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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경기도 남양주를 빛낸 인물은?
미끄긴자 조회수 3,484 작성일2012.04.12
경기도 남양주를 빛낸 인물은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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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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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남양주를 빛낸 인물)

 

1.정약용 (1762.6.16~1836.2.22)  
  
본관 나주. 자 미용·송보. 초자 귀농. 호 다산·삼미·여유당·사암·자하도인·탁옹·태수·문암일인·철마산초. 가톨릭 세례명 안드레아. 시호 문도. 광주(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출생이다.

 

1776년(정조 즉위) 남인 시파가 등용될 때 호조좌랑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가환 및 이승훈을 통해 이익의 유고를 얻어보고 그 학문에 감동되었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고, 1784년 이벽에게서 서학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를 거쳐 검열이 되었으나, 가톨릭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인 공서파의 탄핵을 받고 해미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와 기중가설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사건에 둘째 형 약전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찰방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직을 맡고 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1799년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 신유교난 때 장기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그 곳 다산 기슭에 있는 윤박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체계는 유형원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박지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시재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융희 4) 규장각제학에 추증되었고, 1959년 정다산기념사업회에 의해 마현 묘전에 비가 건립되었다. 저서에 《정다산전서》가 있고, 그 속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마과회통》 《모시강의》 《매씨서평》 《상서고훈》 《상서지원록》 《상례사전》 《사례가식》 《악서고존》 《주역심전》 《역학제언》 《춘추고징》 《논어고금주》 《맹자요의》 등이 실려 있다.
 
2.이석영 (1855~1934)

 

독립운동가. 본관은 경주. 백사·이항복의 10세손이며 이유승의 6형제중 둘째아들로서 귤산 이유원에게 입양되어 남양주시 가곡리 임하려에서 살았다. 1910년 가장 먼저 독립운동에 뛰어든 동생인 우당 이회영(1867~1932)의 권유로 가곡리의 모든 땅과 재산을 처분하여 형 건영(1853~1940), 동생 철영(1863~1925) 회영, 시영(1869~1953) 호영(1875~1933)등 6형제와 그의 가족들은 1910년 12월30일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이주를 하였다. 당시 6형제가 가지고 간 돈은 엽전 26가마였으며 그중 이석영은 가곡리의 소유전답 6,000석 토지를 매각하여 현금 40만원(당시 쌀 1석은 3원이었음)을 내어놓아 가장 많은 액수였다.

 

6형제는 제일 먼저 한인 자치기구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국내에서 모여든 청년들에게 구국의 이념과 항일정신을 고취시켜 조국광복의 중견간부 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를 개소하였다. 이것이 바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다. 1911년 4월 제1기 졸업생을 배출하니 변영태, 성준용, 김련 등 40명이다.

 

신흥강습소의 본관과 사옥을 준공하고, 1913년 신흥중학교로 개칭하고 군사반을 두었다. 1919년 중학교를 폐지하고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하니 1920년 폐교 때까지 10년간 2,100명의 독립군을 배출하였으며 이들은 청산리 대첩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때 이석영의 큰아들 이규준은 항일 독립운동가가 일제의 회유로 변절하여 독립운동 진영에 피해를 주는 자들을 체포암살하는 ‘다물단’의 단장으로 활동하던 중 북경에서 암살되었다.

 

신흥무관학교의 실질적 설립자 이석영은 가난에 지쳐 두부비지로 연명하다가 굶어서 별세하였다. 가곡리에 이석영이 살던 이하려의 터에는 노거수 은행나무만 서 있으며, 원찰인 보광사가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3.김용기 (1909∼1988)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 봉안마을에서 태어나 고향마을에 ��봉안 이상촌��을 건설하였고 이는 후일 가나안농장으로 계승됐다.

 

엄격한 가정교육과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하였다. 어려서 양평에 있는 사립기독 광동학교에 입학하여 근대교육을 받았다. 재학시절 내내 우등생으로 일관하여 주위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고 한다. 1929년 김봉희와 결혼하여 1984년 사별할 때까지 55년간 황무지 개척의 동반자로서 함께 일하였다.

 

1931년부터 고향마을에 훗날 ‘가나안농장'으로 계승된 ‘봉안 이상촌'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한동안 자금난에 시달리다가 광주의 한 부자에게 돈을 빌린 후 마을 뒷산 황무지를 사서 부인과 함께 땅을 일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935년경에 자신의 5형제를 비롯하여 친구인 여운혁 목사 등과 함께 마을 앞 수천평의 땅에서 본격적인 ‘봉안 이상촌'을 건설하기로 뜻을 모았다. 먼저 집집마다 닭·돼지 등의 가축을 키우는 한편 복숭아·배 등의 과수를 심고 과목 사이에 고구마를 심었다. 특히, 고구마 농사는 당시 마을의 부족한 식량을 해결함과 동시에 농가수입을 증대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당시 시급했던 식량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환경개선, 식생활개선, 농업기술보급, 상·혼·제례 간소화 등 정신개조를 통한 애국정신 함양에도 크게 힘썼다. 또한 봉안교회를 중심으로 조직된 청년회에서는 농촌내의 유년·소년·청년 대상의 교육계몽운동과 여운혁목사가 중심이 되어 마을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야학운영 등을 통해 문맹퇴치운동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자신의 자서전에 밝힌 바, 봉안촌 마을이 1930년대에 이미 문맹을 퇴치하는 개가를 올렸다. 봉안 이상촌이 급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은 그의 탁월한 지도력과 함께 주민 모두가 신앙생활을 공유하고 있었던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일체감을 바탕으로 이상촌 주민 모두가 노력한 결과, 그 성장률은 놀라울 정도여서 1940년경에 주민수는 물론 논·밭·과수원의 규모도 크게 확대되었다. 이상촌 건설운동에 매진하면서, 한편으로는 여운형으로부터 감화받은 민족의식을 지속적으로 표출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로 1939년 장로장립을 받을 당시 식순의 하나였던 동방요배를 거부하여 일본 경찰에 구속되는 고초를 겪은 일을 들 수 있다. 이 밖에 1940년대 들어 일제가 강요한 창씨개명과 일제가 요구한 공출을 앞장서서 거부한 일이 그것이다. 또한 여운형 주도로 1944년 8월에 조직한 조선건국동맹의 하부조직인 농민동맹이 10월 양평에서 결성될 때, 양주군의 대표로 참석하여 자신의 옛 스승과 함께 항일의지를 펼치기도 했다.

 

한편 일제강점기의 ‘봉안 이상촌’ 건설이란 경험을 살려 한국전쟁 이후인 1954년 11월 광주군(현 하남시 풍산동)에 정착, 다시 황무지를 개척하면서 ‘가나안농장’이란 커다란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계속해서 근면·봉사·희생 정신 위에 '몸바쳐 일하자, 겸손히 섬기자'는 교훈을 내걸고 1962년 2월에 ‘가나안 농군학교’의 문을 열었다. 이후 죽을 때까지 종교인·공무원·군인·농부는 물론 사회 유력인사를 포함하여 모두 35만 1000여 명 정도의 다양한 계층을 교육시켰다. 이 학교는 정신개척의 도장으로서 자신의 개척자적 철학을 구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의식·생활·인격의 혁명을 중요한 교육과제로 삼았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6년 8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가나안 농군학교의 설립은 5·16쿠데타 이후 경제개발계획과 맞물려 국가 주도의 국민운동과 맥을 같이했기 때문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1973년 가나안 복민회를 설립하여 원성군에 제2농군학교와 제1농군학교를 중심으로 복민운동의 실천기반을 확보하고 이듬해 복민주의 연구실을 설치하여 복민사상의 이론적 실천을 체계화하는 데 힘썼다.

 

1980년 가나안 농군학교를 수료한 수료생을 중심으로 일가회를 조직하여 복민운동의 주체로 키웠다. 식솔 모두도 철저히 복민운동의 역군으로 교육하여 가족이 솔선하여 가나안 식구로 일하고 있는 셈이다. 죽기 전까지 ≪참 살길 여기에 있다≫ ≪이렇게 살 때가 아닌가≫ ≪심은대로 거두리라≫ ≪운명의 개척자가 되자≫ ≪나의 한길 60년≫ ≪영광된 내일을 위하여≫ ≪가나안으로 가는 길≫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2012.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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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남양주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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