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오얏나무꽃문양을 언제부터 궁중에서 사용했는가...???
ew**** 조회수 2,970 작성일2005.05.30
조선말기에 일본에 의해 강제로 조종당하면서 조선을 이씨조선으로 낮추어 부르기 시작하여 오얏리씨의 성을 따 오얏나무꽃 문양을 본떠 궁중에 사용하기 시작한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들기에 질문합니다.  고종의 단발은 조선이 이미 일본의 손에 넘어 갔다는 의미라 그시기에 이씨조선으로 전락하면서 부터 오얏꽃문양이 궁중에 쓰여지기 시작했던것이 아닌가 생각되기에 만약 그렇다면 오얏꽃문양은 수치요 굴욕의 상징일것 이기에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프로필 사진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1 개 답변
1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k4****
지존
전통 예절, 의식 65위, 사회문화, 한국사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1897년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 이후입니다.

 

오얏꽃문양을 사용하게 된 동기는 명확하게 밝혀진바가 없습니다.

다만 학계에서는 두가지 주장이 존재합니다.

 

첫번째는 님의 같은 주장으로 일제의 압력에 의해 유럽이나 일본의 지방 봉건영주처럼 문양을 상징으로 만들어 강요했다는 것이죠.  다시말해 지방정부처럼 권위를 떨어뜨렸다는 겁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용이나 봉황 등의 문양을 무시하고 단순히 오얏 리(李)를 강조하여 품위를 격하시킨 것이죠.  조선 왕조는 한민족을 대표하는 국가가 아니라 이씨라는 일개 가문에 의해 지배되는 왕조라는 뜻이 됩니다. 

 인정전의 용마루에 오얏꽃문양은 일제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오얏꽃문양은 일제의 강압에 의해 사용되었다는 주장입니다.

 

두번째 주장은 이와 상반된 겁니다.

고종 그리고 독립협회와 일부 정치인들에 의해 중국의 속국이 아닌 사대정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국가라는 것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해 국호를 바꾸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 황실의 상징인 국화문양에 맞서서 오얏꽃문양을 사용했다는 주장이죠.

일제의 강압에 의해 덕수궁, 인정전 등 궁궐 곳곳에 그리고 독립문에 까지 문양을 새겨넣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좀 무리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당시 고종이 대한제국을 표방하면서 각종 기록에 일제에 자주의지를 표명했다는 기록들로 봐서 강압적이기 보다는 자의적인 의지로 봐야한다는 것이죠.

2005.05.30.

  • 채택

    질문자⋅지식인이 채택한 답변입니다.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