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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원을 했다기 보다는 반명을 하거죠. 명나라가 자신은 원나라를 이어서 중국을 지배하는 나라이니 예전의 국경을 회복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철령...지금의 안변을 기준으로 그 북방을 요동에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지방을 다스리는 기관이 철령위인데 그래서 이 문제를 "철령위 설치" 문제라고 합니다. 최영은 명나라의 이런 무리한 조치에 격분하여 요동정벌을 기획한 것입니다. 원래 고려의 땅이라는 거죠.
결과적으로 위화도 회군이후 철령 이북의 땅을 빼앗겼다면 이성계는 천고의 역적인데, 오히려 위화도 회군이후 명나라는 철령위 설치에 대해 일체 거론하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최영이 외교적으로 풀 수 있는 문제를 오버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고려가 요동을 장악했더라면 대중국 관계를 새롭게 이끌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명나라의 국세를 보면 몰락해가던 고려가 요동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기는 어려웠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 아래는 네이버 지식 백과 내용입니다==================
1387년(우왕 13) 12월에 명나라는 철령 이북의 땅이 원나라에 속했던 것이므로 요동(遼東)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철령위의 설치를 결정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던 설장수(偰長壽)를 통해 이듬해 2월 전달되었다. 이에 고려 조정은 유사시를 대비해 전국적으로 성을 수축하고, 서북면에 무장들을 증파해 수비를 굳건히 하였다.
또한 밀직제학(密直提學) 박의중(朴宜中)을 사신으로 파견해 철령 이북의 문천(文川)·고원(高原)·영흥(永興)·정평(定平)·함흥(咸興)은 물론 그 북쪽의 공험진(公嶮鎭)까지도 원래 고려의 영토였음을 주장하면서 철령위의 설치를 철회하도록 요구했으나,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앞서 명나라의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는 요동 백호(百戶) 왕득명(王得明)을 보내 철령위의 설치를 정식으로 통보해왔다. 서북면도안무사(西北面都安撫使) 최원지(崔元沚) 또한 요동의 도사(都司)가 강계(江界)에 철령위를 설치하고, 요동에서 철령까지 70개의 역참을 설치하려 한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명나라는 강계만호 김완가(金完哥)의 내부(來附)를 계기로 요동의 봉집현(奉集縣)에 철령위지휘사사(鐵嶺衛指揮使司)를 설치하고, 황성(黃城)을 중심으로 민호(民戶)의 초무(招撫)에만 나서고 있었다.
한편 고려는 전국의 정병(精兵)을 총동원하고, 최영(崔瑩)·조민수(曺敏修)·이성계(李成桂)를 각각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좌군도통사·우군도통사로 삼아 이른바 요동정벌을 단행했으나,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중단되었다.
이후 명나라는 더 이상 철령위의 설치를 거론하지 않았고, 1393년(태조 2)에는 봉집현의 철령위지휘사사도 현 만주의 철령으로 이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철령위 [鐵嶺衛]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5.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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