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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동학 농민 운동 배경 전개과정 의의 ?? 내공 50!!!!!!
비공개 조회수 13,351 작성일2019.04.13

동학농민운동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 300자 이상으로 정리존 도와두세욤....,,,

내공 50이요@!!!!!!!!!!!!!

4월 17일 전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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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 운동 배경 전개과정 의의 ?? 내공 50!!!!!!
동학농민운동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 300자 이상으로 정리존 도와두세욤

동학농민운동의 배경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직접적 원인은 잘 알려져 있듯이 전라도 고부(古阜)군수 조병갑의 가혹한 폭정 때문이었다.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 장군의 최후 진술을 읽어보면, 조병갑이 저지른 폭정은 고부군 한 곳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조선 팔도 대부분의 지방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현상이었다고 한다. 요컨대, 19세기말 조선 민중들은 ‘삼정문란(三政紊亂)’으로 일컬어지던 지배체제의 모순 아래 지방관으로부터 가혹한 수탈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는 제1의 배경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전개과정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은 고부농민봉기, 3월봉기, 집강소 통치시기, 9월 재봉기 등 4단계로 구분하여 이해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1단계는 1894년 1월 10일 일어난 고부농민봉기 단계이다. 고부농민봉기는 1월 10일 전봉준(全琫準) ,김도삼(金道三) ,정익서(鄭益瑞) 등의 주도로 고부 농민들이 봉기하여 탐관오리로서 온갖 폭정을 저지른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을 몰아내고 수탈의 상징인 만석보를 허물어 버렸던 사건을 말한다.

고부농민봉기 단계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특징은 고부군의 사회·경제적 처지와 고부 일대에 널리 포교되었던 동학과 깊은 관련이 있다.

2단계는 고부농민봉기를 주도했던 전봉준 등 지도부가 고부농민봉기를 수습하고 진정시키기 위해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李容泰)의 가혹한 탄압을 견디지 못하여 무장(茂長)으로 피신하였다가 손화중의 도움을 받아 그 해 3월 20일 전면적으로 봉기한 무장봉기 단계이다.

그 해 4월 7일 황토현에서 전라감영 군을 격파하고 전라도 서남해안으로 기수를 돌려 흥덕, 고창 ,무장, 영광, 함평을 차례로 점령하였으며, 4월 23일 장성 황룡촌에서는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京軍)을 무찔렀다.
4월 27일에는 호남의 수부(首府)인 전주성을 점령하고, 5월 8일 전주화약(全州和約)을 체결하였다. 이 전주화약을 계기로 동학농민군들은 자기들의 고을로 돌아가 폐정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3단계는 동학농민군들이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각 고을로 돌아가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실시하는 시기인 집강소 통치시기이다.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활동은 새 전라 감사로 부임한 김학진(金鶴鎭)과 전봉준 사이에 담판이 이루어지면서 가속화되어 몇 개 고을별로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며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동학농민군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고을에서는 집강소 설치가 수월했을 뿐만 아니라 과감한 폐정개혁 활동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나주, 운봉, 순창의 경우는 집강소 설치를 거부하는 향리와 지방 유생 및 지방 포군으로 구성된 수성군(守城軍)과 동학농민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등 집강소 설치와 폐정개혁 활동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의 4단계는 전봉준이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재기하는 9월 12일부터 그 해 12월 체포되기까지이다.


제2차 기포를 위하여 전봉준은 9월초부터 삼례를 거점으로 하여 동학농민군을 재조직하고 10월에는 서울을 향해 북상을 시작했다. 이 때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한 경군과 일본군의 연합군대가 세 길로 나누어 내려오기 시작하자 전국 각 지역에서는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잇따랐다.

특히 1차 무장 기포 단계에서 봉기하지 않았던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 경상도 북부지방에서도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반침략항쟁의 대열에 동참하기 위해 봉기했으며, 최시형의 영향 아래에 있던 동학 상층지도자들도 휘하 교도들을 이끌고 봉기하여 논산의 전봉준과 합류했다.

동학 농민 운동의의
동학농민운동은 동학교도와 모순된 사회에서 고통받던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근대 민족 운동이었다.
보국안민(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과 제폭구민(포악한 것을 물리치고 백성을 구원함)을 내세운 1차 농민 전쟁은 반봉건 운동,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2차 농민정쟁은 자주적으로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려는 반침략 운동이었다.
비록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전봉준이 체포됨으로써 실패했지만 이때 나타난 농민군의 개혁의지는 갑오개혁이 영향을끼쳤다.


2019.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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