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의 시대착오

김선영 | TV평론가
직장에서 마케팅팀 부장인 둘째딸 강미리(김소연)는 서로의 실수로 자신의 블라우스에 커피를 쏟은 신입사원 한태주(홍종현)를 회사 비상구로 불러내 그 자리에서 그가 입고 있던 와이셔츠를 벗게 한 다음 자신이 입는다. 엄연한 직장 내 성추행이자 갑질인 장면을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에서는 문제의식 없이 변화된 여성상을 보여주는 장치로 사용했다.  KBS 화면 갈무리

직장에서 마케팅팀 부장인 둘째딸 강미리(김소연)는 서로의 실수로 자신의 블라우스에 커피를 쏟은 신입사원 한태주(홍종현)를 회사 비상구로 불러내 그 자리에서 그가 입고 있던 와이셔츠를 벗게 한 다음 자신이 입는다. 엄연한 직장 내 성추행이자 갑질인 장면을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에서는 문제의식 없이 변화된 여성상을 보여주는 장치로 사용했다. KBS 화면 갈무리

KBS 주말드라마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이 시청률 30%를 돌파했다. 50%에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했던 전작 <하나뿐인 내 편>보다 상승폭이 더 가파르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이하 <예쁜 내 딸>) 극본을 쓴 조정선 작가는 10년 전 <솔약국집 아들들>로 최고 시청률 44.2%를 기록하면서 KBS 주말극의 전성기를 이어간 바 있다. 할아버지부터 장성한 손자들까지 3대에 이르는 대가족이 한집에서 북적거리며 살아갔던 2009년의 <솔약국집 아들들>과 비교하면, 홀어머니와 독립한 딸들의 이야기를 그리는 2019년의 <예쁜 내 딸>은 시대의 변화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좋은 표본처럼 보인다.

그런데 외적인 변화만큼이나, 작품에 내재된 가치관도 달라졌을까?

[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의 시대착오

<솔약국집 아들들>이 방영된 2009년은 ‘패륜’을 기본 코드로 삼은 막장드라마가 TV를 지배하던 시기였다. 전통적인 홈드라마 계보를 이어가던 KBS 저녁 일일극마저 ‘장기 이식’이라는 막장드라마의 신소재를 개척한 <너는 내 운명>으로 시대의 흐름에 두 손을 든 때였다. 이 와중에 등장한 <솔약국집 아들들>은 패륜 코드로 황폐화된 홈드라마계에 다시금 가족의 위로와 치유적 기능을 강조하면서 가족 판타지를 공고히 한 작품으로 호평과 인기를 동시에 얻었다. 말하자면 음울한 시대의 반작용이었던 셈이지만, 요즘에 다시 살펴보면 꽤 찜찜한 설정이 많다.

드라마는 솔약국집을 중심으로 한 서울 혜화동을 전통적인 공동체 정신이 살아있는 거대한 유사가족집단으로 묘사한다. 할아버지 송시열(변희봉)은 5년째 통장을 연임하면서 동네 전체를 관장하는 아버지 같은 존재로 그려지고, 그의 손주들인 네 형제는 그 계보를 이어가야 할 동네의 기둥으로 인식된다. 그 많은 대가족을 뒷바라지하는 건 어머니 배옥희(박미라)의 몫이다. 극중에서 옥희가 아들들 장가 보내기 프로젝트에 목숨을 거는 모습은 무척 속물적으로 묘사되는데, 마흔이 다 되도록 독립하지 않은 아들들에 대한 돌봄노동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간다. 아들을 짝사랑한다는 이유로 복실(유선)을 노예처럼 부려먹는 모습도 평생 독박 돌봄노동이 낳은 폐해로 볼 수 있다.

그로부터 10년 뒤 등장한 <예쁜 내 딸>은 홀어머니와 세 자매로 이뤄진 모녀 가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가부장 중심의 대가족 이야기였던 <솔약국집 아들들>과 사뭇 대조되는 설정이다. 과거와 달리 여성들의 돌봄노동 애환을 뚜렷하게 가시화시켰고, ‘유리천장’에 도전하는 ‘알파걸’ 둘째 딸 강미리(김소연)의 이야기를 통해 변화한 여성상을 선보이려는 의도도 드러난다. 하지만 막상 이야기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보면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가치관이 그대로 녹아 있다. 드라마가 중심에 놓은 돌봄노동의 고단함은, 돌봄을 가정, 여성에 전가하는 사회구조와 가부장제를 향한 비판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모녀 간 갈등과 화해의 서사를 추동하는 동력으로 기능할 뿐이다.

어머니 박선자(김해숙)는 ‘가부장적인 남편, 독사 시어머니, 가난의 3종 세트를 다 갖췄던 전형적인 한국 엄마’로 소개된다. 남편을 잃은 뒤 홀로 설렁탕집을 운영하며 딸들을 키워낸 그녀는 현재 워킹맘인 큰딸 강미선(유선)의 육아 도우미에 가사 도우미 역할까지 해내느라 등골이 휘는 중이다. 선자의 모습은 국가가 돌봄노동을 가족에게 일임하며 복지비용을 줄이는 동안 한평생 노동력을 무상으로 갈아 넣어 시스템을 유지하는 기혼 유자녀 여성들의 불합리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그렇지만 드라마는 그러한 문제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딸과 엄마의 죄책감과 연민이 뒤얽힌 모녀 멜로로 흘러간다.

제작발표회 당시 ‘모성 신화’를 강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면서도, 헌신적인 어머니 선자와 개인의 욕망을 추구하는 시어머니 미옥(박정수)을 대립 구도로 그리는 것도 모순적이다. 정작 육아와 집안일에는 관심조차 없는 미선의 남편 정진수(이원재)는 ‘미워할 수 없는 철부지 남편’처럼 코믹하게 그려지고 집안일에 똑같이 무관심했던 시아버지 정대철(주현)이 상식적인 어른으로 그려지는 동안, 황혼 육아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미옥은 남성들보다도 이기적인 캐릭터로 묘사된다. 이 같은 ‘여적여’ 구도는 워킹맘 미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은행의 남성 상사보다 비혼의 여직원 후배들이 미선을 더 적대적으로 대하는 장면에서도 반복된다.

이보다 문제적인 것은 가장 진취적인 여성 캐릭터로 소개된 미리의 서사다. 드라마는 미리의 당당한 캐릭터를 그리기 위해 연하의 신입사원 한태주(홍종현)와의 로맨스를 통해 의도적으로 역전된 권력관계를 선보인다. 그런데 이를 위해 가져온 장면이라는 것이, 기껏 서로의 실수로 부딪친 첫 만남에서 자신의 옷에 커피를 쏟은 한태주에게 다짜고짜 입고 있던 와이셔츠를 회사 비상구에서 벗어달라고 요구하고, 사무실에서 혼자 생수통을 교체하라고 시키는 장면 등이다. 작가는 ‘신여성’ 캐릭터를 의도했을지 모르지만, 결과는 성추행적인 상황을 단순히 성별만 바꾸고 남성들이 흔히 ‘남성 차별’의 대표적 예시로 들곤 하는 ‘생수통’을 끌어들여 모순만 키운 셈이다. 미리가 비혼을 선언하는 이유로 ‘생모’에게 버림받은 상처 때문에 “자식을 잘 키울 자신이 없어서”라고 말하는 장면만 봐도, 이 드라마가 지금의 시대정신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다.

돌이켜보면 10년 전 <솔약국집 아들들>은 1997년 외환위기 당시처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점점 사회안전망이 허술해지는 상황에서 최후의 도피처로서 가족 판타지로 기능한 이야기였다. 그것을 지탱하게 한 힘이 여성들의 무상 돌봄노동이라는 사실은 그 따뜻한 판타지 뒤에 철저히 가려졌다. 그런 면에서 극 초반 짧게 나오는 사연이지만, 남편과 두 아이에 시누이까지 건사하다가 암에 걸려 사망한, 장남 진풍(손현주)의 첫사랑 혜림(최지나)의 이야기는 의미심장한 징후처럼 보인다. <예쁜 내 딸>의 엄마들은 부디 장기 이식이 필요한 중병에 걸리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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