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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신경숙-어머니를 위하여' 작품분석
비공개 조회수 3,098 작성일2008.10.25

'신경숙-어머니를 위하여' 작품분석 부탁드려요 ㅠ

 

  결혼을 하기 전에는 이따금 음식을 만들고 싶어서 손이 간지러울 때가 있었다.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떴는데 감자를 썰어넣어 갈치조림도 하고 싶고 느타리버섯이며 미나리를 곁들여 꽃게탕도 하고 싶고 대파를 썰어서 낙지볶음도 만들어보고 싶은 때가 있었다. 그런 날이면 일어나 앉자마자 여기저기 전화를 해서 친구들에게 점심 먹으러 와달라고 청했다. 혼자 사는데 음식을 만들어보았자 남으니까 기왕 만드는 거 그동안 친구들한테 못되게 군 거 만회도 할 겸 얼굴도 볼 겸 겸사겸사. 게다가 음식이란 모름지기 혼자 먹는 것보다 둘이 먹는 게 맛있지 않은가. 둘보다는 셋이, 셋보다는 넷이 모여 먹는 게 맛있다. 신바람이 나서 장에 나가 평소에 해보고 싶었던 음식 재료들을 실컷 사가지고 와서 오랜만에 도마를 꺼내놓고 재료들을 씻고 다지고 썰고 찧어 이것저것 만드는 시간은 참 즐거웠다.

  두부에 칼이 들어가는 순간의 느낌은 얼마나 부드럽고 아슬아슬한가. 뜨거운 물에 산낙지를 데치는 순간은 또 얼마나 긴장되고 오싹한가. 가끔 남성들에게 인생을 살면서 음식을 만드는 순간의 느낌들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손해라고 강변하며 음식을 만들어보길 권하는 게 내 버릇이기도 하다. 내 생각은 아직 변함이 없다. 어렸을 때 내 아버지는 가끔 우리 형제들에게 음식을 만들어주었다. 자장면도 만들어주었고, 양념간장을 바른 돼지고기를 석쇠에 구워주기도 했다. 식구들이 모여 밥을 먹을 때 이따금 아버지는 비빔밥을 만드셨는데 이상하게 아버지가 밥을 비비면 맛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기름이 귀하던 때 아버지가 밥을 비빌 때만 어머니가 참기름을 한두 방울 떨어뜨려 주었기 때문인 듯싶다. 어쨌거나 우리들은 아버지가 음식을 만들어주면 제비새끼들처럼 입을 벌리고 쏙쏙 받아먹었다. 그때 참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전혀 음식을 만들지 않는 아버지에게 내가 그때 말을 하면 아버지는 젊은 날에 당신의 새끼들인 우리가 음식을 먹는 걸 보면 정작 당신은 무서웠다고 했다. 자그마치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이 다들 먹성이 좋으니 아닌 게 아니라 쌀독에 쌀이 푹푹 줄어드는 게 보였을 것이다. 그 무서움이 아버지에겐 살아갈 힘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들의 먹성만이 무서웠겠는가. 어린 나이에 전염병으로 이틀 간격으로 부모를 잃고 종가의 장손 노릇을 하며 우리 형제들을 먹이고 입히고 학교 보내며 평생을 보낸 내 아버지에겐 무섭지 않은 젊은 날이 단 하루라도 있으셨을까. '아버지'로 상징되는 권력과 억압을 내 아버지는 전혀 지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연약하기조차 했다. 그분이 세상과 대적했던 방법은 온화함과 자상함이었다. 음식을 만들 줄 아는 남자만이 품을 수 있는 인생의 노하우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따금이라도 아버지가 만들어주는 음식을 먹고 자란 아이들은 훗날 분명 행복하게 그 일을 추억할 것이다.

  20대에서 30대 초반 자취 수준의 살림을 살 때 친구들을 부르면 온갖 접시가 다 끌려 나오고 젓가락은 짝이 안 맞고 상은 비좁아 낑겨 앉아야 해도 오랜만에 이 음식 저 음식 만들어놓고 앉아 있으면 시종 웃음이 터지며 즐거웠다. 오래 만나와서 이젠 밉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은 친구들과 격식 없이 내 식대로 만든 음식은 짝이 맞았던 것일 게다. 그렇게 보내는 몇 시간이 내게도 그랬고 친구들에게도 휴식이 아니었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마음에 맞는 친구와 맛있는 거 만들어 먹으며 잘난 사람 흉보는 재미는 최고다. 그때에는 생선가게 앞을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그 앞에 서서 각양각색의 생선들을 구경하는 게 내 취미이기도 했다. 바다를 못 보고 내륙에서만 자란 나는 저것들이 바닷속에선 어땠을꼬? 생각하는 게 즐거웠다. 온갖 상상력이 작동되면 내 어디에 지느러미라도 솟아날 듯 유쾌했다. 그러다가 지금은 얼음 위에 저렇게 납작하게 엎드려 있구나 싶어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한번도 요리를 해본 적이 없는 도미를 오로지 너무 싱싱해 보인다는 이유로 한 마리 사가지고 와서 이걸로 구이를 하나 찜을 하나 망설이고 갈등을 일으키다가 내 식대로 도미요리를 창조하기도 했던 기쁨을 결혼 후에는 잃어버린 게 여간 아쉬운 게 아니다. 하고 싶을 때만이 아니라 매일 밥상을 차려야 하는 처지에 놓이고 보니 음식 만드는 일이 기쁨보다는 노동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오로지 잃어버린 마음만 있는 건 아니다. 입을 다물고 묵묵히 파를 썰거나 마늘을 찧다보면 수십 년 재래식 부엌에서 그 복잡한 절차를 거쳐서 끊임없이 따뜻한 음식을 만들어내던 어머니가 떠오른다. 예전에는 그냥 한순간의 어머니였는데 이제는 그 재래식 부엌에서 보낸 어머니의 전 생애가 떠오른다. 따뜻한 음식을 만들어 가족에게 먹이는 일로 전 생애를 보내신 어머니. 그래서 불행했다고 단 한 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지만, 그래서 딸인 나조차도 당연하게 여겼던 어머니의 음식 만들기가 이제야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 희생으로 다가와 마음이 복받치는 것이다. 간을 맞추다가, 솥뚜껑을 열다가, 군불을 때다가 얼마나 숱하게 눈물을 훔쳐내셨을까. 어머니가 쭈그리고 앉아 고구마순을 다듬거나 멸치 똥을 갈라내시던 그 재래식 부엌은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오로지 어머니만을 위해 음식을 한번 만들어봐야겠다. 어머니가 더 늙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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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어머니를 위하여' 작품분석 부탁드려요 ㅠ

 

  결혼을 하기 전에는 이따금 음식을 만들고 싶어서 손이 간지러울 때가 있었다.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떴는데 감자를 썰어넣어 갈치조림도 하고 싶고 느타리버섯이며 미나리를 곁들여 꽃게탕도 하고 싶고 대파를 썰어서 낙지볶음도 만들어보고 싶은 때가 있었다. 그런 날이면 일어나 앉자마자 여기저기 전화를 해서 친구들에게 점심 먹으러 와달라고 청했다. 혼자 사는데 음식을 만들어보았자 남으니까 기왕 만드는 거 그동안 친구들한테 못되게 군 거 만회도 할 겸 얼굴도 볼 겸 겸사겸사. 게다가 음식이란 모름지기 혼자 먹는 것보다 둘이 먹는 게 맛있지 않은가. 둘보다는 셋이, 셋보다는 넷이 모여 먹는 게 맛있다. 신바람이 나서 장에 나가 평소에 해보고 싶었던 음식 재료들을 실컷 사가지고 와서 오랜만에 도마를 꺼내놓고 재료들을 씻고 다지고 썰고 찧어 이것저것 만드는 시간은 참 즐거웠다.

- 도입(기): 음식 만드는 일의 즐거움(추녀 시절의 즐거운 추억: 회상)

 

  두부에 칼이 들어가는 순간의 느낌은 얼마나 부드럽고 아슬아슬한가. 뜨거운 물에 산낙지를 데치는 순간은 또 얼마나 긴장되고 오싹한가. 가끔 남성들에게 인생을 살면서 음식을 만드는 순간의 느낌들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손해라고 강변하며 음식을 만들어보길 권하는 게 내 버릇이기도 하다. 내 생각은 아직 변함이 없다.

 어렸을 때 내 아버지는 가끔 우리 형제들에게 음식을 만들어주었다. 자장면도 만들어주었고, 양념간장을 바른 돼지고기를 석쇠에 구워주기도 했다. 식구들이 모여 밥을 먹을 때 이따금 아버지는 비빔밥을 만드셨는데 이상하게 아버지가 밥을 비비면 맛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기름이 귀하던 때 아버지가 밥을 비빌 때만 어머니가 참기름을 한두 방울 떨어뜨려 주었기 때문인 듯싶다. 어쨌거나 우리들은 아버지가 음식을 만들어주면 제비새끼들처럼 입을 벌리고 쏙쏙 받아먹었다. 그때 참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전혀 음식을 만들지 않는 아버지에게 내가 그때 말을 하면 아버지는 젊은 날에 당신의 새끼들인 우리가 음식을 먹는 걸 보면 정작 당신은 무서웠다고 했다. 자그마치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이 다들 먹성이 좋으니 아닌 게 아니라 쌀독에 쌀이 푹푹 줄어드는 게 보였을 것이다. 그 무서움이 아버지에겐 살아갈 힘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들의 먹성만이 무서웠겠는가. 어린 나이에 전염병으로 이틀 간격으로 부모를 잃고 종가의 장손 노릇을 하며 우리 형제들을 먹이고 입히고 학교 보내며 평생을 보낸 내 아버지에겐 무섭지 않은 젊은 날이 단 하루라도 있으셨을까. '아버지'로 상징되는 권력과 억압을 내 아버지는 전혀 지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연약하기조차 했다. 그분이 세상과 대적했던 방법은 온화함과 자상함이었다. 음식을 만들 줄 아는 남자만이 품을 수 있는 인생의 노하우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따금이라도 아버지가 만들어주는 음식을 먹고 자란 아이들은 훗날 분명 행복하게 그 일을 추억할 것이다.

- 발전(전개: 승전기후)

 1) 음식 만드는 즐거움(예나 이제나 변함없는  생각)

 2) 음식 만들어 주시던 아버지에 대한 행복한 추억

 3) 아버지의 삶의 의미를 되돌아 보는 감회

 

  20대에서 30대 초반 자취 수준의 살림을 살 때 친구들을 부르면 온갖 접시가 다 끌려 나오고 젓가락은 짝이 안 맞고 상은 비좁아 낑겨 앉아야 해도 오랜만에 이 음식 저 음식 만들어놓고 앉아 있으면 시종 웃음이 터지며 즐거웠다. 오래 만나와서 이젠 밉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은 친구들과 격식 없이 내 식대로 만든 음식은 짝이 맞았던 것일 게다. 그렇게 보내는 몇 시간이 내게도 그랬고 친구들에게도 휴식이 아니었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마음에 맞는 친구와 맛있는 거 만들어 먹으며 잘난 사람 흉보는 재미는 최고다. 그때에는 생선가게 앞을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그 앞에 서서 각양각색의 생선들을 구경하는 게 내 취미이기도 했다. 바다를 못 보고 내륙에서만 자란 나는 저것들이 바닷속에선 어땠을꼬? 생각하는 게 즐거웠다. 온갖 상상력이 작동되면 내 어디에 지느러미라도 솟아날 듯 유쾌했다. 그러다가 지금은 얼음 위에 저렇게 납작하게 엎드려 있구나 싶어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한번도 요리를 해본 적이 없는 도미를 오로지 너무 싱싱해 보인다는 이유로 한 마리 사가지고 와서 이걸로 구이를 하나 찜을 하나 망설이고 갈등을 일으키다가 내 식대로 도미요리를 창조하기도 했던 기쁨을 결혼 후에는 잃어버린 게 여간 아쉬운 게 아니다. 하고 싶을 때만이 아니라 매일 밥상을 차려야 하는 처지에 놓이고 보니 음식 만드는 일이 기쁨보다는 노동이 되어버렸다.

- 반전, 발전

 1) 20~30대 초반, 생활의 활력소였던 음식 만드는 즐거움

 2) 결혼 이후, 음식 만드는 즐거움을 잃은 아쉬움

 

  그러나 오로지 잃어버린 마음만 있는 건 아니다. 입을 다물고 묵묵히 파를 썰거나 마늘을 찧다보면 수십 년 재래식 부엌에서 그 복잡한 절차를 거쳐서 끊임없이 따뜻한 음식을 만들어내던 어머니가 떠오른다. 예전에는 그냥 한순간의 어머니였는데 이제는 그 재래식 부엌에서 보낸 어머니의 전 생애가 떠오른다. 따뜻한 음식을 만들어 가족에게 먹이는 일로 전 생애를 보내신 어머니. 그래서 불행했다고 단 한 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지만, 그래서 딸인 나조차도 당연하게 여겼던 어머니의 음식 만들기가 이제야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 희생으로 다가와 마음이 복받치는 것이다. 간을 맞추다가, 솥뚜껑을 열다가, 군불을 때다가 얼마나 숱하게 눈물을 훔쳐내셨을까. 어머니가 쭈그리고 앉아 고구마순을 다듬거나 멸치 똥을 갈라내시던 그 재래식 부엌은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오로지 어머니만을 위해 음식을 한번 만들어봐야겠다. 어머니가 더 늙기 전에.

- 정리, 결말(주제 단락)

 1) 어머니에 대한 회상을 통한 '어머니의 전 생애'에 대한 참된 의미의 깨달음

 2) 어머니를 향한 진솔한 마음(사랑)

 

 

[작품 정리]

* 갈래: 생활 수필(경수필)

* 제재: 음식 만드는 일, 생활의 예지

* 어조: 담담하게 과거를 회상하는 차분한 어조

* 표현: 여성스러운 섬세함, 작은 일에 대한 예리한 관찰력 등이 돋보임

 

* 주제

 1) 음식 만드는 일의 즐거움과 부모님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추억

 2) 어버이(어머님)의 사랑에 대한 참된 깨달음

 

 

                                                                                                      edu9508(국어공부)  드림

 

2008.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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