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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함녕전,덕홍전,정관헌의 오얏꽃문양
ji**** 조회수 5,151 작성일2007.10.25

안녕하세요?

저는 4학년인데요...

역사숙제로 함녕전,덕홍전,정관헌의 오얏꽃문양을 찾아서 그리라네요...찾아주세요 찾아주시면 정말 감사해요... 내일모래 가는데... 경주가거든요/...1박2일 제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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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도덕 88위, 영어 독해, 읽기, 영어 어원, 어휘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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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녕전(咸寧殿, 보물 820호) - 함녕전은 광무 1년(1897) 건립되었다.  그 뒤 1904년 4월
대화재로 소실된 것을1905년 1월 다시 상량 하였다.  함녕전은 왕의 침전으로 쓰였는데
1907년 순종이 즉위 한 뒤 잠시 이곳에 머물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강제 양위(讓位)당한 고종은 수옥헌(漱玉軒, 중명전)에 머물다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자, 다시 함녕전에 거처하게 된다.  1919년 1월 고종이 이곳 함녕전에서 갑자기 승하
하고 만다.  고종 승하후 함녕전은 빈전(殯殿), 혼전(魂殿)으로 쓰이다가 후에 효덕전
(孝德殿)으로 불리기도 했다.  1904년 4월의 덕수궁 대화재는 현재의 덕수궁 일대를 잿더미
로 만들고, 오늘날 덕수궁 건물의 모습으로 남게 된 계기가 바로 함녕전에서 발화된 대화재
때문이다.  당시의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함녕전에서 비롯된 덕수궁 대화재는 일제,
혹은 일제의 사주에 의한 방화라는 의혹이 짙다는 것이 대체적인 중론이다.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당시 고종이 외국공사관과 가까운 덕수궁에 기거하는 것을 못마땅
하게 생각한 일제의 고의적인 방화였을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함녕전 내부





덕홍전(德弘殿) - 원래 이곳 덕홍전 자리에는 한때 명성황후의 빈전과 혼전으로 쓰이던
경효전(景孝殿)이 있었다.  1904년 대화재 이후 경효전을 수옥헌(漱玉軒) 방면으로 옮긴
뒤, 1906년 지금의 덕홍전을 짓고 1911년 개조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덕홍전은 덕수궁에 현존하는 건물중 가장 나중에 지어진 건물인 셈이다.
덕홍전의 용도는 주로 외국사신들이나, 대신들을 만나던 접견실로 쓰였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덕홍전의 내부 전체는 넓게 터져 있고,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내부 모양 또한
접견실의 모습 그대로다.  내부에는 봉황과 오얏꽃(李花) 문양 등을 화려한 금색으로 장식
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대한제국기에 황실의 문장(紋章)으로 쓰인 것이다.





덕홍전 내부

정관헌(靜觀軒) - 함녕전 뒤편의 화계를 정원 삼아 위치한 건물이 바로 정관헌이다.
이름 그대로 덕수궁 일대를 "조용히 내려다 보고(靜觀)"있는 셈이다.
1900년 건립된 정관헌은 러시아 건축기사인 사바틴(sabatine)이 설계한 건물이다.
사바틴은 1897년 을미사변(乙未事變) 당시 경복궁에 머물던 중,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목격
하고 이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린 인물이기도 하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
(덕수궁)으로 환궁할 무렵 몇 채의 서양식 건물을 궁내에 지었는데, 정관헌은 그 당시 건립
된 초기 서양식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기도 하다.
이곳 정관헌 용도는 고종의 연유처(宴遊處)로 외빈을 초대해 연회를 열거나, 고종황제가
다과를 들며 음악을 감상하던 휴식처로 쓰였다고 한다. 
이 건물의 가장 큰 특징은 서양식 건축양식에 전통적인 의장(儀裝)이 절충된 외관이라 할
수 있다.  내부기둥은 인조석으로 둔중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주두를, 바깥기둥은 목재로
화려한 코린트 양식 주두(柱頭)를 얹고 있다.  또한 바깥 기둥에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오얏꽃(李花) 문양을 양각하였고, 소나무, 사슴, 박쥐, 당초문 등을 투각한 난간을 설치
하였다.  전통적인 문양(文樣)을 가미한 서양식 테라스를 둔 것이다.








정관헌의 내부

2007.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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