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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강화도 전등사에 대한것이용!!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5,092 작성일2007.04.23

뭐.......

제가 다른 지식인들 것 을 보았는데....

그렇게 쓰지는 말아주세요.

강화군청에 들어가서 그거 퍼온 것 말구염.....

저두 그런 거 좋긴한데.....

이번 울 쌤이...

좀 까다로워욤!!!!

그래서요....뭐 모르는 글자나 아무거나 그냥 프린트 해오지 말고,

자기가 똑똑히 아는 글자로 글-씨-로- 하래요.....ㅠㅠ

그래서요....

초딩 수준에 맞게 좀 해주시구염......

그래서여....수요일 까지 좀 알려주세요...

전등사의 유래, 거기에서 뭐....불이났던 적이 있다던가 뭔가

큰 사고가 일었났던일...뭐..이 이상으로 해주시면 더욱더 좋고요...

죄송 합니다. 내공은 적은데다가

이렇게 바라는 것 도 많아서, 정말루 ㅈㅅ하구여..

수요일까지 해주심 좋겠어요.

내공은 드릴꼐요......

하지만 안해주셔도 괞찮아요.

저랑 울 모둠끼리 하는거니까 괞찮을 꺼예요.

그래도 좀 써주셨으면 좋겠어요~~~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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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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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위 치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번지 정족산성 안

 

단군 왕검의 세 왕자가 쌓았다는 정족산 삼랑성(사적130호)내에 위치한 전등사는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년) 아도가 창건하여 진종사라 하였다.

 

그 후 고려 제27, 28, 30대의 충숙왕 ·충혜왕 ·충정왕 때에 수축하였고, 1625년(인조 3)과 1906년에도 중수하였으며, 또 일제강점기에도 두 차례 중수하였다.

 

지금의 전등사란 명칭은 고려 충렬왕 8년(1282)에 왕비 정화궁주가 옥등잔을 부처님께 바친 데서 생겨났다고 전해진다.이때 정화궁주는 승려 인기에게 《대장경》을 인간, 이 절에 봉안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보물 178호인 대웅보전은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집으로 광해군 13년(1621)에 지어진 조선 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이며 특히 내부의 불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고종 3년 병인양요시 프랑스군에 대항하여 결사호국의 각오로 전투에 임했던 장병들이 무운을 부처님께 빌기 위해 대웅보전의 기둥과 벽면에 자신들의 이름을 써놓은 흔적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보물179호인 약사전을 비롯한 10동의 건물과, 11세기 중국 북송때 만들어진 보물393호인 범종, 유형문화재 26호인 순무천총양헌수승전비, 지방문화재인 7호인 대조루와 실록과 왕실세보를 보관했던 장사각지와 선원보각지, 전설이 서려있는 나녀상,열리지않는 은행나무, 우는나무 등 많은 고목이 있다.

 

보물 제 178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가는것으로 꼽아야 하겠다. 특히, 내부의 불단위에 꾸며진 닫 집의 화려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는 것이며,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나오며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

 

전등사에 전해지는 유물로 대표적인 것 중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범종은 전형적인 우리나라 종과는 그 형태가 판이함을 금방 알 수 있다. 완전한 중국의 종으로서 전체 높이가 163cm이며 밑 지름이 1m로 종루는 쌍용이 움크리고 있고 음통이 없으며 종 몸에 상ㆍ중ㆍ하로 구획이 지어져 띠가 둘려있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종 몸을 살펴보면 종몸의 상 하에 8개의 네모진 구획이 마련되어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많이 마멸되어 판독하기가 어렵다.

 

<대웅전 네 모서리 기둥 윗부분에는 벌거벗은 여인상을 조각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절을짓던 목수의 사랑을 배반하고 도망친 여인을 조각한 것으로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 위해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고 한다. 대웅전 내부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으며, 천장은 용,극락조,연꽃등으로 화려하게 채색하였고, 부처를 모신 불단과 닫집의 장식 또한 화려하다.>

 

전등사 대웅전 (보물 제178호)

 

보물 제 393호인 전등사 범종

<중국 송나라때(1097) 회주 숭명사에서 무쇠로 만든 중국종이다. 2차대전때 일본군이 병기를 만들려고 부평 병기창에 갖다 놓은 것을 광복후에 이곳에 옮겨 놓았다. 종의 정상부에 두 마리 용으로 이루어진 종고리가 있고, 몸통에는 팔괘가 있다.>

 

전등사 대조루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

 

전등사 명부전

<약사전 옆 서남쪽에 세워진 명부전은 정확한 창건 연대가 밝혀지지 않는다.명부전에는 지장보살상을 비롯해 시왕,귀왕등 모두 29존상이 모셔져 있다.>

 

전등사 약사전

<보물 제179호.고종 13년(1876) 대웅전과 함께 기와를 바꾸었다는 기록이 보일뿐 언제 지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건축양식이 대웅전과 비슷하여 조선 중기 건물로 짐작 하고 있다.>

 

양헌수 승전비

<1886년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비로 앞면에는 "순무천총양공헌수승전비"라고 새겨져 있다.>

 

정족산 가궐지

<고려 고종46(1259) 풍수도참가 백승헌의 진언에 의해 고종이 건립했던 가궐터이다. 당시 백승헌이 낭장으로 있을때 고종이 적당한 도읍지를 문의하자 삼랑성및 신니동에 가궐을 짓도록 했고, 원종5년(1264) 몽고가 왕의 친조를 요구 했을 때 가궐을 짓고 마니산 첨성대에 제사를 하면 친조 문제가 해결되고 주위의 대국들이 와서 조공할 것이라고 진언하였다 한다. 건물은 몽골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으며 당시 이 가궐에는 왕이 거처하지 않을 때에도 평상시 처럼 금침을 깔고 의복을 놓아두었다고 한다.>

 

정족산 사고

<임진왜란 전에 실록을 보관하였던 사고는 내사고인 춘추관과 충주,성주,전주등 3개의 외사고가 있었으나, 임진왜란때 전주사고만이 화를 면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그후 임란의 병화를 피한 전주사고본이 한양에서 가까운 강화로 옮겨져 선조 39년(1606) 4월 복인 작업을 완료하고 전주사고본인 원본은 마니산 사고에 나머지 4부는 춘추관,태백산,묘향산,오대산사고에 봉안되었다. 마니산 사고는 병자호란의 피해와 효종 4년(1653) 11월 사각의 실화사건으로 삼랑성내 정족산 사고가 건립되어 이안 봉안되어 왔으나, 1910년 일제에 의해 국토가 강점되면서 정족산사고본은 태백산사고의 실록및 규장각의 도서와 함게 조선 총독부 학무과 분실에 이장되었다가 1930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진후 광복과 함께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오고 있다. 정족산 사고는 1930년 전후에 파손되어 빈터에 주춧돌만 남아 있던 것을 1999년 강화 문화 사업으로 복원,정비하였다.>

2007.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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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le****
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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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년(소수림왕11)에 아도가 창건하여 진종사라

 

 하였다네요. 그 후 고려 제27, 28, 30대의 충숙

 

왕, 충혜왕 충정왕 때에 수축하였고, 1625년(인

 

조 3)과 1906년에도 중수하였으며, 또 일제강정

 

기에도 두 차례 중수하였다고 해요.

 

전등사는 대웅전, 대조루, 범종, 약사전 등이 있

 

다고 하네요. 좋은 답변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직접 적으셔야 한다고 해서 짧게 해드립니당..

2007.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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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ub****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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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치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번지 정족산성 안

 

단군 왕검의 세 왕자가 쌓았다는 정족산 삼랑성(사적130호)내에 위치한 전등사는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년) 아도가 창건하여 진종사라 하였다.

 

그 후 고려 제27, 28, 30대의 충숙왕 ·충혜왕 ·충정왕 때에 수축하였고, 1625년(인조 3)과 1906년에도 중수하였으며, 또 일제강점기에도 두 차례 중수하였다.

 

지금의 전등사란 명칭은 고려 충렬왕 8년(1282)에 왕비 정화궁주가 옥등잔을 부처님께 바친 데서 생겨났다고 전해진다.이때 정화궁주는 승려 인기에게 《대장경》을 인간, 이 절에 봉안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보물 178호인 대웅보전은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집으로 광해군 13년(1621)에 지어진 조선 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이며 특히 내부의 불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고종 3년 병인양요시 프랑스군에 대항하여 결사호국의 각오로 전투에 임했던 장병들이 무운을 부처님께 빌기 위해 대웅보전의 기둥과 벽면에 자신들의 이름을 써놓은 흔적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보물179호인 약사전을 비롯한 10동의 건물과, 11세기 중국 북송때 만들어진 보물393호인 범종, 유형문화재 26호인 순무천총양헌수승전비, 지방문화재인 7호인 대조루와 실록과 왕실세보를 보관했던 장사각지와 선원보각지, 전설이 서려있는 나녀상,열리지않는 은행나무, 우는나무 등 많은 고목이 있다.

 

보물 제 178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가는것으로 꼽아야 하겠다. 특히, 내부의 불단위에 꾸며진 닫 집의 화려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는 것이며,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나오며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

 

전등사에 전해지는 유물로 대표적인 것 중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범종은 전형적인 우리나라 종과는 그 형태가 판이함을 금방 알 수 있다. 완전한 중국의 종으로서 전체 높이가 163cm이며 밑 지름이 1m로 종루는 쌍용이 움크리고 있고 음통이 없으며 종 몸에 상ㆍ중ㆍ하로 구획이 지어져 띠가 둘려있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종 몸을 살펴보면 종몸의 상 하에 8개의 네모진 구획이 마련되어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많이 마멸되어 판독하기가 어렵다.

 

<대웅전 네 모서리 기둥 윗부분에는 벌거벗은 여인상을 조각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절을짓던 목수의 사랑을 배반하고 도망친 여인을 조각한 것으로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 위해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고 한다. 대웅전 내부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으며, 천장은 용,극락조,연꽃등으로 화려하게 채색하였고, 부처를 모신 불단과 닫집의 장식 또한 화려하다.>

 

2008.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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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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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위 치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번지 정족산성 안

 

단군 왕검의 세 왕자가 쌓았다는 정족산 삼랑성(사적130호)내에 위치한 전등사는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년) 아도가 창건하여 진종사라 하였다.

 

그 후 고려 제27, 28, 30대의 충숙왕 ·충혜왕 ·충정왕 때에 수축하였고, 1625년(인조 3)과 1906년에도 중수하였으며, 또 일제강점기에도 두 차례 중수하였다.

 

지금의 전등사란 명칭은 고려 충렬왕 8년(1282)에 왕비 정화궁주가 옥등잔을 부처님께 바친 데서 생겨났다고 전해진다.이때 정화궁주는 승려 인기에게 《대장경》을 인간, 이 절에 봉안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보물 178호인 대웅보전은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집으로 광해군 13년(1621)에 지어진 조선 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이며 특히 내부의 불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고종 3년 병인양요시 프랑스군에 대항하여 결사호국의 각오로 전투에 임했던 장병들이 무운을 부처님께 빌기 위해 대웅보전의 기둥과 벽면에 자신들의 이름을 써놓은 흔적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보물179호인 약사전을 비롯한 10동의 건물과, 11세기 중국 북송때 만들어진 보물393호인 범종, 유형문화재 26호인 순무천총양헌수승전비, 지방문화재인 7호인 대조루와 실록과 왕실세보를 보관했던 장사각지와 선원보각지, 전설이 서려있는 나녀상,열리지않는 은행나무, 우는나무 등 많은 고목이 있다.

 

보물 제 178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가는것으로 꼽아야 하겠다. 특히, 내부의 불단위에 꾸며진 닫 집의 화려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는 것이며,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나오며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

 

전등사에 전해지는 유물로 대표적인 것 중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범종은 전형적인 우리나라 종과는 그 형태가 판이함을 금방 알 수 있다. 완전한 중국의 종으로서 전체 높이가 163cm이며 밑 지름이 1m로 종루는 쌍용이 움크리고 있고 음통이 없으며 종 몸에 상ㆍ중ㆍ하로 구획이 지어져 띠가 둘려있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종 몸을 살펴보면 종몸의 상 하에 8개의 네모진 구획이 마련되어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많이 마멸되어 판독하기가 어렵다.

 

<대웅전 네 모서리 기둥 윗부분에는 벌거벗은 여인상을 조각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절을짓던 목수의 사랑을 배반하고 도망친 여인을 조각한 것으로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 위해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고 한다. 대웅전 내부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으며, 천장은 용,극락조,연꽃등으로 화려하게 채색하였고, 부처를 모신 불단과 닫집의 장식 또한 화려하다.>

 

전등사 대웅전 (보물 제178호)

 

보물 제 393호인 전등사 범종

<중국 송나라때(1097) 회주 숭명사에서 무쇠로 만든 중국종이다. 2차대전때 일본군이 병기를 만들려고 부평 병기창에 갖다 놓은 것을 광복후에 이곳에 옮겨 놓았다. 종의 정상부에 두 마리 용으로 이루어진 종고리가 있고, 몸통에는 팔괘가 있다.>

 

전등사 대조루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

 

전등사 명부전

<약사전 옆 서남쪽에 세워진 명부전은 정확한 창건 연대가 밝혀지지 않는다.명부전에는 지장보살상을 비롯해 시왕,귀왕등 모두 29존상이 모셔져 있다.>

 

전등사 약사전

<보물 제179호.고종 13년(1876) 대웅전과 함께 기와를 바꾸었다는 기록이 보일뿐 언제 지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건축양식이 대웅전과 비슷하여 조선 중기 건물로 짐작 하고 있다.>

 

양헌수 승전비

<1886년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비로 앞면에는 "순무천총양공헌수승전비"라고 새겨져 있다.>

 

정족산 가궐지

<고려 고종46(1259) 풍수도참가 백승헌의 진언에 의해 고종이 건립했던 가궐터이다. 당시 백승헌이 낭장으로 있을때 고종이 적당한 도읍지를 문의하자 삼랑성및 신니동에 가궐을 짓도록 했고, 원종5년(1264) 몽고가 왕의 친조를 요구 했을 때 가궐을 짓고 마니산 첨성대에 제사를 하면 친조 문제가 해결되고 주위의 대국들이 와서 조공할 것이라고 진언하였다 한다. 건물은 몽골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으며 당시 이 가궐에는 왕이 거처하지 않을 때에도 평상시 처럼 금침을 깔고 의복을 놓아두었다고 한다.>

 

정족산 사고

<임진왜란 전에 실록을 보관하였던 사고는 내사고인 춘추관과 충주,성주,전주등 3개의 외사고가 있었으나, 임진왜란때 전주사고만이 화를 면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그후 임란의 병화를 피한 전주사고본이 한양에서 가까운 강화로 옮겨져 선조 39년(1606) 4월 복인 작업을 완료하고 전주사고본인 원본은 마니산 사고에 나머지 4부는 춘추관,태백산,묘향산,오대산사고에 봉안되었다. 마니산 사고는 병자호란의 피해와 효종 4년(1653) 11월 사각의 실화사건으로 삼랑성내 정족산 사고가 건립되어 이안 봉안되어 왔으나, 1910년 일제에 의해 국토가 강점되면서 정족산사고본은 태백산사고의 실록및 규장각의 도서와 함게 조선 총독부 학무과 분실에 이장되었다가 1930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진후 광복과 함께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오고 있다. 정족산 사고는 1930년 전후에 파손되어 빈터에 주춧돌만 남아 있던 것을 1999년 강화 문화 사업으로 복원,정비하였다.>

2008.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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