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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경기도 군포,의왕의 문화재나 씨름에이야기
비공개 조회수 4,540 작성일2009.07.14

안녕하세요?

저는 군포초에 다니는 3학년 학생인데

선생님이 군포,의왕시에 문화재나 씨름

에 대한 걸 알아오랬어요.

그래서 좀 알려주세요

 

 

꼭꼭꼭!!!

내공 겁니다.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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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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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l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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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89위, 전통 예절, 의식, 외국국기, 국가정보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군포의 문화재-

1.조선백자 도요지
종 별 : 사적 (제342호)
수 량(보유종별) : 일원 (사적)
소유자(보유자): 군포시
소재지 :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1057-4번지
지정년월일(고시년월일): '91.1.9
관리단체(관리의무자): 군포시 (문화예술팀)
전체면적 : 2.134㎡
문화재구역(보호구역) : -

조선백자 도요지는 조선 전기(15세기말 ~ 16세기 전반) 지방백자 요지로서 거의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백자제조를 위한 기마터이다.
도요지는 2개의 작업장으로 이루어졌으며,처음에는 산구릉의 자연경사를 따라 구릉 중턱에서부터 산위쪽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그후 자리를 옮겨 앞의 가마와 거의 직각이 되게 서남쪽의 구릉 아래에서부터 구릉쪽으로 축조되었다. 가마는 지표면을 약 30∼40㎝ 정도 파서 반지하식 바닥을 만들고 그 위에 모래를 깔고 개떡을 놓아 수평을 잡았으며, 진흙으로 양벽을 쌓아 올려 구축한 터널식 칸가마이다.

작업장 역시 2곳이 발견되었다. 작업장 바닥에는 백토(白土)가 깔려 있었고 물레작업장과 백토저장시설 그리고 백토건조시설인 온돌구조가 남아 있었다. 이 가마터의 발굴과정에서 많은 도기편(陶器片)이 수습되었는데, 대부분 백자류인 발(鉢)과 접시류들이었고 이외에 청화백자편, 철화백자편, 청자, 분청자, 토기류 등이 극소수 출토되었다. 이 가마터는 대개 16세기 전반에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묘역에 있는 선생의 신도비 비문은 영의정을 지낸 남곤이 지었고,글씨는 둥지중추부사 강징이 쓴 것이다.한편,차자 정광필(1462~1538)선생의 자는 사훈,호는 수천으로 중종14년(1519) 기묘사화때 영의정으로 조광조 등을 구하려다 파직뒤에 퇴계 이황을 비롯한 사람들에게서 크게 칭송을 받았다.시호는 문익이며 선생의 신도비 비문은 좌찬성 양곡소 세양이 지었고 글씨는 퇴계 이황이 썼다.

2. 정난종 선생묘 및 신도비의 묘역일원

종 별 : 경기도 기념물(제115호)
수 량(보유종별) : 일원 (임야)
소유자(보유자): 동래정씨 동래군파 종친회
소재지 :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산 3-1 번지
지정년월일(고시년월일): '89.6.1 ('00.4.17)
관리단체(관리의무자): 동래정씨 종친회(정창모)
전체면적 : 24,147㎡
문화재구역(보호구역) : 6,708㎡ (17,439㎡)

수리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이 묘역 일원은 경기지방에 현존하고 있는 조선 시대 사대부가의 묘역중 비교적 그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다.
이곳에는 조선 세조때의 명신인 정난종선생을 비롯하여 그의 장자 광보, 차자 광필,그리고 광필의 넷째 아들복겸과 6세손 주손, 진원의 묘 등이 산등성이의 중턱에서부터 아래로 차례로 열을 지어 조성되어 있다. 묘역에는 각각의 묘에 대한 신도비와 혼유석,석등,동자석,문인석 등과 함께 규례대로 갖추어져 있어, 조선전기의 분묘사 내지 석비,금석문 등 고고미술사 연구의 귀중한 재료가 되고 있다.

정난종(1433~1489)선생의 자는 국형,호는 허백당, 본관은 동래이다.
일찌기 과거에 급제한 이후 세조 13년(1467) 황해도 관찰사로서 재직하던 중,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고, 성종 1년(1470년)에 동지중추부사로 사은사의 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듬해 순성좌리공신 4등에 올라 동래군(東萊君)에 봉해졌다. 관작은 평안도 병마절도사, 우잠찬,이조,공조,호조의 판서등을 역임했고 시호는 익혜(翼惠)이다. 성리학에 밝고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어 성임(成任)과 함께 세조,성종대 최고의 서예가로 일컬어 졌다. 초서,예서를 잘쓰고 특히 조맹부체에 뛰어났다. 서울 탑골공원의 [원각사비음(圓覺寺碑陰)], 경기도 양주의 [고령부원군신숙주묘표(高靈府院君申叔舟墓表)], [윤자운신도비(尹子雲神道碑)],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종명(洛山寺鐘銘)]과 고성의 [유점사종명(楡岾寺鐘銘)], 서울 덕수궁의 [흥천사종명(興天寺鍾銘)]등의 그의 글씨이다.
묘역에 있는 선생의 신도비 비문은 영의정을 지낸 남곤이 지었고,글씨는 둥지중추부사 강징이 쓴 것이다.한편,차자 정광필(1462~1538)선생의 자는 사훈,호는 수천으로 중종14년(1519) 기묘사화때 영의정으로 조광조 등을 구하려다 파직뒤에 퇴계 이황을 비롯한 사람들에게서 크게 칭송을 받았다.시호는 문익이며 선생의 신도비 비문은 좌찬성 양곡소 세양이 지었고 글씨는 퇴계 이황이 썼다.

3.방짜유기장


종 별 : 도 무형문화재(제10호)
수 량(보유종별) : 방짜유기 (무형)
소유자(보유자): 김문익 (김문익)
소재지 : 경기도 군포시 대야미동 122-1 번지
지정년월일(고시년월일): '92.6.5
관리단체(관리의무자): 김문익
전체면적 : -
문화재구역(보호구역) : -

방짜유기란 유기합금의 일종으로 구리와 주석을 10대 3의 비율로 배합하여 만든 놋쇠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방짜유기가 제작된 것은 신라시대부터라고 하는데, 현재 유기제작 기술은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주물제작법으로 쇳물을 녹여 그릇의 형태에 부어서 만드는 방법이다. 이 주물유기 제작법은 제작이 용일하고 합금도 자유로이 할 수 있다.
둘째는 우리말로 궁구름옥성기라 하는데, 이러한 제작법을 요즘은 반방자 유기라 부른다. 이 제작법은 절반을 주물제작법으로 만들어 놓고 불에 달구어 그릇의 형태를 만드는 방법이다.
셋째는 구리와 주석을 75%대 25% 비율로 합금하여 처음부터 주물된 놋쇠 덩어리를 자주 불에 달구어 두들기면서 그릇의 형태를 만드는 방법이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에서 이 세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하여 만들었으나 안성의 주물유기, 납청의 방짜유기 순천의 반방짜유기 기술이 남아있어 국가에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현재 남한에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로 지정된 이봉주(李鳳周)가 납청유기 기술을 이식시켜 경기도 안산시 시화공단에서 방짜유기를 만들고 있다. 이봉주의 작품은 섬세하고 다듬어진 모양보다는 투박하고 거칠면서도 은은한 한국적인 미를 간직한 것이 특징이다.

군포시 일대의 방짜유기 제작자로는 안양시 박달동에서 납청산업을 경영하는 이형근과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된 김문익을 들수 있다. 김문익은 군포시 당동에 위치한 공방에서 전통적인 방짜유기 기술로 주발, 쟁반, 화로, 촛대, 향로, 꽹과리, 징 등을 제작하고 있다. 특히 '88 서울 올림픽 개막식에 사용된 바라는 김문익의 손을 거친 작품이다.

4.전주이씨 안양군묘


종 별 : 경기도 기념물(제122호)
수 량(보유종별) : 일원 (임야)
소유자(보유자): 전주이씨 안양군파 종사회
소재지 :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 산27
지정년월일(고시년월일): '90.4.30 ('90.9.14)
관리단체(관리의무자): 안양군파 종사회(이무형)
전체면적 : 4,480㎡
문화재구역(보호구역) : 952㎡ (3,528㎡)

이곳은 성종의 삼남 안양군(安陽君) 이행의 묘다.
묘역의 규모는 약 300여평으로 연지,사당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묘역에는 상석,향로석,묘표가 각 1기씩 세워져 있고, 동자석,석수,망주석,문인석 등의 석조물이 각각 2기씩이 있다. 재질은 모두 화강암이다.
후에 이 묘역에 신도비를 세웠는데, 비문은 통정대부 거창 신중묵이 지은 것을 1976년 이형이 쓰고,김충현이 전액을 하여 건립하였다.
안양군 묘는 1990년에 경기도 기념물 제122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5.김만기 선생묘 및 신도비
종 별 : 경기도 기념물(제131호)
수 량(보유종별) : 일원 (임야)
소유자(보유자): 광산김씨 문현공파 문중
소재지 : 경기도 군포시 대야미동 158-3,4,5번지
지정년월일(고시년월일): '92.6.5 ('93.1.6)
관리단체(관리의무자): 문현공파 종회 (김건중)
전체면적 : 29,058㎡
문화재구역(보호구역) : 1,004㎡ (28,054㎡)

김만기 묘역과 신도비는 지금의 군포시 대야미동 산1-12전지에 위치하고 있다.
묘역 중앙에는 대형 분묘가 8개의 호석에 둘러싸여 있고, 그앞 왼쪽에는 묘표가있다. 오른쪽 앞에는 숙종 어필의 묘표가 있으며, 전면 좌우에는 8각의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각 조성되어 있다. 숙종 14년녀(1688)에 세워진 묘표의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김진규가 글씨를 쓴 것이고, 숙종 어필의 묘표는 숙종 25년(1699)에 세웠다.
신도비는 묘표와 마찬가지로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김진규가 글씨를 쓴 것으로, 4각의 기단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첨석을 얹어 만들었다.
김만기 묘역과 신도비는 1992년에 경기도 기념물 제131호로 지정되었다.

6.이기조 선생의 묘


종 별 : 경기도 기념물(제121호)
수 량(보유종별) : 일원 (임야)
소유자(보유자): 군포시
소재지 :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 1152-11 번지
지정년월일(고시년월일): '90.4.30 ('90.9.14)
관리단체(관리의무자): 한산이씨 총대종회(이명원)
전체면적 : 3,000㎡
문화재구역(보호구역) : 1,126㎡ (1,874㎡)

조선 인조때의 문신인 이기조 선생의 묘와 신도비로 이곳에는 120여평에 걸쳐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석물로는 상석,향로석이 각 1기와 동자석 망주석,문인석 각 2기의 석조물이 설치되어 있다. 즉 봉분을 중심으로 정면에 상석과 향로석이 놓여 있고, 한 단 아래의 좌우에 동자석, 망주석, 문인석이 한쌍씩 서 있다.
이 묘소에는 묘비가 없는대신 동자석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기조의 묘는 원래 경기도 장단에 있었으나, 20년 뒤인 1672년에 현재의 곳에 이장하여 부인 신씨와 합장하였다. 이 유적은 현재 경기도 기념물 제121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7.동래정씨 동래군파 종가


종 별 : 문화재 자료 (제95호)
수 량(보유종별) : 1곽 (대지)
소유자(보유자): 정운석
소재지 :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24-4 번지
지정년월일(고시년월일): '00.4.11 ('00.4.17)
관리단체(관리의무자): 정준수
전체면적 : -
문화재구역(보호구역) : -

수리산 줄기의 동쪽 자락에 서향으로 자리잡은 이 집은, 조선중기의 문신 정사룡(鄭士龍, 1491∼1570)이 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지은 건물이다. 그는 파시조(派始祖)인 동래군(東來君) 정난종(鄭蘭宗, 1433∼1489)의 손자로서 이 가옥의 맞은편 산 중턱에 정난종의 묘가 있어 이로 인해 마을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안채와 사랑채, 작은 사랑채, 행랑채 등 4동이나 원래는 사랑마당 바깥쪽으로 행랑과 연못, 작은 사랑채 뒤에 초당, 안채뒤에 사당, 오양간 등이 있었다. 사랑채는 1877년에 지어졌으며, 안채는 1783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초당과 오양간은 한국전쟁때 소실되고, 사당은 60년대에 철훼하였으며, 방앗간이 있던 바깥행랑채는 70년대에 무너진 것으로 전한다.
사랑채는 전면 5칸으로 구성된 전후툇집으로 누마루, 마루복도, 행사청 등 평면 구성과 칸의 분할이 독특하여 조선후기 살림집의 기능을 중시한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의왕의 문화재-

1)의왕 청계사동종

종목 : 보물 제11-7호
분류 : 유물 / 불교공예/ 의식법구/ 의식법구
수량 : 1구
지정일 : 2000.02.15
소재지 : 경기 의왕시 청계동 산11 청계사
시대 : 조선시대
소유자 : 청계사
관리자 : 손성중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종의 높이는 115㎝, 입지름 71㎝이며, 무게가 700근이나 나가는 큰 종이다.종의 꼭대기에는 두마리의 용이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고 있고, 어깨와 종 입구부분에는 꽃과 덩굴을 새긴 넓은 띠가 있다.어깨 띠 아래로는 연꽃모양의 9개의 돌기가 사각형의 유곽 안에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보살상들이 서있다.종의 허리에는 중국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2줄의 굵은 횡선이 둘러져 있고, 그 아래로 글이 남아 있어 만든 사람과 시기를 알 수 있다.18세기의 종의 형태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조선 후기 범종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2)검제김유선생영정

종목 : 시도유형문화재 제117호 (경기)
분류 :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 : 1폭
지정일 : 1984.09.12
소재지 : 경기 의왕시
소유자 : 사유
관리자 : 청풍김씨판서공파종중
연락처 : 경기도 의왕시 문화공보과 031-345-2065

조선시대의 문신인 검제 김유(1653∼1719)선생의 초상화이다.김유는 황해도 관찰사와 대제학을 지낸 문신이자 학자로,『동국여지승람』을 증보하였다.영정은 검은 사모에 관리의 평소 집무복인 녹색의 관복을 입고 호랑이 가죽이 깔린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이다.사모가 상당히 높고, 마주 잡은 두 손은 허리띠 아래에 놓여 있으며, 발 받침대의 두 발 사이에는 호랑이 얼굴의 일부가 정면으로 나타나 있다.얼굴의 외곽선은 갈색으로 표현하고 움푹 들어간 부위는 갈색선을 조심스럽게 겹쳐 그려 붓질이 몰리도록 하여 어둡게 표현되었다.수염은 검은 올과 흰 올을 정성스럽게 그려 넣어 사실적인 효과를 거두었는데, 이같은 사실성의 추구는 얼굴 검버섯 표현이나, 의복의 자연스런 선의 표현에서도 나타난다.화면의 오른쪽 윗부분에 그림의 내력을 적은 기록이 남아 있어 선생이 64세 때인 숙종 42년(1716)에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18세기 초 공신도상의 양식을 따른 문신상의 전형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는 작품이다

 
군포시나 의왕시는 명절날이나 씨름대회때 씨름을 즐깁니다.^^싸름에대한 설명입니다.

씨름은 순수한 한국어이며, 이 밖에 각저()·각저(觝)·각력()·각희()·상박() 등의 한자어 별칭이 있다. 씨름은 원래, 원시사회에 있어서는 맹수나 타종족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살 수 있었으므로 생활수단으로서 투기() 또는 자기를 보호하는 무술로서 행하여졌던 것이다. 그리고 차차 인간이 지적()·정서적·사회적 발달에 따라 무예로 발전하였다.

씨름은 농경사회의 제례행사의 여흥의 하나로서, 음력 5월 5일 단오절이 되면 남자들은 자기 마을과 이웃 마을 사람들과 힘을 자랑하는 내기로서 넓은 모래사장이나 잔디밭에 모여 씨름경기를 하였다. 음력 7월 보름이 되면 백중()이라 하여, 각 지방에서 힘이 센 장사들이 많이 모여 수백 명의 관중 앞에서 힘을 겨루는 씨름을 하여 천하장사를 가려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음력 8월 한가위, 즉 추석 명절이 되면 경향() 각처에서 힘이 세고 거대한 체구의 장사들이 많이 모여들어 자기 고장과 자신의 명예를 걸고 우승을 쟁취하기 위해 씨름경기에 참가하였으며 장사들은 맞붙은 상대를 이기기 위하여 서로 부둥켜 잡고는 당기고, 들고, 밀고, 허리를 돌리고, 다리를 걸고, 감고 또 되치기를 하며 자기의 기술을 총동원하여 최대의 힘을 다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마지막으로 이긴 자에게는 부상()으로 황소 한 마리를 상으로 주었다. 이와 같이 마지막 우승자에게 황소를 주는 풍습은, 옛날에는 씨름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농사를 짓는 농민이었다는 점과 또한 한국은 예로부터 농업을 천하지대본()으로 숭상하는 농업국이므로 농사일을 부지런히 하라는 뜻에서 황소를 부상으로 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2009.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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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백과서사전.전문정보.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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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샅바나 띠를 넓적다리에 걸친 두 사람이 서로 부둥켜 잡고 햄과 재주를 부려,상대방을 먼저 넘어뜨리는 것으로 승부를 내는 항국 고유의 운동. 씨름은 순수한 항국어이며 이 밖에 각저 각력 각희 상발 들의 한자어 별칭이 있다.

 

2009.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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