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좌의 게임
▲<왕좌의 게임>에 등장하는 7왕국 군주의 보좌, 철왕좌. 작품 속 설정으로는 최초로 7왕국을 통일했던 왕이 각 지역 영주들과 지배자들이 항복 표시로 내놓은 칼 1천여 자루를 녹여 만든 보좌로 알려져 있다.
지난 주에 이어 박욱주 박사님의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에서는 전 세계적 인기를 얻고 있는 드라마 시리즈 ‘왕좌의 게임’을 기독교적으로 바라봅니다. 회당 제작비 170억여원에 달하는 초대형 블록버스터 드라마 ‘왕좌의 게임’은 마지막 8번째 에피소드가 지난 19일 시작됐습니다. -편집자 주

보좌와 역사: 왕좌를 향한, 전 인생을 바친 열망

존 스노우의 이야기뿐 아니라, <왕좌의 게임>의 서사 전체에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보좌 상속의 약속과 이를 향한 열망이라는 개념이 중세적인 모습으로 반영되어 있다.

에다드 스타크나 존 스노우와 같이 일부 명예심이 넘치는, 고결한 성품을 가진 영주들을 제외하면, 드라마 전체에 등장하는 모든 대영주들은 ‘철왕좌(Iron Throne)’라 불리는 보좌에 앉을 자격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다.

그 수단이 정치력이든, 군사력이든, 암살과 권모술수가 되었든 간에, 모든 방법을 동원해 각기 인생을 바쳐 권좌에 앉고자 한다.

이런 모습들은 대단히 왜곡된 세속적 양태이긴 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이런 열망 자체는 원래 인간들의 영혼에 각인된, 참으로 본유적인 열망인 것으로 확인된다.

성경은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보좌를 상속받으라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뭇 인간을 그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뜻을 정하셨기에 인간들은 모두가 그 뜻에 합치되는 삶을 살 기회를 얻게 된다.

<왕좌의 게임>이 하나의 대표적 사례이긴 하지만, 그 외에도 왕권이나 황권을 얻기 위해 힘을 다하는 인간 군상들을 그린 작품들은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한 가지 긍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바로 자유민주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쉽게 체감할 수 없는 왕권과 보좌의 개념을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점이다.

<왕좌의 게임>에 등장하는 인물 관계를 생각해 보자. 왕권을 노리는 대영주들 간의 관계야 서로 대등한 위치에서 경쟁하는 것이지만, 다른 인물들은 모두 이 대영주들이 가진 권세와 힘에 자의로든 타의로든 복종하는 위치에 처해 있다.

특히 이들 대영주들 가운데 한 명이 원래 갖고 있던 권세와 힘에 더해 7왕국 전체의 왕권까지 얻게 되면, 그와 대립하던 대영주들조차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복종하고 만다. 그렇지 않으면 반역자로 낙인찍히게 된다.

왕좌의 게임
▲<왕좌의 게임> 속 시대배경은 왕과 영주, 그리고 신민 사이의 위계질서가 확고하고 명확한 중세시대이다.
이는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택하고, 언론이나 인터넷 포털, 그리고 SNS를 통해 대통령과 정권 지도부 비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오늘날 한국의 현실 가운데서는 경험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오늘날은 차라리 기업 오너들과 그 밑에 고용되어 일하는 피고용인들 간의 관계가 과거 영주들과 신민들 사이의 관계와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통상 우리 사회는 이런 ‘권위적’ 질서를 하나의 절대악인 것처럼 여긴다.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평등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대원칙에 위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무조건적 평등을 정치적 이상으로 여기는 진보 계열 정당이 집권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번 정부가 들어선 후 가장 많이 회자되어 온 문재인 대통령의 말이 이런 분위기를 대변한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2012년 9월,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 중).”

매우 이상적인 약속이지만, 아쉽게도 인간 현실에서 이 약속이 온전하게 지켜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많은 이들이 이런 류의 약속을 지켜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하겠지만, 인간의 삶이 애초 불평등한 현실 가운데 위치해 있음을 우리는 결코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우선 인간이란 존재가 참으로 다양한 불가능성 가운데 놓인 채 고뇌하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고, 다음으로는 죄악으로 인해 타락한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내세운 약속이 참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나라는 향후 도래할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왕국 뿐이다.

전지전능하며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초월적 힘과 지배력에 힘입지 않는 이상 진정한 기회 평등, 진정한 공정성, 진정한 정의란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공의와 정의로 충만한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왕국의 체제가 기본적으로 왕정 체제라는 점이다. 이는 단지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위계에서만 적용되는 사안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피조물들 사이에도 주인과 종, 큰 자와 작은 자, 높은 자와 낮은 자의 위계가 나뉜다. 왕과 신민들 뿐만 아니라, 대영주와 소영주, 영주들과 신민들, 그리고 부유한 자와 빈곤한 자 사이에도 명백한 위계가 존재할 것이라는 게 성경의 가르침이다.

보좌와 질서: 하나님 나라의 위계질서를 상징하는 철왕좌

통상 오늘날 민주주의 사상에 익숙한 이들 사이에서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나라의 ‘위계적’ 질서라는 것이 하나의 신화적 비유 정도로 여겨진다. 그리고 천국에서는 모든 구원받은 영혼들이 ‘절대적으로’ 평등하고 행복하리라는 설교가 환영을 받는다.

그러나 이는 ‘지옥 형벌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평등하고 행복하다는 것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왕권과 보좌 중심의 엄정한 위계질서가 정해져 있어 결코 무조건적으로 평등한 곳이 아닌 것으로 확인된다. 거기에는 분명한 왕권의 차별, 보좌의 차별, 상급의 차별이 존재하는 것 같다.

왕좌의 게임
▲여왕 대너리스를 중심으로 모여든 영주들과 신하들. <왕좌의 게임>은 확고한 왕권체제 하의 신분질서를 보여준다.
얼마 전 영화 <돈>에 관한 평론에서 진술한 바대로,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는 더 많이, 더 성실히, 더 충성되게 일한 자에게 더 큰 영광과 보좌를 허락해 주시는 명백한 자본주의적 경쟁체제를 따른다.

이런 이유로 바울 사도는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고 권고하였던 것이다.

결국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는 마르크스주의적 유토피아를 꿈꾸는 어떤 이들의 이상과 같이 무조건 서로 평등한 그런 곳을 말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엄연히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그러면서도 그 왕국의 시민들 사이에 큰 자와 작은 자가 나뉘는 위계적 질서가 성립되는 것으로 성경은 곳곳에서 가르치고 있다.

무엇보다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시는 것”(계 22:12)이 하나님의 공의임을 명시하고 있다.

<왕좌의 게임>은 존 스노우를 통해 표현된 그리스도의 구원사역 알레고리와 함께, 바로 이런 엄정한 하나님의 치리의 질서, 왕권의 무게감, 그리고 그 왕권을 상속받고 보좌에 오르는 자의 영광됨을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기독교적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참된 군주로서 합당한 계승권, 성품, 그리고 능력을 가진 존 스노우의 지도 하에 만인이 권위와 질서에 순종하는 모습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한 모범이라 할 수 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사회 곳곳에서 정당한 권위와 질서라는 개념이 과도한 수준으로 무너지고 있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고전적이긴 하지만 이런 개념들이 여전히 살아있는 대작 대중문화 콘텐츠를 만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비록 비열하고 잔혹한 왕권 투쟁 장면이 연속되긴 하지만, 적어도 그 왕권을 획득한 이, 철왕좌에 오른 이가 군주로서의 권세와 힘을 발휘하게 된다는 권위와 질서 개념은 작품 속에 분명하게 살아있다.

왕좌의 게임
▲서구 기독교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왕권과 보좌의 개념을 간접적으로 이해시켜주는 TV 시리즈, <왕좌의 게임>.
물론 <왕좌의 게임>이 지금과 같이 큰 인기를 얻게 된 데는, 주전 1세기 검투노예들의 혁명을 주제로 다룬 TV 시리즈 <스파르타쿠스(Spartacus)>가 그랬던 것처럼, 과도한 폭력과 섹슈얼리티, 그리고 소위 ‘막장’에 가까운 로맨스 및 원한 관계 등이 큰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작품이 주는 카타르시스의 원천 가운데는 서구 기독교 문화사 가운데 생생하게 전해져 내려오는 참된 왕권과 보좌 상속의 성취라는 서사요소를 빼놓을 수 없다.

한 중세 영웅의 알레고리를 통해 참으로 왕권을 상속받을 만한 자격을 갖춘 이가 끝내 보좌에 앉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공의의 약속을 확인하고, 이로부터 심유한 신앙적-도덕적 카타르시스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