴 셔먼호사건을 계기로 조선개항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사건 발생 뒤 미국은 두 차례 탐문항행을 실시하면서 셔먼호사건을 응징하고 이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동시에 조선과 통상관계를 수립하기 위하여 원정을 하였다. 조선 원정을 단행한 지상 목표는 조선개항이었다.


애쓴 장군
진무중군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 수비병 600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미군은 광성보에 대한 수륙 양면포격을 한시간 벌인 끝에 광성보를 함락하였고 이 전투에서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을 내었고, 조선은 전사자 350명, 부상자 20명이었다.

 

조·미전쟁 결과 조선개항은 무위로 끝났는데 실패의 요인
첫째 미국은 조선당국과의 입약교섭에서 화해적 교섭방법을 지양하고 시종일관 포함책략으로 대처하였다.
물리적 힘에 의해 무력적으로 조선을 굴복, 조선 개항을 강요하였다.
둘째 문화적 배경의 차이에 대한 상호이해가 부족하였다.
셋째 조선은 철두철미하게도 미국과의 불교섭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양이에 대한 불심감과 배외감정이 강한 조선은 미군을 오량캐로 간주하였고, 미군은 백인우월감을 가지고 조선을 호전적 야만국으로 간주하였다.
여기에서 양국간의 화해적 교섭은 불가능하였다.
넷째 미국 은 조선원정을 단행할 때 처음부터 조선과 전쟁을 각오하고 강화도에 내침하였다.
강화해협은 역사적으로 외국배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군사적 제한구역이었다.
그러기에 해협 입구에는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 ' 비가 서 있었다.
이처럼 국방 안보상 중요한 수로에 정식 허가 없이 미군함대가 들 어온 것은 엄연한 주권침해요 영토침략행위였다. 그러기에 조선측은 이를 침입 또는 내범으로 단죄하고 있다.
다섯째 1871년 조선은 아직도 개항여건이 조성되지 못한 가운데 미군함대를 맞이하였다.
미국은 1854년 일본개항 성공을 역사적 교훈으로 삼고 조선에서도 똑같은 것을 기대하였으나 오히려 정반대였다.
일본은 이미 1641년 나가사키에 네덜란드 상관을 설치, 유럽열강과 교역을 해왔고, 이를 통하여 유럽선진물물을 수용함으로써 일본지도자는 이미 개항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기에 일본은 1854년 페리의 미군함대가 내침하였을 때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도 평화리에 미일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나가사키같은 교역항구도 없었고 양반지도층은 여전히 태서문물(泰西文物)에 눈이 어두 웠기때문에 개항은 곧 망국인양 쇄국정책을 고수하였다.
또한 개항의 관건을 쥐고 있는 청나라가 대한 종주권이 상실되는 것을 우려하여 개항에 반대하였다.
결국 위정척사사상에 젖어 있는 흥선대원군은 조·미전쟁 직후 쇄국양이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경향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양인과의 화친은 매국이요 망국행위라고 경계하였다.

 이런거 알려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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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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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24위, 한국사 70위, 사회학 14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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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에 대해서

 

 1866년8월 미국의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지나 평양 상륙했는데 이들이 소란을 피우자 당시 평양감사 박규수가 먹을 것과 땔감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선원들은 민가를 약탈하고 백성을 감금하는등 만행을 저질렀고 이에 화가 난 평양군민들이 배를 태우고 침몰시키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1871년에 일어난 신미양요는 당시 급변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외면한 대원군(大院君)의 쇄국정책을 배경으로 우방 미국과 최초의 무력충돌을 일으킨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무기의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조선군 350명과 함께 전투의 주역인 어재연장군과 어재순(魚在淳) 형제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그들의 살신보국(殺身報國)의 정신은 나라사랑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 1871년 신미양요 때 미 해군이 빼앗아 미 군함에 걸려있는 '어재연 장군기'. 일명 '수자기(帥字旗) (출처:Chosun.com)

 

1871년(고종 8)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號)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무력 침략한 사건(신미양요)으로 이 전쟁에서 우리에게 막대한 피해를 안긴 미국 해군은 조선군의 대포 등 상당수의 전리품을 함대에 싣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수(帥)자기였다. 

 

[매천야록 내용] 신미년(1871 고종8년) 여름에 미국인들이 강화도를 침범했는데, 전병사 어재연(魚在淵)이 순무중군(巡撫中軍)으로 나가 싸우다가 패해 죽었다. 어재연은 군사를 이끌고 광성보로 들어가 배수진을 치고도 척후병을 세우지 않았다. 적군은 안개가 낀 틈을 타 엄습했으며, 보(堡)를 넘어 난입했다. 어재연은 칼을 빼들고 맞서 싸웠지만 칼이 부러졌다. 그래서 연환(鉛丸:납탄)을 움켜지고 던졌는데, 맞은자들은 그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러나 연환마저도 다 떨어지자 적들이 그를 창으로 마구 찔렀다. 그가 반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에서 죽자 적들이 그의 머리를 베어갔다. 어재연은 죽었지만 적들은 또 다른 방비가 있는 줄 알고 곧 달아났다.
패보가 전해지자 조정과 민간에서는 깜짝 놀랐다. 조정에서는 그를 병조판서에 추증하고 시호를 충장(忠壯)이라고 했다. 그의 상여가 돌아오자 모두 조정을 비우고 나가 맞았는데, 이를 맞이하는 수레와 말이 수십리나 이어졌다.

 


▲ 신미양요에 참가한 1370톤급 USS Monocacy (출처:위키백과) 

신미양요 (미국에서는 가장 전투기간이 짧은 전쟁으로 기록하고 있다)

1871년 4월 3일, 미국함대가 조선(고종 8년)에게 통상조약체결을 강요하기 위해 강화도를 침략해 벌어진 전투이다. 신미양요의 발단이 된 것은 1866년(고종3년) 7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며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선박 제너럴셔먼 호의 화재사건이었다. 당시 화재로 미국인 23명이 사망하자, 미국은 조선에 강력히 항의하고, 손해배상과 통상관계를 요구했다. 조선이 이러한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미국은 조선 원정을 결정했다. 당시 아시아함대 사령관이었던 존 로저스(John Rodgers) 해군소장은 군함 5척에 수병 1천2백여 명과 대포 85개를 적재한 후 조선으로 향했다.

48시간 동안 계속된 이 전투에서 전사한 조선군은 350여명, 미국해군은 항해 중 숨을 거둔 맥키 중위를 포함해 단지 4명의 수병만이 전사했을 뿐이다. 미국의 목적은 조선을 개항 하는데 있었는데 조선의 결사항전 의지를 알고 조선을 개항 시키려는 의지를 접고 7월 3일 함대를 철수 시킨다.  


▲ 사진 출처: shinmiyangyo.org 

신미양요가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타고 평양부중에까지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다가 격분한 민중들에 의해 불살라진데 있었다.

셔어먼호의 행방을 탐문하다가 사건의 윤곽을 알게된 미국의 브란트대통령은 청국주재 미국공사 로우에게 셔어먼호사건에 대한 책임문책과 조선과의 통상체결의 임무를 명하였으며 이에 로우공사가 직접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제독이 지휘하는 기함 콜로라도호와 군함 4척에 1천 1백 30명의 병력을 이끌고 1871년 4월 3일 남양 앞바다에 나타나 통상할 것을 요구하니 이것이 신미양요의 시작이다.

그러나 우리측 정부로부터 아무런 답변이 없자 미국측에서는 소함정 4척을 보내 강화도 손돌목을 지나 광성진(廣城鎭) 앞으로 들어서다가 허가없이 들어서는 이들을 저지하려고 맹렬히 쏘아대는 조선군의 포격을 받고 퇴각해 간 일이 생겼다.

 

평화적인 교섭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로저스 제독은 마침내 명령을 내려 4월 23일 615명의 병력을 몰래 초지포(草芝浦)에 상륙시켜 기회를 엿보다가, 이튿날인 4월 24일 바다로부터 쏘아대는 함포사격의 지원을 받으며 일제히 어재연장군이 포진하고 있는 광성포대를 습격하니 쌍방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어재연장군과 그의 동생 어재순이 끝까지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하였고, 광성별장 박치성(朴致誠)은 어재연장군의 용감한 죽음을 보고 스스로 목을 찔러 전사하였으며, 천총 김현경(金鉉景), 초관 유풍노(柳豊魯), 군관 이현학(李玄鶴)등 수백명의 조선군 장졸이 침입자들을 막다가 전사하였다.

당시의 집권자인 대원군의 서양오랑캐에 대한 적개심을 크게 불러일으켜 그의 쇄국정치를 더욱 강화케하는 결과를 낳았다. 어린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이후 1871년 4월에 전국에 척화비를 세운다.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고 비석 표면에 새겼다.

 

그 후 나라에서는 죽음으로서 나라를 지킨 어재연 장군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충장공(忠壯公)이란 시호를 내리고 병조판서겸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라는 높은 벼슬을 더해 주었다. 지금도 강화도에 있는 광성진은 역사의 현장으로서 잘 보존되고 있다. 


▲ 미국에서 임대형식으로 136년만에 돌아와 용산 전쟁 기념관에 전시중인 수자기

 

1866년 (신미양요·고종8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타고 평양부중에까지 들어와 통상을 한편 정부가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군에 빼앗긴 어재연 (魚在淵)장군기'수자기'[장수를 나타내는 '수(帥)'자가 쓰인 가로 세로 각각 4.5m의 대형 깃발 : 당시 미국 메릴랜드주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고 지난 2007년 10월 22일 136년 만에 임대형식으로 국내에 들여와 용산 전쟁 기념과 현관에 전시중이다. 

2008.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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